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0 세 넘어서 (당시로는) '노처녀' 딱지를 달고 유학하던 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과 함께 살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의 작은 원룸을 방문한 부모님 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갈아입으면서 "아버지, 우리 서로 트고 지내요. 이담에 내가 아버지 똥기저귀 갈아드릴 거니까...' 라고 농담했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후, 글을 써보자 하고 쓴 첫 '소망'이라는 에세이에서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는 날 손을 잡아드리고 싶다'라고 썼었다. 

그러므로 부모님과 한집에 사는 것, 임종을 지킨 것, 나에게는 30 년전부터 꿔왔던 꿈의 실현이다. 특히 아버지의 병수발은 나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거의 감상적인, 순수한 '감정'에 기초했다. 물론 '내 기저귀 갈아준 부모님, 이제 그들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내가 돌보리라' 라는 순수함이 3 년간의 병수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으나, 동시에 나는 무척 무지했다. 수발을 들겠다고 한 결정은 모로코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 한 장에 이끌려 무작정 여행가겠다 결정하는 무모한 여행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여행이 어떤 어려움을, 어떤 위험을, 어떤 경험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비행기표 한장을 들고 있는 형국이랄까.

아버지가 넘어지신 뒤 며칠 안되어 나는 '나'의 단호한 결심, '나'의 열정적 헌신, '나'의 사랑,  '나'의 노력만으로는 성공적인 수발이 이뤄질 수 없다는 알게 되었다. 일이 잘 되기 위해서는 내 노력만이 아니라 나의 돌봄의 대상인 부모님의 노력이, 그리고 우리 모두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를 낸다는 말이 딱 맞았다. 

엄마와 내가 병수발 초기부터 3 년 내내--서서히 우리의 의견차가 좁혀지긴 했으나---끊임없는 대화로서 조절해야했던 문제는 '간병 도우미 고용' 문제였다.

누군가를 고용해서 쓴다는 사실 그 자체가 엄마께는 아주 힘든 일이었다. 이미 5-6 년 전에 엄마와 나는 가사 도우미 문제로 약간 갈등을 겪었다. 2009 년, 부모님이 한국에서 사실 때, 엄마가 병이 나서 살림외 모든 일을 다 하는 게 힘든 상태가 되었다. 멀리 떨어져사는 죄로 부모님을 도와드리지 못하는 나는 어떻게서든 엄마의 일을 덜어드리고 싶어서 가사 도우미 고용을 제안했다. 노인네 두 분만 사는 집에 누군가 정기적으로 가서 건강 상태를 체크해서 나에게 알려주면 좋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엄마가 극렬 반대하셨다. 알뜰살뜰 살림꾼 엄마는 돈주고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살림을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누군가가 집에 드나드는 것에 신경쓰는 것도 피곤하다셨다. 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절대 안한다!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에도  노! 한달에 한번만이라도에도 노!  결국은 도우미를 못쓰게 되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를 '트레이닝'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오셨을 때, 그리고 내가 한국에 갔을 때, 아버지께 혼자 할 수 있는 간단한 일들을 배워드렸다. 커피와 차를 혼자 끓여드시게하고, 아침은 혼자 찾아 드시게 하고, 가스불 켜는 법도 배워드리고, 세탁기 사용법도 배워드리고, 청소도 담당하시게 했다. 모든 일이 약간 서툴었고 느렸지만 아버지는 엄마를 도와드릴 수 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간병인 고용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5 년 전 기억이 있는지라 나는 아버지의 간병 도우미를 고용하는 게 그리 쉽게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용변수발 목욕 수발은 도우미 없이는 도저히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나는 급하게 간병도우미를 구했다. 세뇨라 빅토리아가 오기로 했는데 엄마는 불편해하다못해 불쾌해했다. 

'우리 둘이 하면되지 왜 딴 사람을 들여야하니?

엄마도 나도 지병이 있어서 너무 무리하면 안된다, 아버지를 드는 것은 우리 둘이 할 수 없다...라고 해서 엄마를 설득했다. 처음에는 도우미를 하루 2 시간만 고용했으나 몇 달이 지나면서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엄마는 역시나 반대했다.

'난 누가 들낙거리는 거 싫다!'

'아버지의 이런 모습, 남에게 보이는 것 싫다. 우리가 하자' 

엄마는 도우미가 오면 불청객이 침입이라도 한 듯이 불편한 기색이었다.

엄마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엄마에게는 너무도 힘든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계속 안 좋은 상태이니 그 사실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많았다. 팔순이 넘어서 남편의 사고로 한국에는 돌아갈 수 없게 되어 국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딸의 집에서 살면서 자신의 공간이 없어지고 남편과 한방에서 내내 병수발을 들고 있는데---이것만해도 트라우마가 생길 상황!--거기에 언어도, 문화도, 생김새도 다른 사람들과 계속 맞닥뜨려야하니 얼마나 힘드실까. 게다가 여러 사람들이 드나드는 아버지 수발을 드는 방은 엄마의 방이었고, 목욕 수발을 드는 동안에는 엄마의 침대, 엄마의 책상이 사용되니, 엄마는 분명히 공간의 침해를 받고 있었다. 

아버지의 몸이 쇠약해지면서 할 일이 너무도 많아졌고, 내가 아버지의 몸을 조금이라도 더 만져드리고 움직여드리고, 좀 더 양질의 음식을 만들어드리기 위해서, 그리고 지병이 있는 내 몸을 챙기기 위해서 도우미의 도움을 늘리는 게 절실해졌다.

그래서 엄마한테 과격한 말을 해야했다. 

"엄마, 엄마는 내가 몸이 약한데 아버지 수발 든다고 내내 걱정하시죠? 도움을 안 받으면 엄마 딸이 죽어요. 저 과로하면 안되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저 도와주신다치고  도우미를 좀 더 사용하게 해주세요.

엄마가 도우미들이랑 마주치는 거 싫으시면 그 시간에는 나오지 말고 푹 쉬세요. 그렇게 쉬어 주시면 나중에 내가 엄마 믿고 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엄마는 딸이 고생하는 것이 마음아파서, 본인에게는 아주 힘든 일이지만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나 대신에 간병 도우미의 시간과 시급을 계산해주는 일을 맡아서 해주었다. 날짜, 시간의 기록과 정확한 액수의 돈을 봉투에 넣는 엄마의 일은  각기 다른 시간대에 들낙날락하는 여러 도우미들을 관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스케쥴이 들쑥날쑥이라 간혹 간병인 중에는 자기가 하루 빼먹은 사실을 잊고 돈이 덜 들어왔다고 이야기를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엄마는 꼼꼼히 날짜, 시간을 정확히 기록한 노트를 보여줬다. 반대로 돈이 더 들어온 것같다고 돌려주려는 경우에도 엄마는 정확한 계산을 보여줬고, 언젠가부터 간병 도우미들은 엄마의 계산을 신뢰해 자기들은 계산을 아예 안한다고 했다.

엄마가 본인이 원하는대로라면 간병 도우미들을 덜 고용하는 것이었을텐데, 고집을 접으시고  현실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해주고 나와 아버지를 도와준 것이 나는 정말 고마웠다. 엄마에게 그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이해하기에. 엄마와 나의 상호 협력과 감사의 마음은 우리의 일터의 분위기를 항상 긍정적으로 만들어주었다.

병수발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 가장 힘든 사람은 아버지였다. 졸지에 불구가 되어 가장 사랑하는 것--책읽기, 글쓰기--를 하지 못하게 되고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을 다 내보이고 용변 수발을 받아야하는 지식인의 비애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아버지는 처음 기저귀를 사용하게 되었을 때 충격을 받았고 우울했었다. 그런데 아버지께 아버지를 돌보는 게 내가 원하는 일이니 내가 당신의 기저귀를 갈게 해달라 간청했을 때 조용히 '탱큐' 라며 내 마음을 받아주신 뒤, 거의 초인적인 의지로 모든 일에 협력해주셨다. 

도우미들의 서비스를 두고 '난 이 사람 싫다, 저 사람 갈아라' 라고 불평하지 않고, 무리한 요구하는 일 없이, 손이 서툰 간병인들이 일을 배우기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려주셨고, 묵묵히 자신의 몸을 나와 간병인들에게 맞겨주셨다. 아버지의 겸손함과 상냥함, 그리고 감사의 표현은 우리의 일을 쉽게 해주고 기쁨과 보람으로 채워줬다.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가 아니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때도 아버지는 감사함을 표현했다. 예로 늦은 밤에 일이 끝난 뒤 눈 감고 계시는 아버지가 주무시는 줄 알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는 간병인들에게 아버지는 눈을 번쩍 뜨고 입에 미소를 가득 담고 (고개를 못 돌리시니 천장을 올려다본 채로)  '로마나, 탱큐' '버지니아 탱큐' 하고 외쳤다. 그들은 기대치 않은 감사의 선물에 손을 가슴에 얹고 감동을 표시하며, "아버지, 제가 감사해요!" 라고 인사하곤 했다. 요양원에서 일하는 로마나는 '요양원 환자들은 아무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라고 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본인들의 뜻만 고집하는 대신 자식과 협력한 결과는? 아버지의 득이었다. 사고 후 죽냐마냐 하던 분이 3 년간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3 년은 고통과 좌절로만 점철된 고난의 시기가 아니라 아버지가 주위의 모든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매일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기뻐하고, 엄마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부모님의 협력 덕에 내가 무턱대고 시작한 수발이라는 힘들고 슬프지만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재미있고 기쁘고, 행복하고, 보람있는 멋진 여행이 될 수 있었다. 만약 엄마가 자신의 뜻만 고집하고 불평을 일삼았다면?  일단은 올바른 치료와 케어를 제공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피해자는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지칠 뿐만이 아니라 부모님과 소통이 안되는 게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며, 분명 마음 고생하면서 하는 수발은 엄청난 고역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척추라도 너무 무거운 짐을 지면 뼈가 뒤틀리듯이, 순수한 효심도 다툼과 몰이해라는 무거운 짐은 감당하기 힘드니 말이다. 부모님의 합리적 선택과 협력 덕에 소모적인 투쟁도 없고, 그런 투쟁이 초래하는 감정적 소진, 에너지 소진도 없으니 나는 나의 모든 에너지는 아버지의 수발에 쏟아 부을 수 있었다. 그게 아버지의 복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 복은 아버지가 선택한 것이다.

내가 받은 복도 있다. 나는 사람은 90 의 나이에도 자신을 바꿀 수 있고 주위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몸이 불구가 되어도 마음과 생각이 유연할 수 있다는 것도 보았다. 몸이 불편한 늙은이인 아버지가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고, 겸손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한 것, 그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그가 이룬 마지막 업적이다. 노년의 문턱에 서서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는 '노년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배운다. 인품이 부족한 나는 90 세가 된다해도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이미 기준이 세워져 있기에 조금은 흉내를 내볼 수 있을 것같다. 그렇게 하려한다. 나를 위해서,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 


오늘 정기검진차 병원에 다녀왔다. 넉 달에 한번씩 만나는 의사 선생님은 언제나 부모님 안부를 묻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버지는 어떠시냐'고 물었다. 지난 번 검진 직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했다.

의사는 조의를 표하고는 어머니와 내가 어떤 상태인가를 물었다. 

나는 바쁘기로 소문난 의사의 시간을 뺏을까봐 간단히 아버지가 평안하게 세상을 떠나셨고, 엄마와 난 평안한 마음으로 지내지만 아버지를 몹시 그리워하고있다고 대답했다. 의사가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더니 물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신이 아버지를 집에서 모셨지요?"

"네."

"어떤 식으로 모셨지요? 예를 들어 아버님이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었나요?"

"아, 완전히 침대 생활을 하셨어요. 기저귀 사용하시고 누워 계셨어요."

"힘들지 않았어요?"

"힘들 때도 있지요. 그러나 대부분은 즐거웠어요. 아버지를 모신 3 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아버지와 같은 분을 모실 수 있는 것은 영광이었어요."


의사는 들고있던 차트와 펜을 책상에 놓더니만 진료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나에게 한걸음 다가서서 물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기에 아버지를 돌보고 싶었습니까? 

어떤 분이시길레 그분을 돌보는 게 특권이자 영광같이 느껴졌습니까?"


그의 질문을 이해를 했지만 막상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난감했다. 바쁜 의사 선생님한테 나의 블로그 글처럼 장황하게--전근대적 글쓰기 스타일!--이야기를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라는 게 한마디로 요약이 가능하지 않으니..

내가 우물쭈물하니까 의사가 자기 이야기를 했다.

"나에게는 딸 둘, 아들 둘이 있는데 첫째가 내년에 50 이 됩니다. 아이들이 다 컸고, 손주를 세 명을 둔 할아버지이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하는가를 생각하고 삽니다. 당신이 아버지를 모시는 게 영광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말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나의 아이들에게 나는 과연 어떤 아버지인가 생각이 들어요. 당신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시기에 그런 소리를 듣는가 궁금한 것도 그래서이고요."

6 년간 알아온 의사 선생님의 개인적 이야기를 들은 게 처음이다. 의사 선생님은 필시 70 대 중반일테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연세가 많았다. 나는 대답했다.

"저의 아버지는 매사에 감사했어요. 긍정적이시고..."

의사는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도 긍정적이었냐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기저귀를 사용해야하는 것이 처음에는 힘들어하셨지만 대화를 나눠서 받아들이시게끔 되었다고 설명했다. 의사는 "어떤 아버지에게든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라고 이해했다.

나는 그래서 아버지께 감사한다고, 그렇게 받아들여주신 게 수발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고, 그 이후로 모든 일이 쉬워졌다고 했다.  의사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길레 내가 그를 모시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냐고 다시 물었다.

"좋은 분이셔서...매사에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존중해주셨고요. 겸손하고 욕심이 없는 좋은 사람...다정하고 참 사랑스러운 분이셨어요. 아...근데, 뭐라 정확히 이야기를 못하겠네요."

라고 했다. 의사는 가만히 뭔가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그렇지요. 한 사람을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아요.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던 간에 당신의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고 성공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겠어요. 당신이 아버지를 모시고 싶어했고, 모시면서 행복해했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만도 당신의 아버님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미 말해주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저 나도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좋은 관계를 아이들과 맺고 싶고, 죽은 후에도 아이들에게 좋은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의사와 나는 훈훈한 대화를 마치고 인사를 나눴다. 의사는 밖으로 나가고 내가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나더니 으사가 들어왔다.

"오늘 진료 하는 걸 잊었네요. 청진기 검진도 해야하고, 피검사와 초음파 검사 결과도 알려드려야하고, 다음 번 테스트도 알려드려야하는데 .. 즐거운 이야기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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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의 질문과 여러 생각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도 부모님을 보면서 나와 에밀과 꼴렛과의 관계를 가끔은 생각하고 있으니까.  70 중반의 할아버지 의사가 자신이 아이들에게 어떤 아버지인가, 그리고 사후에 어떤 아버지로 기억될 것인가를 아직 50 대인 나보다 더 절실하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노년과 죽음이 삶의 성적표같이 느껴지는 것은 왠일이람?  

학생의 1 년간의 학교 생활을 담임 선생님이 조그만 칸에 몇 자의 글로서 정의하듯이, 아버지의 90년의 삶을 나는 몇 자로 정의하려고 끙끙거렸다. 그리고 10 개 미만의 형용사로서 나는 아버지를 정의했다. 

나는 90 평생의 삶이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의사가 아버지의 훌륭함과 성공을 아버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딸인 나를 보고 파악한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한 인간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정의하는 노년의 성적표가 그렇게 간단한 거라니... 

내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라는 의사의 질문에 나는 할 (좋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답을 제대로 못했다. 

나의 아이들이 '당신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들을 때, 그들은 무어라 할 수 있을까?  나를 몇 자의 단어로 묘사를 할 때 그 단어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이전에 떠오르는 질문,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에 단 몇 자로 대답한다면 나는 뭐라 대답할 수 있나?  

막막하다.


건강검진 갔다가 생각거리만 잔뜩 들고왔다. 



(2017. 04.) 아버지 돌아가시기 1 년 반 전. 


주위에 집에서 병수발 드는 사람이 없는지라 우리집 일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다. 수발에 대한 일반적 반응은 ‘너무 힘드시겠어요’ 이다. 내가 엄청난 희생을 한다고 칭찬도 자주 듣는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애들도 나중에 자매님처럼 날 부양해줄까?’ 하고 농담삼아 진담을 한 분도 있고, 자신이 이기적이라 부모님을 품지 못했다고 반성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동갑내기인 필리핀 친구 다이앤은 나의 희생을 우려했다.


“정말 괜찮다고? 일에 너무 빠져있는 거 아니야? 너 스스로를 챙겨야지. 신주, 너의 부모님이야 좋으시겠지만, 네 희생이 너무 커.”


나름 나를 챙기면서 일하고 있는데 같은 지붕 아래 살지 않으니 증명할 길이 없다.  부모님 모시는 일을 숭고한 희생처럼 보는 것도, 아니면 커다란 개인적 손실로 보는 것도 나에게는 불편한 시선이다. 내가 꼭 희생하는 건 아니라고 했으나 다이앤은 “너는 희생을 합리화하는 것일지도 몰라. 우리 동양 여성들의 문제야" 라고 못을 박았다. 그녀가 날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녀도 이해해야할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난 물었다.


“다이앤, 이제까지 내가 너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적이 있어?”


“물론이지! 내가 네 도움을 어떻게 잊겠어! 내가 대장암 걸렸을 때 한동네 사는 시누는 나 몰라라 했는데 넌 우리애들을 데려다가…”


“그렇다면 이렇게 좀 봐줘. 만약 이제까지 우리 관계에서 내가 너와 너의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너를 도와준 ‘나’와 지금 우리 아버지를 돌보고 있는 ‘나’ 라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기때문이야.  내가 지금  아버지를 돕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에 옛날에 너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발벗고 나섰던 거야. 그때도 희생한 게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야.아버지든, 친구든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니까.”

 

다이앤은 그 때 잠시 '아...' 하는 표정이었다. 그 이후로는 효도, 희생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오랫만에 만난 셰리라는 친구는 내가 부모님과 같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대단해!' 라고 하더니, 자기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무남독녀이고, 그녀의 엄마는 싱글맘으로 그녀를 키웠다.) 


"난 나중에 절대로 엄마를 우리집에 안 모실 거야. 그런 희생은 자신이 없어. 오히려 친구라면 돕겠어.  실제로 남편이랑 나는 얼마전까지 실직한 친구를 우리집에서 1 년간 살게 해줬어." 라고 했다.


위의 두 대화는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일이라서인가, 나는 이들의 대화를 묶어서 떠올리곤 했다. 나는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미화하고 종용하는 사회의 압력을 경계해야한다는 다이앤의 입장에 찬성한다.  또한 셰리가 평생 해결되지 않은 엄마와의 문제를 직시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선을 그어서 엄마가 노후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합리적이고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은 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같았다. 왜일까? 나와 다이앤과 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이앤이나 셰리는 '부모'를 모시는 것'과 '친구를 돕는 것'을 완전히 다른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것같다.  다이앤도, 셰리도 이웃과 친구를 돕는 것은 대단한 희생이 아닌, 훈훈한 선행으로 보았지만, 병수발이라던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경계해야할 희생으로 보았으니 말이다. 셰리와 달리 나는 부모님이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다. 


그렇다. 나는 부모님과 아주 친한 친구사이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사회적 정의로는 현재 나의 상태가 "딸이 부모님 모시는 것" "딸이 아버지 병수발 드는 것" 이지만, 현실에서 나와 부모님은 무겁고 진중한 '효'로 엮여진 관계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친구에게 도움을 주는 친구의 관계--즉,  셰리가 사랑하는 친구에게 무상으로 숙식을 제공하는 마음과 내가 부모님을 모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나는 다이앤에게 내가 이웃을 돌보는 마음이나 아버지를 돌보는 마음이나 한 마음이라고 했다.   이제까지 내 삶에서 만난 여러 이웃들처럼. 30 년 전 이스라엘에서 유학시절, 사라 할머니가 치매로 요양원에 있을 때 말벗 해드리고 목욕을 시켜드린 것, 나디아 할머니의 영주권 신청을 도운 것, 빅토리아가 암수술을 받을 수 있게 도운 것, 바바라 할머니의 개, 진저를 돌봐주는 것—나는 나의 이웃, 나의 친구를 도운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의 친구, 강대건 씨를 돕는 것이고. 다른 친구들과 달리, 강대건 씨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셀 수 없이 많은 도움을 준 은인이다. 이제 내가 그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같이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내 친구라고 부르고, 내 이웃으로 섬길 수 있는 것은 특권이고 축복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부모님께 그렇게 잘하는가' 라고 물을 때 내가 꼭 이야기하는 것은 '당신이 나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두었다면 당신도 그럴 것이라' 고 대답한다. 그래서 나는 나처럼 부모와 편한 관계가 아닌 셰리가 엄마와는 절대로 살지 않겠다고 할 때 그 마음을 이해한다. 그 누구도 '억지로' '떠밀려져서' '그냥 그래야한다고 하니까' 수발의 임무를 지게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전제 하에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있다. 병수발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편견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희생’이란 개념과 단단히 묶여져 있다는 사실이다.  ‘늙으면 죽어야지’ ‘자식에게 똥수발 시키느니 죽는 게 낫다’ 식의  보편적 진리인양 통용되는 말들은 정작 수발을 들기도 전에 은 노년과 병수발을 모두 불행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수발에 대한 두려움, 거부감은 노년에 어떻게든 살고자 애쓰는 약자들의 노력을 냉정한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 '똥오줌 못가리면서 명이 질긴 건 저주' 라는 사고를 갖고 사는 사람이나, 그런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나, 수발은 지옥 체험이 되어버린다.


나는 희생이라고 하는 개념과 수발을 함부로 엮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노년과 수발에 관한 부정적인 말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고, 또한 수발은 무조건 희생이라고 여겨 칭찬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함을 의미한다. 그리고---이게 내가 가장 노력하는 것이기도 한데--돌보미도 헌신을 해 열심히 일을 하되 수발이 꼭 희생이 되지 않게끔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전에 성경을 읽던 중, 우연히 병수발의 좋은 예를 발견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사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어떤 관점으로든 수발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수발의 경험 덕에 나는 이제까지 내가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소리다.


 ’선한 사마리아인 법’ (도움을 받는 이가 뜻밖에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했을 때 도움을 준 사람이 손해배상과 처벌에서 보호해주기 위한 법) 이 그 예화에 의거해 생겨났을 정도로 비기독교인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정확히 어떤 이야기인지 한번 나눠보고자한다.



---누가복음 10: 25-37 을 풀어서 썼음--



한 유대인 율법학자가 예수한테 물었다.


율법학자: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예수: "율법에서는 그 방법이 무어라고 합니까?"


율법학자: "하나님을....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수: "그 말이 맞습니다."


율법학자: "그렇다면 저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는 대답 대신에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사람이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옷을 벗기고, 마구 때려서 반쯤 죽여놓고 

가버렸다. 길을 가던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피해서 다른 길로 갔다. 두번째로 (제사장을 도와 성전의 일을 담당하는) 레위인도 그를 피해 다른 길로 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처한 피해자를 보고 가엾게 여겨 그에게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싸매어주고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간호해주었다. 심지어는 다음날 길을 떠나기 전 그는  여관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가 끝난 뒤 예수가 물었다.


예수: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피해자의 이/웃/입니까?” 


율법학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 ‘당신도 가서 똑같이 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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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깊이 숙고할 필요없이 파악되는 명백한 주제가 있다. 제사장, 레위인과 같은 지도층에 속하는 종교인의 위선,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이웃이 되어야하는가....그런데 그런 주제 대신에 내눈을 사로잡은 것은, 이제까지 내가 한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유대인 피해자의 묘사'였다.


강도에게 모두 빼앗기고 옷이 벗겨지고 맞아서 반쯤 죽어 있는 강도의 피해자. 그 묘사를 읽으며 나의 뇌리에 낙상한 직후의 아버지의 모습, 죽음이라는 강도를 만나 넘어져 찻길에 쓰러져 의식이 잃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팔이 부러졌고, 손발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었고, 옴짝달싹 못하게 된 가엾은 아버지는 유대인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사마리아인의 응급처치도 나에겐 새로운 의미로 읽혀졌다.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피해자의) 상처에 붓고 (붕대로)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것은 내가 매일매일 하는 병수발의 여러 다른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부러진 팔을 붕대로 보호하고, 몸을 깨끗이 씻고, 항상 소독하고, 온 몸에 로션을 발라 욕창이 안 생기게 하고, 차로 병원에 모시고 다니고, 집에서 내내 돌보아드리는 게 나의 일이다. 사마리아인이 길을 떠나면서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고 자기 대신 돌봐달라고 하는 대목은 내가 간병 도우미들에게 돈을 지불하면서 아버지를 돌봐달라고 하는 것으로 읽혀졌다. 



"사마리아인이 병수발을 든 거구나!"


나는 이제까지 몰랐던 진리를 발견이라도 한 양 내심 외쳤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라는 말이 딱 맞는다)


자세히 읽으면서 나는 사마리아인의 병수발의 주변 상황을  새롭게 음미했다. 


강도의 피해자, 제사장, 레위인은 모두 유대인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천하게 여겨 멸시하고 어떤 관계도 맺지 않으려고 했다. 예수가 ‘누가 피해자의 이웃인가’ 라고 물었을 때 율법학자가 ‘사마리아인’ 라고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한 이유는  자기들이 그리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선행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차마 인정할 수 없어서일 수도 있다.


율법학자의 질문--‘내 이웃이 누군가’---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뻔뻔할 정도로 이기적인 사고이다. 


'내가 영생을 얻고 싶은데 율법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니, 어떤 이웃을 골라잡아 사랑을 해야할까' 의 심보이다. 


찬밥 더운밥 가리듯이 내 마음에 맞는 이웃을 선택하려는 제사장이 만약 반죽음이 되어 길에 쓰러져 있는 사마리아인을 발견했다면? 율법학자의 기준으로는 천한 사마리아인은 그의 이웃이 아니므로 당연히 외면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어떠했나? 그는 자기의 이웃이 누구인가의 기준이 없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피해자가 보았고, 그 피해자가 유대인임에도 거리낌없이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자신을 멸시하는 종족인 유대인 피해자를 이웃으로 삼아 도와줬다는 면에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운 것은 단순한 선행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수의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하다. 


'저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예수는'누가 피해자의 이웃이 되었습니까?' 라고 되묻는다. 또한 예수는 ‘사마리아인같/은/ 사람이 되/어/라’ 라고 하지 않고,  ‘가서 똑같이 하라 (Go and do likewise)’ 라며 이웃 사랑 행위의 실천을 강조한다.  이거저거 따질 것 없이 자비와 사랑의 마음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이웃을 삼아 도우라는 소리다. 이 예화에서 이웃은 두가지 모습이다. 유대인 피해자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 도 이웃이고, 사마리아인 처럼 ‘그 누구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도 이웃이다. 


유대인 피해자나, 사마리아인이나,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살면서 우리가 처할 수 있는 상황과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다 보여주고 있다.  현재 아버지는 유대인 피해자처럼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고, 그것을 발견한 나는 사마리아인처럼 도움을 주는 상황일 따름이다. 사마리아인과 나의 다른점이라면, 사마리아인은 개인적 관계가 전혀 없고, 자기를 적대시하는 부류에 속한 유대인을 도운 것이고, 나는 핏덩이인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살려준 나의 아버지를 돕는 것이므로 나의 일은 '선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마땅히 해야할 일'에 속한다.


예수는 사마리아인의 일이 ‘선하다’고 칭찬하지 않는다. (‘선한’ 이란 형용사는 인간들이 붙인 수식어이다). 나의 눈에도 그가 '선하다'라는 생각보다는 '이 사람, 참 일 잘하네~' 라고만 보인다.


정말 사마리아인은 모든 일을 현명하게 했다.  응급처치, 밤에 환자 돌봐주기, 그 다음에 자기 대신에 누군가가 돌봐주게끔 조처하고 떠나기---정말 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쾅쾅 받아야할 일이다.  분명 그에게 약간의 불편함과 경제적 지출이 있었겠지만 그게 희생이 아님은 그 다음날 그의 처사로 확인된다. 그는 다음날 자기 계획을 취소하고 머물면서 환자를 돌보는 대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여관 주인에게 돈 주고 '병수발' 서비스를 샀음--을 하고는 자기 길을 떠났다. 보상의 기대 없이 남을 도와준 것, 차별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한 것, 불필요한 희생을 피한 것---다 참 잘했어요! 이다.


나도 사마리아인이 자기가 선 자리에서 자기 눈에 보이는 이웃을 도왔듯이,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했듯이, 그렇게 살고 싶다. 내 삶에서 여러 이웃을 만났고 나는 도움을 받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했다. 지금 내가 돌보는 이웃은 운명적으로 나와 아버지라는 관계를 맺고 있는 강대건이라는 나의 이웃이다.  그를 돕는 게 ‘부모 병수발’이라는 무거운 ‘봉사와 희생’이라는 개념과 연상되는, 그런 거창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실제로는 나는 그저 도움이 필요한 나의 이웃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내가 아무리 붕대를 잘 말아도,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아무리 많은 간병 도우미를 고용해도, 나의 이웃 강대건 씨는 몸이 치유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의 돌아가시는 최후의 순간까지 마음만이라도 건강할 수 있게 잘 챙겨드리는 게 내 수발의 중심 목적이다. 이기적이고 성격이 고약하고 무례한 이웃이 미워 죽겠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때문에  미움을 꾹꾹 누르면서 돌보는 게 아니라, 매사에 감사해하고, 어질고, 착한, 그래서 사랑스럽기만한 이웃 강대건씨를 돌봐드릴 수 있어서 기쁘기 한량없다.



내가 빅토리아와 같이 다닌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차가 없어서였다. 캘리포니아의 대중 교통 시스템은 한국에는 비교가 안되게 낙후되어 버스가 드문드문 다니며, 버스 노선도 많지 않아서 불편하기 짝이없다.

두 군데 직장을 다니는 빅토리아는 길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하루에 5 시간을 길에서 보낸다. 그러니 암환자인 그녀가 몸이 많이 지치는 것은 물론이고 효율적으로 병원의 일처리를 없었다. 


내가 빅토리아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빅토리아는 내가 매일 같이 다닐 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혼자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내 도움이 꼭 필요할 때만 나와 같이 다니려고 했고, 방문해야할 병원과 사무실이 정해지면 맨 먼저 주소과 버스 노선을 확인하여 자기가 혼자 갈 수 있는가를 알아보았다. 암수술을 할 병원이 정해진 뒤 그녀는 주소를 보더니, 


"아, 잘됐다. 혹시라도 항암치료를 받아야할 경우에, 이 병원은 내가 혼자 다닐 수 있겠네요. 집에서 30 분 걸으면 병원가는 버스가 있고, 40 분 버스 타면 병원에 도착할 거고, 정류장에서 병원가지 15 분-20 분 잡으면...넉넉잡아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어요" 라며 기뻐했다.


차로는 20 분이면 가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병원인데  시간 반이 걸리더라도 남의 도움 없이 있다는 그녀에게는 마음이 놓이는 일이었다. 


극빈자 보험을 받는 그녀는 정말 돈이 없었다. 병원 가는 날이 많아지면서 시간제로 받는 급료를 포기하다보니 돈으 스트레스가 적지 않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작은 돈이라도 나에게 페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빅토리아와 다닐 우리는 다투곤 했다.


주차요금당시에 나도 작은 액수의 돈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했던 때였다. 나도 내가 일로 병원에 때는 좀 멀어도 길에다 공짜 주차하고 걸어서 병원에 가던 때였다. 그러나 우리는 내내 빅토리아의 직장과 병원 사무실을 오가면서 촌각을 다투는 처지니 가까운 곳에 주차하기 위헤서 한번에 1 불이나 2 불하는 주차비를 낼 가치가 있었다.


어느 병원 옆에 하루 종일 주차에 3 내는 곳이 있었다. 병원에서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분명 두 시간은 넘게 있을 것이었고, 병원 주위에 공사가 한창이어서 무료 주차를 하기 위해서는 아주 멀리까지 가서 주차하고 걸어야했다. 빅토리아는 그래도 멀리가서 주차하자고 했다. 내가 오늘은 시간이 없다며 미터기에 돈을 넣었더니 빅토리아가 단단히 화가 났다. 다음번에는 자기가 내겠다고 하더니만 그 후에도 주차비 생각만 하고 있었는지, 이틀 후에 내가 어떤 병원 사무실과 전화로 예약을 하는데, "마담싱쥬, 이번에는 내가 주차비 꼭 낼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라고 다짐했다.


나는 남에게 끼치는 것을 원치 않는 빅토리아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고 가능한한 존중하려했다. 그래서 그녀가 혼자 있는 일들은 혼자 하게끔 두었다. 서류를 기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불필요한 항목에 기입을 하거나, 같은 서류를 쓰는 일이 있었지만 그런 일은 문제가 아니라 싶었다. 수술 전에도 자기가 혼자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왕복 40 거리를 시간 넘게 다녀옴) 등록 절차를 혼자 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면서 나에게 전화해서 먹어야하는 약들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자기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해달라고 해서 다음 읽어보고 정확치 않은 부분을 설명해주기만 했다.


5 2 아침 7 시, 빅토리아의 수술! 아침 일찍 가서 마취하기 전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친구 인디라, 로사 (빅토리아한테 '암만 꺼내고 자궁은 사/수/하/라!' 종용했던 친구)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기다렸다. 수술은 시간 만에 끝났다. 사람들은 그게 좋은 징조라고 했다. 암이 번졌을 가능성이 크단다수술이 끝난 마취가 약간 풀린 상태의 빅토리아를 2 분여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수술 후 빅토리아는 요리사, 청소일을 그만두어야했다. 자궁 적출 후에는 솥과 물동이같이 무거운 것을 들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빅토리아에게 수입원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의 젊은 친구들 —인숙이와 은영이—가 선뜻 수백불의 돈을 기부했다. 빅토리아에게 큰 응원이 되었다.


몇 달 후 10 월에 출산을 한 나의 친구가 유모를 구할 때 나는 아기들을 본 경력이 오래된 빅토리아를 서슴없이 추천했다. 자궁을 잃는다고 눈물 흘렸던 빅토리아는 자궁을 잃은 뒤에 오히려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안고 돌보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후 우리는 몇 번 만났다. 빅토리아가 채혈사 자격증을 땄을 때 졸업식을 가 축하했고, 직장 인터뷰를 준비할 때 좀 도와줬다. 그 이후로는 각자의 삶이 바빠져 만나지 못했다. 


10 년 후 아버지 간병 건으로 연락을 했을 때, (나중에 알게 된 바) 빅토리아는 1 년 전에 어머니를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마마는 멕시코의 둘째 집을 방문하러 갔다가 갑자기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되었고 미국에 돌와오지 못한 채 짧은 투병 뒤에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가 미국 여 중에 낙상하셔서 영원히 한국에 돌아가시게 것과 흡사했다.) 평생 엄마를 모시고 살아온 빅토리아는 급작스레 엄마를 떠나보낸 뒤, 깊은 슬픔을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홀로 애도하던 중, 내가 아버지 건으로 연락한 것이다.


빅토리아는 이후 3 년간 아버지를 자신의 아버지인양 정성으로 모셨다. 마마가 멕시코에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원만큼 돌봐드리지 못한 한을 나의 아버지한테 풀기라도 하는 양, 친부모에게 하는 정성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나는 빅토리아가 자궁을 잃은 뒤에 아기를 안게 되었고, 자신의 어머니를 덧없이 잃은 뒤 아버지를 돌봐줄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신비로운 인연/축복이라고 여겨진다)


아버지가 운명하신 , 빅토리아는 새벽 4 시 반,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 아버지의 뺨을 쓰다듬고, 아버지의 뺨에 자기의 뺨을 대고 눈물 흘렸다. 6 시 반 경, 장의사들이 와서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터로 모시기 위해서 준비하는 동안, 그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나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방 안에 빅토리아가 있어서 내가  믿고 마음을 놓을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시신이 집을 떠난 뒤에 우리 식구들이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죽음의 충격으로 얼떨떨해하며 앉아 있는 동안에 그녀는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 방의 쓰레기통의 기저귀를 버리고, 옷을 정리하고, 침대의 담요를 개어 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그것 하나만 보아도 지난 3 년간 빅토리아가 어떻게 아버지를 돌보았는지를 알 수 있다. 남이 보던 안보던 묵묵히, 온 정성을 다해 일하는 빅토리아의 보살핌을 3 년간 받은 아버지는 천복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빅토리아는 나의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분명히 빅토리아가 누군가를 섬겼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에게는 돌봄, 섬김, 봉사가 천성이기 때문이다.


수술 한 달 후 경과를 보려고 의사에게 가 검사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빅토리아가 엘리베이터에서 전단지 장을 뜯었다. 뭐냐고 물었더니 빅토리아가 대답했다.


병원에서 자원봉사자 구한다고 해요. 혹시라도 내가 도울 있는 있나해서…”


그게 빅토리아이다. 언제든지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수술을 하고 나오면서 자신이 남을 위해 있는 일이 있는가를 찾는 그런 섬김과 봉사의 마음을 가진 빅토리아. 바로 그래서 그녀는 10 나의 전화를 받자마자 한숨에 달려와 3 아버지를 그렇게 정성으로 돌본 것이다. 


나는 빅토리아의  덕에 그녀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 덕에  아버지는 죽음 이후의 순간까지 존엄성을 지킬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제 빅토리아가 늙으면 내가 빅토리아에게 섬김으로써 보은할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빅토리아의 매니저로서 서류 처리를 하고 전화 업무를 하는 동안 나는 그녀가 치료를 받을 때까지 긍정적인 태도와 희망을 잃지 않게끔 이왕이면 많이 웃게해주자 마음 먹었다. 평소에 눈물이 많고 웃음도 많은 나는 내가 지치지 않기 위해서도 웃어야했다. 다행히 이미 빅토리아가 밝은 성격이라서 그녀는 나의 유머에 금방 반응해줬고 나에게 농담을 걸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다니는 내내 많이 웃었다. 죽음과 암에 관해서도 농담을 하면 한없이 큰 걱정거리와 두려움도 어느새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을 달콤하게 해줬다. 우리가 웃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를 더 담대하게 만들어줬다.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이었다.


예로, 고속도로 공포증이 있는 나를 대신해 운전해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빅토리아는 나에게 장난을 걸었다. 운전 공포증이 있는 나를 놀리는 말이었다.


“마담싱즁, 어떻게 암 환자한테 운전을 시켜요? 마담싱쥬가 운전해요.”

“쎄뇨라, 내가 운전했다간 쎄노랴 암으로 죽냐마냐 하기 전에 사고로 죽을 거에요."

“푸하하하!”


암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쉬쉬하지 않고 까짓것~ 해버리니까 맘이 편해지곤했다. 빅토리아가 진지하게 걱정을 할 때도 반은 농담으로 받고 반은 진담으로 받아주었다.


"마담싱즁, 이게 중요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긴 알지만…나는 가끔 생각해요. 암치료 받다가 내머리가 다 빠질 건가? 내 모습은 어떨까?”

"세뇨라만 그런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그런 상상하는데요.”

"마담싱즁도?”

"그럼요. 여성들 중에 그런 상상 안하는 사람 없을 거에요. 세뇨라야 진짜로 그렇게 될 것같지만. 하하하!”


빅토리아가 나의 짖궂은 소리에 ‘아...마담!’ 하고 고함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세노랴, 내가 중고품 가게 가서 싸구려 스카프 많이 사다줄게 바꿔가면서 써요. 글고…어차피 빠질 거면 이참에 빠지기 전에 한번 확 밀어보는 게 어떨까요? 거기에 무지개 색으로 염색까지. 너무 멋질 것같은데?”

"아하하하! 마담싱즁!!”


우리가 수시로 나누는 웃음은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게끔 해줬다. 아주 잠깐이라도 웃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긍정적 태도와 여유가 암과 맞서는 약이었다.


빅토리아는 밤에 아르바이트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 가끔 전화를 하곤 했다. 밤에는 좀 ‘잔잔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 밤에 온 전화, 


"마담싱쥬, 나에요.”
"오, 세노랴! 어디에요? 일 끝났어요?”
"네. 지금버스기다리고있어요.”

빅토리아는 뜨문뜨문 오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집에 가려면 밤길에 한참을 걸어야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10시가 넘었다.


"세노랴, 피곤하겠어요."
"그래요, 하하하,  마담싱쥬, 나 하품하고 있어요."

밤에는 길에 차가 뜸하고, 정류장에도 사람이 없단다. 그냥 혼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심심해서 걸었단다. 키가 작아 정류장 벤치에 앉으면 다리가 땅에 닫지 않는 빅토리아, 아기같이 땅에서 발이 뜬 채로,  밤하늘 올려다보고, 지나가는 차 구경하고, 암 생각도 하고…나한테 전화를 한 거구나. 
암과 싸우는 상태에서도 고된 일을 해야하는 그녀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그럴 때일 수록 웃어줘야한다.


"저런! 세뇨라, 가방에 돈많이 넣어 갖고 다니는 당신이 이 야심한시각에 혼자 있어서 되겠어요?"

"하하하"

"혹시 누가 찝쩍거리면, 나는 암환자요! 하고 소리 질러요. 그리고, ‘암은 전염되는 병이오~!' 라고 겁을줘요. 알았지요? 암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미친 사람인줄 알고 도망갈 거에요.”
"하하하"


늦은 밤에 가슴에서부터 솟아나는 웃음을 크게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생각하며 설거지를 했다.


가끔은 진지한 소리를 하기 위해서 농담과 진담을 골고루 섞은 말폭탄을 투하해야할 때도 있었다. 

의사를 만나 수술을 받기로 하고 나온 직후에 주고받은 대화가 그랬다.

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옆에서 걷는 빅토리아가 말이 없었다. 차를 탔다. 말이 없이 운전만한다. 이상했다.


"빅토리아, 왜그래요?”


"마담싱쥬,  의사가…." 


빅토리아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의사가 내 자궁을 다 제거해야 한다고 했지요?”


"네."

"'그거'만 꺼내고 자궁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가?" ('그거' 는 '암'을 의미했다)

"네?!!!!"

"자궁을 다 꺼낼 필요는 없잖아요. 암만 꺼내지..” 


빅토리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놀라 펄쩍 뛰었다. 나는 암이 들어있는 자궁을 다 들어내는 게 기쁘다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빅토리아는 암때문에 자궁까지 들어내야한다고 슬퍼하고 있다니. 이제까지 어떤 일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빅토리아가 수술을 하게 되었으니 기뻐해도 모자랄 순간에 눈물을 보이다니. 


"자궁없는 여자는...."

빅토리아의 말을 못 이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목숨을 잃을까말까 하는 상황에서 자궁을 지키고 싶다는 거였다.

지난 해 대장암을 앓았던 이웃 다이앤이 생각났다. 암을 늦게 발견해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암이 다른 장기로 번지지 않아 창자의 일부를 제거하고 항암 치료를 받았다. 항암 치료가 끝난 뒤 검사에서 암이 깨끗이 제거되었다는 희소식을 전해듣던 순간 하늘에 무지개가 떴고, 우리는 부등켜안고 울며 기뻐했었다.


그런데 몇 주 후에 다이앤이 나에게 상의를 하러 왔다. 잘라낸 창자 대신에 몸 밖으로 소변과 대변을 받아내는 튜브가 연결된 조그만 플라스틱 백을 매고 다니는데 너무 귀찮고 번거로우며 ‘보기 좋지 않아서’ 인공창자 수술을 받고 싶다고 했다. 의사는 인공 창자를 달면 암의 재발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하며 잠시 유보하는 걸 권했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는 달고 싶다고 했다


"난 아직 젊어. 배변백을 달고 다니고 싶지 않아." 라고 했다.


나는 원래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조언하지 않는데, 그날은 다이앤에게 강력하게 인공창자를 달지 말라고 했다. 


"다이앤, 바로 얼마 전에 침대에 누워서 ‘내가 몇 년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울었던 거 생각나?  아이들 더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하냐며 울었지? 그런데 이제 간신히 살게 되니까 목숨갖고 도박을 하려고 하는 거야? 도박을 하려면 라스베가스에 가요! 가서 집도 날려먹고, 차도 날려먹고, 다 날려먹어요. 그러나 목숨갖고는 도박하지 말아요. 아니 인공창자 단다고 당신이 더 섹시하고 예뻐져요? 어디 미모 대회 나갈 일이라도 있어?” 


다이앤은 고민 끝에 인공창자를 아직은 달지 않겠다고 했다. (5 년 후에 달았다)


빅토리아가 자궁을 보존하고 싶어하는 것도 목숨걸고 하는 도박이란 면에서 다이앤의 경우와 다를 게 없었다. 하나 다르다면 다이앤이 여성적인 아름다움의 이유에서였다면 빅토리아는 문화적인 압력때문이었다. 수백년 내려온 자궁숭배 문화라는 엄청난 짐덩이를 진 채, 그게 아무짝에 쓸모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던져버리지 못하고 낑낑거리는 형국이었다. 암덩이를 제거하기 전에 그녀의 정신을 지배하는 문화의 암력을 절단해버리는 게 급선무였다.


빅토리아…  조용히 그녀를 부르며 나는 서서히 말폭탄을 던질 준비를 했다.

그 다음에 따다다다~~ 


"빅토리아, 자궁을 보존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당신의 암은 아주 전이가 될 가능성이 높은 아주 위험한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지금 배에 뭐가 들어있는지 우리 알잖아요. 

5 개월 태아 크기의 암이에요.

당신의 자궁은 암을 임신하고 있어요. 근종이 아니라, 암을!


바로 조금 전 당신 수술 받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생각나요?

아직 암이 퍼지지 않은 것같지만 그래도 수술을 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거라고, 수술 날짜 빨리 잡아주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감사했어요?

그런데 지금 그 자궁을 보존하겠다고 하는 거에요?


그 자궁 갖고 뭐하려고?


만약 당신이 20 대라면, 아니 30 대라면, 아니 40 대라면, 당신이 자궁 들어낸다고 슬퍼할 때 나도 같이 슬퍼할게요. 그러나 당신은 지금 54 세에요. 앞으로 아기 낳을 일 없어요. 

자궁을 갖고 있어봤자 아기생길 일은 없고, 다시 암을 임신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왜 자궁이 갖고 싶어요?”


그러나 나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빅토리아가 맞섰다.


"자궁이 있어야 여자니까요!" 


"오, 그래요? 누가 그래요? 왜 그렇대요?


빅토리아, 한번 생각해봐요. 우리가 팔 없는 사람보고 인간이 아니라 그러지 않잖아요.

다리 없어도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않잖아요.

자궁이 없는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여자가 자궁이 없다고 여자가 아닌 게 아니에요.


다리 없는 사람은 다리 없는 게 눈에 띄고 불편함을 겪기라도 하지, 자궁이 없다고 불편할 게 하나라도 있어요?  자궁이 없다고‘이 여성은 자궁이 없습니다’ 라고 이마에 글자가 뜨기라도 한데요?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게 어때서요? 당신은 자궁이 없으나 있으나 똑같은 사람이에요!” 


빅토리아의 무표정이 내 의견을 받아들이는 건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았다. 

다시 초강세 공격!


"빅토리아가 왜 자궁을 원하는지, 그 자궁갖고 뭘 하려는지 한번 생각해봐요.

거기에 꽃이라도 심을 거에요?”


빅토리아가 이 대목에서 프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일부러 비아냥거리는 톤으로 말했다.


"그래, 그 귀한 자궁, 길이길이 보존하시유. 

그 자궁 덕에 하늘나라 일찍 가시유.

하늘나라 가서 그 자궁 애지중지하면서 사시요.

암꽃 피운 나의 자궁~ 하면서…”


빅토리아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마담싱쥬!!!!! 우하하하하!!”


그렇게 험하게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빅토리아가 업고 있는 자궁숭배 문화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녀의 등에 얼마나 꽉 붙어있는지, 빅토리아를 마구 잡아 흔들어서 떨어트리는 방법뿐이 없었다.


빅토리아는 이내 정색하고 말했다. 자신은 한번도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냥 여자는 자궁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며, 자기 친구들도 그렇다고 했다. 한 집에 같이 사는 친구 로사 (멕시코계 미국인) 가 자궁에서 물혹이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발견한지 꽤 되었는데 혹시라도 자궁에 손상이 갈까봐 수술을 꺼린다고 했다며, 사실은 로사가 빅토리아의 자궁 수술을 걱정하면서 빅토리아더러‘암만 꺼내고 자궁은 보존할 수 없냐’고 의사에게 물어보라고 종용했다고 했다.


내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내 말에 동의를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여하간 빅토리아는 그 이후로는 자궁에게 굿바이~를 하는 것에 대해 마음 고생을 하지 않는 듯했다.



수술 일정을 정하기 위해 병원에 가던 날, 빅토리아가 운전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여러가지 생각으로 맘이 복잡한 듯했다. 갑자기 ""마담싱즁, 수술 담당이 제발 여자 의사였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나이 많은 남자 의사이던가.”라고 했다.


"나이 많은 남자 의사는 왜요?”


"젊은 의사보다는 나이 많은 의사가 경험이 많으니까…”


"경험 많은 사람이 좋다고요? 세뇨라랑 같이 잘 것도 아닌데 경험 많은 사람을 왜 밝힌데요?”


"마담싱즁!” (비난과 웃음이 섞임)


"난 제발 빅토리아한테 젊고 잘생긴 의사가 걸렸으면 좋겠어요.  빅토리아야 그냥 누워있지 나는 매번 의사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데 이왕이면 잘생긴 의사 보면 내가 좋지~~”


"마담싱즁! 그런소리를~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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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 암 진단을 받은 뒤 5 월 2 일 수술을 받을 때까지의 빅토리아의 여정은 체념과 우울에서 희망과 긍정으로의 생각과 태도의 전환의 과정이기도 했다. 암진단을 받은 직후, 그녀는 '평화'라는 가면 뒤에 자포자기, 절망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병원 일이 어떻게 진척되어 가고 있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마담, 전 마음이 평화로워요. 이상하리만큼 평화로워요." 라고 해서 내가 놀랐었다.


"평화라고요? 두려움이 없다는 건 좋지만, 평화롭다는 소실은 암 수술 끝나고 할 소리에요. 지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를 해요?" 라고 타박했다. 


그 후에도 몇 번,  빅토리아는 서류와의 숨바꼭질, 끝이 안 나는 수속에 지쳐서 ‘그냥 포기하고 싶다’ 고 했던 적이 있다. 땅에 주저앉아서 그런 소리를 했던 날도 있었다. 나는 마음이 아팠지만, 


"노, 빅토리아, 그렇겐 안되겠어요. 내가 들인 시간이 얼만데! 그거 계산해서 나한테 다 돈을 갚고 나서 포기하던가 해요!" 라고 농담했다. 다행히 나의 짓궂은 농담은 그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그녀는 "오. 마담!" 하더니 웃으면서 일어났다.


사회복지사, 의사, 간호사, 사무직원들이 도움을 주면서 일이 풀릴 조짐이 보이면서 빅토리아가 어느 오후, 나와 작별하기 전에 나를 껴안으면서 한 말이 있다.


"마담, 고마워요. 난 혼자였을 때 포기하려고 했어요. 모든 일이 다 꼬인 것을 보고 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평화롭게 끝내려고 했어요. 마담이 끊임없이 일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희망을 갖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약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강해졌는가를 말해줬다. 그녀가 부끄러워하면서 “혹시라도 수술하게 되면 같이 있어줄 수 있어요?" 라고 물었을 때 나는 강인한 의지를 보았고, "전 죽음이 약간 두려워요" 라고 할 때도 나는 죽음과 싸우려는 투지를 보았다. 


그녀가 그렇게 강해지기까지 큰 도움을 준 것은 우리가 수시로 주고받은 유머 덕이었다. 너무 힘이들어 마음의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할 때 툭 던져진 농담은 지팡이가 되어 우리가 넘어지지 않게 받쳐주었다. 또한 힘든 상황에 우리가 웃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를 더 낙관적으로, 그리고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웃음과 유머은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라 우리가 의도하여 택한 습관이었고, 정신력과 낙관적 태도가 필수적인 암과의 전쟁에서 가장 유용하고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수술 받기 전 날도 나에게 먼저 농담을 건 것은 빅토리아였다. 


내가 전화를 하니 하루 종일 맑은 스프와 쥬스, 차만 마시고 있다고 했다. 마음이 평화롭고, 모든 준비가 되었다면서 빅토리아가 농담을 던졌다.

"마담싱쥬, 나 죽을지도 몰라요. 뼈를 추리러 와줘요. 하하하!”


나도 질새랴 농담으로 받았다.


"네~~세뇨라, 그러나 나는 뼈에는 관심 없어요. 신선한 장기가 더 좋아요.”


"오, 마담싱쥬! 하하하하!”


그렇게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수술 직전에도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그리고 그녀가 수술을 잘 이겨낼 거라는 확신이 왔다. 






나는 한 간호사가 빅토리아와 나의 관계를 물었을 때 '우리 여성들은 서로에게 엄마 역할을 한다' 고 했었다. 내가 빅토리아를 도울 때 나를 도와준 친구들이 있었다. 몇몇 엄마들은내가 일이 늦게 끝나서 방과 후 시간 맞춰서 아이들을 데리러 갈 수 없을 때 기꺼이 아이들을 픽업해줬고 격려해줬다. 그 외에 빅토리아에게 직접 응원의 말을 전해주고 빅토리아의 힘을 덜어주려고 학교 일을 자원해 도와준 엄마들도 있었다.


우리 아이들 또래의 자매를 둔 비키는 우리 애들과 놀리면 자기가 덜 힘들다면서 아이들을 많이 봐줬다. 봄방학 동안에는 아이들이 집에 있는데 부모님께 종일 아이들을 맡기고 나가는 게 죄송해서 고민하니까 자기가 하루 아이들 4 명을 데리고 디즈니랜드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집은 몇 번 가본 적이 있고 우리 아이들은 한번도 안 가본 곳이었다. 이참에 한번 보내봐도 되겠다 싶었다.


그 전날 에밀과의 대화.


"에밀, 내일 아침에 제레미랑 코린이랑 디즈니랜드에 갈 거야."


"그게 뭐야?"


"디즈니랜드! 디즈니랜드 몰라?"


어떻게 이 당연한 것을 모르지? 우리가 디즈니랜드에서 30 분 거리에 사는데? 내가 안 데려간 것은 사실이지만, 디즈니랜드는 모든 이의 상식이 아닌가?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미키마우스, 신데렐라 등을 언급하니 에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 그거...그러면 스케이트 타야하는 거야? 난 싫은데...."


이건 또 뭔소리? 오...얼마 전에 학교에서 단체로 스케이트 쇼를 관람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디즈니 만화영화 주인공들의 분장을 한 스케이터들의 공연을 본 기억때문에 아이는 디즈니랜드가 아이스링크라 생각한 것이었다.


옆에 있던 꼴렛이 끼어들었다.


"엄마, 난 디즈니랜드 보다는 real 한 게 좋아. 공주님, 왕자님, 이런 이야기보다는 진짜 이야기가 좋은데...."


내가 큰 돈 지출하면서 선심쓰는 건데 황당한 상황이었다. 돈의 가치가 없는데 굳이 보내야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맘 편히 밖에서 일을 하려면 어딘가에 가는 게 필요한데....다행히 아이들은 제레미와 코린과 어디를 간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그렇게 그 흥분 속에서 아이들은 하루를 보냈다.


다녀온 뒤에 물어보니 제레미와 코린과 같이 논 게 그리도 좋았나보다. 


아이들이 디즈니랜드를 다녀온 날은 빅토리아에게서도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전문의를 만난 날이었다.

암울한 정보를 들었지만 꼭꼭 막혀있던 일들이 처음으로 풀린 날, 디즈니랜드로 100 불이 넘는 지출을 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우리를 도와준 많은 엄마들이 있었지만 빅토리아도 나도 우리의 실제 엄마들 덕에 용기를 잃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엄마를 모시고 사는 빅토리아는 엄마가 자기가 암에 걸린지를 전혀 모르게 한다고 했다. 엄마가 걱정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했다. 


나와 빅토리아가 자주 통화하고, 의사 이름, 병원 주소, 전화번호, 소셜 워커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니 마마가 이상하다 여길 수 있었다. 그래서 빅토리아더러 당분간 ‘마담징즁이 아프다’ 라고 하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전화를 할 때마다 마마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마담징즁, 코모에스타, 코모에스타?” (Madame Shinjyu, how are you? How are you?) 


자꾸 물으셨고  내가 아는 스페인어로는 '무이비엔'  (very good) 뿐이니, 나는 그저 무이비엔, 무이비엔 대답한다. 그러면 마마는 



"갓블레슈! 마담징즁, 갓블레슈!" 하시고 나는  "그라시아스, 그라시아스! 마마!”한다.


(마마는영어를못하고, 나는 스페인어를 못하니, 그저 아는 소리를 두 세번 씩 부르짖는다.)


내가 빅토리아와 전화 통화를 자주 하니 마마가 ‘마담징쥬'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시는 것같았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마마의 기도가 저에게 향했다면, 그것을 빅토리아에게 돌려주세요. 빅토리아 살려주세요!”


빅토리아가 살겠다는 의지는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서였다. 팔에 금이 갔을 때도 엄마한테 내색을 안했다고 하는 그런 ‘독종’ 딸의 엄마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이 깊었다. 조그만 둥지에서 단둘이 의지하면서 보듬어주는 모녀의 사랑, 그것이 빅토리아의 일이 잘 되어야만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내가 빅토리아 일로 한참 바빴던 2005 년 4 월, 예정대로 한국의 부모님이 방문하셨다.  부모님은 빅토리아를 만나적 없이 그저 나의 이야기로 들어 알고 있었다. 


엄마는 도착하자마자 ‘이번 미국행은 네가 빅토리아의 수술에 집중할 수 있게 돕자는 목적으로 온 것이니까 우리에겐 신경쓰지 말아라’ 라고 하셨다. 한국에서 도착한 뒤의 시차적응, 본인들의 식사와 산책 등 건강 관리를 열심히 해서 내가 신경쓸 일이 없도록 해주셨다. 


엄마는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아니! 내가 빅토리아를 간접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게 축복이다’ 라고 하면서 식사와 청소는 물론,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까지 다 해주셨다.


그뿐이랴 주말에는 내가 푹 쉬어야하니 아이들과 가까운 해변에 가는 것, 며칠 가족 여행 다녀오는 것도 다 생략하자고 했다. 딸이 잘 쉬어야 빅토리아를 위해 일할 수 있고, 딸에게 아무 부담 안 주는 게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빅토리아를 위해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는 이론이었다. 에릭은 가까운 곳으로 가족 여행 계획을 세웠지만 부모님의 단호한 반대로 취소되었다.


부모님의 이해 덕에 나는 맘 편히 ‘빅토리아 안 도와주는 귀신들’ 잡으러다닐 수 있었다. 부모님은 출국 일정도 빅토리아의 수술 직후로 잡으셨다. 내가 당신들 출국 준비에 마음을 쓰지 않게 해주고, 혹시라도 힘든 일이 있으면 나를 도와주려는 배려였다.


언젠가 내가 운 적이 있었다. 제니퍼 덕에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게 된 날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긴장이 풀려서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울어서 스트레스 푸는 스타일이라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하면서 찬송가 들으면서 신나게 울어재꼈다. (진짜 이 표현 말고 달리 할 길이 없음) 


집에 들어가기 전에 다 울어야지. 엄마 마음 고생 시키지 말아야지…


빅토리아가 마마한테 자기의 상태를 비밀로 하듯이 나도 나의 약함과 무름을 엄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나는 계속 울고 있었다. 

엄마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에구..힘들었구나. 빅토리아도 힘든 날이었겠구나. 가엾어라. 된장찌게 끓여놨어. 어서 밥 먹어라. 다 잘 될 거야. 염려하지 말아.”


수많은 여성들이 빅토리아와 나를 이끌어주고, 도와줬지만, 맨 마지막 나를 품에 안아준 것은 엄마였다. 내가 있는 그대로, 지친 그대로 안길 수 있어도 되는 엄마의 강함이, 엄마의 사랑이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