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동경비구역' 시작 부분에서 "판문점은 겨울 들판과 같다. 불이 붙으면 쉽게 뻗어나간다' 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은 판문점의 묘사일 뿐만이 아니라 틴에이저 두 명이 사는 우리집의 묘사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끊임없는 상호 도발과 냉전으로 항상 긴장감이 감도는 우리집.
냉혹한 침묵, 서슬이 퍼런 눈싸움,
그러다가 한번 싸움이 나기라도 하면 마치 겨울 들판에 불바다처럼 무서운 기세로 퍼져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곤 한다.
룰루는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병사와 같고
랄라는 대한민국 병사.
룰루 동무는 오해를 쉽게 하고, 사소한 일에 굉장히 자존심상해하며, 역정내고 고함지르기를 즐겨한다.
('내가 너 때릴 수 있는데 참는 거야' 식의 핵무기성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랄라께서는 낙천적이며 삶을 즐기는 스타일이나 어찌나 변덕이 심한지, 대외 정책도 일관성이 없어 햇볕이 비쳤나 하면 어느새
먹구름에 껴있고, 기분 좋을 때는 자기가 아끼는 쵸코렛, 아이튠 카드 등을 서슴없이 나누지만, 자기 기분 나쁘면 자기만 혼자 야금야금 먹으면서 옆의 룰루가 거의 미칠 정도로 약을 올린다.
혜지 언니가 경험에 의거해 '두고 봐. 애들이 정말 죽자고 싸울 거다. 그러나 얼마 지난 후에는 아주 친해진다' 하고 미리 말해줘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항상 경직되어 있고 적대적인 내 자손들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최근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북한 헌병 룰루와 남한 병사 랄라가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의 대화는 아주 단순한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부모님이 오신 뒤 랄라의 방을 둘이 같이 쓰게 되면서였다.
처음에는 룰루가 랄라 방에서는 잠만 자기로 하고 낮에는 안방을 쓰라고 했다.
그런데 한 석 주 지난 뒤부터 룰루가 랄라 방에서 엎드려 숙제하는 모습이 보였다.
책상도 없이 불편할텐데?
괜찮단다.
괜찮다면서 공부하는 중간중간, 바로 옆 책상에 앉아 숙제하는 랄라와 자꾸 투닥였다.
그렇게 싸우고 있느니 내 방 가서 공부하라고 하면 랄라 방에서 하겠다고 우긴다.
그러면서 또 둘이 싸운다.
티격태격, 끊임없이.
쉴새없이 다투는 모습이 보기 안 좋기도 하거니와, 자꾸 다투면 부모님께서 당신들이 오셔서 애들이 불편하게 되었다고 하실까봐 조심스러워 잔소리를 했더니 둘이 소리를 죽여가면서 열심히 싸우더라.
그런데 옛날에 각자 방을 차지하고 있을 때와는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다른 때는 싸우고 나면 각자 자기 방 문을 닫고 들어가 서로 미운 얼굴을 안 보면 되었는데, 이제는 한 방을 쓰니 닫을 문이 없었다.
싸움이 자주 일어나고 오래 지속되는 단점은 있었으나, 싸움을 하다말고 방문 닫아 걸고 미움에 사로잡혀 속 끓이던 때와 다른 싸움의 양상이었다.
아이들은 화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냉전도 아닌, 그런 관계에서 싸움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 기분이 풀어져서 둘이 속닥거렸다.
'너랑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라는 데 서로 동의를 하고 같은 공간에서 서로 감정 다스리면서 공유하게 된 침묵,
그렇게 부족한 '동의'이고 '공유'였지만, 그것도 암묵적 동의 하에 이뤄지는 일이라 그런지 서로 각자 방에서 문 닫고 미움을 키우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관계였다.
서서히 이들에게 좀 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네 음악은 저질이야, 네 음악은 시끄럽기만 해 라고 공격하던 아이들이
서로의 음악을 들어주는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어떤 때는 서로 자기가 재밌게 보는 유튜브 동영상을 같이 보면서 낄낄 거렸다.
아이들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런 정겨운 광경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너무 놀라 문고리를 잡고 하염없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어떤 날은 밤 늦게까지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한다.
자정이 가까운데, 너무 늦었다 싶어 이제 자라고 잔소리를 하면 잠시 조용했다가 다시 소리를 죽여 도란도란.
보다보다 못해 너무 늦었다고 자라고 하면
"우리 둘이 지금 친해지는데 엄마가 왜 막아?"
라고 저항한다.
와.....와....와....
평소 엄마의 사랑을 두고 쟁탄전을 벌이던 아이들이 엄마를 공동의 적으로 만들었다!
축포를 터트리고 싶은 이 어미의 기쁜 마음!
어느새 아이들의 방은 공동경비구역 영화의 송강호와 이병헌이 몰래 노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집이 안 팔린 게 오히려 너무 잘 되었구나!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가 집을 내놓은 지 몇 달, 팔릴 듯 하다가 안 팔린 게 두 번,
부모님 오시고 난 뒤에 집 파는 것을 보류했다.
이제는 집이 안 팔려서 정말 다행이다 싶다.
만약 집이 팔려서 새 집에 이사를 갔더라면 아이들은 지금보다 더 큰 집에서, 각각 방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더 보장 받았을 거고,
서로에게 아쉬울 게 없으니 각자 자기 방에서 이기심, 질투, 분노라는 총과 칼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꼭 방을 따로 쓰는 게 아이들의 정을 갈라 놓는 것은 아니겠고
대궐같은 집,각기 다른 방을 쓰면서도 기질적으로, 천성적으로 잘 맞아 친한 오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집의 경우는 아이들이 틴에이저가 되면서 나름 성숙해진 상태에서
선택권없이 같은 방을 쓰게 된 게 관계 계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집이야 언제든 사서 이사가면 되는 것이지만
이제 고작 4 년 후에 아이들이 대학을 가게 되면서 헤어지게 될텐데
그 전에 이런 시간이 주어진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아이들 덩치가 커지면서 집이 좁아 불편하고
친구들을 데려와 편히 놀 수 없어서 내심 미안한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게 다 아이들 복인 거같다.
태어나서 가장 많은 시간을 공유한 오빠, 동생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로 삼게 된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가.
게다가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서로를 탐구하고 자기를 발견해가는 것도 얼마나 큰 득인가.
살면서 보니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으나 바른 생활을 하고 돈 대신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자식/형제 자매들이 정과 사랑이 깊은 경우가 많더라. 그런 식으로 삶이 공평한게 참으로 신비하게 느껴졌었는데 이번에 비슷하게나마 우리도 그런 축복을 경험하게 되어 참
기쁘다.
부모님이 오셔서 받은 복이다.
부모님이 안 계셨더라면 아이들은 한 방을 쓸 일이 전혀 없었고, 아무리 방을 같이 쓰면서 친해지는 게 좋다고 하지만 틴에이저 애들을 한 방에 몰아넣는 일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아이들 방을 같이 쓰게 한 거고, 예상치 않은 덕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숨어있던 선물들을 발견하는 삶이 너무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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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상에서 행복을 주는 것들...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호떡과 김치전.
그리고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
'편안한' 표정으로 편지 읽고 있는 룰루.
thank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