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빅토리아와 같이 다닌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차가 없어서였다. 캘리포니아의 대중 교통 시스템은 한국에는 비교가 안되게 낙후되어 버스가 드문드문 다니며, 버스 노선도 많지 않아서 불편하기 짝이없다.

두 군데 직장을 다니는 빅토리아는 길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하루에 5 시간을 길에서 보낸다. 그러니 암환자인 그녀가 몸이 많이 지치는 것은 물론이고 효율적으로 병원의 일처리를 없었다. 


내가 빅토리아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빅토리아는 내가 매일 같이 다닐 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혼자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내 도움이 꼭 필요할 때만 나와 같이 다니려고 했고, 방문해야할 병원과 사무실이 정해지면 맨 먼저 주소과 버스 노선을 확인하여 자기가 혼자 갈 수 있는가를 알아보았다. 암수술을 할 병원이 정해진 뒤 그녀는 주소를 보더니, 


"아, 잘됐다. 혹시라도 항암치료를 받아야할 경우에, 이 병원은 내가 혼자 다닐 수 있겠네요. 집에서 30 분 걸으면 병원가는 버스가 있고, 40 분 버스 타면 병원에 도착할 거고, 정류장에서 병원가지 15 분-20 분 잡으면...넉넉잡아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어요" 라며 기뻐했다.


차로는 20 분이면 가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병원인데  시간 반이 걸리더라도 남의 도움 없이 있다는 그녀에게는 마음이 놓이는 일이었다. 


극빈자 보험을 받는 그녀는 정말 돈이 없었다. 병원 가는 날이 많아지면서 시간제로 받는 급료를 포기하다보니 돈으 스트레스가 적지 않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작은 돈이라도 나에게 페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빅토리아와 다닐 우리는 다투곤 했다.


주차요금당시에 나도 작은 액수의 돈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했던 때였다. 나도 내가 일로 병원에 때는 좀 멀어도 길에다 공짜 주차하고 걸어서 병원에 가던 때였다. 그러나 우리는 내내 빅토리아의 직장과 병원 사무실을 오가면서 촌각을 다투는 처지니 가까운 곳에 주차하기 위헤서 한번에 1 불이나 2 불하는 주차비를 낼 가치가 있었다.


어느 병원 옆에 하루 종일 주차에 3 내는 곳이 있었다. 병원에서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분명 두 시간은 넘게 있을 것이었고, 병원 주위에 공사가 한창이어서 무료 주차를 하기 위해서는 아주 멀리까지 가서 주차하고 걸어야했다. 빅토리아는 그래도 멀리가서 주차하자고 했다. 내가 오늘은 시간이 없다며 미터기에 돈을 넣었더니 빅토리아가 단단히 화가 났다. 다음번에는 자기가 내겠다고 하더니만 그 후에도 주차비 생각만 하고 있었는지, 이틀 후에 내가 어떤 병원 사무실과 전화로 예약을 하는데, "마담싱쥬, 이번에는 내가 주차비 꼭 낼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라고 다짐했다.


나는 남에게 끼치는 것을 원치 않는 빅토리아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고 가능한한 존중하려했다. 그래서 그녀가 혼자 있는 일들은 혼자 하게끔 두었다. 서류를 기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불필요한 항목에 기입을 하거나, 같은 서류를 쓰는 일이 있었지만 그런 일은 문제가 아니라 싶었다. 수술 전에도 자기가 혼자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왕복 40 거리를 시간 넘게 다녀옴) 등록 절차를 혼자 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면서 나에게 전화해서 먹어야하는 약들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자기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해달라고 해서 다음 읽어보고 정확치 않은 부분을 설명해주기만 했다.


5 2 아침 7 시, 빅토리아의 수술! 아침 일찍 가서 마취하기 전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친구 인디라, 로사 (빅토리아한테 '암만 꺼내고 자궁은 사/수/하/라!' 종용했던 친구)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기다렸다. 수술은 시간 만에 끝났다. 사람들은 그게 좋은 징조라고 했다. 암이 번졌을 가능성이 크단다수술이 끝난 마취가 약간 풀린 상태의 빅토리아를 2 분여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수술 후 빅토리아는 요리사, 청소일을 그만두어야했다. 자궁 적출 후에는 솥과 물동이같이 무거운 것을 들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빅토리아에게 수입원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의 젊은 친구들 —인숙이와 은영이—가 선뜻 수백불의 돈을 기부했다. 빅토리아에게 큰 응원이 되었다.


몇 달 후 10 월에 출산을 한 나의 친구가 유모를 구할 때 나는 아기들을 본 경력이 오래된 빅토리아를 서슴없이 추천했다. 자궁을 잃는다고 눈물 흘렸던 빅토리아는 자궁을 잃은 뒤에 오히려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안고 돌보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후 우리는 몇 번 만났다. 빅토리아가 채혈사 자격증을 땄을 때 졸업식을 가 축하했고, 직장 인터뷰를 준비할 때 좀 도와줬다. 그 이후로는 각자의 삶이 바빠져 만나지 못했다. 


10 년 후 아버지 간병 건으로 연락을 했을 때, (나중에 알게 된 바) 빅토리아는 1 년 전에 어머니를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마마는 멕시코의 둘째 집을 방문하러 갔다가 갑자기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되었고 미국에 돌와오지 못한 채 짧은 투병 뒤에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가 미국 여 중에 낙상하셔서 영원히 한국에 돌아가시게 것과 흡사했다.) 평생 엄마를 모시고 살아온 빅토리아는 급작스레 엄마를 떠나보낸 뒤, 깊은 슬픔을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홀로 애도하던 중, 내가 아버지 건으로 연락한 것이다.


빅토리아는 이후 3 년간 아버지를 자신의 아버지인양 정성으로 모셨다. 마마가 멕시코에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원만큼 돌봐드리지 못한 한을 나의 아버지한테 풀기라도 하는 양, 친부모에게 하는 정성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나는 빅토리아가 자궁을 잃은 뒤에 아기를 안게 되었고, 자신의 어머니를 덧없이 잃은 뒤 아버지를 돌봐줄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신비로운 인연/축복이라고 여겨진다)


아버지가 운명하신 , 빅토리아는 새벽 4 시 반,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 아버지의 뺨을 쓰다듬고, 아버지의 뺨에 자기의 뺨을 대고 눈물 흘렸다. 6 시 반 경, 장의사들이 와서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터로 모시기 위해서 준비하는 동안, 그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나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방 안에 빅토리아가 있어서 내가  믿고 마음을 놓을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시신이 집을 떠난 뒤에 우리 식구들이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죽음의 충격으로 얼떨떨해하며 앉아 있는 동안에 그녀는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 방의 쓰레기통의 기저귀를 버리고, 옷을 정리하고, 침대의 담요를 개어 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그것 하나만 보아도 지난 3 년간 빅토리아가 어떻게 아버지를 돌보았는지를 알 수 있다. 남이 보던 안보던 묵묵히, 온 정성을 다해 일하는 빅토리아의 보살핌을 3 년간 받은 아버지는 천복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빅토리아는 나의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분명히 빅토리아가 누군가를 섬겼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에게는 돌봄, 섬김, 봉사가 천성이기 때문이다.


수술 한 달 후 경과를 보려고 의사에게 가 검사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빅토리아가 엘리베이터에서 전단지 장을 뜯었다. 뭐냐고 물었더니 빅토리아가 대답했다.


병원에서 자원봉사자 구한다고 해요. 혹시라도 내가 도울 있는 있나해서…”


그게 빅토리아이다. 언제든지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수술을 하고 나오면서 자신이 남을 위해 있는 일이 있는가를 찾는 그런 섬김과 봉사의 마음을 가진 빅토리아. 바로 그래서 그녀는 10 나의 전화를 받자마자 한숨에 달려와 3 아버지를 그렇게 정성으로 돌본 것이다. 


나는 빅토리아의  덕에 그녀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 덕에  아버지는 죽음 이후의 순간까지 존엄성을 지킬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제 빅토리아가 늙으면 내가 빅토리아에게 섬김으로써 보은할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빅토리아의 매니저로서 서류 처리를 하고 전화 업무를 하는 동안 나는 그녀가 치료를 받을 때까지 긍정적인 태도와 희망을 잃지 않게끔 이왕이면 많이 웃게해주자 마음 먹었다. 평소에 눈물이 많고 웃음도 많은 나는 내가 지치지 않기 위해서도 웃어야했다. 다행히 이미 빅토리아가 밝은 성격이라서 그녀는 나의 유머에 금방 반응해줬고 나에게 농담을 걸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다니는 내내 많이 웃었다. 죽음과 암에 관해서도 농담을 하면 한없이 큰 걱정거리와 두려움도 어느새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을 달콤하게 해줬다. 우리가 웃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를 더 담대하게 만들어줬다.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이었다.


예로, 고속도로 공포증이 있는 나를 대신해 운전해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빅토리아는 나에게 장난을 걸었다. 운전 공포증이 있는 나를 놀리는 말이었다.


“마담싱즁, 어떻게 암 환자한테 운전을 시켜요? 마담싱쥬가 운전해요.”

“쎄뇨라, 내가 운전했다간 쎄노랴 암으로 죽냐마냐 하기 전에 사고로 죽을 거에요."

“푸하하하!”


암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쉬쉬하지 않고 까짓것~ 해버리니까 맘이 편해지곤했다. 빅토리아가 진지하게 걱정을 할 때도 반은 농담으로 받고 반은 진담으로 받아주었다.


"마담싱즁, 이게 중요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긴 알지만…나는 가끔 생각해요. 암치료 받다가 내머리가 다 빠질 건가? 내 모습은 어떨까?”

"세뇨라만 그런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그런 상상하는데요.”

"마담싱즁도?”

"그럼요. 여성들 중에 그런 상상 안하는 사람 없을 거에요. 세뇨라야 진짜로 그렇게 될 것같지만. 하하하!”


빅토리아가 나의 짖궂은 소리에 ‘아...마담!’ 하고 고함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세노랴, 내가 중고품 가게 가서 싸구려 스카프 많이 사다줄게 바꿔가면서 써요. 글고…어차피 빠질 거면 이참에 빠지기 전에 한번 확 밀어보는 게 어떨까요? 거기에 무지개 색으로 염색까지. 너무 멋질 것같은데?”

"아하하하! 마담싱즁!!”


우리가 수시로 나누는 웃음은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게끔 해줬다. 아주 잠깐이라도 웃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긍정적 태도와 여유가 암과 맞서는 약이었다.


빅토리아는 밤에 아르바이트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 가끔 전화를 하곤 했다. 밤에는 좀 ‘잔잔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 밤에 온 전화, 


"마담싱쥬, 나에요.”
"오, 세노랴! 어디에요? 일 끝났어요?”
"네. 지금버스기다리고있어요.”

빅토리아는 뜨문뜨문 오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집에 가려면 밤길에 한참을 걸어야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10시가 넘었다.


"세노랴, 피곤하겠어요."
"그래요, 하하하,  마담싱쥬, 나 하품하고 있어요."

밤에는 길에 차가 뜸하고, 정류장에도 사람이 없단다. 그냥 혼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심심해서 걸었단다. 키가 작아 정류장 벤치에 앉으면 다리가 땅에 닫지 않는 빅토리아, 아기같이 땅에서 발이 뜬 채로,  밤하늘 올려다보고, 지나가는 차 구경하고, 암 생각도 하고…나한테 전화를 한 거구나. 
암과 싸우는 상태에서도 고된 일을 해야하는 그녀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그럴 때일 수록 웃어줘야한다.


"저런! 세뇨라, 가방에 돈많이 넣어 갖고 다니는 당신이 이 야심한시각에 혼자 있어서 되겠어요?"

"하하하"

"혹시 누가 찝쩍거리면, 나는 암환자요! 하고 소리 질러요. 그리고, ‘암은 전염되는 병이오~!' 라고 겁을줘요. 알았지요? 암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미친 사람인줄 알고 도망갈 거에요.”
"하하하"


늦은 밤에 가슴에서부터 솟아나는 웃음을 크게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생각하며 설거지를 했다.


가끔은 진지한 소리를 하기 위해서 농담과 진담을 골고루 섞은 말폭탄을 투하해야할 때도 있었다. 

의사를 만나 수술을 받기로 하고 나온 직후에 주고받은 대화가 그랬다.

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옆에서 걷는 빅토리아가 말이 없었다. 차를 탔다. 말이 없이 운전만한다. 이상했다.


"빅토리아, 왜그래요?”


"마담싱쥬,  의사가…." 


빅토리아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의사가 내 자궁을 다 제거해야 한다고 했지요?”


"네."

"'그거'만 꺼내고 자궁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가?" ('그거' 는 '암'을 의미했다)

"네?!!!!"

"자궁을 다 꺼낼 필요는 없잖아요. 암만 꺼내지..” 


빅토리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놀라 펄쩍 뛰었다. 나는 암이 들어있는 자궁을 다 들어내는 게 기쁘다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빅토리아는 암때문에 자궁까지 들어내야한다고 슬퍼하고 있다니. 이제까지 어떤 일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빅토리아가 수술을 하게 되었으니 기뻐해도 모자랄 순간에 눈물을 보이다니. 


"자궁없는 여자는...."

빅토리아의 말을 못 이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목숨을 잃을까말까 하는 상황에서 자궁을 지키고 싶다는 거였다.

지난 해 대장암을 앓았던 이웃 다이앤이 생각났다. 암을 늦게 발견해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암이 다른 장기로 번지지 않아 창자의 일부를 제거하고 항암 치료를 받았다. 항암 치료가 끝난 뒤 검사에서 암이 깨끗이 제거되었다는 희소식을 전해듣던 순간 하늘에 무지개가 떴고, 우리는 부등켜안고 울며 기뻐했었다.


그런데 몇 주 후에 다이앤이 나에게 상의를 하러 왔다. 잘라낸 창자 대신에 몸 밖으로 소변과 대변을 받아내는 튜브가 연결된 조그만 플라스틱 백을 매고 다니는데 너무 귀찮고 번거로우며 ‘보기 좋지 않아서’ 인공창자 수술을 받고 싶다고 했다. 의사는 인공 창자를 달면 암의 재발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하며 잠시 유보하는 걸 권했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는 달고 싶다고 했다


"난 아직 젊어. 배변백을 달고 다니고 싶지 않아." 라고 했다.


나는 원래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조언하지 않는데, 그날은 다이앤에게 강력하게 인공창자를 달지 말라고 했다. 


"다이앤, 바로 얼마 전에 침대에 누워서 ‘내가 몇 년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울었던 거 생각나?  아이들 더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하냐며 울었지? 그런데 이제 간신히 살게 되니까 목숨갖고 도박을 하려고 하는 거야? 도박을 하려면 라스베가스에 가요! 가서 집도 날려먹고, 차도 날려먹고, 다 날려먹어요. 그러나 목숨갖고는 도박하지 말아요. 아니 인공창자 단다고 당신이 더 섹시하고 예뻐져요? 어디 미모 대회 나갈 일이라도 있어?” 


다이앤은 고민 끝에 인공창자를 아직은 달지 않겠다고 했다. (5 년 후에 달았다)


빅토리아가 자궁을 보존하고 싶어하는 것도 목숨걸고 하는 도박이란 면에서 다이앤의 경우와 다를 게 없었다. 하나 다르다면 다이앤이 여성적인 아름다움의 이유에서였다면 빅토리아는 문화적인 압력때문이었다. 수백년 내려온 자궁숭배 문화라는 엄청난 짐덩이를 진 채, 그게 아무짝에 쓸모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던져버리지 못하고 낑낑거리는 형국이었다. 암덩이를 제거하기 전에 그녀의 정신을 지배하는 문화의 암력을 절단해버리는 게 급선무였다.


빅토리아…  조용히 그녀를 부르며 나는 서서히 말폭탄을 던질 준비를 했다.

그 다음에 따다다다~~ 


"빅토리아, 자궁을 보존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당신의 암은 아주 전이가 될 가능성이 높은 아주 위험한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지금 배에 뭐가 들어있는지 우리 알잖아요. 

5 개월 태아 크기의 암이에요.

당신의 자궁은 암을 임신하고 있어요. 근종이 아니라, 암을!


바로 조금 전 당신 수술 받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생각나요?

아직 암이 퍼지지 않은 것같지만 그래도 수술을 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거라고, 수술 날짜 빨리 잡아주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감사했어요?

그런데 지금 그 자궁을 보존하겠다고 하는 거에요?


그 자궁 갖고 뭐하려고?


만약 당신이 20 대라면, 아니 30 대라면, 아니 40 대라면, 당신이 자궁 들어낸다고 슬퍼할 때 나도 같이 슬퍼할게요. 그러나 당신은 지금 54 세에요. 앞으로 아기 낳을 일 없어요. 

자궁을 갖고 있어봤자 아기생길 일은 없고, 다시 암을 임신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왜 자궁이 갖고 싶어요?”


그러나 나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빅토리아가 맞섰다.


"자궁이 있어야 여자니까요!" 


"오, 그래요? 누가 그래요? 왜 그렇대요?


빅토리아, 한번 생각해봐요. 우리가 팔 없는 사람보고 인간이 아니라 그러지 않잖아요.

다리 없어도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않잖아요.

자궁이 없는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여자가 자궁이 없다고 여자가 아닌 게 아니에요.


다리 없는 사람은 다리 없는 게 눈에 띄고 불편함을 겪기라도 하지, 자궁이 없다고 불편할 게 하나라도 있어요?  자궁이 없다고‘이 여성은 자궁이 없습니다’ 라고 이마에 글자가 뜨기라도 한데요?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게 어때서요? 당신은 자궁이 없으나 있으나 똑같은 사람이에요!” 


빅토리아의 무표정이 내 의견을 받아들이는 건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았다. 

다시 초강세 공격!


"빅토리아가 왜 자궁을 원하는지, 그 자궁갖고 뭘 하려는지 한번 생각해봐요.

거기에 꽃이라도 심을 거에요?”


빅토리아가 이 대목에서 프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일부러 비아냥거리는 톤으로 말했다.


"그래, 그 귀한 자궁, 길이길이 보존하시유. 

그 자궁 덕에 하늘나라 일찍 가시유.

하늘나라 가서 그 자궁 애지중지하면서 사시요.

암꽃 피운 나의 자궁~ 하면서…”


빅토리아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마담싱쥬!!!!! 우하하하하!!”


그렇게 험하게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빅토리아가 업고 있는 자궁숭배 문화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녀의 등에 얼마나 꽉 붙어있는지, 빅토리아를 마구 잡아 흔들어서 떨어트리는 방법뿐이 없었다.


빅토리아는 이내 정색하고 말했다. 자신은 한번도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냥 여자는 자궁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며, 자기 친구들도 그렇다고 했다. 한 집에 같이 사는 친구 로사 (멕시코계 미국인) 가 자궁에서 물혹이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발견한지 꽤 되었는데 혹시라도 자궁에 손상이 갈까봐 수술을 꺼린다고 했다며, 사실은 로사가 빅토리아의 자궁 수술을 걱정하면서 빅토리아더러‘암만 꺼내고 자궁은 보존할 수 없냐’고 의사에게 물어보라고 종용했다고 했다.


내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내 말에 동의를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여하간 빅토리아는 그 이후로는 자궁에게 굿바이~를 하는 것에 대해 마음 고생을 하지 않는 듯했다.



수술 일정을 정하기 위해 병원에 가던 날, 빅토리아가 운전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여러가지 생각으로 맘이 복잡한 듯했다. 갑자기 ""마담싱즁, 수술 담당이 제발 여자 의사였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나이 많은 남자 의사이던가.”라고 했다.


"나이 많은 남자 의사는 왜요?”


"젊은 의사보다는 나이 많은 의사가 경험이 많으니까…”


"경험 많은 사람이 좋다고요? 세뇨라랑 같이 잘 것도 아닌데 경험 많은 사람을 왜 밝힌데요?”


"마담싱즁!” (비난과 웃음이 섞임)


"난 제발 빅토리아한테 젊고 잘생긴 의사가 걸렸으면 좋겠어요.  빅토리아야 그냥 누워있지 나는 매번 의사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데 이왕이면 잘생긴 의사 보면 내가 좋지~~”


"마담싱즁! 그런소리를~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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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 암 진단을 받은 뒤 5 월 2 일 수술을 받을 때까지의 빅토리아의 여정은 체념과 우울에서 희망과 긍정으로의 생각과 태도의 전환의 과정이기도 했다. 암진단을 받은 직후, 그녀는 '평화'라는 가면 뒤에 자포자기, 절망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병원 일이 어떻게 진척되어 가고 있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마담, 전 마음이 평화로워요. 이상하리만큼 평화로워요." 라고 해서 내가 놀랐었다.


"평화라고요? 두려움이 없다는 건 좋지만, 평화롭다는 소실은 암 수술 끝나고 할 소리에요. 지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를 해요?" 라고 타박했다. 


그 후에도 몇 번,  빅토리아는 서류와의 숨바꼭질, 끝이 안 나는 수속에 지쳐서 ‘그냥 포기하고 싶다’ 고 했던 적이 있다. 땅에 주저앉아서 그런 소리를 했던 날도 있었다. 나는 마음이 아팠지만, 


"노, 빅토리아, 그렇겐 안되겠어요. 내가 들인 시간이 얼만데! 그거 계산해서 나한테 다 돈을 갚고 나서 포기하던가 해요!" 라고 농담했다. 다행히 나의 짓궂은 농담은 그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그녀는 "오. 마담!" 하더니 웃으면서 일어났다.


사회복지사, 의사, 간호사, 사무직원들이 도움을 주면서 일이 풀릴 조짐이 보이면서 빅토리아가 어느 오후, 나와 작별하기 전에 나를 껴안으면서 한 말이 있다.


"마담, 고마워요. 난 혼자였을 때 포기하려고 했어요. 모든 일이 다 꼬인 것을 보고 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평화롭게 끝내려고 했어요. 마담이 끊임없이 일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희망을 갖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약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강해졌는가를 말해줬다. 그녀가 부끄러워하면서 “혹시라도 수술하게 되면 같이 있어줄 수 있어요?" 라고 물었을 때 나는 강인한 의지를 보았고, "전 죽음이 약간 두려워요" 라고 할 때도 나는 죽음과 싸우려는 투지를 보았다. 


그녀가 그렇게 강해지기까지 큰 도움을 준 것은 우리가 수시로 주고받은 유머 덕이었다. 너무 힘이들어 마음의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할 때 툭 던져진 농담은 지팡이가 되어 우리가 넘어지지 않게 받쳐주었다. 또한 힘든 상황에 우리가 웃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를 더 낙관적으로, 그리고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웃음과 유머은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라 우리가 의도하여 택한 습관이었고, 정신력과 낙관적 태도가 필수적인 암과의 전쟁에서 가장 유용하고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수술 받기 전 날도 나에게 먼저 농담을 건 것은 빅토리아였다. 


내가 전화를 하니 하루 종일 맑은 스프와 쥬스, 차만 마시고 있다고 했다. 마음이 평화롭고, 모든 준비가 되었다면서 빅토리아가 농담을 던졌다.

"마담싱쥬, 나 죽을지도 몰라요. 뼈를 추리러 와줘요. 하하하!”


나도 질새랴 농담으로 받았다.


"네~~세뇨라, 그러나 나는 뼈에는 관심 없어요. 신선한 장기가 더 좋아요.”


"오, 마담싱쥬! 하하하하!”


그렇게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수술 직전에도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그리고 그녀가 수술을 잘 이겨낼 거라는 확신이 왔다. 






나는 한 간호사가 빅토리아와 나의 관계를 물었을 때 '우리 여성들은 서로에게 엄마 역할을 한다' 고 했었다. 내가 빅토리아를 도울 때 나를 도와준 친구들이 있었다. 몇몇 엄마들은내가 일이 늦게 끝나서 방과 후 시간 맞춰서 아이들을 데리러 갈 수 없을 때 기꺼이 아이들을 픽업해줬고 격려해줬다. 그 외에 빅토리아에게 직접 응원의 말을 전해주고 빅토리아의 힘을 덜어주려고 학교 일을 자원해 도와준 엄마들도 있었다.


우리 아이들 또래의 자매를 둔 비키는 우리 애들과 놀리면 자기가 덜 힘들다면서 아이들을 많이 봐줬다. 봄방학 동안에는 아이들이 집에 있는데 부모님께 종일 아이들을 맡기고 나가는 게 죄송해서 고민하니까 자기가 하루 아이들 4 명을 데리고 디즈니랜드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집은 몇 번 가본 적이 있고 우리 아이들은 한번도 안 가본 곳이었다. 이참에 한번 보내봐도 되겠다 싶었다.


그 전날 에밀과의 대화.


"에밀, 내일 아침에 제레미랑 코린이랑 디즈니랜드에 갈 거야."


"그게 뭐야?"


"디즈니랜드! 디즈니랜드 몰라?"


어떻게 이 당연한 것을 모르지? 우리가 디즈니랜드에서 30 분 거리에 사는데? 내가 안 데려간 것은 사실이지만, 디즈니랜드는 모든 이의 상식이 아닌가?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미키마우스, 신데렐라 등을 언급하니 에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 그거...그러면 스케이트 타야하는 거야? 난 싫은데...."


이건 또 뭔소리? 오...얼마 전에 학교에서 단체로 스케이트 쇼를 관람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디즈니 만화영화 주인공들의 분장을 한 스케이터들의 공연을 본 기억때문에 아이는 디즈니랜드가 아이스링크라 생각한 것이었다.


옆에 있던 꼴렛이 끼어들었다.


"엄마, 난 디즈니랜드 보다는 real 한 게 좋아. 공주님, 왕자님, 이런 이야기보다는 진짜 이야기가 좋은데...."


내가 큰 돈 지출하면서 선심쓰는 건데 황당한 상황이었다. 돈의 가치가 없는데 굳이 보내야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맘 편히 밖에서 일을 하려면 어딘가에 가는 게 필요한데....다행히 아이들은 제레미와 코린과 어디를 간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그렇게 그 흥분 속에서 아이들은 하루를 보냈다.


다녀온 뒤에 물어보니 제레미와 코린과 같이 논 게 그리도 좋았나보다. 


아이들이 디즈니랜드를 다녀온 날은 빅토리아에게서도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전문의를 만난 날이었다.

암울한 정보를 들었지만 꼭꼭 막혀있던 일들이 처음으로 풀린 날, 디즈니랜드로 100 불이 넘는 지출을 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우리를 도와준 많은 엄마들이 있었지만 빅토리아도 나도 우리의 실제 엄마들 덕에 용기를 잃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엄마를 모시고 사는 빅토리아는 엄마가 자기가 암에 걸린지를 전혀 모르게 한다고 했다. 엄마가 걱정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했다. 


나와 빅토리아가 자주 통화하고, 의사 이름, 병원 주소, 전화번호, 소셜 워커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니 마마가 이상하다 여길 수 있었다. 그래서 빅토리아더러 당분간 ‘마담징즁이 아프다’ 라고 하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전화를 할 때마다 마마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마담징즁, 코모에스타, 코모에스타?” (Madame Shinjyu, how are you? How are you?) 


자꾸 물으셨고  내가 아는 스페인어로는 '무이비엔'  (very good) 뿐이니, 나는 그저 무이비엔, 무이비엔 대답한다. 그러면 마마는 



"갓블레슈! 마담징즁, 갓블레슈!" 하시고 나는  "그라시아스, 그라시아스! 마마!”한다.


(마마는영어를못하고, 나는 스페인어를 못하니, 그저 아는 소리를 두 세번 씩 부르짖는다.)


내가 빅토리아와 전화 통화를 자주 하니 마마가 ‘마담징쥬'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시는 것같았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마마의 기도가 저에게 향했다면, 그것을 빅토리아에게 돌려주세요. 빅토리아 살려주세요!”


빅토리아가 살겠다는 의지는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서였다. 팔에 금이 갔을 때도 엄마한테 내색을 안했다고 하는 그런 ‘독종’ 딸의 엄마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이 깊었다. 조그만 둥지에서 단둘이 의지하면서 보듬어주는 모녀의 사랑, 그것이 빅토리아의 일이 잘 되어야만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내가 빅토리아 일로 한참 바빴던 2005 년 4 월, 예정대로 한국의 부모님이 방문하셨다.  부모님은 빅토리아를 만나적 없이 그저 나의 이야기로 들어 알고 있었다. 


엄마는 도착하자마자 ‘이번 미국행은 네가 빅토리아의 수술에 집중할 수 있게 돕자는 목적으로 온 것이니까 우리에겐 신경쓰지 말아라’ 라고 하셨다. 한국에서 도착한 뒤의 시차적응, 본인들의 식사와 산책 등 건강 관리를 열심히 해서 내가 신경쓸 일이 없도록 해주셨다. 


엄마는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아니! 내가 빅토리아를 간접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게 축복이다’ 라고 하면서 식사와 청소는 물론,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까지 다 해주셨다.


그뿐이랴 주말에는 내가 푹 쉬어야하니 아이들과 가까운 해변에 가는 것, 며칠 가족 여행 다녀오는 것도 다 생략하자고 했다. 딸이 잘 쉬어야 빅토리아를 위해 일할 수 있고, 딸에게 아무 부담 안 주는 게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빅토리아를 위해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는 이론이었다. 에릭은 가까운 곳으로 가족 여행 계획을 세웠지만 부모님의 단호한 반대로 취소되었다.


부모님의 이해 덕에 나는 맘 편히 ‘빅토리아 안 도와주는 귀신들’ 잡으러다닐 수 있었다. 부모님은 출국 일정도 빅토리아의 수술 직후로 잡으셨다. 내가 당신들 출국 준비에 마음을 쓰지 않게 해주고, 혹시라도 힘든 일이 있으면 나를 도와주려는 배려였다.


언젠가 내가 운 적이 있었다. 제니퍼 덕에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게 된 날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긴장이 풀려서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울어서 스트레스 푸는 스타일이라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하면서 찬송가 들으면서 신나게 울어재꼈다. (진짜 이 표현 말고 달리 할 길이 없음) 


집에 들어가기 전에 다 울어야지. 엄마 마음 고생 시키지 말아야지…


빅토리아가 마마한테 자기의 상태를 비밀로 하듯이 나도 나의 약함과 무름을 엄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나는 계속 울고 있었다. 

엄마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에구..힘들었구나. 빅토리아도 힘든 날이었겠구나. 가엾어라. 된장찌게 끓여놨어. 어서 밥 먹어라. 다 잘 될 거야. 염려하지 말아.”


수많은 여성들이 빅토리아와 나를 이끌어주고, 도와줬지만, 맨 마지막 나를 품에 안아준 것은 엄마였다. 내가 있는 그대로, 지친 그대로 안길 수 있어도 되는 엄마의 강함이, 엄마의 사랑이 감사했다.





이상한 자매애


리셉셔니스트, 간호사, 의사들은 우리를 보면 의아해했다. 우리는 어떤 공통점도 없는 관계였다. 빅토리아는 셔츠에 청바지, 아주 캐쥬얼한 차림이고 화장끼는 전혀 없었다. 그 옆에서 조잘거리는 호피무늬 코트에 와글와글한 긴 파마머리, 화장이 진한 동양여성, 우리는 ‘친구’가 가질 수 있는 공통 분모가 하나도 없는 것같았다. 나이, 인종, 언어, 스타일 모두 다르지만 항상 붙어다니는 우리는 마치 완전히 다른 성격과 스타일의 두 형사가 활약하는 영화—버디필름 (Buddy Film) 의 주인공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호피무늬 아줌마가 매니저처럼 가방에 빅토리아의 모든 병원 기록과 서류들을 다 관장하고, 생년월일, 주소, 전화번호, 운전면허증 번호까지 척척 나오니 의아해했다. 우리나라 주민증 번호처럼 중요한 소셜 시큐리티 번호는 내가 한국어 암호로 ( ‘육-육-삼-오-구—“ ) 외워서 기입하는 모습을 보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채혈을 하던 필리핀계 간호사는 궁금증을 못참고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우리의 관계가 뭐냐고. 처음에는 친구같지는 않고 엄마와 딸인가 했는데, 나이차이가 많이 안나고, 언어와 인종이 다르고, 둘의 스타일이 너무도 달라서 도저히 종잡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엄마에요, 엄마!”


그녀가 혼란에 빠지기 전에 금방 이어 말했다.


“우리 여성들은 항상 서로서로에게 엄마 역할을 하잖아요?”


간호사가 ‘맞아요!’ 하며 방긋 웃었다.


우리의 ‘이상한 관계’가 준 잇점은 한번 본 사람은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나도 우리에게 도움을 준 은인들을 잊지 못한다.




햇필드 선생.


의사 햇필드 선생은 빅토리아 검진을 한 뒤에 당신들은 어떤 관계이냐고 물었다. 


“빅토리아가 저에게 중요한 친구에요. 암 수술 받을 수 있게 같이 다니는 중이에요”  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친구들이 서로 돕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요” 라고 미소지었다.


그녀는 눈 앞에서 해야할 일만 하고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과 달리 설명을 잘 해줬다. 빅토리아는  MMMT Malignant mixed Mullerian Tumor) 의 케이스인데 그것은 폐경기 이후에 나타나는 희귀한 종양으로 악성세포들고 구성되어 있어 악성도가 매우 높고 여러 장기로 전이될 가능성이 크다는—으시시한 소리를 해줬다. 위급한 상황이고 신속하게 일처리를 해야한다고 하며, 자기가 서류 제출을 했지만 혹시라도 진전이 없으면 자기에게 다시 연락을 하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이 지나도 서류 수속은 진행되지 않았고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빅토리아라는 환자의 건으로…” 하고 소개를 하다가 시간 절약하기 위해, “멕시코 환자와 같이 왔던 한국인인데~~” 라고하니 그녀는 담박 기억해내고는 그 자리에서 당장 팩스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는 그 결과 --‘다음주에는 전문의를 만날 수 있습니다”--를 나에게 직접 알려줬다. 



또 하나의 은인은 제니퍼.


시티스캔을 할 수 없었을 때 도움을 준 여성이다.  처음 조영실에 도착했을 때 직원은 서류가 미비하다면서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의사가 보내준 허가서인데 왜 안되냐니 자기는 모른다면서 그리 급하다면 돈을 내고 하라는 매정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근 1000 불 정도의 액수였다) 우리는 낙담해서 한 두 시간 정도 병원 카페테리아에 가서 마음을 가다듬어야했다. 


무든 이유에서인지 나는 다시 조영실에 가보고 싶어졌다. 빅토리아에게 다시 한번 부딛혀보자고 했다.  두 시간 전에 안된다고 했던 일이 될 리가 없지만 그냥 한번 다시 시도해보고 싶었다. 


다른 직원이 앉아 있었다. 제니퍼라는 맑은 눈의 직원은 쉰 목소리로 내가 장황하게 늘어놓는  기구한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더니 뭔가 같이 확인해보자면서 같이 나가자고 했다. 건물을 나와 주차장을 건너 다른 건물로 가서 한 사무실로 우리를 데리고 가더니 직원에게 내 대신 모든 서류를 꺼내놓고 설명을 해달라고 했다. 직원은 서류를 살피고 몇 군데 전화를 하더니만 ‘아! 알았다!” 라 소리쳤다. 우리는 비로서 우리가 몇 달 동안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던져졌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빅토리아가 신청한 서류는 오렌지 카운티의 고유의 긴급한 의료 상황에 처한 19-64 세의 빈곤층, 합법적 거주자를 위한 의료 혜택 프로그램을 위한 것이다. 카운티는 그녀에게 보험증을 주고 치료를 허가했지만 —-그게 우리가 들고다니던 허가서—지금까지 빅토리아가 만난 의사와 각종 의료진은 — 응급실부터 시작해서— 모두 얼바인 대학 병원 시스템에 속해 있어서 일어난 문제였다. 이제 남은 것은 얼바인 병원에서 빅토리아를 혜택을 받는 환자로 받아줄지 아닐지를 결정하고 승인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설명과 즉시 직원은 즉시 빅토리아가 위중한 상황이며 신속히 대처해야한다는 이멜과 팩스를 다른 사무실에 보냈다. 그 직원은 이후로 빅토리아가 허가서 없이 갈 수 있는 병원들과 lab 의 리스트를 뽑아 줬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한다면서. 


그 순간부터 모든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우리 옆에 내내 서있던 제니퍼는 자기 일인양 기뻐했다. 

우리가 주차장을 돌아 원래 건물로 돌아가는 길에 제니퍼는 ‘잠깐만요’ 하더니만  옆의 큰 길에서 방향을 못잡아  헤매는 운전자에게 다가가서 길을 알려줬다. 여전히 친절히. 


나는 나의 궁금함을 억제하지 못하고 물었다.


“맨날 이러세요?”

“무슨 소리에요?”

“당신은 항상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나요?”


그녀는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도움이 필요한 게 보이니까 그걸 하는 거라고. 별거 아니라고. 사실 병원 조직이나 건물이 아주 비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시스템을 모르는 사람들은 고생을 하는 것같다고. 자기는 빅토리아와 같은 처지의 환자를 처음 보았고, 앞으로 이런 경우가 생길 때에 대비해서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 알아두고 싶었다 했다.


제니퍼와 헤어지기 전, 그녀는 우리에게 허그를 해주며 말했다.


“포기하지 마세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환히 웃고 헤어지면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마음 속에 담았다. 10 년이 지나면서 그녀의 얼굴을 흐릿하지만 시원하고 선한 그녀의 눈매와 이름은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의사 에브라힘 D 선생


이브라힘 선생도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 은인이다. 빅토리아의 CT 스캔의 결과를 읽어주고 빅토리아가 신속히 수술을 받게 도와주었다. 그는 거주자의 대부분이 멕시코계인 도시의 조그맣고 허름한 산부인과 병원의 병원장이다. 그를 처음 만난 날, 그는 시티 스캔의 결과와 각종 서류들을 재빨리 훑더니만 이란어 엑세트가 강하게 묻어나는 영어로 


“좀 더 일찍 왔어야지요” 라고 했다.


우리는 그 순간 긴장했다. 뭔가 크게 잘못되어있는가…


“암덩이가 무척 크네요.”


그의 목소리는 끔찍한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를 단조로운 톤으로 서술하는 나레이터마냥 담담했다.


“5개월 된 태아의 크기입니다."

나는 그의 비유에 경악했다. 어떻게 암의 크기를 태아의 크기로서 이야기를 하나?! 한편으로는 산부인과 의사는 매일 자궁의 태아의 크기를 관찰하는 사람이니, 빅토리아의 자궁 안에 있는 이물질--암--의 크기도 평상시에 하는대로 태아의 크기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는 빅토리아가 수술을 빨리 해야한다고했다.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자궁을 ‘열어보기 위해서’ 즉, 수술을 위해서 큰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저는 산부인과 의사이지 암 전문의가 아닙니다. 간단한 수술이면 우리 병원에서도 할 수 있지만 암수술은 못합니다. 아니, 수술을 한다해도 수술 후의 항암치료 시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큰 병원의 암전문의를 만나서 수술하고 필요하면 항암치료를 받아야합니다.”


우리는 둘 다 동시에 아....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빅토리아의 고개가 푹 떨궈졌다. 이제까지 의사를 찾는 것도, 만나는 것도 힘들었는데 또 암 전문의를 찾아야한다니. 


우리의 허탈한 표정을 보더니 의사가 푸념같이 들리는 소리를 했다.


"어쩌겠습니까...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본주의 사회이니..." 


그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다 돈보고 일하니 빅토리아처럼 극빈자 보험을 가진 사람이 수술을 할 경우에는 국가에서 지불하는 보험 액수가 적고 절차가 까다로워서 의사들이 꺼려한다고 했다. 100불을 받아야할 수술인데 10 불만 받는 격이고, 암수술은 중대한 수술인데 돈도 제대로 못받고 수술을 했는데 혹시라도 잘못되면 소송이나 걸릴 수 있으니 어떤 의사가 좋아하겠냐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아는 암전문의에게 전화를 해주겠다고 했다. 만약 그사람이 빅토리아를 받아주면 다행이겠으나 혹시 안된다면 우리가 직접 암전문의를 찾아야한다고 했다. 그다음에 한 소리가 너무도 고마웠는데--혹시 수술실이 필요하다면 자기 병원을 제공할 수 있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노라고 제안했다.


나는 의사의 입에서 ‘자본주의 운운’ 하는 소리를 들으니 신기했다. 게다가 무뚝뚝한데 하는 소리마다 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다.


그날 오후 우리는 뉴포트비치의 병원의 의사와 연락이 되었다. 위급 환자라고 의사와의 미팅을 이틀 후에 잡아 줬다. 


4 월20 일.  수요일.


암전문의의 사무실에 들어가는 순간 유리로 둘러싸인 사무실의 밝음에 눈이 부셨다. 밝은 방에는 밝은 기운이 넘쳐 흘렸다.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환히 웃으며 반겨주는 직원, 지나치는 간호사, 다 친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평상시처럼 여러 서류를 보여주고 설명을 하려는데 사무직원이 그럴 필요 없다면서 환히 웃었다.


"서류는한장만필요합니다. 허가서 한 장."

"허가서는스페인어로되어있는데요, 영어 서류를 못받아서.."

"상관없어요(방긋!) 날짜만 확인하면 되거든요(더 예쁜 방긋!)."

방긋방긋 웃는 사무직원의 미소가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한편으로는 맨날 구박덩이에 싸움쟁이

역할만 하던 우리가 이렇게 환대를 받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의사가 들어왔다.

젊고 활기찬 의사였다. 휘르르~~ 차트를 훑는 모습마저 젊음과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이미 빅토리아에 관해서 다 알고 있었다.


“수술을 빨리 해야겠습니다."

아, 저 박진감, 추진력이라니!


“무슨 일이 있어도 2 주 내로 수술할 것입니다. 아마 자궁을 다 들어내야할 것입니다. 수술은 바로 옆 종합건물 병동에서 할 것이고요. 잠시 후에 복도 끝 방의 재닛이라는 사무직원이 구체적인 설명을 해줄 것입니다.”


뭐든지 일사천리였다. 너무도 고맙고 신기했다. 이제까지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동분서주 다니던 게 과녁을 어디에 맞추어야하는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양궁 선수와 같았는데, 이제 우리는 정확히 목표물을 향해 활을 당기고 있었다. 수술이라는 그 과녘을 향해! 


의사는 방을 나가다가 말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나더러“당신에게 감사합니다. 당신은 아주 좋은 친구입니다” 라고 하고 빅토리아에게도“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 하였다.


의사가 나가자마자 빅토리아와 나는 손을 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수술을받게된거야?!   맞아! 꿈같다!  와. 안믿어진다!!


닥터 이브라힘의 덕이었다. 그는 나와 빅토리아가 마치 도랑에 박힌 차 처럼 꼼짝않는 차를 어떻게든 꺼내보려고 애를 쓸 때 나타나 차를 도랑에서 빼줬음은 물론, 기름까지 넣어주어 잘 갈 수 있게 해주었다.


(참고--빅토리아는 10 년이 지나서 요즘도 닥터 이브라힘에게 진료를 받는다고 한다)




‘암’이 맺어준 우정


나는 2004 년,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유치원 유치원에서  청소부/요리사로 고용된 빅토리아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나보다 10년 연상이지만 항상 밝고 유머센스 있고 다정해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고 나와도 예의를 갖추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2005 년 1 월, 유치원이 개학한 뒤 며칠 후 어느날 아침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가는 길에 부엌을 지나치는데  조리대 앞에 서 있던 빅토리아가 넋나간 표정이었다. 심상치 않아 보여 그녀에게 아무 일 없냐고 물었다.그녀는 여전히 넋나간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저한테 암이 있답니다" 


그녀는 ‘주말에 하혈이 너무도 심해서 달려간 응급실에서 생각지도 못한 암 진단을 받았다. 전문의를 만나서 정밀 진단을 받아야하고, 보험이 없어서 극빈자 보험을 신청했다’고 했다, 나는 노령의 어머니를 모시며 직장 두 개를 다니면서 근근이 생활하는 중에 암 선고를 받은 그녀가 너무도 딱했다. 어서 정밀검사 받고 수술을 받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빅토리아는 그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성실하게 유치원 요리사, 청소부의 일을 해냈다. 나는 일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함부로 묻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다가 얼마 지나서 빅토리아에게 어떻게 되어가고있는가 물었다. 놀랍게도 나와 대화를 나눈 뒤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아니, 더 안좋은 상태였다.  보험 신청서가 분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담당자가 자기에게 전화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단다.


나는 펄쩍 뛰었다.


"빅토리아,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안돼요. 어서 전화해서 서류처리를 요구해야 해요."

“마담싱쥬, 제가 할수있는 일이 뭐가있겠어요. 전 마음이 편해요.”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요!  어서 서류접수를 해서 의사 만나고 수술 받아야지요!”


그렇게 다구쳤지만 빅토리아의 상황이 이해가 갔다.  아침 7 시에 출근해서 유치원 학생들의 간식과 점심을 준비하고 청소를 하느라 바빠 노상 전화기를 붙들고 있을 수도, 전화를 하겠다고 근무 시간에 자리를 비울 수도 없다. 하교 후에 청소를 하고난 뒤에 곧바로 다른 직장으로 가 일을 하니, 낮에는 일하느라 바빠서, 저녁에는 병원이랑 관계 기관 사무실들이 닫혀서  전화를 걸 수가 없다.


당장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암과 싸우겠다는 용기와 의지’가 아니라, ‘전화를 걸 시간’이었다. 

실없는 소리같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한번만이라도 도와주자 하고 빅토리아가 요리하는 동안 전화기를 잡았다. 자동응답기가 나와 메시지를 남겼으나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받기를 바라면서 30 분간 쉴 새없이 전화번호를 눌렀다. 마치 동전 넣고 인형 꺼내는 게임--성공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엄청난 집중과 인내를 요구하는 게임--을 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받았다. 당장 빅토리아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직접 통화하라고. 그러나 빅토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고 서류 분실에 대해 따지지를 못했고, 상대방은 ‘고상하게’ 발뺌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빅토리아에게 수화기를 달라고 해 상대방에게 내 신원을 밝히고 설명을 요구했다.


담당자는 나에게 서류가 분실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서류가 너무 많다보니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했다. 그 다음말이 날 경악케했다. “서류 분실은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두고 이렇게 무심하게 이야기를 하다니! 물론 이해한다. 그들이 매 환자들의 서류 하나하나를 신경쓸 수 없다. 절박한 환자들이 흥분해서 전화할 때 일일이 친절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음도 안다. 또한 너무도 많은 환자들을 다루니 환자들의 절박한 상황에 무감각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무감각하지 않은 척, ‘ 즉  ’암환자의 상황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들이 최소한의 포로페셔널 예의가 없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청서는 분명히 제출되었는데 당신들이 모른다고 하면 우린 뭘 어떻게 해야합니까?' 


라고 따졌더니 담당자는 '제가 보호자도 아닌 당신께 설명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라고 발뺌하더니만 한술 더 떠 “위급한 상황도 아닌데 왜 그러냐" 라고 짜증을 냈다.


나는—- 이럴 경우에는 폭발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폭발했다.


"지금 농담한 거지요?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합니까? 암환자를 두고? 이 환자의 암세포가 얼만큼 큰지 압니까? 암이 번지고있는지 아닌지 봤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수술 받아야하는 판인데 그렇게 무심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환자를 도와주는 게 당신들의 임무 아닙니까?" 


나의 격앙된 어조에  쌀쌀맞던 그녀는 당황했다. 자기에게 며칠을 주면 분실된 서류를 찾아보겠다고 하더니, 오늘 내로 하겠다고 하더니만, 아니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같다며 월요일까지 하겠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네, 감사합니다! 월요일!! 좋습니다’ 라는 마음이었지만 겉으로는 차갑게 ‘ 감사하다. 가능한한 빨리 해달라.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 당신이 보내는 서류 접수를 담당할 직원의 이름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전화를 나눈 시간과 통화 내역을 기록해두겠다' 고 했다.


빅토리아는 점심 준비로 왔다갔다 하면서 내 통화 내용을 들었다. 이제까지 내가 화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빅토리아는 내 격앙된 어조에 많이 놀란 듯했다. 말없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마담 싱쥬, 고마워요” 라고 하며 뺨을 대며 껴안아줬다.


나는 전화를 한 뒤에 다시금 깨달았다. 당장 밥벌이를 하기 위해 바쁜 빅토리아가 암과 혼자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전화하고, 팩스 보내고, 이멜하고, 질문하고, 받아적고, 확인하고—-하는 일들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힘들지만 내가 나의 생활을 어떻게 정리하냐에 따라서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빅토리아, 내가 도와줄께요. 수술 받을 때까지 같이 싸워요.” 라 제안했다.


그렇게 나는 빅토리아의 비서이자 매니저가 되었다. 나의 편의와 내가 상대해야하는 많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빅토리아에게 필요한 서류와 인적사항, 병력, 전화번호 목록을 정리했다. 어떤 사무실이든 전화를 하면 통화 내용과 시간을 기록하고 담당자 이름도 기록했다.



미궁과 같은 의료 시스템.


빅토리아가 의사를 만나고 (2 달 걸림), 전문의를 만나 수술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진단에서부터 넉 달 걸림) 빅토리아와 함께 여러 노력을 하면서 나는 과히  친절하지 않은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되었다.  극빈자프로그램이 존재하며, 그 프로그램에 속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정말 고맙게도—-의사들과 간호사들이 극빈자 환자를—-가난한 사람을!—무시하지 않고 깍듯이 존중해주는 것은 깊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시스템의 덩치가 커서 그런지 일이 한번 꼬이면 (빅토리아의 경우처럼) 그것을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익명성 사회의 병폐, 테크놀러지라는 허울좋은 '편리' 로 인한 폐해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정보가 친절하게 제공되어 있는 경우도 연락처가 없다던가, 팩스, 전화번호가 있으면 주소 대신 '우편함 번호'만 나와 있었다. (주소가 없으니 직접 방문해서 올바른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씨름하는데, 전화를 걸 때마다 담당자가 바뀌니 똑같은 설명을 반복해서 하여야하고, 전화통화 대신 팩스로 보내라 해서 팩스를 보내면 그 사이에 담당자 근무 시간이 바뀌어서 팩스를 다시 보내라는 소리를 하고, 팩스 못 받았으니 사무실로 전화를 해라....이런 도돌이표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화 통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이멜을 많이 사용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기의 책임의 경계가 확실한 경우에 일을 철저히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설렁설렁 모호하게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내가 전화를 통해 운좋게 어떤 정보를 얻었다할지라도 몇 시간 후에 그 사람 대신 앉아 있는 사람과 통화를 하면 완전히 다른 소리를 했다. 그러므로 나는 중요한 일은 꼭 서면으로 기록을 남기고 서면으로 대화를 하려고 했다. 법정 소송이 많고, 소송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 나라에서는 그렇게 문서로 기록을 남겨두는 게, 그리고 상대방이 그것을 알게 하는 게 일의 정확하고 빠른 진전을 위해서 필요했다.


황당한 일도 여러번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나는 일은 ‘피검사 사건’이다.


빈자 보험 카드를 발급 받은 뒤에 피검사, ct 스캔을 ‘당장’ 해야한다는 의사의 검진 뒤 그녀의 보험카드가 적용되는 곳은 다른 병원이라고해서 서둘러 갔다. 피검사 신청하고 빅토리아가 팔뚝을 내놓고 피뽑을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밖으로 나왔다. 대기실에 앉아서 그 다음에 ct 스캔을 위해 가야할 방 번호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빅토리아가 뛰어왔다. 


‘마담, 여기좀 와봐요!’ 


달려가보니 나이 지긋한 간호사가 이 병원 환자가 아니므로 피를 뽑아줄 수 없다고 했다. 의사가 보냈다고 이야기를 해도 통하지 않았다. 내가 들고다니던 진단기록 등을 보여주면서 이 병원 응급실에 들어온 적이 있고 환자 번호도 있다고 하며 어디든지 가든 우리에게 서비스를 거부당하는 우리의 딱한 처지를 설명했다. 그녀는 컴퓨터 몇 대를 오가면서 꼼꼼히 살피더니만 ‘이번만 해줍니다. 이분은 우리 병원 환자가 아니에요. 원래 해줄 수 없는 건데 이번만 해주는 겁니다. 환자에게 확실히 설명해주세요’ 라 하였다.


피뽑기 허들을 잘 뛰어 넘었다 했더니만 ct 스캔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친절한 담당자는 규율때문에 해줄 수 없다고 ‘처방전’을 받아오라 했다. 빅토리아의 의사가 준 처방전은 효력이 없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또 어디가서 허가서를 받아와야한다는 거지? 암의 크기를 알려줄 ct 스캔을 하라는 허락을 받는데 두 달이 넘게 걸렸는데 이제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말이니. 마치 손에 쥐어졌던 풍선을 누군가가 낚아채어 하늘로 보내버리는 것같이 허무했다.


다행히 한 간호사가 우리를 도와줬고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되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참 이상했다. 우리가 뭘 몰랐을 때는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었다. 빅토리아 담당 소셜 워커도, 간호사도, 사무직원도 의사도, 다 손을 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정보를 확실히 얻고 요구를 하니까 이제까지 아무도 몰랐던 문제가 갑자기 다 아는, 뻔한 사실로 둔갑하는 것같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한 조각이 없어서 완성될 수 없었던 골칫거리 퍼즐이 다 맞춰지는 것같았다. 


숱한 사연을 거쳐 한 ct 스캔의 결과를 들으러 의사에게 간 날은 4 월 18 일, 암 진단을 받은지 석 달 후였다. 담당 의사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의사는 왜 이제야 왔냐고 야단쳤다. 마치 우리가 게을러서 시티 스캔을 받지 않기라도 한 양. 그러나 그런 꾸짖음도 달기만 했다. 빨리 수술을 하라는 이야기니까. 빅토리아는 4월 25 일 수술신청서를 내고 5 월 2 일 아침 수술을 받았다.


빅토리아가 암 치료를 받기 위해 투쟁하던 시기에 미국에서는 ‘테리 시아보’ 논란이 한창이었다. 테리 시아보는 심각한 뇌 손상으로 15 년간 튜브로 영양공급을 받고 있는 환자로, 그녀가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뜻을 밝혔었다고 주장하며 회생이 불가능하니 튜브를 제거하자고 하는 그녀의 남편에 맞서 그녀의 친정부모는 딸이 깨어날 가능성에 있다고 주장해 장장 10 년간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결국에는 연명치료, 존엄사, 죽을 권리, 살 권리등 여러 이슈를 둘러싸고 플로리다 주지사, 대법원, 대통령, 연방의회, 교황청까지 개입했는데 플로리다주 대법원이 영양공급장치를 제거하라는 명령이 3 월 중순에 내려졌다. (참고로 그녀는 튜브를 제거한지 2 주 후, 3 월 31 일 사망했다)


빅토리아와 여러 사무실을 전전하면서 테리 시아보의 기사를 접할 때마다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살 권리만큼 중요한 죽을 권리, 누가 누구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테리였다면? 내가 테리의 부모라면? 내가 테리의 남편이라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이 질문거리만 떠올랐다. 동시에 테리와는 너무도 다른 처지의 빅토리아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금방 손을 쓰면 살 가능성이 있는 암환자 빅토리아, 살려는 의지가 확실하고,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는 그녀가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게 왜 이리 어렵단 말인가.

당시에 또 하나의 사건은 요한 바오로 2 세 교황의 선종이었다. (2005 년 4 월 2일) 빅토리아 보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나는 성베드로 대성전 중앙에 안치되어 공개된 교황의 시신을 보면서 그분의 위대한 삶을 생각하기보다는 ‘교황님은 보험때문에 고생 안 하셨겠지?’ 라는 말도안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누운지 며칠 안되어 나는 도우미 없이는 아버지를 돌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목욕할 때 아버지의 안전을 위해서는 힘이 좋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도우미는 어떻게 구하는 거지? 찾아보면 정보를 얻을 수 있겠으나 나는 당장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빅토리아가 떠올랐다. 그녀는 멕시코 출신의 미국 시민자로서 10 여년 전 아이들이 다니던 유치원의 청소부/요리사였다. 연락없이 지내다가 전화하는 것도, 요양 도우미 경험이 없는 그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세뇨라, 혹 요즘 바빠요? 요즘 우리 집에 일이 있어서 도움이 필요한데, 물론 돈을 지불할 것이고요….”

빅토리아가 나의 말을 막았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가 언제 갈까요?"


너무도 고마웠다. 내가 찬찬히 설명하고 시급을 이야기했다. 내가 가격을 이야기하자마자 그녀는 ‘네!’ 하고 대답했다. 그녀가 너무도 빨리, 긍정적인 대답을 해서 나는 적지않이 놀랐다. 속으로 빅토리아가 요즘 돈이 궁한가? 그래서 힘든 일이라도 당장 하려는건가? 싶었다.


몇 시간 후  그녀가 왔다.  아버지께 공손히 인사를 한 뒤에 그녀는 나를 도와 아버지 스폰지 목욕을 했다. 목욕이 끝난 뒤에는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조용히 아버지 방을 정리하고 바닥을 물걸레로 닦았다. 2 시간 동안 많은 일을 한 뒤에 퇴근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나와 함께 했다.


아버지가 침대신세를 지면서도 3 년간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를 친아버지인양  헌신하며 섬긴 빅토리아 덕이다.  3 년 동안 그녀는 자기가 맡은 일을 100 퍼센트 수행함은 물론 내가 언제든지 어떤 도움이든 청할 수 있는 그런 든든한 백업 일꾼이었다.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하는 그녀의 열정에 나는 가끔 언성을 높여가면서 그녀가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막아야했다.)  


간병 도우미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빅토리아의 삶의 중심은 그녀의 교회와 아버지의 수발이었다.  우리는 시간 계산, 돈계산을 정확하게 했는데, 빅토리아는 조금이라도 더 머물면서 일을 하나라도 더 하려고 했고 내가 요구하지 않은 일을 찾아서 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고마워하면서 동시에 빅토리아가 돈이 궁한가보다 추측했다. 은퇴한 뒤에 연금이 많지 않으니까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는 거 아닐까?  아니면 아버지가 없는 그녀가 나의 아버지께 각별한 정을 느끼는 것일까? 


나를 더 헛갈리게 하리라 작정을 하기라도 한 듯이 그녀는 일을 시작한지 몇개월 후에 나에게 제안했다.


“마담징쥬, 일주일에 하루는 에릭과 데이트를 나가세요. 그날은 제가 ‘아부지’를 혼자 돌볼께요. 내가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데이트 나가는 날은 제가 무보수로 일할께요. 저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줘요.” 라고 했다.


빅토리아가 돈이 궁해서 간병도우미 일을 덥썩 잡아서 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녀의 제안이 이해가 안되었다. 여하간 그런 제안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빅토리아, 우리는 비즈니스 관계에요. 고용주를 버릇없게 만들면 안돼요. 절대로 공짜로 일해주면 안돼요 그런데 그 마음은 너무 너무 너무 고마워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버지를 돌본다는 게 나에겐 정말 큰 격려에요.” 라 했다.


한 1 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빅토리아가 왜 우리집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 목욕이 끝나고 같이 정리를 하는 중, 빅토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기 친구들이 ‘왜 너는 60 중반에 간병 도우미라는 힘든 일을 시작하느냐’ ‘그 한국인 할아버지가 뭐라고 그렇게 정성을 다하느냐’ 라고 묻는다고 했다. 나도 궁금해하던 일이었다. 그래서 “왜 그래요?’ 하고 물었다.


빅토리아는 나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슬쩍 흘리듯이 말했다.


“제가 친구들한테 이야기했어요. ‘옛날에 그 할아버지의 딸이 나의 생명을 구해줬어.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그녀를 도와줄 차례야.’”


깜짝 놀랐다. 돈이 궁해서가 아니었구나! 자기 아버지의 정이 그리워서도 아니었구나!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었구나. 그녀의 마음 속에 ‘은혜를 갚는다’ 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상상도 못했던 나는 깊이 감동받았다. 그녀는 돈이 궁해서 덥썩 일을 시작한 게 아니었고, 오히려 나와 맺은 비즈니스 관계는  내 마음이 편하게 하면서 나를 도와주려는 그녀의 배려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든든했다. 아버지를 나와 같은 마음으로 돌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천군만마를 얻은 것같았다.


빅토리아가 내가 그녀의 생명을 구해줬다고 하는 일은 2005 년의 일이었다. 그 사건으로 우리는 운명공동체가 되어 깊은 자매애를 쌓았다. 그 이후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갔고 자주 만나지 못했다가 10 년 후 아버지 일로 다시 만나게 되어  다시금 운명공동체가 되어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연합하여 노력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예전에 빅토리아에 관해 쓴 글들을 찾아보았다. 지금 이 글의 기초가 된 나의 옛날 블로그/일기를 찾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글을 잘 보관하지 않았을만큼 그때의 사건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었다. 빅토리아에게 내가 우리의 자매애의 이야기를 글로 써도 되냐고 물었더니, ‘물론이지요! 그건 우리의 이야기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단지 제 이름만 바꿔주면 됩니다’ 라고 선선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