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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뤼셀 일지 (11) : 장례식
    카테고리 없음 2023. 4. 19. 22:10


    남편과 딸이 도착한 다음날 아버님의 장례식이 있었다.
    화장장/장례식장이 있는 브뤼셀 시의 한 묘원에서.

    이슬비가 내렸다 개였다 반복하는 날씨 덕에 수시로 변하는 구름의 파노라마가 장관이었다.
    매일 혼자 브뤼셀 골목길 산책을 즐기셨던 아버님이 익숙했었을 축축한 회색 날씨.

    우리는 묘원에 일찍 도착했다. 일찍 온 식구들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 나는 혼자 묘원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친정아버지가 묻히신 캘리포니아의 묘원처럼 이 묘원도 참 오밀조밀, 따뜻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쉬엄쉬엄 걸으면서 각양각색의 묘비들과 묘석들을 찬찬히 읽었다.
    생년월일과 사망년월일, 한 인간의 시작과 끝을 알려주는 16 개의 숫자와
    망자의 삶을 정의하는 간단한 문구들 앞에서 나는 사뭇 경건하고 겸허한 자세가 되곤 한다.

    아버님도 이렇게 16 개의 숫자로서 정의되는 거구나… 생각했다.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장례식장은 내가 가보았던 미국 장례식장과 유사했다.
    식장의 맨 앞 중앙에 관이 놓여있었고, 그 좌우로 동영상을 위한 큼직한 모니터와 많은 꽃 부케들…
    오른쪽으로는 조사 낭독을 위한 작은 연단에 마이크가 설치되어 었었다.

    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어머님께 보여드리려고 맨 뒤에 서서 동영상을 찍었다.
     


    아버님의 자녀 네 명과  네 명이 이룬 가정의 자녀 중 한 명씩 대표로 1-2 분 내외의 짧은 조사를 읽었다. 나의 딸도 영어로 조사를 읽었다.

    아버님이 어떤 분이셨는가에 대한 기억과 묘사는 개인적으로 약간씩 달랐지만, 결국 그려진 아버님의 모습은 비슷했다. 성실하고, 유머러스하고,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어머님을 사랑했고, 장모님을 모셨고... 따뜻하고 성실한 가장, 남편, 그게 자손들에게 남겨진 아버님의 모습이었다.

    남편의 순서는 맨 마지막에서 두 번째였다. 궁금했다.

    장례식장으로 오는 길 택시 안에서 내가 "조사는 어떤 내용이야?"라고 물었을 때 남편은

    "음… 아마 내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그런 내용이야 “라고 짤막하게 대답했었다.
    마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아버님을 묘사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듯이...

    남편의 조사는 책임감 있는 가장으로서의 아버님—-평생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심—으로 시작되었고, 그런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아버님이 자연스럽게 포기하셨던 꿈—공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버님은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닥치는 대로 많은 책을 읽으셨다. 아버님은 은퇴 후에야 대학에서 청강을 함으로써 본인이 하고 싶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브러셀 대학에서 10 년 넘게 역사 강의를 청강하면서 어찌나 열심히 공부하셨는지, 수업을 자주 ‘땡땡이 까는’ (남편은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속어를 그대로 사용했고 이 대목에서 장례식장에 작은 웃음이 터졌다) 학생들은 아버님께 노트를 빌리곤 했다.’

    뒤이어 남편은 아버님이 집필한 ’수상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가 결혼 후, 빠삐와 나의 아내 팜펨은 아주 각별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팜펨은 아버지의 글솜씨를 알아보고 아버님께 글을 쓰시라고 적극 권장했습니다. 아버님은 망설이셨고, 팜펨은 10 년 동안 빠삐를 설득했습니다. '빠삐, 글 쓰세요. 빠삐의 목소리를 그대로 글로 옮기시면 되어요.'  그 응원에 힘입어 아버지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책을 완성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책을 self-publishing 했는데 몇 년 뒤 저는 출판사로부터 빠삐의 책을 내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고, 일 년 뒤 빠삐의 책이 출판되었고 서점에서 구입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장 뒤에 서서 촬영을 하던 내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버님의 역사공부, 수상록은 당연히 언급할만한 일이라 싶었지만, 왜 이름을 언급해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지? 앞에 나서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나는 영상을 촬영하느라 장례식장 맨 뒤에 서 있는 게 다행이었다.

    (남편에게 나중에 왜 내 이야기를 했냐고 물었다. ‘수상록을 쓰셨다는 것은 빠삐에게 큰 업적이었어. 그걸 가능하게 한 게 당신이었고, 그 외에도 당신과 빠삐의 관계는 빠삐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으니까. 자식들만큼 중요한 며느리였으니까’라고 했다.)

    예식이 끝난 뒤에 사람들은 줄 서서 한 명씩 아버님의 관에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나는 사람들이 잘 안 보이는 곳에서 그 광경을 다 카메라에 담았다. 장례식장에 누구누구가 왔는지 궁금하실 어머니가 분명 좋아하실 장면이라 싶었다.

    나의 딸도 아버님의 관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 나를 대신해서 나의 ‘작은 나무 십자가‘ 한 개를 관 위에 놓았다.

    작은 나무 십자가는 1987 년, 예루살렘에서 1 불 주고 산 감람나무로 만든 십자가이다. 이후 이스라엘을 떠나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온 뒤 결혼, 육아, 부모님 부양의 30 년이란 오랜 세월을 나와 함께 해 온 나의 친구이다. 아무 장식이 없이 무명끈에 달린 단순한 십자가가 너무도 좋아서 나는 침대 옆에 걸어두기도 하고, 컴퓨터 모니터 위에 걸기도 하고, 내 손이 닿는 곳에 두고 자주 만지작거렸다.  어찌나 많이 만지작거렸는지 반들반들해졌다.
     
     

     
    사람들이 인사를 마치고 떠난 뒤, 텅 빈 장례식 장.
    나도 아버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갔다.
    나는 관 위에 놓은 나의 사랑하는 나무 십자가를 마지막으로 만지면서 아버님께 작별 인사를 했다.
    눈물이 터졌다.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는데, 마치 나를 관찰하고 있기라도 했던 양, 딸아이가 나타나서 나를 껴안아주었다.

    어제처럼, 딸아이 품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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