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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6 : 아버님의 죽음카테고리 없음 2023. 3. 28. 19:08
어머님은 깨어 계셨다. 오늘따라 아버님이 아주 평안하게 주무시고 계신다고 알려드렸더니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다행이구나.’ 언젠가부터 어머님의 감정 표현에는 아무런 색깔이 없다. 어머님이 ‘뭐 좀 먹을래?’ 하고 물으셨다. 평생 자식들을 먹이는 기쁨으로 사신 어머님은 병상에 누워 아무것도 못하게 된 뒤에도 ‘먹을래? 먹어라!’가 주요 어록. 어머님이 드실 수 없는 병원식—스푸, 하얀 빵, 바나나, 요그크르, 애플소스, 주스—-를 계속 방문객에게 권하신다. 어머니가 시키시는 대로 요구르트에 잼을 듬뿍 넣어 먹었다. 만족해하셨다. 그랑쁠라스까지 걸어서 다녀왔으며 어머님께 집에 가서 인사를 하고 왔다고 말쓰드렸다. 어머님은 내가 나만의 시간을 가진 게 참 잘한 일이라고 하셨다. 어머님은 기분이 좋아지셔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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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5: 그랑쁠라스와 임종 준비카테고리 없음 2023. 3. 28. 09:00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내가 벨기에 온 지 나흘 째 날, 일요일 저녁 6 시 20 분 경. 시누이와 내가 아버님 곁을 지켰다. 일주일이 지나서 나는 그날에 대해서 글로 쓴다. 그날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떠나시던 순간까지를 시간적 순서로 기억하고 정리해보려고 한다. 일주일 나의 뇌리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는 충격적 순간을 담담히 대면하는 것이 나에겐 아주 필요한 일이다. 아버님의 장례식 전에 아버님의 죽음의 이야기를 곱게 정리하고, 장례식 날, 투명하고 밝은 마음으로 아버님을 보내드리련다. ————————————— 일요일 아침, 날씨가 맑았다. 비가 내릴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한번 걸어볼까?’ 욕심이 났다. 걷고 싶었다. 브러셀에 도착하자마자 요양원에 찾아갔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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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4: 아버님과의 대화카테고리 없음 2023. 3. 25. 18:41
(03-18-2023) 사흘째 잠을 푹 자고 아침 8 시에 기상했다. 호텔 조식. 어제 인사를 나눈 셰프, 앙드레가 나를 위해 조식에는 포함되지 않은 달걀 요리 (에그 베네딕트)를 만들어주었다. 아침 먹고 나서 컴퓨터 실에서 글 쓰고 공부하는데 또 다른 친절한 직원이 카페올레를, 그리고 한 시간 후에는 카푸치노를 갖다 주었다. 시차로 인한 피로를 풀려고 아침 식사를 하면서 녹차와 커피를 마셨는데 거기에 더해 커피 두 잔을 더 마셨으니 카페인 파티를 한 셈. 그러나 정신적/육체적으로 소모적인 요양원 방문을 앞두고 카페인 충전은 필수, 기운도 나고, 머리도 맑아져 가벼운 마음으로 요양원까지 걸어갔다. 어머님 방에 들어섰는데 공기가 심상치 않다. 드시는 게 없으니 뼈만 남은 어머니가 무서울 정도로 수척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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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3: 음식 수발 도우미카테고리 없음 2023. 3. 21. 07:01
03-17-2023 브러셀 비를 캘리포니아가 다 가져갔는지, 캘리포니아에서는 계속 비가 내린다던데 브러셀 날씨가 계속 좋다. 아침 일찍 호텔 조식 뒤 글을 좀 쓰고 요즘 붙들고 있는 공부를 30 분 정도 하고 난 뒤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요양원 방문을 하려면 기운이 넘쳐야 한다. 아직 시차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현지 사람들의 스케줄로 활동하려면 더더욱 충전을 잘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점심으로 샌드위치에 아주 큰 사이즈의 녹황색 채소 스무디를 마시고는 요양원으로 떠났다. 요양원에 가는 길에 꽃집에 들렀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의 꽃집 아줌마가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주었다. 오늘 어머님은 상태가 아주 양호하셨다. 화병에 꽃을 꽂아 창가에 놓은 뒤 잠시 어머니와 잠시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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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2: 요양원 방문카테고리 없음 2023. 3. 18. 22:37
오후에 부모님께 갔다. 걸어서 10 분 거리, 현재 호텔이 지난번에 묵었던 호텔과 비슷한 위치라서 가는 길이 익숙했다. 구름 속으로 비치는 밝은 햇살, 쌀쌀한 공기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줘 오랜만에 팔을 휘휘 저으면서 씩씩하게 걸었다. 요양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나올 때는 또 다른 숫자의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요양원 환자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함이란다. 지난번에 왔을 때, 나는 요양원 원생의 탈출 기도를 목격했었다. 내가 요양원 현관을 들어가자마자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그러나 자동문이 닫혔고, 그녀는 나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날 보고 “봉쥬르~” 하며 씩 웃었다. 나도 인사를 했고, 그녀의 옷이 추운 겨울 날씨에 나가 다니기에는 약간 허술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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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1: 출발 전카테고리 없음 2023. 3. 17. 18:41
시어른들을 돌보러 브러셀에 왔다. 두 달 전, 어머님이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완화치료를 받으시게 된 뒤 두 분이 한 방을 쓰시는 게 불가능하게 되었다. 시아버님이 독실로 옮기신 뒤 우울증에 빠지셨고, 동시에 지력과 표현력도 급격히 저하되시고 계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치매가 오셨다는 말도 들렸다. 남편과 나는 약간 안타까웠다. 아버님과는 대화를 하려면 노력이 필요한데 그만한 노력이 기울여지지 않는 듯해서였다. 우리 생각에 보청기의 도움이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청력이 안좋아지셔서 소리가 들리지 않으므로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 외에도 (어쪄면 약간 극복이 가능한) 여러 요인이 있었다. 첫째, 아버님의 소극적 성격에 대한 이해. 항상 어머님을 통해서 남과 대화를 해오신 아버님이 갑자기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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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심리치료카테고리 없음 2023. 3. 8. 15:27
작년 말, 이스라엘 어머니가 편찮으신데, 시어머님 건강 악화로 남편이 급히 브러셀로 떠난 뒤 마음이 무척 무거워 글을 쓸 수 없었을 때였다. 나는 삶에 어려움을 맞닥뜨릴 때마다 글쓰기라는 therapy를 통해서 극복해 왔는데 글을 쓸 수 없으니 참 힘들었다. 집중해 글 쓸 시간 없어서, 혹은 시간은 있는데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또는 시간도 있고, 육체적 힘도 있는데 의욕이 안 나서.... 필사도 중지. 글쓰기도 중지. 펜과 나는 멀어졌다. 다행히 내 어두움의 원인을 찾았다. 지난 10 년간 내가 적절히 애도하지 않았던 많은 '상실' 들. 숨차게 그저 앞에 닥치는 일만 해결하면서 달려오다보니 미처 돌보지 못했던 너덜너덜해진 마음. 오빠의 죽음, 부모님의 집과의 작별과, (부모님, 오빠, 언니 나로 이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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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 짐정리와 성찬카테고리 없음 2023. 3. 7. 06:16
남편이 작년 11 월, 급히 벨기에로 떠났다. 시댁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식구들은 저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 부모님을 돕고 있었지만 그래도 할 일이 많았다. 뭐라도 도움이 되려면 직접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의 암이 온몸에 전이가 되어서 치료가 가능하지 않다는 진단이 나온 뒤 온 가족은 이제까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즉, 어머님이 아버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상황--에 직면했다. 어머님은 당신이 떠나신 뒤에 아버님의 케어를 고려해 요양원에 들어가시겠다고 하고 당신이 살아계시는 동안 집을 처분하고 싶다고 하셨다. 시누이, 조카 두 명(시누이의 두 딸), 그리고 시동생은 각자, 그리고 어떨 때는 함께, 요양원들을 방문해서 부모님께 맞는 시설을 찾고 어머님을 모시고 가서 확인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