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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 친구는 나의 동무 (4)
    카테고리 없음 2023. 7. 12. 07:11




    옥자 아줌마와 통화를 한 뒤에 나는 엄마와 이야기 꽃을 피우곤 한다.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옥자 아줌마와 이야기가 흥미롭고, 옥자 아줌마 이야기를 들은 뒤에 엄마랑 이야기는 더 재밌어진다.
    두 분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당시 분위기나 사건들이 좀 더 선명하게 가깝게 되기 때문이다.

    엄마는 옥자 아줌마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니  ‘맞아. 그랬어.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 그 친구는 정말 그랬어’ 라시며 옥자 아줌마의 버전을 확인해 주셨다.
    그런데 엄마가 아줌마의 말 중 약간 의아해하신 대목이 몇 군데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나 (옥자)는 간부였고, 너의 엄마는 반동분자였다'라는 말.


    엄마는

    ”내가 반동분자라는 취급을 받은 건 맞아. 그런데 옥자가 학교의 간부였다고? 금시초문이야. 우리 학교에는 ’간부‘라는 직책이 없었어.
    어떤 자격으로 간부가 되었다는 거야? 참 이상하다.“

    호오… 아줌마는 분명 ’간부였다’고 했고, 그래서 ‘우쭐했다’ 고 하셨는데?….
    (아줌마는 ‘우쭐하다’ 라는 표현을  몇 번인가 인생의 다른 사건들, 상황을 묘사할 때도 사용하셨다. 아줌마에게는 그게 자긍심과 비슷한 의미인 듯했다.)

    엄마는 옥자 아줌마가 학교에서 채점을 하고 선생님에게서 사탕을 받아서 우쭐했다는 말도 처음 듣는다 하셨다.

    “옥자는 우등생이지만 공부를 아주 잘하는 애는 아니었어.
      선생님이 방과 후에 채점을 맡겼다는 거, 나는 몰랐어.”

    “옥자 아줌마를 선생님들이 예뻐하셨나 봐요. “

    ”그런가 보구나. “




    ——


    며칠 후,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프라이팬에 야채를 넣고 볶으시다 말고, 나무 주걱을 든 채, 갑자기 뭔가를 때달은 듯한 탄성을 내셨다.

    “옥자가 그래서 나한테 그랬던 거였구나!”

    의아해서 ”엄마, 뭐요?“ 라고 여쭈었는데 엄마는 내 말에 아랑곳없이 혼자 소리를 하셨다.

    “이제야 알겠다. 그래서 옥자가 김철 선생님을 찾은 거였구나!”

    무슨 소리시지?

    엄마는 새로운 깨달음에 잠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듯, 나에게는 잠시 후 식탁에 앉은 뒤에야 설명을 해주셨다.


    ”중학교 때 옥자가 나를 대놓고 조롱하고 모욕해서 내가 상처받은 적이 있었어. “

    ”알고 있어요. 엄마가 학교에서 왕따 받았을 때 일이지요? “

    ”맞아. 근데 그 왕따를 조장한 선생이 있었어. 나를 따돌리라고 학생들에게 지시를 한 선생, 그 선생은 평소에 나를 아주 미워했어.”

    “알아요. 그 선생이 교양주임이라고 하셨지요?”

    “맞아, 교양주임 선생. 근데 그 선생님 이름이 뭔지 아니? 김철이야. 김철…. 옥자가 북한에 가서 찾으려고 했던 선생…”

    “아~! 김철!! 그 이름이 교양주임 이름이었구나!! 아줌마가 이야기하실 때, 김철이란 이름이 친숙하다 싶었는데, 왕따를 주모했던 선생 이름이었구나!! “




    ——————————————————

    왕따 사건은 엄마가 중학교 3 학년 때, 학교의 지시로 엄마의 학급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엄마를 의도적으로 무시하여 고립시킨 일을 말한다.
    그 이유는 엄마의 신앙이었다.

    중학생이었던 엄마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종교는 아편’이라고 가르치며 공산당에 충성을 종용하고 기독교를 억압하던 학교 입장에서는 예수쟁이 우등생이 골칫거리였다.

    엄마를 아끼는 선생들은 엄마를 몰래 불러 ‘신앙은 혼자 지키면 되는 거니까 교회를 다니지 말고 학교에 밉보이지 말아라’라고 조언했고,  엄마를 반동분자라고 미워하던 선생들은 여러 방법으로 엄마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려 했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 날 교회를 못 가게 하려고 크리스마스 당일, 기독교를 믿는 학생들을 학교 숙직을 시키거나, 학생들이 단체로 교회에 들이닥쳐 공격을 하게끔 허용한다거나….)

    엄마를 가장 못마땅하게 본 것은 사회/윤리 과목을 가르치던 교양주임이었다.  사회 시험 중간고사는 1 시간 동안 개인적으로 선생님과 면담을 하면서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는 구두시험이었는데, 엄마의 시험 시간에 교양주임은 시험은 안전에 없었다. 그는 한 시간 내내 기독교를 믿으면 안 된다는 주제로 회유와 강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엄마는 북한은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법 조항을 인용하면서 맞섰고, 교양주임은 엄마를 더 미워하게 되었다.

    어느 날 교양주임은 억지 이유를 들어 엄마를 공개적인 자아비판의 자리에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온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지켜보는 자아비판 자리에서 엄마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자 분개한 교양주임은 새로운 방법으로 엄마를 처벌했는데, 그게 ‘왕따‘였다.

    ‘아무도 봄메와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된다 ‘라는 지시는 엄마의 학급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에게까지 적용되었다.  엄마의 친구들은 엄마와의 대화를 피하였고, 선생님들도 엄마가 질문을 하거나, 대답을 하려고 손을 들어도 철저히 무시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유령 취급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니던 엄마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엄마의 베스트 프렌드인 정숙 아줌마였다. (약혼식 피로연에서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을 부르신 분이다. ^^ 정숙 아줌마 정의심에 불타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서 나중에 반공 인사들의 지하조직인 ‘비룡단’의 멤버로서 활약을 한다. 그 이야기는 따로…) 그녀는 밤에 엄마의 집에 몰래 찾아와 학교에서 엄마를 왕따 시키라고 학생들에게 지시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엄마는 스스로가 선생님과 학생이 연합한 조직적 왕따의 피해자임을 알면서도 학교를 계속 다녔고, 교회를 계속 다녔다.

    그러던 중, 외할머니가 엄마가 왕따를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할머니는 항의를 하러 학교에 찾아가 교양주임을 만났다.

    교양 주임은 ’봄메는 60 명 중 55 명이 따르는 영향력이 있는 학생인데 불손한 사상을 갖고 있고, 자기 고집을 피우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는 어쩔 수 없다’라고 했고, 이에 분노한 외할머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내 딸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에  딸을 보낼 수 없습니다. 전학을 시키겠습니다”

    라고 선언했다.

    외할머니가 내린 결정은 여러모로 예외적이었다. 일단, 신포 시에는 여자 중학교가 하나뿐이 없으므로 ’전학을 시킨다’는 것은 온 가족이 다른 도시로 이사 가야 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사회상을 고려할 때 아들이 아닌, 둘째 딸의 교육을 위해서 온 가족이 이사를 간다는 것은 아주 큰 용단이었다.

    한 달 후 엄마의 가족은 이원으로 이사를 했다.
    이원에서 엄마의 가족은 엄청난 고초를 겪었고, 625 전쟁이 났으며, 그해 말 (1950 년 12 월) 작은 고깃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양주임의 주도로 이뤄진 왕따는 엄마에게만이 아니라 엄마의 온 가족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


    엄마와 나는 식탁에 앉아 엄마가 새로이 깨달은 여러 가지 사실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는 내내 옥자아줌마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고 했다.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어서 굳이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풀 방도도 없었던 물음표들.

    그중 하나는 ’옥자는 내가 학교에서 조직적 왕따를 당했을 때 왜 나를 대놓고 조롱했을까 ‘ 였고
    또 하나는  ‘옥자는 미국 시민자로서 북한을 방문했을 때 왜 많은 선생님 중에서 김철 선생님을 만나려고 했을까’였다.

    이 두 문제는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없고, 함께 연결 지어 생각된 적이 없는, 그저 어쩌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궁금증이었는데, 내가 아줌마와 나눈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가지가 한 번에 엮여서 궁금증이 풀려버린 것이었다

    “내가 왕따를 당했을 때 다른 친구들은  나를 피하고 무시했지만 아무도 나에게 못되게 굴지 않았거든. 오히려 미안해하면서 피하는 듯한 인상이었어. 근데 옥자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면서 나를 조롱했었어. 이전까지는 나를 함부로 대한 적이 없던 애가 갑자기 변해서 나를 모욕해서 나는 많이 놀랐어. 큰 상처를 받았지. 영원히 옥자랑은 친구를 안 할 거다라고 결심할 정도였으니까….

    근데 이번에 너랑 옥자랑 나눈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어.

    옥자가 방과 후 학교에 남아 채점을 하고 선생님이 주는 사탕을 먹고, 학교의 간부였다고 하고,  그래서 우쭐했다고 하고… 학교에 ‘충성‘하고,  자기 스스로 ‘앞잡이’란 단어를 사용할 정도였으니 대단한 충성이었겠지… 나는 전혀 몰랐던 일들이야.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생각나는 게 있었어.

    옥자가 북한에 갔을 때 ”김철 선생님을 꼭 뵙고 싶어서 신청을 했는데 못 만났다 “ 고 했던 거.  
    나는 그 말 들으면서 속으로 ‘김철 선생은 나를 아주 미워한 사람이었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왜 옥자는 그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건가 의아했었어. 그러나 그냥 그대로 덮어 두었지.

    그런데 이번에 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옥자가 교양주임을 따른 것은 교양주임이 자기를 인정해 주고 예뻐해 줬고, 고마워서 다시 찾으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었어.
    그랬더니 갑자기 궁금했던 게 풀리더라고.
    옥자가 왜 나에게 못되게 굴었는지.

    교양주임은 선생 중에서 공산주의 사상이 가장 투철했고 학교에서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두려운 게 없었던 거야.
    선생이 미워하는 애는 자기도 미운 거고..
    그래서 당당하게 나를 조롱했던 거 같아. “

    ”그럴 수 있겠네요.”  나는 엄마의 말이 이해가 갔다.  

    이제까지 어두웠던 사실들이 명확히 보이는 순간, 그러나 갑자기 빛이 환한 빛이 비칠 때 밝은 빛에 적응이 안 되어 눈을 깜빡거리듯, 엄마는 새로운 사실들에 금방 적응이 안 되는 듯했다.

    ”70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옥자는 교양주임을 잊지 못하고 있고, 나는 반대 이유로 그 선생을 잊지 못하고 있구나.
    궁금했던 일이 풀리니까 시원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모르고 죽을 수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되니 신기하고.. 그렇다.

    다 옛날 일이다. 힘든 일들도 많았지만 모든 게 다 잘 되었어 “라고 하셨다.



    ———

    나는 ’엄마의 딸‘ 이자 ’옥자 아줌마의 동무‘로서 70 년 전으로 돌아가 많은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중학생 친구들이 주고받은 상처.
    엄마가 학교에서 받았던 압력과 왕따의 상처.
    아버지 없는 가난한 가정에서 선생님의 인정이 절실히 필요했던 옥자아줌마.
    다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엄마 말씀대로 다 옛날 일들이고, 그 옛날 일들은 그저 몇 개의 작은, 더 이상 아무런 고통을 유발하지 않는 작고 흐린 상처 자국만을 남겼을 따름.

    옥자 아줌마의 이야기는 또한 엄마의 중학교 때 이야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엄마의 현재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엄마의 모든 게, 모든 사람이 감사하다고 하셨다.

    “결국은 옥자한테, 김철 선생한테, 그리고 그 외 우리 가족을 핍박했던 사람들에게 다 감사해.
    그들 덕에 우리 온 가족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피난을 내려올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남에 와서 고생 많이 했지만 지금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  
    그 후에 겪은 일들이 힘든 일들이 많았고, 어떤 일들은 너무 고생스럽던 기억이 슬퍼서 생각하고 싶지 않긴 하지만, 그것들도 어느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감사해.
    지금 이 순간까지 올 수 있게 해 준 일들이니까…“

    중학교 때의 일에 연연하기에는 엄마의 그 이후의 삶은 훨씬 큰 역경의 연속이었다.
    피난민 생활, 극심학 가난, 학문의 꿈 포기 (엄마에게는 가장 큰 상처), 폐결핵, 결혼, 질병…. 아들의 죽음.

    그 어느 하나 남김없이 감사하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All is well that ends well” 이란 속담이 떠올랐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은 진리다.
    일이 잘 마무리되면 이전의 어려움과 도전의 과정이 다 보상되고 내 인생에 함께 했던 무수한 인간들은 모두 감사의 대상이 되기 때문.
    모든 것의 ’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라는 말은 인생의 숙제와도 같은 소리다.
    삶의 무수한 고난의 과정을 이겨낸 상태에서야만 가능한 소리이기에…

    구순을 목전에 두고, 삶의 끝자락에서 암투병을 하는 엄마로부터 ’다 좋았노라, 다 감사하노라‘ 하는 말을 들으며 위안을 느낀다.
    그렇게 되기까지 엄마가 이겨낸 무수한 고난, 그 고난을 통해 피워낸 지혜, 평화, 감사의 마음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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