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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 삶, 놀음
    카테고리 없음 2023. 7. 20. 01:07

    구체적인 여행 계획 없이 떠나는 자동차 여행의 묘미는 ‘우연한 발견‘과 그것이 주는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다짐이다.
    이번에도 그런 일들이 많았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적어보겠다.


    ——

    내 몸의 두드러기가 심해져서 유기농 야채를 구입해야했다.
    우리는 운전을 해서 숙소에서 약간 떨어진 ‘몽매니으 (Montmagny)‘ 로 갔다.
    역사가 오래된 이 도시는 우리 숙소가 위치한 작은 마을에 비교하면 큰 도시와 같았다.
    중심 대로는 자동차 딜러, 패스트푸드 체인점,  옷가게, 식당 등등이 줄지어 있어 미국의 소도시와 다를 바 없었다.

    샤핑을 마친 뒤, 이 도시를 한번 돌아보자고 하다가 눈에 드는 한 공원이 있어서 차를 세웠다.

    Promenade du Bassin. “배수지 산책로” 라 불리우는 공원.

    작은 강의 물이 큰 생로랑 강으로  배수되는 수문이 있는 곳이어서여서 배수지 산책로.
    물안개 속에 엄청난 양의 물이 퀄퀄 쏟아져 흐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아주 작지만 나름 나이아가라 폭포를 연상시키는데 바로 옆에 집들이 있었다.
    저기 주민들은 매일매일 이런 경치를 보고 엄청난 물소리를 듣고 사는구나….놀라웠다.



    강을 따라 산책로를 걸었다.
    어떨 때는 해가 비추더니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고, 다시 햇빛이 비추고…그런 변화를 경험하면서 산책로를 걸었다.




    드문 드문 일정 간격을 두고 있는 벤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벤치에는 짧고 강렬한 일본 하이쿠 시를 연상시키는 아주 짧은 시들이 적혀 있었다.
    벤치마다 다른 시를 읽으며 걷는 재미가 쏠쏠했다.




    알고 보니 이 시들은 뭉메으니 시에서 ‘물의 맛’이란 주제로 주최한 공모전에서 입상한 이 지역 작가 10 명의 작품들이었다.

    몇 개의 예를 대충 직역해서 보여드리자면,


    ‘천둥소리, 비둘기 날아오르고 소나기 쏟아지네‘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모래는 조수에 합쳐지고, 비는 북소리를 낸다’
    (제가 바빠서 원문의 아름다움을 고려하지 않고 직역해서 죄송합니다. 불어의 사운드가 참 예쁜 시에요. 저는 의미만 대강 전한 거고…)



    ‘여름밤, 달이 강 위로 미끄러지며 떠가네’



    ————-

    배수문 가까이 가니 거기에도 또 예쁜 공원이 있었다.
    이런 벽화도 있고…


    바람이 많이 불고 날씨가 쌀쌀한데도,  가족들과 연인들이 탁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기준으로는 ‘겨울’인 날씨, 이런 어두운 날씨에, 살벌한 기세로 쏟아지는 수문에서 전해오는 물안개로 공기가 축축한 곳에서, 그리고 가끔 무리에서 뒤처진 먹구름 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빗물을 떨어뜨리는 상황인데, 사람들이 바람막이 점퍼를 껴입고서 공원 식탁에 앉아서 피자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

    우리 옆으로 볼살이 통통하게 오른 2세, 4세의 아가 형제가 사과를 들고 구르듯이 뛰어서 멀리 멀리 갔다.
    나는 혹시 아이들이 물에 빠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어 부모를 찾았다.
    배수문 앞의 나무 의자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있는 젊은 부부. 그들은 아이들을 보면서 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이들은 더 멀리 뛰어가버렸다.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졌는데? 하는 걱정은 캘리포니아 출신인 나의 몫.  
    젊은 부부는 가끔 아이들에게 눈길을 던지기만 할 뿐, 자신들의 식사와 대화에 집중하는 기색이었다.
    저 멀리서 아이들은 상상에서 전사’가 되고 ‘영웅’이 되어 온갖 기합소리를 외치면서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우리가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아이들과 가까와졌다.
    아이들은 노느라 바쁜 와중에 우리에게 미소지었다. 그 친절함, 다정함이라니…
    한 손에는 사과를 들고, 한 손은 높게 쳐들고, 형의 뒤를 쫓으며 부모를 향해 달려가는 동생의 엉덩이를 한층 더 통통하게 만들어주는 기저귀의 실루엣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산책로를 걷는데 곳곳에서 가족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추운데!!
    우비를 입고!!!
    여기는 비가 많아서 이 정도면 맑은 날씨로 치는 건가?
    우리도 한번 저렇게 먹어볼까?

    남편과 나는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걸었다.
    별 거 아니지만 사소한 새로움을 만나면서 내 마음은 즐거워졌다.

    그리고 어김없이 떠오른 구절,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노는구나…..”



    ———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노는구나…’

    이 말은 사실 나의 친구의 딸, 루비가 한 말이다.
    나는 이 표현을 아주 좋아한다.  여행할 때마다 자주 이 구절을 떠올린다.

    10 년도 넘었나? 루비가 6 살쯤, 루비와 루비 엄마가 캘리포니아에 왔었다.
    당시 우리는 사막에 집이 있었고, 루비네와 주말에 함께 사막집에 갔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일들을 루비네와 함께 했다.

    낮에는 죠슈아츄리 공원에 가서 열심히 바위를 타고, 저녁 식사 후에는 좁은 거실 온 식구가 함께 구르면서 깔깔거렸고, 밤에는 마당에서 망원경으로 별을 보았다.
    어느 순간, 루비가 바지의 포켓에 손을 꽂은 채 정색을 하고 물었다.

    “여기선 이렇게 놀아요?”

    우리는 그 질문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루비의 눈에는 자기가 평소에 ‘노는’ 것과 다르게 노는 게 신기했던 거라.

    나는 나대로 ‘우리가 평소에 하고 사는 일들‘—즉 살기에 약간 불편한 사막집에 가고, 죠슈아 츄리 공원에서 하이킹을 하고 바위를 타고, 밤늦게 옷을 겹겹이 껴입고 마당에 앉아 별을 바라보는 게——을  ’ 노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루비의 말은 내가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갖고 살던 시각을 상기시켜 주었다.
    늦게 아이들을 본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이들을 통해서 동심을 새로 경험하는 그런 축복을 누렸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잡던 어린 시절——이 나에게 돌아왔고 나는 그걸 만끽했다. 하루하루가 축복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나는 그걸 잊어갔었다.
    커가는 나의 아이들이 그 동심을 서서히 잊어가듯이…


    그런데 루비 말을 듣는 순간, 동심의 눈으로 사물이 보였다.

    ‘사는 건, 노는 것’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구나.
    나도 그렇게 살았었는데,..
    40 이 넘었어도 그렇게 사는 게 가능했었는데,
    그걸 잊고 있었네…

    ——


    그런 깨달음 이후에도 안타깝게도 탁한 영혼의 어른인 나는 나의 일상을 그런 마음으로 살지는 못하고 있다.
    책임과 바쁨 속에서 하루하루 급급히 살고 있을 따름이다.
    거의 전투적으로 나만의 시간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하루에 단 한순간이라도 나만의 시간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내가 선택한 단어, ’ 쟁취‘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놂‘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새로운 곳을 여행할 때, 새로운 상황을 접하고, 나와 다른 삶의 면모를 발견하게 될 때마다, 어김없이 나에게 떠오르는 구절은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노는구나‘ 이다.
    꼭 피크닉을 하고 수상스키를 즐기고 사이클링을 하며 능동적으로 재밌게 노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슈퍼마켓 캐시어도, 관광 가이드도, 정장을 차려입은 바쁜 발걸음의 회사원들도, 그 일상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는 나의 눈에는, 그들의 시름과 스트레스와 책임에서도 한 발자국 떨어져 있기에 흥미롭게 보이고, 흥미로움은  ‘노는 것‘과 쉽게 연결되기 마련이다.

    남들이 지고 가는 시름과 책임을 무시하고 ‘노는 시각’으로 살자고 부르짖는다는 것은 참으로 매정하고 무례한 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나 나름의 시름과 책임을 지고 살고 있다. 이번 여행 중에 심각하게 두드러진 나의 건강 문제도 그렇고, 내가 모시고 사는 엄마의 암투병만 해도 그렇고…. 몇 년째 내가 지고 가고 있는 문제들은 내가 삶을 ‘놂‘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아주 어렵게 하고 있고, 그래서 이렇게 여행을 하면서 내가 ’ 놂‘의 시각을 상기하고 회복하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내가 나와 거리가 있는 남의 삶을 바라볼 때 유지할 수 있는 ’ 놂‘의 인식과 시각을 나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훨씬 더 즐거워지고 역동적으로 될 것이다.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그게 내가 참 바라는 것이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이렇게 노는구나’라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울러 내 삶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고 하고 있다.

    비가 많이 와서 무제한 상념의 시간에 빠져들 수 있었고, 내가 첨예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두려움을 직면하고, 나의 슬픔을 인정하고, 나의 외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비단 엄마의 건강문제만이 아닌, 60 이 넘은 한 인간으로서 내 삶을 돌아볼 때 드는 여러가지 사고 속에서 피어나는, 한번은 생각하고 지나가야할 문제들이었다.

    사색의 대상은 나의 삶,
    거이 이기적이다시피 완전히 나에게 몰입해서 사고하는 이 과정을 통해 (자기 성찰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므로)
    나의 삶에 나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생긴 것 같다고 느낀 게 며칠 전부터였다.
    나의 삶을 나는 이제 ‘놀이’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남은 여행 동안 이 시각을 더 건강하게 키울 작정이다.

    캘리포니아에 돌아가면, 수많은 검사와 병원 방문, 수시로 날아오는 의사와 간호사의 첵업 이메일, 결과의 기다림, 샤핑, 요리, 그 외에 해결해야 할 삶의 자잘하고 많은 일들—-을 이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끔.

    인생이 여행이라는 사실, 나는 내 삶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볼 필요가 있고, 그건 가능하며, 그래야 나는 자연스럽게 평정의 시각, 즐거운 시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연히 한 산책, 거기서 만난 이름 모르는 지역민들, 귀여운 아가들, 벤치……
    이 모든 여행의 기억은 나에게 ‘놀음‘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다시금 여행은 나에게 놀 수 있는 능력, 살 수 있는 능력을 되살려주고 있다.
    열심히 살면서 삶을 즐겁게 놀아보고 싶다는 욕망, 그게 이번 여행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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