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뇌출혈 소식에 에밀은 샌디에고에서,  꼴렛은 워싱턴 디씨에서 급히 집으로 왔다. 

아이들이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기운 하나도 없이 말도 못하시던 할아버지는 잠시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하여, 꼴렛에게는 얼굴을 찡그려가며 미소지었고, 에밀에게는  에밀!” 하고 또렷한 소리로 외치셨다.

그게 할아버지가 있는 최대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 이후 할아버지는 천장만 보고 계셨고,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손을 잡아드리는 말고 있는 없었다.  

이틀 후, 에밀이 샌디에고에 내려가겠다고 했다.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이 할아버지 병실에 그냥대기상태로 있는 20 초반의 젊은이에게는 의미가 없었던 게다. 할아버지가 위험한 순간을 넘긴 것같고  자기 말고도 이모, 엄마, 할머니, 버지니아, 아빠가 있으니 자기는 학교로 돌아가야겠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상태가 어떻게 변할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에밀을 그냥 보내는 마음에 걸렸다.  당장 다음날에는 수업도 없으니 굳이 내려가야할 이유도 없는 것같은데....


에밀, 샌디에고에 가서 해야할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니?”


그건 아닌데...내가 있다고 해도 딱히 도울  없어.”


에밀, 도울 있어.”


어떻게?”


그냥  옆에 같이 있어주는 것으로...”


에밀은 잠시 놀란 표정이었다. 뭔가 하는 없이 그냥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니

그러나 말을 받아들여  샌디에고로 내려가지 않았다.


다음날 (월요일)   점심 때쯤, 에밀과 꼴렛이 할아버지 병실에 왔다. 

 

에밀이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you are coming home today.”


아버지는 말을 알아들으셨지만 금방 말씀을 하지 못하셨다.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입을 움직이려 애를 쓰셨다

그리고 천천히 말씀하셨다.


 “I’m so happy” 


에밀, 꼴렛, 모두 잠시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가 또렷하게 말씀하셔서.

나는 순간이 중요하다 싶어서 셀폰을 열어 촬영을 했다.


왜요? 아버지, 행복하세요?”


아버지는 “Because… you guys…all…came…” 이라 하셨다.


나는 그순간  마음이 놓였다. 아버지가 이정도로 좋아지셨구나! 시간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실 거니까 에밀이가 자기 학교로 돌아가도 좋을 것같았다. 에밀은 그날 오후 샌디에고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새벽에 돌아가셨다. “I’m so happy’ 라고손자들에게 이야기한 13 시간 후였다.


간호사를 만나고 아버지 시신을 화장회사에 보낸 뒤 에밀에게 문자를 보냈다. 


에밀아, 할아버지가 새벽 3 시에 돌아가셨어. 엄마, 빠빠, 할머니, 이모가 할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에 같이 있었단다. 에밀, 너도 어제 할아버지와 함께 해준 고맙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I'm so happy라고 하는 순간 정말 기뻤고 마음이 놓였어. 너와 꼴렛이 그냥 옆에 있는 자체가 할아버지에게 힘을 주어서 그리도 엄청나게 멋지고 아름다운 --“I'm so happy”-- 하실 있었지. 네가 하루 머물러서 할아버지 옆에 있어준 , 그래서 할아버지를 행복하게 해준 너무도 고맙다.”


에밀에게서  답장이 왔다.


엄마, 할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걸릴 것같아. 그러나 내가 하루 있으면서 할아버지 옆에 있을 있었던 정말 다행이야....엄마, 엄마는 괜찮아?......엄마는 너무도 열심히 할아버지를 돌봤잖아. 엄마는 amazing mother 일 뿐만이 아니라 amazing daughter 야.”


에밀이가 나를 도닥이다니... 이런 모습이 있구나. 무뚝뚝한 아이에게서 받은 다정한 문자가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에밀에게 정말 고마웠다. 에밀이가 나의 말을 들어줘서 하루 묵는 덕에 우리 가족이 할아버지로부터 '행복'이란 말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남겨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만약 내가 아버지께아버지, 오늘 퇴원해서 집에 가실 거에요라고 했다면?


아버지는 분명 한국어로는그래, 잘됐구나.”  ...좋다!’ 라고 하셨지 영어로 ‘I'm so happy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 쏘우 해피’ 는  "잘됐다" "좋다" 라는 말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고 강렬한 행복의 표현이다. 아버지가  힘든 순간에 행복감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신 것,  그것을 우리가 목격한 것, 다 감사할 일이다. 


어떤 면에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영어로 ‘I'm so happy라고 하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는 아이들을 보면 그냥 거의 반사작용처럼 얼굴이 환해지며 행복해했다.  몸이 아무리 아픈 날도, 마음이 울적한 날도, 아이들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  아버지는 마치 한번도 어김없이 몹시 갖고 싶은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활짝 웃으셨다. 나는 아이들이 아무 것도 하는 (doing) 없이 그냥 존재 자체 (being) 로서 아버지께 그렇게 큰 기쁨을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왔다. 어쩌면 내가 에밀더러 "그냥 옆에 같이 있는 것"으로써  도와줄 수 있다고 했던 게 아버지께 아이들이 존재 자체로서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조건도 없이어떤 행위도 없었는데 그저 사랑을 해주는 것, 그  '무조건적 사랑' 을 부모님은 내내 실천하셨다. 오빠, 언니, 나, 나의 조카들 (달래, 솔이), 에밀, 꼴렛...우리 모두 부모님의 그 조건없는 사랑의 수혜자들이다. 아버지가 병상에 누운 뒤로 사랑을 받기만 하던 우리 자손들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할머니 할아버지께 사랑을 표현하려고 노력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병상에서 고생하셨지만 그렇게 우리가 사랑을 표현할 시간이 주어진 것은 부모님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축복이었다. 


나는 수발의 가장 큰 축복이 받는 사랑에 익숙하던 아이들이 사랑을 주는 주체로 변화한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각 22 세, 19세인 에밀과 꼴렛은 미국 중산층 이민자 가정, 핵가족의 산물로서 부모와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부모한테 대들고 싸운다는 소리 돌려서 예쁘게 해봤음) 평범한 미국 아이들이다. 부모를 사랑한다지만 불손하게 행동하기도 하나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  할버니 할아버지깨는 항상 다정하게 예의바르게 사랑을 표현한다. 특히 아버지가 병상에 누운 시기는 아이들이 10 대에서 20 대 성인으로의 성장을 하는 어려운 시기였는데, 자기들을 잠깐 보기만해도 행복해하고 모든 것을 다 예쁘게 봐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 덕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아이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할아버지 수발에 참여함으로써 사랑과 존경심을 표현하였다.


사랑과 존중


조부모와 손주들간의 사랑과 존중, 그것은 내가 첫아이를 임신하기 전부터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그런 관계이다. 그 꿈의 모델은 시댁 식구들이었다. 벨기에의 에릭의 가족은 한 때 4 대가 같이 살던 그런 대가족이다. 에릭의 부모님이 에릭의 외할머니 ('본마망')가 100 세때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서 모셨고 에릭은 본마망와 각별히 친한 손자였다. 본마망은 부엌과 응접실의 바로 옆 방을 쓰셨는데 그 집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계시는 본마망께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손자, 증손자들도 본마망께 스스럼없이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티비를 같이 시청하곤 했다. 미국에서 할머니를 내내 그리워하던 에릭은 우리가 벨기에를 방문한 동안 수시로 본마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모시고 산책을 나가거나 맛있는 식당으로 모시곤 했다. 나는 온 가족이, 특히 본마망의 손자 손녀인 에릭과 그 형제들이 본마망과  살갑게 친하면서도 존중하는 그런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관계에 감동했다. 그리고 내가 아이를 낳으면 나의 아이들도 엄마 아버지와 이런 관계를 맺으면 좋겠다 꿈꿨고 그렇게 노력하리라 마음 먹었다. 


조부모와 친하면서도 존중하게 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우리는 미국에 사는 핵가족이기때문에 친척들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처럼 가족간의 서열이나 관계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존중하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벨기에와 한국의 조부모님들과 아이들이 가까워지려면 일단은 자주 보는 게 중요했다. 에릭과 나는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한국과 벨기에를 번갈아가면서 방문했다. 부모님들도 자주 미국에 오셨다. 우리 살림이 풍족하지 않을 때여서 잦은 한국 여행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지만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아이들과 부모님이 친해지게 위해서는 가치있는 일이라 거리낌없이 여행에 투자했다. 아이들이 후에는 시부모도, 부모님도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즐기실 있게끔 일년에 한번씩  한달에서 6 가량 우리집에 와서 머무셨다. 화장실이 하나뿐인 좁은 집이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부모님이 오는 날은 크리스마스같이 신나는 날이었다. 20 년 전만해도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분들은 큰 이민 가방에  별별 짐을 다 싸왔다.우리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 아버지 키 만큼 커보이는 그런 가방을 풀면 일년 내내 고심하면서 사다 모은 선물이 한가득. (벨기에 시부모님의 선물과 비교되었다.  '선물 잔뜩 사왔다' 하며 가방을 열면 고작 장난감 작은 것 몇 개와 쵸콜렛 박스 두어 통, 옷이나 스카프, 간단했다.) 한국 할머니 할아버지의  가방은 끝없이 뭔가 계속 꾸역꾸역 나와서 온 마루를 다 어지럽게 채워버렸다. 아이들은 부모님이 오시면 흥분해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럴 밖에. 크리스마스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선물을 받으니! 부모님은 아이들의 산타클로스였다. 


부모님은  기꺼이 아이들의 식사, 목욕, 산책등을 도와주셨고,  아이들에게 칭찬과 사랑을 아끼지 않으면서 

동시에 나와 에릭도 내내칭찬해주셨다. ‘애들은 이렇게 키워야한다. 그런 방법은 옳지 않다 식으로 훈육에 참견하신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같이 사는 수월하고 유쾌했다.


매사에 칭찬을 하고 격려해주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손자/손녀가 어디 있으리오.


예로  에밀의 선생님이 에밀이 글씨를 너무 흘려써서 알아보기 힘들다고 쪽지를 보내와서 우리는 에밀더러 글씨를 신경써서 쓰라고 잔소리를 했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 이것 . 글씨를 어찌 이렇게 쓰지? 어른 글씨 같다. 나이도 어린데, 획이 아주 자연스럽구나!”


그러네요. 영어인데 붓글씨같아.”


에밀은 글씨 잘쓴다고 하는 소리가 맘에 드니 내내 보란듯이 자신의 글씨를 의식하면서 쓰기시작했다. 글씨는 자연스럽게 또박또박해졌다. 


늦잠꾸러기 꼴렛을 깨울 때도 할머니는 그만의 방식이 있었다.  꼴렛 이불을 살짝 걷고, 뻗은 다리를 부드럽게 주무르면서,


"이구...예쁜 꼴렛. 피곤한데 일어나야하는구나...이구.....이구...."


아침에 일어나는 거가 졸지에 영웅적인 행위가 되어버린 꼴렛은 기분 좋은 감추느라 애쓰면서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꼴렛은 어느날 나에게엄마도 나의 딸에게 할머니같은 할머니가 되어줄 있어?” 라고 나에겐 감히 꿈꿀 없는 요구를 했다. 바느질, 요리를 놀이처럼 재밌게 배워주는 할머니, 자기가 어떻게 하든 격려해주는 할머니가 좋았던 게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도 내가 할머니같은 할머니가 그건 가능하지 않다 싶던지 혼잣말로 이담에 딸의 딸에게 할머니같은 할머니가 되야지라고 결심하더라..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친한 것은 다행이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이들이 너무 어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너무도 사랑이 후하시니까 아이들이 버릇이 나빠지는 것이었다.  어느날 꼴렛은 밥을 먹고 것을 먹으려고 수를 쓰는 자기에게 할머니가 쵸코렛을 주자 삐져서, “할머니, 우리집에 오지마!” 라고 텃세를 하더니만, 느날은 한수 떠서할머니가 들으면 고려장 시켜버릴 거야라고 하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꼬마가고려장이란 말을 아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네 하고  웃기에는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철없는 애가 하는 소리이므로 무작정 못하게 할 수도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모질게 굴거나 무례하게 구는 것은 교포 가정에서 가끔 있는 일이다. 나의 지인들의 이야기도 비슷했다.  한국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득 사온 선물을 풀자마자 아이들은 자기들 장난감만 챙겨서 '고맙습니다’  외치고 자기 방으로 사라져린다,  말이 편하게 통하지 않는 조부모가 귀찮아하고 친구들에게 부끄러워한다, 할머니는 왜 이것도 모르냐고 타박한다...등등


그런데 아이들 입장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었다.  자주래야 일년에 한번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르신을 공경하라’  한국식 예의는 미국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약자'를 존중하라는 개념은 있지만 나이가 많다고 공경해야한다는 식의 사고는 없다.  그러니 한국식으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하면 못써!” 할머니한테 잘해드려야지!”라는 말, 즉  ‘할아버지가 나이가 많으니까 공경해야한다라는 소리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전혀 이해가 안가는 컨셉트인 것이다 (사실 따져보면 그리 합리적인 생각도 아니다.) 그렇다고 윽박질러서 무조건 공손하게 하라고 했다가는  아이들과 부모님 사이를 멀어지게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생각할 일이 많았다.  '국제결혼, 미국이민자, 핵가족 아이들이 조부모의 사랑에 버릇이 나빠지지 않고 공경하게 하려면?  오랫만에 손주들에게 사랑을 퍼주고 싶어하시는 부모님의 욕구를 충족시켜드리되 그것때문에 아이들이 버릇이 나빠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은 1 년에 한 달이이었다. 그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연스레 서로를 알고 사랑하고 존경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고, 아이들이 너무 어렸다. 그래서 내가 쓴 몇가지 방법이 있다.



일단은 사소한 일 무조건 할머니 할아버지를 우선순위로 놓았다.


멜론 맛있는데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먼저 맛보게 해드릴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이가 많으셔서 쉬 피곤하시니까 우린 조용히 놀자. 딱 1 시간만.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산책 다녀와라. (실제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 데리고 나가는 산책임)

할머니 할아버지가 혹시라도 넘어지면 안되니까 너부터 천천히 걸어라.

할머니 할아버지 내리기 편하시게 앞에 앞에 앉으시게하자.


이런 식으로 한국의 가정에서는 이미 너무도 당연히 하는 일들, 매사에 어르신들을 배려하는 사고방식을 사소한 일에서 실천하려고 했다.


하나, 연극을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니까 존중해야한다 하는 대신에  아이들이 쉽게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안에서의 서열을 파악하게끔, 엄마 아빠보다 위의 최고 권력자임을 알게하기 위해서 한 건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어렸을 콜라는 물론 사탕, 아이스크림을 자주 사주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시면 바뀌었다.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뭐든 맛있고 달콤한 것을 사주시게끔 했.  그리고 연극을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사탕을 사주겠다고 나에게 이야기하시면 내가 거부하다가 결국은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에 순종한다는 그런 단순한 시나리오였다. 할머니랑 리허설을 몇번 하고서 실전에 들어갔다.


 예를 들자면:


할머니:  “신주야, 오늘 내가 애들 데리고 나가 사탕을 사주겠다.”

:  “, 엄마. 우린 애들 사탕같은 사줘요..' 

할머니:  "어쩌다 먹는 괜찮아. 애들이 양치를 해서 충치도 하나 없는데, 

너무 그렇게 못하게 하면 된다.”

: “그래도 사탕 사달라는 버릇 생기면 안되는데..”

할머니:”아니, 할머니가 어쩌다 사주는 거니까 괜찮아. 

우리가 후에 애들이 사탕 사달라 사달라 조르지 않을 거니까 걱정마.

애들 웃는 얼굴 보고 싶구나. 이해해라.”

 : ". 엄마. 그렇게 하세요."


사탕 이야기를 하니 주의깊에 경청하던 아이들은 일단은 사탕 먹게되어 좋고,  동시에 자기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엄마와 맞서는 할머니를 더더욱 사랑하게 되면 할머니에게 꼼짝 못하는 엄마를 보면서 집안의 서열을 확실하게 파악한다.


아이들은 20 분 걸어 사탕가게 가는 내내 즐거움을 감추지 못해 길에서 펄쩍거리면서 뛰었다.   ‘할머니 탱큐!’ 하면서 무아지경으로 막대 사탕 을 때,  잊지 않고 꼭 한 말이 있다. 


얘들아, 할아버지한테 감사하다고 말씀 드렸어? 할머니가 내셨지만, 두분이 같이 모은 돈이거든. 할아버지가 사주시는 것이기도 .”


아이들은할아버지 땡큐~!’  외쳤다.


사탕/아이스크림 드라마 뒷전에서 흐믓하게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힘찬 땡큐에 놀라고 즐거워하시곤 했다. 귀한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으며 아이들은 집안의 우두머리라고 알고 있던 엄마가 순종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권위를 달콤하게 받아들였다.


아이들 버릇이 나빠지게 하지 않기 위해 연극이 하나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달이라는 짧은 시간에 11 개월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사랑을 표현해주려니 많은 것을 사주려고 하셨다. 부모님이 얼마나 절약하면서 사는지 아는지라 나는 아이들에게 많은 돈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동시에 우리 나름대로의 절약에 익숙해져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선물의 홍수에 버릇이 나빠지는 것도 우려스러웠다.


아이들에게 배풀 행복해하시는 부모님이 계속주는 기쁨 느낄 있게 하면서, 그게 부모님께 부담도 안되고, 동시에 아이들의 버릇도 나빠지지 않으려고 한 방법이 있다. 그것도 간단했다.  아이들에게 사줘야하는 , 필요한 것들 (자전거, 자전거 헬멧, 신발, , 겨울 자켓) 기다렸다가 부모님이 오실 구매했고, 비용은 우리가 부모님께 미리 드려서 부모님이 지불하시는 척하게끔 했다. 부모님은 본인들이 내시겠다고 우기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어차피 사야할 물건들을 사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해줄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그렇게 년을 하다보니 아이들이 아주 어려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한테 너무 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좋아했는데초등학교 3, 4 학년이 되면서 달라졌다.


어느날 에밀이 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경제 상태가 어떠냐,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자냐고 물었다. 나는 청빈하게 살아 오셨으며, 현재도  철저히 절약하면서 살고 계신다 말해줬다. 에밀이 깜짝 놀랐다.


"그런데, 우리한테 오실 때는 그렇게 가방에 여러 가지를 담아 오시는 거야?! "


"글쎄 말이다. 누가 아니래니. 평생 그러셨어. 자식 셋에게 줄게 없나...

 본인들은 그렇게 절약하시면서...그래서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고 그래.”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선물 사오시지 말라고 ! 

우리 선물 같은 필요 없어."


꼴렛도 마찬가지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보호적으로 되었다. 어느 , 아이들이 사야될 문방용구를 사러 부모님과 나갔다. 아이들이 자기가 필요한 물건을 골라오면 돈을 내가 부모님께 미리 드렸던 돈으로 부모님이 지불하게끔 계획이었다. 아이들더러 각기 필요한 것들을 찾아오라고 뒤에 천천히 구경하면서 돌고 있는데, 꼴렛이 나를 끌어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엄마, 할머니가 나한테 크레용을 사주시겠다고 하는데 어쩌지? 이거 내가 필요한 거니까 사야하긴 하는데...엄마, 엄마가 할머니 몰래 먼저 나가서 먼저 계산해줘요."


나는  (이미 할머니께 돈을 드린 상태이므로)  여유있게할머니가 너에게 기뻐하면서 주시는 거니까 받아도 된다라고 했더니만, 꼴렛이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었다.


"엄마, 엄마는 할머니 상황 몰라? 연세 많아 일할 수도 없고 들어오는 돈도 없는데,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 돈을 쓰면 되겠어?”


하나도 틀린 없는 말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돈을 함부로 쓰면 안되지!


아이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할머니 할어버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몸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이 들리면 걱정을 했다. 멀리있는 우리들이 있는 것이 없으니용돈을  보내드리자라고 했다. 돈이 없는 자기들이 용돈을 보내드릴 없으니 나를 들들 볶았다. 보내드리자고 며칠 후에는 돈을 보내드렸냐고 확인하는 것으로 봐서 아이들의 머리와 마음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차지하는 자리가 확실한 듯했다.


비슷한 시기에 아이들과 나눈 대화가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4 학년무렵,  아침에 차를 타고 학교 가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노인들의 노후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늙으면 어디 가서 사는가,  늙은 사람들은 아파서 죽나 늙어서 죽나, 늙는  뭔가--등등 아이들 특유의 흥미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이전의 가족 구조 안에서는 노인들이 보호를 받았고자녀들은 부모를 봉양할 의무가 있었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줬다이야기 도중, ‘부모가 자식의 기저귀를 갈아 주고자식이 크면 부모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옛날이야기를 했는데그게 아이들에게 쇼크였나보다


에밀이 물었다.


"한국의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누가 돌봐주는 거야?"


혼자 사시고 계시지.. 그래서 엄마도 가슴이 아파.

할머니 할아버지 많이 늙으셨을  돌봐드리고 싶거든.”


학교에 도착했다. 아이들에게 ' 오늘도 즐거운 하루!' 하려고 돌아 보았다.

에밀이 눈물을 닦고 있었다. 꼴렛은 '엄마  눈에 눈물이 나려고 했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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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 사랑에서 주는 사랑으로



조부모의 권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그리고  어렴풋하게나마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의 기초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이미 세워진 사고인 듯하다. 그러나 연세가 많아지시면서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눈에 보이게 돈독해졌다.  선물을 가져오기는 커녕 자식에게 의존하게 된 할아버지를 보며 아이들은 아이들은 미숙하나마 할머니 할아버지께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애초에 자신들을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었듯이...


우리 가족를  흔들어놓은 두 사건--오빠의 사망아버지의 사고--을 겪을  아이들은 둘 다 고등학생이었고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빠가 돌아가시자마자 부모님 건강이 약해지셔서  내가 수시로 한국에 들어가고 몇 차례  이상 머물렀는데, 아이들은 이해해줬다.  이후 우리집에 여행오셨던 아버지가 넘어지셨을 때도 아이들은 우리의 삶의 변화에 금방 적응해서 나를 도와주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신용카드를 주고 원서접수와 기타 모든 일을 ‘네가 알아서 해라했다. 꼴렛이 3 학년 자기 학년 회장선거, 4 학년 때는 총학생회장 선거, 홈커밍 등등 많은 일들을 했는데, 열정적인 부모들이 많이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꼴렛도 나에게 요구하지 않았고, 나도 에릭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이들도 나와 에릭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리에겐 할머니 할아버지가 중요하고, 그들에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가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할아버지 사고로 한국에 영영 못들어가게 되시고 우리집에서 살게 되었을 아이들은 잘되었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나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담당해주었다. 아직도 아주 미성숙하고, 자기 방도 제대로 치우고, 챙겨먹는 것도 못하지만, 적어도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든든하게 도와드리려고 노력한다는 게 나에겐 너무도 신기했다.  사람이 성장하는데 일관성있게 모든 면에서 성장하지 않고, 어떤 부분으로는 부쩍 크고, 어떤 부분은 더디게 수도 있는 거구나.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몸이 성장할 때 손만 먼저 크고, 갑자기 코가 크고, 나중에 키가 크고 하는 식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사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인 아이들 덕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미국 생활, 그리고 병상에 적응하는 게 수월해졌다.


에밀은 자기가 처한 여러 문제가 산더미같고 마음 고생이 심할 때에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최선을 다해서 듬직한 손자 역할을 하려 했다. 특히 할아버지 수발 중에서힘있는 사람만이 있는 일들을 에밀이 담당했다. 




할아버지를 휠체어로 옮기기 위해서는 힘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데 에밀은 자기가 필요할 때는 기꺼이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옮겨서 산책을 모시고 나갔다.  물리 치료사에게 아버지의 몸의 상태에 대해 자문을 받아 가끔 아버지께 운동을 시켜드렸다.할아버지의 갸냘픈 손에 작은 역기를 들려들이고 ‘할아버지 이렇게 하면 근육이 유지됩니다’ 라고 설명하면서 운동을 가르쳐드리는 에밀을 보면서옛날에 유모차를 타고 할아버지와 공원에 가던 아기가엣날에 할아버지 등에 업혀 약수터에 오르던 아이가옛날에 할아버지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던 아이가...저렇게 할아버지를 돌보게 되었구나... 하고 혼자 추억 여행에 빠져들곤 했다.  할아버지도 분명히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이라 생각한다누구에게나 매사에 감사하시는 아버지지만 에밀에게는 더더욱 감사해하셨다.







내가 에릭과 이스라엘로 갸있던 어느 여름, 에밀은 집에 머물렀는데, 정전이 되어 할아버지 수발이 아주 힘든 날이 며칠 있었다. 순간 수발을 드는 것은 할머니와 이모였지만 자기의 필요할 경우에 대비해서 집에서 대기를 해야하는데 더위에 정전이 되었으니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문자를 주고받는 중에 자기 친구들이 며칠째 같이 해변에 가자고 했는데 못갔다고 하길래 나는 그게 불평인줄 알고 이번 주에는 친구들과 바다에 같이 가라고 해줬다. 에밀은 대문자로


“NO!!!!!!!” 라고외쳤다.’ 그리고는 지금 친구들이랑 필요가 없다면서

 “할아버지는 나에게 우선순위야라고 했다.  


부모에게는 무뚝뚝하고 무례할 때도 많은 에밀, 성숙한 모습보다는아직 크고 있구나...’'언제까지 기다려야하는가' 혼자 생각하게 만드는 에밀인데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성숙한 모습으로 절대적 예의와 정성을 다했다.


꼴렛은 에밀과는 다른 방법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즐겁게 한다.  뜬금없이 할머니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 웃음 폭탄을 터뜨림으로써. 할머니 옆에 누워 모자라는 한국어로 수다를 떨고, 갑자기 할아버지의 발을 보고 10 동안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기게 생겼다고) 웃고 할머니를 아이패드로 끌어당겨 웃긴 사진 찍어놓고 깔깔거리고 학교 선생님들이 못되게 험담하고, 벌떡 일어나 소녀시대의 춤을 추고...꼴렛은 우울해질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엉뚱하고, 복잡하고, 웃기고, 황당한 10 대의 세계로 끌어내어 웃게 만들었다.  





"할아버지, 하이 파이브!!" 손녀의 말에 팔이 불편한 할아버지는 팔을 번쩍 드렸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단조로운 노인의 삶에 연예인만큼 분주한 손녀딸의 생활은 흐릿해지던 시간 관념을 똑바로 세워줬고 (예를 들어 며칠에 무슨 일을 하고, 시에 나갔다, 시에 돌아온다 ), 과거에만 머무르던 삶은 갑자기 미래 지향적이 되었다. (예를 들어 1 후에는 여행을 가고 2 후에 집에 와서, 이것 저것 계획이다 ) .  손자 손녀와 사는 노인들이 치매에 걸릴 확률이 줄어든다던데 말이 정말 맞다 싶었다. 한국에서 몸은 건강했지만 두분만 살면서 웃을 일이 없었던 부모님은 미국에서 몸은 불편하지만 손녀딸 덕에 웃을 일이 많아졌다. 


한번은 꼴렛이 자기 친구들을 초대해 할아버지 생신 축하 음악회를 열겠다고 했다. 나는 의아했다. 할아버지 생신 축하? 


엄마, 할아버지랑 돌아가신 삼촌이랑 생일이 가깝잖아. 할아버지가 생신 축하하면서 삼촌 생각하면 얼마나 슬프겠어. 몸도 안좋으신데. 그래서 두분의 생일을 동시에 기리는 음악회를 거야.”


각종 악기를 다루는 친구들, 노래를 잘하는 친구들이 음악회를 하고 그것을 감상하는 그런 조촐한 음악회였는데 꼴렛이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고 했다. 모두 정장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꼴렛의 말로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오면 떠들석하고 요란한 틴에이져들의 파티가 되버리므로 원래 음악회의 목적에서 벗어난다고 했다. 단아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드레스 코드가 필요하다나.


의도는 가상하지만 누가 오기나할까? 나는 궁금했다. 가족 파티가 아닌데 누가 남의 조부모를 모셔서 같이 하는 정장 입는 파티를 하고 싶어할까?


그러나 꼴렛은너무 많은 사람들이 올까봐 엄선해서 초대자 리스트를 짜고 있다고 했다.” 


당일, 꼴렛이 친구와 쇼핑을 해와서 거실과 군데군데 장식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하나 들어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아이들이...천사같은 아이들이...





피아노, 첼로, 트럼펫, 그리고 성악, ....이어지는 아이들의 무대. 천재성이 번득이는 에반은 순간의 영감을 담아 즉흥적으로 8 분간 피아노 연주를 했고, 아이잭은 아버지가 오빠가 좋아하시는 찬송을 첼로로 연주했으며, 매리는 아버지가 엄마가 좋아하시는 찬송을 불렀다. 자기들도 처음 해보는 이상한 컨서트, 친한 친구들 사이지만 수줍어하기도 하고, 휠체어에 앉아서 조용히 모든 무대를 감상하신 아버지와 할머니계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매리가주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부르는 순간, 구석에 앉아 있는 꼴렛이 눈물을 흘리는 눈에 들어왔다. 집안의 막내로서 엉뚱한 익살로서 식구들을 웃게 만드는 아이의 마음이 우리가 상상할 없을만치 깊구나, 그리고 안에는 함부로 나타내지 않는 눈물이 흐르고 있구나....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내가 막내로서 하는 거칠고 까불까불한 행동들 속에 내가 감추고 있는 그런 섬약함과 다정함이 거울처럼 딸에게서 보여서였다.



아버지께 연설의 기회가 주어졌다. 아버지는병과 노년이란 아주 외로울 있는 시간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으로 나에게 위로를 주어서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몇몇 아이들은 눈물을 터뜨렸다.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꼴렛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엄마…” 하고 웃으면서 눈물을 감추는데,  동년배 친구를 보는 것같이, 딸이 늙어버린 것을 보면서 대견하고, 아팠다.


———


어느날 나는 아버지가 쓰러지신 후에 우리가 급조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방이 바로 응접실과 부엌 옆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꿈이 이뤄진 거구나! 본마망의 방이 바로 그러했듯이. 그리고 집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본마망에게 인사를 했듯이 우리집에서도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 아버지께 인사를 하러 들어왔다. 아이들의 친구들이 집에 들어서면 '할아버지한테 인사해' 라고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인사를 했다. 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흔히 볼수 있는 광경은 아니므로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색다른 경험에 약간 압도 되었지만 곧 아버지의 밝은 모습에 안도를 하곤했다.


현관 옆의 그 방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바깥 세계를 이어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우편물이 도착하거나, 친구가 음식을 놓고 가거나, 이웃이 뭔가 물어보러 들리거나, 에릭이 퇴근하거나, 다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었다.  집을 지켜주는 문지기 할버니 할아버지는 에밀과 꼴렛이 그 문을 드나들 때를 놓지지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  '에밀은 3 시에 체육관 갔다' ' 꼴렛은 친구가 데리러 왔더라' 라고 말씀해주셨다.  에밀 꼴렛이랑 문을 통과하는 순간, 수문장님들은 기가 살아났다.  "에밀이다!" "꼴렛인가?" 아이들은 들어오면 손을 씻자마자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인사를 하러 들어왔다.  


에밀과 꼴렛은 할머니 할아버지 방의 문을 여는 순간 어김없이 반가워하는, 사랑이 가득한 시선을 마주했다.  자기들의 존재 자체가 기쁨이라는 것은  부모님의 환희에 미소를 통해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경쟁 사회에서 자기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삶에 지쳐서 집에 돌아온 아이들은 자신들을  맞아주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을 점점  고마워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사랑은 예의바른 태도, 다정한 말로써,  그리고 도와드리는 행위를 통해서 표현되었다.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의 보답이라고나 할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했듯이 아이들도 할머니 할아버지  존재 자체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병약한 노년의 그 모습 그대로. 


아이들과 같이할 때  방의 기운이 바뀌어졌다아이들의 존재 덕에 웃음을 찾는 부모님은 병마의 노년을 살아내기 위한 평상시의 투쟁은 잠시 잊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순간을 온전히 즐기게 되었다


아이들이 다른 도시에서 살기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며칠은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축제였다. 오기 전에 기다리고, 오면 즐기고, 가면 다음에 언제 오나 기다리게 만드는 아이들, 아이들 어느새인가 할머니 할아버지의 산타클로스가 되어 있었다. 아무런 선물 꾸러미 없이, 아무런 행위 없이, 그저 자신의 존재 자체로 누구에게 산타 클로스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자신이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둔 할아버지가 "I'm so happy" 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엄청난 존재라는 사실은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이들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이 험한 세상에서 할아버지는  


'너는 너 그대로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떠나셨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선물,  그의 'I'm so happy"를 아이들이 영원히 기억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기도

from 분류없음 2018.12.03 20:08

유쾌한 유품정리

from 분류없음 2018.12.03 20:07

아버지가 떠나신 뒤 한 달이 지났다. 마음이 평안하다. 아직 장례식을 치루지 않았다. 12 월 충순에 온 식구가 다 모여 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장례식을 미룬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이들이 (우리 애들, 조카들) 다 모일 수 있는 날짜를 잡기 위해서였는데 우리에겐 너무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장례식의 절차에 급급하는 대신, 그리고 사망 후 사흘 후에 억지로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대신,  엄마, 언니, 에릭, 나는 며칠 동안 그냥 아버지 생각하고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옛날의 일들,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 죽음의 순간 등등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바다에도 두 번 가고,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며칠간 그저 아버지 생각만 했다. 아버지의 몸은 우리를 떠났지만 아버지는 온전히 우리 마음에 자리했다. 

처가 나자마자 응급처치를 재빨리 하면 큰 상처로 번지는 것을 막아주듯이 아버지 죽음 직후 우리 마음대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아버지를 기린 것이 무기한 고통스러울 수 있었던 애도의 과정을 줄여 준 것같다

엄마, 언니, 나 모두가 아버지랑 아주 친했고 그래서 아버지가 합리적이신 분이고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그래서 셋이 한마음이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우리 셋 중의 하나가 '이러면 안된다, 장례식은 당장 꼭 해야한다.' 라고 주장했다면 그것도 참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장례식 없이 식당가고 해변가고 하면서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일을 하는 거라는 확신과 기쁨이 있었다. 남아있는 식구들 간의 완전한 소통은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또 하나, 애도의 과정을 쉽게 해주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유품정리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다 끝나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시신이 옮겨진 뒤에 남아 있는 것은 기저귀, 담요, 몇 점 안되는 옷과 신발들, 잘 포장해서  (1 시간밖에 안 걸렸다) 친구가 일하는 양로원에 기부하였다. 

아버지의 유품정리가 그렇게 간단했던 것은 돌아가시기 전에 '짐정리'가 되어 있어서였다.  아버지가 '짐정리'를 하시고 돌아가셔서, '유품정리'가 필요없게 된 것이 본인도 축복이고 남아있는 우리에게도 큰 축복이었다. 



유품정리의 고통

유품을 정리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소모적인지를 나는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옛날에 이스라엘 어머니 오프라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유대교에서는 종교인들이 시신을 관리하기에 사망하자마자 유해를 종교인들이 인수해가는데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가셨고 장기 기증을 했다. 오프라 가족은 할아버지 아파트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시신도, 관도, 사진도, 꽃도 없는 빈소는 침착하고 우아한 분위기 그 자체였다. 조문객들은 차와 다과와 함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조문객들이 다 돌아가고 밤 늦은 시간 오프라가 유품정리를 시작했다. 갑자기 방에서 살이 칼로 베인듯한 그런 비명에 통곡소리가 들렸다. 달려가보니 오프라가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조그만 물건을 들고 선 채 울고 있었다. 능력과 연륜이 있는 심리학자에게도 자기 아버지의 유품정리는 힘든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혼자 사시던 분인데도 짐이 많았다. 그 짐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과정은 고통이었다.

2013 년, 나는 오빠의 유품정리를 하면서 힘든 과정을 겪었다. 그때 썼던 글을 잠시 인용해본다.

빠의 이름만 들어도 쓰러져서 우는 새언니가 유품정리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하기로 했다. 그러면 언니가 감정을 추스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었다. 

오빠의 방에 들어갔다. 옷, 컴퓨터, 스테레오, 책과 공책, 필기용구--모든 게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두 달 전만해도 주인이 있어서 유용했겠으나 이제 아무 쓸모 없이 그저 오빠의 죽음만 상기시키는 그 물건들을 없애는 게 나의 일이다. 큰 숨을 들이키고 일을 시작했다. 

오빠가 얼마나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유품정리를 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정리되어 있었다. 옷들은 계절별로, 색깔별로 정리되어 있었고, 책상의 서류들도 잘 분류되어 있었다. 나는 거의 내 키에 맞먹는 대량 쓰레기 봉지에 분류된 물건들을 넣기 시작했다. 옷, 신발, 책, 공책,....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오빠가 돌아가신 거라고''오빠가 이 옷을 입으셨을 때 모습은 어땠을까?' '이건 정말 오빠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네' '이 음악을 좋아하셨구나'....식으로 매 물건을 만질 때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여러 생각들이 나를 아프게 했다. 며칠 내로 미국에 돌아가야하므로 시간이 빠듯하다는 게 축복이었다. 그날 밤 안으로 끝내야할 일이라서 나는 감정을 통제하면서 로보트처럼 일했다. 

나는 정리 중 몇 차례 선 채로 눈물 흘렸다. 의사의 처방전과 약 영수증, 오빠의 건강기록부, 약봉지, 약병들때문이었다. 오빠의 방 안에서만 발견되었지 아파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약봉지들과 약병들을 통해 나는 오빠가 어떤 병을 언제부터 앓았는지, 그리고 오빠가 얼마나 처절하게 혼자 병과 싸웠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더 근심에서 보호하고, 병에 관해서 전혀 모르고 있던 노령의 부모님을 충격과 근심에서충격에서 보호하려고 오빠는 방문을 닫고 이 방에 혼자 앉아서 투약하고, 약을 먹고, 그리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헝클어진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약병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침묵으로서 끝까지 부모를 지키려고했던 맏아들의 책임감과 외로움이 느껴져서 괴로웠다.

내가 오빠의 유품정리를 하려고 한 이유 중의 하나는 오빠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오빠에게 남이 모르는 그런 비밀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내가 치워드리리라. 그 무엇이라도 나는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서프라이즈는 없었다. 전화와 컴퓨터 조차도 놀랄만한 내용이나 이상한 웹사이트나--아무 것도 없었다. 오빠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살아있을 때 알던 오빠나 돌아가신 뒤에 발견한 오빠나, 다 똑같은, 깨끗한 사람이었다. 

오빠의 짐이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5 시간 정도 후에 모든 일이 끝났다. 자정께 쓰레기 봉지들이 줄지어 현관 앞에 세워졌다. 봉지들이 너무 무거워 질질 끌어 엘리베이터로 가져갔다. 하나 갖다 놓고 또 하나 가져와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한 봉지 끌어내고, 또 하나 끌어내고.. 질질 끌어서 재활용품 장소에 갖다 놓고...그걸 반복했다. 안해본 육체적 노동이었다. 숨이 찰 정도로 힘이 들었다. 몇 번째로 내려갔을 때였던가? 잠시 숨을 돌리려고 허리를 편 순간 나는 멈칫했다. 주차장에 빽빽하게 줄지어 있는 자동차들. 경비인도 없고 아무도 없는 주차장에서 쓰레기 봉지를 지그재그로 낑낑 거리며 끌고 있는 내 모습을 그 차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들이 마치 어린이 만화 영화에서 말하는 자동차들처럼 살아서 나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나를 둘러싸고 뚫어지고 바라보고 있는 차들이 두려워져서 내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흥얼흥얼 노래를 했다. (누군가 그때 나를 봤다면 주차장에서 노래부르는 귀신이라 기겁했을지도 모른다.) 

1 년 후, 미국에서 에릭과 백화점에 갔을 때이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무심코 문을 열고 나온 순간 나는 굳어버렸다. 오빠 유품정리하던 날의 주차장과 너무도 흡사한 정경이 나 앞에 나타나서였다. 빽빽히 줄지어 서 있는 차들, 유리로 된 입구, 엘리베이터. 오빠의 유품을 끙끙거리면서 끌던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차들처럼 백화점 주차장의 차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같았다. 죽음의 기억, 상실의 기억이 나를 후려쳤다. 나는 1 년 전에 내가 쉽게 하지 않았던, 할 수 없었던 것을 했다.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유품정리 대신에 짐정리를

부모님이 애초에 유품정리가 되기 전에 짐정리를 하자고 하신 것은 아니었다. 두분 모두 기억과 세월이 스며있는 물건들을 정리하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빠, 언니, 나, 모두 부모님의 집에 갈 때마다 점점 노쇠해지는 두 분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엄청난 양의 물건들을 보면서 착잡해지곤 했다.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은 하나도 없이, 그저 버리지 못해서 쌓여있는 물건들, 짐들..옷들... 오빠나 언니는 부모님께 예의를 갖춰 행동하는 착한 아이들이니까 아무 말 안하고, 막내인 나는 아버지께 짐정리를 하자고 강하고 요구했다. 당연히 아버지는 상처를 받으시고 방어적으로 되었고 나에게 역정을 내셨다.

"내가 죽으면 그냥 버리면 된다. 생각할 거 없이 그냥 버리면 되니까 지금은 그냥 둬라!"

평소에 온화하신 아버지가 내는 역정에 나는 나대로 화가 나 고함을 질렀다.

"아버진, 아버지 생각만 하는 거에요. 산더미 같은 유품 치우면서 제가 겪을 고통은 생각지 않으세요? 쓰지 않는 물건 정리하자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워요? 절 도와주는 셈치고 좀 정리해주시면 안돼요?"

이렇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은 뒤에도 아무런 진전은 없었다. 

그러다가 급반전이 생긴 것은 2009 년이었다. 엄마가 혈압으로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운좋게 내가 한국에 있어서 엄마의 퇴원까지 돕고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부모님의 낡은 아파트의 전기가 누전이 되고, 동시에 부엌 바닥의 물이 새서 아랫집 벽을 손상시키는 대사고가 일어났다. 바닥을 다 들어내는 공사만이 누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엄마는 불안증이 생겨 혈압이 250까지 올라가 다시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50 년 동안 쌓인 살림, 2 천권이 넘는 책들이 들어차 있는 집, 공사를 한다는 게 두려우셨던 거다. 

나는 며칠 더 체류기간을 연장하고 문제 해결에 골몰했다. 나는 상담을 받은 뒤 바닥을 들어내는 공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아랫집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 저런 결정을 내렸는데 엄마가 눈에 띄게 안정되는 게 보였다.  그때 나는 엄마의 혈압은 식사/운동의 부족이 아니라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늙어가면서 문제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그 모든 책임을 엄마 혼자 지고가면서 엄마는 두려움이 생겼고 삶의 낙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엄마가 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한 두차례 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직전이라는 사실도 우연이 아닌듯했다. 

부모님은 우리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독립적으로 잘 살아오셨으나 이제 너무 연로하여 서 오빠, 언니, 내가 개입해야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싱가포르에 있는 오빠, 캔사스의 언니, 모두 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자주 주고, 돈을 보내겠다, 한국에 들어오겠다--하면서 나를 지원해주었다. 언니랑 오빠랑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든든했다. 언니 오빠가 멀리서 도울 수 있는 일들은 없어서 내 혼자 힘으로 해보겠다 하였다. 

엄마가 퇴원한 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 책을 다 버리기로 했어."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 아버지와 책은 뗄 수 없는 관계인데...내가 아버지께 짐정리를 하시자고 떽떽거릴 때도 나는 아버지의 책은 전혀 정리 대상에 두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밤 내내 의학 사전을 읽으면서 엄마의 증상에 대해 공부를 하고, 엄마를 잘 지켜주기 위해서는 삶을 간단하게 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얼마나 큰 결심을 하신 것인지를 알고 감사히 받아들였다.

이참에 엄마도 낡은 옷가지와 살림들을 정리하겠다 하셨다.

아버지의 삶을 평생을 인도하고 지배해온 책, 엄마의 삶을 평생 인도하고 지배해온 살림을 처분하기로 하는 결정도 어려웠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책을 어떻게 처분한다지? 다행히 나의 '형'인 수원대학교의 영문과 이용관 교수의 도움으로 책들은 수원대 도서관에 기증하게 되었다. (이듬해, 수원대학교에서 아버지께 감사패를 수여했다. 아버지는 자기의 분신과도 같던 책이 도서관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행복해하셨다.) 

아버지와 엄마와 함께 한 짐정리는 고되었지만 아주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짐정리 바로 전 날, 짐들을 대강 구분해보고 쓰레기 봉투를 수십 개 구입하고, 아파트 지하실을 누비면서 박스들을 모았다.  동네 슈퍼 옆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팔순의 할머니에게서 박스를 여분으로 더 구입하였다.

박스들을 낑낑대며 들고 엄마 아버지 아파트로 들어갈 때 나의 마음은 날아갈 것같이 가뿐했다. 이삿짐 박스를 난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유학시절, 박스들은 나에게 자유의 상징물이었다. 혼자, 여러번 국제 이사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사다닐 때마다 박스안에 물건을 포장하면서 나는 새로운 세계애 대한 꿈도 같이 넣었고,새로 이사한 곳에 도착하여 박스를 하나씩 뜯을 때마다 나는 희망으로 설레었다. 박스 하나를 통채로 잃어도 내 삶에 큰 지장이 없었기에 발이 가벼웠고 마음이 가벼웠다. 빚지지 않은 인생이니 비굴하지 않고 자신이 있었다.

부모님의 박스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박스를 통해 책이 나가고, 물건들이 나가겠지. 무거운 짐들이 사라지고, 깨끗한 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게 될 것이다. 부모님의 노년은 가벼워지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구나!!

짐 정리 당일, 새벽에 아침식사를 든든히 하고 운동화를 신은 채 작업을 시작했다. 엄마는 살림 정리, 아버지는 책 분류, 나는 양쪽 다 참견하면서 포장과 쓰레기 정리.

엄마도, 아버지도, 나도 즐거웠다. 박스 안에 책이 채워지고, 쓰레기 봉지 안에 물건들이 채워지는 동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고생했던 이야기,기뻤던 이야기, 어떤 꿈을 꾸었던가의 이야기, 왜 행복했던가...

가끔 일하다 말고

"이거....태능에서 살 적에 화채 그릇으로 썼었는데.."  (그래도 버리자!) 

"이 커피잔은 정말 우리가 아낀 거였어. 그 때는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그렇게 큰 사치같았었는데..."

(이건 제가 가지고 갈래요!)

"교회 음식이나 결혼식 뷔페 할 때 요긴하게 사용했던 그릇이지..." (그래도 버리자!)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옛날을 회고하며 물건을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아버지는 여기 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책이 포장되는 것을 바라보셨다.나는 혹시라도 아버지 마음에 상처가 될까 곁눈질 하면서 보았는데 아버지가 이미 굳게 마음을 잡쉈는지 책이 한 박스씩 포장되어 다용도실로 옮겨져가는 과정을 그저 침착하게 관조하셨다

책은 밤 9 시에 포장이 완료되었다. 부엌 살림은 밤 11 시경에 대강 정리되었다. 나는 기절 직전이었다. 이제까지 이사할 때 이런 식으로 단기간 안에 많은 짐을 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마음이 뿌듯했다. 짐이 꽉 차 있던 거실이 횅하게 뚫려 보이는데 속이 다 시원해졌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났다. 더러운 바닥, 밖으로 내놓야야할 서랍장, 장식장, 쓰레기 무더기 등이 즐비한 거실, 천천히 둘러보면서 심란했다. 이런 지경에 부모님을 두고 미국으로 떠나야하다니...

지진이 나 기둥이 흔들리기라도 한 듯, 엉망진창이 된 집의 상태에 엄마 아버지 마음까지 뒤숭숭할까 걱정이 되었는데, 웬걸? 아니었다.

짐정리가 된 후, 기쁨을 감출 길 없어서 두분은 울상이었다.(원래 너무 고마와 말로 표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마음을 표현할 때는 울상을 지으신다.)

"고마워서 어떻게 하니. 너는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다. 우리가 더 잘 살께. 고맙다. 이번에 너무 너무 고맙다."

내가 되려 죄송스러웠다. 내가 한 일들은 부모님께는 어려워도 젊은 나에게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자녀들은 하루 하루 조그만 일에서 부모님의 시름을 덜어드리고 일상을 가볍게 해드릴 수 있는데 
우리 가족은 다 멀리 살아서 부모님께 적절한 도움을 드릴 수가 없었고 그래서 엄마의 병을 키운 것같아 안타까웠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내가 작별 인사를 드린 뒤에 계단을 내려가는데 나를 따라 내려오셨던 아버지의 
애처로운 모습이다. 
"아버지 내려오시지 마세요!"
"아냐, 내가 봐야지. 너 가는 거 봐야지."


나는 아버지 모습을 뒤로 하면서 떠나기 싫었는데 아버지는 무겁지도 않는 가방, 부득부득 들어주겠다면서 따라 
내려오신다. 그래야 아버지 마음이 편하시겠지 싶어서 그냥 순종했다. 그러나 마음은 괴로웠다.

아파트 계단 밑의 길에 차가 시동이 걸린 채 서 있었다. 유쾌함을 가장하면서 아버지를 향했다.

"아버지, 여기서 작별해요. 포옹~~~"
"그래, 그래."



아무리 표정으로 감추려고 해도 넘쳐나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 아버지를 껴안는데
아버지의 눈에도 이미 눈물이 가득했다. 아버지를 껴안았다. 앙상히 뼈만 남은 아버지의 몸이 딱딱히 안겨졌다.
참으려고 했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아버지, 건강하세요. 내가 또 올께. 아버지 내가 또 와서 봐줄께, 하루 하루 즐겁게 사세요. 아버지..."
"신주야, 우리 걱정하지 말고, 너 건강 조심하고...잘 살아라. 우리는 괜찮아. 이번에 네가 우리를 살려줬어.
고마워."

차에 올랐다. 단정히 서서, 울음을 삼키면서 나에게 '고맙다 고맙다'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 가여워서 눈물났다.
공사는 잘 진척되었고, 거실과 부엌 바닥 수리를 하는 김에 싱크대도 새것으로 바꿨다. 엄마 방도 벽지를 새로 
바르고 하얀색 장도 하나 짜 넣었다.

몇 주 후, 엄마 아버지가 새로 단장한 집에 들어가시는 날, 너무 궁금해서 잠이 안 왔다.

한국 시간에 맞춰서 전화를 드리니 엄마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너무 좋다! 내 평생에 이렇게 좋은 부엌을 갖게 될 줄이야! 마루도 넓고 환해...새 집같아. 너무 좋다."


그 말 한마디에 모든 피로가 다 녹는 거 같았다. 긍정적인 엄마의 목소리가 나에게는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렸다. 90을 바라보는 바라보는 나이에도 새로운 공간은 삶의 의욕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거구나.


"속이 시원해. 언젠가 할 일이었는데 이렇게 살아서 하게 되니 좋다.

우리가 이 짐 두고 죽었으면 그걸 정리하면서 늬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 순간 깨달았다. 엄마랑 아버지가 온 집을 꽉 채운 짐들을 보면서 '자식들을 힘들게하는 유품'이 될 거라고 걱정했으나 정리를 하고 싶어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할지를 몰랐다는 사실을. 정리를 할 기운도 딸리고 '평생의 물건을 정리한다' 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사회 초년병이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것만큼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으리라.

다행이었다. 자식에게 도와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그런 뱃짱과 용기가 없는 두분이 누전, 누수 덕에 선택권이 없이 나의 도움을 받아야했고 그래서 '죽어서 하는 유품정리' 대신에 '더 잘 살려고 하는 짐정리'라는 유쾌한 작업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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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년 큰 짐정리 작업이 끝난 이후에 두 차례에 걸쳐서 짐정리가 이뤄졌다. 2015 년 미국에서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신 뒤 한국에 못 돌아가게 되시고 미국으로 억지로 이민을 해야하게 된 후 집은 1 년 비워져있었다. 나는 집을 부동산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 한국에 잠시 들어갔다.

열쇠를 열고 부모님 아파트를 들어선 순간, 엄마 아버지 집의 특유의 '다정한' 냄새를 먼지의 냄새가 압도했다. 현관 문을 여는 순간 내가 부모님의 짐정리를 하러 왔다는 뻔한 사실이 서럽게 느껴졌다. 지난 30 년 간 내가 이 집에 들어와 문을 열면 언제든지 두 분 중의 한분이 계셨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없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마음이 착잡해졌다. 천천히 둘러보면서 이제 지금의 모습을 곧 상실하게 될 아파트, 엄마 아버지의 집이자 나의 친정의 모습을 내 마음에 담았다. 옷을 갈아입고 작업을 시작했다. 아무리 치워도 버릴 것은 계속 나왔고, 끊임없이 '이걸 간직할까 버릴까' 결정을 해야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아버지 간병을 위해 내가 집을 오래 비울 수 없는 처지여서 시간이 촉박한데 마음이 복잡하니 일의 진전이 더디었다. 그래서 내 마음으로 "다 버린다" 라고 생각하고 엄마 아버지가 의미를 두셨던 물건들 중심으로 남길 것을 선택했다. 잠도 못자고 며칠 일을 한 뒤 비행기를 탔는데, 나는 엘에이까지의 비행이 그렇게 짧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내 잤다) 살도 쭉 빠졌다.

나는 한국에서 집파고 사는 절차를 모르므로 친구 J 의 도움을 받아 집을 내놓았다. 원격으로 집을 팔려니 준비할 서류가 엄청 많았다. 시세가 안좋다, 2 층이니 유리하지 않은 조건이다, 학군이 안좋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집은 내놓자마자 처음 방문한 사람이 그자리에서 사기로 결정해서 금방 팔렸다. 부모님의 모든 재산을 미국으로 옮기고 아파트 매매를 완결짓기 위해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그때 마음이 아주 복잡했었다. 아버지 건강이 안 좋으셨을 때라서 어서 일을 처리하고 미국에 돌아가야한다는 부담과 아파트의 모든 짐들을 완전히 다 비워야하는 숙제가 있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심경이 복잡해서 나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은채 일을 했다. 온 집안을 다 비우는 일은...장례식 같았다.

큰 물건들을 다 처분하고, 이제까지 모든 제거 작업에서 살아남았던 물건/옷/가구들이 새로운 검증과정을 거쳐 버려지거나 선택되어야했다. 우리가 태능에서부터 썼던, 내가 4 살 때부터 우리집 안방을 차지해왔던 옷장을 깨부수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 장은 나에게 '장'이 아니라 '엄마' '아버지'처럼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존재였었다. 그 순간은 자리를 비워야했었다. 만약 저 장이 '유품'이었다면? 엄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장을 부시는 소리를 들었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해외 운송 업체에서 준 박스에 미국으로 보낼 짐을 포장하고--아무리 줄여도 35 박스가 되었다--버릴 물건들을 포장했다. 물건들을 정리하는 내내---부모님 짐을 정리할 때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게 짐정리이지 유품 정리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팔기 위해서, 부모님의 터전을 미국을 옮기기 위해서....그런 목표를 갖고 하는 짐정리니까 내가 괜히센티멘탈해질 필요가 없다 라고 자위했다. 엄마 아버지의 집이, 한국에서 내 친정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사실에 묘한 슬픔 비슷한 감정이 든 것은 사실이나, 그것도 아버지와 엄마가 내 집에 같이 게시는데 무슨 친정타령?! 하며 묻어버렸다.그럴 수 있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한국에서 부친 짐이 몇 주 후에 미국에 도착한 날, 나는 2009 년부터 시작된 짐정리가 잘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짐정리'가 끝났기에 아버지는 유품정리의 숙제를 남겨두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셨다. 축복의 죽음이다. 그렇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이 축복받은 죽음인 것은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둘러싸여 나름 편안하게 임종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정리할 유품을 물려두지 않고 돌아가신 것이라고 믿는다. 아버지가 선택한 것도 있고 (책 기증), 아버지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어 (미국 이민) 물건들이 정리가 된 바람에 정리할 유품이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하간에 처리해야할 유품이 없었다는 사실은 남아있는 우리가 아버지를 온전히 애도하고 기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는 가볍게 훌훌 떠나셨고, 아버지의 빈자리에는 우리가 평생 간직할 아버지라는 인간의 여러 아름다운 모습의 기억이 남아 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죽을까? 내 마지막 순간은 어떠할까? 스르르 잠을 자는 중에 마지막 숨을 내쉴지, 고통 속에 눈을 뜬채 세상을 떠날지, 알지 못한다. 내가 통제할 능력은 더더구나 없다.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뭐라는 것을 적어도 하나는 안다. 내가 짐정리를 제때 제때 하면 아이들에게 유품정리라는 골치거리를 남겨두지 않을 수 있고, 아이들은 쓰레기가 대부분인 유품에 신경을 쓰는 대신에 자기 엄마와의 기억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주고 싶다. 

아버지가 그 옛날 주차장에 내려와 나에게 눈물로 고맙다고 인사하고 껴안아주셨던 것은 아버지가 감히 할 수 없었던 짐정리를내가 도와줘서 할 수 있어서였다는 의미였다. 나는 당시에는 그냥 아버지가 가엾다는 생각으로 껴안았는데 이제는 아버지가 내게 한 '고맙다'라는 말의 의미가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유품정리는 아버지가 당신에게는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책을 포기하는 순간 시작된 것이었고, 아버지의 죽음 준비도 이미 그때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게 일찍 준비하신 덕에 아버지는 참으로 복된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다. 이제 나는 아버지와의 경험을 통해서 배운 삶의 교훈을 내 삶에 적용해서 내 짐도 그때 그때 정리할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유품보다 기억을 더 많이 남겨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