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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미소와 눈물카테고리 없음 2023. 5. 22. 02:54
어제오늘, 시어머님 생각이 많이 난다. 주말 아침에 항상 시부모님과 화상 채팅을 했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주말 아침, 코로나 중에는 주중에도 몇 차례 화상 채팅을 하곤 했다. 인터넷 접속이 불량할 때는 내가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렸고, 시어머님은 아들과 채팅할 때는 하지 않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아 오래오래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몇 년간 빠짐없이 지켜온 채팅 약속에 길들여진 나는 오늘도 예전처럼 10 시 채팅 이전에 하던 일을 마무리지으려고 서둘렀다. 부모님과 화상 채팅이 가능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몸과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다. 10 시가 되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부모님이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 사실이 새롭게 나의 뇌리를 강타했다. '앞으로 영원히 전화를 드릴 수 없는 거구나...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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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의 죽음/애도와 그림카테고리 없음 2023. 5. 20. 09:11
이스라엘에서 의미 있고 즐겁고 바쁜 시간을 보낸 뒤 집에 돌아온 날,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3 월에 찾아 뵈었을 때 돌아가실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았고,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어머님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나와 남편은 같이 껴안고 울었다. 아버님의 장례식이 끝난지 한 달여만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거라, 슬픔과 혼란이 범벅이다. 어머님의 죽음의 애도는 아버님과는 다른 방법으로 진행 중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임종을 지켰고, 시신에게 작별인사를 했고, 며칠간 아주 깊은 슬픔 속에서 혼자 애도했고, 식구들과 장례식을 치렀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용이했다. 그래서 평화 속에서 아버님을 그리할 수 있다. 어머님의 경우는 달랐다. 미국에 사는 우리는 벨기에의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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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1)카테고리 없음 2023. 4. 25. 16:38
이스라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찾아뵌 것은 4 년 전이었다. 이스라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외로움을 많이 타셔서 일 년에 한 번은 찾아가 뵈려고 했는데 코로나로 발이 묶였고, 이스라엘 어머니와 나는 매주 주말, zoom 으로 만나 그리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 항상 건강하시던 어머니가 병원 출입을 자주 하고, 응급실 신세까지 진 뒤에 나는 어머니를 꼭 찾아뵈어야겠다 싶었다. 코로나의 여파가 좀 가신 작년 9 월, 나와 남편은 상의해서 올해 4 월, 이스라엘 행 티켓을 일찌감치 구입해 두었다. 내가 2023년 3 월에 벨기에로 가서 아버님의 임종을 지키리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 채.... 벨기에 여독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이스라엘 행 비행기를 탔다. ------ 이스라엘 어머니가 사는 집은 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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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 일지 (11) : 장례식카테고리 없음 2023. 4. 19. 22:10
남편과 딸이 도착한 다음날 아버님의 장례식이 있었다. 화장장/장례식장이 있는 브뤼셀 시의 한 묘원에서. 이슬비가 내렸다 개였다 반복하는 날씨 덕에 수시로 변하는 구름의 파노라마가 장관이었다. 매일 혼자 브뤼셀 골목길 산책을 즐기셨던 아버님이 익숙했었을 축축한 회색 날씨. 우리는 묘원에 일찍 도착했다. 일찍 온 식구들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 나는 혼자 묘원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친정아버지가 묻히신 캘리포니아의 묘원처럼 이 묘원도 참 오밀조밀, 따뜻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쉬엄쉬엄 걸으면서 각양각색의 묘비들과 묘석들을 찬찬히 읽었다. 생년월일과 사망년월일, 한 인간의 시작과 끝을 알려주는 16 개의 숫자와 망자의 삶을 정의하는 간단한 문구들 앞에서 나는 사뭇 경건하고 겸허한 자세가 되곤 한다. 아버님도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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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10: 신앙카테고리 없음 2023. 4. 10. 22:36
3 년 전, 아버님은 남편과 단 둘이 있을 때 본인의 장례식을 가톨릭 의식으로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무신론자 집안에서 가톨릭 의식이 한 번도 없었고, 그보다 아버님께서 본인의 신앙을 고백한 적이 없기에 남편은 적잖이 놀랐다. 아버님은 남편에게 "팜펨에게 내가 종교의식을 원한다고 하더라고 전해다오. 그럼 분명 팜펨이 무척 좋아할 거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아버님이 가톨릭 의식을 원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사실의 간접적 표현이라 싶어서 나와 남편은 기뻐했다. 작년 말, 우리가 벨기에에 갔을 때, 아버님은 다시금 당신의 뜻을 밝히셨다. 어머니는 '당연히 당신의 뜻대로 해드릴거라'고 했다. 그리고 3 개월 후, 나는 다시 벨기에에 돌아왔고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던 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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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9: ‘안개'카테고리 없음 2023. 4. 6. 09:59
아버님이 떠나신 뒤 이틀 동안 나의 마음을 추스른 뒤 어머님께 갔다. 어머니의 애도 방식을 존중하지만, 그로 인해 내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약간의 거리가 필요했다. 가는 길에 꽃가게에 들렀다. 인상이 좋은 꽃집 주인은 며칠 전에 꽃을 샀던 나를 기억하고 반가워하며 "시어머니를 위한 것이지요?" 하더니 강렬한 장미 부케를 만들어주었다. 어머님이 꽃을 보더니 예쁘다고 해맑게 웃으셨다. 어머니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꽃을 볼 수 있게끔 가까운 선반 위에 화병을 놓았다. 어머님은 이틀 동안 몸이 아주 많이 편찮으셨다고 했다. 여전히 구토가 문제였다. 단백질 음료와 물 몇 모금 마시신 뒤 잠을 청하셨다. 어머님의 틀니를 깨끗이 양치한 뒤 말려서 어머님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놓아드렸다. 주무시는 어머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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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8: 며느리의 자리카테고리 없음 2023. 4. 4. 21:45
구석에서 시댁 식구들의 논의 과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서서히 일말의 소외감이 느껴졌다. 시댁 식구들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들이 내 감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앞서 서술한 실용주의적 사고로 감정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그러나 나의 소외감은 단순히 시댁 식구 들과 감정의 코드, 문화 코드가 달라서 느껴지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며느리의 소외감이었다. 사실 '며느리로서의 소외감’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시댁 식구들과 나의 관계는 좋다. 시댁 식구들은 내내 나를 인정해 주고, 아껴주었으며 한 번도 나를 의식적으로 배척하거나 제외하지는 않았다.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그 순간에도 그들이 딱히 뭔가 잘못한 것은 없다. 되려 내가 한 식구라는 의식이 있으므로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일처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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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7: 애도 문화의 차이카테고리 없음 2023. 4. 3. 15:51
시누와 아버님 시신에 인사를 드리고 어머님 방으로 향했다. 방 문을 여니 초췌한 안색의 어머니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표정을 훑는 어머님의 눈길에서 이미 어머니가 심각한 소식을 감지하셨음이 느껴졌다. 시누이가 어머니께, “엄마, 슬픈 소식이 있어요“ 라고 말을 하니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셨어요” 라고 하는 시누이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니는 숨을 잠깐 들이키셨다. 동요하는 시선을 허공에 고정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단 한 마디, ”아, 그래?“ 어머님의 입이 실룩거리는 게 보였다. 나오는 말씀을 참고 안 하려고 하시는 건지, 울음이 터지는데 참으시는 건지, 무슨 말씀을 하려는데 말이 안 나오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시누이가 “엄마, 우리가 빠빠랑 함께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