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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9: ‘안개'카테고리 없음 2023. 4. 6. 09:59
아버님이 떠나신 뒤 이틀 동안 나의 마음을 추스른 뒤 어머님께 갔다. 어머니의 애도 방식을 존중하지만, 그로 인해 내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약간의 거리가 필요했다. 가는 길에 꽃가게에 들렀다. 인상이 좋은 꽃집 주인은 며칠 전에 꽃을 샀던 나를 기억하고 반가워하며 "시어머니를 위한 것이지요?" 하더니 강렬한 장미 부케를 만들어주었다. 어머님이 꽃을 보더니 예쁘다고 해맑게 웃으셨다. 어머니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꽃을 볼 수 있게끔 가까운 선반 위에 화병을 놓았다. 어머님은 이틀 동안 몸이 아주 많이 편찮으셨다고 했다. 여전히 구토가 문제였다. 단백질 음료와 물 몇 모금 마시신 뒤 잠을 청하셨다. 어머님의 틀니를 깨끗이 양치한 뒤 말려서 어머님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놓아드렸다. 주무시는 어머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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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8: 며느리의 자리카테고리 없음 2023. 4. 4. 21:45
구석에서 시댁 식구들의 논의 과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서서히 일말의 소외감이 느껴졌다. 시댁 식구들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들이 내 감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앞서 서술한 실용주의적 사고로 감정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그러나 나의 소외감은 단순히 시댁 식구 들과 감정의 코드, 문화 코드가 달라서 느껴지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며느리의 소외감이었다. 사실 '며느리로서의 소외감’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시댁 식구들과 나의 관계는 좋다. 시댁 식구들은 내내 나를 인정해 주고, 아껴주었으며 한 번도 나를 의식적으로 배척하거나 제외하지는 않았다.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그 순간에도 그들이 딱히 뭔가 잘못한 것은 없다. 되려 내가 한 식구라는 의식이 있으므로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일처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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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7: 애도 문화의 차이카테고리 없음 2023. 4. 3. 15:51
시누와 아버님 시신에 인사를 드리고 어머님 방으로 향했다. 방 문을 여니 초췌한 안색의 어머니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표정을 훑는 어머님의 눈길에서 이미 어머니가 심각한 소식을 감지하셨음이 느껴졌다. 시누이가 어머니께, “엄마, 슬픈 소식이 있어요“ 라고 말을 하니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셨어요” 라고 하는 시누이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니는 숨을 잠깐 들이키셨다. 동요하는 시선을 허공에 고정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단 한 마디, ”아, 그래?“ 어머님의 입이 실룩거리는 게 보였다. 나오는 말씀을 참고 안 하려고 하시는 건지, 울음이 터지는데 참으시는 건지, 무슨 말씀을 하려는데 말이 안 나오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시누이가 “엄마, 우리가 빠빠랑 함께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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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6 : 아버님의 죽음카테고리 없음 2023. 3. 28. 19:08
어머님은 깨어 계셨다. 오늘따라 아버님이 아주 평안하게 주무시고 계신다고 알려드렸더니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다행이구나.’ 언젠가부터 어머님의 감정 표현에는 아무런 색깔이 없다. 어머님이 ‘뭐 좀 먹을래?’ 하고 물으셨다. 평생 자식들을 먹이는 기쁨으로 사신 어머님은 병상에 누워 아무것도 못하게 된 뒤에도 ‘먹을래? 먹어라!’가 주요 어록. 어머님이 드실 수 없는 병원식—스푸, 하얀 빵, 바나나, 요그크르, 애플소스, 주스—-를 계속 방문객에게 권하신다. 어머니가 시키시는 대로 요구르트에 잼을 듬뿍 넣어 먹었다. 만족해하셨다. 그랑쁠라스까지 걸어서 다녀왔으며 어머님께 집에 가서 인사를 하고 왔다고 말쓰드렸다. 어머님은 내가 나만의 시간을 가진 게 참 잘한 일이라고 하셨다. 어머님은 기분이 좋아지셔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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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5: 그랑쁠라스와 임종 준비카테고리 없음 2023. 3. 28. 09:00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내가 벨기에 온 지 나흘 째 날, 일요일 저녁 6 시 20 분 경. 시누이와 내가 아버님 곁을 지켰다. 일주일이 지나서 나는 그날에 대해서 글로 쓴다. 그날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떠나시던 순간까지를 시간적 순서로 기억하고 정리해보려고 한다. 일주일 나의 뇌리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는 충격적 순간을 담담히 대면하는 것이 나에겐 아주 필요한 일이다. 아버님의 장례식 전에 아버님의 죽음의 이야기를 곱게 정리하고, 장례식 날, 투명하고 밝은 마음으로 아버님을 보내드리련다. ————————————— 일요일 아침, 날씨가 맑았다. 비가 내릴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한번 걸어볼까?’ 욕심이 났다. 걷고 싶었다. 브러셀에 도착하자마자 요양원에 찾아갔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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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4: 아버님과의 대화카테고리 없음 2023. 3. 25. 18:41
(03-18-2023) 사흘째 잠을 푹 자고 아침 8 시에 기상했다. 호텔 조식. 어제 인사를 나눈 셰프, 앙드레가 나를 위해 조식에는 포함되지 않은 달걀 요리 (에그 베네딕트)를 만들어주었다. 아침 먹고 나서 컴퓨터 실에서 글 쓰고 공부하는데 또 다른 친절한 직원이 카페올레를, 그리고 한 시간 후에는 카푸치노를 갖다 주었다. 시차로 인한 피로를 풀려고 아침 식사를 하면서 녹차와 커피를 마셨는데 거기에 더해 커피 두 잔을 더 마셨으니 카페인 파티를 한 셈. 그러나 정신적/육체적으로 소모적인 요양원 방문을 앞두고 카페인 충전은 필수, 기운도 나고, 머리도 맑아져 가벼운 마음으로 요양원까지 걸어갔다. 어머님 방에 들어섰는데 공기가 심상치 않다. 드시는 게 없으니 뼈만 남은 어머니가 무서울 정도로 수척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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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3: 음식 수발 도우미카테고리 없음 2023. 3. 21. 07:01
03-17-2023 브러셀 비를 캘리포니아가 다 가져갔는지, 캘리포니아에서는 계속 비가 내린다던데 브러셀 날씨가 계속 좋다. 아침 일찍 호텔 조식 뒤 글을 좀 쓰고 요즘 붙들고 있는 공부를 30 분 정도 하고 난 뒤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요양원 방문을 하려면 기운이 넘쳐야 한다. 아직 시차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현지 사람들의 스케줄로 활동하려면 더더욱 충전을 잘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점심으로 샌드위치에 아주 큰 사이즈의 녹황색 채소 스무디를 마시고는 요양원으로 떠났다. 요양원에 가는 길에 꽃집에 들렀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의 꽃집 아줌마가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주었다. 오늘 어머님은 상태가 아주 양호하셨다. 화병에 꽃을 꽂아 창가에 놓은 뒤 잠시 어머니와 잠시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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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셀 일지 2: 요양원 방문카테고리 없음 2023. 3. 18. 22:37
오후에 부모님께 갔다. 걸어서 10 분 거리, 현재 호텔이 지난번에 묵었던 호텔과 비슷한 위치라서 가는 길이 익숙했다. 구름 속으로 비치는 밝은 햇살, 쌀쌀한 공기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줘 오랜만에 팔을 휘휘 저으면서 씩씩하게 걸었다. 요양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나올 때는 또 다른 숫자의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요양원 환자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함이란다. 지난번에 왔을 때, 나는 요양원 원생의 탈출 기도를 목격했었다. 내가 요양원 현관을 들어가자마자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그러나 자동문이 닫혔고, 그녀는 나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날 보고 “봉쥬르~” 하며 씩 웃었다. 나도 인사를 했고, 그녀의 옷이 추운 겨울 날씨에 나가 다니기에는 약간 허술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