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가시고 수발이 임무가 끝났다.

새로운 시작이다.



엄마와 집을 떠나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처음 며칠은 나에게 갑자기 주어진 많은 시간이 익숙지않았다.

특히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게 너무도 큰 호사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며칠 후 서서히 나의 특기, 버릇, 고질병인 멍때리기가  시작되었다.


뜬금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내가 아버지께 반항했던 십대 때 생각을 한다.


난 아버지랑 1 년간 말을 안했다.

완전 투명인간처럼 무시했다.

엄마도 아버지도 그런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당시 아버지는 50 대 초반.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였다.


그 후 거의 40 년간 아버지랑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아버지란 사람이 얼마나 섬세하고 감정 표현에 얼마나 서투른지 알게 되었고

당시 틴에이저인 내가 차갑고 모질다 여겼던 아버지의 표정은

아버지가 힘에 겨워한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

삶에 대한 막연하거나 구체적인 공포를

애써 감추느라 굳은 얼굴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평생 삶에 대해 어쩔줄 모르면서 사신 분이었다. 그저 공부 뿐이 몰랐으니..

사춘기 때의 나는 그런  아버지가 무능력하고  이기적이라고 느꼈고 

내가 그런 그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대화거부로 보여준 것이다.


지금 당시 아버지 나이를 넘어 50 대 후반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나에게 푸대접을 받던 50 대 초반의 아버지가 어린 나이였음이 보인다.

그리고 당시의 아버지가  뱃짱도, 자신감도 없었다는 것이 나의 손바닥처럼 훤히 보인다..

 뱃짱이 두둑, 자신감도 팽팽했던 딸과 너무도 달랐던 겁쟁이 아버지.


폭력적이지 않은 부모와 싸우는 아이는 항상 승리하기 마련이다.

그저 부모에게 상처만 주면 되니까.

 그리고 아이가 부모 상처주기는 쉬운 죽먹기.

겁쟁이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나의 박대를 감수했고

 그렇게 그는 매일매일 나에게 지고 살았다..  

내 맘이 풀릴 때까지 아버지를 괴롭히고

내 마음이 스스로 누그러워진 어느날 일방적인 냉전을 끝냈다.


아버지는 어땠을까?

그리도 예뻐하던 막내가 그렇게 모질게 굴었으니.

딸이 자기를 인간취급하지 않는 식탁에서 밥을 드시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를 투명인간 대접하는 막내의 무시를 알면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의 기분은 어땠을까?

가만히 생각한다.


어리고 어리석었던 나.

당시 나의 큰 뱃짱과 자신감이

바로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나를 사랑해주고 보호해준 결과임을 모르고

자신의 두려움을 꾹꾹 누르고 치열히 살았던 

겁쟁이 아버지한테 모질게한 것이다.


그러나 부질없는 상념은 접자.

아버지는 과거에 연연하는 사고방식을 거부하셨다. 

내가 옛날 감정들의 조그만 파편을 자세히 살피면서 혼자 아파하고 미안해하는 것을

아버지가 원하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


"신주야, 왜 그런 생각을 하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냉전이 끝난 후 아버지는 그후 내내 나를 격려해주셨고 사랑해주셨고,

나는 나대로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잘 알게 된 겁쟁이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 상처는 주고받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상처 주고받는 게 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냉전기는

겁쟁이 아버지와 당돌한 막내딸이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었으니까.

아버지도 나도 서로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더 좋은 친구가 되는 과정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좋은 친구가 되었으니까

아버지 수발 드는 것이 쉬웠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편안히 침대에 누워

아무 무늬도 없는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하릴없이 발을 꼼지락 거리며 

겁쟁이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



이른 새벽 일어나 책을 읽던 평생의 습관을 기억하는 아버지의 몸은 새벽 2-3 시면 어김없이 깨어났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아버지는 깨어도 옴쭉달싹 못하는 밤이 길고 고통스러웠다. 적막의 밤, 아버지는 '좋은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기도를 하고 평생 가르쳤던 시들을 기억하기도 하고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하면서 딸과 부인이 깨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어떤 날은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시를 썼다. 어느날, 아침 인사를 하는 나에게 수줍게 "손으로 글을 쓸 수 없으니  시를 잘 못쓰겠네..."하시며 밤에 마음으로 쓴 시를, 한 줄 한 줄, 기억해 들려주셨다. 10 세 때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를 그리며 쓴 시였다. 나는 급히 받아적었다.






어머니



강대건




고요 속애서 들리는 목소리


대건아 


나를 부르는 어머니의 정다운 목소리


나는 눈물짓는다.



어스름 속의 솔밭,


하염없이 땔감을 긁어 모으던 나에게


"이제 집으로 가자" 


이끄시던 다정한 어머니



어머니의 목소리는 사라졌어도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작아도 태산을 명동하는 감동을 준다. 



나는 또한번 어린애가 된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어린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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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당신의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하셨던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아버지가 80 세 생일을 맞이해 쓰신 '아버지의 기도'라는 회고록을 통해서이다. 고된 현재의 삶 속에서도 항상 '내일을 준비하는 삶' '경건의 삶'을 사시다가 채 마흔이 못되어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어머니를 10 세 때 여읜 소년이 80 이 될 때까지 어머니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삶에 짧게 존재했던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의 삶을 평생 밝혀주는 횃불이 되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과연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인가' 를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아버지의 회고록에서 '어머니'에 관한 부분을 잠시 다시 읽어본다.





어머니   (강대건의 '아버지의 기도' 에서) 


어머니는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가정---외할머니가 특히  믿었다에서 태어나 일생을 하늘나라의 영광만 바라보고 독실한 신앙과 인고로  분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 좋은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어머니는 중키의 가냘픈 몸매였다. 그리고 희지도 검지도 않은 화장기 없는 갸름한 얼굴, 차분하고 다소곳한  눈이 어머니의 생김새였다. 별로 말도 웃음도 없이 아홉 식구 살림의 무게를 도맡아 감내하였던 어머니는 그야 말로 청순가련형 여성의 전형이었다

어머니는 예배당으로  때나 15  떨어진 원산 시내로  보러   이외에는 거의 외출하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는 집에 있을 때나 외출할 때나  무명옷 차림이었고, 나는 어머니가 얼굴에 미안수를 바르는 정도 이상으로 화장하는 것을  일이 없다. 따라서 어머니는 여성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화장대나 화장품, 장신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개인 소지품으로서 싱거 재봉틀 하나를 가지고 있었을 따름이다. 어머니는 그것을 아주 자주 사용했으며, 평소에 그것을 정성스럽게 닦고 기름칠하였다.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장서가 많았기 때문이라기는 하지만 혼자서    개를 차지하고 독서 삼매에 몰입할  있었던 아버지는 길고   하나에서 일곱 명의 자식들과 부대끼며 기거해야 했던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

        우리 집의 가풍은 아버지의 암묵적인 승인 하에 어머니의 주도로 형성 되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우리와 밀착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우리의 정신적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유익한 글귀를 벽에  붙이고 우리에게 위인들의 전기를 많이 읽히는 등으로 가풍 형성에 간접적인 기여를 하기는 하였지만 그보다도 우리 집의 에토스 (ethos)  지배한 것은 우리 집을 경건한 신앙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야 하겠다는 어머니의 굳은 의지와 끈질긴 노력이었다

        


 내일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어머니는 하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신앙과 인고의 생활을 했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또한 지상 생활에 있어서도 오늘을 충실히 사는 동시에 항상 내일을 위해서 준비하는 알뜰한 주부였다

어머니가 가사를 도맡아 하면서 몹시 고달파 했겠지만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번도 다투는 것을  적이 없다.  이유는 어머니가 페미니스트 적인 자각이 요즘처럼 일반화하지 않았던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점도 있겠고,  아버지가 집안 일을 어머니와 공동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하드라도 존경 받을 만한 남편이었다는 점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어머니 자신이 더할 나위 없는 현모양처 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명성학교 교장 사택에 딸린   텃밭을 가꾸는 일은 어머니 혼자서 하기에는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서 텃밭을 가꾸는 , 특히 봄에 감자를 심고 가을에 무를 심는 일만은 아버지도 우리와 함께 거들었다. 그럴 때는 아버지가  팔을 걷어 붙인  맨발로 쾌활하고 힘차게 일했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우리 집에서는 젖을 짜먹기 위해서  염소  마리와  염소  마리를 길렀는데 아버지는  동안 풀밭에 말뚝을 박고 매어두었던 염소를 저녁에 우리로 끌고 오는 일을 가끔 도와주었다. 염소를 끌고 다니며 풀을 먹이는 일은 대개 우리 형제들이  일이었지만 염소 젖을 짜는 일은 대개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에게는 빠듯한 우리  살림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억척스러움이 있었다. 어느 , 찌는 듯한  여름 더위를 잊기 위해서 아버지와 나는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내리 쬐는 한낮의 태양 밑에서 온통 흙먼지투성이가  얼굴에 구슬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움칫했다. 명사십리의  유명한 해당화 밭에 끼어있는  마지기 가량의 감자 밭에서 어머니가 김을 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시선을 느낀 어머니는  매던 손을 잠시 멈추고 우리 쪽을 쳐다봤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선은 마주쳤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했다

        나는  순간 아버지의 표정 속에서 놀람과 죄의식---그리고  밑에 깔려있는 짙은 절망감을 읽을  있었다. 분명히  밭은 학교 사택의 텃밭도, 학교의 실습지도 아니고, 어머니가 억척스럽게 해당화 밭에서 일구어 놓은 밭이었다. 적어도  달에  번쯤은 일본에서 부쳐오는 단정하게 장정된 책들, 교장 월급이 40 원쯤이었을 당시에 50 원이나 주고  벼루, 조용한 방에서 벼루에 대고 갈면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내며  집안을 은은한 향기로 채우는 ---- 모든 것이 의미하는 아버지의 세계와 감자 밭에서 김을 매며 흙먼지와 땀방울이 뒤범벅이  어머니의 얼굴이 의미하는 세계는 전혀 달랐다. 아버지의 절망감은 여보, 수고하오!” 라는  마디로는 도저히   없는, 혹은 뛰어넘을  없는. 두텁고 높은  앞에  아버지의 피할  없는 정서였다...

   감자 밭에서 김을 매던 어머니의 억척스러움은 오늘의 삶을 위한 것이었지만 돼지를 기른 것은 내일의 삶을 위한 것이었다끊임 없이 먹고 끊임 없이 배설하는 돼지들에게 먹이를 주는 일도 힘들지만 일주일에  번씩 돼지 우리를 치우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우리에 깔아 놓은 풀과 돼지 분이 뒤범벅이  것을 쇠스랑과 삽을 사용하여 긁어 모아 퇴비 더미 뒤에 쌓는 일인데풀을 베어오는 것은 우리들이었지만  밖의 일은 전부 어머니가 했다

돼지를 길러서 얻은 수익을 어머니는 별도의 통장을 만들어 저축했다.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통장을 발견하고 감사와 감격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어머니의 사랑의 징표인 동시에 주부로서 미래를 위하여 준비했던 어머니의 알뜰함의 증표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이렇게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도 저녁 같은 때에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우리에게 요구한 일이  번도 없었다. 아버지는 저녁 식사 후에 의례히 누워서 우리에게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는  손으로 혹은 주먹  손으로 다듬이질 하듯 활기차게 아버지의 넙적 다리에서 발목에 이르는 부분을 두드리거나 주물렀고, 아버지는 잠들어 하루 종일 교단에  있던 다리의 피로를 풀었다. 그렇게 열심히 아버지를 안마하면서 우리는 어머니 생각을 못했다. 자신에게는 그토록 많을 것을 요구하면서도 남에게는 요구하지는 않는 어머니, 함부로 자기 주장을 하지 않는 어머니--그런 어머니가 요구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는 어머니 다리를 주물러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조그만 성의로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기회를 영영 놓치고  것이다.  

, 이제는 오직 풍수지탄 (    )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멎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이미 세상을 떠났도다라고 하는 바람  나무의 한탄---만이  가슴을 여미누나!  

        그리고 내일이  있다고 생각지 말라 스님의 말을 귓전으로 흘러버린  덧없는 벚꽃아!” 진정  모양이 처량하구나!



예배의 생활

         어머니는 일은 예배: Work is worship” 라는 고색창연한 격언을 그녀의 생활에서 실천했다. 어머니는 일하는 틈새에 예배 드렸지만 일하는 동안에도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했다. 물론 어머니는 한밤중에도, 새벽에도 이불 속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내가 하급 장교로서 온갖 제약과 불가능의 덫에 치이어 허우적거리며 술에 젖어 괴로운 나날을 보낼 때에도  취해 몽롱한  의식 속에서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면 나를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했을 어머니, 그리고 지금도 하늘 나라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깊은 회한의 눈물을 흘린 일이 여러  있었다.

어머니는 고된 일을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우리를 붙들고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었다. 어머니가 즐겨 부른 찬송가들 가운데서 생각이 나는 것은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 시작되는 444 장이다.  찬송가의 가사가 괴로운 현실 속에서  어머니에게 특별히 위로와 기쁨을 주었던  하다 찬송가444  가사는 다음과 같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예수가 거느리시네

때때로 괴롬 당하면 때때로 기쁨 누리네

풍파 중에 거느리고 평안할  거느리네

 주의 손을 붙잡고 천국에 올라가겠네

괴로우나 즐거우나 예수가 거느리시네

 세상 이별할 때에 지옥의 권세 이기네

천국에 있을 때에도 예수가 거느리시네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해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 돌아가신 날은 8 28, 그러니까 우리나라 국권이 상실된 국치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어머니의 생년이 1900 이니, 그야말로 한창 나이에 세상을  것이다 어머니가 집에서 막내 동생 대유를 낳고 계속 고통스럽게 신음했을  15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원산에서 가장  병원인 구세 병원에서 의사가 왔으나  소용 없이 어머니는  운명했다.  나이  10, 초등학교 4 학년 때의 일이다.

        동생들보다  철들어 있던 나는 어머니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우리들 때문에  괴로워하실까 해서 낮에는 곧잘 울음을 참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흑흑 흐느껴 울었다.....여하간에 내가 의례히 이렇게 훌쩍거리고 있었을  한번은 아버지가 나를 달래려고 내가 뒤집어  이불을 걷어 올렸으나 정작 나의 처참한 꼴을 보고는  말을 찾지 못하고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눈만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어린  동생들은 나처럼 어머니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지는 못하는  했다. 그러나 아직은 의식화 되지 않은 영역이 크고 여물지 않은 마음을 받쳐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이 절대 필요한 나이여서 어머니의 상실의 부작용은 그들의 삶에서도 역력했다. 나보다 5  연하의 대열이는 밤마다 오줌을 가리지 못했으며  상태는 9   까도 계속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몰고  정신적 외상은  밖에도 우리 형제들 모두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났다. 닻을 잃고 헤매는 배의 꼴이  우리 형제는 각자가 자기의 책임을 지고 남에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애면글면 애썼다...

        나는 1956 너희들의 엄마와 결혼하기 전까지 닫혀지고 궁색한 하급 장교의 불만스러운 생활 속에서 울적한 나날을 보내며 눈물 속에 아롱지는 어머니의 환영을 쫓으며  냄새 그윽한 어머니의 품에 파고 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특히 1953 경에 내가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지 전까지는 심한 외로움에 시달렸으며 그것은 조락을 재촉하는 늦가을의 싸늘한 비바람과 함께 찾아와  골수까지 파고들었다.  외로움은 방금 내가 사용한 표현 속에서도 암시되고 있듯이 한없이 포근하고 따사롭고 넉넉한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나의 영원한 동경에 이성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겹친 데서 나오는 감정이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같이 비교적 한가한 시간에 이러한 감정이  가슴을 마구 헤집어 놓고 하염없이 되풀이 되는 짙은 한숨으로 휘몰아갈 때에는 나는 외진 곳의 손님이 별로 없는 자그만 다방을 찾아가 사람 좋게 보이는 마담에게  당시에 애창되던 샹송 고엽; The Falling Leaves”  번이고 되풀이해서 틀어달라고 했다.  샹송의 가사는  당시의 나의 복잡한 감정을 비슷하게 표현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목소리


특히 어머니의 [목소리]는  기억 속에 유달리 선명하고 뚜렷하게 남아 있고그것에 얽힌 상념들을 나는 쉽사리 떨쳐 버릴  없다.

나는 어릴 적에 염소를 먹이는 , 집안팍을 청소하는  이외에도 군불을 때는 , 군불  솔가리를 긁어 모으는 일을 해서 집안 일을 곧잘 도왔다. 나는  당시 아버지가 수업 시간에 얘기해  일본의 유명한 독농가 니노미야 긴지로를 존경했고 그를 찬양한 꼴을 베고 새끼 꼬고, 집신 삼고, 부모 돕고, 동생 업고, 형제가 화목해서 효도를 다하니, 우리의 본은 니노미야 긴지로라네 라는 창가에 나타나는 그의 근로 정신과 효심을 본받으려는 착한 아이였다

        나는 어느  학교 솔밭에서 솔가리를 긁어 모으는 일에 열중하여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땅거미가 져서 날이 어둑어둑하게 되었을  갈퀴 잡은 손을 연방 바쁘게 움직이다가 나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둡고  공기를 뚫고 나지막하고 다정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대건아! 수고했다. 그만 하고 집에 가자.”  


 나는 무서웠던 생각이 일시에 사라지고  마음과 몸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에너지에 감싸이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분명 사랑과 구원과 안도를 싣고  것이다....나의 개인적 경험으로 어머니의 목소리는 저속한 일상적 차원에 안주하려는 나의 영혼을 뒤흔들어 높은 차원을 지향하게 만들고 그곳에서 평안과 정밀을 찾을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목소리는  단테의 천당으로 가는 여정에서 그의 영혼의 인도자 (psychopomp) 되었던 베아트리체의 눈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인 미세한 목소리"(열왕기상 19:12) 처럼 내가 해야  일을 말해준다...나지막하고 가냘픈 어머니의 목소리는  내가 귀를 기울여야 들을  있는  양심의 속삭임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베아트리체의 눈처럼 나의 영혼을 이끌어주는 인도자-안내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세한 목소리” –양심의 속삭임으로 어둡고 험난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주는 지킴이보호자가 되었던 것이다. ..

오오, “ 없이 정숙하고  없이 인고하는 존재이신 

그리운 나의 어머니시어

하늘 나라에서 부디, 길이 행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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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신주에요. 

요즘은 제가 새벽에 일어나 잠을 못이루고 글을 써요.


이럴 때 아버지가 깨어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제가 이른 아침 아버지 방을 열고 들어가면

어김없이 맞아주던 아버지의 미소,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힘드셨지요?" 

아침 인사 드리며 서둘러 밤 내내 움직이지 못했던 아버지의 몸을 만져드리자면.

아버지는 말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시곤 했어요.

아침 식사 후,

찬송가를 틀어놓고 면도를 해드리면

편안히 눈을 감고 다시 스스로 잠이 드셨지요.


아버지와 함께하는 그 단순한 아침의 일상이 사라졌습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그립습니다.

당신이 그립습니다.


아버지도 할머니처럼 한없이 순수하고 한없이 인고하는 존재셨어요.

평생의 수고를 뒤로하고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그렇게 그리워하시던 할머니의 품에서

새근새근 단잠을 주무시기를...


아버지,

하늘나라에서 "부디, 길이 행복하소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나 나는

죽음이 너무 자연스러워 충격을 받았다.

숨을 들이쉬었다 내 쉬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한번 내신 숨이 그냥 멈춘 것이었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전이가

마치 얕은 시냇물에 사이가 멀지 않게 놓여진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인양 쉽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죽음과 삶이라는 엄청난 분리가 이렇게 간단하다니....


며칠 후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나는 이전에 찍었던 엄마 아버지 사진을 보았다.

잠시 멈칫했다.

아바지가 돌아가신 뒤에 찍은 사진과 아주 비슷하여서이다.

아버지의 죽음 전이나, 죽음 후나.

엄마 아버지의 모습이 한결같았다.

엄마의 옷과 아버지가 덮으신 담요 색깔만 달랐다.




왼쪽은 1 년 전 겨울,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엄마가 아버지 옆에서 책을 읽어드릴 때 직은 사진이다.

아버지가 편히 누워 계실 때 엄마는 아버지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뉴스를 읽어드리거나 책을 읽어 드렸다. 

나에게 익숙한 광경이다.

 

오른쪽 사진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2 시간 후 내가 간호사와 면담을 하던 중

열려 있던 아버지 방의 문을 통해 엄마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찍은 것이다.

이 익숙한 광경을 다시는 못보겠지 하면서...


엄마는 평생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를 지켰다.

그래서 아버지의 산소마스크, 아버지의 지팡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공부 말고는 모든 일에 서툰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집안의 모든 일을 담당했고

아버지가 당뇨를 얻으신 40 대 중반부터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시기까지

매일 등산, 철저한 건강식, 정기 검진등을 하여 아버지 건강을 유지해드렸다.


 아버지가 몸이 불편해지신 뒤

엄마는 지난 3 년간 아버지와 한 방에서 아버지를 지켰다.

새벽 5 시 경 아버지 혈당검사를 시작으로 인슐린, 아침식사, 산책---으로 이어지는 매일매일의 일정을 감당했다.

밤에 아버지가 심하게 기침하거나 어딘가 편찮으면 

엄마는 잠에 취한 상태에서도 일어나 아버지를 돌봤다.

(엄마가 현재 85 세의 연세임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버지는 그게 미안해서 어떻게든 불편함을 참아보려고 애썼고,

평생 이른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던 습관 덕에 이른 새벽에 눈이 떠져 정신이 말짱하나

몸을 뒤척일 수조차 없는 아버지는 미안해서 차마 엄마를 깨우지 못하고

깜깜한 방에서 외로움과 어두운 생각과 싸우다가

너무 너무 힘들면 

"여보..." 하고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즉각 일어나 아버지의 동무가 되어 드렸다.


엄마는 내내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언제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대건씨를 끝까지 돌볼 수 있게 해주세요."


그 기도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는 고마워하시고 마음을 놓으셨다.


"당신 없으면 난 하루도 못살아."


엄마는 밝게 말했다.


"그래서 제가 열심히 기도하는 거에요.

당신 뒤에 가게 해달라고.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 제가 당신 지켜드릴께요."


두 분은 자주 (이 딸 앞에서 염치도 없이!!)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이야기했다.

엄마는 죽으면 5 년 전 먼저 간 아들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라 했고,

아버지는 9 살 때 세상을 떠나신 당신의 어머니가 너무 보고싶다고 했다.

그리고나선 할아버지, 남동생, 누나, 여동생, 언니,....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들---

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도 즐겁게, 오래오래 나눴다.


엄마 아버지는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 '당장 죽을 준비가 된 사람들' 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현재의 삶에 아주 충실한 그런 긍정적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부모님의 긍정적인 태도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가 우울함에 찌들어

"이제 난 다 살았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책도 못읽고, 밥도 혼자 못먹고,

기저귀를 남이 갈아줘야하는 이런 상태에서 더 살아서 뭐하냐..." 

라고 하셨다면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가 우울함에 찌들어

"이게 뭐냐. 고향에도 못가고. 언어가 안 통하는 미국에서 유배신세니.

평생 아버지 모시느라 고생했는데 

이젠 더 힘든 일만 남았구나." 

라고 하셨다면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모님의 긍정적인 마인드 사소한 것에서 표현되었다.

아버지의 경우,

 몸을 쓸 수 없이 굽은 팔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릴 수 있는 아버지는

'나비야, 나비야' 노래의 율동에 비슷한, 

즉, 손 씻고 나서 묻은 물을 터는 것과 비슷한 동작의 운동을 했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동작이었고, 팔 힘이 없는 아버지께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손천장을 보고 누운 상태에서 조용히 열심히 그 운동을 하셨다.

그래야 몸이 조금이라도 덜 퇴화돌 거라고.

그래야 딸이 덜 힘들거라고...


엄마도 마찬가지. 

아무리 피곤한 날이라도 엄마는 매일 매일 런닝머신에서 20 분간 걸었다. 

굳은 몸, 휘청이는 균형을 고치기 위해

스트레칭 간단한 요가 동작을 열심히 했다. 

너무 피곤하니 웬만한 사람이면 그냥 누워버릴텐데

엄마는 운동을 하기 위해 머리를 매만지면서 일어나곤 했다.

"내가 건강을 유지해야 신주를 도와줄 수 있지."

라고 하시며.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영어 공부를 하고 단어를 외우는 것은 덤,

엄마는 하루 매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했다.


부모님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걱정 대신,

불구가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 대신에,

불구가 된 남편을 24 시간 돌봐야하는 처지를 한탄하는 대신에,

남아 있는 삶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잘 살기 위해 노력했다.

죽음이란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괴물을 순하게 길들여버렸다.

그리곤 죽음 이후의 계획에 바빴다.

당장 내일 죽어도 좋겠다, 그렇다,

당신 먼저 죽고, 내가 죽자, 그러면 좋겠다,

깨끗하게 죽어서 아이들에게 폐가 안되었으면 좋겠다, 

죽으면 뭐가 제일 하고 싶냐...


마치 기차타고 춘천가면 뭐 먼저 하고 싶은가 이야기 나누는 것같았다.


바삐 부모님 방을 들낙날락하면서 일을 하던 나는

엄마가 아버지 침대 옆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을 읽어드리는 

평화로운 모습에 안도감과 행복감을 느끼곤 했다.

그 평화가 많은 노력 뒤에 얻어진 것이고

침대 밑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이란 괴물이 언제 그 평화를 갈기갈기 찢어버릴지도 모르기에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부모님도 그걸 알고 계셨고,

"이 순간이 그리울 거에요" 란 이야기까지 하면서

두분만의 시간을 즐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엄마는 슬픔에 빠졌다.

두분이 너무도 많이 상상하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예행연습까지 했던 그런 죽음이 닥친 것이었다.


엄마는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한대로,

그리고 아버지께 약속한대로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를 지켰다.


살아계셨을 때 이야기를 하고 책을 읽어드렸다면

돌아가신 뒤에는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면서

영혼이 떠난 아버지의 육체를 지켰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영혼과 함께했다.

죽음의 가상 시나리오를 수백번 쓰면서 연습을 한 부부에게

죽음은 아프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울면서 담담히,

슬퍼하면서 평화롭게

엄마는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나

엄마와 아버지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평화였다.


죽음이 무너뜨리지 못한

엄마와 아버지의 한결같은 평화의 모습을 보며

나는 죽음과 삶의 경계가 아무 것도 아닌 것임을 확인한다.


아버지는 죽음으로써,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통해서 보여줬다.

인간을 공포과 절망에 빠뜨리려하는 죽음이란 괴물이

무너뜨리고 지배할 수 없는 내면의 평화와 확신,

죽음 속에는 죽음이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이 있다.


작은 징검다리 하나가 삶과 죽음을 나눌 따름,

숨 한번이 죽음과 삶을 나누는 것일 따름,

그렇게 간단한 것이고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나는 편안히 받아들인다.


죽음, 

그까짓 것..

좀 있으면 

우리도 다시 들이키지 않을 숨 한번 크게 내쉬고

가볍게 뛰어 그 징검다리를 건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