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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 친구는 나의 동무 (3)
    카테고리 없음 2023. 7. 5. 02:02


    옥자 아줌마는 독립적인 여성이다. 뭔가에 의존한다는 것은—그게 인간이든, 지팡이든—아줌마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몸이 불편하게 된 뒤에도 부축받지 않으려고, 지팡이를 잡지 않으시려고 안간힘을 다 쓰신다고 했다.

    4 개월 동안 요양원에 들어가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회복이 된 뒤에 집에 돌아왔지만 운전도 쇼핑도 혼자 할 수 없는 상황이 아줌마에게는 아주 한탄스럽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서질 못한다. 간병인들이 와서 샤핑이라던가 청소, 요리를 도와주는데 샤핑 갈 때는 내가 꼭 샤핑 카트를 민다. 그게 지팡이를 잡는 것보다는 덜 창피하다.
    암 투 위익! (I’m too weak.)”
    (아줌마는 적시 적소에 교포 영어 구사하심)

    병원에 가서도 휠체어를 타기 실어서 벽을 잡고 천천히 걸으셔서 사람들이 독하다고 혀를 두른다고 하셨다.

    ”아줌마, 지팡이 집고 걷는 게 눈에 덜 띄어요. 벽 잡고 천천히 걸으면 더 이상하고, 우습기조차 해요.“

    “아…그런가?“

    ”네, 그러니까 휠체어 타세요. 젊은 사람들도 다리 다치면 휠체어 타잖아요.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그런가? 하하하!” 아줌마께 궁금했던 걸 여쭤보았다. 누구와 피난 내려오셨는지, 왜 내려오셨는지. 내가 엄마에게서도 들어서 알고 있던 사실을 이야기해 주셨다. 당시 전쟁이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남북한의 왕래가 가능할 것이라고 희망했었다.

    그러나 미군이 북한에 원자폭탄을 터뜨릴 것이라는 소문에 사람들은 전전긍긍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가족 중 몇 명이라도 원자폭탄에서 안전한 남한으로 내려가 있다가 나중에 다 만날 요량으로 주로 남자들과 아들들이 대표로 피난을 떠났다. 옥순이 아줌마의 집도 마찬가지. 오빠와 친척 남성 몇 명이 가족 대표로 피난 갈 때 밥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아줌마를 딸려 내려보낸 것이다.

    나는 아줌마가 연고가 없는 남한에서 어떻게 일을 찾으셨는지 궁금했다. 그것도 돈이 잘 벌리는 미군 부대 매점이 첫 직장이셨으니…

    “나랑 오빠랑 내려왔는데, 오빠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오대양 사진관’ 집 아들로, 이북에서는 아주 잘 살았다. 그 오빠가 먼저 미군부대에 취직해서 우리 오빠를 취직시켜주었다. 우리 오빠는 함흥 도회지에 유학 갈 정도로 공부를 잘했었다. 의과대학을 목표로 공부를 하다가 전쟁 때문에 내려와서 아무 일이나 하게 된 거다.

    오빠가 부대의 피엑스, 아, 팜펨, 니는 피엑스가 뭔지 아나?  매점이다. 거기 캐시어를 구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 겁도 없이 지원했다. 내 면접관은 소련 사람이었다. 미국 사람인데 소련 출신이었다. 루마니아 사람이다.  그 루마니아 사람이 내가 이북 출신이고 소련어를 할 줄 안다고 하니까 좋아했다. 자기 고향 말이니까 그런 거였다.“

    (루마니아 사람인데 소련 사람이고, 모국어가 소련말이었어요?라고 질문하려다가 아줌마가 대답하실 수 없을 것 같아서 통과.)

    “아줌마, 소련어를 할 줄 아셨어요?“ ”못한다. 중학교 때 소련어를 배웠다. 그냥 달달 외웠다.“

    “그런데 어떻게 그 ‘루마니아’ 사람이 좋아할 정도로 소련어를 하셨어요?“ “(본인이 생각해도 상황이 우스우신지) 하하하, 그래 말이다. 그거 내가 운이 좋았다. 내가 소련말은 못 하는데, 중학교 때 달달 외운 말 중에서 몇 개가 생각났다.
    그게 맞는 소린지 아닌지 모르지만 비슷한 소리를 했다.”

    “뭐라고요?”

    ”파세마트릿체, 카코이 프레크라스니 비이드~!” ”오, 진짜 러시아 말이네요. 무슨 소리예요?” “보십시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치입니까!라는 말이다.”
    (이 말씀에 나는 박장대소) “그게 소련말로 맞는지 아닌지 난 모른다. 그냥 그렇게 기억나서 했다. 그거 말고 또 했다.” (무슨 말일까 마음 벅차게 궁금해지는 순간!)

    “보이나 나치나예차“ ”그건 무슨 뜻이에요?“ “전쟁은 시작한다 라는 말이다.“ ”네?  아줌마는 한국 전 직후의 미군부대 인터뷰에서 적국의 언어로 전쟁이 시작한다라고 하신 거네요?“

    “그런 건가? 그런네. 근데 그 루마니아 사람이 좋아했다. 나더러 ‘화라쇼‘라고 했다.“

    ”그건 무슨 소린데요?“

    “구웃! (good) 이란 말이다. 내가 루마니아 사람한테 ‘따와리시’ 했다. 그건 ‘동무’라는 말이다. 루마니아 사람이 내가 자기네 나라 말을 하니까 좋게 봐서 인터뷰를 패스했다. 말 몇 마디 했을 뿐인데. 나는 그래서 그게 운명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받아서 우쭐했었다. 나는 내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오래 일을 했다.  그 덕에 우리 집 애들은 아주 편하게 자랐다. 커피도 미제만 먹었다. 맥스웰하우스 커피였다.  포테이토 살라드도 먹었다. 우리 집은 당시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던 부귀영화를 누렸다.“


    아줌마가 부귀영화를 누리기에는 뒤숭숭한 세상이 한몫했다.

    ”그때는 세상이 뒤숭숭해서 돈을 벌 일도 많았다. 담배가 최고였다. 말보로, 필리모리스… 피엑스 나올 때 담배를 10개씩 여기저기 몸에 차고 나와서 팔면 돈이 많이 됐다. “

    “오, 그래도 되는 거였어요? “

    ”당연히 안되지. 직원들은 퇴근할 때 여자 순경한테 다 몸수색을 받았었다.“

    ”그런데 어떻게 안 걸리셨어요?“

    아줌마는 그것도 몰라? 하는 투로 말씀하셨다.

    “순경이랑 짰지!“

    오…


    아줌마는 돈을 많이 벌어서 홍콩에서 온 치마 등 비싼 옷을 입으셨다. ”한국에서 세 벌 밖에 없는 치마를 입었다. 내가.. 우리 첫째도 미국 옷을 입고 자랐다. 유치원 260 명이 있었는데 학부형들이 다 사장들이고 시장 대표고 경찰 서장이고, 다 한자리했다. 나는 기 안 죽고 당당하게 활약했다.”

    ———

    아줌마는 이민을 온 뒤에도 열심히 일을 했다. 돈을 모아서 아이들 좋은 학교에 보내는 것 말고도, 아줌마는 한국에 와서 친구들 만나는 것, 그리고 북한 방문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남자들 밥 해주러 떠밀려 피난을 내려온 아줌마는 고향에 어머니와 남동생이 있었다.

    “나는 전쟁 3 년 내내 북한에 돌아갈 생각뿐이 없었다. 그런데 갈 수 없게 되어 한이 남았다.“ 아줌마는 미국 시민권자 자격으로 신포를 두 번 방문할 수 있었다. 딸을 그리워했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결혼해 살고 있는 동생을 만났다. 갈 때마다 선물을 잔뜩 사가고 돈도 들고 가 동생에게 쥐어주고 오셨단다. ”어떤 선물을 싸가셨어요? “

    ”내의, 양말, 먹거리…. 가방 꽉꽉 채워갔다. 그중에는 ‘감자 깎는 기구’와 손톱깎기도 있었다.“

    “그건 왜요?“

    ”우리는 북한에서 감자를 많이 먹었다. 옛날에는 감자를 놋숟가락으로 껍질을 벗겼는데 놋숟가락이 다 닳곤 했다. 손톱도 가위로 깎았었다. 그래서 사갔다.”

    아줌마는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비참하다. 내, 친구에게 몰래 물어봤다. 살기 어떠냐고. 친구가 ’625 전보다 더 살기 힘들다‘ 라고 했다. 눈에 보기에도 그랬다. 북한에서는 남자 애들이 군대 가는 게 꿈이라고 한다. 어서 커서 군대 가야 밥을 세끼 먹고살 수 있다고.

    그만큼 사람들은 못 먹고 산다. 내가 갔을 때, 북한은 외국에서 손님이 온다고 잘 사는 것처럼 보여주려고 급히 개조했는데 그게 티가 났다. 수세식 변기라고 하는데, 연탄화로 만한 구멍에 똥오줌이 내려가게 했다. 변소가 문이 있는 게 아니라 앉아 있으면 무릎까지만 가리는 식이었다. 아무도 침대를 쓰지 않는데 미국에서 왔다고 나한테만 침대를 줬다. 좁고 딱딱한 철침대였다.”

    “신포는 많이 변했던가요?”

    ”많이 변했다. 옛날 집이나 건물이나 기차역이 다 없어졌다. 1, 2, 3 구도 다 없어졌다. 육대에는 전쟁 날 때 봉화를 올리던 봉대산이라고 있었는데, 그것도 다 밀어버렸더라  마양도는 군사 기지가 되었고 북한이 핵실험을 제일 먼저 한 곳은 우리 고향에서 20 리 떨어진 마을이었다.  고바우란 곳에서 우리 동네로 물이 내려왔었는데, 물을 거꾸로 올라가게 만들었더라. 나는 너무 놀랐다. 어떻게 물을 거꾸로 올라가게 해 버렸는지… 안 바뀐 것도 있었다. 신포에 공설운동장이 하나 있었는데…“

    ”신포 공설 운동장이요? 저, 알아요. 거기서 5 월 1 일에 메이데이 행사했었지요? 퍼레이드도 하고.”

    “아니, 네가 그걸 어떻게 아노?” ”엄마한테서 들었어요. 그 공설 운동장은 어떻게 되었어요?“
    (공설 운동장에서 메이데이 행사가 있던 날, 엄마가 행사 관람을 제대로 안 했다는 이유,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엄마가 고초를 당했음) “공설운동장은 그대로 있었다. 그거랑 일본 신사가 그대로 있었다.”

    북한 방문을 하는 사람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신청하면 만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줌마는 북한에 남은 옛 친구 몇 명의 이름을 적어내고, 선생님 중의 한 분의 이름도 적었다.

    ”김철 선생님 이름을 적었지. 꼭 보고 싶어서.”

    김철…. 나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언젠가 엄마가 이야기해 준 사람인데, 무슨 이야기였더라?

    엄마의 담임 선생님의 별명은 ‘검정 우러기’였다는 생각은 나는데, 김철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분명 들었던 이름인데…. 김철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엄마와 엄마의 집에 끼친 영향을 나는 며칠 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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