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을 나갔다. 날이 흐려도, 추워도, 심지어 비오는 날조차도 산책을 나갔다. 침대에 종일 누워계시는 아버지에게 바깥 바람을 쐬는 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었다.

 

아무리 호수가 좋다고 하지만 흙길이 아니고 나무들도 많지 않으며 약간 훵~ 하고 트인 심심한 곳이라 일년 내내, 매일 가면 좀 싫증날 수 있지만, 아버지께는 아니었다. 산책에서 나갈 때도, 돌아올 때도  아버지의 얼굴은 화색이 돌고, 눈이 빛났다.

 

"아버지 오늘 산책 어떠셨어요?"

 

라고 물으면 도대체 감당이 안되게 감격스럽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저어가면서

 

"아....! 너어--무 좋았어."

 

하시고는 당신이 본 것을 이야기해주셨다. 오늘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날씨가 너무도 좋았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서 쾌적했다. 호수 건너편에 heron 새 한 마리가 혼자 있었다. 거북이 여러마리가 대화를 하는 듯했다. 오리새끼들이 자그마치 8 마리가 되더라. 부모 오리가 두리번거리면서 아기 오리들을 지키더라. 분홍 부츠를 신은 듯, 발이 분홍색인 오리를 처음 보았다....아버지의 눈은 작은 생물의 움직임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게 경이로운 것이었다.  아버지는 단조로운 산책로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곳곳이 보물이 숨어있었고, 산책은 일종의 보물찾기였다. 

 

나는 아버지가 흥분해서 본인이 본 것을 나눌 때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가 떠올랐다. 밖에서 놀던 아이들은 흥분해서 '엄마! 엄마!' 나를 부르며뛰어들어와 자기들의 발견을 같이 나눴다. 개미가 빵가루를 옮기고 있다고, 아가 토끼가 뛰어가는 걸 봤다고, 천천히 움직이는 달팽이를 지켜줬다고 옆집 개를 쓰다듬어 줬다고. 도마뱀이 빨리 도망가더라고...아이들은 바쁜 현실에 찌들어있는 이 엄마가 지나치는 자연의 세세한 여러 모습을 놓지지 않았다.

 

자연은 항상 새로운 놀잇거리가 기다리고 있는 놀이터였다. 자연을 대상화하고 사진을 찍어대고 감탄하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놀 수 있는, 거의 본능적인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즐겁게 함께 놀 수 없는 대자연/멋진 경치/ 유명한 관광지는 큰 의미가 없는 듯했다. 나는 그것을 그랜드 캐년에 데리고 갔을 때 알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멋진 장관을 보여주려고 돈들여, 시간들여 계획해 데려갔건만 아이들은 거대한 병풍같은 그랜드 캐년의 파노라마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

그러나 아이들이 반짝 신났던 순간이 있다. 그랜드캐년의 휴게소 뒤의 풀숲에서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던 다람쥐와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내가 다다가니까 아이들은 마치 내가 다람쥐를 잡아먹으려는 짐승이라도 되는듯 긴장해 "엄마, 얘가 우리랑 이야기 나누는 중이니까 방해하지 마!"  라고 했다. 나는 오랜 시간 운전해서, 비싼 돈 들여서 온 여행의 결과물이 다람쥐랑의 대화라는 사실이 허탈하기도 했고, 다람쥐와친구를 맺고 좋아하는 아이들이 신기해보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연의 작은 생명체와 현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신나서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엄마의 마음으로 들어드리곤 했다. 아버지는 참 어린이같았다. 언젠가 사막 여행 중, 아버지가 선인장 가시에 찔리는 일도 생겼을 때였다. (사진을 찍던 나는 설마 아버지가 선인장 가시를 만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셔터를 눌러 그 순간을 잡았다..)

 

 

온 가족이 다 멈춰서서 아버지 손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실같이 얇은 선인장 가시를 뽑아야던 중, 엄마가 아버지를 책망했다.

 

"아니, 왜 선인장 가시를 만지세요?"

 

아버지는 "너무 예뻐서 만져보고 싶었어" 라고 대답했다. 

 

"아유...어린애처럼, 그걸 꼭 만져봐야해요?"

 

그게 아버지였다. 어린애와 같은 호기심으로  자연을 만나던 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그와 사물을 새롭게 발견하게 됨은 물론, 동시에 아버지가 뭐든 경탄하고 신기해하고 감사해하는 모습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니, 일거양득이었다. 

침대 신세를 진 3 년간도 아버지는 항상 새롭게 뭔가를 발견하고 경이로워했다. 나는 아버지 덕에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였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유년기, 자연, 워즈워스

 

아버지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을 즐기는 아이들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분명한 차이점은 있다. 무아지경으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 노는 어린이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그 무아지경을  철학적으로 고찰하고 그렇게 무아지경이 될 수 있는 어린이들의 능력의 아름다음과 덧없음을 깊이 느끼는 노인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그러한 유년과 자연에 대한 사고는 아버지가 특히 사랑했던 영국 낭만주의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워즈워스의 시를 사랑하여 여러 시를 줄줄 외웠다. 워즈워스처럼 아버지에게도 평생 가장 중요한 일상은 '걷기'였다.  워즈워스가 영국의 호수 지방 (Lake District)의 들과 산을 걸으면서 시적 영감을 추구했다면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관악산을 타면서 명상하고 사색했다.  인간 관계의 복잡함에 마음이 어두워지면 아버지는 하루 종일 산을 탔고, 어떨 때는 밤 늦게까지 혼자 산에서 머물면서 마음을 다스리고는 맑고 행복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나는 이전에는 워즈워스의 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나와 아버지의 워즈워스에 대한 대화의 시작은 30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1 년, 빠리에서 공부할 때,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했는데, 아버지를 위해서 워즈워스가 살면서 주옥같은 시를 썼던 호수지방에 모시고 갔다.  이른 아침 아버지와 산책을 하는데 호수에서 올라오는 물안개 속으로 보이는 산과 구릉과 하늘의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왔다. 당시 빠리에서---이 글에서 굳이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싶지 않은-- 탁한 도시의 삶을 추구하던 나는 갑자기 신비한 경치 속에 아버지와 함께 하는 순간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버지, 너무 아름답네요. 나, 이 경치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나중에 너무도 그리워할 것같아요.

'나중에 그리워할 것같다' 라고 아쉬워하면서 경치를 바라보는 게 처음이에요."

 

아버지는, "그래, 너도 어른이 되어가는 거구나. 워즈워스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송가'에서 했었지." 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언급한 '송가'는 워즈워스의  "불멸의 송가: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를 말한다.  워즈워스의 자연과 유년기에 대한 철학이 아주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송가의 일부는 영화 '초원의 빛'에서 나탈리우드가 낭송해서 유명하며, 우리에게 친숙한 구절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는 이 시의 첫 구절이기도 하다.

 

워즈워스의 '자연'과 '어린이'의 개념은 단순하나 심오하다.  그는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찬란한 이상적인 세계에 살고 있었으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서서히 어두움으로 빠져들어가 옛 세계를 잊게 된다고 보았다. 출생은 곧 '잠'이고 '망각'이다. 그런데 어린이는 태어나면서 '우리의 고향인 신' 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영광을 이끌고 오고, 본능적으로 옛 세계에 가까이 있기에 '영원한 신비'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어린이는 자연과 동화될 수 있는 능력을 아직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는 차차 어른이 되어가면서 어른들은 이전의 '빛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감옥의 그늘'에 뒤덮인 채 살게 된다. 그러나 워즈워스는 옛 광채와 영광이 사라진다해도 어른들도 절망할 필요가 없는데 그것은 그들이 '온 삶의 빛의 원천'이 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은, 원초적 공감, 위로의 생각, 신앙, 철학적 의식에서 힘을 얻어 어린 시절의 빛을 떠올리고 위대한 불멸성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초적 공감, 사색, 신앙, 세월은 어린 시절의 빛을 떠올리고, 위대한 불멸성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게끔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어렴풋한 회상은 온 생애의 빛의 원천이 되어 한번 깨어나면 사멸하지 않는 불멸의 바다로 시인을 인도한다. 이제 광채, 영광의 시간이 사라지고 되찾을 길 없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30 년 전에 아버지가 나에게 '너도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라고 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그 의미를 이해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분명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대학원 때 워즈워스의 '불멸의 송가'를 읽어던 나는유년과 자연에 대한 워즈워스의 사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로. 만. 

 

세월이 지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워가면서 나는 나와는 분명히 다른 감성을 갖고 있는 동심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자연과 일체가 되어 뛰노는 아이들의 무아지경을 경이로움으로 바라보면서 비로서 나는 워즈워스가 '불멸의 송가'에서 한 이야기가 이런 것이었구나...혼자 되새김했다. 시가 심장으로 공감되었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버지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서서히 알아가게 된 것이리라.

 

 

불멸의 송가와 바다

 

내 컴퓨터에는 '불멸의 송가' 라는 사진 앨범이 있다.  2008 년, 부모님을 모시고 해변에 갔을 때 찍은 사진들의 앨범인데 나는 그 사진들을 볼 때마다 부모님과 아이들과 함께 했던 짧은 오후 시간의 기억이 다시 떠오름은 물론이고, 당시 내가 느꼈던 감상을 그대로 다시 생생히 느끼곤 한다.

 

2008 년 10월, 부모님이 방문했을 당시, 아버지 건강이 무척 나빴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에 부모님도 나도 마음이 좀 무거웠던 때였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오후에 해변에 갔다. 내리막길을 천천히 걸어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에밀은 서둘러 물에 뛰어들었고, 꼴렛도 부모님과 잠시 조개를 줍는 듯하다가 어느 새인가 물에 들어가 있었다. 아이들은 첨벙거리면서 파도와 장난으로 싸우기도 하고, 둘이 어울려 물장난치고 모래 싸움을 했다. 그렇게 둘이 놀다가도 갑자기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아니면 모래를 파면서 혼자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부모와 조부모의 존재는 잊어버린 채 자연의 품에 안겨 노는 아이들은 '황홀경'이란 것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느껴지고 경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린 시절 천국은 우리 주변에 있다!                                          

감옥의 그늘이 자라나는 소년에게 뒤덮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그는 빛을,. 

그리고 그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기쁨으로 바라본다.

그 젊은이는 날마다 동쪽에서부터 멀리 멀리 

여행해야하고, 여전히 자연의 사제로서

찬란한 환상이 그의 여정과 함께한다.

마침내 어른은 깨닫게 된다

그 환상이 사라지는 것을.

일상의 빛으로 희미해져버리게 되는 것을.' 

 

행복하게 뛰노는 아이들을 배경으로 아버지가 지나갔다.  나는 천진난만한, 활기찬 아이들의 모습과 지팡이를 잡고 걷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의 대조에 멈칫했다. 

 

아버지는 천천히, 그러나 어떤 목적이라도 있는 듯이 걸으시더니만 밀물이 지나간 뒤에 온 몸을 드러낸 바위군으로 다가갔다. 

 

지팡이를 잡은 채 서서  바위의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홍합을, 모래에서 꿈틀거리는 게들을 보신 것인가? 반들반들한 돌을 찾으시는 건가?

아버지는 찬찬히 바라보시더니 쭈그리고 앉아 손으로 모래를 파면서 놀기 시작했다.  그무렵, 아이들도 파도와의 싸움을 멈추고 나와 모래 속에서 숨쉬는 생명체들을 구경하였다.

 

옆에서 노는 손자들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어 놀고 있던 아버지..아마도 그는 70 년 전, 열살배기 소년 시절, 원산 명사십리에서 저렇게 하염없이 모래, 바닷물, 돌과 놀았겠지....옆에서 쭈그리고 놀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들만의 탐구에 빠져있는 아이들...아무런 걱정, 한숨, 슬픔도 없이 그저 온전히 온 몸으로 자연에서 뛰어노는, 지복의 상태의 아이들이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바닷물에 손을 담구고 돌을 찾는 아버지나....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리니...

 

 

 

30 여분 혼자 놀던 아버지는 바위에 앉아 있던 엄마께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아이들이 노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삶에 대한 일말의 걱정, 우울함, 어두움 없이 현재를 기쁨으로 온전히 만끽하고 있는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보면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워즈워스 시의 이런 구절을 떠올리지 않으셨을까? 

 

 

'새로운 행복에 빠져있는 아이를 보라.

피그미족 마냥 작고 귀여운 여섯살배기!

.....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꼬마 배우는 새로운 기쁨과 긍지를 갖고

삶의 다른 역할을 배울 것이다.

가끔은 자기의 '변덕스러운 무대'를 

온갖 인물로--인생이 그녀의 마차에 싣고 오는 중풍에 걸린 노인의 역할까지 이르는--

채울 것이다.

마치 자신의 천직이 끊임없는 모방이기라도 한 듯.'

 

아니면,  당장은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유의 힘으로 영광스러운 존재'인 아이들이 자라가면서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되고, '관습'에 의해 무겁게 짓눌릴 것이라는 사실에 슬퍼하지는 않으셨을까?

 

'머지않아 네 영혼은 세상의 짐을 질 것이고

관습이 너를 무겁게 누르리라.

서리처럼 무겁게, 거의 인생만큼이나 깊이.'

 

 

 

혹은 자연의 평범한 광경이 마치 '천상의 밎'츨 두른 듯이 환희하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아이들과는 달리,  죽음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우려로 마음이 무거운 자신이 더 이상 대자연을 온전히 즐기고 찬양할 수 없음을 탄식하셨을까? 

 

'그 환상의 빛은 어디로 날아갔는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영광과 꿈은?'

 

할머니, 할아버지, 에밀, 꼴렛, 나는 서로 다른 차원에서 자기만의 사고와 감상에 빠져 있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과 불확실한 미래로 숙연한 우울함에 빠져 있던 늙은 부부, 조부모의 그런 멜랑꼴리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무심함, 자유, 환희,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경외심에 가까운 놀라움으로 바라보는 조부모. 사진기를 들고 조부모와 손주들이 속한 판이한 의식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나. 

 

매 초마다 수평선을 향해 뚝뚝 떨어지는 해는 빠른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아름다운 시간이 내 눈앞에서 스러져갔다

 

  .

나는 워즈워스가 말한 '슬픈 생각' (a thought of grief)  가 무엇인지 알 것같았다.

 

'지금, 새들이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어린 양들이 뛰놀고 있건만,

오직 나에게만 슬픈 생각이

북소리에 박자를 맞추기라도 한 듯 들려왔다.'

 

'슬픈 생각'은 내가 그날 해변에서 부모님과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사고를 정의하는 구절이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자연 내에 함께 존재해서 행복했지만 이런 순간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예견,  아이들이 지복의 상태에서 자연을 만끽하고 있지만 그 순간도 덧없이 지나갈 것이라는 인식--이 모든 것은 '슬픈 생각'이었다. 워즈워스가 한 말이 다 옳다 생각되었고, 그가 불멸의 송가에서 이야기한 '상실'과 '가멸성'에 대한 슬픔이 그 시의 궁극적 주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 (11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 불멸의 송가에서 1 연에서 8 연까지는 슬픔이 지배하지만 마지막 9 연에서 11 연까지의 3 연은 사뭇 긍정적인 사고를 담고 있다) 나는 그날의 경험, 그리고 그날 찍어서 간직하고 있는 사진들의 모든 장면들은 아름다움, 덧없음, 슬픔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유년기와 천국

 

근 10년이 지난 뒤, 아버지를 모시게 되면서 나는 다시금 워즈워스의 불멸의 송가를 음미하게 되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

 

아버지 생의 마지막 3 년, 아버지가 가장 고대한 스케줄은 주말의 산책이었다. 우리집 가까이 호수를 25 분 정도 걸어가면 호수 반대편에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주말에는 어린 아이들을 둔 가족이 함께 나와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타고 놀고, 주위에 있는 아이스크림, 요구르트, 버거 등을 먹으며 오랜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이 없으면서 그 무리에 끼어 있는 것은 필시 우리 가족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점심이나 이른 저녁을 사서 벤치에 앉아서 먹고, 아버지를 위해서는 보온밥통에 따뜻한 미음을 준비해가서 드렸다. 아주 어린 아기에게 밥 먹일 때 앞 수건을 (bib)을 둘러주듯이 아버지도 앞수건을 두르고, 삼키다가 목에 걸리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먹었다. 이날은 특별한 날이라서 아버지가 쵸콜렛 무스나 아이스크림 몇 숫갈도 드시게 해드렸다. 아버지가 기뻐하시니 우리도 기쁜, 온 가족의 소풍 날이었다. 매 주말이...

 

공원에 갈 때마다 나는 놀이터의 어린이들을 심취해서 바라보는 행복한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랑 같이 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오래갈까...싶어 마음 아팠고, 동시에 어느새 훌쩍 커서 집을 떠난 에밀과 꼴렛과 함께 놀던 옛날이 그리웠다. 그러면서 유년기를 찬송한 워즈워스의 불멸의 송가가 나의 마음에 다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보면서 뭐가 그리도 신기한지 내내 함박 웃음이었다. 아이들이 로프 기구를 타고 낑낑거리며 올라타고, 가끔 미끄러지고, 걸음마배기들이 뒤뚱뒤뚱 누비고 다니고, 공놀이를 하는 아기도 있고, 가끔은 온 세상이 떠나가게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뭘 하든 자신의 노는것, 자신의 먹는 것, 자신의 우는 것에 집중했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자기가 하는 것에 전력을 다하는 그 모습이 아무리 귀엽다해도 어른들은 자기 일을 하면서 아이를 보건만, 아버지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이들만 쳐다보고 미소짓고 소리내어 웃으며 우리도 보라고 말해주셨다. 순수한 어린이들을 보고 경이로워하는--지속적으로, 질리지 않고--아버지도 참 순수했다. 아버지야말로 어린아이 같았다. 

 

 

어느 날, 남에게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아버지께는 관심을 보였다. 맨발로 뛰어놀던 다섯 살, 여섯 살 정도의 아이 두 명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만 아버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왜 이 사람은 동상같이 생겼어요?"

"왜 이 사람은 동상이에요?"

(한 아이가 말하면 옆의 아이가 따라함.)

 

나는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난감했다. '이 할아버지가 동상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게 이상해서였다. 망또를 걸치시고 앉아 있으니 손이 안보이고 그냥 뭉뜽그려져있는 게 동상같지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할아버지는 동상이 아니야' 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반대로 아무 말을 안 하는 것도 뭔가 불충분했다. 게다가 아무리 어린이가 하는 소리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내 아버지를 '동상'에 비유하는 것이 불편하기도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하하하하 웃었다. 아버지는 아이의 질문의 천진함이 너무도 귀여운 것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웃는 순간 '동상이 아니구나...' 싶은지 멍한 얼굴로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다가 자리를 떴다. 아버지는 그게 귀엽다고 또 미소지었다.

 

그  어린 아이들은 '동상같이 생긴 사람'이 왜 웃는지를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 동상같은 사람이 자기들의 천진함과 순수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순수함 속에서 천국을 보고, '영혼의 광대함'을 보고 '영원한 신비'를 읽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우리와 함께 산책을 하는 도우미들은 아버지가 왜 공원에서 아이들을 보는 것을 그리도 즐기는지를 궁금해했다. 아이들이 귀여운 거야 범 우주적 사실이라하지만 아버지가 공원에서 아이들을 취한 듯 바라보는 것은 사실 평범한 '어린이 사랑' 은 아니라는 게 명백했기 때문이다.

 

어느날 빅토리아가 물었다. 왜 그렇게 아이들 보는 걸 좋아하시는가고.. 나는 워즈워스의 시 이야기를 하기는 너무 거창하고 해서 간단하게 말했다.

 

"아이들은 천국에서 내려온지 얼마 안되니 천국에 가까이 있고,

이 지상에서도 아이들에게는 자기 주위가 다 천국이지요. 

아버지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천국을 느끼시는 것같아요."

 

모호한 말인데도 빅토리아는 금방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천국을 본다는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라 나도 경험하는 일이다. 어쩌면 나는 아이같은 아버지를 통해서, 주위에서 천국을 발견하는 아버지를 통해서 천국을 경험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이제 나는 불멸의 송가를 다른 감흥으로 읽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지상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자연에서 거룩한 광채를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탄식에 공감하였지만, 이제는 죽음, 가멸성, 불확실성에 대한 안타까움도, 두려움도 없이 ,불멸의 송가 마지막 3 연 (9-11)에 담겨있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사고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오 얼마나 기쁜가! 우리의 타다 남은 불속에

살아있는 무엇인가 존재한다니,

자연이 아직도 그리도 덧없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니!

우리의 지난 세월에 대한 기억이 나의 마음에

영원한 감사기도를 낳는다. 

.....

 

그러니 노래하라, 너희 새들아, 노래하라, 즐거운 노래를!

그리고 어린 양들이 북소리에 박자 맞추듯

뛰놀게 하라!

....

 

비록 한 때 그리도 빛나던 광채가 

나의 시야로부터 영원히 사라졌다한들 어떠리오.

비록 풀밭의 광휘와 꽃의 영광의 시절을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한들 어떠리오.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 있는 것에서 힘을 얻으리라.

지금까지 존재해왔고, 또 늘 존재할 것임에 틀림없는 그 원초적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는 위로의 생각에서.

죽음을 궤뚤어보는 신앙에서.

그리고 철학적 의식을 가져다 주는 세월에서.

 

그리고 오, 너희들, 샘물, 초원, 산, 숲이여,

우리 사랑의 어떤 이별도 절대 예언하지 말라!

오히려 나는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너희들의 힘을 느낀다.

나는 너희들의, 보다 습관적인 지배 하에 살기 위해서

 즐거움 하나 만을 포기한 것뿐이니.

나는 수로를 따라 물결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시냇물을

내 스스로가 그 시냇물처럼 경쾌하게 돌아다녔던 그 옛날보다 훨씬 더 사랑한다.

새로 태어난 순수한 빛은

여전히 사랑스럽다.

저무는 태양의 주위로 몰려드는 구름들은

인생의 무상함을 줄곧 지켜본 이의 눈에는 실로 차분한 색조를 띤다.

또 하나의 경기가 끝났고, 또 하나의 승리가 얻어졌다. 

인간이 붙들고 살아가는 마음 덕에,

그 마음의 따뜻함, 기쁨, 두려움 덕에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꽃 한송이가 

나에게

종종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한 상념들을 안겨준다.'

 

 

 

병으로 몸이 침대에 휠체어에 묶여이다고 해도 어떠리오. 자연에 대한 사랑, 어린 시절의 회상, 명상, 신앙, 사색은 언제든 빛의 원천이 되어 불멸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줄 수 있음을 아버지는 나에게 보여주었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는 소망하련다. 나의 인생이

 하루 하루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결속되기를.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3 시간 전에 마지막을 부른 노래의 이야기이다. 뇌출혈을 당한 뒤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부르신 노래가 찬송가였다면 닷새 후 돌아가시기 전에 부르신 노래는 동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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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못 읽으시는 아버지에게 음악은 새로운 세계였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아버지 방에서는 음악이 울려퍼졌다.  찬송가는 물론이고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트럼펫 연주에 교향곡, 관현악, 오페라, 성악 등 악기와 장르를 넘는 아름다운 소리들은 우리의 바쁜 삶의 배경 음악이었다.

 

어느날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튜브의 옆의 창에 일본 노래 하나가 떴다.  갑자기 아버지가 외쳤다

 

'어! 후루사토다, 후루사토다! 저거 후루사토야!!'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것을 보고 소리치듯이 흥분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바로 똑같은 목소리와 톤을 들은 적이 있었으나 90 세 할아버지의 '어린애같은' 목소리는 적응이 안되었다. 

 

내가 아버지의 어린애같은 목소리를 들은 것은 1 년 전이었다. 사촌, 인철오빠가 한국에서 사진 한 장을 보내왔을 때였다.  '신주야, 이분이 우리 할아버지시니?' 라는 질문과 함께.

 

성경을 들고 서 있는 또렷한 눈매의 어떤 남성의 색바랜 흑백 사진이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아버지가 외쳤다.

 

"우/리/ 아버지다!

아아아, 우/리/ 아버지다!

우/리/ 아버지야!" 

 

아버지의 힘찬 목소리도 목소리려니와 '우리 아버지'란 표현에 나는 적지 않이 놀랐다. 어린아이가 친구한테 자기 아버지 이야기하는 듯한 표현이 아닌가. 갑자기 어렸을 때 아버지 모습을 보고 반가우니 어린 아이로 돌아가는 것인가.... 손가락으로 아무 것도 잡을 수 없는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손으로 사진을 잡았고 손은 마구 떨렸다.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야, 우리 아버지야' 하면서 눈물 흘리셨다.

 

그런데 유튜브의 일본 노래를 보며 아버지는 바로 '우리 아버지야' 할 때의 그 뜨거움으로 '후루사토다' 라고 외치신 것이다. 그리고는 따라 부르셨다. 음이 간단한 동요였다. 아버지는 구부러졌던 어깨를 펴고, 화면의 가사를 따라서 힘차게 노래했다. 나의 놀란 시선은 아랑곳없이.

 

노래가 끝난 뒤 여쭸다.

 

"아버지, 후루사토가 무슨 뜻이에요?"

"고향이란 뜻이야. 어려서 많이 불렀던 노래야."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이 노래는 나에게 '나의 살던 고향'과 같은 노래였던 것이다. ( 그후에 나는 후루사토가 실제로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나의 살던 고향' 만큼이나 애창되는 노래임을 알게 되었다. 일본의 2011 년 지진과 쓰나미 후, 플라시도 도밍고가 일본 공연 중에 충격과 상심에 빠진 일본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불렀다.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마음의 노래' 이다)

 

아버지가 어려서 이 노래를 왜 애창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버지는 9 세 때 평소에 아주 존경하고 사랑하던 어머니를 잃었다.  9 세는  엄마의 죽음을 '몸'으로 느끼지만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함부로 울면 안된다는 교육의 탓에 이불 속에서 혼자 숨죽여 울던 그 어린 소년 강대건이 잃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친구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였으리라. 80 년 전에 부르던 그 노래가 불쑥 티비 창에 떠오르니 아버지가 '후루사토다!' 라고 놀라 외칠만 했다.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후루사토를 들려달라고 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엄마는 아버지의 기운을 북돋아드리려고 같이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가 노래를 하면 멕시코 간병인들이 신기해했다.

 

"저게 일본어에요?" "아버지가 일본어도 하세요?"

 

그들고 마찬가지로 나도 아버지의 역사와 언어의 세계가 가끔 경이롭게 느껴졌다. 딸과 부인과는 한국어로, 의사, 물리치료사, 손주, 사위, 멕시코 도우미들과는 영어로 소통하는 아버지. 엄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어로 노래를 하고 평생 공부하고 애송해온 영시, 한시, 일본시를 애송하는 아버지의 두뇌가 도대체 어떠 식으로 작동되고 있는지 지도를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버지 앞에서는 평생 철없는 내가 기껏 한 소리는, "아버지, 돌아가실 때 나한테 아버지 두뇌를 주고가면 안되요?" 였다.

 

동시에 나는 후루사토라는 노래가 아버지에게 열심히 부르시는 게 이해가 안되었다. 아버지는 일본에 대해 자존심을 지키고, 일본어가 한국어만큼 편했지만 일본어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일본어,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있다. 30 년 전, 부모님과 일본을 갔을 때였다. 입국 수속을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저 멀리 앞쪽에서 나이가 지긋한 출입국사무소 직원의 불손한 태도가 눈에 띄었다. 그 시간에는 한국에서 온 비행기 승객들이 입국 절차를 받는 거라 대부분이 한국인들이었다. 여권검사를 하고, 쳐다보고, 도장을 찍고 여권을 던져주는 그 간단한 절차에 그의 교만함이 드러났다. 딱 뭐라 항의할 수 없게끔 기분 나쁘게 행동하는 그 치사한 무례함을 하나 둘 겪고 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그가 아버지의 여권을 휘리릭 훑더니 맨 처음 페이지에 아버지 이름을  가르키며 뭐라 뭐라 했다. 그 순간 아버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당신이 한자를 모르는 거요!

그건 호랑이 '호' 자가 아니라 경건할 '건' 자요!

글자를 몰라도 좋소.

그러나 모르면 공손하게 물으시오!"

 

작은 공항이라 아버지 목소리가 온 공항에 찌렁찌렁 울리는 것같았다. 사람들의 눈길은 다 아버지와 그 직원을 향했다.  나도 아버지가 격노한 모습에 놀라 눈이 동그래져 아버지와 그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만큼이나 아버지의 표정이 단호했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직원은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아무 소리 없이 도장을 찍어주었다.

 

나도 그 직원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기에 아버지가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서 속이 시원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분노는 내가 느끼는 '불친절에 대한 기분 나쁨'과는 격이 다른,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이라는 게 분명했다. 빼앗긴 나라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차별을 당하고 살았던 아버지는 스치고 지나가는 차별도 옛 기억을 후벼파는 것임이 분명했고, 그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인가 싶었다. 나는 대강 짐작하고 분노 비슷한 감정을 느낄지는 몰라도 나라를 빼앗긴 자의 설움과 분노를 온전히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상상을 못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없는 설움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것, 게다가 어떻게 '나라를 빼앗긴다'는 끔찍한 경험을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옛 세대의 역사의식

 

'후루사토'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야기가 많이 옆으로 가는 것같은데 그래도 나는 '후루사토'를 부르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이야기인 것같아 좀 적어보겠다.

 

아버지의 역사적 경험과 의식을 그러다가 2007 년, 아버지가 쓰신 수상록 편집을 하던 중, 나는 차별, 억압, 탄압이 현실이자 생활이었던 일제 강점기를 살아낸 아버지에게는 나와 다른 역사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아주 간단한 사실에서 발견했다. 아버지는 개인의 역사를 한국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함께 생각했다. 예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결혼은 '1919 년, 3.1 운동이 일어난 해' 라고, 또한  '1919 년은 민족적으로 다사다난한 해였던만큼, 강씨 집안에게도 다사다난한 해였다' 로 묘사되어 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의 묘사도 민족의 치욕적 사건과 연관짓고 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해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 돌아가신 날은 8 28, 그러니까 우리나라 국권이 상실된 국치일을 하루 앞둔 이었다. 어머니의 생년이 1900 이니, 그야말로 한창 나이에 세상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연도ㅡ 1937 년을 중일전쟁이 일어난 해와 같이 묶어 생각하는 것은 차지하고 , 흥미로운 것은 할머니의 사망일, 8 월 28 일의 묘사이다--- '우리나라 국권이 상실된 국치일을 하루 앞둔 날.'  여기서 '국치일'이라 1910년 8 월 29일, 경술국치일을 의미한다. 조선은 이날 한일병합조약이라는 부당하고 굴욕적인 조약으로 500 년 역사의 조선이 일제로 넘어가 이후 35 년간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경술국치일 이후 27 년이 지난 1937 년이고, 날짜도 8 월 28 일로 경술국치일인 8월 29 일 이 아니다.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버지는 경술국치일에서 17 년 뒤에 태어났으며, 수상록을 쓰던 싯점 (2007)은 국치일에서 90 년이 지났고 할머니의 죽음에서 70 년이 지난 싯점이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치욕의 역사는 뒤로하고 일본과 경제, 문화적으로 일본과 당당히 맞서고 세계적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경술국치일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건은 자신에게 가장 아픈 기억인 어머니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었다.

나라를 빼앗기는 설움이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만큼이나 가슴에 피가 흐르게 만드는 고통임을 경험해서가?. 그래서 아버지의 의식 속에 8월 29 일이란 숫자는 '국치일'로서 또렷이 기억되고 있는 것인가?  

 

 

고향---'후루사토'--상실, 그리움, 희망

 

아버지처럼 첨예한 역사 의식을 가진 사람이 일본 노래에 정서를 담아 노래를 하는 게 아이러니컬하다 싶었고, 처음에는 우리집에 매일 일본 노래가 흐른다는 사실이 적응이 안되었다. 그러나 후루사토의 가사를 여러번 일으면서 나는 '일본'이란 형용구를 초월한 인간의 원초적 정서를 담은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 단순한 가사가 불러일으키는 복합적인 감상을 나 스스로 음미하게 되곤 했다.

 

 

1 절:

토끼 쫓던 저 산 

붕어 낚던 저 강

지금도 꿈에 그리는

잊지못할 고향

 

2 절:

어떻게 지내시나요 아버님 어머님 

친구들은 여전한가요 

비바람 불어도 

생각나는  고향

 

3 절:

뜻을 이루고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산 푸른 고향

물 맑은 고향

 

아주 간단한 언어로 후루사토는 상실, 그리움, 동경, 희망의 주제를 담고 있다. 색깔 몇 개 안 쓰고 덧칠을 하지 않는 수묵화처럼 말끔하나 깊이가 있는 가사이다. 굴곡진 삶을 통해 죽음, 사별, 상실이 무엇인가를 너무도 잘 아는 구순의 아버지에게 단순한 선율에 담긴 그리움의 가사는 어려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평생은 상실, 동경, 희망의 주제로 살아낸 삶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일제 강점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낸 나의 부모님 세대의 어르신들의 집단적인 경험이고 주제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2007 년에 수상록을 쓰셨다. 아버지는 가족사와 더불어 2 차대전, 한국 전쟁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가 살아낸 한국 역사를 아주 자세히 기록했다. 나는 아버지의 책을 통해서 이전까지 몰랐던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개인의 삶이 마치 가늘고 연약한 덩쿨처럼 타고 올라갔던 든든한 나무인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뛰어난 기억력과 관찰력으로 자신이 만났던 한국의 역사를 움직인 인걸들의 이야기---침례교 선교사 말콤 펜윅, 공산주의자 , 창덕궁에 있던 '민주위원'이란 기관에서 만난 이승만, 김규식, 김구를 위시한 28 명의 최고 정무 위원,  이용문, 송요찬, 백선엽, 김일환, 정일권 등의 장군들---를 개인적인 관점에서 기록했다.)

 

1960 년 대 초의 시기의 기록으로 마무리지어진 아버지의 수상록의 주제는 '실제적 상실과 그 상실의 아픈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9 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할아버지는 1950 년 10 월 공산당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19 세에 월남한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고, 북의 가족들도 잃었다. 후루사토에 '비바람이 불어도 생각나는 고향'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수줍던 문학 청년이었던 아버지가 던져진 한국 역사의 장은 '비바람'이 아닌, 폭풍우와 해일과 지진의 장이었다. 특히 한국 전쟁은 그가 소중히 간직하는 모든 것들을 다 파괴했고, 그에게 소중했던 '미' '진리' 등의 가치는 쓰레기만도 못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고군분투해야했다.

 

아버지는 한국전에서 우리 민족이 '자의든 타의든' 두 편으로 나눠지었고, 적이 되어 증오와 적대감정에 휩싸여 폭행과 학살을 자행했다고 기록한다. 전쟁 직후 서울에 남아 있던 아버지에게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민청에 가입하라'고 권유한 옛 지인이 자신이 열성분자임을 입증하기 위헤 남한 군 포로를 각목으로 후려쳐서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그 포로의 고통으로 비명지르는 것을 들은 것-- 그것이 끔찍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도망 다닐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을 믿을 수 없고, 친구로 어울리면서도 그 본심을 알 수 없어서 몸을 사려야했던 아버지는 '누가 우리편이고 누가 적인지'를 알 수 없던 상황은 6.25를 '비극 중의 비극'으로 만들었다'라고 적고 있다.

 

아버지의 글 중에서 내가 지금까지도 항상 새롭게 읽게 되는 부분은 아마도 의용군 심사 현장이다. 자의던, 타의던, 의용군이 되겠다고 심사현장으로 향하던 젊은이들의 광기어린, 연출된 열정, 거기에 합류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행진했던 22 세의 아버지. 나는 그 부분을 읽을 때는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신분이 발각날까봐 조마조마해하듯이, 자기가 원치 않는 상황에 속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공포를 숨기고 행동했을 아버지를 상상하며 애가 타곤 한다. 그것도 20 세 초반의 어린 나이에...나의 아들과 같은 나이에 의용군 심사를 받으신 거라니...

 

"나는  허름한 , 머리띠, 검은 고무신 차림을 하고 공장 노동자, 농민, 점원  각종 직업과 계층 출신의 의용군 지원자들과 4   조로 어깨를 끌어 안고 발을 맞추며 비겁한 자여, 갈려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킨다 라는 적기가와 함성을 고래고래 지르며 마포 일대를 돌다가 마지막으로 종로로 행진해서 수송국민학교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운동장 여러 곳에 의용군 심사의원 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붉은 글씨로 살벌한 구호가 적혀 있는 깃발들이 무수한 의용군 지원자들의 인파와 함께 물결치고 있었다. 도도히 흐르는 전승의 물결을 타고 자원이건, 강제 동원이건 의용군 지원자가 양산되어 이제는 심사에 합격한 자들만이 의용군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운좋게 의용군 심사에서 불합격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오히려 민청 회원들에게 반동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 있어서 내내 도망다녀야했다.

 

서울 수복 후 아버지는 국군에 입대했다. 아버지는 군대에서 만난 인걸들의 기억을 적고 있는데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은 한국 역사를 움직인 장군들이 아니라, 한 미국 장교이다. 그는 아버지가 전방의 36 연대 본부에서 근무할 때 같은 장교 천막을썼던 사람이다. 

 

"어느  밤에 있었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삭풍이 윙윙거리며 천막을 치고 천막의 사방 날개가 마구 펄럭이는 몹시 춥고 을씨년스러운 겨울 밤이었다. 음산한 전등 밑에서 별로  일도 없어 일찍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으나 손가락과 발가락이 시려서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장교가 천막에 들어와 잠시 앉아 있다가 갑자기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자고 있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나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은  같았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섞여서 들리는  오열은 전쟁의 광란상과  비극을 상징하는  같아 나에게는  없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장교는 미국에서 곧장  나이 어린 장교였다. 부모의 따뜻한 보호 속에 있다가 이렇게 살벌하고 위험한 전쟁터로 내던져진 스무 살을  넘은 청년, 대학을  졸업하고 임관한 R. O. T. C.  출신 장교이었다.  그의 흐느낌은 바람 소리가 커질 때에는 더욱 커져서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그리워진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비통한 오열 속에서 전쟁의 비정함과 수많은 젊은이와 그들을 사랑하는 부모들의 오열을 들을  있었다."

 

미군 장교의 '비통한 오열' 을 들으면서 전쟁의 비정함과 수많은 젊은이와 그들을 사랑하는 부모들의 오열을 들을 수 있었다' 고 꽤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생각을 토로한 아버지 자신은? 전쟁에 났을 때 아버지는 스무살 초반의 대학생이었고, 전방 36 연대에 근무한 시기는 52 년 이므로 아버지가 24-25 세였을 것이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임관한 R O T C 장교'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생각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 땅의 한 막사, 늦은 밤 오열하던 그 무명의 미국 장교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자기와 한 천막에서 잠자는 척하면서 자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안스러워하고 있다는 한국군 장교는 

전쟁이 끝나도 돌아갈 고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 한국군 장교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였고,

아버지가 공산군에 의해서 잔인하게 처형되었고 

사랑하는 누이들은 북한에 남겨졌고

형 한 분을 제외하고는 남한에 내려온 남동생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그 한국군 장교는 사랑하는 자식을 전장에 보낸 뒤 오열하는 부모가 없고

그는 아무 것도 없이, 아무도 없이, 그저 혼자 살아내야함을 알고 있어서

부모가 그립다고, 고향이 그립다고 남처럼 맘대로 오열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그에게는 삶 자체가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전쟁후 아버지는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했고, 결혼을 했으며,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여대, 서울대, 한림대에서 가르쳤다.

돌아갈 고향은 없어졌지만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한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죽음으로 만나는 고향

 

 

유튜부에서 후루사토를 만난 뒤 아버지는 거의 매일 후루사토를 불렀다.  기력이 딸리는 아버지가 갸냘픈 목소리로 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그렇게 뭔가 마음을 담아 노래할 수 있는 게 다행이라 싶었다. 또한 전쟁으로 형님 한 분을 제외한 온 가족을 잃은 아버지께 '고향'은 얼마나 그리운 것일까, 그리고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괴로운 경험일까가 헤아려져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가 후루사토 노래를 마지막으로 부른 것은 돌아가시기 13 시간 전이었다.

(나의 전화기에는 아버지가 이 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모습의 영상이 있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퇴원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날, 여늬때와 다름없이 병원에서도 아버지께 '후루사토'를 들려드리기 위해 유튜브로 찾으면서 내 마음은 착잡했다.  음식을 못 삼키시므로 얼마 안되어 돌아가실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 상태에서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가기로 했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유튜브로 후루사토 노래가 울리자마자 아버지는 천장을 보면서 열심히, 착한 어린이가 선생님 말을 듣고 열심히 노래 부르듯이, 노래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사랑스러워서 미소를 띤 채 동영상을 찍었다. 얼굴이 마비가 되어 발음이 정확치 않고, 나흘 동안 드신 게 죽 반 그릇도 안되었으니 기력이 딸려 소리를 내는 게 힘드실텐데도 온 기운을 다 모아서 열심히 부르셨다.

 

바로 그 때 에밀과 꼴렛이 병실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들어온 것을 보았지만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다정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는 아이들 눈에는 할아버지가 자기들은 뜻을 모르는 일본 노래를, 더군다나 무슨 중요한 노래 자랑도 아닌데,  얼굴은 마비가 되신 상태에서 왜 멈추지 않고 부르실까 의아한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손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노래를 그리도 열심히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 나는 지금 아버지에게 후루사토라는 노래의 의미가 무얼까? 나도 의아했다. 동시에---이게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까지도 내가 눈물 터뜨리게 만드는 사실인데---온 몸에 케이블이 연결된 채 담요로 덮인 아버지를 내려다보면서  아버지의 몸이 우리나라같다는 생각이 휙 들었다. 왜 그럴까?. 삼년간 내가 매일 만져온 나의 아버지의 몸이 내가 언제든 손으로 샤악~~그릴 수 있는 그런 토끼모양의 한반도 지도만큼 정겨워서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부르는 일본어 노래가 한국 역사의 한 산물이라서?   아버지의 인생이 나에게 한국 역사책이었기때문에? 얼굴이 마비가 두동강이 난 우리 나라를 연상시켜서? 

 

그런데 아버지의 몸이 그 지경이고, 닷새의 짧은 기간 동안 응급실, 중환자실, 일반 병실로 거쳐왔고, 죽음의 기운은 병실에 꽉 차 있건만 아버지의 표정은 편안했고, 눈빛은 밝았다.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누군가가 자기를 내려다보는데 노래를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 순수함, 의연함이 압도적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버지가 부르는 후루사토는 더 이상 나라와 모국어를 잃어버린  9살배기 소년이 감정을 담을 수 있었던  원초적 동심의 노래만도 아니었다. 두고온 고향을 그리는 노래만도 아니었다.  '뜻을 이루고'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꿈꾸던 이가 그 '언젠가'가 다가왔음을 감지하고 부르는 노래였다.

 

어쩌면 그 '고향'은 죽어야마나 갈 수 있는 곳, 죽어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랑하는 존재들이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게 원산의 명사십리이든, 안양의 관악산이든, 천국이든---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친구, 그리고 앞서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아들까지, 아버지는 이제 비바람이 부는 세상을 뒤로하고 돌아갈 수 있게 된 그곳을 그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너무 슬펐다. 아버지가 마치 미리 장송곡을 미리 불러주는 것같았다. 눈물이 터지려해서 당황스러웠다. 아버지에게든,  아이들에게든 슬픈 기색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슬픔이 내 마음의 전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고향에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음에 안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노래가 끝난 뒤 에밀이가 말했다.

 

"할아버지, 오늘 집에 돌아가실 거에요."

 

아버지는 "I'm so happy" 라 했다. 내가 '아버지 왜 기쁘세요?' 라고 물으니 "Because you guys all came" 이라 했다.

 

첫째 딸과 손주들이 와서 행복함을 느꼈고 그것을 표현했던 아버지는 13 시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몸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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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의 모래톱을 지나며 

 

 

---알프레드 테니슨 (강대건 역)

 

해 지고 저녁별

그리고 나 부르는 하나의 분명한 음성!

내가 바다로 떠날 땐

포구의 모래톱이 통곡 소리 내지 않기를.

 

오직 밀물 가득하여, 파도 소리, 물보라 없고

자는 듯 넘실대는 조수만이 있기를,

가없는 바다의 깊은 심원에서 끌리어 나온 자가

또 다시 본향 찾아 돌아갈 때에는.

 

황혼 깃들고 저녁 종 소리,

그 다음에 찾아 오는 어둠이여!

내 바닷길 떠날 때에도

이별의 슬픔 아주 없기를.

 

시간과 공간의 경계에서 멀리

내가 조수에 실려 갈지라도

바라노라, 포구의 모래톱을 지났을 때

'인도자'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게 되기를.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노래하는 동영상을 나는 엄마께도 보여드리지 못했었다가 그저께 처음으로 보여드렸다.  지난 며칠간, 아버지가 후루사토를 부르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많이 울었다. 어제 저녁에 에릭과 컨서트에 갔는데 암으로 투병하던, 우리가 무척 존경하고 응원하던, 첼리스트가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또 울었다.

 

콘서트 동안 고개 푹 숙이고 아이패드에 (다음의) 그림 그렸다. 

테니슨의 시와 '인도자'의 얼굴을 직접 마주했을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아프리카 속담에 "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라는 말이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책 제목으로 사용해서 유명하기도한 구절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정말 옳은 소리다. 어린이를 키우는 데 있어서 직계 가족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이의 조부모, 이웃, 교사, 종교적 지도자, 의사, 정치가, 비영리단체의 봉사 등 '마을' '사회'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사실은 어린이를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인을 돌보려면 온 마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직계 자손뿐만이 아니라, 손자 손녀, 이웃, 종교적 지도자, 의사, 정치가, 사회 정책, 시설...그렇다, 한 노인을 돌보려면 온 마을이 힘을 합해야한다. 

 

이번에 나는 오프라를 보면서 노년은 정말 '함께 가야하는 길'임을 절실하게 느꼈다. 오프라에게는 자기 자신이 노년의 플랜 B 이고, 그녀가 아무리 독립적이고, 자신을 영리하게 관리를 한다고 해도, 그녀를 보이지 않게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바로 그녀를 돌봐주고 있는 '마을'이었다. 오프라라는 노인 한 명을 돌보기 위해 온 마을이 협력하고 있었다.

 

남편이 떠난 뒤 1 년간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던 오프라를 굳세게 잡아준 것은 오프라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대로 받아준 가족, 친구, 이웃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오프라를 은밀히, 은근히 도와오고 있다. 출판사 직원인 로닛과 카멜은 오프라의 매일매일을 지켜주는 든든한 도우미로서 은행 사무, 병원가기, 정원 돌보기, 운동, 집안 일, 일주일에 한번씩 해야하는 쇼핑 등 크고작은 일들을 돕는다. 오프라가 멀리 가족 모임에 가야하면 가족같이 친한 친구 (지난 번 글에 썼던 점성술학자!)가 어김없이 나타나서 운전을 해주고 노나와 엘론 부부는 오프라를 방에서 끌어내어 운동을 하게끔 만들었다.  조용한 성격의 엘론은 남에게 뭘 강요하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오프라에게만은 우겨서 그녀가 자신의 팔짱을 끼고 (돌아가신 남편에게 그러했듯이) 밤길을 안전히 걸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돌아섰다.  (엘론이 오프라가 자신을 의지해서 걸을 수 있게 팔을 내어주는 것은 돌아가신 남편에게 "나를 잡아줘요" 라고 할 수 없게 된 오프라에겐 한층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그런 도움이었다.) 손자 손녀들의 방문, 그들이 보내주는 카드, 메시지 등도 깊은 애도 속에 고통받던 오프라를 밝은 현실로 끌어내어 미소짓게 만들어주었다. 차로 1 시간 20 분 거리에 사는 아들들은 유명하고 성공적인 변호사, 정치 자문인으로서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나타나 엄마와 차를 마시거나 점심을 먹고 사라졌다. 그들이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나타나 빈집을 북적북적하게 함은 물론이다. 내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오프라를 돌보았다. 고맙다는 말을 할 필요 없게끔 은근한 도움은 오프라가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끔 도와주면서, 동시에 오프라가 삶의 방향성을 잃지 않거나 실족하지 않게 해주었다.

 

밤 10 시, 11 시 이후에 오프라는 큰 집에 혼자 남겨지지만, 그녀에게는 유난을 떨지 않고 은근슬쩍 돕는 사람들이 열어주는 밝은 아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주던 매일매일의 사랑은 사라졌지만 다른 사랑이 그녀의 삶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오프라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온 '마을'이 힘을 합하는 모습에,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때 아이들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라는 말을 기대하지 않듯이 그런 자유를 주는 사랑의 아름다움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나의 아버지도 '노인 한 분을 모시기 위해서 한 마을이 필요하다' 라는 말의 아주 좋은 예이다. 아버지의 돌봄의 주 책임자인 내가 이렇궁 저렇궁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엄마의 도움은 절대적이었고, 매일매일 나와 함께한 도우미들과 일주일에 세 번 아버지에게 물리 치료를 해준 레니의 수고와 사랑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엄선생님은 본인의 사업을 중지하고 한국에서부터 날라와 아버지의 전신 마사지를 해주고 갔고,  박홍관 목사님과 사모님은 샌디에고에서부터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고 기도를 해주셨다. 이모와 이모부, 준규 목사 가족도 돈들여 여행을 와 부모님께 기도를 해주고 갔다.  성경 공부 모임의 친구들의 음식과 기도와 그들이 가져다주는 꽃과 화초들은 우리 온 식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고, 선아, 미숙이, 리사는 뛰어난 요리 실력으로   지친 나와 엄마가 맛갈나는 한국 음식을 먹게해주었다.  아버지를 '하라부지'라고 부르며 방학때마다 찾아와 기도해준 션과 노라, 할아버지를 위해 컴퓨터로 성경구절로 예수님 그림을 그려 방에 걸어주고 간 죠셉....

 

그리고 너무도 고마운 분은 나의 언니. 

 

타주에 사는 언니는 예술가이자 대학 교수, 교회의 여러 일을 담당하는 일꾼으로 매일매일이 무척 바쁘다. 가르치랴, 작품활동하랴, 살림하랴, 언니는 일분 일초를 아껴가면서 치열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언니는 일년에 7-8 번이나 부모님을 도우러 우리집에 왔다. 아버지 생신, 추수감사절은 물론이고 자신이 짜낼 수 있는 시간은 다 짜내어 부모님을 뵈러 오고 내가 이틀, 사흘이라도 온전히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여름에 3 주동안 와 있으면서 에릭과 내가 여름 휴가를 가질 수 있게끔 도와줬다. 요리를 못하는 형부에게는 부인이 집을 떠나면 본인이 아주 불편함에도 언니를 적극 지원해주고, 여름에 같이 와서 아버지 산책, 안마, 그리고 형부 특유의 공손한 유머로 엄마 아버지를 즐겁게 해주었다. 

 

물론 실제적인 일은 내가 한다지만, 언니의 존재는 육체적 안전만이 아니라 정신적/감정적인 안정을 위해서 아주 중요했다. 

 

언젠가 언니의 작품을 만드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언니는 아버지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책상에 놓여있는 작품 속의 아버지의 얼굴은 내가 매일매일 바라보고 사는, 누워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 옆에서 사진을 올려다보는 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바로 그게 나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니는 '예술'로서 아버지의 몸을 만지고 있는 것이고, 나는 '현실'에서 아버지의 몸을 만지고 있는 것이 다를 따름,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방식으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이 노년의 플랜 B 가 된 오프라도, 노년과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한 아버지의 태도도 참 훌륭했다. 그러나 그들이, '노인 자신'이 그렇게 의연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바로 '마을' 이었다. 한 노인을 돌보기 위해서는 '마을'이 필요한데  그  '마을'은  직계 자식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고, 자식의 친구이기도 하다는 게 나에게는 체험을 통해 얻은 진리이다.

 

이 글을 쓰면서 꼴렛이가 아버지 장례식 때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게 '노인 자신'과 '마을'의 역할과 시너지를 잘 요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용해보겠다.

 

"저는 고등학교 때 공부하다가 새벽에 아래층에 내려가 물을 마시곤 했는데 할아버지는 그 이른 시간에 어김없이 책 속에 파묻혀 공부를 하시곤 했어요. 할아버지는 저를 보면 깜짝 놀라시면서 반가워하셨어요. 할아버지는 책을 사랑하셨고, 지식을 끊임없이 추구한 호기심이 많은신 분이셨어요. 할아버지께는 세상에 배울 게 너무도 많았고, 읽을 책도 많아서, 그래서 할아버지는 새벽이든 밤이든 언제든지 공부를 하신 것이지요. 할아버지는 정말 존경할 만한 삶을 사셨어요. 저는 어젯밤 여기의 많은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할아버지는 많은 일들을 하셨고 여행도 많이 하셨고,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할아버지 특유의 고귀함을 유지했던 것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난 3 년간 병상에 계실 때도 할아버지는 존엄성을 잃지 않았고, 돌아가신 후에 조차 할아버지께는 고결함이 있었어요."

 

여기까지는 '노인 자신'으로서의 아버지를 이야기했다면 그 다음은 바로 '마을'의 몫을 이야기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그 고결함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존해준 것이기도 하다고 느껴요. 지난 3 년간 엄마가 자신의 삶의 여러 부분을 포기하고 할아버지를 돌보았는데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할아버지를 돌보면서도 내내 기쁨을 잃지 않았어요. 지난 10 월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할아버지를 담당한 간호사들마다 병실에 들어오면 "아, 이분은 주름하나 없네!' "미스터 강은 완벽한 피부를 갖고 있다!" "3 년간 욕창이 없었다니!" 하고 감탄했어요. 한사람도 빼지 않고....그걸 보면서 저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피부를 유지한 것은 할아버지가 젊어보이는 핸섬한 얼굴을 타고나서가 아니라 엄마, 할머니, 이모의 정성 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나는 꼴렛의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하면서도 깊이 새겨듣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프라의 삶을 엿보면서 노인의 존엄성, 노인의 고결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고결한 철학과 굳은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지켜줘야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꼴렛의 speech 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온 마을의 협력이 필요하다'에서 '마을'이란 '직계 가족을 넘어선 이웃/공동체' 를 의미하기도 하고 (클린턴이 의미한 것처럼) 더 큰 의미의 '사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노인을 돌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린이 문제처럼 노인 문제는 모든 사회 문제와 마찬가지로 분명 정부 지원정책과 사회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의 구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가족만의 문제로 버려지면 안된다. (안타깝게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열심히 노력해서 바꿔가야할 일이다. 

 

그러나 그 구조적, 정치적, 사회적 개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마을'의 일원이 되고자하는 마음가짐이 아닌가싶다. 노인들을 해결해야할 문제거리, 골칫거리로 보지 않고, 그들을 이웃으로 여기고, 그 이웃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들의 약함과 어두움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 하고, 그들에게 사소한 도움이라도 주려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은 '마을'은 참 살만한 곳일 것이다. 

 

얼마 후 나는 '노인'이 될 것이다. 내가 속한 마을의 이웃들이 나에게 적대적이고 나를 골칫거리로 여기지 않는 따뜻한 마을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나는, 내가 그나마 조금 젊은 이 때에 나의 마을에 사는 노인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드리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노년의 Plan B 는? 

 

Plan B 는 현실적인 대안을 일컫는 말이다. 모든 요건을 다 만족시켜주는 그런 답은 아닐지라도 실제적으로 적용을 할 수 있는 그런 플랜, 그것을 플랜 B 라고 부른다. 에릭이랑 나는 지난 10 년간, 멀리 계시는 벨기에 부모님, 한국 부모님의 노년을 걱정하여 '자주 '플랜 B 가 뭘까' 라고 둘이 궁리하곤 했다.

 

우리 둘이 생각하기에 한국 부모님은 미국에 오시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싶어서 진지하게 초청했으나 툇자 맞았고, 벨기에 부모님의 현재 사시는 집은 노인들이 살기에는 불편한 집이라 여겨 집을 팔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작은 집으로 옮기시라고 권유했으나 그것도 툇자. 우리가 생각하는 플랜 B 와 양가 부모님들이 생각하는 플랜 B 는 달랐다.

 

그런데 운명이 개입하여 친정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시고 억지로 미국 이민을 하게 되셨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바람직한 플랜이었는데 그게 어떻게든 이뤄지게 된 것이다.  엉겁결에 모든 일을 해결해야했고, 결국 다 잘 되어 부모님은 미국에 잘 정착하셨다. 원래 우리가 플랜 B 를 계획해서 실행했더라도 이렇게 잘 해결되었을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준비는 항상 하고 있지만 일이 닥칠 때 허겁지겁 해나가야하는 것--플랜 C 라는 게 존재한다 싶었다. 그래서 시부모님은 아직도 완강히 집을 팔 수 없다고 버티실 때 우리 입장을 강하게 피력할 필요가 없다고도 싶은 게,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여러 가능성의 준비를 해뒀다가 일이 터지면 그때 신속하게 결정하는 게 더 낫다 싶어서이다.

 

우리가 내내 노인들의 플랜 B 를 고민하는 경향이 있어서인가, 2016 년 여름 에릭과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에릭이 오프라와 아로디와 이틀 지내고 난 뒤에 나에게 물었다.

 

"오프라와 아로디의 플랜 B 는 뭐야?"

 

에릭도 나처럼 오프라나 아로디 두분 중의 한 분이 사고를 당하거나 쓰러질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혼자 생각했었구나! 

나도 그게 내내 고민이었다.

 

오프라와 아로디는 정원이 큰, 아름다운 집에서 단둘이 살았다. 정원 한쪽에 그들이 운영하는 조그만 출판사 건물이 있다. 손자 손녀가 어렸을 때는 자주 찾아와 집안이 북적북적했으나 아이들이 다 성장한 뒤로부터는 찾아오는 일이 적고, 큰 가족 모임도 식당을 빌려 하면서 집안은 대부분 조용하다. 팔순의 노부부가 단둘이 사는 집은 평화로움이 감돌지만 동시에 언제 돌발할지 모르는 폭풍전야의 평화가 주는 위기감이 맴돌기 마련이다. 나는 속으로

 

한분이 사고를 당하시면 간병인을 둬서 집에서 모실 수 있을까? 집의 구조가 그러기에 적합한가?

누군가 먼저 떠나시면 남은 분이 이집에서 혼자 사실 수 있을까? 집이 너무 크고 정원이 커서 더 외롭진 않을까?

혼자 산다면 넘어지거나 쓰러질 때 신속히 대처할 사람이 없을텐데?  

자신 중의 하나가 부양을 하려고 할까? 그렇다면 누굴까?

 

많은 생각을 했었다.

 

오프라 댁에서 머문 사흘째, 오프라가 당신들이 다음날 병원에 간다면서 우리는 알아서 좋은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그런데 에릭이 선뜻 제안했다.


"제가 병원에 모셔다드릴께요. 제가 운전할께요."

 

오프라는 펄쩍 뛰었다. 하루 일정을 포기하고 왜 병원에 가냐고. 

 

나도 의아했다. 나야 당연히 오프라와 아로디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것을 선호했다. 옛날에 가이드까지 했던 나라이니 볼 것 다 봤고, 새로운 거 못본다고 아쉬울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애초에 여름 휴가를 이스라엘로 간 이유가 병약한 아로디를 뵈려고 한 것이지 않았나. 그러나 

이스라엘이 초행인 에릭이 하루 일정을 포기하다니, 그것도 남의 병원을 따라가겠다고?

 

(나중에 에릭에게 정말 괜찮냐고 물으니 에릭은 '내가 원하는 일이다. 당연히 해야할 일이다' 한마디로 끝냈다.)

 

다음날 우리 넷은 차를 타고 하이파 시로 향했다. 평소에는 두분이 택시를 타고 간다고 했다. 우리 넷은 마치 소풍을 가는 것처럼 들떴다. 차안의 분위기가 즐거웠다.

 

이런 저런 이야기에 참여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나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얼마전까지만해도---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오시기 전--부모님을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게 특혜같이 부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두분이 마을버스, 전철, 버스를 타고 병원, 치과 다녀오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난 너무도 죄송했다. 병원에서 수속하고 앉아서 기다릴 때---그 외로운 시간에----같이 있어드리고 싶었다.

 

나에게 트라우마처럼 또렷이 박혀있는 기억도 있다. 엄마가 응급실에 입원했던 어느 날, 우리 맞은편 침대에 누워 있던 아주 아주 늙은 부부.침대에 누워 있는 할머니는 눈을 뜨지 않고 가쁘게 숨쉬며 잠을 자는 듯했고, 그 옆에서 고개를 팔에 묻고 꼬박 잠을 자던 삐쩍 마른 할아버지, 잠깐 깨어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할머니 발에 양말을 신겨드리고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 잠에 빠져들던 그 할아버지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그 노부부의 모습은 자식들이 한국에 없는 나의 부모님의 미래라 싶어서였다. 

 

평소에 그런 효도를 받아보지 못했던 부모님은 위급 상황에 내가 한국에서 부모님의 병원 일정을 돌봐드리게 되었을 때, 그리고 미국에 오셔서 내가 병원에 모시고 다닐 때마다, '고맙다, 고맙다, 우리가 이런 호강을 하다니, 정말 고맙다. 너도 바쁜데...' 하셨다. 

 

하이파시를 향해 가는 차안에서 오프라, 아로디도 우리가 같이 하는 것을 무척 즐기는 게 느껴졌다.

 

클리닉에 도착했다. 한국은 어쩐지 모르겠는데 이스라엘에서는 중병이나 전염병이 아닌 경우 큰 쇼핑 몰 안에 의료 클리닉들을 둔다고 한다. '환자'와 '일반인'이 굳이 분리될 필요가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쇼핑을 가듯이 병원도 가벼운 마음으로 가라고.... 아로디의 심장 클리닉은 하이파 시의 그랜드 캐년이라는 커다란 쇼핑센터 안에 있었다.

 

우리 앞으로 걷는 오프라와 아로디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두분은 서로서로를 의지해서 걷고 있었다. 균형감각을 잃어 누군가를 잡아야하는 오프라는 아로디를 지팡이 삼아 잡고 있었고, 아로디는 자신의 심장병을 간호해주는 오프라의 존재 자체를 의지해서 ---활기찬 젊은이, 어린이를 둔 가족들이 큰 쇼핑백을 들고 활보하는 분주한 쇼핑센터를---천천히 걷고 있었다. 바닥은 반들반들하니 미끄러워 균형감각을 위협하고, 비슷한 가게들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으니 방향감각을 위협하니, 오프라와 아로디는 조심스럽게 두리번 거렸다. 그 위태위태한 모습이 나에게는 쇼킹했다.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열정적으로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면서 살던 오프라와 아로디의 모습은 없었다. 화려한 삶을 뒤로하고 결국은 맞이한 노년의 병약함과 외로움이 그들의 걸음걸이에서 묻어났다.

 

그날 밤, 나는 자연스럽게 오프라에게 물었다. 위급 상황이 닥쳤을 때 플랜 B 가 무엇이냐고.

오프라는 아로디가 죽는다는 것은,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심리학자로서 자신의 그런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음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내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미안했다..

 

나중에 나의 여동생 비비와 오라버니 드로에게도 플랜 B 가 뭐냐고 물어보았다. 둘 다 자기들이 돌볼 것이라고 했다. 특히 드로는 자기 집의 아랫층의 침실을 가르키면서 '저게 엄마 방이야' 라고까지 했다.  그런데 그건 아주 먼 훗날, 남아있는 한분이 거동이 불편할 때의 이야기였다.  배우자가 돌아가신 뒤 당장의 플랜은 없었다.  나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더 이상 이 문제를 고민할 수도 없었다.

 

 

배우자의 죽음---삶을 새로 배우기

 

에릭과 내가 이스라엘을 방문한지 6 개월 후 아로디는 세상을 떠났다. 오프라는 예견했으나 부인해온 '죽음'이라는 사건이 닥치자 거의 얼어붙었다. 슬픔과 애통 속에서 세상과 단절했다. 상처받고 무서워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동물마냥 오프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프라와 자주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말을 걸고 위로를 하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고, 어떨 때는 위로해주는 사람들에게 공격적으로까지 된다고 했다. 

 

"사람들이 나한테 염려에 가득찬 표정으로 인사를 할 때 내가 활기차게 인사를 받으면 '아, 오프라,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다' 라고들 해. 그럼 나는 '책 표지로서 책을 판단하지 말아요' 라고 해.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들 맘대로 생각하지는 말라는 거야. 난 너무 아프니까. 날 그냥 그대로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

 

그러나 이번에 오프라를 방문하면서 나는 커다란 변화를 목격했다.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애도의 고통 중에도 오프라는 자신의 삶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새롭게 주어진 여러 장애물들을 극복해내고,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남편과 있을 때에는 개발할 기회가 없었던 여러 능력들을 개발해내고 있었다.

 

한 예로, 정원 가꾸기.

 

도착한 첫 날, 오프라는 나를 정원으로 안내했다. 올해 비가 많이 와서 정원은 잡초로 무성했다. 오프라는 올해는 전례없는 많은 비가 와서 집에 내내 갇혀 있었는데 내가 오는 날부터 해가 나기 시작했다며 내가 행운이라고 했다. 정원 한 가운데에 네모난 콘크리트 '터전'이 있었다. 정원 의자가 놓여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앉았다. 무성한 나무들이 자연적인 그늘을 만들어주어 아늑한 가운에 앉아 있자니 꽃들의 향내가 느껴지고 빛을 받은 여러 나뭇잎들의 반짝임, 그리고 가지각색 꽃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네가 내년에 올 때쯤은 이 정원은 완전히 달라져 있을 거야.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콘트리트 터전은 명상의 장소로 아름답게 꾸며질 것이고....집에서부터 여기 명상의 장소까지는 자갈과 자연석을 사용해서 길을 낼 거야.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흙에 잠기지 않게끔. 작은 꽃들도 심고. .....네가 이미 알아봤을지도 모르겠지만 현관 앞의 큰 나무를 제거하고 패티오를 크게 만들었잖아? 그래서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게...."

 

오프라는 나에게 여러 계획을 이야기하다가 웃었다.

"아로디가 내가 이렇게 정원을 꾸미고, 개조하고, 새로운 구조물을 건축하는 것을 보면 무척 놀랄 거야. 아마 자랑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좋겠네."

 

오프라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반추했다.

 

"아로디와 나는 굉장히 동등한 관계로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했지만  가사 노동과 집안 일은 전통적인 남성/여성의 역할분담을 그대로 고수했어. 내가 식사와 빨래 담당, 아로디가 재정, 자동차, 정원, 집수리 등등을 담당했지. 내가 한 일보다 아로디가 담당한 일이 훨씬 더 많았어. 나는 자잘한 일에 신경쓰지 않고 내 커리어에 집중할 수 있게 아로디가 도와줘서 너무도 고마웠어.

 

문제는 아로디가 떠난 뒤였어, 내가 아는 게 거의 아무 것도 없더라고. 정원은 물론이고, 은행, 재정, 그리고 출판사 업무. 내가 커리어에 집중하는 동안 소홀하게 했던 것들, 남편이 다 해줬던 그 모든 일이 숙제처럼 내 앞에 놓여 있겠지.

 

아예 포기를 하거나, 아니면 새로 배우거나. 그게 내가 선택해야할 일이었어. 아로디는 아마 내가 출판사를 닫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 그가 돌아가시기 6 개월 전에 쓴 쪽지에 '직원들에게 퇴직금 주고 출판사 정리하기' 라고 씌여있더라고.

 

그러나 나는 다 배우기로 결정했어. 지금도 계속 새로 배우고 있어. 내 나이에, 더군다나 남편이 떠난 뒤의 슬픔에 빠진 상태에서 새로운 삶의 기술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출판사 일도, 은행일도, 정원일도, 집수리도, 나는 어떻게든 해나가고 있어. 사람들을 고용하고 관리해서 하는 것이지만 결국 내가 배워가면서 하는 일이기도 해. 지금 날 보고 아로디가 많이 놀랄 거야."

 

오프라의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남편을 애도하고 있던 오프라는 이제 몸의 균형감각을 되살리기 위해서 운동도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트레이너를 고용해서 운동을 하고, 한번은 친구와 함께 문화센터에 가서 운동을 한단다. 특히 지난 해부터는 '억지로 나 스스로를 끌어내다시피 해서' 여행을 시작했으며, 비록 예전처럼 걷지 못해 휠체어를 사용해야하지만, 그렇다고 못갈 곳도 없고 못할 일도 없다는 기세로 그녀는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일본, 에스토니아, 프랑스로  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심리학 웍샵을 했다.

 

그런 근황을 나누면서 오프라는 여전히 남편 이야기를 한다.  혼자 다니면서 너무 허전하고 슬프고, 옛날 남편과 같이 다니던 기억이 새롭고, 매일매일 그가너무도 그립단다.

 

"난 정말 행운이었어. 아로디를 내 남편으로 두었었다니....

난 그를 사랑해. 나는 뭘 하든지 아로디와 함게 한다고 생각해. 안 그럴 수 없는 게 그 생각이 떠나지를 않으니까..."

 

대화의 반 이상은 돌아가신 남편의 이야기이지만,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 그리고 죽은 남편에 대한 변치않는 사랑이 그녀의 현재를 마비하거나 동결시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다. 자신의 삶을 새롭게 개척해나가는 오프라가 참 자랑스러웠다. 

 

 

 

"내 손을 잡아줘요"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는?

 

다음날 우리는 가까운 친구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친구가 차로 집에다 바래다 주어 내리는 순간, 나는 오프라가 균형을 일을까 두려워 재빨리 오프라 쪽으로 달려갔다.

 

"괜찮아. 여기는 내가 걸을 수 있는 곳이야. 이것 봐. 파란색 레일이 보이니? 이게 내 지팡이야."

 

그제서야 내 눈에 파란색 레일이 들어왔다. 집 입구에서부터 정원까지의 긴 길에 쭉 울타리같은 레일이 이어져있었다. 오프라는 두 손으로 레일을 잡고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대문에 도착하자마자 레일에서 손을 떼어 더듬더듬 대문을 잡고 균형을 유지하면서 정원 안으로 들어가더니만, 들어가자마자 담벽을 타고 있는 레일로 재빨리 손을 옮겨 다시 두 손으로 레일을 잡고 걸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온 정원과 집이--대문에서 집까지, 집에서 정원까지, 정원에 있는 작은 출판사 건물까지--다 손잡이/레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큰 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의 울타리의 중간의 줄이 손잡이 레일.

 

 

 

"오프라, 이렇게 레일이 많은지 몰랐어요? 왜 이렇게 설치했어요?"

 

"나를 잡아줄 손이 없으니까...."

 

오프라는 말을 이었다.

 

"아로디랑 내가 외출했다 들어올 때, 나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 항상 아로디에게 말했어..

'뗀 리 야드' (당신의 손을 나에게 주세요/제 손 잡아주세요)'  

아로디는 나의 손을 잡아주었고, 나는 그를 의지해서 걸어 집으로 들어오곤 했어.

그런데 아로디가 떠나버린 거야.  내가  '손을 줘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어."

 

나는 울컥 슬픔을 느꼈다.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라는 사실이 아로디의 죽음, 그의 영원한 사라짐의 구체적인 증명같이 느껴졌다.  매일 지팡이처럼 남편을 붙들었던 오프라는 이제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으니, 하루에도 몇 번씩 남편의 부재를 육체적 장애를 통해 느끼고 있겠구나. 

 

오프라는 말을 이었다.

 

"나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아로디가 없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지? 나는 어떻게 혼자 설 수 있을까...

밖에 나갔다 집에 들어오는 간단한 일이 나에겐 위험한 일이거든. 내가 언제 어디서고 넘어질 수 있으니까...정원의 한쪽에 있는, 집에서 20 미터 거리에 있는 출판사 건물까지 가는 일도 위험한 일이고. 그래서 온 집안에 레일을 설치한 것이야.

지금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나의 자율성, 자유, 육체적 안전을 보호할 수 있는가에 집중해서 살고 있어. 안전과 독립성, 그게 너무도 중요해."

 

나는 '아!' 탄성 질렀다.

 

"오프라, 당신은 정말 창의적인 사람이에요!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정말 멋져요!"

 

진짜 그랬다. 아직까지는  '그냥 조심조심 다니지 뭐...' 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집은 그렇게 끔찍하게 위험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오프라가 자신의 독립과 안전을 위해서 온 집안에 '손잡이 레일'을  장치를 한 것이, 그 기발한 발상과 추진력이 대단하게 보였다. 80 세의 그녀는 '더 늙은 때'를 대비하는 '노후준비'를 하는 현명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날 밤, 오프라가 잠자리에 들기 전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로디의 부재를 또한번 실감했다. 밤에 집의 문단속은 아로디의 몫이었다. 이제는 오프라가 그 일을 한다. 오프라는 구석구석 돌면서 창문 하나 하나 꼼꼼히 다 잠구고  원격조정기를 사용해서 문/창문 밖의 철재 차양을 내렸다. 온 집안이 마치 갑옷을 입은 것같았다. '뗀 리 야드' 라고 할 때 손을 내밀어 줄 아로디가 없다는 말이 또 떠올랐다. 

 

'지금은 내가 와 있다지만, 다른 때는 오프라가 매일밤 혼자 이 큰 집의 문들을 하나 하나 닫는 것이겠지....그걸 오프라는 해내고 있구나.'

 

오프라가 먼저 자러 가고, 나는 늦은 밤에 목욕을 하려고 발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걸어 목욕탕으로 가던 중, 바로 목욕탕 옆의 오프라의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오프라의 잠을 깨울까 싶어 불을 안켜고 있어서였나, 시각을 못쓰는 대신에 모든 감각이 다 살아나서인가, 조용한 가운데 오프라의 숨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새근새근 고르게 나는 숨소리. 

 

복도에 서서 그 숨소리를 한참 들었다. 평소에는 이 큰 집에서 오프라의 숨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도 없겠구나...

 

오프라는 여전히 침대의 반쪽을 아로디의 자리로 남겨두고, 아로디의 벼개닛도 정기적으로 갈아준다고 했었다. 그렇게 아로디의 존재는 죽음 이후에도 오프라를 붙들어주고 있었다. 큰 집, 큰 정원에서 외로움과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돌아가신 아로디를 의지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 오프라에게 존경심이 느껴졌다.

 

 

 

플랜 B----혼자 서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

 

이스라엘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내 마음이 약간 가벼워졌다.  2 년 반 전에 에릭이 물었던 "What is the plan B?"  (아로디가 세상을 떠나면 오프라가 어떻게 살아가나?) 의 답이 나온 것 같아서였다. 

 

오프라가 혼자 이 집에서 살아내는 것이 플랜 B 였다. 오프라가 선택해서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앞서 말했듯이 오프라는 원래 'no plan' 이었다.  '난  아로디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난 아무런 계획도 할 수 없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게 주위 사람들에게는 좀 답답해보일지 몰라도 그게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반응인지도 모른다. 나의 오빠, 아버지와의 경험으로도 볼 죽음 이전에 했던 여러 계획들은 그대로 실행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아닌 것도 많았다. 죽음 이후 몇 주, 몇 달,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나가는가는 그 죽음이 어떤 식으로, 어떤 시기에 일어났는가에 따라---전혀 예측할 수 없는 변수에 따라--달라지기 마련이다. 집은 이사를 해야하나? 유품정리는 어떻게? 남은 배우자가 혼자 살 수 있을까?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어떻게? 이런 아주 크고 작은 문제들이 사실은 아주 중요하고, 처리하기 힘든 문제로 떠오르는데 그것을 미리 계획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러니 'no plan' 이 되는 것이다.

 

오프라는 'no plan' 이라고는 했고 아로디 죽음 후 1 년 반 정도는 슬픔으로 점철된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오프라는 '삶을 선택했다.'   오프라가 나에게 한 말이 있다.

 

"아로디 떠나고 첫 해, 사람들은 내가 자살할까봐 두려워했어.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게다가 한동안 내가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온 집안의 문을 꼭꼭 잠구고 살았으니 자살할까봐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지. 매일 아침 내가 살아있나 체크하러 들리는 친구가 있을 정도였으니...그러나 자살은 나에게 선택권이 될 수 없었어. 슬프다고 자살할 수는 없었어. 물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에 대한 매력은 있었지만 그걸 선택할만큼  나는 그렇게 무책임하지는 않으니까..."

 

자살, 자기 파괴 행위 등의 옵션을 제외한 뒤에는 여러 가능성이 존재했다.  오프라의 경우에서처럼 사별 후의 삶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더라도 자신의 삶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 포기하지 않는 위치 매김 자체가 삶의 방향을 긍정적으로 돌려놓았다. 압도적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일도 못했고, 건강도 상했지만, 삶의 나침판은 내내 '살기 (living)'로 향해 있었기에 그녀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새로운 책임을 담당했고,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갔다. 얼마나 멋진 자리 매김인가! 얼마나 멋진 균형감각인가! 얼마나 멋진 삶인가!

 

노년에 몸의 균형감각은 훼손되어도 삶의 균형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오프라는 증명했다.  그녀는 노년에 혼자 사는 삶의 여러 위험을 첨예하게 인식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에게 한계를 두지 않았다. 되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자율, 자유, 독립의 삶을 위해서는 그런 위험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현명하게 받아들였다. 실로, 그녀가 혼자 살면서 맞닥뜨리는 위험은 도처에 있다.  거동이 불편한데 큰 집에 혼자 살자니 외로움으로 인한 우울증은 물론이고, 목욕탕, 거실, 부엌, 정원 등 친숙한 공간들이 사고와 죽음으로 인도하는 함정이 될 수도 있으며 사고가 났을 때 운이 안 따르면 오랜 시간 동안 아무와 연락이 안되어 응급 치료의 골든 타임을 놓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가 아직도 가르치고, 소통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삶을 추구하려면 이제까지 자기가 살아온 집이 자기에게 최적의 공간임을 알고 포기하지 않는다. 그 주거 공간이 다리가 불편하고, 균형이 불안정하고, '손을 잡아줄 남편이 없는' 그녀에게 위험한 공간이 될 수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독립과 자율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해내서 새로운 '솔로형 보금자리'로 재창조해버렸다.

 

플랜 B, 그것은 오프라 자신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고, 독립과 안전을 꾀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계속 추구해가려는 마음가짐, 그게 바로 플랜 B 였다. 성공적 플랜이다. 거기에 덧붙여, 삶의 도처에서 언제고 공격하려고 웅크리고 있는 험상궂은 위험이란 맹수를 허를 찌르는 그런 꼼꼼한 자기 보호, 안전 장치를 만들어가는 노력의 과정은 자칫 무력하고 암울하게만 볼 수 있는 노년을 해리포터나 헝거게임같이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만들어버린다.

 

내가 오프라를 보고 마음을 놓았다는 것은 비단 오프라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도 걱정을 덜하게 된다. 이상한 자신감이 생겨서이다. 나는 많은 자잘한 결심을 하고 있다. 나도 한계를 두고 살지 않으리라. 마지막 순간까지 내 욕구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현명하게 내 안전을 꾀하고 자유를 추구하리라. 계속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도전에든 압도되지 말고 든든한 뱃짱으로 살아가리라.

 

예측 불가, 불확실성으로 뿌연 노년이란 미래에 대비해서가장 현실적인, 적용 가능한 플랜 B 는 유연하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이다싶다. 어차피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거, 이왕이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삶을 사랑하겠다'는 긍정적인 호기를 갖고 살면 좋지 않겠나. 

 

 

 

오프라의 절친 중, 레베카 할머니는 아주 '유능한' 점성술사 입니다. 손금도 잘보세요.

 

할머니는 친구, 친구의 친척, 파티에서 만난 사람들, 식당 종업원, 가게 주인---그 누구에게든 '생일이 뭐에요?' 하고 말을 걸고 이야기 나눈 뒤 10 분 안에 그 사람의 인생을 다 읽어내서 '와..' '와...' '와...' 감탄을 자아내는 분입니다. 점성술을 믿기는 커녕 우습게 보던 어떤 대학 교수가 자녀 문제로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 레베카 할머니가 생일 읽고, 손금 읽고, 아이 문제 다 알아내고, 아이 운세까지 다 읽어내고...그래서 교수님이 놀라서 바들바들 떨다가 울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등의 성공사례들이 전설처럼 회자되는 분.

 

저도 20 대 말엽까지  정다/* 스님의 십이지- 책을 독파하고 점성술과 십이지간지를 짬뽕해서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을 즐겼더랬어요. 그래서 점성술이 말되는 소리도 있고, 엄청나게 재밌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단지 그게  맞던 안 맞던 제가 삶에 집중해 사는데 도움이 안되는 것이라 싶고 저의 인생관과는 상관없는 태도라 싶어서 끊었어요. (그건 옛날에 에세이에서 쓴 적이 있어서 생략~~)

 

제가 레베카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10 년 전, 이스라엘 아버지 80 회 생일 잔치에서였어요. 제 운세를 봐주고 싶어하시는데, 점성술을 끊은 입장에서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점성술을 믿어서가 아니고, 제 운명이 궁금해서도 아니고, 그냥 할머니가 친근감과 애정의 표현으로서도 점성술을 사용하시는 것을 알기에 제 생일을 알려드렸지요.  할머니가 '아........' 하시더니 저더러 이렇네 저렇네 많은 말씀을 해주셨어요. (정다/* 스님의 '십이지**' 에서 배운 것과 비슷한 내용이라 놀랄 것은 없었음)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저에게 (그리고 저의 옆의 사람들이 다 듣게끔) 한 말씀이 있어요. 

 

"지금 무슨 계획하는 거 있니? 넌 2 년 후에 정말 유명해질 거야. 수백 명의 사람을 앞에 두고 연설을 하고, 사람들은 너의 이야기를 경청하고....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거야...."

 

전 그 말 듣는 순간 속으로 아아..! 탄식이 나왔어요.

왜 사람들은 나에게서 이런 운세를 읽는 것일까?

그런 식의 성공은 전혀 일어날 일이 아닌데!  내가 전혀 원하는 게 아닌데!! 

 

레베카 할머니 말고 저는 가끔  운명을 읽는 사람들로부터 '넌 크게 성공한다' 는 식의 소리를 들었더랬어요.

 

1988 년 경, 기독교인 헬렌은 저에게 '5 년 후에 수백명 앞에서 연설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라고 계시를 받은 듯이 이야기했을 때, 당시  강단에 설 꿈을 갖고 공부하는 중이었던 저는, "그래? 수강 신청 많이 하는 인기 교수가 되는 건가봐?" 하고 장난삼아 대답했더니 헬렌이, "아니, 그게 아니라, 큰 연설가가 되고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될 거야" 라고 했었어요.  그 후에 성지순례 온 어떤 할머니도 그런 소리를 했고,  여행 중에 만난 어떤 집시같은 여인도 그런 소리를 했고, 일본 친구의 할머니를 방문했을 때 '내 집에는 귀신들이 같이 산다고, 나중에 내 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군데 군데 희미한 동그라미가 보일 것이고 그게 귀신들이 찍힌 것이다' 라는 으시시한 소리를 한 할머니도 저에게 크게 성공하고 유명해질 거라고 했어요.

 

다들 뭘 보고 그런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뭔가를 읽어내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가끔 남과 말할 때 신들린 듯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가끔이지만) 그게 재밌어서인가 잠시 뭐가 씌여서 제 사회적 성공을 확신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봐요.

 

여하간 그런 예언은 다 '꽝'이 되었습니다. ㅋㅋ

 

운명의 장난인지, 제가 운명갖고 장난을 친건지, 아니면 그분들이 믿는 그 무엇인가가 장난을 친건지. 그들의 계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준으로는--'폭망한 인생'!  Me!  Moi! 

 

가장 최근의 예언자인 레베카 할머니의 '2 년 후 수백 명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할 운명' 이란 예언은 2 년 후에도 계속 제가 냄비와 밥솥과 빨랫더미를 벗삼아 온종일 고양이와 노는 아줌마의 현실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할머니의 예언 능력에 스크래치를 낸 안타까운 사례일 따름!

 

여하간에, 이번에 이스라엘에 와서 만난 첫 친구가 레베카 할머니였어요.

식당에서 만나 껴안고 인사를 나눈 뒤 레베카 할머니가  "너랑 같이 해볼 게임이 있어' 라며 박스 하나를 꺼내들었어요.

 

앗,..또 예언?

할머니는 10 년 전의 예언이 안 이뤄졌다는 사실, 아니 저에게 자신이 성공을 예언했다는 사실 조차 잊으셨나?

 

할머니가 저에게  "지금 네가 미래에 대해서 알고 싶은 어떤 문제가 있니? 말해봐. 그게 어떻게 될지를 내가 알려줄께" 라면서 박스를 열었어요. 그 안에 주사위가 여러 개 들어있더군요. 

 

 '즐거운 소통을 원하시는 할머니의 원을 들어드려야하나, 아니면 정말 내가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해야하나' 하면서 제 마음의 주사위를 들고 잠시 격렬하게 고민했지요.

 

할머니가 재촉하셨어요.

 

"어서 말해봐. 뭘 생각하고 있니?"

 

할머니의 재촉에

 '팜펨아, 너도 60 이 다 되어간다. 할머니한테 맞춰드리지 말고 너도 할/머/니/답/게 이야기해봐!' 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그래서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아요."

 

할머니는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니, 제 반응이 이해가 안되셨나봐요.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아? 어서 말해봐. 생각하는 거 있잖아. 당장 안 떠올라도 생각해보면 나올 거야."

 

할머니가 저를 push 하시니까 저도 좀 더 강하게 제 의사 표현을 하게 되더군요.

 

"레베카, 전 정말 알고 싶지 않아요. 모르고 사는 게 더 좋아요. 모르고 사는 게 더 좋다는 것을 저는 확신해요."

 

그리고 제가 예전에 블로그에도 썼던 글, '한치 앞을 몰라서 다행이다' 라는 글의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가족은 2015 년 어느날 영화보고 즐겁게 저녁 먹고 사진을 찍었는데 바로 40 분 후에 아버지는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었고, 나는 3 년간의 수발을 들게 되었다. 그 이전, 2013 년에 엄마 생일 축하로 만나고 10 일 뒤에 혼수상태에 빠진 오빠, 그 후의 죽음.  두번의 경험을 겪으면서 나는 내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바로 한치 앞에 어떤 위기와 고통과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는데, 내가 '한치 앞을 모르고 살아서 다행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앞의 일을 모르니까 현재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으니까. 바로 앞의 일을 모르니까 온전히 즐길 수 있었으니까. 나는 그래서 굳이 내 앞의 일들을 미리 알고 싶지 않다' 

 

레베카 할머니는 그래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면 좋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라고 우기셨어요.

 

할머니는 스스로의 말에 설득력이 없는지 이미 알고 있었을 거에요. 본인도 '나쁜 일을 당할 거라'는 예언을 하는 분이 아니거든요. 할머니 입장에서는  점성술이든, 게임을 통해서 저에게 '그냥 뭐든 다 잘될 거다'라고 이야기 해주고 즐거운 시간 보내려고 했는데  제가 버티니까 좀 당황스러웠을 거에요. 그러나 여하간에 전 어떤 예언도 듣고 싶지 않았으므로 저의 입장을 피력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레베카, 만약에 제가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게 고통이라도 다 괜찮다, 나는 어떻게든 이겨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요?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요?"

 

그 말에 할머니가 말을 잊었습니다. 

 

"레베카, 진짜로 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싶지 않아요. 고통을 당하고 싶지는 않은 건 당연하지요. 그러나 그냥 뭐든 다 받아들이고, 거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면 삶은 무엇인가 꼭 보답을 해준다는 것을 배웠어요. 오빠의 죽음도, 아버지의 죽음도...그래서 저는 그냥 모르는 채 살래요. 알고 싶지 않아요. 제가 알던 모르던 일어날 일이 일어난다면 그냥 살아내면 된다고 생각해요. 삶은 열심히 사는 자에게 그 무엇이던 보상을 해주니까요."

 

레베카 할머니는 실망하신 게 역력했어요. 상처받으신 것같기조차 했어요. 그러나 자존심을 지키시데요.

 

'난 나에게 운명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에게만 읽어준다. 부탁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안 읽어준다' 라시면서---즉 너같이 튕기는 사람은 절대로 안 읽어준다라고 '튕기시면서'--- 박스를 닫으셨어요.

 

그러나 박스를 닫는 순간, 우리 둘 다 운명에 대한 대화도 닫아버렸어요.  

까짓것으로 마음 상할 일 있나요?

연어 샌드위치와 토마토, 오이 샐러드를 맛있게 나눠 먹었습니다.

 

할머니는 근황을 나누면서 노년의 피로함과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래도 사람들을 도우면서 열심히 살겠다는 결심을 토로하셨습니다.

저는 그게 점성술 이야기보다 훨씬 더 재밌었습니다. 

 

바로 앞에 일어날 일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우리가 서로에게 집중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게 얼마나 좋냐...싶었습니다.

 

 

 

 

 

 

 

 

 

 

 

 

 

이스라엘 왔습니다.

from 여행 2019.04.10 08:05

어제 이스라엘에 도착했습니다.

2 년 반 전 이스라엘 아버지가 돌아가신 힘든 시간을 겪고 계신 이스라엘 어머니를 뵈러 왔습니다.

일년에 한번은 꼭 어머니를 찾아뵙기로 약속했었어요., 동생의 아들이 결혼을 하고, 오빠의 생일도 크게 한다고 해서 겸사겸사해서 왔습니다.

 

 

오프라 댁의 제 방이에요. 해 잘들고 조용해서 글쓰기 넘 좋은데 글쓸 시간은 안나요.

 

 오프라랑 아침 식사. 식사 중에 전화가 왔는데 '내 딸이 와서 앞으로 1 주일간은 나는 아무런 환자를 받지도 않을 것이며 출판사 일도 안 할 것이다'라고 하시데요. 제가 오는 걸 그리도 좋아사니다는 거 감사하기도 하면서 그만큼 마음으로 하는 소통이 그리우셨나보다 싶어서 약간 안스러웠어요. . 

여행 오기 전에 할 일들이 좀 있어서 밤새면서 해치우고, 잠자는 남편 입맞춤해서 깨워 작별인사하고 택시타고 공항 갔습니다. 당근 잠이 부족했지만, 비행 시간이 13 시간-14 시간, 자면서 가면 된다 했어요.

 

그러나 쪽잠 30 분 잔 것 말고는 잠을 하나도 못잔, 한번도 이렇게 못자본 적이 없는 그런 비행이 되었습니다.

 

비행기 타기 전부터 고생.

악명높은 엘알 항공의 보안검색.

 

검색 때문에 줄이 길어지고, 비행기가 늦게 떠나는 일도 비일비재해요. 공항 들어가는 순간, 허...검색을 하도 꼼꼼히 해서 오늘따라 체크인 카운터에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이 줄을 쭉 이어 아주 멀리 떨어진 공항 출입구까지 이어서 있었어요.

 

긴 줄 끝에 합류해서 서 있는데 한참 서 있다보니까 제 옆에서 은근히 줄이 하나가 곁다리를 치기 시작했어요. 꼭 줄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그렇다고 저와 같은 줄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이상한 무리의 존재. 

 

일본여성들이었어요.  제 또래 일본 아줌마들은 정성들인 엷은 화장, 번들거리지 않으면서 은은한 화장이 특징이잖아요? 이분들도 무슨 연유에서인가 이스라엘을 가는구나..성지순례가시나? 그런데 단체가 아니네..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뭔가 눈치가 심상치 않아요.

 

뒤에 있는 사람들이 (히브리어로) 주고받습디다.

 

'여기 엘알 맞아?' '우리가 잘못 아니야?' '아니 맞을 거야. 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잖아.' 

 

그때 알았습니다. 줄의 시작이 어딘지 모르는데 바로 앞에 동양 여성 그룹이 서 있으니까 이게 이스라엘 비행기인가 아닌가 싶은 거였던 거에요.

 

급기야 제 뒤의 무리가 제 앞의 무리에게  ‘여기 엘알 맞아요?’'이 긴 줄 믿어져요?!'  고함,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함지르는 거 수줍어하지 않습니다~)

앞에 선 사람들이 또 고함,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줄이다!’'오늘 내로는 태워주겠지' 

하하하하~

 

그 와중에  옆에 은근히 조심스럽게 소심하게 줄을 여성들이 동요하는 듯했어요. 일본어로 샤불샤불샤불~~하더니

여성이 저한테

 

 ‘아나타가  지루하게싯데 있는데 와다시다치가 감히 말을 시켜저 너무 너무 스미만센~~’ 마음이 한번에 전해지는 공손한 태도로

저에게 물었습니다. 사무라이가 썩은 무 베듯이 간단한 질문:

 

 ‘토쿄?’

 

그들은 바로 옆의 ANA 항공을 타는데 저를 보고 (동양여성) 동경행 체크인 하는 라인인 줄 알고 제 옆에 선 것이었어요. 

 

일본말을 못하지만 바디 랭기쥐만을 터득하고 있는 제가  “! ! !” 하고 바디 랭기지로 

 

와다시가 줄을 잘못 서싯데 아나다니 불편 끼쳤데 스미만센 마음을 전했습니다.

 

아아아아~~아아아~~ 스미마셍, 스미마셍~~하하하하~~ 하고 웃으시더니 당신들끼리 샤부리 샤부리 샤부리~~ 하고는 우르르 가버렸습니다.

 

잠시 후에는 중국 항공 직원이 긴 줄을 훑으면서 오다가 제 앞에서 멈춰서 묻습니다. 아마도 줄 잘못서서 베이징 가는 비행기 못타는 승객도 있는지...이분도 딱 한마디만 합디다.

 

"차이나?"

 

저도 간단하게 '노!' 했더니, 그녀가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모든 혼돈의 원인은 저. ㅠ

 

엘알 보안검색은 저의 베스트 프렌드....저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지요.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에 주절주절...제 인생 요약본을 들려드리고. 전화기 열고 이스라엘 친구들과 가족 사진들을 보여주고난 뒤에 통과!

 

비행기를 탔습니다. 만석이라 3 인석의 가운데에 앉게 되었어요. 왼쪽에 한 할머니, 오른쪽으로 제 또래의 여성이 앉았습니다.

 

비행기 타자마자 저를 가운데 두고 여인이 열렬한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저는  대화의 보이지 않는 줄을 머리가 방해할까해서 상체를 의자 뒤에 바짝 대고 조용히 있었지요요. 즐겁게 이야기 나누던 할머니가 히브리어로 아줌마한테 묻더군요.  ‘여기 이 사람한테 자리 바꿔달라고 할까? 네가 가운데 앉고 이 사람 네 자리로 가자고 할까하고 묻데요.  저도 그게 참 좋은 생각갔았지만 못알아듣는 척하고 가만히 있었어요.  (제가 히브리어 한다는 것을 알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서 그냥 입닥치는 인류 평안에 기여함) 아줌마가 거절하더군요.  

 

결국 저는 그  쪽잠 자는 2 시간 빼곤 근 12 시간 할머니 덕에 바빴습니다.  

 

"아니, 미국 여권이 안보이네! 아, 어쩌지. 난 요즘 너무 잘 잃어버려. 아니 어딜갔을까."

큰 가방 구석구석 뒤지면서 찾는 할머니, 안스러워서 제가 호주머니가 수십 개나 되는 듯한  가방 속을  뒤집어서 제가 찾았어요.

 

"여기 있네요!" 

 

할머니가, "땡큐, 땡큐,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시더니 잠시 후에 이번에는,

 

"아니, 이스라엘 여권이 없어졌네."

 

그래서 다시 같은 가방 뒤지고 또 뒤지고. 혹시 머리 위의 짐칸에 올려 놓으셨냐고 하니까, 그럴 리 없다고....그래도 한번 열어보자고 했더니만 역시나 그 가방에서 나왔어요.

 

탱큐, 땡큐, 하나님 감사합니다. 갓, 땡큐...

(세속적 유대인은 절대로 하나님 찾지 않는데 이 할머니는 종교인이라서 뭐든지 감사해하셨어요.)

 

이제 눈 좀 붙여볼까 하는데  할머니가 신문 읽으려고 하는데 안경이 없어졌다십니다.

 

'왜 나는 이렇게 자주 읹어버리냐, 내가 정말 무서운 것은 치매인데, 매일 뭘 잊어버린다, 남편이 신장병인데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 어떻게하지? 큰일이다. 그런데 안경이 어디에 있지?..."

 

이 상황이  만화로 그려진다면  '구름방울' 속에 들어가야 마땅한 속생각들이 다 밖으로 흘러나오는 거에요. 전, 어차피 뭘 하긴 글렀다, 할머니를 돕자..하고 가방을 다시 뒤지다가 안경을 발견했어요. 난 어떻게 이렇게 뭐든 잘 찾아내지? 스스로 감격해서 할머니께 '여기, 안경이요!' 하고 보여드렸더니,  할머니가 찾는 건  안경이 아니고, 다른 안경이라고. 사실은 안경이 개가 있는데 개가 없어진 거라고. 중의 하나만 찾은 거라고. (... 열심히 살아야겠다...마음 먹게 되는 순간ㅠ) 결국 할머니가 화장실 가시려고 일어났을 할머니 의자에서 안경 발견했고 또 하나는 윗칸의 짐에서 발견했지요. (갓, 땡큐,땡큐... 감사하는 할머니)

 

의자에서부터 식탁을 꺼내  여는 것이나 모니터로 영화 보는 것도 도움이 필요하셔서 여러모로 도와드렸는데, 멀찌감치 앉은 사람이 보던프렌즈미드를 보여달라고 하세요. 그래서 켜드렸더니, ‘이게 같은 프로그램이 아니다. 사람이 보는 거랑 다르다 우기셔요. 사람은 이미 아까부터 보고 있었던 거라서 같은 프로그램이지만 다른 장면이 나오는 거라고 설명드렸는데, 할머니는  자기가 납득하기 전까지는 어떤 진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분이셨어요. 결국 멀찌감치 앉은 이웃이 거들어서 '할머니도 계속 보시다보면 이 장면이 나올 거라' 고 했는데 할머니는 '티비 꺼줘요. 안볼래요" 로 마무리..

 

식사 시켰는데  '너무 맛없다. 짜다. 생선 덜 익은 것같다.....' 하고는 깨끗이 비우시고, 아침 식사가 나올 무렵 주무시고 계셨어요. 음식 카트가 다가오는데 저더러 '그냥 잘래. 음식 생각 없어. '하셔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제가 받은 오믈렛을 보시더니 식욕이 동하셨는지 카트가 지나간 뒤에 크게 부르셨어요. (그 덕에 옆줄에서 식사 포기하고 잠을 자려고 하던 이웃이 눈을 뜸---그 이웃은 그 나름 재밌는 분) 

 

할머니가 넘 피곤하다고. 자기의 온 인생은 참 힘든 일이 많았노라....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아버지 병수발 3 년, 어머니 병수발 2 년, 지금은 신장투석 받는 남편을 돌보고 계심)  본인도 다리가 많이 아프시다고 비행 중 여러번 일어나 기내를 걸으셨어요. 할머니는 자기 것을 잘 챙기셔서 스튜어드들에게 민트 차를 세 번 주문하셨고, 너츠와 크래커도 항상 두 봉지, 세 봉지 받으셔서 저랑 수다떨 때 간식으로 제공하셨어요. 귀여우심..

 

우리 앞에 9 개월이 된 아가와 탄 부모가 앉았어요. 아가는 CF 에 나오는 아기처럼 엄마 아빠 보면서 귀엽게 꺄르르 웃었고, 저랑 할머니는 둘 다 아기를 보면서 입 헤~~~~ 벌리고 좋아했지요. 아가가 꺄르르 하다가 잠자고, 일어나서 잠시 징징~ 하다가 엄마 아빠 품에 들어가면 다시 꺄르르~~, 젊은 부부가 쩔쩔매는데, 할머니가 그들에게 '아기 나에게 맡겨라' 하셨어요. 그리고 '모떽, 모떽 (sweetheart, sweetheart)' 하면서 아가를 안으셨는데, 그 아가가 표정이 돌변하는 거에요.  아가는 할머니가 안는 순간 울지는 않았지만 의심이 가득한 표정. 뚫어져라 관찰하면서 절대로 웃지 않겠다는 결심을 눈빛으로 쏘아댔어요. (진짜임 ㅠ. 그리고 그게 넘 귀여웠음)

 

할머니랑 저랑 '아기가 언제 돌변해서 울지 모른다'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어르는데, 아가가 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미소를 방긋. 할머니가 무척 섭섭해 하시면서, 아기가 널 좋아하는 것같다 하고 넘기셨어요. 그래서 졸지에 큰 선물을 받았지요. 아가랑 키득키득, 도리도리 잼잼~!  오랫만에 아기 안고 노니까 어찌나 재밌던지, 그러나 제 허리가 상할까봐 조심했어요. 아기 드는 것을 근육 운동을 하는 셈이라 치자 맘먹고 아기를 들었다 내렸다 할 때 운동 할때처럼 들숨 날숨 조절을 했지요. 어깨가 뻐근하니 운동 많이 했습니다. 아울러 그 젊은 부부랑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지요. 다 할머니 덕...

 

할머니는 옆줄의 아줌마랑도 이야기를 텄어요. 처음에 옆 줄의 할머니와 너무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길래 친구이시냐고 여쭸더니,

 

'아니, 비행기 타고 만난 거야. 너랑 만난 시간에 만난 거지' 라고 하시데요. 

 

그 '옆줄 할머니'는 통로 넘어서, 제 옆의 할머니를 넘어서 저에게 자신의 삶을 나누셨어요.  얼마나 재밌는 스토리인지 빨려들어갔지요.  (저는 지금 할머니가 몇 살에 이스라엘로 이민 왔고 어디서 어떻게 공부했고, 할머니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의 이야기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책 한권 읽은 것같아요)

 

두 할머니는 각자 저를 자기 집에 초청했는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게 전화기 켜고 자기 전화번호와 주소를 입력하게 하셨어요. 요즘은 제가 바빠서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한번 뵈려고 해요. 할머니 물건 찾으랴, 이야기 들랴, 아기 보랴, 또 다른 할머니랑 이야기 나누랴---어쩌다가 하늘에서 제가 지상에서보다 더 바쁘게 되었는지 이해가 안되었지만 여하간 즐겁게 여행을 했어요.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할 무렵, 할머니가 '우리 꼭 만나야해. 내가 미국 돌아가는 비행기편을 바꾸고 싶다" 하셨어요. 할머니랑 정이 들어서 그래도 되겠다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제가 잠을 푹 자고 건강한 상태에서 만나야하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진지하게 비행기 표 바꾸는 것을 고려하던 할머니는 몇 년만에 방문이라 볼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일정을 앞당겨서 미국으로 갈 수는 없겠노라 하며 포기했어요. 그리곤 작별 인사를 거창하게 했어요.

 

'우리집에 꼭 와. 우리 아들 며느리랑 손자들이랑 다 같이 만나자. 안식일에 오면 좋을 거야. 내가 요리를 잘하거든..아, 모떽, 모떽, 오늘 너무 고마웠어.' 하면서 진한 포옹을 하고 뽀뽀로 인사를 하셔서 속으로  '우리 이제 같이 내려서 걸을 거니까 좀 있다 작별인사 해도 될텐데...' 생각했지요.

 

그러나 비행기 문이 열리는 순간, 왜 할머니가 그런 작별 인사를 했는지 이해했습니다. 할머니는 큰 가방 하나지고, 또 한 가방 하나 끌면서도 '샤르르륵~' 빠져나가듯이 먼저 비행기에서 내렸습니다. 제가 따라 내렸을 무렵, 할머니는 저만치 앞에서 점점 더 빨리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비행기에서 열심히 다리 운동 하셔서인가, 근 14 시간 비행 뒤에 훨훨 날듯이 걸으시는 할머니.  저는 놀란 채 할머니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쫓아가야했습니다. 

 

여권심사대에 도착해서 긴 줄의 뒷꽁무늬에 선 순간, 이미 여권 심사 마치고 지나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멀리 있는 유리창 너머로 보였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 후 여권심사대를 통과해서 수화물 찾으러 내려갔을 때 할머니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할머니는 제게 뽀뽀 인사를 미리 한 것이었구나 알았지요.

 

기차를 타고 하이파로 왔는데 2 시간 정도의 기차 여행 중에는 에밀 또래의 청년이 말을 걸어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도대체 쉴 시간이 없는 여행이었습니다.

 

세상에, 저는 모르는 사람과 그렇게 편안하게 뚫어지게 아이 컨택트를 하는 친구는 첨 봤어요. 사람들 보면 약간 수줍어하는 에밀과 꼴렛과는 참 다른 아이. 그러나 그가 겪는 고민들이나 하는 생각들의 많은 부분은 에밀과 꼴렛의 것과 비슷했어요. 같은 세대가 지고 가는 고민거리구나 싶더군요.  레바논 출신의 부모님을 둔 삼남매의 막내인 이 청년은 군복무 후 가이드 일을 하면서 대학 진학을 하려는 계획 중이었어요. 여행을 좋아하는 아이니까 여행객에게도 관심이 많은 것이어서 저에게 말을 건건데, 말 나누면서보니 호기심도 많고 꿈도 많은 게 예뻤어요. 그 친구가 전공을 뭘하면 좋을까에 관해서  같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잠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생각이 들긴 했어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큰 베낭을 메고 내려가는 아이의 맑은 눈과 또렷한 시선을 제 마음의 앨범에 담았습니다.

 

비행기에서도 그랬고, 기차를 타고서도 그랬고, 사람들이 자기 인생이란 병풍을 한번에 열어서 보여주는 것같아서 참 고마웠어요. 토막토막 들었지만 제가 들은 이웃들의 삶의 이야기는 정말 fascinating 했고, 짧은 만남에도 진지하게 자기의 삶을 나누고, 남의 삶에 관심을 표하고 배우려는 이웃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들만큼 들어서인가 저도 사람들 만나서 마음의 문 여는 것이 참 편하네요.   분명 피곤해야 정상인 상황인데 아마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눠서 피곤하지 않은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