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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 친구는 나의 동무 (2)
    카테고리 없음 2023. 6. 21. 07:43

     

    나는 엄마로부터 엄마의 고향, 신포에 대해서 들어 알고 있었는데, 옥자 아줌마를 만나면서 나의 지식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엄마와 옥자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전쟁 전 신포시는 1 구에서 6 구까지 나뉘어 있었다. 1 구는 가난한 어촌 마을, 2 구는 '주재소' (경찰서)가 있는 곳, 일본인들의 집이 많이 있었다. 3, 4 구는 살림이 넉넉한 사람들부터 아주 잘 사는 사람들이 사는 구역이었다. 5 구에 학교가 있었고, 학교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었으며 6 구는 거지처럼 아주 못 사는 사람들이 살았다. 

    신포시의 한 가운데에는 '금강 백화점'이라 불리는 아주 큰 가게가 있었다. 현대식 백화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100 가지의 종류의 물건이 있다는 의미로, 다양한 물건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아줌마는 2 구에서 살았고, 엄마는 5 구 학교 근처의 교장 사택에 살았다. 엄마는 신포가 고향이지만 할아버지가 다른 지역에서 교사로서 복무했기에 '심포리' '월근대리'와 같은 작은 마을에서 자랐고, 4 학년 때 할아버지가 신포국민학교에 발령받아 온 가족이 이사를 왔다. 옥자 아줌마는 엄마를 처음 본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4 학년 때였다.  운동장에 서 있는데 눈이 반짝거리고 예쁜 아이가 눈에 띄었다. 걔가 너그 엄마였다. 새로 온 교장 선생님의 딸이라고 했다. 너그 엄마는 파란 세일러복을 입고 있었는데, 우리 친구들은 너그 엄마 보면서 '쟤는 공주 아닌가' 라고 했다. 너그 엄마는 도도해 보였다."

    엄마의 어렸을 때는 그런 인상이었구나....

    나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엄마의 어렸을 때의 모습, 그 새침하고 도도한 모습을 상상하며 아줌마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너그 엄마가 공부를 잘해서 우리 친구들은 다 놀랐다. 글씨도 남자같이 쓰는 거다. 선생니보다도 잘 썼다. 너그 엄마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머리가 영리하고 공부를 잘했는데 전쟁때문에  아깝게 되었다. 우리는 '춘사이는 천재다'라고 하며 존중했다.

    너그 엄마는 그림도 잘 그렸다. 미술 시간에 손가락을 그린 적이 있다. 내 기억에 손가락 세 개는 안 펴고 엄지와 검지를 편 손가락을 그렸는데, 너그 엄마가 너무 자세히 잘그려서 우리 친구들이 다 놀랐다. 지금도 내, 너그 엄마의 그 손가락 그림을 아주 생생히 기억한다." 

    아줌마는 자존심이 강해서 평소에는 '내가 제일 잘났다' 식으로 이야기하시는 분인데 어쩐 일로 엄마 칭찬을 많이 하셨다. 아줌마는 심지어 엄마가 자신의 '롤모델'이라고까지 하셨다.

    "너그 엄마가 내 롤모델이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내가 그걸 시인한다. 엄마 머리를 따라갈 수 없고 엄마 사는 방식도 따라갈 수 없다. 나는 너그 엄마를 존경한다. 사람들한테 너그 엄마 자랑 많이 하고 다녔다. 나한테 이런 친구가 있다고."

    나는 엄마 이야기,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재밌기도 했지만, 아줌마의 독특한 무뚝뚝한 서술체 말투에 매료되어 아줌마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당시 국민학교는 5 년제였다. 엄마와 아줌마는 국민학교 과정을 마친 뒤 신포 여자 중학교에 나란히 입학했다.

    옥자 아줌마는 중학교는 아주 행복한 시간이었노라 했다. (엄마에게는 중학교가 아주 힘든 시간이었다. 그건 나중에.) 그것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줌마가 우등생으로서 학교 간부직을 맡게 되고, 학교에 '충성하면서' 선생님들의 인정을 받았고, 그래서 내내 '우쭐하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옥자 아줌마의 집은 아주 가난했다. 아버지를 국민학교 2 학년 때 여의셨고, 오빠와 남동생 둘, 옥자 아줌마, 4 남매를 키우기 위해서 옥자 아줌마의 어머니는 큰 고생을 했다. 너무 가난해서 끼니를 잇기 힘들었다. 콩을 눌러 기름을 뽑은 뒤 (기름은 전쟁에 사용했다) 의 남은 찌꺼기를 물에 담아 익혀 먹었다. 감자, 좁쌀, 옥수수를 많이 먹었다. 옥자 아줌마는 그때 '세상에서 밥 굶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어려서  꿈 중의 하나는 '365 일 밥을 먹고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못 사는 집 애들은 우리를 부러워했다. 내가 '우리는 오늘 저녁에 옥수수를 먹는다'라고 자랑을 하면 친구들이 먹고 난 뒤 옥수수 속을 달라고 해서 그걸 끓여 먹었다."

    옥자 아줌마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중학교 때는 학교 간부가 되는 게 아줌마의 목표였다. 아버지 없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나의 존재를 증명하려면' 학교에서 간부를 해야 했고 간부가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했다.

    "그때는 학교에 기성회란 게 있었다. 아버지들이 대표로 왔다. 나는 아버지들이 망토를 입고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아버지가 망또를 입고 학교에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했다. 그리고 나는 결혼하면 치맛바람을 날리리라 마음먹었다. 그 어린 나이에..."

    "푸하하하! 치맛바람이요?"

    "그때는 치맛바람이란 말은 없었지만, 내 마음으로 그랬다는 거다. 내가 잘 나가서 아이들 학교에서 힘을 쓰게 해 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거다."

    (옥자 아줌마는 나중에 실제로 본인의 자녀들의 학교에서 치맛바람을 날리셨고, 치맛바람 무용담도 한참 이야기해 주셨음.)

    중학교의 간부가 되기 위해 아줌마는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다. 여름에 보는 국가고시는 아주 중요한 시험이어서 특별히 열심히 공부했다. 5 개의 과목, 한 과목당 120 문제를 풀어야 하는 어려운 시험이었고 그걸 준비하려면 과목 당 책 한 권을 달달 외우는 식이었다.

    연필과 종이가 있다면 공부하는 게 훨씬 쉬웠을 것이나 아줌마는 종이도, 연필도 없었다. 연필은 부잣집 애들이 연필을 다 쓰고 몽당연필을 버리면 그걸 줒어서 대나무를 이어 고뭇줄로 칭칭 감아 연필로 사용했다. 연필은 그렇게 구한다지만 종이는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종이 대신, 박스에 모래를 넣어 평평하게 만들고, 손가락으로 모래에 글씨를 쓰고 지우면서 공부를 했다.

    "나는 정직했다.  친구들이 '카닝구'를 해도 나는 안 했다. 친구 중에 기차게 카닝구를 잘하는 애가 있었다. 이름은 생각이 안 나는데 걔를 보면서 카닝구도 잘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걔는 무릎 위에 책을 놓고 재빨리 책을 찾아 답을 썼고,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역사 연도를 써놓았다. 걸리면 선생님한테 맞는데도 그렇게 열심히 카닝구를 하더라."

    아줌마는 잘하면 7 등-10 등 사이의 성적을 내내 유지했다. 우등생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우등생의 특혜 중의 하나는 방과 후 선생님과 함께 채점을 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사탕을 주었다.

    "창숙이나 정희 같은 부잣집 애들은 평소에도 사탕을 먹겠지만 나는 사탕을 먹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채점하는 날은 사탕도 먹고, 선생님한테 뽑혀서 채점을 하니 내 위신도 올라가는 날이라서 아주 좋았다"라고 하셨다. 

    아줌마는 엄마가 자기보다 공부를 훨씬 잘했다고 했다. 

    "나는 7등에서 10 등 사이를 왔다 갔다 했지만 너그 엄마는 항상 1 등이었다. 너그 엄마가 나타나기 전에 동네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던 애가 있었는데...걔가 너그 엄마의 유일한 경쟁상대였다. 걔 이름이 뭐더라... 아, 갑자기 걔 이름이 생각 안 난다."

    "아줌마, 혹시 임언순 아줌마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다, 임언순이다!" 하시더니 아줌마가 놀란 듯이 물었다.

    "팜펨, 니가 어찌 임언순이를 아나?"

    "엄마한테 이야기 들었지요."

    "그러나? 신기하다. 니 왜 그런 걸 기억하고 있나?"

    "재밌어서요. 여하간, 임언순 아줌마 이야기 해주세요."

    "임언순이는 집이 못살았지만 공부를 잘해서 친구들이 존중했다. 경쟁심이 많았다. 걔도 남한에 피난 내려왔다."

    "그렇다고 들었어요. 근데 임언순 아줌마는 아직 살아계시나요?"

    "3 년 전에 죽었다. 근데, 니가 어찌 걔를 아? 신기하데이..."

    "아줌마, 그때 친구들 이름 저 많이 알아요. 정숙, 창숙, 정희, 금자, 금희..."

    "너, 약장사 정숙이도 아나?"

    "물론이지요.  전 엄마 친구 중에서 정숙이 아줌마랑 가장 많이 보았어요. 제가 어렸을 때 정숙이 아줌마가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저더러 복덩이 복덩이 하셨어요.""

    "걔는 연애질 잘하는 애로 소문나 있었다. 이성에는 머리가 돌아가는 애였다. 절에서 살아서 '절간집 애'라는 별명도 있었고."

    "하하하, '이성에는 머리가 돌아가는 애'라고요?!!! 표현이 너무 재밌어요. 저는 정숙 아줌마의 어머니가 남편과 사별 뒤에 주지승과 결혼했고, 아들 둘을 나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절간애'라는 별명은 몰랐네요. 그런데 아줌마, 정숙 아줌마가 전쟁 중에 국군을 도와 반공 활동을 해서 나중에 훈장까지 맡은 거 아세요?"

    "그랬나? 내는 몰랐다. 니가 어찌 그런 걸 아노?"

    "엄마가 말씀해 주신 뒤에 궁금해서 제가 신문 찾아봤어요. 아줌마, 이야기 나온 김에.... 웃긴 얘기 하나 해드릴게요. 제가 퀴즈 하나 낼게  맞혀보세요."

    "하하하, 그래라"

    "정숙 아줌마 결혼식 날, 피로연 때 하객들이 아줌마께 노래를 시켰을 때 아줌마가 부른 노래가 무얼까요?"

    "모른다. 뭐꼬?"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무어?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노래를 결혼식에 불렀다고? 하하하, 정숙이, 걔가 미쳤구나! 하하하! 근데 넌 어떻게 그걸 아노?"

    "재밌어서요. 이야기가 재밌어서요."

    아줌마는 궁금한지 나더러 내가 아는 사람들이 또 누가 있냐고 물었다.

    엄마가 친구들과 왕래를 많이 하지 않으셔서 내가 직접 만난 사람들은 별로 없다. 내가 아는 이야기들은 다 최근에 엄마께 북한이야기, 어렸을 적 이야기를 여쭈어서 알게 된 내용들이다.  엄마가 말을 많이 하지 않으셔서 내가 엄마께 여쭙고, 또 여쭙고, 여쭈어서 알아낸 친구들의 이름을 대었다.

    "저, 창숙이 아줌마도 알아요. 창숙이 아줌마 집이 부자여서 피난 내려올 때 배 한 척에 다 실어 내려왔다고 들었어요. 정희 아줌마는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이름은 알아요. 강금자 아줌마가 육대 출신이고..."

    "맞다, 맞아! 니 많이 안다.  남정희랑 창숙이는 부잣집 딸로서 라이벌이었어. 항상 경쟁관계.  남정희가 내 결혼식 들러리였다. 걔 엄마 이름이 내 이름가 한 가지다. 김옥자."

    "아 그러시군요!"

    "정희는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퉁퉁 부었다더라. 나랑 친했는데, 이제는 연락이 안 된다. 죽었는가 보다."

    "아... 네.... 그러시구나....금옥 아줌마는요?"

    "걔는 귀가 안 들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우리보다 두 살 많으니 아마 죽었을 께다. 이젠 다 죽었다. 국민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내내 1번이었던--걔는 난쟁이를 겨우 면할 정도로 키가 작아서 내내 1번이었다-- 김선미는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못했는데, 미군부대 타이피스트가 되어 팔자를 고쳤지. 걔도 코로나 동안에 죽었다카더라." 

    아줌마는 신포 출신 선후배 모임이 있는데 한 달에 한 번 만나던 모임은 이제 다들 죽어서 해체되었다고 했다. 나는  이제까지 몰랐던 분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내 친구들의 이야기인양 다 머릿속에 찬찬히 간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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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줌마는 중학교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중학교 때 나는 학교 간부였다. 나는 공산당에 충성했다. 그래야 내가 어딘가 발을 붙일 수 있어서 그랬다. 나는 학교에서 날렸고 학교에 가면 우쭐했다. 지금 생각나는 건, 1948 년 5 월 10 일, 남한에서 선거가 있었는데, 이북에서는 난리가 났다. 공산당원은 물론이고 학생들도 혈서 쓰고 단식하고 그랬다. 나는 거기에서 앞잡이 역할을 했다."

    (아줌마가 거리낌 없이 '앞잡이 역할'이란 말을 쓰는 게 놀라웠고, 동시에 아줌마가 해주시는 이야기들이 더 신뢰가 갔다.)

    "너그 엄마는 성적이 우수했지만 사상이 안 좋아서 간부를 못했다. 얘수쟁이라서다. 당시는 예수쟁이가 몇 집 없었는데--예를 들어 1 구에는 단 두 집밖에 없었다--너그 엄마는 예수쟁이들 중에서도 좀 독종이었다. 선생님들도 반동분자인 너그 엄마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이것도 내가 엄마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아줌마는 중학교 때 엄마와의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다고 했다.

    "너그 엄마는 반동분자이니까 간부인 나는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내가 피해볼 수 있어서 내가 피했다."

    "그러셨어요? 엄마가 자아비판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니 그런 것도 아나!" 감탄 뒤 아줌마는 본인의 기억을 이야기해 주셨다.

    엄마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아서 학교에서 구실을 찾아 자아비판을 시켰는데, 엄마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아서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다 놀랐으며 선생님들은 엄마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것도 내가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일치.)

    그러나 그 후 엄마에게 일어난 일들을 아줌마는 잘 모르고 있었다.

    엄마가 기독교 신앙 때문에 학교에서 고초를 겪는 것을 보다 못한 외할머니가 엄마를 이원으로 전학시키기로 용단을 내렸고, 엄마의 온 가족이 신포를 떠나 이원으로 이사를 한 것이다.

    아줌마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깜짝 놀랐다.

    "그랬나. 나는 몰랐다. 어느 날 너그 엄마가 갑자기 전학을 가버린 것만 기억난다."

    아줌마는 이원 이야기를 하니 갑자기 한 친구가 떠올랐는지, "걔 이름이 뭐더라...?" 하시며 이름을 떠올리려고 하셨다.

    "이원에는 신포에서 살다가 이사를 간 친구가 하나 있었다. 아... 그 친구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걔 아버지도 선생이었다. 걔는 이사 간 이후로 소식이 끊어져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신기하다.... 걔 생각 이제까지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오늘 생각이 나니.... 근데 왜 이름이 생각 안나노.."

    "아줌마, 혹시 '이현재'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현재?!!!" 잠시 이름을 생각하던 아줌마는 반가워하며 크게 외치셨다

    "맞다! 맞다! 맞다! 이현재다!"

    "아줌마, 이현재의 아버지는 이원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셨지요? 이름은 '이형'이라고 들었어요."

    "'이형'? 맞다! 맞다! 이현재 아버지 이름, 이형 맞다!!"

    70 년이 넘는 동안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고, 떠올릴 이유도 없었던 친구와 친구의 아버지의 이름들 들으면서 아줌마는 적지 않아 흥분했다.

    "신기하데이... 맞다. 맞다. 내 오늘, 이현재, 이형 이름도 불러보고, 이 무슨 일이고? 세상에...... 근데, 니는 어찌 그걸 다 아노?"

    "재밌어서요. 옛날이야기가 재밌어서 계속 여쭙고 적어두고 그랬어요."

    "이현재 기억하는 사람은 내 친구 중에도 없을 끼다. 에햐.... 그걸 니가 어찌 아노."

    나는 나대로 나 혼자만 알고 있던 엄마 친구를 비롯, 내가 알고 있던 옛날 북한 이야기들을 아줌마와 맞춰보고 '추억'하는 게 너무 재밌었다. 옛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내가 엄마와 아줌마와 동시대를 살아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내가 이야기로만 알던 옛날의 세계를 살아내고 기억하는 아줌마랑 대화하면서 오랜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듯 반가웠다.

    나는 통화를 할 때마다 아줌마의 뛰어난 기억력이 감탄스러워서 자주, 진심으로, 칭찬을 해드린다. 아줌마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아주 좋아지신다.

    “나도 모른다. 내, 왜 그렇게 다 생각나는지. 동창회 언니들도, 친구들도 나더러 니는 어찌 그렇게 다 기억하냐고 묻는다. 난 기억력이 타고났다.”

    라고 하시는 아줌마는 이미 나와 처음 통화를 하던 날의  한탄/불평/회의에 가득 찼던 분이 아니었다.  

    "우리 애들이 공부를 잘하는 게 내 머리를 받은 건지도 모른다. 하하하. 이런 말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그게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당연히 아줌마 머리를 물려받았겠지!

    "아니요, 아줌마, 당연히 그렇겠지요!"

    대화를 하다 보면 가끔 아줌마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룬 것은 무엇인가' 식의 사고에 빠져드신다. 60 대 초반의 나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죽음을 앞둔 어르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리라. 외로이 홀로 앉아, 홀로 그걸 생각하고, 그냥 삼켜버리는 게 아니라, 남과 나누고, 인정을 받으시니 자긍심이 저절로 살아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줌마가  본인이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고,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그리고 정직하고 성실했던 삶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를 자유스럽게 표현하시곤 한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떳떳하다.  싫은 소리 안 듣고, 매사에 인정받았다."

    "나는 껌꼬 희고는 분명히 하는 사람이다. 평생 비뚜러진 짓 하지 않았다. 헛된 짓 하지 않았다." (아줌마 발음 그대로 썼음)

    그렇게 이야기하곤 갑자기 자기 자신을 떠벌리는 것이 창피하다고  계면쩍어하시는 아줌마가 참 사랑스럽다. 나는 열심히 살아온 아줌마의 삶을 짝짝 짝짝 열렬하게 (갑자기 공산당 박수가 생각남 ㅋ) 손뼉 치며 칭찬해 드린다. 아줌마와 나의 대화는 이래저래 활기차다.

    우리의 통화는 매번  서로 알고 있는 이야기와 기억의 조각을 맞추면서 이제는 사라져 버린 세계를 다시 상상으로 재건하는 흥미롭고 보람 있는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아줌마랑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신포 국민학교, 신포 여자 중학교 학생이 된 듯하고, 신나게 과거를 추억하는 수다를 떨다 보면 아줌마와 내가 일종의 동창회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엄마의 친구와 친구의 딸의 참 이상한 동창회...

    며칠 전, 아줌마와 통화를 한 뒤, 아줌마가 오랜만에 엄마께 문자를 보냈다. '팜펨이랑 이야기 나누면서 너무 행복했노라고, 살 맛난다'고 하셨단다. 엄마도 흐믓해하셨다.

    엄마랑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엄마가  엄마가 '(동창) 명희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아있는지....' 하셨다.

    나는 그 아줌마를 본 적도 없고, 특별히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지만, 옥자 아줌마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두어서 알고 있던 소식을 엄마께 전해드렸다.

    "엄마, 모르셨어요? 명희는 이미 2 년 전에 죽었어요."

    그 순간, 엄마도 나도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둘이 동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명/희/가/ 죽었다'라고? 얘, 명희가 네 친구니? 아이고, 진짜 넌 옥자랑 친구가 되었구나! 하하하하!"

    돌아가신 명희 아줌마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나는 그분을 한 번도 만나 뵌 적이 없어서 이름을 그렇게 쉽게 불렀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 나는 나는 깨달았다. 내가 옥자 아줌마를 진짜 친구처럼 여기고 소통하고 있구나.... 그래서 아줌마 친구들을 내 친구라고 착각하고 있구나...

    내가 옥자 동무와 친해져서 수다를 떨어도, 나의 절친, 춘산 동무는 전혀 질투하지 않는다. 그건 참 감사한 일. 

    당분간, 아니 옥자 동무가 살아 있는 한, 옥자 동무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나는 신포 인민 여자 중학교 학생이 될 것 같다.  70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14 세 소녀의 마음으로, 나는 옥자 동무와의 깔깔깔깔 웃고 수다 떨면서 풋풋하고 소중한 우정을 쌓아갈 것이다.

    사랑하는 옥자 동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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