이상한 자매애


리셉셔니스트, 간호사, 의사들은 우리를 보면 의아해했다. 우리는 어떤 공통점도 없는 관계였다. 빅토리아는 셔츠에 청바지, 아주 캐쥬얼한 차림이고 화장끼는 전혀 없었다. 그 옆에서 조잘거리는 호피무늬 코트에 와글와글한 긴 파마머리, 화장이 진한 동양여성, 우리는 ‘친구’가 가질 수 있는 공통 분모가 하나도 없는 것같았다. 나이, 인종, 언어, 스타일 모두 다르지만 항상 붙어다니는 우리는 마치 완전히 다른 성격과 스타일의 두 형사가 활약하는 영화—버디필름 (Buddy Film) 의 주인공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호피무늬 아줌마가 매니저처럼 가방에 빅토리아의 모든 병원 기록과 서류들을 다 관장하고, 생년월일, 주소, 전화번호, 운전면허증 번호까지 척척 나오니 의아해했다. 우리나라 주민증 번호처럼 중요한 소셜 시큐리티 번호는 내가 한국어 암호로 ( ‘육-육-삼-오-구—“ ) 외워서 기입하는 모습을 보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채혈을 하던 필리핀계 간호사는 궁금증을 못참고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우리의 관계가 뭐냐고. 처음에는 친구같지는 않고 엄마와 딸인가 했는데, 나이차이가 많이 안나고, 언어와 인종이 다르고, 둘의 스타일이 너무도 달라서 도저히 종잡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엄마에요, 엄마!”


그녀가 혼란에 빠지기 전에 금방 이어 말했다.


“우리 여성들은 항상 서로서로에게 엄마 역할을 하잖아요?”


간호사가 ‘맞아요!’ 하며 방긋 웃었다.


우리의 ‘이상한 관계’가 준 잇점은 한번 본 사람은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나도 우리에게 도움을 준 은인들을 잊지 못한다.




햇필드 선생.


의사 햇필드 선생은 빅토리아 검진을 한 뒤에 당신들은 어떤 관계이냐고 물었다. 


“빅토리아가 저에게 중요한 친구에요. 암 수술 받을 수 있게 같이 다니는 중이에요”  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친구들이 서로 돕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요” 라고 미소지었다.


그녀는 눈 앞에서 해야할 일만 하고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과 달리 설명을 잘 해줬다. 빅토리아는  MMMT Malignant mixed Mullerian Tumor) 의 케이스인데 그것은 폐경기 이후에 나타나는 희귀한 종양으로 악성세포들고 구성되어 있어 악성도가 매우 높고 여러 장기로 전이될 가능성이 크다는—으시시한 소리를 해줬다. 위급한 상황이고 신속하게 일처리를 해야한다고 하며, 자기가 서류 제출을 했지만 혹시라도 진전이 없으면 자기에게 다시 연락을 하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이 지나도 서류 수속은 진행되지 않았고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빅토리아라는 환자의 건으로…” 하고 소개를 하다가 시간 절약하기 위해, “멕시코 환자와 같이 왔던 한국인인데~~” 라고하니 그녀는 담박 기억해내고는 그 자리에서 당장 팩스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는 그 결과 --‘다음주에는 전문의를 만날 수 있습니다”--를 나에게 직접 알려줬다. 



또 하나의 은인은 제니퍼.


시티스캔을 할 수 없었을 때 도움을 준 여성이다.  처음 조영실에 도착했을 때 직원은 서류가 미비하다면서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의사가 보내준 허가서인데 왜 안되냐니 자기는 모른다면서 그리 급하다면 돈을 내고 하라는 매정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근 1000 불 정도의 액수였다) 우리는 낙담해서 한 두 시간 정도 병원 카페테리아에 가서 마음을 가다듬어야했다. 


무든 이유에서인지 나는 다시 조영실에 가보고 싶어졌다. 빅토리아에게 다시 한번 부딛혀보자고 했다.  두 시간 전에 안된다고 했던 일이 될 리가 없지만 그냥 한번 다시 시도해보고 싶었다. 


다른 직원이 앉아 있었다. 제니퍼라는 맑은 눈의 직원은 쉰 목소리로 내가 장황하게 늘어놓는  기구한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더니 뭔가 같이 확인해보자면서 같이 나가자고 했다. 건물을 나와 주차장을 건너 다른 건물로 가서 한 사무실로 우리를 데리고 가더니 직원에게 내 대신 모든 서류를 꺼내놓고 설명을 해달라고 했다. 직원은 서류를 살피고 몇 군데 전화를 하더니만 ‘아! 알았다!” 라 소리쳤다. 우리는 비로서 우리가 몇 달 동안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던져졌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빅토리아가 신청한 서류는 오렌지 카운티의 고유의 긴급한 의료 상황에 처한 19-64 세의 빈곤층, 합법적 거주자를 위한 의료 혜택 프로그램을 위한 것이다. 카운티는 그녀에게 보험증을 주고 치료를 허가했지만 —-그게 우리가 들고다니던 허가서—지금까지 빅토리아가 만난 의사와 각종 의료진은 — 응급실부터 시작해서— 모두 얼바인 대학 병원 시스템에 속해 있어서 일어난 문제였다. 이제 남은 것은 얼바인 병원에서 빅토리아를 혜택을 받는 환자로 받아줄지 아닐지를 결정하고 승인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설명과 즉시 직원은 즉시 빅토리아가 위중한 상황이며 신속히 대처해야한다는 이멜과 팩스를 다른 사무실에 보냈다. 그 직원은 이후로 빅토리아가 허가서 없이 갈 수 있는 병원들과 lab 의 리스트를 뽑아 줬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한다면서. 


그 순간부터 모든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우리 옆에 내내 서있던 제니퍼는 자기 일인양 기뻐했다. 

우리가 주차장을 돌아 원래 건물로 돌아가는 길에 제니퍼는 ‘잠깐만요’ 하더니만  옆의 큰 길에서 방향을 못잡아  헤매는 운전자에게 다가가서 길을 알려줬다. 여전히 친절히. 


나는 나의 궁금함을 억제하지 못하고 물었다.


“맨날 이러세요?”

“무슨 소리에요?”

“당신은 항상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나요?”


그녀는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도움이 필요한 게 보이니까 그걸 하는 거라고. 별거 아니라고. 사실 병원 조직이나 건물이 아주 비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시스템을 모르는 사람들은 고생을 하는 것같다고. 자기는 빅토리아와 같은 처지의 환자를 처음 보았고, 앞으로 이런 경우가 생길 때에 대비해서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 알아두고 싶었다 했다.


제니퍼와 헤어지기 전, 그녀는 우리에게 허그를 해주며 말했다.


“포기하지 마세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환히 웃고 헤어지면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마음 속에 담았다. 10 년이 지나면서 그녀의 얼굴을 흐릿하지만 시원하고 선한 그녀의 눈매와 이름은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의사 에브라힘 D 선생


이브라힘 선생도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 은인이다. 빅토리아의 CT 스캔의 결과를 읽어주고 빅토리아가 신속히 수술을 받게 도와주었다. 그는 거주자의 대부분이 멕시코계인 도시의 조그맣고 허름한 산부인과 병원의 병원장이다. 그를 처음 만난 날, 그는 시티 스캔의 결과와 각종 서류들을 재빨리 훑더니만 이란어 엑세트가 강하게 묻어나는 영어로 


“좀 더 일찍 왔어야지요” 라고 했다.


우리는 그 순간 긴장했다. 뭔가 크게 잘못되어있는가…


“암덩이가 무척 크네요.”


그의 목소리는 끔찍한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를 단조로운 톤으로 서술하는 나레이터마냥 담담했다.


“5개월 된 태아의 크기입니다."

나는 그의 비유에 경악했다. 어떻게 암의 크기를 태아의 크기로서 이야기를 하나?! 한편으로는 산부인과 의사는 매일 자궁의 태아의 크기를 관찰하는 사람이니, 빅토리아의 자궁 안에 있는 이물질--암--의 크기도 평상시에 하는대로 태아의 크기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는 빅토리아가 수술을 빨리 해야한다고했다.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자궁을 ‘열어보기 위해서’ 즉, 수술을 위해서 큰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저는 산부인과 의사이지 암 전문의가 아닙니다. 간단한 수술이면 우리 병원에서도 할 수 있지만 암수술은 못합니다. 아니, 수술을 한다해도 수술 후의 항암치료 시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큰 병원의 암전문의를 만나서 수술하고 필요하면 항암치료를 받아야합니다.”


우리는 둘 다 동시에 아....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빅토리아의 고개가 푹 떨궈졌다. 이제까지 의사를 찾는 것도, 만나는 것도 힘들었는데 또 암 전문의를 찾아야한다니. 


우리의 허탈한 표정을 보더니 의사가 푸념같이 들리는 소리를 했다.


"어쩌겠습니까...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본주의 사회이니..." 


그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다 돈보고 일하니 빅토리아처럼 극빈자 보험을 가진 사람이 수술을 할 경우에는 국가에서 지불하는 보험 액수가 적고 절차가 까다로워서 의사들이 꺼려한다고 했다. 100불을 받아야할 수술인데 10 불만 받는 격이고, 암수술은 중대한 수술인데 돈도 제대로 못받고 수술을 했는데 혹시라도 잘못되면 소송이나 걸릴 수 있으니 어떤 의사가 좋아하겠냐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아는 암전문의에게 전화를 해주겠다고 했다. 만약 그사람이 빅토리아를 받아주면 다행이겠으나 혹시 안된다면 우리가 직접 암전문의를 찾아야한다고 했다. 그다음에 한 소리가 너무도 고마웠는데--혹시 수술실이 필요하다면 자기 병원을 제공할 수 있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노라고 제안했다.


나는 의사의 입에서 ‘자본주의 운운’ 하는 소리를 들으니 신기했다. 게다가 무뚝뚝한데 하는 소리마다 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다.


그날 오후 우리는 뉴포트비치의 병원의 의사와 연락이 되었다. 위급 환자라고 의사와의 미팅을 이틀 후에 잡아 줬다. 


4 월20 일.  수요일.


암전문의의 사무실에 들어가는 순간 유리로 둘러싸인 사무실의 밝음에 눈이 부셨다. 밝은 방에는 밝은 기운이 넘쳐 흘렸다.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환히 웃으며 반겨주는 직원, 지나치는 간호사, 다 친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평상시처럼 여러 서류를 보여주고 설명을 하려는데 사무직원이 그럴 필요 없다면서 환히 웃었다.


"서류는한장만필요합니다. 허가서 한 장."

"허가서는스페인어로되어있는데요, 영어 서류를 못받아서.."

"상관없어요(방긋!) 날짜만 확인하면 되거든요(더 예쁜 방긋!)."

방긋방긋 웃는 사무직원의 미소가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한편으로는 맨날 구박덩이에 싸움쟁이

역할만 하던 우리가 이렇게 환대를 받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의사가 들어왔다.

젊고 활기찬 의사였다. 휘르르~~ 차트를 훑는 모습마저 젊음과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이미 빅토리아에 관해서 다 알고 있었다.


“수술을 빨리 해야겠습니다."

아, 저 박진감, 추진력이라니!


“무슨 일이 있어도 2 주 내로 수술할 것입니다. 아마 자궁을 다 들어내야할 것입니다. 수술은 바로 옆 종합건물 병동에서 할 것이고요. 잠시 후에 복도 끝 방의 재닛이라는 사무직원이 구체적인 설명을 해줄 것입니다.”


뭐든지 일사천리였다. 너무도 고맙고 신기했다. 이제까지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동분서주 다니던 게 과녁을 어디에 맞추어야하는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양궁 선수와 같았는데, 이제 우리는 정확히 목표물을 향해 활을 당기고 있었다. 수술이라는 그 과녘을 향해! 


의사는 방을 나가다가 말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나더러“당신에게 감사합니다. 당신은 아주 좋은 친구입니다” 라고 하고 빅토리아에게도“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 하였다.


의사가 나가자마자 빅토리아와 나는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수술을받게된거야?!   맞아! 꿈같다!  와. 안믿어진다!!


닥터 이브라힘의 덕이었다. 그는 나와 빅토리아가 마치 도랑에 박힌 차 처럼 꼼짝않는 차를 어떻게든 꺼내보려고 애를 쓸 때 나타나 차를 도랑에서 빼줬음은 물론, 기름까지 넣어주어 잘 갈 수 있게 해주었다.


(참고--빅토리아는 10 년이 지나서 요즘도 닥터 이브라힘에게 진료를 받는다고 한다)




‘암’이 맺어준 우정


나는 2004 년,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유치원 유치원에서  청소부/요리사로 고용된 빅토리아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나보다 10년 연상이지만 항상 밝고 유머센스 있고 다정해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고 나와도 예의를 갖추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2005 년 1 월, 유치원이 개학한 뒤 며칠 후 어느날 아침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가는 길에 부엌을 지나치는데  조리대 앞에 서 있던 빅토리아가 넋나간 표정이었다. 심상치 않아 보여 그녀에게 아무 일 없냐고 물었다.그녀는 여전히 넋나간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저한테 암이 있답니다" 


그녀는 ‘주말에 하혈이 너무도 심해서 달려간 응급실에서 생각지도 못한 암 진단을 받았다. 전문의를 만나서 정밀 진단을 받아야하고, 보험이 없어서 극빈자 보험을 신청했다’고 했다, 나는 노령의 어머니를 모시며 직장 두 개를 다니면서 근근이 생활하는 중에 암 선고를 받은 그녀가 너무도 딱했다. 어서 정밀검사 받고 수술을 받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빅토리아는 그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성실하게 유치원 요리사, 청소부의 일을 해냈다. 나는 일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함부로 묻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다가 얼마 지나서 빅토리아에게 어떻게 되어가고있는가 물었다. 놀랍게도 나와 대화를 나눈 뒤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아니, 더 안좋은 상태였다.  보험 신청서가 분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담당자가 자기에게 전화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단다.


나는 펄쩍 뛰었다.


"빅토리아,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안돼요. 어서 전화해서 서류처리를 요구해야 해요."

“마담싱쥬, 제가 할수있는 일이 뭐가있겠어요. 전 마음이 편해요.”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요!  어서 서류접수를 해서 의사 만나고 수술 받아야지요!”


그렇게 다구쳤지만 빅토리아의 상황이 이해가 갔다.  아침 7 시에 출근해서 유치원 학생들의 간식과 점심을 준비하고 청소를 하느라 바빠 노상 전화기를 붙들고 있을 수도, 전화를 하겠다고 근무 시간에 자리를 비울 수도 없다. 하교 후에 청소를 하고난 뒤에 곧바로 다른 직장으로 가 일을 하니, 낮에는 일하느라 바빠서, 저녁에는 병원이랑 관계 기관 사무실들이 닫혀서  전화를 걸 수가 없다.


당장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암과 싸우겠다는 용기와 의지’가 아니라, ‘전화를 걸 시간’이었다. 

실없는 소리같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한번만이라도 도와주자 하고 빅토리아가 요리하는 동안 전화기를 잡았다. 자동응답기가 나와 메시지를 남겼으나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받기를 바라면서 30 분간 쉴 새없이 전화번호를 눌렀다. 마치 동전 넣고 인형 꺼내는 게임--성공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엄청난 집중과 인내를 요구하는 게임--을 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받았다. 당장 빅토리아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직접 통화하라고. 그러나 빅토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고 서류 분실에 대해 따지지를 못했고, 상대방은 ‘고상하게’ 발뺌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빅토리아에게 수화기를 달라고 해 상대방에게 내 신원을 밝히고 설명을 요구했다.


담당자는 나에게 서류가 분실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서류가 너무 많다보니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했다. 그 다음말이 날 경악케했다. “서류 분실은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두고 이렇게 무심하게 이야기를 하다니! 물론 이해한다. 그들이 매 환자들의 서류 하나하나를 신경쓸 수 없다. 절박한 환자들이 흥분해서 전화할 때 일일이 친절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음도 안다. 또한 너무도 많은 환자들을 다루니 환자들의 절박한 상황에 무감각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무감각하지 않은 척, ‘ 즉  ’암환자의 상황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들이 최소한의 포로페셔널 예의가 없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청서는 분명히 제출되었는데 당신들이 모른다고 하면 우린 뭘 어떻게 해야합니까?' 


라고 따졌더니 담당자는 '제가 보호자도 아닌 당신께 설명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라고 발뺌하더니만 한술 더 떠 “위급한 상황도 아닌데 왜 그러냐" 라고 짜증을 냈다.


나는—- 이럴 경우에는 폭발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폭발했다.


"지금 농담한 거지요?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합니까? 암환자를 두고? 이 환자의 암세포가 얼만큼 큰지 압니까? 암이 번지고있는지 아닌지 봤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수술 받아야하는 판인데 그렇게 무심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환자를 도와주는 게 당신들의 임무 아닙니까?" 


나의 격앙된 어조에  쌀쌀맞던 그녀는 당황했다. 자기에게 며칠을 주면 분실된 서류를 찾아보겠다고 하더니, 오늘 내로 하겠다고 하더니만, 아니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같다며 월요일까지 하겠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네, 감사합니다! 월요일!! 좋습니다’ 라는 마음이었지만 겉으로는 차갑게 ‘ 감사하다. 가능한한 빨리 해달라.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 당신이 보내는 서류 접수를 담당할 직원의 이름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전화를 나눈 시간과 통화 내역을 기록해두겠다' 고 했다.


빅토리아는 점심 준비로 왔다갔다 하면서 내 통화 내용을 들었다. 이제까지 내가 화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빅토리아는 내 격앙된 어조에 많이 놀란 듯했다. 말없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마담 싱쥬, 고마워요” 라고 하며 뺨을 대며 껴안아줬다.


나는 전화를 한 뒤에 다시금 깨달았다. 당장 밥벌이를 하기 위해 바쁜 빅토리아가 암과 혼자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전화하고, 팩스 보내고, 이멜하고, 질문하고, 받아적고, 확인하고—-하는 일들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힘들지만 내가 나의 생활을 어떻게 정리하냐에 따라서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빅토리아, 내가 도와줄께요. 수술 받을 때까지 같이 싸워요.” 라 제안했다.


그렇게 나는 빅토리아의 비서이자 매니저가 되었다. 나의 편의와 내가 상대해야하는 많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빅토리아에게 필요한 서류와 인적사항, 병력, 전화번호 목록을 정리했다. 어떤 사무실이든 전화를 하면 통화 내용과 시간을 기록하고 담당자 이름도 기록했다.



미궁과 같은 의료 시스템.


빅토리아가 의사를 만나고 (2 달 걸림), 전문의를 만나 수술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진단에서부터 넉 달 걸림) 빅토리아와 함께 여러 노력을 하면서 나는 과히  친절하지 않은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되었다.  극빈자프로그램이 존재하며, 그 프로그램에 속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정말 고맙게도—-의사들과 간호사들이 극빈자 환자를—-가난한 사람을!—무시하지 않고 깍듯이 존중해주는 것은 깊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시스템의 덩치가 커서 그런지 일이 한번 꼬이면 (빅토리아의 경우처럼) 그것을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익명성 사회의 병폐, 테크놀러지라는 허울좋은 '편리' 로 인한 폐해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정보가 친절하게 제공되어 있는 경우도 연락처가 없다던가, 팩스, 전화번호가 있으면 주소 대신 '우편함 번호'만 나와 있었다. (주소가 없으니 직접 방문해서 올바른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씨름하는데, 전화를 걸 때마다 담당자가 바뀌니 똑같은 설명을 반복해서 하여야하고, 전화통화 대신 팩스로 보내라 해서 팩스를 보내면 그 사이에 담당자 근무 시간이 바뀌어서 팩스를 다시 보내라는 소리를 하고, 팩스 못 받았으니 사무실로 전화를 해라....이런 도돌이표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화 통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이멜을 많이 사용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기의 책임의 경계가 확실한 경우에 일을 철저히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설렁설렁 모호하게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내가 전화를 통해 운좋게 어떤 정보를 얻었다할지라도 몇 시간 후에 그 사람 대신 앉아 있는 사람과 통화를 하면 완전히 다른 소리를 했다. 그러므로 나는 중요한 일은 꼭 서면으로 기록을 남기고 서면으로 대화를 하려고 했다. 법정 소송이 많고, 소송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 나라에서는 그렇게 문서로 기록을 남겨두는 게, 그리고 상대방이 그것을 알게 하는 게 일의 정확하고 빠른 진전을 위해서 필요했다.


황당한 일도 여러번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나는 일은 ‘피검사 사건’이다.


빈자 보험 카드를 발급 받은 뒤에 피검사, ct 스캔을 ‘당장’ 해야한다는 의사의 검진 뒤 그녀의 보험카드가 적용되는 곳은 다른 병원이라고해서 서둘러 갔다. 피검사 신청하고 빅토리아가 팔뚝을 내놓고 피뽑을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밖으로 나왔다. 대기실에 앉아서 그 다음에 ct 스캔을 위해 가야할 방 번호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빅토리아가 뛰어왔다. 


‘마담, 여기좀 와봐요!’ 


달려가보니 나이 지긋한 간호사가 이 병원 환자가 아니므로 피를 뽑아줄 수 없다고 했다. 의사가 보냈다고 이야기를 해도 통하지 않았다. 내가 들고다니던 진단기록 등을 보여주면서 이 병원 응급실에 들어온 적이 있고 환자 번호도 있다고 하며 어디든지 가든 우리에게 서비스를 거부당하는 우리의 딱한 처지를 설명했다. 그녀는 컴퓨터 몇 대를 오가면서 꼼꼼히 살피더니만 ‘이번만 해줍니다. 이분은 우리 병원 환자가 아니에요. 원래 해줄 수 없는 건데 이번만 해주는 겁니다. 환자에게 확실히 설명해주세요’ 라 하였다.


피뽑기 허들을 잘 뛰어 넘었다 했더니만 ct 스캔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친절한 담당자는 규율때문에 해줄 수 없다고 ‘처방전’을 받아오라 했다. 빅토리아의 의사가 준 처방전은 효력이 없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또 어디가서 허가서를 받아와야한다는 거지? 암의 크기를 알려줄 ct 스캔을 하라는 허락을 받는데 두 달이 넘게 걸렸는데 이제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말이니. 마치 손에 쥐어졌던 풍선을 누군가가 낚아채어 하늘로 보내버리는 것같이 허무했다.


다행히 한 간호사가 우리를 도와줬고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되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참 이상했다. 우리가 뭘 몰랐을 때는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었다. 빅토리아 담당 소셜 워커도, 간호사도, 사무직원도 의사도, 다 손을 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정보를 확실히 얻고 요구를 하니까 이제까지 아무도 몰랐던 문제가 갑자기 다 아는, 뻔한 사실로 둔갑하는 것같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한 조각이 없어서 완성될 수 없었던 골칫거리 퍼즐이 다 맞춰지는 것같았다. 


숱한 사연을 거쳐 한 ct 스캔의 결과를 들으러 의사에게 간 날은 4 월 18 일, 암 진단을 받은지 석 달 후였다. 담당 의사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의사는 왜 이제야 왔냐고 야단쳤다. 마치 우리가 게을러서 시티 스캔을 받지 않기라도 한 양. 그러나 그런 꾸짖음도 달기만 했다. 빨리 수술을 하라는 이야기니까. 빅토리아는 4월 25 일 수술신청서를 내고 5 월 2 일 아침 수술을 받았다.


빅토리아가 암 치료를 받기 위해 투쟁하던 시기에 미국에서는 ‘테리 시아보’ 논란이 한창이었다. 테리 시아보는 심각한 뇌 손상으로 15 년간 튜브로 영양공급을 받고 있는 환자로, 그녀가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뜻을 밝혔었다고 주장하며 회생이 불가능하니 튜브를 제거하자고 하는 그녀의 남편에 맞서 그녀의 친정부모는 딸이 깨어날 가능성에 있다고 주장해 장장 10 년간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결국에는 연명치료, 존엄사, 죽을 권리, 살 권리등 여러 이슈를 둘러싸고 플로리다 주지사, 대법원, 대통령, 연방의회, 교황청까지 개입했는데 플로리다주 대법원이 영양공급장치를 제거하라는 명령이 3 월 중순에 내려졌다. (참고로 그녀는 튜브를 제거한지 2 주 후, 3 월 31 일 사망했다)


빅토리아와 여러 사무실을 전전하면서 테리 시아보의 기사를 접할 때마다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살 권리만큼 중요한 죽을 권리, 누가 누구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테리였다면? 내가 테리의 부모라면? 내가 테리의 남편이라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이 질문거리만 떠올랐다. 동시에 테리와는 너무도 다른 처지의 빅토리아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금방 손을 쓰면 살 가능성이 있는 암환자 빅토리아, 살려는 의지가 확실하고,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는 그녀가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게 왜 이리 어렵단 말인가.

당시에 또 하나의 사건은 요한 바오로 2 세 교황의 선종이었다. (2005 년 4 월 2일) 빅토리아 보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나는 성베드로 대성전 중앙에 안치되어 공개된 교황의 시신을 보면서 그분의 위대한 삶을 생각하기보다는 ‘교황님은 보험때문에 고생 안 하셨겠지?’ 라는 말도안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누운지 며칠 안되어 나는 도우미 없이는 아버지를 돌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목욕할 때 아버지의 안전을 위해서는 힘이 좋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도우미는 어떻게 구하는 거지? 찾아보면 정보를 얻을 수 있겠으나 나는 당장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빅토리아가 떠올랐다. 그녀는 멕시코 출신의 미국 시민자로서 10 여년 전 아이들이 다니던 유치원의 청소부/요리사였다. 연락없이 지내다가 전화하는 것도, 요양 도우미 경험이 없는 그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세뇨라, 혹 요즘 바빠요? 요즘 우리 집에 일이 있어서 도움이 필요한데, 물론 돈을 지불할 것이고요….”

빅토리아가 나의 말을 막았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가 언제 갈까요?"


너무도 고마웠다. 내가 찬찬히 설명하고 시급을 이야기했다. 내가 가격을 이야기하자마자 그녀는 ‘네!’ 하고 대답했다. 그녀가 너무도 빨리, 긍정적인 대답을 해서 나는 적지않이 놀랐다. 속으로 빅토리아가 요즘 돈이 궁한가? 그래서 힘든 일이라도 당장 하려는건가? 싶었다.


몇 시간 후  그녀가 왔다.  아버지께 공손히 인사를 한 뒤에 그녀는 나를 도와 아버지 스폰지 목욕을 했다. 목욕이 끝난 뒤에는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조용히 아버지 방을 정리하고 바닥을 물걸레로 닦았다. 2 시간 동안 많은 일을 한 뒤에 퇴근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나와 함께 했다.


아버지가 침대신세를 지면서도 3 년간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를 친아버지인양  헌신하며 섬긴 빅토리아 덕이다.  3 년 동안 그녀는 자기가 맡은 일을 100 퍼센트 수행함은 물론 내가 언제든지 어떤 도움이든 청할 수 있는 그런 든든한 백업 일꾼이었다.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하는 그녀의 열정에 나는 가끔 언성을 높여가면서 그녀가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막아야했다.)  


간병 도우미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빅토리아의 삶의 중심은 그녀의 교회와 아버지의 수발이었다.  우리는 시간 계산, 돈계산을 정확하게 했는데, 빅토리아는 조금이라도 더 머물면서 일을 하나라도 더 하려고 했고 내가 요구하지 않은 일을 찾아서 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고마워하면서 동시에 빅토리아가 돈이 궁한가보다 추측했다. 은퇴한 뒤에 연금이 많지 않으니까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는 거 아닐까?  아니면 아버지가 없는 그녀가 나의 아버지께 각별한 정을 느끼는 것일까? 


나를 더 헛갈리게 하리라 작정을 하기라도 한 듯이 그녀는 일을 시작한지 몇개월 후에 나에게 제안했다.


“마담징쥬, 일주일에 하루는 에릭과 데이트를 나가세요. 그날은 제가 ‘아부지’를 혼자 돌볼께요. 내가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데이트 나가는 날은 제가 무보수로 일할께요. 저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줘요.” 라고 했다.


빅토리아가 돈이 궁해서 간병도우미 일을 덥썩 잡아서 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녀의 제안이 이해가 안되었다. 여하간 그런 제안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빅토리아, 우리는 비즈니스 관계에요. 고용주를 버릇없게 만들면 안돼요. 절대로 공짜로 일해주면 안돼요 그런데 그 마음은 너무 너무 너무 고마워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버지를 돌본다는 게 나에겐 정말 큰 격려에요.” 라 했다.


한 1 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빅토리아가 왜 우리집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 목욕이 끝나고 같이 정리를 하는 중, 빅토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기 친구들이 ‘왜 너는 60 중반에 간병 도우미라는 힘든 일을 시작하느냐’ ‘그 한국인 할아버지가 뭐라고 그렇게 정성을 다하느냐’ 라고 묻는다고 했다. 나도 궁금해하던 일이었다. 그래서 “왜 그래요?’ 하고 물었다.


빅토리아는 나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슬쩍 흘리듯이 말했다.


“제가 친구들한테 이야기했어요. ‘옛날에 그 할아버지의 딸이 나의 생명을 구해줬어.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그녀를 도와줄 차례야.’”


깜짝 놀랐다. 돈이 궁해서가 아니었구나! 자기 아버지의 정이 그리워서도 아니었구나!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었구나. 그녀의 마음 속에 ‘은혜를 갚는다’ 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상상도 못했던 나는 깊이 감동받았다. 그녀는 돈이 궁해서 덥썩 일을 시작한 게 아니었고, 오히려 나와 맺은 비즈니스 관계는  내 마음이 편하게 하면서 나를 도와주려는 그녀의 배려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든든했다. 아버지를 나와 같은 마음으로 돌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천군만마를 얻은 것같았다.


빅토리아가 내가 그녀의 생명을 구해줬다고 하는 일은 2005 년의 일이었다. 그 사건으로 우리는 운명공동체가 되어 깊은 자매애를 쌓았다. 그 이후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갔고 자주 만나지 못했다가 10 년 후 아버지 일로 다시 만나게 되어  다시금 운명공동체가 되어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연합하여 노력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예전에 빅토리아에 관해 쓴 글들을 찾아보았다. 지금 이 글의 기초가 된 나의 옛날 블로그/일기를 찾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글을 잘 보관하지 않았을만큼 그때의 사건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었다. 빅토리아에게 내가 우리의 자매애의 이야기를 글로 써도 되냐고 물었더니, ‘물론이지요! 그건 우리의 이야기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단지 제 이름만 바꿔주면 됩니다’ 라고 선선히 대답했다.)







 (2018 01--아버지 돌아가시기 1 년 전의 글)



아버지 병수발은 아버지의 생명의 시간을 연장해보려는 시간과의 싸움이지만 그것은 또한 내가 나만의 시간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 돌봄이가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게 어렵다는 것, 그게 병수발과 육아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나는 수년 전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육아를 통해 터득한 교훈, 즉 ‘시간은 나지 않는다. 고로  내가 시간을 내야한다’를 현재의 삶에 적용하려고 애쓴다. 


시간을 ‘내다’와 ‘나다’는 획 하나 ‘ㅣ’ 의 차이일 따름이나, 그 획 하나는 한 인간이 시간의 주체이냐마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삶의 주체이냐마냐를 가늠짓는다.


시간이 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피동적 태도라면 시간을 내는 것은 능동적인 태도이다. 두 표현이 시사하는 시간관의 본질적 차이는 ‘공부’라는 개념과 연결지으면 극명히 드러난다. (‘시간이 날 때 공부를 하는’학생과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는’학생의 차이.) 시간을 내다는 영어로 ‘make time’ 즉, 시간을 만들다인데 ‘만들다’라는 단어는 시간의 능동적 관리, 관리자의 주체성을 잘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육아, 수발은 아무리 기다려도 나만의 시간이 안 난다.  절대로 시간이 ‘저 좀 쓰세요’ 라고 찾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시간을 낸다는 게 현실적으로 아주 어렵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나?


훔/쳐/야/한/다.  시간을 훔치고, 거기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야한다.


시간을 내는 것을 ‘훔치다’라는 과격한 효편을 사용해야할 정도로 수발을 들면서 시간을 내는 게 어렵다. 아버지 건강이 약해지면서 나를 위한 시간을 내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신지 1 년 후에 잠시 나름 안정기가 있었다. 도우미를 사용하고, 아버지 팔이 회복되고, 당뇨가 조절되었고 그래서 나는 짧은 기간이나마 아침에 일찍 카페에 가 40 분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2016 년 11 월에 쓴 글에서 나는 카페에서의 황홀경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는 커피빈 카페! 집에서 차로 5 분 거리의 카페이다. 내 앞에는 설탕을 듬뿍 넣은 달달한 커피가 있다. 충전이 100 퍼센트 완료된 내 컴퓨터. 세상에 부러운 게 하나도 없다. 이제 곧 내 마음의 충전도 100 퍼센트 될 것이다. 


그런데 시간은 없다. 좀 있다 집에 가야한다. 40 분 동안 집중해서 글을 쓰며 나만의 시간을 만끽해야한다. 아, 그러나 40 분이라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지다니, 그것만해도 어딘가!  


오늘도 아침에 아버지 식사와 면도를 마친 뒤 8 시경 집을 나왔다. 도우미가 와서 엄마를 도와 아버지와 아침 산책을 하는 동안 나는 이렇게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책 읽거나 그림도 그리거나 글을 읽을 것이다. 


집에 할일이 산더미이고, 이렇게 굳이 차 몰고 카페에 나오면서 내가 나만의 시간을 갖는게 영 미안하다.  아무래도 내가 있으면 소소한 것까지 챙겨드리면서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주에는 카페에 나오는 대신 우유 커피를 타서 50 분간 (드라이빙 시간이 절약되므로 10 분 더해서) 내 방에서 혼자 노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모든 소리가 들리고, 마음이 분산이 되어 나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오면 뭘 하든 집중력과 생산성이 높아진다. 충전이 빨리 된다. 그래서 나는 운전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수고스럽게 카페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나의 시간을 잠시라도 갖지 않으면 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다. 내가 잘살아야 부모님도 잘 모실 수 있으므로 나는 나부터 챙기려고 노력한다. 카페로 나오면서 마음이 좀 불편할 때 나는 '당신의 안전이 최고로 중요합니다' 라는 말을 상기한다.


오늘같이 이렇게 햇빛이 찬란한 날, 커피향이 진동하는 이 아름다운 카페의 구석에서 달달한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글을 쓰자면 온 시름이 다 사라지고 마음에 감사함이 퐁퐁 샘솟는다.  너무 기뻐서 내 옆에 존재하는 이름 모르는 이웃들을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이다. 


아, 시간이 다되었다. 이제 가야한다. 돌아갈 집이 있음이, 해야될 일이 있음이, 그리고 반가움으로 나를 맞아주는 부모님이 계심이, 내가 열심히 살 이유가 너무도 확실한 현재의 상황이 신난다.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고, 등 마사지를 해드리고, 면도해드리고, 밥을 드리고, 운동시켜드리고....아직도 아버지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그나마 건강하시기에 이렇게 시간을 훔칠 수 있는 게 감사하다.

100 퍼센트 충전 완료!"



그 이후 얼마 안되어 나만의 시간을 내는 게 어려워졌다. 엄마의 어깨와 팔에 이상신호가 와서였다. 도우미가 있더라도 내가 없으면 엄마가 도우미를 돕기 위해 손을 한번이라도 더 쓰게 되니 위험하다.


몇 달 후 엄마의 어깨가 나아졌으나 아버지가 더 쇠약해지셨다. 그래서 내가 밖에 나가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일주일 내내 아침 6 시 반부터 자정까지, 정신없이 바쁜 삶,  일주일에 한번 슈퍼마켓 가기, 은행, 엄마 아버지 모시고 병원가기, 약국가기, 음식 준비하기, 아버지의 정신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모든 행위-이것만해도 스케쥴이 꽉 차버린다.


가끔 친구 만나는 일도 불가능해졌다. 친구들을 만나면 너무 반가운데 이야기를 하고나면 피곤해서 아버지 수발에 즉각적인 지장이 있고, 외출 다녀온 뒤 쉬지 못하고 일을 하면 며칠간 피곤에 절어 고생해야한다. 내가 피곤하면 고혈압과 심장 질환이 있는 엄마가 더 많은 일을 하게 됨을 의미한다. 안 나가는 게 답이다.


어쩌다가 멀리서부터 친지들이 방문할 때는 마치 내가 해외 여행이라고 가는 듯이 며칠 전부터 면밀한 계획을 세워야한다. 자주 쉬어서 에너지를 비축해놓고, 손님이 오는 날은 도우미를 많은 시간 고용해서 내가 일을 덜 해도 되게끔 하고, 외출 전과 후로 쉬어두어 아버지를 돌볼 때 피곤하지 않게끔한다.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일상은 엄청나게 꼼꼼하게 세운 계획의 성공적인 결과이다.


에릭을 위시해서 내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는 그래도 가끔은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엄마의 적극적인 지원과 도우미 덕으로 에릭과 3 주 또는 한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음악회를 간다.  저녁에 4 시간을 비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밖에 나가기 위해서 준비할 게 너무 많아서 컨서트가 숙제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지만 유일하게 나와 에릭을 위해 정기적으로 하는 일이어서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나는 모짜르트, 바흐, ….의 음악에 맞춰 졸음의 해드뱅잉을 하기 일쑤, 언젠가부터는 아예 푹 자자 맘 먹고 비행기에서 쓰는 목베게를 꼭 챙겨간다. 음악회가 끝난 뒤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일어설 때 에릭은 농담기 하나 없이 진심으로 ‘음악 좋았어?' 대신 ‘잘잤어?’ 라고 묻는다.


언니도 내가 몰아서 휴식할 수 있게 도와줬다. 자신이 강의와 작품활동으로 바쁨에도 시간을 ‘내/서’ 와주어 내가 평소에 누리지 못한 ‘일요일’을 몰아서 누릴 수 있게 해준다. 여름방학에는 석 주라는 긴 시간을 ‘내/서’형부랑 함께 아버지를 돌봐주었다. 내가 집을 떠나면서 가장 마음이 편한 것은 언니와 형부가 와 있을 때였고, 진심으로 감사했다.


친구들도 참 고마웠다. 내가 나가지 못하니 친구들은 우리집에 잠시 들러 잠깐 차를 마시거나 문자로 근황을 나눈다. 성경공부 모임 친구들은 나의 편의를 위해 2 주에 한번씩 우리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동생뻘 되는 자매, 선아와 미숙이는 정성들여 만든 김치, 찌게, 국 들을 떨궈놓고 사라지곤한다.


현재까지 수발은 성공적이고 아버지의 건강이 유지되고 있으나 나는 너무 지쳐서 나만의 시간을 내서 뭔가를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되곤 한다. 하루 종일 관리자 역할을 하고, 퇴근없이 24 시간 내내 몸과 마음이 묶여있다보면 자기 것을 챙기기 쉽지 않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일만 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인데 말이다. 내가 나의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바꾸려고 노력한다. 


나만의 시간을 못 가질 때 일어난 한 에피소드.


어느날 밤, 여늬 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잠자리를 봐드리고 시계를 보니 밤 11 시였다. 하루 종일 아버지방-부엌-거실-부엌-아버지방을 오가면서, 집 밖으로 발 한자국 내놓지 않고 갇혀서 일을 한 힘든 날이었다. 마음이 갑갑해서 공기를 쐬자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은 작정하고 좀 울어보자' 생각했다. (난 울어서 스트레스를 푼다)


밤 산책을 즐기는 남편은 이미 밖에 나가 산책 중이었다. 10 시 반 경에 나더러 산책을 같이 가자고 했는데 내 일이 안끝나서 혼자 나갔었다.


혹시라도 밤에 우는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내딴에는 머리를 써서 남편이 가는 길의 반대쪽의 길을 택했다. 늦은 밤에 아무도 없었다. 맘 편히 눈물 흘리면서 인적이 없는 길을 걷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저만치서 어둠 속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남편이었다.


나는 놀라서 멈춰섰다. 


그는 어둠 곳에서 갑자기 멈춘 나의 모습을 보았지만 그게 나인지 몰라보고 묵묵히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황야의 무법자들의 결투 마냥, 단 둘이 맞닥뜨린 그 순간, 나를 못 알아보고 나에게 다가오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나는 내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날씨가 차가운 밤, 남편은 두꺼운 외투에 모자까지 쓰고 있는데 산발을 한 나는 내의같은 달라붙는 얇은 면 셔츠에 하늘하늘하는 면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창이 다 떨어진 실내화. 내 손에 들려있는 것은 핸드폰이 아니라 ‘돗보기 안경’ 이었다. 그리고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다.


나는 내 모습을 의식하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구차하고 처량하고 슬펐다. 남편에게 나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뒤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서면 다른 길이 없이 그저 우리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니 그는 자기를 피해 집으로 도망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얼어붙은 듯 서있는데 에릭이 가까이 다가왔다. 10 미처 지척에서야 날 알아보고 “당신이야?” 라고 반가워했다. 춥겠다면서 어깨를 안아준다. ‘오늘은 한번 반대로 걸어봤다, 호수의 오리들이 모여서 잠자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고 즐겁게 이야기를 했다. 내가 방금 나의 자아를 대면하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꿈에도 모르는채. 남편이 눈치가 없는 게 너무도 고마웠던 순간이었다.


그날 밤의 경험은 병수발을 드는 동안에 내가 내 시간을 갖지 못하면서 당혹해하고 좌절감을 느낀 몇 번 되지 않는 사건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육아의 경험을 되살려 나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게 당연하지’라고 선선히 받아들이고,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려고 한다. 또한 육아의 경험을 되살려 나는 나의 육체적/감정적/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함을 상기한다. ‘답은 내가 시간을 훔치는 것이다’ 라 마음먹고 내 시간을 잘라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지 않는 시간을 내는 것, 시간을 훔치는 것은 도전이다. 그러나 방법이 없지는 않다.


나는 내내 자투리 시간이 주어질 때 집중하는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집중력이 있으면 내가 정신줄 놓으면 스르르 사라져버리는 조각난 시간에 뭔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자투리 시간의 활용의 한 예는 그림 그리기이다. 아버지와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를 보면서, 아버지가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 아버지 방 앞에서 전화기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일종의 ‘여가 선용’이다. 고구마 삶는 동안, 스프가 끓고 있는 동안 부엌 의자에 걸터앉아 그림 그리기를 하다보니 10 분, 15 분의 시간에 집중하고 금방 현실의 일로 돌아갈 수 있다. 내가 시간이 나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 그래서 시간을 선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나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너무 작은 화면에 그림을 그리니 눈이 나빠지겠다면서 에릭이 타블렛을 사줘서 그림을 좀 더 시원하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전화기에 그린 첫 그림-자화상 ^^



         


(전화기 그리기 시작한 초기의 그림. 

부엌 싱크대에 문제가 있어서 연관공이 와서 작업하는 동안 근처에 앉아서 그렸음

첫 그림은 싱크대 문제를 발견했을 때 나의 마음, 두번째는 공사 진행 중의 마음)


그림 그리기 외에도 나는 하루 일과중 어차피 해야하는 일상적인 행위—목욕, 운동—를 온전히 나만의 시간으로 만끽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시간이란 게 참 요상해서 서두르면 시간의 흐름을 잊게되고 시간이 나를 스쳐 지나가버린다. 반대로 온전히 의식하고 하면 시간을 잡을 수 있다. 시간의 의식 자체만으로도  나의 시간을 훔칠 수 있다는 자각은 나의 일상을 풍부하게 해주고  단시간에 효과적으로 충전이 가능하게 해준다. 예로 선정이가 보내준 초를 켜고 물에 몸을 담고 목욕하는 10 분이란 짧은 시간은 마치 정결의식처럼 나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해준다. 아침에 창문을 열 때, 잠시 밖에 나가 5 분이라도 하늘을 보고 천천히 체조를 하면서 깊이 숨을 들여쉬면서 나의 호흡을 의식하는 순간 그 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 아버지가 주무시는 동안 하는 운동도 마찬가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운동을 하면 책임, 걱정거리 다 잊고 나의 숨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 차 마시면서 신문 읽을 때도 그것을 할 수 있는 게 축복임을—그게 사실이니까—상기한다. 조각조각난 시간들도 의식을 하면 그 조각이 크게 느껴졌고, 그 조각들이 모이면 커다란 덩어리의 시간이 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조각난 시간에 그려진 그림들 일부의 모음



사소한 행위들을 의식하며 만끽하는 것, 그게 내가 아래층 위층, 부엌, 아버지방, 목욕탕을 통통통통 뛰어다니면서 일을 하는 하루에서 훔쳐내는 귀한 시간들이다. 


"마음이 가난한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성경말씀만큼 "시간이 가난한자에게 복이 있나니’란 말도 진리다.  심심할 시간이 없는 것은 힘들기도 하지만 복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남으니 '영화/나/ 보자' 라는 식의 사고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으니 영화 '씩이나,' 외식 '씩이나'--다. 뭐든지 덤이다. 뭐든지 선물이다.


사막에서 걸을 때 물 한병이 소중하고, 그 물이 엄청나게 달게 느껴지듯이, 수발로 바쁜 일상에서 조금씩 훔쳐쓰는 나의 시간은 내가 그 소중함을 알고 쓰기에 엄청 달고 소중하다. 그렇게 달게 느낄 수 있는 이 상황이, 조그만 일에 행복해지는 나의 삶이 만족도가 높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나의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를 잃어가면서 남을 돌보는 것은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어리석은 행위이다. 내가 내 시간을 가져야 나도 즐겁게 살고 아버지도 행복하게 산다. 그러므로 내가 내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


나는 앞으로 일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더라도, 균형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나의 시간을 훔칠 것이다. 내 몸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나만의 시간을 끊임없이 욕구할 것이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흐르는 시간과 사랑이라는 따뜻한 마음을 차가운 머리로 경영할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쓴 글임)


나는 아버지에게 스킨쉽을 자연스럽게 자주한다. 아침에 아버지가 눈을 뜨자마자, 면도가 끝난 뒤,  휠체어에 앉아서 간식을 잡술 때, 침대에 앉아서 티비를 보실 때, 뜬금없이 아버지의 몸을 만진다.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드리고,  머리 마사지를 하고, 손가락 마사지를 하고, 발 마사지를 한다. 자주 아버지의 어깨를 꼭 껴안기도 한다. 뺨, 이마에 가볍게 뽀뽀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마치 아가들에게 하듯이  쬬—옥 소리를 내며 입술로 뺨에 도장을 찍듯이 꾸욱 누른다.

아버지와의 망설임없는, 잦은 스킨쉽을 보고 간병도우미가 물었다. 

“아버지를 참 편하게 대하네요. 어려서부터 아버지랑 친했나봐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57세인 내가 구순의 아버지한테 자유스레 뽀뽀를 하니말이다.

그러나 난 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시기 전에는— 커서는 물론이고 어려서도--한번도 아버지께 뽀뽀한 적이 없다. 나의 세대는 부모 자식간에 애정 표현을 뽀뽀로 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의 어른들은 감/사/하/게/도 요새 어른들처럼 어린아이들에게 좀 가까운 어른이면 ‘뽀뽀해드려~!’ 강요하고 영문을 모르는 아이가 뽀뽀를 해주면 환호하고 칭찬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 뽀뽀를 해본 기억도, 뽀뽀를 받아본 기억도 전무하다.

아버지께 뜬금없는 허그와 뽀뽀가 자연스러워진 것은 수발을 들면서 자신의 몸의 소유권을 완전히 박탈닥한 아버지의 몸을 돌보면서이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볼 수도 없고, 신체의 어느 부위도 보고 만질 수도 없는 아버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사소한 일도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아버지의 몸은 하루 종일 생존을 위해서 해야하는 여러가지 일들---면도, 목욕, 용변, 물리치료사와 운동--동안 끊임없이 남에게 의해 만져짐을 당한다. 그런 의무적인 접촉에는 ‘사랑의 터치’는 없다. 부드럽지만 그렇다고 다정한 위안을 주지는 못하는 그런‘만져짐.' 간호사가 피를 뽑으려고 스웨터의 소매를 걷어 올릴 때와 같은 부드럽지만 사랑이 없는 그런 터치에 아버지는 익숙하다.

아버지의 몸을 만진다는 사실에 아버지도 나도 잠깐 적응이 필요했으나 서서히 적응해가면서 나는 아버지께 사랑의 표현이 저절로 나온다.  젖먹이 아가의 기저귀를 간 뒤에 엉덩이에 큰 소리를 내며 뽀뽀를 하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진다. 기저귀는 간호사도 갈아주고, 유모도 갈아줄 수 있지만, 아기 궁둥이에  하는 뽀뽀는 아기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끼는 사람만이 할 수있지 않은가. 

나는 아버지가 즐거움, 따뜻함,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랑의 터치를 자주 해드리고 싶다.  아버지가 간병인들로부터 받는 생존을 위한 ‘만짐’이 건강을 위해 억지로 먹어야하는 지루한 건강식이라면 나의 뜬금없는 두피 마사지, 발가락 마사지, 허그와 뽀뽀는 더운 날의 시원한 수박처럼 살맛을 돋군다고 믿는다  아버지를 껴안아드릴 때, 아버지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같다는 것은 나의 착각만은 아닌 것같다.  내가 뽀뽀를 하는 순간에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지고 삶의 기운이 전해지는 게 느껴지고 아버지의 기쁨은 동시에 나에게 기쁨을 준다. 엉덩이에 뽀뽀를 하는 순간 꺄르르르 웃는 아가가 엄마에게 삶의 희열을 느끼게 해주듯이 말이다.

내가 아버지를 가만히 두지 않고 껴안고 뽀뽀하는 비단 아버지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아버지께 사랑의 스킨쉽을 자주한다.

아버지와 나는 지금 죽음으로 향하는 그런 기차를 같이 타고가고 있다. 얼마 안가서  아버지가 ‘강대건의 죽음’이라는 역에서 내릴 것이고 나는 계속 그 기차를 타고 ‘강신주의 죽음’이라는 역을 향해서 갈 것이다. 누구도 기차가 언제 ‘강대건의 죽음’이라는 역에 도착해서 아버지가 내려야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언제’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아버지의 점점 쇠약해지는 몸이 그것을 말해준다. 

빠른 속도로 ‘강대건의 죽음’이라는 역을 향해 달리는 기차에서 나는 곧 나와 작별할 아버지를 보면서 두려움, 미안함, 안타까움, 슬픔을 느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저 키스, 마사지, 허그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잠시나마 멈추게 하고 온전히 느끼려고 한다.

2 분 후에 가스실로 보내져 죽음을 당할 부인과 여동생을 나치 경비원 몰래 껴안고 뽀뽀했던 어떤 유대인 이발사처럼 말이다.

유대인 이발사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쇼아 (Shoah)’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포함된 내용이다.  끌로드 란츠만 감독은  장장 9 시간 반 동안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었던 수용자들과 가스실의 문턱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들의 인터뷰와 증언을 담아낸다. 아직도 남아 있는 수용소의 가스실들의 사진과 수용소로 향하던 기나긴 철도를 배경으로 생존자들의 증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끔찍한 사진과 동영상 하나 없이 생존자들의 서술과 증언으로 관객이 상상 속에 태어나는 홀로코스트의 실체는 참혹하기 이를데없다.

나는 이스라엘에 간지 도착한지 몇 달 안되어 쇼아를 이틀에 걸쳐 하이파의 한 영화관에서 관람했는데 큰 충격을 받았고, 이 영화는 이후로 내가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 내가 잊지 못하는 에피소드는 감독과 텔아이브의 한 이발사와의 인터뷰였다. 아브라함 봄바 라는 이름의 이발사는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에서 여성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임무에 관해서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는 텔아비브의 한 이발소에서 손님의 머리를 자르는 내내 아브라함은 감독의 여러 질문에 ---아무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브라함의 임무는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하기 직전의 여성과 어린이들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었다. 그를 위시해 유대인 이발사들이 16-7 명 정렬해서 전라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줄지어 들어오면 재빨리 그들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한사람 당 대략 2 분 소요되었다.

자신들이 그 방을 나가자마자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할 것을 전혀 모르는 여성들은 머리를 자르고 샤워를 한 뒤에 일을 배당받을 거라는 희망에 차 있었다. 이발사들은 곧 죽음을 맞을 그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지만 둘러싼 채로 감시하고있는 독일 병사들 앞에서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머리를 잘라야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아브라함의 무뚝뚝함, 침착함은 놀라웠다. 분명 복잡한 감정의 여러 현을 건드리는 질문들에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또박또박 대답했다. 한 예로 전라로 들어온 여성들을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는 감독의 질문에 그는 ‘나는 아무런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라고 대답했다. 그는  ‘여성들 중에는 나의 고향에서부터 알고 있는 여성들도 있었고, 같은 동네에서 산 여성 친구들도 있었으며, 그 친구들이 그를 보고 반가워했지만 자기는 그냥 묵묵히 일을 해야만 했다고 했다’ 고 덧붙이기조차 했다. 마치 역사책을 읽는 듯이 또박또박한 말투로.


여성들이 곧 죽임을 당할 것이고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만큼,  그것을 아무런 감정을 섞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하는 아브라함의 무심함과 초연함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여버려야했고, 묻어둬야했던 끔찍한 감정들의 크기와 정도를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감정 컨트롤을 잘했던 그가  잠시 울컥한 대목이있다. 그의 동료 이발사의 이야기를 할 때였다. 

“내 친구도 이발사로 일하고 있었어요…그런데 그의 부인과 누이가 가스실에 들어왔을 때….”  

아브라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할 수 없어요. 너무 끔찍합니다. 제발….” 

란츠만 감독은 그에게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종용한다. 아브라함은 할 수 없다고 우기고, 란츠만은 다시금  ‘당신은 이야기를 해야만해요. 힘든 것 압니다. 압니다. 미안해요.” 라 한다.

이런 대화 후 아브라함은 눈물을 훔치고  동료 이발사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동료 이발사는 부인과 누이에게 그들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줄 수 없었다. 바로 뒤에 나찌 경비원들이 있었고 혹시라도 그가 가스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순간 모두가 죽음을 당할 것임을 알기때문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2 분이었다. 그 때 그 이발사가 한 일은?

아브라함은 말했다.

“[제 동료]는 자기 부인과 여동생을 위해  위해 최선을 다해서, 껴안고 키스를 하면서 일 초라도 더, 일 분이라도 더 같이 하려고 했습니다.” 

9 시간 반의 긴 영화 내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 내가 왜 이 장면을 그렇게도 생생히 기억을 하는 이유가 있다. 그해 나는 이스라엘에 도착해서 처음 집을 떠난 사람이 겪은 극심한 향수병에 걸려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국제 통화를 하는 것이 어려웠다.  어쩌다 정말 어렵게 전화를 걸었을 때  부모님이 받지 않으면 하염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부모님의 무응답이 ‘죽음과 같다’고 느꼈다.  ‘엄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가 바로 이런 기분일 거야 내가 아무리 이야기하려고 해도 부모님이 나에게 답하지 않는 상황. 그게 죽음이지.’ 

‘죽음’같다’는 것은 죽음과는 분명 다르다. 전화가 안된다고 죽음과 같다고 느끼는 나의 처지와 홀로코스트로 누이와 아내를 잃은 유대인 이발사의 경험은 절대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이를 만날 수 없는 게 죽음과 같다고 느끼던 나에게  사랑하는 이를 잃어야했던  유대인 이발사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큰 울림을 주었다.  마냥 철부지였던 내가  ‘내가 사랑하는 이와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단 2 분이라면? 그 짧은 시간, 그 매초가 그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고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영화를 봤던 무렵, 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남의 죽음은 물론이고 나의 죽음에 관해서 생각해볼 계기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 이발사의 이야기는 죽음이 목전에 있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처음으로 강렬하게 느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내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애초에 그 삶이라는 게 나에게 주어진 게 얼마나 감사한지, 어떤 이유에서든 살고자 했지만 죽어야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못누린 시간을 내가 대신 열심히 살아줘야하겠다는 책임감마저 갖게 되었다. 이후로 내 삶은 성실하고 치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발사의 이야기가 나에게 ‘가족의 소중함’ ‘삶의 소중함’ ‘시간의 소중함’과 같이 약간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깨달음을 주었다면 2013 년 오빠가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나는 유대인 이발사의 마음을 더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혼수상태의 오빠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고,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살 수 있겠지? 돌아가실지도 몰라, 아니 살 수 있을 거야, 정말?’ 의 희망과 절망을 널뛰기를 다스리려고 애쓰면서 석 주를 보냈다. 그러나 오빠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오라기 희망이 뇌사라는 진단에 의해 끊어졌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의  ‘얼마’ 가 하루인지, 일주일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나는 2 분 후에 가스로 죽음을 당할 아내와 누이을 바라보는 유대인 이발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를 2 분 후에 보내야하는 그와 달리 나는 오빠를 아침 저녁으로 30 분 볼 수 다지만, 유대인 이발사처럼 죽음에 맞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허그와 키스 말고는. 

나는 오빠의 뺨을 수없이 가볍게 쓸었고, 퉁퉁 부은 오빠의 팔과 손을 만지고, 복잡하게 놓인 튜브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오빠의 가슴을 만졌고, 오빠의 뺨에 내 뺨을  갖다 대었다. 오빠 오빠…대답이 없는 오빠에게 계속 이야기하고, 노래를 불러드렸다.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오빠가 이땅에 머무는 그 짧은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소소한 사랑의 표현뿐이 없었다. 오빠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 그리고 그 이후, 나는 테러리스트와 같은 죽음이 남기고 간 나와 가족의 상처에 아파했다. 많이 아픈 만큼 배움도 컸다.

영화에서 이발사를 보고 내가 삶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살아겠다는 막연한 착한 생각을 하게끔 해줬다면, 오빠와 함께하는 ‘시한부’의 시간과 그를 이어 맞이한 오빠의 죽음은 나를 본질적으로 바꿔버렸다. 매 순간, 정말 소중하게 여기면서 잘 살리라는 결심은 나의 하루하루를 지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죽어가다 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빠가 돌아가시는 순간, 그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되었다. 오빠와 나눌 수 있으리라 여겼던 나의 미래가, 나의 시간은  오빠의 죽음과 함께 덧없이 사라져버리니 나는 내가 죽는 것같았다. 


이후로 나에게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의식이 남아 있다. 오빠가 가신 뒤 나는 삶을 건성건성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 새롭고 소중했다. 더 성실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나의 하루하루를 지배했다. 내가 숨쉬는 매 순간이 공짜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자각은 나의 마음을 형언할 수 없는 감사함과 책임감으로 채워줬다. 오빠가 가신 뒤에 부모님을 잘 모시겠다는 결심은, 단순히 오빠 ‘대신’에 부모님을 돌본다는 책임감만이 아니었다. 오빠가 살지 못한 삶을 내가 이렇게 잘 누리고 살고 있는데 하는 감사함과 내가 부모님을 돌보는 것이 돌아가신 오빠와 함께 하는 것이라는 기쁨이 있었다. 

이제 아버지 수발을 들면서 나는 3 년 전 오빠의 중환자실에서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아버지가 내려야할 ‘강대건의 죽음’이라는 기차역이 1 초 후에 도달할지 10 년 후에 도달할지 나는 모른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죽음의 가능성이 아주 리얼하게 우리 옆에 있다.

반대로  아버지의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사고는 바로 그 첨예한 인식 덕에 우리에게 놓여진, 언제 박탈될지 모르는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생명의 소중한 순간을 우리는 잘 살아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수시로 아버지를 껴안아드리고, 키스를 하고 사랑을 표현한다. 

죽음이 언제고 우리를 떼어놓을 것을 알기에 슬프다. 그러나 ‘시한부 삶’을 매 순간 의식하고 살기에 사랑이 빛과 향기가 더 진해진다. 매 순간을 하나도 낭비없이 의식하고 살고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단 1 분이라도 축복은 축복이다. 




꼴렛이 중학교 때의 일이다. 공립학교에서는 일년에 한 두 번씩 기금을 모은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좋은 학군이라 소문 났지만 공립학교 예산이 충분치 않아, 학생들에게 컴퓨터, 프린터, 복사지, 과학 실험 재료 등등을 제공하기 위해서 부모들로부터 기부금을 모으는 것이다. 

우리는 당시 (친구의 말로) '얼바인에서 제일 똥차'를 몰고다니고 매사에 절약하던 때였고 아이도 나도 '돈없는 사람' 냄새가 폴폴 나던 때였다. 

그러나 우리 애들이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되게끔 공교육의 수준이 유지되고 나의 아이들은 물론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의 아이들에게도 수준이 있는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번 기부에 참여해왔다.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기부를 권장하는 편지에 어김없이 들어가는 내용이 기부 액수에 따라 기부자 (학생)에게 혜택이 있다는 것인데, 예로, 50 불, 100 불, 200 불...식으로 일정 액수 기부마다 혜택과 선물이 따르는 것이다. 즉, 20 불 기부하면 플라스틱 팔찌, 50 불 기부하면 펜과 플라스틱 팔찌, 100 불 기부하면 아이패드 추첨권과 모자----그리고 200 불 이상은 '최고 기부자'의 카테고리로서 '수업 빼먹고 해변 도시에 가서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권리'를 준다는 식이다. 

왜 기부자에게 특혜를 주는지? 꼴렛 학교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에밀 학교에서도 일정 액수를 기부하면 디즈니랜드에 갈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이 있었다. 학교 버스 대절해서 디즈니랜드에 가버린 뒤 남아 있는 아이들은 어쩌라고? 아이들이 많이 빠지니 정상 수업도 불가능한데.... (나는 첫째 아이 교장에게 기부금을 낸 가정의 자녀들이 받는 '특혜'가 차별이 아니냐고 의의를 제기했는데, 빠듯한 예산에 기부를 장려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해해달라고 했다.) 

이 무슨 아이러니냐....학교를 돕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들을 돕자고 내는 기부금이 일종의 빈부의 차별 대우를 종용하는 것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기부금을 많이 내는 가정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고, 그 자녀들은 소위 '인기있는 그룹'에 속하는 애들이 많은데, 그들은 보란듯이 디즈니랜드, 해변에 가는 것이다)

꼴렛과 에밀은 우리가 최고 액수 이상의 기부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액 기부들이 특혜를 받는 것이 차별이라고 비판했다. 에밀은 디즈니랜드를 안가면서 재밌게 놀 기회를 포기하니 잠시 억울해하는 것 같았지만 금새 자기가 안 가는 게 맞다고 받아들였다. (디즈니랜드에 간 뒤에 그날 수업도 대강 하고 숙제가 없는 것만해도 좋은 듯했다.)

꼴렛은 고액 기부자 가정의 학생이 하루 종일 해변에 가서 논다는 게 말도 안된다며 강한 비판을 했다. 자기는 절대 안 갈거라고도 했다. 

아, 기특해라!  자기가 알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기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그저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는구나.....했는데, 앗, 다음 날 학교 가더니만 마음이 변했다.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해변가는 버스에 아이들이 타는데 나더러 타자고 해."

"넌 어제 안 간다고 했잖아?"

"근데 가고 싶어. 친구들과 같이 가는 거라서 재밌을 거같아."

"그건 공정치 않아. 왜 부모가 돈 낸 아이들이 특혜를 받아야해? 기부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자식이 특별 대접을 받으라고 하는 건가?  기부금 내면 끝이지. 공립학교가 왜 그런다니?"

"엄마 말은 알겠는데....하루만 가서 노는 건데...난 가고 싶어.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해. 

엄마, 우리도 200 불 이상 기부했으니까 나에게도 해변에 갈 기회가 있는데 그걸 포기하고 싶지 않아."


나는 차갑게 받았다.


"꼴렛아, 넌 돈 내지 않았어. 기부금은 엄마 아빠가 낸 돈이야.

그리고 너 재밌게 놀라고, 너 좋은 대우 받으라고 낸 돈 아니야.

너희 학교 학생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배우라고 낸 기부금이야."


"내 친구들도 마찬가진데? 걔들도 부모님이 돈 낸 건데 해변 가는 거잖아."


"엄마는 그게 잘못되었다고 하는 거야. 왜 부모들 돈으로 자식들이 특혜층이 되냐고!"


피검사 예약이 되어 있어서 나가는 길이었는데 나는 어느 순간에 나는 골목에 차를 세우고 꼴렛과 열띤 문자를 나눴다. 꼴렛의 요구가 점점 더 간절해졌다. 나의 거절도 더 완강해졌다.


"엄마, 우리 가족이 기부금을 냈고, 기부금을 낸 사람에게 주는 혜택이 정/당/하/게 있는데 왜 그것을 안받어?" 

꼴렛의 정당함의 기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꼴렛, 그럼 남아있는 애들은 뭐야? 돈 내면 수업 빼먹고 놀러가는 애들 바라보면서 남아 있는 애들의 기분은 생각해봤니? 네가 그 아이들이라면 그게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같아?" 

"아이들도 받아들이겠지. 학교가 정한 룰이잖아."

"엄마는 그 룰이 옳지 않다고 하는 거야! 너도 어제까지는 그 룰이 옳지 않다는 것을 봤었어!"


버스가 떠날 준비를 한다며 꼴렛의 조바심은 극에 달했다.


"엄마, 제발, 제발, 제발....이번에 한번만 가게 해줘. 다음 번에는 안 이럴께. 내 친구들이 버스 창문에서 나 보면서 어서 타라고해. 엄마, 제발, 제발, 제발..."


문자에 아이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다. 버스가 떠날락 말락 할 때의 기분이 얼마나 아슬아슬할까. 

불현듯, 얘가 나랑 문자를 주고받는 중에 버스가 떠나면 깊은 원한이 맺힐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내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기부가 차별을 조장하면 안된다, 특권층 의식을 버려랴--라는 생각은 강건너 가버리고 엄마가 고집 피워서 자기가 즐겁게 놀 권리를 빼앗았다고 확신하고 화만 남겠지.  

꼴렛이 자기 스스로 선택을 해야하는 게 필요했다.


"꼴렛, 엄마는 엄마 생각 다 얘기했고, 너도 네 생각 다 얘기한 것같다.  이제 그만하자.  엄마가 화나서 하는 소리가 아니야. 지금 의사한테 가야해서 그래. 해변에 가든 말든 네가 결정해라."


나는 전화를 끊고 혈액검사를 하러 갔다. 운전을 하면서 설사 꼴렛이 차에 올라탔더라 하더라도 내가 화를 내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애초에 우리 대화의 목적이 나에게 순종을 강요하려한 게 아니라 꼴렛이 차별과 특혜에 대한 생각을 해보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게 도와주려함이 아니었던가. 

12 살이란 나이에 불공정과 공정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걸 자기가 싸울 힘은 아직 없는 걸 수도 있다. 아직 어리니까 내가 이해해야지. 뭐라도 좋다! 

병원에서 나와 전화기를 켰더니 꼴렛의 문자가 있었다.


"엄마, 나 버스 안탔어."


딱 한 문장의 문자만 남겨져 있었다.

버스를 안타기로 한 게 잘한 것같다거나, 버스를 안타서 화가 난다던가, 한 문장이라도 더 있으면 마음의 상태를 짐작하겠건만...  불안한 징조. 버스 안탄 게 엄마 탓이라고, 엄마때문에 하루 망쳤다고 두고두고 불평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오후에 꼴렛을 데리러 갔다. 차에 올라타는 아이의 표정을 보니 밝기 그지없다. 나에게 삐진 얼굴을 기대했었는데 이게 왠 선물이라니?

꼴렛이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엄마, 좀 전에 수학 시간이 마지막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테일러 선생님이 오늘은 수업을 하지 않고 그냥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어. 그러더니, '난 화난다. 기부금 많이 냈다고 아이들을 해변으로 데려가 놀려주는 게 뭐냐?'라고 하시는 거야. 그게 정말 맞는 소리잖아!"

(엉? '그게 정말 맞는 소리'라고?  아까 나한테 해변 가겠다고 문자 폭탄을 보냈던 게 누구였지?)

나는 속생각을 누르고 가만히 들었다. 꼴렛은 계속 재잘거렸다.

"선생님이 그랬어. 

'내가 누구한테 더 화가나는지 모르겠다. 돈 많이 기부했다고 아이들을 해변에 보내는 부모들에게 화가 나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그런 제안을 한 학교에 화가나는 건지...'

너무 훌륭한 선생님이지?"


나는 감격했다. 어쩜 그런 선생님이 계시다니! 옳고 그름을 이미 판단하고 있었으나 아무 말 없이 당하고 있던 아이들이 속이 후련했겠다 싶었다. 

꼴렛이 나를 보며 말했다.

"엄마, 선생님이 그 말을 하는 순간에 내가 안 가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버스를 안 탄 게 어려웠지만 그렇게 한 게 자랑스러웠어."

"꼴렛, 엄마도 그래! 네가 안 가서 정말 기쁘고 자랑스러워."

"엄마, 오늘 일은 정말 차별이었어. 해변에 간 아이들때문에 학교에 남아 있는 애들은 피해를 보았어. 수업을 재대로 하지 못했으니까.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 그런데 내가 해변가서 뛰어놀았다면 남아 있는 사람들의 기분을 몰랐을 것아냐?  영원히!"

그러더니 나에게 눈을 찡긋하면서 작게 이야기했다.

"엄마, 오늘 해변 간 애들 재미없었데. 구름이 많이 끼고 추워서 놀지 못했다고해. 안 가길 너무 잘했어. 헤헤"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꼴렛이 나에게 '엄마 나 버스 안 탔어' 라는 문자를 보낸 것은 아침 일찍이었다. 버스가 떠나자마자. 그때는 (내가 예상했던대로) 자기를 선선히 보내주지 않는 엄마에 대한 섭섭함과 재미볼 기회를 놓친 실망감을 다소 느꼈던 것같다. 그런데 그렇다고 특혜의 버스를 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루 종일 모호하고 꿀꿀한 감정으로 보내다가 테일러 선생님의 그날의 맨 마지막 수업 시간에 모든 것이 확실하게 다 정리된 것이다. 

뭐가 옳고, 뭐가 그르고, 자기의 선택이 옳았고..... 

아, 훌륭한 테일러 선생님! 그는 자기가 꼴렛의 어미에게 준 도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까? 

꼴렛이 '버스를 타고 해변에 가서 하루 노냐 마냐의 문제'는  언듯 보면 별 거 아닌 것같지만 내 입장에서는 사회의 부조리의 축소판이었다. 특혜와 차별을 당연히 여기는 사고방식,  있는자의 그룹에 속해서 없는 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것 (버스를 못탄 아이들의 학습을 침해했으므로), 옳지 않은 특혜가 합법적으로 주어졌을 때 그것을 합리화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엄청나게 부당했고 부조리했다. 또한 처음에는 학교의 처사를 '차별이다, 부당하다'고 했던 꼴렛이 바로 그 다음날 친구들의 영향과 즐거움의 유혹으로 무너지는 것도, 사실은 어른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쩌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라고 넘길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런데 그게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니, 가치관을 키워가는 아이들에게 끼칠 교육적 악영향은 간과할 수 없었다.

바로 그래서 나는 병원 예약시간에 늦어가면서 차를 세우고 꼴렛과 치열하게 문자 싸움을 벌인 것이다. 꼴렛이 내가 하는 소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격렬한 토론 속에서 내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엄마가 '특혜를 당연시하고 선민사상에 젖어 사는 도덕적 철부지'들보다는 '자기가 좀 힘들더라도 공정한 잣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알면 이담에 한번이라도 더 고민하겠지.

나는 테일러 선생님이 너무도 고마웠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이 계시다는 게 고맙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는 선생님이 내가 아이와 나누려던 가치관을 내 대신에 너무도 쉽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내 생각이 아무리 옳아도 엄마로서 내가 그것을 꼴렛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그러면 안되었다. 나는 설득을 하려는 노력만 할 수 있다. 그리고 설득하려고 오래 붙잡을 수도 없었다. 엄마의 얘기가 납득이 안되는, 아니면 엄마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12 세 아이에게 주절주절 이야기해봤자 잔소리뿐이 안되니말이다. 그런데 선생님 덕에 꼴렛은 자기가 이미 갖고 있었으나 잠시 흔들렸던 옳고 그름의 잣대를 똑바로 세울 수 있었다.

선생님은 자신도 모르는 채 꼴렛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왜냐면 이후 꼴렛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 '왜 학교가 소위 스스로 인기있다고 나서는 'popular group'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학생회 활동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잘나가는 아이들'에  속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학교 구석 구석을 찾아다니면서 혼자 앉아 있는 학생들과 혼자 점심을 먹는 친구들, 또는 영어가 서툴어 자기들끼리 모여 다니는 이민자 학생들과 소통하려 하고 그들이 학교 활동에 포함하려고 한 일관성있는 노력은 어린 중학생으로 경험했던 몇몇 뼈아픈--그래서 약이 된-- '소외'의 경험과 테일러 선생님이 확고하게 해준 옳고 그름의 잣대 덕이었다. 

내가 이전 글에서 워싱턴 디씨의 은퇴하는 변호사가 내가 꼴렛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의 삶으로써 대신해줘서 고맙다고 했는데, 테일러 선생님께도 비슷한 이유로 감사드린다. 선생님은 자기가 한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선생님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기부 행사는 연례 행사이고, 반복적인 일은 사람을 무디게 하기 마련이므로. 모쪼록 선생님의 날카롭고 정의로운 판단력이 무디어지지 않았기를 바랄 따름이다. 여하튼간에 나는 테일러 선생님에게 두고두고 감사드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