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의 절친 중, 레베카 할머니는 아주 '유능한' 점성술사 입니다. 손금도 잘보세요.

 

할머니는 친구, 친구의 친척, 파티에서 만난 사람들, 식당 종업원, 가게 주인---그 누구에게든 '생일이 뭐에요?' 하고 말을 걸고 이야기 나눈 뒤 10 분 안에 그 사람의 인생을 다 읽어내서 '와..' '와...' '와...' 감탄을 자아내는 분입니다. 점성술을 믿기는 커녕 우습게 보던 어떤 대학 교수가 자녀 문제로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 레베카 할머니가 생일 읽고, 손금 읽고, 아이 문제 다 알아내고, 아이 운세까지 다 읽어내고...그래서 교수님이 놀라서 바들바들 떨다가 울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등의 성공사례들이 전설처럼 회자되는 분.

 

저도 20 대 말엽까지  정다/* 스님의 십이지- 책을 독파하고 점성술과 십이지간지를 짬뽕해서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을 즐겼더랬어요. 그래서 점성술이 말되는 소리도 있고, 엄청나게 재밌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단지 그게  맞던 안 맞던 제가 삶에 집중해 사는데 도움이 안되는 것이라 싶고 저의 인생관과는 상관없는 태도라 싶어서 끊었어요. (그건 옛날에 에세이에서 쓴 적이 있어서 생략~~)

 

제가 레베카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10 년 전, 이스라엘 아버지 80 회 생일 잔치에서였어요. 제 운세를 봐주고 싶어하시는데, 점성술을 끊은 입장에서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점성술을 믿어서가 아니고, 제 운명이 궁금해서도 아니고, 그냥 할머니가 친근감과 애정의 표현으로서도 점성술을 사용하시는 것을 알기에 제 생일을 알려드렸지요.  할머니가 '아........' 하시더니 저더러 이렇네 저렇네 많은 말씀을 해주셨어요. (정다/* 스님의 '십이지**' 에서 배운 것과 비슷한 내용이라 놀랄 것은 없었음)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저에게 (그리고 저의 옆의 사람들이 다 듣게끔) 한 말씀이 있어요. 

 

"지금 무슨 계획하는 거 있니? 넌 2 년 후에 정말 유명해질 거야. 수백 명의 사람을 앞에 두고 연설을 하고, 사람들은 너의 이야기를 경청하고....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거야...."

 

전 그 말 듣는 순간 속으로 아아..! 탄식이 나왔어요.

왜 사람들은 나에게서 이런 운세를 읽는 것일까?

그런 식의 성공은 전혀 일어날 일이 아닌데!  내가 전혀 원하는 게 아닌데!! 

 

레베카 할머니 말고 저는 가끔  운명을 읽는 사람들로부터 '넌 크게 성공한다' 는 식의 소리를 들었더랬어요.

 

1988 년 경, 기독교인 헬렌은 저에게 '5 년 후에 수백명 앞에서 연설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라고 계시를 받은 듯이 이야기했을 때, 당시  강단에 설 꿈을 갖고 공부하는 중이었던 저는, "그래? 수강 신청 많이 하는 인기 교수가 되는 건가봐?" 하고 장난삼아 대답했더니 헬렌이, "아니, 그게 아니라, 큰 연설가가 되고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될 거야" 라고 했었어요.  그 후에 성지순례 온 어떤 할머니도 그런 소리를 했고,  여행 중에 만난 어떤 집시같은 여인도 그런 소리를 했고, 일본 친구의 할머니를 방문했을 때 '내 집에는 귀신들이 같이 산다고, 나중에 내 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군데 군데 희미한 동그라미가 보일 것이고 그게 귀신들이 찍힌 것이다' 라는 으시시한 소리를 한 할머니도 저에게 크게 성공하고 유명해질 거라고 했어요.

 

다들 뭘 보고 그런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뭔가를 읽어내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가끔 남과 말할 때 신들린 듯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가끔이지만) 그게 재밌어서인가 잠시 뭐가 씌여서 제 사회적 성공을 확신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봐요.

 

여하간 그런 예언은 다 '꽝'이 되었습니다. ㅋㅋ

 

운명의 장난인지, 제가 운명갖고 장난을 친건지, 아니면 그분들이 믿는 그 무엇인가가 장난을 친건지. 그들의 계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준으로는--'폭망한 인생'!  Me!  Moi! 

 

가장 최근의 예언자인 레베카 할머니의 '2 년 후 수백 명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할 운명' 이란 예언은 2 년 후에도 계속 제가 냄비와 밥솥과 빨랫더미를 벗삼아 온종일 고양이와 노는 아줌마의 현실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할머니의 예언 능력에 스크래치를 낸 안타까운 사례일 따름!

 

여하간에, 이번에 이스라엘에 와서 만난 첫 친구가 레베카 할머니였어요.

식당에서 만나 껴안고 인사를 나눈 뒤 레베카 할머니가  "너랑 같이 해볼 게임이 있어' 라며 박스 하나를 꺼내들었어요.

 

앗,..또 예언?

할머니는 10 년 전의 예언이 안 이뤄졌다는 사실, 아니 저에게 자신이 성공을 예언했다는 사실 조차 잊으셨나?

 

할머니가 저에게  "지금 네가 미래에 대해서 알고 싶은 어떤 문제가 있니? 말해봐. 그게 어떻게 될지를 내가 알려줄께" 라면서 박스를 열었어요. 그 안에 주사위가 여러 개 들어있더군요. 

 

 '즐거운 소통을 원하시는 할머니의 원을 들어드려야하나, 아니면 정말 내가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해야하나' 하면서 제 마음의 주사위를 들고 잠시 격렬하게 고민했지요.

 

할머니가 재촉하셨어요.

 

"어서 말해봐. 뭘 생각하고 있니?"

 

할머니의 재촉에

 '팜펨아, 너도 60 이 다 되어간다. 할머니한테 맞춰드리지 말고 너도 할/머/니/답/게 이야기해봐!' 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그래서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아요."

 

할머니는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니, 제 반응이 이해가 안되셨나봐요.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아? 어서 말해봐. 생각하는 거 있잖아. 당장 안 떠올라도 생각해보면 나올 거야."

 

할머니가 저를 push 하시니까 저도 좀 더 강하게 제 의사 표현을 하게 되더군요.

 

"레베카, 전 정말 알고 싶지 않아요. 모르고 사는 게 더 좋아요. 모르고 사는 게 더 좋다는 것을 저는 확신해요."

 

그리고 제가 예전에 블로그에도 썼던 글, '한치 앞을 몰라서 다행이다' 라는 글의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가족은 2015 년 어느날 영화보고 즐겁게 저녁 먹고 사진을 찍었는데 바로 40 분 후에 아버지는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었고, 나는 3 년간의 수발을 들게 되었다. 그 이전, 2013 년에 엄마 생일 축하로 만나고 10 일 뒤에 혼수상태에 빠진 오빠, 그 후의 죽음.  두번의 경험을 겪으면서 나는 내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바로 한치 앞에 어떤 위기와 고통과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는데, 내가 '한치 앞을 모르고 살아서 다행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앞의 일을 모르니까 현재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으니까. 바로 앞의 일을 모르니까 온전히 즐길 수 있었으니까. 나는 그래서 굳이 내 앞의 일들을 미리 알고 싶지 않다' 

 

레베카 할머니는 그래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면 좋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라고 우기셨어요.

 

할머니는 스스로의 말에 설득력이 없는지 이미 알고 있었을 거에요. 본인도 '나쁜 일을 당할 거라'는 예언을 하는 분이 아니거든요. 할머니 입장에서는  점성술이든, 게임을 통해서 저에게 '그냥 뭐든 다 잘될 거다'라고 이야기 해주고 즐거운 시간 보내려고 했는데  제가 버티니까 좀 당황스러웠을 거에요. 그러나 여하간에 전 어떤 예언도 듣고 싶지 않았으므로 저의 입장을 피력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레베카, 만약에 제가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게 고통이라도 다 괜찮다, 나는 어떻게든 이겨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요?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요?"

 

그 말에 할머니가 말을 잊었습니다. 

 

"레베카, 진짜로 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싶지 않아요. 고통을 당하고 싶지는 않은 건 당연하지요. 그러나 그냥 뭐든 다 받아들이고, 거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면 삶은 무엇인가 꼭 보답을 해준다는 것을 배웠어요. 오빠의 죽음도, 아버지의 죽음도...그래서 저는 그냥 모르는 채 살래요. 알고 싶지 않아요. 제가 알던 모르던 일어날 일이 일어난다면 그냥 살아내면 된다고 생각해요. 삶은 열심히 사는 자에게 그 무엇이던 보상을 해주니까요."

 

레베카 할머니는 실망하신 게 역력했어요. 상처받으신 것같기조차 했어요. 그러나 자존심을 지키시데요.

 

'난 나에게 운명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에게만 읽어준다. 부탁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안 읽어준다' 라시면서---즉 너같이 튕기는 사람은 절대로 안 읽어준다라고 '튕기시면서'--- 박스를 닫으셨어요.

 

그러나 박스를 닫는 순간, 우리 둘 다 운명에 대한 대화도 닫아버렸어요.  

까짓것으로 마음 상할 일 있나요?

연어 샌드위치와 토마토, 오이 샐러드를 맛있게 나눠 먹었습니다.

 

할머니는 근황을 나누면서 노년의 피로함과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래도 사람들을 도우면서 열심히 살겠다는 결심을 토로하셨습니다.

저는 그게 점성술 이야기보다 훨씬 더 재밌었습니다. 

 

바로 앞에 일어날 일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우리가 서로에게 집중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게 얼마나 좋냐...싶었습니다.

 

 

 

 

 

 

 

 

 

 

 

 

 

이스라엘 왔습니다.

from 여행 2019.04.10 08:05

어제 이스라엘에 도착했습니다.

2 년 반 전 이스라엘 아버지가 돌아가신 힘든 시간을 겪고 계신 이스라엘 어머니를 뵈러 왔습니다.

일년에 한번은 꼭 어머니를 찾아뵙기로 약속했었어요., 동생의 아들이 결혼을 하고, 오빠의 생일도 크게 한다고 해서 겸사겸사해서 왔습니다.

 

 

오프라 댁의 제 방이에요. 해 잘들고 조용해서 글쓰기 넘 좋은데 글쓸 시간은 안나요.

 

 오프라랑 아침 식사. 식사 중에 전화가 왔는데 '내 딸이 와서 앞으로 1 주일간은 나는 아무런 환자를 받지도 않을 것이며 출판사 일도 안 할 것이다'라고 하시데요. 제가 오는 걸 그리도 좋아사니다는 거 감사하기도 하면서 그만큼 마음으로 하는 소통이 그리우셨나보다 싶어서 약간 안스러웠어요. . 

여행 오기 전에 할 일들이 좀 있어서 밤새면서 해치우고, 잠자는 남편 입맞춤해서 깨워 작별인사하고 택시타고 공항 갔습니다. 당근 잠이 부족했지만, 비행 시간이 13 시간-14 시간, 자면서 가면 된다 했어요.

 

그러나 쪽잠 30 분 잔 것 말고는 잠을 하나도 못잔, 한번도 이렇게 못자본 적이 없는 그런 비행이 되었습니다.

 

비행기 타기 전부터 고생.

악명높은 엘알 항공의 보안검색.

 

검색 때문에 줄이 길어지고, 비행기가 늦게 떠나는 일도 비일비재해요. 공항 들어가는 순간, 허...검색을 하도 꼼꼼히 해서 오늘따라 체크인 카운터에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이 줄을 쭉 이어 아주 멀리 떨어진 공항 출입구까지 이어서 있었어요.

 

긴 줄 끝에 합류해서 서 있는데 한참 서 있다보니까 제 옆에서 은근히 줄이 하나가 곁다리를 치기 시작했어요. 꼭 줄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그렇다고 저와 같은 줄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이상한 무리의 존재. 

 

일본여성들이었어요.  제 또래 일본 아줌마들은 정성들인 엷은 화장, 번들거리지 않으면서 은은한 화장이 특징이잖아요? 이분들도 무슨 연유에서인가 이스라엘을 가는구나..성지순례가시나? 그런데 단체가 아니네..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뭔가 눈치가 심상치 않아요.

 

뒤에 있는 사람들이 (히브리어로) 주고받습디다.

 

'여기 엘알 맞아?' '우리가 잘못 아니야?' '아니 맞을 거야. 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잖아.' 

 

그때 알았습니다. 줄의 시작이 어딘지 모르는데 바로 앞에 동양 여성 그룹이 서 있으니까 이게 이스라엘 비행기인가 아닌가 싶은 거였던 거에요.

 

급기야 제 뒤의 무리가 제 앞의 무리에게  ‘여기 엘알 맞아요?’'이 긴 줄 믿어져요?!'  고함,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함지르는 거 수줍어하지 않습니다~)

앞에 선 사람들이 또 고함,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줄이다!’'오늘 내로는 태워주겠지' 

하하하하~

 

그 와중에  옆에 은근히 조심스럽게 소심하게 줄을 여성들이 동요하는 듯했어요. 일본어로 샤불샤불샤불~~하더니

여성이 저한테

 

 ‘아나타가  지루하게싯데 있는데 와다시다치가 감히 말을 시켜저 너무 너무 스미만센~~’ 마음이 한번에 전해지는 공손한 태도로

저에게 물었습니다. 사무라이가 썩은 무 베듯이 간단한 질문:

 

 ‘토쿄?’

 

그들은 바로 옆의 ANA 항공을 타는데 저를 보고 (동양여성) 동경행 체크인 하는 라인인 줄 알고 제 옆에 선 것이었어요. 

 

일본말을 못하지만 바디 랭기쥐만을 터득하고 있는 제가  “! ! !” 하고 바디 랭기지로 

 

와다시가 줄을 잘못 서싯데 아나다니 불편 끼쳤데 스미만센 마음을 전했습니다.

 

아아아아~~아아아~~ 스미마셍, 스미마셍~~하하하하~~ 하고 웃으시더니 당신들끼리 샤부리 샤부리 샤부리~~ 하고는 우르르 가버렸습니다.

 

잠시 후에는 중국 항공 직원이 긴 줄을 훑으면서 오다가 제 앞에서 멈춰서 묻습니다. 아마도 줄 잘못서서 베이징 가는 비행기 못타는 승객도 있는지...이분도 딱 한마디만 합디다.

 

"차이나?"

 

저도 간단하게 '노!' 했더니, 그녀가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모든 혼돈의 원인은 저. ㅠ

 

엘알 보안검색은 저의 베스트 프렌드....저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지요.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에 주절주절...제 인생 요약본을 들려드리고. 전화기 열고 이스라엘 친구들과 가족 사진들을 보여주고난 뒤에 통과!

 

비행기를 탔습니다. 만석이라 3 인석의 가운데에 앉게 되었어요. 왼쪽에 한 할머니, 오른쪽으로 제 또래의 여성이 앉았습니다.

 

비행기 타자마자 저를 가운데 두고 여인이 열렬한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저는  대화의 보이지 않는 줄을 머리가 방해할까해서 상체를 의자 뒤에 바짝 대고 조용히 있었지요요. 즐겁게 이야기 나누던 할머니가 히브리어로 아줌마한테 묻더군요.  ‘여기 이 사람한테 자리 바꿔달라고 할까? 네가 가운데 앉고 이 사람 네 자리로 가자고 할까하고 묻데요.  저도 그게 참 좋은 생각갔았지만 못알아듣는 척하고 가만히 있었어요.  (제가 히브리어 한다는 것을 알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서 그냥 입닥치는 인류 평안에 기여함) 아줌마가 거절하더군요.  

 

결국 저는 그  쪽잠 자는 2 시간 빼곤 근 12 시간 할머니 덕에 바빴습니다.  

 

"아니, 미국 여권이 안보이네! 아, 어쩌지. 난 요즘 너무 잘 잃어버려. 아니 어딜갔을까."

큰 가방 구석구석 뒤지면서 찾는 할머니, 안스러워서 제가 호주머니가 수십 개나 되는 듯한  가방 속을  뒤집어서 제가 찾았어요.

 

"여기 있네요!" 

 

할머니가, "땡큐, 땡큐,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시더니 잠시 후에 이번에는,

 

"아니, 이스라엘 여권이 없어졌네."

 

그래서 다시 같은 가방 뒤지고 또 뒤지고. 혹시 머리 위의 짐칸에 올려 놓으셨냐고 하니까, 그럴 리 없다고....그래도 한번 열어보자고 했더니만 역시나 그 가방에서 나왔어요.

 

탱큐, 땡큐, 하나님 감사합니다. 갓, 땡큐...

(세속적 유대인은 절대로 하나님 찾지 않는데 이 할머니는 종교인이라서 뭐든지 감사해하셨어요.)

 

이제 눈 좀 붙여볼까 하는데  할머니가 신문 읽으려고 하는데 안경이 없어졌다십니다.

 

'왜 나는 이렇게 자주 읹어버리냐, 내가 정말 무서운 것은 치매인데, 매일 뭘 잊어버린다, 남편이 신장병인데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 어떻게하지? 큰일이다. 그런데 안경이 어디에 있지?..."

 

이 상황이  만화로 그려진다면  '구름방울' 속에 들어가야 마땅한 속생각들이 다 밖으로 흘러나오는 거에요. 전, 어차피 뭘 하긴 글렀다, 할머니를 돕자..하고 가방을 다시 뒤지다가 안경을 발견했어요. 난 어떻게 이렇게 뭐든 잘 찾아내지? 스스로 감격해서 할머니께 '여기, 안경이요!' 하고 보여드렸더니,  할머니가 찾는 건  안경이 아니고, 다른 안경이라고. 사실은 안경이 개가 있는데 개가 없어진 거라고. 중의 하나만 찾은 거라고. (... 열심히 살아야겠다...마음 먹게 되는 순간ㅠ) 결국 할머니가 화장실 가시려고 일어났을 할머니 의자에서 안경 발견했고 또 하나는 윗칸의 짐에서 발견했지요. (갓, 땡큐,땡큐... 감사하는 할머니)

 

의자에서부터 식탁을 꺼내  여는 것이나 모니터로 영화 보는 것도 도움이 필요하셔서 여러모로 도와드렸는데, 멀찌감치 앉은 사람이 보던프렌즈미드를 보여달라고 하세요. 그래서 켜드렸더니, ‘이게 같은 프로그램이 아니다. 사람이 보는 거랑 다르다 우기셔요. 사람은 이미 아까부터 보고 있었던 거라서 같은 프로그램이지만 다른 장면이 나오는 거라고 설명드렸는데, 할머니는  자기가 납득하기 전까지는 어떤 진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분이셨어요. 결국 멀찌감치 앉은 이웃이 거들어서 '할머니도 계속 보시다보면 이 장면이 나올 거라' 고 했는데 할머니는 '티비 꺼줘요. 안볼래요" 로 마무리..

 

식사 시켰는데  '너무 맛없다. 짜다. 생선 덜 익은 것같다.....' 하고는 깨끗이 비우시고, 아침 식사가 나올 무렵 주무시고 계셨어요. 음식 카트가 다가오는데 저더러 '그냥 잘래. 음식 생각 없어. '하셔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제가 받은 오믈렛을 보시더니 식욕이 동하셨는지 카트가 지나간 뒤에 크게 부르셨어요. (그 덕에 옆줄에서 식사 포기하고 잠을 자려고 하던 이웃이 눈을 뜸---그 이웃은 그 나름 재밌는 분) 

 

할머니가 넘 피곤하다고. 자기의 온 인생은 참 힘든 일이 많았노라....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아버지 병수발 3 년, 어머니 병수발 2 년, 지금은 신장투석 받는 남편을 돌보고 계심)  본인도 다리가 많이 아프시다고 비행 중 여러번 일어나 기내를 걸으셨어요. 할머니는 자기 것을 잘 챙기셔서 스튜어드들에게 민트 차를 세 번 주문하셨고, 너츠와 크래커도 항상 두 봉지, 세 봉지 받으셔서 저랑 수다떨 때 간식으로 제공하셨어요. 귀여우심..

 

우리 앞에 9 개월이 된 아가와 탄 부모가 앉았어요. 아가는 CF 에 나오는 아기처럼 엄마 아빠 보면서 귀엽게 꺄르르 웃었고, 저랑 할머니는 둘 다 아기를 보면서 입 헤~~~~ 벌리고 좋아했지요. 아가가 꺄르르 하다가 잠자고, 일어나서 잠시 징징~ 하다가 엄마 아빠 품에 들어가면 다시 꺄르르~~, 젊은 부부가 쩔쩔매는데, 할머니가 그들에게 '아기 나에게 맡겨라' 하셨어요. 그리고 '모떽, 모떽 (sweetheart, sweetheart)' 하면서 아가를 안으셨는데, 그 아가가 표정이 돌변하는 거에요.  아가는 할머니가 안는 순간 울지는 않았지만 의심이 가득한 표정. 뚫어져라 관찰하면서 절대로 웃지 않겠다는 결심을 눈빛으로 쏘아댔어요. (진짜임 ㅠ. 그리고 그게 넘 귀여웠음)

 

할머니랑 저랑 '아기가 언제 돌변해서 울지 모른다'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어르는데, 아가가 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미소를 방긋. 할머니가 무척 섭섭해 하시면서, 아기가 널 좋아하는 것같다 하고 넘기셨어요. 그래서 졸지에 큰 선물을 받았지요. 아가랑 키득키득, 도리도리 잼잼~!  오랫만에 아기 안고 노니까 어찌나 재밌던지, 그러나 제 허리가 상할까봐 조심했어요. 아기 드는 것을 근육 운동을 하는 셈이라 치자 맘먹고 아기를 들었다 내렸다 할 때 운동 할때처럼 들숨 날숨 조절을 했지요. 어깨가 뻐근하니 운동 많이 했습니다. 아울러 그 젊은 부부랑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지요. 다 할머니 덕...

 

할머니는 옆줄의 아줌마랑도 이야기를 텄어요. 처음에 옆 줄의 할머니와 너무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길래 친구이시냐고 여쭸더니,

 

'아니, 비행기 타고 만난 거야. 너랑 만난 시간에 만난 거지' 라고 하시데요. 

 

그 '옆줄 할머니'는 통로 넘어서, 제 옆의 할머니를 넘어서 저에게 자신의 삶을 나누셨어요.  얼마나 재밌는 스토리인지 빨려들어갔지요.  (저는 지금 할머니가 몇 살에 이스라엘로 이민 왔고 어디서 어떻게 공부했고, 할머니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의 이야기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책 한권 읽은 것같아요)

 

두 할머니는 각자 저를 자기 집에 초청했는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게 전화기 켜고 자기 전화번호와 주소를 입력하게 하셨어요. 요즘은 제가 바빠서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한번 뵈려고 해요. 할머니 물건 찾으랴, 이야기 들랴, 아기 보랴, 또 다른 할머니랑 이야기 나누랴---어쩌다가 하늘에서 제가 지상에서보다 더 바쁘게 되었는지 이해가 안되었지만 여하간 즐겁게 여행을 했어요.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할 무렵, 할머니가 '우리 꼭 만나야해. 내가 미국 돌아가는 비행기편을 바꾸고 싶다" 하셨어요. 할머니랑 정이 들어서 그래도 되겠다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제가 잠을 푹 자고 건강한 상태에서 만나야하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진지하게 비행기 표 바꾸는 것을 고려하던 할머니는 몇 년만에 방문이라 볼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일정을 앞당겨서 미국으로 갈 수는 없겠노라 하며 포기했어요. 그리곤 작별 인사를 거창하게 했어요.

 

'우리집에 꼭 와. 우리 아들 며느리랑 손자들이랑 다 같이 만나자. 안식일에 오면 좋을 거야. 내가 요리를 잘하거든..아, 모떽, 모떽, 오늘 너무 고마웠어.' 하면서 진한 포옹을 하고 뽀뽀로 인사를 하셔서 속으로  '우리 이제 같이 내려서 걸을 거니까 좀 있다 작별인사 해도 될텐데...' 생각했지요.

 

그러나 비행기 문이 열리는 순간, 왜 할머니가 그런 작별 인사를 했는지 이해했습니다. 할머니는 큰 가방 하나지고, 또 한 가방 하나 끌면서도 '샤르르륵~' 빠져나가듯이 먼저 비행기에서 내렸습니다. 제가 따라 내렸을 무렵, 할머니는 저만치 앞에서 점점 더 빨리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비행기에서 열심히 다리 운동 하셔서인가, 근 14 시간 비행 뒤에 훨훨 날듯이 걸으시는 할머니.  저는 놀란 채 할머니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쫓아가야했습니다. 

 

여권심사대에 도착해서 긴 줄의 뒷꽁무늬에 선 순간, 이미 여권 심사 마치고 지나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멀리 있는 유리창 너머로 보였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 후 여권심사대를 통과해서 수화물 찾으러 내려갔을 때 할머니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할머니는 제게 뽀뽀 인사를 미리 한 것이었구나 알았지요.

 

기차를 타고 하이파로 왔는데 2 시간 정도의 기차 여행 중에는 에밀 또래의 청년이 말을 걸어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도대체 쉴 시간이 없는 여행이었습니다.

 

세상에, 저는 모르는 사람과 그렇게 편안하게 뚫어지게 아이 컨택트를 하는 친구는 첨 봤어요. 사람들 보면 약간 수줍어하는 에밀과 꼴렛과는 참 다른 아이. 그러나 그가 겪는 고민들이나 하는 생각들의 많은 부분은 에밀과 꼴렛의 것과 비슷했어요. 같은 세대가 지고 가는 고민거리구나 싶더군요.  레바논 출신의 부모님을 둔 삼남매의 막내인 이 청년은 군복무 후 가이드 일을 하면서 대학 진학을 하려는 계획 중이었어요. 여행을 좋아하는 아이니까 여행객에게도 관심이 많은 것이어서 저에게 말을 건건데, 말 나누면서보니 호기심도 많고 꿈도 많은 게 예뻤어요. 그 친구가 전공을 뭘하면 좋을까에 관해서  같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잠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생각이 들긴 했어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큰 베낭을 메고 내려가는 아이의 맑은 눈과 또렷한 시선을 제 마음의 앨범에 담았습니다.

 

비행기에서도 그랬고, 기차를 타고서도 그랬고, 사람들이 자기 인생이란 병풍을 한번에 열어서 보여주는 것같아서 참 고마웠어요. 토막토막 들었지만 제가 들은 이웃들의 삶의 이야기는 정말 fascinating 했고, 짧은 만남에도 진지하게 자기의 삶을 나누고, 남의 삶에 관심을 표하고 배우려는 이웃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들만큼 들어서인가 저도 사람들 만나서 마음의 문 여는 것이 참 편하네요.   분명 피곤해야 정상인 상황인데 아마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눠서 피곤하지 않은 것같습니다. 

 

 

 

 

 

블로그는 오랜 기간효도 블로그 별명이 있을 정도로  한국의 부모님께 소식을 전하고, 신변잡기를 기록하는 장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우리집에 계시는 동안은 블로그 업데이트가 전혀 안되고 부모님이 한국에 돌아가신 뒤에 다시 개장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애도블로그' 되어서 죽음에 관한 글만 올라가고 있다. , 독자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는 못된 블로그이다. (독자가 읽기에 편한 -- 짧고 주제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 아니라,  '이거 언제 읽지' 싶게 하염없이 길고 주제가 산만한 글을 꾸역꾸역 뱉어내고 있음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오빠가 돌아가신 6 개월 ,  2014 , 독자가 이멜을 해왔다. 그녀는 '아기 재워놓고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잠깐 메일을 보낸다' 부모님께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가 '상실수업'이라는 책을 보내드리고 싶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댓글 달기도 수월치 않고, 관리자 이멜 찾는 것도 쉽지 않다고하는 블로그에 들어와 끝없이 글을 찬찬히 읽어주고....부모님을 위해 책까지 보내주겠다고 하시다니.  (엄마는 그분으로부터 책을 받았고, 책만큼, 그의 따뜻한 마음이 깊은 위로를 받았다.)


몇몇 독자들에게서 개인적인 쪽지나 이멜을 받으면서 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위로를 경험하기도 하고, 또한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글을 쓰는 누구에게 위로를 주려고 쓰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 글을 읽고 잠깐 숨을 돌릴 있다면,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있다면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스스로도 오빠의 죽음, 아버지 병환의 어려운 시간에 인터넷을 통해 읽은 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사별의 경험도 그렇지만 수발도 외로운 작업인데 시간이 없으니 support group 찾는 것도, 찾는다해도 만날 시간이 없던 ,  인터넷에서 발견하는 글들은 내가 외로움을 극복하고 삶의 용기를 얻을 있게끔 해줬다. 


사실, 처음에는 놀랐다. 오빠의 죽음, 병수발 등은 내가 모르던 세상이었고 그리고 알았더라도 추상적이기만 했는데 들어가보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리고 나보다 힘든 시간을 겪는 분들이 많았다. 나는 자연스레 무리에---말없이--끼어들어 조용히 글을 읽으면서 일방적인 관계를 --나만 알고 그들은 나를 모르는---맺어갔다. 이해와 공감을 주고받는 소통의 표현이 없이 실제로 아무런 접촉이 없는 관계임에도, 나는 남의 글을 읽으면서 안정을 찾았다. 이제까지 어디에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는데, 처음으로 누군가---고통을 겪고 있는 인류의 작은 무리-- 온전히 연대하면서 안정감마저 느꼈다. 마치 우연히 장롱에서 찾아낸 족보 속에서 이름을 때의 섬짓함과 겸허함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내가 세상에 이렇게 존재하기까지 이런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죽고 했구나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오빠의 죽음 후에는 여러 블로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다면 아버지 수발을 들면서 내게 가장 현실적인 도움과 위로를 '인터넷 ' ---우습게도---바로 아마존의 상품 사용 후기들이었다. 아마존의 여러 노인용 상품 후기는 바빠서 읽을 시간이 없을 뿐더러 시간이 있어도 정신이 산만하고 몸이 지쳐서 글을 읽을 없었던 내가 정기적으로 찾아 읽고 위로를 받았던 가상 심리치료 공간이었다.  


'아마존 심리치료사님들' 처음 만난 것은 기저귀를 찾던 중이었다. 아버지가 기저귀를 착용하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약국에서 파는 기저귀가 비쌀 뿐더러 재질이 마음에 안들었다. 종일 누워계시는데 땀이 차기도 하고, 고무줄이 너무 빡빡해서 피부에 무리가 가기도 했다. 너무 바빠서 물건 사러 나갈 시간도 아쉬웠다. 


혹시라도 아마존에 내가 원하는 기저귀가 있을까 해서 찾아보았다. 상품 설명을 읽어보고 그게 정확한지 확인하려면 리뷰를 읽어야한다. 


생각없이 리뷰들을 읽어내려가다가 나는 마음이 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저귀를 사용하고 있구나. 자기를 위해서 사기도 하고, 남을 위해서 사기도 하고, 직접 용변 수발을 들고 있구나...!


짤막짤막한 요약 평을 읽으면서 나는 감동을 느끼는가? 스스로도 처음에는 이해가 안되었다.


"간병도우미 입장에서 기저귀는 아주 편리합니다."


"저의 남편은 치매입니다. 이게 도움이 됩니다."


"할머니가 좋아하십니다"


"저의 부인은 치매입니다. 기저귀는 우수한 품질에 가격도 착합니다."


" 오빠를 위해서 샀는데 오빠가 아주 만족해합니다. 현재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고 좋아합니다."


이렇게 아주 간단한 리뷰들이 미사여구 없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누군가가 기저귀가 필요하고 누군가가 기저귀를 사고 있다는 사실. 여러 해에 걸쳐 쓰여 모여진 리뷰들이었지만 여하간 나는 나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만나게 것같아 반가웠다. 


짤막짤막한 리뷰 속에 개인사가 은근히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치매 어머니, 요실금증 할머니, 뇌출혈, 파킨슨 , 뺑소니 사고 기저귀 신세를 지게 조부모---나는나와 다른 상황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겪고 있는 불특정 다수의 이웃들의 이야기에 빨려들어갔다. 안도감같은 느껴졌다. 


"저의 어머니는 95 세이고 제가 모시고 있습니다. 저는 어르신들의 여러 문제는 물론이고 성인용 기저귀의 세계는  문외한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까지 제가 구입해온 기저귀보다 훨씬 월등한 재질의 기저귀를 우연히 발견한 것은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착용하기 쉽고, 흡수력이 뛰어난 기저귀!! 어르신들의 요실금 문제로 고생하신다면 기저귀가 풀어줄 것입니다. 아주 아주 만족합니다."


" 할머니는 이것이 지금까지 사용해온 기저귀 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속옷처럼 편하다고 하십니다. 벗기도  쉽고 버릴 돌돌 말기도 쉽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위해 기저귀를 년동안 구입해오고 있습니다. 디자인이 우수합니다.  플라스틱같지 않고 천과 같이 감촉이 부드럽고 좋습니다. 품질에 비해 가격이 싼편입니다. 아주 만족합니다."


" 기저귀는 뺑소니차 사고를 당하시고 거의 침대에만 누워 계시는 저의 조부모님의 구세주입니다. 기저귀 덕에 부모님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품질이 우수합니다. 할아버지가 기꺼이 착용하려 하는 보아 불만이 없으신 것같습니다. 쉽게 새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저의 시아버지가 제품을 년째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남편과 제가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 기저귀를 사용했지만 제품이 가장 만족스럽습니다. 옆에 탭이 있어서 조절하기가 쉽고, 소변이 어느 정도 흡수되었는지 보여주는 선이 있어서 기저귀를 언제 갈아드려야하는지를 쉽게 있으니까요."


나는 내가 원하는 기저귀만이 아니라 다른 기저귀들의 상품 평도 읽기 시작했다. 읽는 자체가 나에게 위로가 되어서였다.


"저의 연로한 어머니는 사고를 여러번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얼마전까지는 패드를 사용했다가 지금은 기저귀 팬티를 입으셔야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브랜드를 아주 좋아하십니다. 입고 벗기 편하고 품질도 훌륭합니다. 문제는 브랜드를 가게에서 구입할 없다는 것이지요."



"저는 90 세의 불구 환자의 간병인입니다. 지금까지 월그린스 가게에서 32 개당 20 불을 주고 기저귀를 구입해왔습니다. 환자의 가족이 절약할 있게끔 도와줄 있을까해서 제가 기저귀들을 찾아보다가, 기저귀를 만드는 회사가 제가 월그린스 가게에서 사는 기저귀를 만드는 회사와 동일한 회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저귀는 가게에서 사는 기저귀와 비교해 품질이 동일하나 가격이 엄청나게 싸다는 장점이 있네요. 흡수력이 뛰어나고 착용감도 좋습니다. 온라인으로 구매하면 시간 절약, 절약 (자동차 가스비)! 강추합니다."


"아마존에서 이것을 주문할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가게나 수퍼에서 기저귀를 사야하는 수고를 덜어줍니다 우습게도 친지들을 위해서 기저귀를 고를 때마다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게 되네요. 아마존으로 주문하니 그런 당황스러운 상황을 면할 있어서 다행입니다."



" 기저귀 덕에 저의 엄마는 자신감을 회복했습니다. 두껍고 흡수력이 좋아서 외출할 안전합니다. (패드를 썼을 때는 정말 당황스러운 상황이 있었지요.) 완전 히트입니다!"


"뇌출혈후 회복기에 있는 어머니를 위해서 샀습니다. 낮에 착용기에 완벽한 기저귀! 나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엄마 (my cute and adorable mother) 위한 훌륭한 기저귀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치매인데, 아버지가 엄마를 혼자 돌보는 힘에 부쳐 일년 전부터 요양원에 모시고 있습니다. 아직도 가끔은 엄마를 모시고 외출을 있습니다. 식당에서 잠깐 외식을 때야 문제가 없지만, 어쩌다가 집에 와서 오래 계시다 가실 경우에는 기저귀가 필요합니다. 제가 기저귀 전문가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엄마가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같습니다. 어머니는 파킨슨 병까지 있어서 기저귀 혼자 차는 어려운데 기저귀는 그냥 올려 입으면 되기때문에 아주 편리합니다."


.....사람사는 냄새가 폴폴 나고, 사람 사는 맛이 쓰고 달달한 후기들!! 


그러나 모든 후기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되려 불편할 때도 많다. 너무 절박해서, 너무 가난해서, 너무 외로워서...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쳐 지나면서 괜히 미안한 마음마저 들기도 했다. 


특히 성인이 자녀를 위해 기저귀를 구입한 부모들의 후기는 나의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했다. 내가 기저귀 상품 후기를 처음으로 찾아 읽던 어느날 한밤중에 거실 구석에서 소리내어 울게 만든 것은 " 기저귀는 저의 아들을 위한 것입니다" 라고 시작하는 글이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성인 기저귀를 검색 중인데... 아들을 위한 기저귀라니...아들이 성인이라는 소리?'


아아아....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같다는 표현이 맞았다. 새로이 입력된 정보가 나의 머리에 혼란을 가져와 나는 아무 것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아들에게 아주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몇년째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피부에 자극이 없고, 가격도 착합니다. 계속 사용할 것입니다."


" 기저귀의 장점은 고무줄로 되어 있어서 입기 편하고 착용감도 좋습니다. 딸아이가 편한 제일 중요한데 아이는 

기저귀가 편한 것같습니다. 팬티처럼 맞고 속에 입어도 티가 안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못할 일은 아니야! 분명 내가 상상하는 이상의 그런 보람과 기쁨이 있으리라는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내가 처음으로 들여다보게 어떤 부모들의 일상에 겸손해지지 않을 없었다. 


가끔 공원에서 성인 자녀를 태운 휠체어를 미는 부모들 보면서 힘드시겠다, 훌륭하시다~ 하고 지나쳤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힘들어도 분명 내가 상상하는 이상의 보람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사고는 아주 추상적인 것이었음을 나는 처음 깨닫게 것이다.  

쉽게 새지 않고, 냄새가 덜나고, 갈아주기에 편한 기저귀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하루에 번씩 덩치가 성인 자녀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그리고 아이가 회복되리라는 희망 없이 매일매일 같은 일을 묵묵히 하는 부모들의 일상을 처음 맞닥뜨리면서,

내가 상상도 못하는 상황이 피할 없는 매일매일의 '현실' 부모들의 이야기를 만나면서 

나는 이제까지 한번도 해보지 안았던--아니, 하지 않으려고 했던--불편한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20 대의 에밀과 꼴렛의 기저귀를 가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아이들이 자폐라서 영원히 기저귀를 갈아줘야하는 

상황이라면?  과연 나는 어떤 엄마일까?


"자폐 딸을 위해 기저귀를 구입했습니다. 아이는 의사 표현 능력이 부족합니다. 

이전에 쓰는 기저귀랑 비교해서 어떠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대답을 못하네요. 

어떨 때는 것이 좋다고 하고 어떨 때는 원래 것이 좋다고 해요. 현재 개를 사용하고 있어요."


"저의 아들을 위해 구입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호스피스에서 사용하는 기저기와 같습니다. 소변이 새거나 냄새가 나는 , 

창피할 있는 상황을 방지해줍니다."



" 기저귀가 따로따로 포장이 되어 있어서 보기도 좋고 위생적입니다. 시중의 유명 상표의 기저귀보다는 

아주 조금 작은 것같습니다만  가격 면에서, 품질 면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기저귀 덕에 삶이 편해졌습니다."



성인 자녀를 위해 기저귀를 구입한 부모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삶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열심히 읽어내려갔다

내가 이렇게 자꾸 읽고 싶은 걸까?


답을 알았다. 부모가 자식의 기저귀를 간다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이 힘든 상황이었으나, 상품 후기를 올리는 부모들은 자기들이 어떤 상황에 기저귀를 구입하며, 기저귀의 품질을 조목조목 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상황을 감정을 섞지 않고 편안하게 묘사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그것을 남과 나누는 것이 새로웠고 그것을 배우고 싶었다.  댓글들을 열심히 읽다보면 그들이 따뜻한 사랑을 ~ 이성으로 관리하여 자녀들의 병수발을 드는 , 그들의 '내공' 저력이 나에게도 전해지는 것같았다. 


'그렇지문제가 있으면 풀어가면 되는 거야.

받아들일 받아들이고, 해야할 하고...그러면 되는 거야.

나도 합리적으로 사고하면서 살아야겠다.'


라고 굳게 결심을 하곤했다. 


특히 용기를 준 리뷰들은 기저귀를 쓰고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기쁨' 표현할 때였다.

  

" 딸은 심한 자폐증을 앓고 있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저귀를 아주 많이 사용해야합니다. 이렇게 싸고 좋은 기저귀들을 발견해서 기쁩니다."


"아마존에서 기저귀를 발견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많이 사서 아이의 목욕탕 선반에 쌓아두고 개는 꺼내서 화장실 옆의 예쁜 박스에 보관합니다."

 

간단하나 힘찬 "그레잇! 딸아이에게 맞습니다" 라는 리뷰에 나는 미소지었고, 


" 딸에게 완벽하게 맞습니다. 기저귀처럼 공기가 통합니다. 강추! 여성들에게 특히 좋습니다. 다른 없네요. 

즐거운 추수감사절 되세요!" 


라는 리뷰에는 그게  몇년 전에 올린 리뷰임을 알면서도  '해피 땡스기빙! 블레스유!' 외친다

이, 엄마 아빠들, 다 내 친구들같다. 


아마존 상품 후기를 통해 나는 인종, 언어, 시간을 초월한 어떤 공동체에 속해, 가끔은 경외심에 가까운 충격도 느끼고, 어떨 때는 그냥 혼자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몸을 못쓰는 어느 누군가가 어디에서인가 돌봄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그리고 누군가가 어디선가에서 혼자 돌봄의 일을 묵묵히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외로워졌다. 삶이 '정상적' 것같이 느껴졌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서로 알아보는 능력이 있는지, 나는 실제의 삶에서도 아마존 리뷰어들처럼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고 정보를 공유해주는 의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아마존 상품 후기를 공유한 사람들마냥 이들도 자신의 삶을 문장으로 간단히, 정직하게 나누었다. 그들은 대부분 예의바른 small talk 같은 거에 시간 낭비하지 않고 직접 본론으로 들어간다. 


예로 부모님 모시고 병원에 갔을 아버지 서류를 처리하던 사무직원이 뜬금없이 나더러, "당신의 어머니, 아침에 일어나실 천천히 일어나시라고 하세요. 저의 어머니는 새벽에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는데 혈압으로 쓰러져서 목과 척추를 다쳐서 2 년간 침대 신세지고 돌아가셨어요. 누웠다가 일어날 혈압의 변화가 크기 때문에 어르신들은 조심해야해요" 라고 했다. 충고를 받아들여 엄마는 아침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일어나신다.


한국 슈퍼마켓에서 과일을 고르는데 옆에 있던 아저씨가 엄마더러, 역시 뜬금없이,


"어머니, 다리 힘이 약해지시면 안됩니다.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연습을 하셔야해요. 근육을 만들어줘야해요. 한번 해보세요."


하더니만 엄마에게 다리 운동 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도 자기 엄마 생각이 나서 나의 엄마에게 효도한 것이다. 소리를 교훈삼아 엄마는 스쿼트 운동을 매일 하신다.


어느날은 엄마가 산책을 하고 있는데 엄마 옆으로 자전거로 지나친 중학생 아이가 자전거를 급히 세우고는 엄마가 자기에게 올때까지 기다렸다가 엄마에게 하이 파이브! 했단다. 웬만한 중학생 아이들은 노인네들은 호수의 거북이나 정원의 토끼보다도 관심을 기울이는데, 아이는 아마도 나름대로 어떤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기에 지나가는 동양인 할머니를 보고 멈춰서서 격려할 생각을 것이겠지...


나도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거르지 않고 자유스럽게 경험을 나눈다. 지금까지 삶에서 사람들과 소통이 이렇게 쉬웠던 적이 없다. 사람들과 단시간에 벽이 허물어진다. 나보다 힘든 사람을 보면 축하해주고, 나보다 힘든 사람을 보면 존경심과 격려를 표현하게된다. 남들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짐을 갖고 가는 사람들은  남의 노력을 폄하하거나 자기보다 편한 팔자를 질투하거나 시간이 없다. 각자 자기가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면서 남의 일을 인정해주고 격려해준다. 나의 경험으로는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해도--격려가 되었다. 그만큼 외로운 일이기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은 옛날에는 전혀 없었던 만남들이다. 그리고 기대치 않았던 상황에 저절로 생기는 support group, 정기적으로 만나 위로를 주고받지 않아도아니 위로를 기대하지 않는 상황에 후하게 전해지기에  감동을 주는 위로는 귀한 축복이다. 


독자들에게 친절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소통하지 않으면서도 이 블로그를 아직 닫지 않는 이유가 있다. 내가 아마존 상품 후기를 읽으면서 안도하고 위로를 얻었듯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고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아버지가 손을 못쓰시게 된 뒤에 어떻게든 손을 움직이게 하려고 한 일들이 몇 개 있다. 종지 하나에 박하사탕을 채우고, 옆에 빈 종지를 두어, 아버지가 박하 사탕을 한 종지에서 다른 종지로 옮기시게 하였다.  지력이 왕성한 아버지가 그런 단순한 동작을 하셔야하는 게 가슴아팠다. 어느 날,  손가락을 굽힐 수 없어서 펜을 잡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공처럼 둥근  플라스틱 펜꽂이를 사서 아버지가 펜을 잡게 해드렸다.

 

"아버지, 쓰고 싶은 거 뭐든 써보세요"

 

아버지는 잠깐 생각하시더니 아주 천천히 엄마, 오빠, 언니, 나의 이름을 한문으로 쓰셨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쓰셨다. 

 

 

나는 '아.....' 하고 소리내었다. 관사가 두 개가 빠지고 동사 하나가 빠졌지만, 아버지가 쓰신 구절은 분명히 영국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 (Percy Bysshe Shelley) 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 (Ode to the West Wind) 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The trumpet of a prophecy! O, Wind,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예언자의 나팔 소리! 오, 바람이여,

겨울 오면, 봄 또한 멀겠는가?)

 

아버지는 펜을 놓으시고 나를 올려다보시며 "왜 이 구절이 생각나는 걸까?"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셨다.

그리고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내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헌병의 통역관으로 죄수들의 심문을 통역했을 때....."

 

(아버지는 서울대 재학 시 전쟁이 발발해 국군으로 참전했고 영어 통역관으로서 거제도 포로 수용서의 포로들의 출신 (남한/북한), 나이, 소속, 계급 등을 묻고 이념적 성향을 파악/분류하는 심사의 통역을 했다.) 

 

"그때 만난 한 포로가 있어. 셸리의 '서풍'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이 생각나.  그는 자기가 김일성대학 영문과 교수라고 했는데 철저한 공산주의자같았어. 그가 심문이 끝난 뒤에 미군 헌병의 눈을 쏘아보면서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라고 하겠지!

 

난 정말 깜짝 놀랐어. 당시 정치학과 학생이었지만 시를 사랑해서 외우고 다니던 나는 그게 셸리의 시의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포로수용소에서 심문을 하는데 포로가 시를, 그것도 영시를 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 그때는 지금과 달리 영어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었거든. 골수 공산주의자가 자기가 경멸하는 영미 제국주의의 언어와 문학을 통해서 자신의 저항 의지를 표현하고 이념을 주장했다는 건 참 흥미로운 사건이지.

 

더군다나 그가 도전적인 표정으로 인용한, '겨울이 오면 봄이 멀겠냐' 라는 구절이 너무도 의미심장했어.  자기가 지금 포로로 갇혀 있지만 언젠가는 해방될 것이라는 소리도 되겠고, 아니면 북한이 인민해방 전쟁에서 이길 거라는 도전적 희망의 표현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는 심문 중에 나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서울대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기가 인용한 시의 의미를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도 느꼈을 거야.  정작 미국인 심사관은 그 시를 모르니 한국인인 우리가 영시를 인용하고 의미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난 참 복잡한 감정을 느꼈어. 나랑 그는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라. 문학을 사랑하는 그와 내가 이념에 의해 나눠져서 포로와 심문관이라는 처지로 만났다는 것이, 같은 시를 들으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봄'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그런 슬픈 감정을 느꼈어.

 

나중에 내가 70 년대 중반에 셸리의 시를 번역했는데 그때 내내 그 포로 생각이 났어.  

그는 북한으로 돌아가서 다시 교수가 되었을까?, 똑똑한 사람이니까 무슨 일이든 했겠지? 그는 과연 자기가 꿈꾸던 봄을 맞이했을까?"

 

아버지가 천천히 오래 오래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심취해서 들으면서 서풍의 그 마지막 구절이 아버지 세대에게는 아주 큰 울림과 의미가 있는 듯하다 싶었다. 김일성 대학 영문학과 교수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도 정치학 전공자였음에도 셸리의 시을 외우고 있었고, 나의 주례를 섰던 아버지 연배의 신학자 황성수 목사님도 그 시를 다 암송할 수 있었다. 1989 년 도, 내가 한국을 방문하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만난 연세가 지긋한 한 어르신도 내가 영문학을 한다고 하니 자신은 영문학이라고 하면 '겨울이 온다면 봄이 멀겠는가'라는 싯구절 하나밖에 모른다고 했었다. 함석헌 선생이 그 시를 번역하고 ("서풍에 부치는 노래") 마지막 구절이 어떤 고난에서도 그를 잡아준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였다고 한 것도 유명한 사실이다. 어쩌면 일제의 압제와 참혹한 이념 분쟁과 전쟁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어낸 세대가 공유했던 처절한 저항의식, 혁명이 가지고 올 새로운 세상, '봄'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말을 멈추고 우수에 잠긴 표정으로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말씀했다.

 

"오늘따라 최석규 생각이 많이 나는구나. 신주, 너는 내 친구 최석규를 기억하니?"

 

기억하다마다. 최석규 씨는 아버지가 수상록에서 언급한 적이 있고, 몇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왜 최석규 씨를 떠올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도 김일성 대학 영문학과 교수처럼 '봄'을 꿈꾼 청년이었다. 나는 아버지 침대 근처에 내내 놓여있는 수상록을 펼쳐서 최석규 씨 부분을 아버지께 읽어드렸다.

 

(수상록에서의 글을 요약한다)

 

최석규 씨는 한국 동란 전 강대건씨가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3 학년 재학 중에 만난, 당시 연세대 철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이었던 학생이었다.  그는 학업 성적이 우수할 뿐만이 아니라 꽁트도 쓰고, 작곡도 하는 등, 다양한 취미와 재능을 가졌고, 점잖고 사려깊은 인품을 갖고 있어서 강대건은 그를 내심 존경했다.

 

전쟁 발발 후, 강대건은 인민군이 점령하는 서울에서-- 누가 나의 편이고 누가 적인지 구별이 안되는 흉흉하고 두려운 분위기에서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기위해 몸을 사리고 있었다.  어느날 광화문에서 최석규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강대건은 그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 몰라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길을 걸으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최석규가, "세상이 어떻게 되더라도 학문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겠다' 고 결의를 토로하는 순간, 깊이 감명받고 그를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당면한 문제, 즉, 어떻게 먹고사는가, 그리고 불시의 가택 수색으로 해서 젊은이를 끌고가는 '인민 위원회와 민청원의 마수에서 어떻게 벗어사는가의 문제를 협력해서 같이 풀어가기로 했다. 일단 민생고 해결책으로 빵을 만들어 팔기로 했는데, 서투른 실력으로 반죽해 기름에 튀긴 빵은 작고 딱딱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고 저녁마다 그들은 안팔린 빵을 먹어치워야했다.

 

하루는 갑자기 날이 흐리더니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오기 시작해서 허둥지둥 빵이 든 바구니를 들고 뛰던 중, 둘 중 누군가가 바구니를 땅에 떨어뜨렸다. 모래가 묻어 팔 수 없게 된 빵을 먹은 뒤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면서 허탈한 마음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중, 최석규는 철학도다운 초탈한 태도로 강대건에게 말했다.

 

 ‘지금은 천둥 번개 치며 비를 쏟아 내리고 있지만 저 구름 위에서는 태양이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후 얼마 안되어  보안 서원들과 민청원들의 가택 수색이 더욱 강화되었고, 최석규는 아침에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보안서원에 의해 잡혀갔다. 강대건은  일본인들이 방공호 용으로 파놓았던 토굴, 집주인이 피난가서 빈 집의 마루 밑 등에 숨어 지냈다. 

 

서울 수복 후 강대건이 최석규의 집을 찾아갔을 때. 대문을 들어서는 강대건을 맞이한 것은 낯익은 노래 “돌아오라,소렌토로”를 부르던 최석규의 목소리였다. 최석규와 강대건은 이제까지 각자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서로에게 설명하고 서로의 행운을 축하했다. 최석규는 다른 피납 인사들과 함께 결박되어 긴 도보 행렬을 이루어 북쪽으로 끌려갔는데 원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일어난 혼란을 틈타 도주하여 서울까지 온 것이다. 최석규는 자기는 머리를 깎아 인민군으로 오인될 우려가 있으니 강대건이 대신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날 헤어진 후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최석규가 우리측 헌병대에게 인민군의 혐의를 받고 또 다시 강제 연행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최석규를 구하기 위해서 강대건은 그가 인민군도 아니고 부역자도 아님을 증언하고 그의 조속한 석방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동네 거주자들과의 연서로 제출했다. 강대건은 연락장교로 군에 들어간 뒤에도 부산 일대에 산재한 포로 수용소의 포로들을 심사/통역할 때, 혹시라도 최석규가 인민군 포로가 되어 어딘가에 수감되어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여 모든 포로 수용소에 문의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60년이 지나도 강대건은 최석규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최석규의 빼어난 천부적 소질이 언젠가는 그를 학계나 기타 전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해 줄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최석규에 관한 소식은 영영 들려오지 않았다.  팔순이 가까운 나이에 강대건은 연세대 동문회 발행의<<2004동인록>>을 입수하여 46 년 철학과 입학생 명단에서 최석규의 이름과 연락처를 발견하여, 혹시라도 자신이 찾고 있는 인물인지 확인하고자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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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상록을 덮으면서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 왜 최석규 선생님을 떠올린지 알 것같아요. 김일성 대학 영문과 교수가 '겨울 오면, 봄 또한 멀겠는가' 라고 한 것이나, 최석규 선생님이 '지금은 천둥 번개 치며 비를 쏟아 내리고 있지만 저 구름 위에서는 태양이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라고 한 것이나 다 같은 사고의 표현이었네요."

 

"그래. 같은 저항정신, 같은 꿈. 다 같다. 단지 서로 다른 이념을 지지하고 그것을 위해 저항하고 투쟁하려고 한 게 달랐지."

"정말 그렇네요."

 

그날 밤 늦게까지 나는 잠을 못이뤘다.  이제까지 나에게 흑백 사진으로만 존재하던  과거가 갑자기 총천연색을 입고 새롭게 떠올라서였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 군집해 있는 포로들의 또렷하지 않은 이미지 속에서 갑자기 눈매가 또렷한 한 북한 군인이 나타났다. 짧으나 더부룩한 머리, 맑은 피부, 우중충한 포로복을 입은 그가 영시를 읊었다. 또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고무신을 신은 청년 둘이 기름에 쩔은 빵을 팔겠다고 길가에 앉아 있는 모습도 떠올랐다.  비를 피해서 뛰다가 빵을 떨어트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그리고 그 빵을 줒어 털어서 먹는 모습도 상상되었다. 그런데 세 명의 청년들의 마음에 시가 흐르고 있었고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과 함께 그날 아침, 손이 굽은 아버지가 정성들여 쓴 싯구-- '겨울 오면 봄 또한 멀겠느냐' ---의 삐뚤삐뚤한 글자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왜 그 구절을 썼을까? 

 

그것을 쓰면서 구순의 긴 여정에서 스치듯 짧게 지나쳐간 김일성 대학 영문과 교수와 친구 최석규.  일제의 압박과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그들이 포기하지 않았던 희망의 메시지를 지금 아버지가 다시 떠올리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죽음의 '겨울'이 가까워지는 지금, 아버지에게 '봄'은 무엇일까?

 

전쟁 후 60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고, 아버지는 불구가 되어 미국 땅에 살게 되었다. 이념을 위해 투쟁하던 동년배들은 필시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아버지처럼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겨울 오면 봄 또한 멀겠느냐' 라는 싯구를 쓰면서 그가 희구하는 '봄'은  분명히 서풍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주제--즉, 고루한 사고, 낡은 구세계가 타파되고, 자유와 평화가 꽃을 피우는 시기--로서의 '봄'을  아닐 것이다.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담담히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에게 '봄'이란 문자 그대로 죽음의 겨울이 끝나고 도래하는, 죽음 후에 새생명이 꽃피고 움트는 시기가 아닐까? 그에게 김일성 대학 영문과 교수와 친구 최석규는 어떤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희망의 상징적 존재들이다. 왜 희망을 가져야하는지, 또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역경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준 롤모델들이다.

 

힘든 투병의 시간에 아버지가 밝고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이유, 불평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상냥할 수 있는 이유는, 영시를 읊는 북한군 포로와 비구름 너머의 해를 희구하는 철학도마냥, 아버지 역시 '겨울 오면 봄 또한 멀겠는가' 라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봄에 향한 희망은 곧 겨울의 혹한과 죽음을 끌어안는 것을 의미한다. 겨울을 거쳐야만 봄이 올 수 있으니, 어떤 면에서 겨울은 필요한 과정이다. 재생을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 그러니 죽음에 조바심을 내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죽음이 삶을 잉태하고 있는데 뭐가 두려우리오!  바로 저편에서 새생명과 재생을 약속하는 봄이 손짓하는데 못 참을 게 무엇이리오.

 

이미 삶 속에 죽음을 서서히 키워가는 아버지, 아버지는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절망하지 않듯이 나도 절망하지 않는다. 그가 언젠가 겨울을 맞이할 때 그 얼음을 뚫고 움트는 봄의 약속, 새로운 탄생을 기대할 것이다. 

 

 

 

 

 

따다따다,  샤악샤악,  챡챡챡챡  스윽스윽.  부엌에서 칼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살림을 시작했다.

 

아버지 수발을 들기 시작하면서  결혼 전은 물론이고 결혼 후에도 20 년간 남편의 이해와 관용을 밥삼아, 아이들의 무지를 반찬삼아 잘도 피하고 도망다니던  밥하기, 부엌일은 끝났다.  달걀 프라이에 김치 볶아주고, 거기에 김 몇 장 잘라주면 “엄마, 그레잇 디너! 땡큐~~!” 남발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뿌듯해하던 사깃꾼 엄마는 없어졌다. 완전 대대적인 변화가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이것저것 줒어먹을 곳도 많고, 몸이 건강하니 줒어먹어도 괜찮지만 아버지는 아니었다.  모든 음식에 구역질을 하셔서 누릉지만 드시다보니 영양 부족으로 몸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좋아하던 음식들이 다 역해지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 씹을 수 있는 능력이 다 감퇴되어 버린 상황이니 어떻게든 아버지 입맛과 치아 능력에 맞고 영양이 골고루 가게끔 노력해야한다. 그러다보니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행히 아버지는 참 잘 드시고, 당도 잘 유지되고 있으며 변을 잘 보신다. 아주 뿌듯하다.

 

문제는 안하던 요리를 하자니 내 몸은 상처가 많아졌다. 한번은 왼쪽 손바닥에 큰 칼 흠집 하나, 중지에도 하나, 오른손 집게 손가락에 상처 하나 등, 요리 처음해보는 자취생이나 신혼 부부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상처들이 수두룩하니 에릭이 깜짝 놀라 물었다. 

 

"당신 일을 많이하네. 어쩌다가 이렇게 상처를 많이 입었어? 손바닥의 상처는 어쩌다가 난거야?"

 

살림꾼이 되어 버린 부인에게 존경과 감사가 범벅이 된 그의 말에 난감했다. 남이 보면 한상 크게 차려주겠다고 먹잇거리 찾으러 산으로 가 들짐승과 사투를 벌이면서 얻은 상처같은데 실제로는 도망가기는 커녕 아주 조신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예쁜 아보카도를 잡다가 받은 상처이다. 에릭이 "아니, 아보카도를 자르다가도 이렇게 될 수 있어?"라고 놀라 물었다. 에릭이 미소를 띈채 존경심이 가득한 톤은 저리가라 추긍조로 '손가락에는 왜 반창고를 붙였냐'고 물었다.

 

"양파 자르다가. 양파도 미끄러워."

 

마치 남편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양파를 본 적이 없기라도 한 양 뻔뻔하게 둘러대면서 약간 쑥스러웠다.  그 옆의 상처는? 또 묻는다. 그건 샐러리를 자르다가....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었다. 일을 열심히 하고 인정을 받기는 커녕, 내가 잘못해서 상처낸 거라는 것만 스스로 폭로하고 있으니 말이다.  . 마치 전투에서 폭파 사고 와중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참전 무공 훈장을 받은 용사가 나중에 조사에 의해  애초에 실수로 지뢰를 잘못 건드려 폭파를 일으킨 주범이라고 밝혀져 훈장을 빼앗겼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칼의 상처만이 아니라 불에 데는 일도 잦아졌다. 스프 저을 때 뜨거운 스프가 튀겨서 아앗~ 비명 지르는 것은 애교에 속한다. 뜨거운 기름에 수분이 들어가, 아니면 수분에 기름이 부어질 때, 뜨거운 팬을 잘못 잡을 때 입은 크고 작은 화상이 팔과 손에 즐비하고, 게다가 손빨래, 설거질, 아버지 목욕 등으로 손에 물이 마를 틈이 없이 일을 하니 부분적으로 습진도 생겨 결혼반지를 낄 수 없게 되었다.

 

핸드크림이란 것을 발라야한다던데 그걸 발라봤자 금방 다시 손을 물에 담궈야하고 한번도 바른 적이 없다.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아버지의 생사가 나눠지는 상황--질식, 감기, 욕창--에서 내가 잘먹고 잘쉬는 것--내 건강--은 중요했지만 내 손과 얼굴의 미용은 당연히 관심 밖이 되었다.

 

어느날 엄마가 나의 손을 보고 가슴아파했다.

 

"네 손이 아주 거칠구나. 손이 참 고왔었는데....."

 

그말은 맞는 소리였다. 그런데 곱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내 손은 고생할 일이 없었다.  글쓰고, 낙서하고, 편지쓰고, 그림그리고, 자판 두드리고, 피아노치고, 기타 줄 튕기고---그렇게 나의 손은 사고의 세계를 넓혀주고, 즐기게 해주고, 그렇게 재밌게 살라고 머리가 지시하는대로 움직여주는 도구였다. 힘든 일 안하고 사니 손이 고왔던 게 당연하다. 

 

결혼하고 나서도 동네에 소문날 정도로 허술한 살림 실력에 나의 손은 큰 고생을 하지 않았다. 나의 살림의 목적은 '빨리 해치우고 내가 좋아하는 거 하자' 였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집안 일들은 어서 대강 해치우고 내가 좋아하는 일, 의미있는 일, 내 정신 세계를 건강하게 해주는 일들을 해야지...여전히 나는 책을 읽고, 편지쓰고, 자판을 두드렸다. 아기 손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쭈글쭈글...

엄마는 내가 아버지와 엄마를 모시느라고 손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 손을 만지면서 안타까워했다.

 

"어쩌다가 네 손이 내 손같이 되었니...우리때문에 고생해서 너무 미안하구나."

 

어이구, 무슨 소리!  내 손이 엄마같다니! 내 손이 아무리 늙어도  평생 쉴사이 혹사되어온 엄마의 손을 따라갈려면 멀었다.  엄마는 항상 바쁘게 몸을 움직이고 손을 써서 가족을 섬기고 전업주부로서 당신의 삶에 만족하고, 살림을 재밌어 하고 살아온 엄마의 거친 손.

 

그런데 엄마의 열정적 살림은 당신의 딸들은 경제력을 갖고, 자신만만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수 있게 하겠다는 결심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었다. 즉 엄마는 내가 엄마같이 되지 않기를 바라셨다. 내가 엄마께 죄송한 부분이다. 학위를 수집하기라도 하는 양 이스라엘, 프랑스, 미국에서 여러 학위를 따고나서 전업주부가 되어버린 나는 엄마에게 못할 일을 했다. 내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그 긴 여정 동안 나를 항상 든든히 지지해주고 기다려준 엄마께는 항상 죄송함을 느낀다.  내 마음의 빚을 영원히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떨 땐 슬프기조차 하다.

 

하지만 어쩌면 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엄마이다. 엄마는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여 열정적으로 해온 주부이고 섬기는 삶에서 행복을 느끼셨으니까. 나는 엄마처럼 살림을 하면서 그런 기쁨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이제까지와는 다른 용도로 손을 쓰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고 무척 행복하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것을 하게 해주고, 내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내 손이 감사하다. 아버지의 용변 수발은 단지 '똥을 치우는 일' 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아버지께 사랑을 표현하고, 아버지를 외로움과 두려움에서 보호해드리고, 삶의 마지막 챕터를 용감하게 써나갈 수 있게 해드릴 수 있기에 소중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그까짓 똥기저귀 가는 일로서 한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지를 지키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지덕지하다. 손으로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그래서 '죽을 지경'을 '살림'으로 변환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롭다.

 

그렇듯 거칠어져가는 나의 손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과 관계를 가져왔다.

 

이제까지 '머리 대신'에 '몸'을 쓰는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을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하지는 않았다고는 자부하지만 내가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화하고 연대한 적은 없었다.  경비원 아저씨, 동네 행상 아줌마들, 환경미화원 어르신, 그 모두에게 나의 시선은 다정했고, 나의 마음은 따뜻해했지만, 나는 항상 그들과 거리가 있었다. 마치 상아탑 창문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다고 할까?  내가 그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으리라는 것은 내가 굳이 결심할 필요도 없는 하나의 '팩트'였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자아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나에게는 교육 받아서 사회에서 인정받고 대우받고 편안하게 사는 게 지하철 1 호선, 시청 역 다음에 종로 2 가 처럼, 당연한 귀결으니까.  

 

그런데 요양보호사들과 같이 일을 하면서, 나의 아버지를 위해 궂은 일을 성심껏 하는 그들을 통해서 나는 '도움을 주는 손' '마음을 담아 일을 하는 손'의 아름다움에 감동받았다. 책 속에 파묻혀 읽고, 글쓰고, 수정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회에 가서 발표하고---그런 학자의 길이 아름답다면 그에 못지않게 적은 보수에도 열심히 자기가 담당한 환자들을 위해서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하는 요양보호사들의 일도 귀하고 아름다움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나도 그런 일을 배워가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나는 변화했다. 이런 이야기 쓰면서 마치 내가 누구를 내려다보면서 '이 내가 누군데 이런 궂은 일을 하고 이런 훌륭한 생각을 하게 되었니..난 여러모로 잘났구나...' 라고 하는 것같이 들릴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든다만, 그건 내 진심의 왜곡이다. 그러므로...who cares! 이다. 나는 분명히 뭔가 배웠고 그걸 이야기하려함이니...  

 

나의 변화를 나는 아이들 교육 방식에서 나타났다.  1 년 전,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던 우울한 아들이 나와 남편에게 "나는 똥같은/더러운 일 (shitty job)은 하고 싶지 않아!" 라고 투덜거렸다. 

 

욕처럼 사용되는 저속한 단어의 사용에 내가 충격을 받아 잠시 말을 잊었는데 남편이 1 초의 망설임도 없이 반박했다.

 

"에밀, 이 세상에 더러운 일이란 존재하지 않아. 세상에는 일만 존재할 따름이야."

 

그 말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나는 감사했다. 그리고 내가 끼어들었다. 내 경험으로 나는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에밀, 너는 실제로 shitty job 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어. 누군지 아니?"

 

에밀이 그게 무슨 소린가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의 엄마야! 하하하! 엄마는 아침 저녁으로 똥을 만지고 살아. 엄마랑 같이 일하는 아줌마들도 똥치우는 일을 하지. 사실 그분들은 엄마보다 더 많이 똥을 치우고 있어."

 

에밀은  '더러운 일 (shitty job)'이라고 했을 때 shitty 란 단어를 하나의 비유--즉 '똥만큼 더러운'의 의미--로 사용했다. 나는 에밀에게 나와 간병 도우미들이 하는 일은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똥의 일 (shitty) 을 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에밀아, 엄마가 해보고 알았는데  '똥을 만지는 일'은 절대로 '똥같이 더러운 일'이 아니야. 그걸 너랑 나누고 싶어."

 

미국 사람들이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욕, 'shitty' 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또박또박 사용하면서 이야기를 하니 에밀이가 아무 말 없이 들었다.

 

사실 나는 에밀이가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나도 55 세가 넘어서 서서히 깨닫게 된 일, 책을 통해서 머리가 깨인 게 아니라, 실제로 손을 사용해 일하면서 터득한 진리인지라, 20 세 초반의 아이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게 오히려 당연했다.

 

'에밀아, 엄마와 함께 shitty 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밤에 달게 잠자고, 사소한 것들을 감사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선 자리에서 더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 물론  그들이라도 100 퍼센트 행복한 건 아니지. 엄청 피곤하니까. 가난하니까. 남들이 내려다보니까. 

 

그러나 그들의 shitty job 때문에 그들의 삶이 shitty 하지는 않아. 그들은 배웠다고 교만하고, 사랑의 마음은 고사하고 분노와 질투가 가득하고, 항상 자기를 증명하려고 애쓰면서 자기도 피곤하고 남들도 피곤하게하지 않아. 그리고 적어도 그들이 하는 일들은 직/접/적/으/로 한 생명의 존립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일이야. 돈을 많이 받지는 못해도....얼마나 고마운 일이니. 남들이 더럽다고 안하는 일들을 해서 사람들을 살려주고 있으니 말이야."

 

에밀은 이해를 하는지 못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진정성을 존중해 내 이야기를 듣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 후 1 년간 에밀은 더 큰 격동의 시간을 거쳤다. 에릭과 조심스럽게 그를 관찰하고 도우려했다. 이러다가 아이의 정신이 다 무너져버리는가 두려운 순간도 있어서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작년 11 월이었다. 추수감사절 휴가가 끝날 무렵, 에밀과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자기는 공부가 재미없고, 왜 공부해야하는지 모르겠다고--나에게 화를 내듯이--이야기했다. 그 순간, 아, 이제까지 내가 인내하고 돌봐줬으면 되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왜 내가 너를 공부하라고 독려해야하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학교를 그만둬라."

 

에밀이 깜짝 놀랐다. 1 년만 하면 학사가 끝나는데 그만두라고 하니까 놀랄만도 했다.

 

"네가 학위 끝난다고 다른 사람이 될 것같아? 아닐 거야.. 넌 여전히 불만스러워하고, 여전히 불평할 거야.  그렇게 살아도 상관없어. 네 인생이니까. 단지 그런 너에게 우리가 경제적 보조를 해줄 필요는 없지."

 

나는 에밀이가 오해할까봐 정성을 다해서 설명했다. 우리가 경제적 보조를 끊겠다는 게 그를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공부 안한다는 것에 대한 처벌도 아니라는 것을.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을 '특권'이라는 것을 매 순간 느끼고 살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특권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불평불만만 일삼는다면, 비싼 돈 내면서 그런 소리 하고 있느니 아예 때려 치우는 게 낫다고.

 

 '머리에 똥만 차는 교육' 보다는 '똥을 만지는 일'이 더 교육적이라는 게 나의 확신이고 진심이었다. 학위는 필요없다!

 

나의 말에 반박도, 부정도 없이 에밀은 가만히 들었다. 나는  '에밀아, 너도 shitty work 을 한번 해봐. 뭐든간에.' 라고 권했다. 

 

"지난 1 년 동안 너는 너무 아팠고 그래서 엄마 아빠가 너더러 날아보라고 밀치지를 않았어.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널 도와주면 너를 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상황이 된 것같아. 너는 이제 날아야해. 너를 믿고 한번 날아봐."

 

(그 후 4 개월뿐이 안 지났으나 에밀은 정말 많이 변했다. 현재 에밀은 휴학 상태로 신발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2-3 회 새벽 4 시 반에 일어나 다섯시까지 출근해서 신발 박스를 내리고 정리하는 일을 하고, 2-3 일은 오후와 저녁에 일을 한다. 책도 읽기 시작했고, 자기가 좋아하는 피트니스 트레이너 자격증 과정도 잘 해가고 있다. 며칠 전에 문자가 왔는데 자기가 죠르단 피터슨의 책을 읽던 중,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자녀 교육'에 관한 챕터를 읽으면서 부모의 역할과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영향에 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 챕터를 읽은 뒤에 나도 이제 자녀 교육에 관해서 옛날과는 달리 어떤 의견과 방향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엄마랑 아빠가 나에게 해준 교육에 관해서 더 큰 감사함을 느낀다" 는 문자를 보내왔다. 아이의 고통스러운 방황이 점점 끝나가는 것같아서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다)

 

만약 아이와 내가 바로 3 년 전에 아이의 진로와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면 어땠을까?

 

분명 나는 아이가 '더러운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교육의 목적이 그것이니까), 어떻게 하면 아이가 사회적 보상과 인정을 받고 자신감을 갖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같이 고민했을 것이다. 대학원을 갈래, 유학을 갈래, 1 년간 봉사활동을 가서 여러 경험을 쌓아볼래, 그러기 위해서 일을 해서 돈을 좀 모아봐라, 우리가 도와줄께~~~ 하면서 아이의 '독립적' '성장'을 위해 같이 고민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면서도 내가 좌지우지하지 않으려 하고  아이가 스스로 결정을 하게끔 하려고 조심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건 가장 바람직한 부모의 태도일지 모른다. 분명 아이가 앞으로도 그런 고민들을 할 것이고, 부모로서 나의 역할은 만년 현재 진행형인 고민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3 년 전, 아버지 수발을 들기 전과 그 이후의 내가 다른 점이 있다. 아이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직업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이래야 애가 편하게 잘 살텐데---!' 라는 간절함이란 1 퍼센트도 없다. 직업관이 달라지고 일에 대한 관점이 달라져서이다. 섬김의 아름다움, 희생의 중요성 어쩌구 저쩌구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에 '똥같은 직업, 엿같은 직업'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어서이다. 그저 엿같은 직업이라고 차별하는 인간들만 있을 따름이다. 그게 좀 성질나게 만드는 요인이지만 그것도 '엿같은 분들' 이라 생각하고 넘겨버리면 된다. 나는 그저 내 아이가 엿같은 직업을 차별하는 것을 바꾸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그리고 지금 서서히 아이의 사고가 바뀌고 있다. 다행이다.

 

물론 가능하다면 아이가 자기가 원하는 일 찾아서 하면 정말 좋겠다. 그러나그런 사람은 아주 소수라고 하고,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다 고려해보면  내 자식이 그런 선택받은 소수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흐...어쩌겠냐. 그러면 그런 거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많은 돈을 주무르는 성공을 했다? 그것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온 몸이 삭게 노력을 한다? 그것은 아이의 선택이니 존중해야하겠지만 나는 돈이 많고 세상이 알아준다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에휴...가엾은 것...할 것같다..

 

좋아하는 일도 아닌데, 돈도 많이 못 받는다? 그럼 어떠냐. 그냥 열심히 살아라. 꾀부리지 말고, 수 쓰지 말고. 

 

뭐든 다 좋다다. 수발을 들어서 깨달은 진리라고 하면 꼭 '힘든 일을 해야 인간이 성숙한다'는 식의 따지고 보면 아주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일들이 어떻게 보냐에 따라서 힘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한 뒤의 든든한 뱃짱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차별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이 직업에 의해서 남을 차별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암암리에 직업과 일의 귀천을 미리 정의해버리는 버릇은 다시금 암암리에 사람의 귀천을 정의해버리는 엄청난 과오로 이어질 수 있다.  직장 뿐이랴, 외양, 소지품, 출신학교, 집안---남과 자신을 평가하게 만드는 말도 안되는 '엿같은' 기준이 많기도 하다. 그런 기준에 놀아나서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차별해서 잘해주거나 박대하고, 동시에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와 근거없는 오만함에 빠지게 하거나 불행한 인격적/정서적 자해를 하게끔 만들지 않는가!

 

나는 에밀이랑 꼴렛에게 함부로 내 의견을 강요하지 않으려하지만 직업과 일의 귀천을 정의해버리는 사회의 편견과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말은 자신있게 한다.  사람을 눈으로 만나고, 마음으로 발견하고, 머리로서 현명하게 관계를 키워나가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도 한다. 틀린 소리가 아니므로 아이들이 고깝게 듣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바램이 있다. 그런데 너무 유치하게 들리기도 하고 분명 못 알아들을 이야기라서 안한다. (내가 55 세 되어서 깨달은 걸 애들이 알아들을 리 있으랴...)

 

나는 그들이 이담에라도 거친 손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을 위/해/서.  내 손보다더 거친 할머니의 손을 갖게 된다면 더더욱 환영할 일이다.  

 

물론 지금 거울을 보면서 역기를 들어 올리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게임기를 현란하게 움직이고, 기타를 치고, 핸드크림으로 마사지해서 보들보들한 손을 가진 그들이 덜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되려 자신의 평안함과 안전함에 집착하는 그 젊음이 귀엽기조차 하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이  '수고하는 손'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손길' '마음을 담는 손'의 의미와 그런 손의 바쁨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손으로 쌓아가는 사랑의 탑은 남의 인정이라는 신기루와 달리 단단하기 때문이다.

 

녀석들이 60 이 다되어 혼자 거울 보면서, 쭈글쭈글한 스스로의 모습에도 흐믓하게 씨익 웃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오빠가 돌아가신 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해주었다. 흔히들 하는 위로들은 "좋은 곳에 있다" "편히 쉬소서" "고통이 없는 저 세상에서 행복하소서" 란 말들이다. 이미 사별을 겪은 분들은 아시는 소리겠지만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말들이다. 그 말을 하시는 분들도 아무런 위로가 안됨을 알면서도 딱히 어떻게 뭐라 해야할지 모르기에 그거라도 해서 유족에게 위로하려는 것이니 그 고운 의도를 감사하며 받아들였다.


진정한 위로는 '공감'에서 온다.  양쪽 다 같이 느끼는 공감이란 것은 어떤 경우에서든 참 어려운데 애도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많은 분들은 우리를 가엾은 대상으로 보았고 오빠를 가여워했고, 죽음을 안타까워했지만 우리랑 같은 강도의 슬픔을 느끼진 못했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당해본 사람만 아는 감정이기때문에 공감하라고 기대할 수 없다. 


공감까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마음에 울림이 오는 위로는 가능하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는 않은 듯했다. 나는 위로를 받는 처지에서 바람직한 위로, 바람직하지 않은 위로의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일단, 절대로 하면 안되는 소리--- 슬프지 말라고 설득하려고 하는 것,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라, 죽은 게 낫지 않냐는 식의 논리는 위로는 커녕 섭섭한 마음마저 불러 일으킨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게 가장 필요하다. 내버려 두는 것은 유족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을 때나  폭포수 수다를 떨때나, 놀랍게도 '낄낄거리는 웃을 때도 그게 애도의 한 과정이자 형태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거다. '분명 통곡을 하겠지. 그럼 위로해야지' 하고 다부지게 작정하고 갔는데 유족이 (나처럼 검정 아이라인 바른 눈으로 )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말빠르게 수다를 떨 경우,  '아니, 이 사람 보게나, 되게 모질다. 오빠가 돌아가셨는데 울지도 않아?' 라고 판단하지도 말고, '아, 다행이다, 살만한가보다' 라고 안심하지도 말고 인내해준다면 좋으리라. 가만히 말을 안하고 있으니까 그걸로 죽음의 대화는 끝났다 생각하고 화두를 현실로 돌려 부동산 이야기 (혼자 남은 새언니 걱정을 하다가 부동산 이야기로 흐름),  남편과의 갈등 (오빠는 참 본받을만한 남편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 남편 험담으로 함) 을 이야기하면 안된다. 


절대로 하면 안되는 것---죽음을 비교하지 말기. 위로한답시고 이야기하다가 '당신의 아들이 잘 죽었습니다. 고마워하세요' 라고 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오빠가 돌아가신 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아들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던 엄마는 세월호 아이들을 보면서 끔찍해서 울었고, 어린 아이들의 부모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힘들어했다. 그런데 그때 엄마가 들었던, 위로의 형식인데 전혀 위로가 안되던 말이 있다.


"세월호 보세요. 얼마나 가엾어요. 꽃같은 어린이들이 갔는데 아드님은 그래도 50 넘게 누리다 가지 않으셨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건 위로는 커녕 가슴에 장대못을 밖는 소리다. 세월호의 아가들이 끔찍하게, 너무도 안타깝고 아쉽게 세상을 떠난 거 생각하면 그 누구의 마음이 미어지지 않겠느냐만, 자기 아이의 죽음을 세월호의 희생자들의 죽음과 비교해서 "우리 애는 잘 죽었다"고 위로를 받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유족의 슬픔을 자기 잣대로 정의해서 '이정도 슬퍼하시면 되겠네~~' 하는 것은 무례와 무식의 극치이다. 어떤 경우라도 자기 생각으로 슬픔을 가늠하고 비교해, "당신 아들이 죽은 게 더 낫고, 저 아줌마 딸이 죽은 게 더 슬픈 일이라"고 하면 안된다. 제발.


비슷한 예로 남의 애완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의 아끼는 고양이가 죽어서 주인이 가슴아파할 때 고양이는 사람이 아니니까 덜 슬프리라 생각하거나, 사람도 아닌데 고양이 하나 죽었다고 유난떤다고 비판하지 마시라.  '왜 저러는지 몰라' 라고 비판의식이 들걸랑, 입을 닫아 걸고 절대, 절대 말을 하지 마시길. 죽은 고양이는 '하나의 고양이'가 아니라 '바로 그 고양이'이고, 웬만한 인간은 주지 못하는 순수한 사랑을 주인에게 나눠준 귀한 생명체인 것이다.  슬픔의 정도는  '고양이'이냐 '인간'이냐에 따라 나눠지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도  슬픔의 정도는 '몇살에 죽는가' '어떻게 죽는가' 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다.  돌아가신 분이,  아니면 그 고양이가 유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고, 어떤 기쁨과 행복을 주었느냐에 따라 깊이와 강도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잘 이해가 안된다면, 아주 간단하고 안전한 애도의 방법이 있다. "입다물고 애도하는 척" 하면 된다. 

그래야 상처가 없다. 위로랍시고 상처를 주는 건 가장 못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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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은 분들을 통해서 위로를 얻었다. 말로 다 표현못할 정도로 감사하다.  나는 위로를 받으면서 '적절한 위로의 방법'으로 위로를 해준 분들은 이미 본인들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어봤기에, 아니면 평소에 죽음과 삶에 대한 통찰을 깊게 하고 살아서인지, 아니면 나와 어머니를 깊이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타고난 감성이 풍부해서인지---나의 슬픔을 적절한 방법으로 만져주었고, 무거운 슬픔을 같이 지어주었다.


내가 받았던 위로의 기억들... 돌이켜보면 참 행복한 기억이다. 


아무 말 없이 황당한 표정으로 신음한 분들이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게, 또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게 위로가 되었다. 황당한 슬픔---그게 바로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무슨 말로 위로가 되겠어요..." 하는 말은 내가 이해를 받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눈물은 가장 큰 위로라는 것도 배웠다. 한 친구는 내가 눈물 한방울 없이 오빠의 사망 소식을 전하자마자 그 맑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줄줄 흘렀다. 또 한 친구는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에 잠깐 만났을 때 내가  펑펑 울 때 가만히 내가 맘편히 울게 해줬다. 오빠 빈소 앞에서 세상이 떠나가게 울었던 오빠 친구들과 오빠의 친구들의 배우자들...나에게 포근한 위로를 주었다.  


또한 나에게 아무 말도 안했고, 울지도 않았는데...그냥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된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그들이 겪어냈던 삶의 스토리를 알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이미 나를 안다는 공감대가 느껴졌다.  그리고 되려 내가 그들의 고통을 모르고 산 게 미안했다. 


우리 가족이 우리만의 고통에 허덕이고 있지만 한가지 확실히 배운 게 있다. 오빠의 죽음을 통해서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거나, 이미 좋은 분들이 얼마나 귀한지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저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게 마음을 안정시켜줬다. 내가 말을 안했는데도 나타나 나에게 도움을 준 사촌들, 말을 할 필요가 없이 그냥 나도 모르던 내가 해야할 일들을 알아서 처리해주거나 도움을 준 분들.  유품 정리할 때 기사를 대동하고 나타나 짐을 부쳐주고 날라준 친구, 오빠 홈페이지 정리해준 친구, 한국의 장례나 재산 정리에 관해 상세히 설명해주고 언제든지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해준 분, 엄마께 책을 보내주거나 목걸이를 보내준 친구,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그냥 나타난 친구들.... 그들은 위로는 '말'로가 아니라 '침묵'으로,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배워준 은인들이다.


위로는 돌아가신 분의 죽음을 논할 때 오는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물어보지 않는 게 위로가 된다. 오빠가 돌아가시자마자 사실 나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혼자 울고 혼자 생각하고 싶었으나 오빠의 친족 중의 유일한 대표로 장례에 참여해야했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가장 힘들었던 조문객들이 당연히 갖는 궁금한 사실---"어떻게 가셨는지요?" "저런...왜 그러셨나요"--에 응대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만 그 때마다 참 힘들었다. 내가 털어놓고 싶은 사람들이 있고 친구들에게는 묻지 않아도 자세히 이야기했지만, 빈소에서 처음 보는 오빠 지인들에게 상세히 기자 회견하듯이 이야기하는 게 참 힘들었다. 오빠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든 정의하면서 슬퍼할 때 어느새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있기도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왜 그렇게 덧없이 갔는지, 자식이 없어서 외롭겠다, 삶이란 너무 허무하지 않냐, 부모님 가엾다 불효를 하고 가다니 (죽은 게 마치 오빠 책임인양...).무수한 이야기를 들어야하는 빈소 상주의 역할은 고통 그 자체였다. 죽음에 왜 말이 그리도 많이 필요한 것인가...떠난 사람은 말이 없는데 산사람들이 말이 너무 많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죽음은 공평하다. 내 오빠나, 친구의 고양이나 세월호 어린이들이나 그들은 떠나면서 그들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상실감과 슬픔을 준다. 떠난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애도는 덧없는 세상을 떠난 것을 불쌍해하고 가엾어하기 보다는 그들과의 아름다운 기억을 많이 되살리는 것이리라. 유족이 원하는 방식대로 고인을 기릴 수 있게 해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애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죽음은, 그리고 죽음 이전의 삶은 이미 아름다운 의미가 있다. 어떤 식으로 살았던, 어떤 식으로 마무리지어졌던, 그것이 마무리지어지는 게 아쉬웠다는 것은 그의 존재의 존귀함을 죽음으로 역설적으로 증명해준다. 그런 문맥에서 아주 아쉬운 죽음--- 열살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난 소아암 환자, 어린 아이들을 두고 죽음을 맞이한 젊은 부모, 80 의 부모를 두고 세상을 떠난 아들, 보같고 냉정한 어른들때문에 목숨을 잃은 수학여행 학생들--은 짧던 길던, 바로 그 슬픔때문에 잘 살아진 삶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죽음은 슬퍼하는 이가 없는 죽음이다. 차가운 방에서 혼자 목숨을 끊은 할아버지, 아들에게 죽음을 당한 어머니, 경제고를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은 세 모녀, 게임하는 부모에 의해 버려져 굶어 죽은 아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려버린 젊은 여성....이 커다란 세상에서, 그렇게 많은 기회가 있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지치도록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이 세상에서 혼자 죽음을 택해야했거나, 아니면 죽음으로 버려진 이웃들이다. 다 태어날 가치가 있었고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고 행복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인데. 


내가 모르는 그들의 생각이 자주 스치고 지나간다. 슬퍼하는 이 없이 죽은 사람들이 너무 가엾다. 

생면부지의 그들을 생각하면서 애도한다. 마치 내가 슬퍼하는 게 거품처럼 사라진 그들의 삶에 조그만 의미라도 더할 수 있을까....


(2014. 10.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