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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어머니--미소와 눈물
    카테고리 없음 2023. 5. 22. 02:54

     
    어제오늘, 시어머님 생각이 많이 난다.

    주말 아침에 항상 시부모님과 화상 채팅을 했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주말 아침, 코로나 중에는 주중에도 몇 차례 화상 채팅을 하곤 했다. 인터넷 접속이 불량할 때는 내가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렸고, 시어머님은 아들과 채팅할 때는 하지 않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아 오래오래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몇 년간 빠짐없이 지켜온 채팅 약속에 길들여진 나는 오늘도 예전처럼 10 시 채팅 이전에  하던 일을 마무리지으려고 서둘렀다. 부모님과 화상 채팅이 가능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몸과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다.

    10 시가 되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부모님이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 사실이 새롭게 나의 뇌리를 강타했다.

    '앞으로 영원히 전화를 드릴 수 없는 거구나...부모님이 가셨구나...'

    그리움이 몰려왔다.

    화면으로 만나던 시부모님의 얼굴, 목소리가 떠올랐다. 지난 며칠간의 일들을 소상하게 알려주고, 우리의 안부를 묻던 시부모님... 일주일에 두 번 보는 우리 얼굴이 그리도 반가운지, 어머님의 목소리를 항상 흥분되었고, 말이 빨라지셨지....

    어머님은 아들과는 삶의 여러 사건/팩트 들을 나누셨다.  냉장고 수리가 끝났다, 새 식기 세척기가 잘 든다, 손녀가 루마니아에 실습을 나간다, 우리 동네 살던 마리넬라가 브라질 고향으로 돌아갔다 등등.

    어머님은 나와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하셨다. 멀리 사는 한국 며느리는 어머니의 마음의 금고여서 남들에게 하지 않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인간관계, 어떤 사건에 대한 본인의 생각 등등 속 깊은 이야기들은 내가 어머니를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깊은 이야기를 통해 나는 어머님이 얼마나 자식들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다. 자식들에게 요구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그게 지나쳐서 자식들을 힘들게 하셨지만--, 사랑과 인내로서 자식들을 응원해주셨던 어머님. 나서지 않고 묵묵히 도와주기만 하던 어머님.  나 역시 어머님의 그런 묵묵한 섬김의 수혜자였다. 살림 안 하고 못하는 며느리한테 단 한 번도 비판적인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 미국에 올 때마다 '너는 너의 시간을 갖지 못했으니 내가 있는 동안 살림을 해줄게 네가 하고 싶은 거 해라' 하시면서 내가 내 시간을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게 해 주셨던 어머님, 생일 축하 전화를 까먹은 것을 깨닫고 뒤늦게 전화를 드리면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너희들이 안녕하면 그걸로 된 거야"라고 오히려 다독거려 주셨던 어머님. 항상 기다려주신 어머님... 친엄마도 아닌데 시모로서 나에게 그런 무조건적 사랑을 주시다니....

    어머님이 떠나신 뒤, 어머님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잃은 존재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가 확실히 느끼게 된다.  죄송하기도 하고, 너무 그립기도 하다. 나는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어 눈물을 흘린다. 

    오늘도 혼자 훌쩍거리다가 결국 낮에 엄마 앞에서 눈물을 터뜨렸다.

    "엄마, 시어머니 너무 그리워...너무 보고 싶어."

    엄마는 나를 금방 이해해주셨다. 엄마의 눈에도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가슴 아프다" 하시면서 눈물을 훔치시는 순간 위로를 받았다.

    만약 시어머니가 옆에 계셔서 며느리와 사돈이 자기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본다면 뭐라 하실까?

    시어머님은 본인이 눈물을 억제함은 물론 남이 우는 것도 막으시곤 했었으니 아마도 나에게 '팜펨아, 왜 우니! 울지 마!'라고 하셨을 것 같다.
    나는 나의 눈물을 막는 어머님께 섭섭함을 느끼곤 했었는데, 지금은 '울지 말라'는 어머님의 잔소리도 좋으니, 어머님이 옆에 계셨으면 좋겠다.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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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님의 장례식을 준비하던 시동생이 우리에게 우리 가족과 어머님의 사진들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옛날 앨범을 뒤져 어머님 사진을 찾았는데, 나도 남편도 놀란 사실이 있다.

    어머님은 참 잘 웃으시는 분이었다. 사진마다 웃고 계셨다. 아름다운 어머니...

    "에릭, 어머님 좀 봐. 사진마다 활짝 웃고 계셔. 우리가 어머님이 잘 웃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같아."
    "나도 놀라워하고 있었어. 엄마가 언제부터 웃음을 잃으신 거지?"

    나는 많은 사진들을 시간적 순서로 놓고 어머님의 웃음이 언제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는가를 살펴보았다.

    어머님은 손자 손녀들이 어렸을 때 많이 웃으셨다. 가게를 하시고 100 세에 가까워지는 친정어머니를 모시면서 손자 손녀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때인데도 얼굴은 웃음꽃이 활짝 이었다.


    아버님이 은퇴를 하신 뒤부터, 손자 손녀들이 성장해서 어머님의 뒷바라지가 필요하지 않게 되면서 조금씩 어머님의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편과 내가 시부모님을 한 번은 하와이, 또 한 번은 이스라엘로 여행을 보내드렸었는데 그 여행을 무척 즐기셨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의 얼굴에서는 함박 미소는 없었다. 어머님은 자식들과 함께 있을 때, 손자 손녀를 돌볼 때 에너지가 생기는 분이셨었던 것이다.

    아버님이 사고를 당한 뒤 아버님의 케어를 전담하게 된 이후로 어머님의 얼굴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때까지 손녀 손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화의 주제였던 자식들과 본인들의 케어 문제를 놓고 대립하게 되면서 어머님은 무척 힘들어하셨다. 자식들도 힘들었다. 웃을 일이 별로 없었다.

    인간의 기억이란 게 얼마나 이상한지, 우리는 그렇게 어두워진 어머님의 얼굴을 어머님의 얼굴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공격적/방어적으로 되고 고집이 세진 어머님을 어머님의 성격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머님의 미소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걸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장례식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노년에 혼자 지고 가려고 했던 짐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그렇게 웃음을 잃어버리셨을까.... 근데 왜 혼자 지고 가려고 하셨을까....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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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찾던 중 또 하나의 사진에 눈이 머물렀다. 오래오래.... 
    내 결혼식 날, 어머님과 나의 사진, 어머니와 내가 껴안고 있었다. 
    그 순간이 기억났다. 
    우리는 둘 다 눈물을 펑펑 쏟았었다. 어머님은 나에게 '울지 말라'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쁜 큰 눈에서 맑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날이라고 하셨던 어머님.

    어머님은 기쁜 눈물은 남에게도, 본인에게도 허용하셨구나....

    이후 어머니가 기쁜 눈물을 흘리신 게 언제였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님의 삶의 마지막 자락에 환한 미소, 소리내어 웃는 웃음,  기쁨에 찬 눈물이 더 많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님의 수발, 본인의 병, 그 모든 짐을 홀로 지고 가려고 했었던 어머님이 웃음을 짓는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 짐을 같이 지려고 했지만 어머님은 거부하셨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짐을 혼자 지려고 하셨던 것.

    자식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게 무엇일까. 
    한 인간이 홀로 삶의 마지막 과정에서 지어야 하는 짐은 그 누구도 가볍게 해 줄 수 없는 것인가...

    이는, 나 역시 늙어가면서 계속 생각하고 배워갈 문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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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어머님 생각을 많이 하니까 되려 마음에 평화가 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이렇게 어머님과의 '교제'가 필요했었던 것인가보다.

    나의 말을 들으실지 모르실지 알 길 없지만, 그래도 어머님께 속삭인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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