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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러셀 일지 10: 신앙
    카테고리 없음 2023. 4. 10. 22:36

     

    3 년 전, 아버님은 남편과 단 둘이 있을 때 본인의 장례식을 가톨릭 의식으로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무신론자 집안에서 가톨릭 의식이 한 번도 없었고, 그보다 아버님께서 본인의 신앙을 고백한 적이 없기에 남편은 적잖이 놀랐다. 아버님은 남편에게 "팜펨에게 내가 종교의식을 원한다고 하더라고 전해다오. 그럼 분명 팜펨이 무척 좋아할 거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아버님이 가톨릭 의식을 원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사실의 간접적 표현이라 싶어서 나와 남편은 기뻐했다. 

    작년 말, 우리가 벨기에에 갔을 때, 아버님은 다시금 당신의 뜻을 밝히셨다. 어머니는 '당연히 당신의 뜻대로 해드릴거라'고 했다.

    그리고 3 개월 후, 나는 다시 벨기에에 돌아왔고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던 날, 아버님이 돌아가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시누이와 내가 어머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머님께서 당신은 죽음은 두렵지 않은데, 아버님을 두고 떠나는 게 걱정이라고 했고 (당시만 해도 아버님이 암이 온몸에 전이된 어머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실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 시누이와 나는 어머니께 걱정 마시라고 위로해 드렸다. 시누이는 ‘엄마가 가면 아빠도 오래 살지 못하실 거야’라고 하더니,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아빠가 장례식은 종교의식으로 해달라고 했어.
    근데 아빠가 언제부터 종교를 갖게 된 거지?”라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에릭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라고 말했다. 딸로서 아빠의 결정이 오랜 시간의 숙고 끝에 이루어진 것임을 아는 게 바람직하며, 누나가 멀리 사는 동생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아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라 싶어서였다.

    시누이는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에릭이 신을 믿어?"
     

     

    시댁의 무신론


    나의 추측대로 그녀는 동생이 신앙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매년 우리 집을 방문한 시부모님은 남편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시댁 식구들에게 전했을 리가 없다. 시어머님은 '어디 가서 뭘 보았다, 뭘 먹었다, 누구를 만났다' 등의 주제 외에는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게다가 이제까지 어머니가 고수해 온 무신론적 사고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택한 아들에 대해서 굳이 이야기하고 싶을 이유가 없었다.

    어머님가 갖고 있는 무신론적인 사고는 어찌나 철저한지 '독실한 무신론자' 라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어머님은 Christians 들의 위선과 독선에 대한 경멸을 서슴없이 표현하곤 했다. 나를 의식하시고, “나는 가톨릭보다는 개신교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라는 무마성 발언으로 마무리짓곤 하셨다. (나는 가톨릭교와 개신교 다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님이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어머니의 반기독교적 사고가 내가 하나님을 믿기 전의 사고방식과 비슷해서이기도 하거니와, 정직하고, 언행이 깨끗하고, 이웃을 정성으로 섬기는 어머님의 입장에서는 종교를 갖고 있으면서 인격적으로 허물이 많은 사람들과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합리한 사고/행동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님은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말씀을 안 했지만 그게 어머니 마음에 드는 선택이 아니었음은 어머니의 언행에서 은근히 드러났다.   어느 크리스마스 날 아침, 어머님은 잠옷 바람으로 할머니 침대에 기어들어와 품에 안긴 손녀딸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밤마다 하나님께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던 어린 나이의 딸은 할머니의 폭탄선언에 충격을 받았다. "엄마, 하나님이 없어? 할머니는 왜 그렇게 이야기하지?" 하고 물었다.  나는 어머님이 왜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날에 아이에게 그런 소리를 하셨나 섭섭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어머님이 기독교를 믿는 아들의 집이 자기 집 같지 않고 마음이 불편하신 것이려니 하고 이해했다. 더욱이 그 아들은 똑 부러지게 '나는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견진성사를 거부했던 자랑스러운 아들이 아니었던가…

    남편이 어려서 견진성사를 거부했다는 것을 처음 들은 것은, 1995 년 7 월, 나와 남편의 결혼식 다음날이었다. 우리의 결혼식은 LA 의 한 교회에서 양가 가족들 20 명만 모여서 드린 단출하게 기독교 예식으로 치러졌다. 신혼여행은 벨기에에서 온 다섯 명의 식구들과 함께 떠나는 캠핑 여행이었다. 그래서 결혼식 다음 날 우리는 캠핑 여행 준비로 분주했다.  짐을 싸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머님과 이모님이 견진성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음은 어머니와 이모님, 그리고 나중에 에릭에게서 들은 견진성사 이야기의 요약)

    에릭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작은 마을에 단 하나였던 초등학교는  공립학교였는데, 당시 교과 과정으로 주 1 회, 종교에 관한 수업이 있었고, 그 과정을 이수한 학생들은 자동적으로 마을의 성당에서 주최하는 견진성사 클래스에 등록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신부님으로부터 교리와 신앙에 관한 훈련을 받은 뒤 공동으로 견진성사를 받았는데 견진성사는 가톨릭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종교적인 의미가 없이 그저 청소년이 거치는 통과 의례로 여겨졌다.  그래서 마을의 모든 아이들은 다 견진성사를 했고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축하했다. 무신론자인 부모님도 자식들이 견진성사를 받게끔 했다.

    의문과 회의 속에서 신부님과 교리 공부를 하면서 세례를 준비하던 에릭은 되려 더 큰 혼란에 빠졌다. 결국 그는 신부님께 하나님을 믿을 수 없으니 견진성사를 받을 수 없겠다고 선언했다.

    견진성사의 날, 신부님은 강론 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중에는 견진 성사를 거부한 학생이 있습니다.  저는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지 않은 그 학생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삶의 여정에서 그가 신을 만나기를 바라고 축복합니다. “

    견진성사 이야기를 전해주시던 어머님이 이 대목에서 아들을 얼머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느껴졌다.  13세 아들의 정직함, 당당함은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남편과 바로 그 전날 결혼을 한 나에게는 남편이 개인적으로 신부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에... 

    어머니와 남편과 나는 서로 조심을 했기에 종교적으로 큰 갈등은 없었다. 그러나 허심탄회한 진지한 대화도 없었다. 에릭이 하나님을 믿는 게 공식화된 후, 아들이 종교를 갖게 되었다면 도대체 무슨 계기로 그렇게 되었나, 그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 궁금하실 법도 한데 어머님은 한 번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셨다.  매사에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시는 어머님, 삶에 큰 시련도 실패도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본인의 사고방식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계셨다.  무신론도 어머니의 확신 중의 하나였다. 신이 없어도 너무도 잘 살고 있는데, 신을 믿는 사람들보다 더 사랑을 베풀고,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굳이 복잡하게 신을 찾아 나설 일이 없었다. 종교 문제는 어머님께는 확실히 정리가 끝난 주제였다. 신은 없고, 종교는 필요 없다. 끝!  

    아버님은 달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의 아들이, 그것도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수학자인 아들이 하나님을 믿다니, 이제까지 혼자 갖고 있던 생각들을 우리에게 표현하셨다.   ”나는 가끔 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긴 해”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 생각이 틀렸다면?" "우리가 그냥 저절로 생긴 것은 아닐 텐데..."라고 흘리듯 이야기를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주제를 붙잡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어머님의 존재감은 너무도 강해서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종교에 대한 대화가 가능하지 않았다. 남편도, 아버님도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부모님과 에릭과 한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남편이 어렸을 때 집안 분위기가 바로 이런 것이었나...상상했다. 맛있는 음식, 정겨운 대화... 그러나 정작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고 중요한 이야기는 나눌 수 없는 분위기... 

    남편이 견진성사 교육을 받을 때의 혼란이 이해가 갔다. 무신론자인 부모님은 가톨릭교의 교리를 완전히 무시했기때문에 견진성사도 그냥 통과의례로 한번 하고 마는 것으로 여겼기에 아들더러 견진성사를 받으라고 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들은 아들의 입장을 상상하지 못했다.   부모로부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배웠는데, 갑자기 '신이 존재하고 나는 신에게 헌신하겠다'라는 공개 서약을 해야 한다니, 그 모순을 매사에 논리를 따지던 13 세 소년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언젠가 남편에게 ‘견신성사 교육을 받던 시기의 당신은 어떤 아이였어?’라고 물은 적이 있다. 남편은 "나는 약간 조숙했던 것같아. 많은 고민과 질문이 있었는데, 내 옆에는 나와 같이 이야기를 나눠줄 사람이 없었어. 나보다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배워주고 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래서 나는 외로웠었어."라고 했다.

    13 세 소년이 겪었던 외로움, 그것은 아버님의 현실이었다.  종교에 관한 한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않은 무신론자 집안에서 아버님은 관심을 죽이고, 대화를 포기하고 살고 계시니까..

    그런데 그런 아버님의 갈증을 알면서도 남편은 타고난 성격 (개인주의적 성향) 과 평소에 갖고 있던 신앙관  (자기 믿음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지 포교 행위는 싫다!) 때문에 아버님과 능동적으로 신앙에 대해 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게 2007 년까지의 일이다.
     
       
    남편의 신앙

    내가 남편을 만났을 당시, 나는 첫눈에 반했다. 만난지 얼마 안 되어 나는 그에게 종교가 뭐냐고 물었고, 그는 ’가톨릭 문화에서 자랐지만 종교가 없다‘라고 대답했다. 자기 식구들도 다 무교라고 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잠시 딜레마에 빠졌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뒤늦게 하나님을 믿게 된 나는 만약 어쩌다 결혼을 한다면 당연히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과 할 것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신앙이 없다지만 나는 되려 그에게 많은 종교인들에게서 찾아지는 사고의 편협함이라던가 self-righteousness 가 없는 매력적이었다. 그의 인문학적 소양을 보면 그는 종교를 신학, 역사, 철학이란 큰 틀에서 생각할 것이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신앙은 아주 단단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결혼했다.

    결혼을 하면서 나는 종교에 관한 한 딱 한가지 조건을 걸었다. “나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기독교적 신앙 속에서 키우고 싶다. 내가 아이들과 교회 가는 것을 인정해 달라.  당신에게 아무런 강요를 하지 않겠다.”

    결혼 후 그는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켜주었다. 매주 그는 40 분 거리의 한인 교회에 나와 함께 출석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교회를 함께 가서 아이들을 안아주고, 놀아주고 내가 주일학교를 가르치면 끝나고 냔 뒤 교실을 청소해 주는 등, 나를 도왔다. 나는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매주 교회 출석을 하는 남편이 과연 하나님에게 마음이 열린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나의 궁금증을 원천봉쇄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나에게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아무도 모를 수 있다. 그건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이므로, 나는 하나님 믿게 됐다고 소란스럽게 떠들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질문도 토론도 하지 않았다. 토론은 언쟁이 될 가능성이 컸고, 그것은 신앙의 문턱에 서 있는 남편에게 페퍼 스프레이를 뿌려서 못들어오게 하는 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게는 말로 전도할 능력이 없이 없거니와 그럴 의도도 없었다. 애초에 내가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성경을 통해서였지, 사람의 말로 전도가 된 게 아니었으며, 행동이 받쳐주지 않는 말을 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실망은 신앙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곤 했었다. 내 입을 닫는 게 상책이었다.

    내 경험으로 보면 신앙이 생기는 경로와 자라는 경로는 사람들의 DNA 처럼 각기 다르다. 그래서 나는 나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남편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믿음의 실천도 다 다를 것이라는 생각 했고, 그래서 기다리는 게 어렵지 않았다.  남편을 말로 설득하려 하지 않고, 따지고 논의하지 않으며, 그저 내 입을 닫은 채 하나님께 기도드릴 뿐이었다.  애초에 우리가 다니던 작은 한인 교회는 우리 부부가 행복하게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둘째가 아직 어렸을 때 목사님이 타지로 옮겨가신 뒤, 우리는 멀리 있는 그 교회를 나갈 이유가 없어졌다. 교회를 찾기 위해서 몇몇 교회를 방문했는데, 그게 큰 도전이 되었다. 남편은  자기가 카톨릭 의식을 제대로 따르는 것도 아니면서 가톨릭과 다른 개신교의 모습에 실망하는 때도 많았다. 수학자인 남편은 감성에 호소하는 신앙적 표현이라던가, 자기 감정에 북받쳐 성경을 과도히 주관적으로 해석을 한다던가 할 때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10 분 미만에 아주 길어야 20 분인 가톨릭 강론에 비해 훨씬 긴 목사님 설교들, 그 설교가 50분에서 1 시간까지 되는 날은 그는 어김없이 불평했다.  

    어느 날, 초대받은 목사님의 설교와 축도로 예배가 끝나자마자 그가 나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목사님이야? 설교에서 왜 자기 이야기만 해?"

    남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목사님은 설교 내내 자신의 인생 여정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나는 00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대학교에서 기독교 동아리를 했고, 진짜 믿게 된 것은 군대, 개척 교회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되었는가. 과거에  나의 부인이 미군부대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오늘 나의 부인의 노래 테이프를 구매하실 수 있다...'.  

    남편은 한마디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했다.

    "성단에서 하는 설교는 간증과는 구별 되어야한다고 생각해."

    그날 그는 예배 끝난 뒤에 점심 식사/친교 시간에 참석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냥 집에 가자고 했다.  나는 "그래, 집에 가는 길에 햄버거 사 먹자!"라고 하며 서둘러 교회를 떠났다. 남편의 불만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편의  일부 목사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마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인양 내가 방어적으로 될 필요가 없었다.

    한 번은 모 교회에서 친구 목사님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게시판에 그 교회의 선교지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걸려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딱히 할 일이 없으니 게시판을 정독하게 되었다. ‘선교하는 장소에 따라 선교사님들은 보호색 동물처럼 그 나라 사람같이 되나 보다 ‘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사진을 보고 있었다. 예로, 몽골의 선교사 가족들은 회색/베이지색 누비옷에, 볼도 발그스레하니 몽고인과 같이 보였다. 몽골 선교사 사진의 바로 밑의 사진은  야자수 남방에 구레나룻 수염을 기른 선교사님과 부인, 그들의 뒷배경은 요트가 떠 있는 바다였다. 남아프리카였나? 그 나라가 어디였는지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여하간 그 사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선교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남편이 돌아오는 길에 물었다. 

    "개신교에서 선교사들의 임무는 뭐야?"

    선교지에 파송되어 말씀을 전하고 사는 거….라고 하려다가 내 답이 참 궁색하게 들려서 함구했다.

    남편은  좀 더 자세히 물었다.  "내가 궁금한 거는 선교사가 파송지 가서 살면서 뭘 어떻게 하냐는 거야.  예로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먹고, 양치하고,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뭐냐는 거야. 선교하러 나가? 그게 뭔데? 아니면 어디 가서 일을 해?"

    "어.. 그것 말이야. 케이스마다 다 다르겠지만. 지역사회에서 일하는 선교사님들도 있어." "무슨 일? 교회에서 파송할 때 전문적 기술을 소지한 사람들을 뽑아서 선교사로 파송하는 거야? 주재원같이?"

    의료 선교를 하는 선교사도 있고, 교육 선교를 하는 선교사도 있으며. 신분 유지 때문에 학생 신분으로 있는 사람도 있더라...라고 대답하는데  남편에게는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요트 앞의 야자무늬 남방의 선교사님'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 너무도 확실한 거 같았다.

    남편은 '어떤 지역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가서, 실제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면서 지역민을 섬기는 사람들이 선교사라 불릴 수 있다고 봐.'라고 했다.  "그건 엄청난 commitment 이겠구나... 그러나 그게 맞는 소리 같다"라고 호응해 주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토론을 삼가고, 그의 옳은 생각을 인정해 주었다.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만 해도 고마웠다. (그러나 나와 가까운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 남편의 신앙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다.) 

    2003 년이었던가. 당시 우리는 마땅한 한인교회를 찾지 못해서 대형 미국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교회 본당까지 7-8 분이 걸리는데 본당으로 향하는 길에는  '환영해 주는 사람들 (greeters)'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Hi, guys! Welcome!" "God bless you!" "Have a great worship!" 외치는 greeters의 역할은 대형 교회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교회가 하도 커서 서로 잘 모르는 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따뜻한 환영을 받고 악수를 하면서 친근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편이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남편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미소 짓지 않는다. 말도 의미하는 바를 이야기하듯이, 미소도 꼭 그 의미가 확실할 때만 미소 짓는다. 가뭄에 콩 나는 듯한 웃음은 더더욱 그렇고.  대형교회의 greeters 들은 남편에게는 '괜히 웃음을 강요하는 모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 교회의 여러 greeters 중에서도 아주 표현이 과격한 커플이 있었다. 큰 키에, 잘 차려입은 옷, 희고 고른 치아를 활짝 드러낸 미소의 그  커플은 다른 greeters 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환영 인사를 했다. 다른 greeter 들은 눈맞춤하고, 사람을 보아서 어떤 이에게는 악수를 청하고, 어떤 이들 (남편과 같이 무뚝뚝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친절한 표정으로 인사만 하지만, 이 커플은 모든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 게 목적인 듯, 적극적으로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하이 파이브! 를 해주었고, 아이들은 그들 앞에 가면 신나게 깡충깡충 뛰어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남편은 그 커플의 공격적인 환영을 거부했다. 예의상 미소는커녕,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들의 악수의 시도를 원천봉쇄하려는 듯 양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들 앞을 쌩~~ 지나갔다. 부전자전이라고 나의 아들도 아빠처럼 손을 호주머니에 꽂은 채 남편 뒤를 따랐다. 

    그런 상황이 몇 주 반복되면서 그 부부는 멀찌감치서 계단을 올라오는 우리 식구를 보면 표정이 굳어버렸다. 미소도, 손인사도 어색했다. 우리 가족이 지나칠 때 간신히 "hi guys"라고 외칠 따름.   남편은 간단히 목례하면서 그들을 지나쳤다.

    매주 교회에 들어설 때마다 그런 ’불손한 태도‘를 일삼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그가 왜 교회에 나오는지, 교회를 원해서 나오는 것인지 아닌지 아리송했다. ’저럴 거면 아예 안 나오겠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남편의 신앙의 상태를 모르는 상태에서 교회 출석은 계속되었다.

    그 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님으로서 매 예배 때마다 신도들에게 새로운 결단/다짐을 하게끔 만드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헌신'에 관한 감동적 설교를 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가 다가가자! 섬기자! 사랑을 전파하자!'라는 내용의 설교 마지막 무렵, '결단'을 권장했다.

    목사님은 “첫 번째,  지구촌 사역에 참여하시겠다고 작정한 분은 일어나십시오.”라고 했다. 그것은 멀리 떨어진 오지에 가서 봉사하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목사님은 일어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 그들더러 계속 서 있으라고 한 뒤, 목사님은 두 번째 그룹을 불렀다.  

    “두 번째, 세계가 아니더라도 미국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겠다고 작정한 분들은 일어나십시오”

    오지보다 훨씬 가까운 미국에서의 헌신이라니, 더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다.  예배당의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좌석 (2 층 꼭대기)에 앉아있던 나의 눈에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룹을 합하니 교회 회중의 절반은 일어난 것 같았다. 목사님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은 “모든 이가 다 세계로 나가고, 다 지역사회에서 사역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직장과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봉사하겠다고 하는 결단도 세계로 나가는 것만큼 귀하고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이제 자기가 선 자리에서 가족과 이웃을 섬기겠다고 작정하신 분들은 일어나십시오”라고 했다.

    그 대목에서 나는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생각을 했는지 우르르르 일어났다. 그 모습은,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나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일어났네!' 하며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사람들의 거대한 파도가 바로 내 옆에 앉은 남편에서 멈추어졌기 때문이다. 남편은 좌우앞뒤 모든 사람들이 일어난 가운데 혼자, 팔짱을 낀 채, 앞을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목사님은 결단을 내린 모든 이들을 위한 축복 기도를 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파도를 끊어버린 남편'에 놀라서 기도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선 채로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그를 보면서 아이러니하게 나에게도 평화가 찾아왔다. 내가 이제까지 남편과 교회를 출석하면서 내가 가졌던 궁금증----'내 옆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건가? 안 믿으면서 여기에 와 앉아 있는 건가?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 오는 건가?'--이 풀리는 듯해서였다.

    우리가 결혼할 때 내가 남편에게 부탁한 것은 ’ 내가 아이들과 교회 나가는 것을 인정해 달라 ‘였지 ’당신이 교회를 같이 나가자 ‘는 아니었다. 그가 원치 않았다면 그는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었고, 예스 노가 분명한 그는 그가 싫었다면 그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거부하며 파도를 끊은 그를 보면서 나는 이제까지 그가 교회에 나온 게 꼭 나를 쫓아서 나온 것만은 아님을 깨달았다. 

    견진성사를 거부했던 그 소년은 아직도 계속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찾고 있구나....

    나는 그가 그만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나같이 성격이 급하고 열정적인 사람에게는 거기에 맞는 방법으로 역사하셨듯이, 부드러우나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인 남편에게는 서서히, 그에 맞는 방법으로 감동과 변화가 있으리라. 조바심 낼 필요가 없었다.

    내가 남편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 것은  2006 년, 내가 친구와 함께 한국에 들어가서 남편이 아이들을 돌봐야 했을 때였다. 매일 밤 아이들과 기도하던 나를 대신해서 그가 아이들과 기도를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 안 했지만 속으로  "아이들과 기도할 때 '하나님' 하고 부르겠지? 그럼 이 사람이 하나님 믿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간접적으로 나는 그의 신앙을 짐작했다.

    내가 한국에서 돌아온 뒤에도  남편은 나와 교대로 아이들과 밤에 기도를 했다.  내가 자기의 기도 소리를 듣는 게 쑥스럽다고 아이들 방문을 닫고 기도를 했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서서히 변화했다. 아이들과 함께 가족 예배 드릴 때나 손님이 와서 식사 기도를 할 때나 다 대표기도가 나의 몫이었으나, 언젠가부터 남편은 그 역할을 공유했다.

    그러한 남편의 변화는 나의 오랜 기도의 응답이었다. 이미 꽤 만족스러웠던 우리의  결혼 생활 중 빠져있던 한 요소--영적인 화합--가 이미 존재하던 육체적, 정서적, 지적인 화합에 더해지니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아버님과 아들의 신앙 

    2007 년 시부모님이 오셨을 때였다. 직장에 있는 남편 대신 나는 부모님과 점심식사, 쇼핑, 산책, 차, 저녁 준비, 아이들 픽업, 등등을 함께 하면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어느 날 어머님이 휴식을 취하시는 동안 아버님과 수다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아버님이 나에게 나의 종교에 관해서 물으셨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말씀드렸다.  아버님은 주의 깊게 들으시더니 "나도 가끔 '신이 없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신의 존재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라고 말끝을 흐리시더니 본인의 조상들 중에는 독실한 신앙인들이 있었노라고 말씀하셨다. 본인은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만 믿어지지는 않는다라고도 하셨다.

    나는 믿음은 억지로 생기는 게 아니고, 의지로 결정하는 게 아니고,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니 아버님이 그냥 그 선물을 구하기만 하시면 된다고 했다. 아버님은 나에게  '그래서 이제는 에릭도 신을 믿니?' 하고 물으셨다. 

    "네, 아버님." 하고 대답한 뒤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남편의 몫이라 싶어서였다.

    평생 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도, 하지도 않고 살아온 아버님께 신앙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며느리가 하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더더욱 먼 나라 이야기일 수도 있다 싶었다. 

    나는 남편에게 아버님과의 대화를 들려주면서 '당신이 아버님과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다'라고 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앙을 남과 나눌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너무 채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이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래서 작정하고 말했다.

     '아버님은 영성에 대한 관심이 있으시다. 그러나 당신의 집안 분위기상 아버님의 자기 관심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버님을 도와드릴 수 있는 사람은 당신과 나뿐이다. 나는 아버님과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했다. 당신은 한 번도 아버님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이제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남편에게  '견진성사' 무렵의 자신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당신이 견진성사 받을 무렵, 매사에 의문이 많았는데 당신의 질문을 진지하게 같이 고민하면서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다고 했었던 거 기억나? 그게 현재 아버님의 모습이야. 아버님은 이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당신뿐이야. 신에 대한 관심이 있는 아버지한테 아들로서 어떻게 하나님 믿게 되었는가를 나누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자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남편은 알았다고 했다.

    2008 년 9 월, 남편은 벨기에로 열흘 간 혼자 다녀왔다. 그는 짧았지만 참 즐거운 여행이었다면서 "아버지 모시고 나가서 저녁 먹으면서  예수님 이야기를 했어.  나의 개인적 신앙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처음에는 좀 어색했지만, 아빠가 나에게 질문을 하고 나는 대답을 하면서 아주 유익한 시간을 보냈어"라고 했다.

    그 후, 부모님이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우리가 벨기에에 갈 때마다 남편은 아버님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적인 갈증을 풀어드리려고 했다. 꼭 영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어머님이 옆에 계시면 아버님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쉽지 않았다. 어머님도 외로우신지 사람을 만나면 말을 많이 하셔서, 난청으로 대화에 쉽게 참여하지 못하는 아버님의 말까지 어머님이 다 하시는 식이어서 아버님은 말을 할 기회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 

    남편과 나는 미리 '어머니가 시장에 가신 동안' '당신이 부엌에서 어머니랑 이야기하는 동안' 식으로 미리 작전을 짜서 아버님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우리의 대화는 꼭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게 목적은 아니었다.  주로 아버님이 말씀을 많이 하시고 우리가 들어드리는 게 목적이었다. 자기 성찰을 많이 하시는 아버님이 스스로에 대해 '소리 내어' 생각할 기회를 드리고 어쩌다가 영성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우리 생각을 나누는 식이었다. 아버님은 우리와 대화 나누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아버님이 '장례식을 종교적 예식을 해달라'라고 하셨을 때 우리가 기뻤던 것은 그것이 아버님의 간접적이 신앙 고백이라 싶어서이다. 15 년이 넘는 세월, 남편과 내가 아버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꾸준히 전하려고 한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진 것 같아서이다.

    시누이가 '아빠가 언제부터 신을 믿었지?'라고 혼잣말을 할 때, 내가 남편의 영향이라고 답을 한 것은 내가 그녀에게 아버님의 천로역정에 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오랜 시간에 걸쳐 내려진, 확신에 찬  결정임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작별 인사

    작년 12 월, 요양원의 부모님을 방문한 뒤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 날이었다.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찾아뵈었다.

    남편은 이제까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일을 했다.

    '엄마, 아빠, 내가 기도해드리고 싶어요'라고 하면서 두 분의 손을 잡았다. 나도 아버님의 손을 잡았다.

    남편이 조용히 기도했다. 그에 이어 나도 기도했다.

    꿈같았다.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하는 순간,  결혼 후 지금까지의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난 남편의 변화에 뜨거운 감사가 느껴졌다.  어머니는 기도가 끝난 뒤 '고맙다' 라고 하시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다.  기도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는 아들의 다정함이 기쁘신 것이리라. 아버님은 귀가 잘 안 들려서 에릭이 무슨 기도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에릭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가 아이패드에 크게 에릭의 기도 내용을 적어드렸다. 사랑과 축복과 소망으로 가득 찬 아들의 기도를  아버님은 양손을 모아 턱 밑에 괴고 천천히, 읽으셨다. 

    그날이 남편이 아버님을 뵌 마지막 날이었다.  아버님과 아들의 작별 인사는 기도를 통해서였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아왔던 두 남성이 그렇게 기도로서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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