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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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유서와 아버지부모님 이야기 2018. 12. 31. 07:45
오빠는 돌아가실 때까지 부모님께 더할나위 없는 효자였다. 공손하고 배려깊고 자주 뵈려고 노력하고 아름다운 곳, 맛집으로 모시고다니는 게 오빠의 낙이었다. 아버지도 오빠를 지극히 사랑하셨다. 그러나 오빠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항상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유달리 첫째인 오빠에게 엄했다. 오빠가 착하고 부드러운 성격이고 야단 맞을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아버지는 오빠를 많이 꾸짖었다. 오빠의 성격은 아버지와 많이 비슷했지만 재능과 관심분야가 달랐다. 아버지와는 달리 오빠는 미술과 음악에 재능이 있었고, 운동도 잘하고 기타치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아버지와 달리 오빠는 여러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매일 각종 모임에서 노래를 부르고 사회를 보며 바쁘게 지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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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그리스여행부모님 이야기 2018. 12. 22. 05:17
아버지가 편찮으시면서 우리 가족의 삶에 큰 변화라면 가족 여행을 못다닌 것이다. 아이들이 대학에 가면서 바빠져서 만나는 게 힘들어서 그런 것도 큰 요인이고, 어쩌다 함께 모여도 주말 여행이든, 여름 방학을 이용한 여행이든 이비 수발로 바쁜 나의 일상을 더 번거롭고 힘들게 하여 내 스스로 삼가하게 되었다. 여름방학의 경우, 에릭과 내가 여행을 갈 수 있는 시간은 캔사스에 사는 언니가 집에 와 있는 3 주 동안이다 그런데 대학 교수인 언니가 올 수 있는 시간은 캔사스의 대학의 여름방학 기간이었고, 그 시간이 캘리포니아의 우리 아이들의 방학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꼴렛이 북가주의 대학교로 진학한다는 게 확실해졌을 때 에릭이 '애들이 이제 다 집을 떠나니 그 전에 한번 온 가족이 여행을 하면 어떨까' 라고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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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장례식을 너의 결혼식처럼 해다오부모님 이야기 2018. 12. 19. 15:09
엄마와 아버지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그 연세의 어르신들이 하시는 이야기--치매와 자식들에 폐끼치는 것 걱정, 혼자 남을 배우자에 대한 걱정은 물론이고 장례식에 어떤 사진을 사용할지, 어떤 찬송가를 불렀으면 좋겠는지 디테일한 것까지 이야기하셨다. 어쩌다가 내가 끼어들면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이야기를 같이 나누자는 듯이 반색하시며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하셨다. "연명치료는 거부한다, 서류를 작성해놓았다" "하나님 나라 가는 것이니 슬퍼할 것없다" "우리 죽었다고 우는 것보다 찬송 부르면서 기뻐해줬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욕심도, 한도 다 비우고 밝은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나 스스로도 죽음에 좀 담대해지는 것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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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년만의 장례식부모님 이야기 2018. 12. 12. 18:04
'사바'는 히브리어로 '할아버지' 라는 뜻이다. 80년대 말엽 이스라엘에 살 때, 나는 나를 이스라엘로 초대했던 오프라 교수의 아버지를 사바라 불렀다. 사바는 무척 웃기고 유쾌한 분이였다. 당시 부모님께 거의 매일 쓰다시피한 편지에서 나는 '노인이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게 놀랍다'며 할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그 편지들에 기초해서 나중에 혼자 영어 에세이를 썼다.2 년 전에 오프라 교수랑 이멜을 나누던 중, 그녀는 내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쓴 에세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보내달라고 했다. 자신의 아버지에 관해 쓴 에세이니 읽어보고 싶은 게 당연하다 싶어서 이멜로 보내드렸다. 그녀는 읽자마자 나에게 흥분해서 답장을 했다. '너의 글을 읽고 나는 이제까지 돌아가신 아버지와 화해를 하게 되었다'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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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손자 손녀의 한국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부모님 이야기 2018. 12. 10. 06:40
아버지의 뇌출혈 소식에 아들은 샌디에고에서, 딸은 워싱턴 디씨에서 급히 집으로 왔다. 아이들이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기운 하나도 없이 말도 못하시던 할아버지는 잠시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하여, 딸에게는 얼굴을 찡그려가며 미소지었고, 아들에게는 “룰루!” 하고 또렷한 소리로 외치셨다. 그게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 이후 할아버지는 천장만 보고 계셨고,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손을 잡아드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틀 후, 아들이 샌디에고에 내려가겠다고 했다.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이 할아버지 병실에 그냥 ‘대기’ 상태로 있는 게 20 대 초반의 젊은이에게는 의미가 없었던 게다. 할아버지가 위험한 순간을 넘긴 것같고 자기 말고도 이모, 엄마, 할머니, 버지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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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유품정리부모님 이야기 2018. 12. 3. 20:07
아버지가 떠나신 뒤 한 달이 지났다. 마음이 평안하다. 아직 장례식을 치루지 않았다. 12 월 중순에 온 식구가 다 모여 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장례식을 미룬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이들이 (우리 애들, 조카들) 다 모일 수 있는 날짜를 잡기 위해서였는데 우리에겐 너무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장례식의 절차에 급급하는 대신, 그리고 사망 후 사흘 후에 억지로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대신, 엄마, 언니, 에릭, 나는 며칠 동안 그냥 아버지 생각하고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옛날의 일들,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 죽음의 순간 등등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바다에도 두 번 가고,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며칠간 그저 아버지 생각만 했다. 아버지의 몸은 우리를 떠났지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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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눈 것들부모님 이야기 2018. 11. 29. 14:16
사라 할머니는 이스라엘로 날 초청했던 오프라 교수의 시어머니이다. 나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찾아 뵈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할머니는 만난지 1 년도 안되어 돌아가셨고 당시 할머니는 80세, 나는 27 세였다. 아래는 2002 년에 출판된 책에 수록되었던 사라 할머니에 관한 에세이를 기초로, 내 기억을 새로이하기 위해 부모님께 썼던 옛 편지를 참고해서 쓴 글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쓴 글이라 '수발'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사라 할머니 이스라엘 가족과 같이 생활하면서 나는 향수병이 더 심하게 도졌다. 아예 처음부터 기숙사에 들어갔더라면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만나고, 내가 느끼는 외로움과 향수를 조금 더 객관적 시각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기숙사로 옮긴 이후에 나는 향수병이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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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치매에 걸려도 돼!부모님 이야기 2018. 11. 21. 11:38
어르신들이 다 그러하듯이 아버지는 치매를 두려워하셨다. 인지능력과 인격을 상실하는 것도 두렵고, 자식들을 힘들게 하게될까봐 두려워하셨다. 아버지는 18 세기 영국의 문필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이야기를 하곤 하셨다.스위프트는 유명한 고전 '걸리버의 여행기'의 작가로서 사회 비판과 풍자로 명성을 날린당대의 최고의 문필가로서 부와 명예를 축적했으나, 말년에 뇌졸증 후 우울증과 언어장애를 앓았고 3 년간의 투병 후에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시종들이 치매로 인지능력을 상실하고 침을 질질 흘리는스위프트를 구경거리로 만들어 돈을 받고 그 추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치매라는무서운 질환이 가져온 한 뛰어난 작가의 드라마틱한 몰락을 한탄하셨다. 아버지는 사고로 침대 신세를 지게 된 이후에 자주 스위프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