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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의 유서와 아버지
    부모님 이야기 2018. 12. 31. 07:45

    오빠는 돌아가실 때까지 부모님께 더할나위 없는 효자였다. 공손하고 배려깊고 자주 뵈려고 노력하고 아름다운 곳, 맛집으로 모시고다니는 게 오빠의 낙이었다. 아버지도 오빠를 지극히 사랑하셨다. 그러나 오빠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항상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유달리 첫째인 오빠에게 엄했다. 오빠가 착하고 부드러운 성격이고 야단 맞을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아버지는 오빠를 많이 꾸짖었다. 오빠의 성격은 아버지와 많이 비슷했지만 재능과 관심분야가 달랐다. 아버지와는 달리 오빠는 미술과 음악에 재능이 있었고, 운동도 잘하고 기타치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아버지와 달리 오빠는 여러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매일 각종 모임에서 노래를 부르고 사회를 보며 바쁘게 지냈다. 아버지와 같이 성실한 학자가 될 자신이 없으니 학문의 길은 가지 않고 직장 생활을 하고 싶다고 자기의 진로도 정했다.

    이북에서 홀로 내려와 서울대학 교수가 되기까지 성실과 노력으로 투쟁하면서 살아온 아버지는 오빠의 느긋한 생활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제자들, 탁월한 실력과 성실함을 갖춘 서울대 학생들을 보면서 경쟁 사회의 처절함을 모르고 사는 듯한 오빠가 불안했다. 아버지의 불안과 걱정은 차가운 시선, 비판적 언어에서 드러났다.

    오빠는 아버지처럼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한번도 아버지에게 대들거나 반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삶의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결국은 아버지와 오빠의 대립구조가 존재했다. 엄마는 착한 오빠를 유달리 모질게 대하는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았다. 아버지는 엄마가 오빠를 나약하게 만든다고 역정냈다. 아버지는 엄마와 우리에게 한번도 욕지거리를 하거나, 육체적/정서적 학대를 한 적은 없었지만 (6 세 연하의 엄마에게 '너'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한번도 없고, 우리에게도 한번도 거친 언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자신의 공포와 걱정의 스트레스를 '화'로서 내내 엄마한테 풀었다. 

    1985 년 이스라엘에서 온 심리학자 오프라 교수의 웍샵에서 통역을 하게 되면서 나는 우리집안의 문제에 대해 더 첨예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오프라 교수는 "문학 작품 분석하는 영문학이나 사람 분석하는 심리학이나 비슷하다" 며 몇 권의 책을 건네 주었다. 그 책들은 '가족 치료' 의 전문 서적이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 식구들의 관계에 유사한 그런 사례들을 보면서 적지 않게 놀랐다. 심리학책과 웍샵을 통해 배운 것을 우리의 삶에 잘 적용하면 문제가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상 부모님이 심리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1 년 뒤 오프라 교수의 초대로 이스라엘로 가게 되었다. 신나서 준비하는 가운데 걱정이 들었다. (당시 내가 어렸으므로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르나) 나는 부모님이 나 없는 동안에 이혼할지도 모른다 싶었다. 부모님은 '자식'과 '가정을 지키려는 열망'의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운명 공동체였으나 그 가운데 표현되지 않은 불만이 많았고 대화는 대부분 어긋나기 마련이었다. 오프라가 준 심리학 책을 읽으면서 내가 문제의 근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아버지가 오빠에 대한 혹독함,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엄마와 아버지의 불화--을 나 나름대로 풀어보면 어떨가 싶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 아버지를 설득하자.

    아버지는 고집이 세신 분이지만 성품이 맑고, 정직하고, 정당한 사람이었다. 이성적이시기에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고 설명을 잘해드리면 아버지가 잘 받아드릴 수 있을 것같았다. 그리고 내 견해로는 애초에 갈등의 근원이 엄마와 오빠이기보다는 아버지였다. 

    당시에 아버지는 서울대에서 은퇴하신 뒤 춘천의 한림대에서 강의를 하셨다. 주중에는 춘천에 계시고 주말에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가끔 나도 여행삼아 아버지를 따라가고 했다. 어느 금요일, 우리가 춘천에서 돌아오는 기차 여행에서 나는 아버지께 오빠와 아버지,엄마의 관계에 대해 나의 생각을 나누었다. 감사하게도 아버지는 언뜻 들으면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 여겨질 수 있는 나의 견해에 방어적이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셨다. '내가 신열이를 너무도 아끼는데 앞으로 신열이의 미래가 걱정이 되어서 그런다. 생존경쟁이 얼마나 치열한데 앞으로 그걸 모르는 것같아 안타깝다...' 는 아버지의 말씀에 담긴 진정성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진심이 오빠에게는 전해지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표현하는 방법이 오빠와 엄마께 상처만 준다면? 그래도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게 되려 섭섭하신 거였다.

    그렇게 2 시간을 이야기 나눈 뒤에 청량리 역에서 전철 4 호선을 탔다. 우리는 계속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총신대 역을 지날 무렵이었다. (너무 중요한 순간이어서 지나가던 역 명을 기억한다) 나와 아버지는 전철 손잡이를 잡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오빠를 사랑한다는 것은 알겠는데요, 아버지, 이때까지 한번이라도 오빠가 그걸 느낄 수 있게 하신 적 있어요?"

    좀 더 정확히 다시 물었다.

    "아버지는 오빠한테 사랑한다고 하신 적 있어요?"

    그 말에 아버지는 내가 둔기로 자신의 머리를 내려치기라도 한 듯이 말을 잃고 (죄송하지만) 멍청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잠시 후,

    "아니..없다. 내가 그런 적이 없구나. 없어."

    아버지는 마치 커다란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은 사람과 같은 뭔가에 취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변하마. 앞으로 내가 신열이에게 잘하마...."

    그 날 이후로 아버지는 변하셨다. 그날 이후 오빠가 돌아가실 때까지 근 30 년간 아버지는 오빠에게 다정함으로 사랑을 표현하셨고, 단 한번도 비판을 하지 않았음은 물론, 부정적인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다. 오빠의 크고 작은 효도에 감사해하시고 오빠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격려해주셨다.

    내가 자신이 아들에게 사랑을 표현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의 아버지가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은 사람과 같았다고 했는데, 아버지의 이후의 오빠에 대한 모든 행동은 종교적인 변화와도 비슷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한번에 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버지는 완전히 변하셨다.

    애초에 오빠는 아버지께 반항하거나 아버지를 무시한 적이 없었으므로 아버지의 태도가 변하면서 오빠와 아버지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편하고 사랑이 넘치는 관계로 변해갔다.

    몇 달 후 이스라엘에 있는 나에게 "신주야, 이제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신열이와 아주 잘 지내고 있어" 라고 업데이트도 해주셨다.

    아버지가 변하면서 엄마와의관계에 변화가 왔다. 아버지가 오빠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엄마와 새 상처를 만들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 엄마께 다시 여쭤보았다. 

    "엄마, 아버지가 오빠한테 한번이라도 힘든 이야기한 적 있어요? 30 년간?"

    "단 한번도 없어. 아버지는 완전히 변했어."

    오빠는 '총신대역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빠는 아버지가 어떤 계기로 변화해서 자기에게 갑자기 그렇게 잘 대해주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 30 년간 자신을 일관성있게 사랑해주고 격려만 해주는 사랑의 아버지가 되었는지를 전혀 모르는 채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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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

    맏아들인 오빠는 부모님께 공손했다. 엄마를 어려서부터 '어머니'라 불렀고, 항상 경어를 썼다. 특유의 점잖은 유머로 부모님이 웃다가 눈물 흘릴 정도로 재밌는 이야기를 해드리면서도 공손한 예의를 잃은 적이 없다. 

    아버지가 2007 년 아버지 팔순을 기념해서 '아버지의 기도' 라는 수상록을 내셨을 때 우리집에서 기념 모임을 가졌다. 오빠는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버지의 책을 처음 읽었다. 엘에이 오는 10 시간 넘는 비행 내내 오빠는 책을 읽었고 (새언니의 말에 의하면) 오빠가 많이 울었다고 한다.

    오빠가 정확히 왜 울었는지 나는 모른다. 짐작할 수는 있다. 왜냐, 나도 엄청 울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원고를 교정하려고 밤새 읽다가 새벽에 나는 엉엉 울고 말았다. 중년이 되면서 세상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점차 실감하고 있는 나는 어려서부터 80 세까지의 아버지의 삶이 병풍처럼 시간적 순서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 복잡한 감정을 경험했다. 10 세에 어머니를 잃은 강대건이라는 소년, 19 세에 남한에 혼자 내려와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도망다녀야했던 강대건이라는 청년, 결혼을 한 뒤에 사과 궤짝을 찬장삼아 살림을 시작하면서 책임감에 허덕이던 강대건이라는 30 대 남성, 첫 아기를 품에 안고 '기적''경이'로움을 느끼기는 커녕, '공포감'에 휩싸였던 그 겁많고 책임감 많은 강대건이라는 초보 아빠, 당뇨병 진단을 받은 뒤 직장의 경쟁에서 밀려날까 두려워 새벽마다 산을 오르면서 건강을 지키려고 햇던 강대건이라는 45 세의 직장인....우리를 책임져주는 믿음직한 아버지의 여러 숨겨졌던 모습을 보면서 연민, 감사, 존경심이 들었다. 오빠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년 후, 2013 년, 오빠는 엄마의 팔순 생신을 위해서 다시 미국에 왔다. 오빠가 우리집을 방문했을 때 오빠의 대학 동창인 Y형이 찾아왔다. 오랫만에 만나 회포를 풀며 옛 이야기를 나누던 중,  Y형은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며 대학교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떤 수업 시간에  '누구를 가장 존경하는가' '롤 모델이 누구인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단다. Y형은 자기를 위시해서 친구들 모두가 유명한 위인들을 자신의 롤모델로 꼽았다고 했다. 

    "그런데 신열이 너는 아버님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했었어. 우린 다 놀랐어. 아버지를 어떤 위인보다도 존경한다는 말에..."

    Y형은 자기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오빠가 한 말을 생각하게 된다며, 두 아이의 아빠로서 과연 자신이 아이들도 자기를 그 누구보다도 존경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고, 열심히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고 했다.

    오빠가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사실은 새로운 사실은 아니었다. 오빠의 평소의 언행과 태도에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너무도 확실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오빠가 남에게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한 게 대학 시절이라는 것은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아버지가 변하기로 마음 먹은 싯점은 1986 년, 그 때는 이미 오빠가 대학,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 생활을 할 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빠는 아버지가 변하시기 이전에, 즉 아버지와 갈등이 존재하던 대학교 때,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 아버지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Y형으로부터 옛날 이야기를 들은 뒤 정확히 한 달 뒤에 오빠는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리도 사랑했던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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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의 죽음 후, 아버지는 애통해하셨고, 많이 아파하셨지만 동시에 아주 침착하게 대처하셨다.

    언젠가 글에 썼듯이 아버지가 오빠의 빈소에 와서 분향을 하고 기도를 올릴 때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오빠의 사진을 보며 기뻐하셨다. 

    "저 사진....참 좋다. 신열이의 미소가 참 좋구나.

    신열이가 천국에 있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미소야. 저 사진을 누가 택했지? 참 고맙구나."



    오빠의 장례식과 삼우제를 난 뒤 아버지가 장례 절차를 도와주고 문상을 와준 분들께 쓴 감사 편지는 차분함을 넘어 당당한 기백이 느껴지기조차했다. 

    "저는 지난 6 22 ,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강신열 아버지입니다. 신열을 잃은 우리 가족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시고 슬픔에 동참해주신 여러분, 특히 뜨거운 눈물과 간절한 기도와 연도로 지원해주신 교회의 성직자와 신도 여러분, 깊은 조의 표명과 함께 갖가지 장례 절차의 순조로운 운행을 도와주신 동문 여러분, 직장과 기타 사회 활동을 통해서 교분이 두터웠던 선후배, 동료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여러분이 보여주신 사랑과 성심성의는 우리 모두를 고무하고 감동케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을 후비는 듯한 우리 아픔을 상당한 정도까지 치유케 해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이방신을 섬기는 이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명부로 가는 길목에 가로 놓인 삼도천에서 악귀에 시달리며 공포로 치떨고 있는 신열의 모습이 아니라, 굳센 그리스도인의 신앙심과 더불어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과 신실함으로 이중 삼중으로 무장하고 천성을 향해서 일로매진하는 신열의 장한 못습을 상상할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순간 신열이 육신의 온갖 제약으로 묶여 있던 어두운 시간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영원의 세계에서 생명으로 태어나, 소망했던 대로 하나님을 무시로 찬미하며 자유무해하고 평화롭고 기쁨으로 충만한 완벽한 천국 생활을 시작했다고 확신하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으로부터 오는 커다란 위안과 기쁨을 저는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극진한 사랑과 은혜를 모아 절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신열은 다음과 같은 비명이 새겨진 묘석 밑에 안식하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가슴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우리의 천사,

    토마스 아퀴나스 신열

    (1958. 2. 28- 2013. 6. 22) 위에,

    한줌의 흙이여,

    가볍게 놓이소서.


    2013. 6. 28.

    강대건"


    나는 이 편지를 페이스북에 올리기 위해 타자 치면서 아버지의 글에 드러난 신앙심과 용기에 적지 않이 안심하였다.아버지의 씩씩함에 위로도 받았다. 동시에 아버지의 진심에 약간은 의구심이 들었다. 80 말엽의 노인이 외아들을 잃고 이렇게 의연할 수가 있나? 혹시 쇼크 상태에서 자식의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애도의 감정을 억압하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그게 드러나지 않을까?

    4 개월이 지나 오빠의 묘소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였다. 엄마가  '신열아...신열아...네가 왜 여기에 있니...' 하고 오열하셨다. 아버지도 선 채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자마나 아버지는 힘찬 목소리로 감사기도를 올렸다. 아버지가 오빠의 죽음을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신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언젠가 '새벽에 일어나 글 읽을 때, 신열이가 너무 그리워서 마음이 막 아프게 그리워' 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애통과 절망의 호소가 아니였다. 시간이 지나가도 퇴색되지 않는 아들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었다.



       


    오빠가 돌아가신지 1 년 후,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단 둘이 조용한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아버지께 오빠의 '유서' 를 보여드리기 위해서다.
    '유서' 라기 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편지' 라는 게 더 정확하겠다.

    오빠의 유품 정리를 하던 중 낡은 가방을 버리기 전에 내용물들을 책상 위에 다 쏟아 부어 혹시라도 중요한 게있는가 확인을 하는데 어느 가방에서 편지 봉투 한 장이 떨어졌다. 버려야하나 마나 확인하기 위해서 휘르륵 읽었다. 오빠가 하나님에게쓴 편지였다. 돌아가시기 정확히 6 개월 전에 쓴 편지.

    '오빠는 유서를 하나님께 쓰셨네...'

    유품 중에 오빠가 쓴 편지라곤 딱 하나, 그래서 버릴 수가 없었다. 사람에게 쓴 편지가 아니므로, 그리고 사람이 읽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쓴 편지이니 그냥 나만 알고 간직하자 싶었다.

    그 후 깊은 슬픔에 잠긴 엄마에게는 오빠 유품에 관해 이야기를 삼가했지만 아버지랑은 모든 이야기를 다 했다. 아버지는 오빠에 대한 이야기는 다 재밌게 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오빠의 편지를 버릴 수 없어서 보관한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나에게 부탁하셨다.

    "신주야, 나도 좀 읽게 해줄 수 있니? 나는 그냥 신열이의 글씨를 보고싶고, 신열이가 쓴 글이라니 읽어보고 싶다. 사람에게 쓴 글이 아니라 하나님께 쓴 글이라니 더...." 

    라고 하셨다.

    선뜻 그러자고 할 수가 없었다.  신앙 고백이므로 오빠가 부끄러워할 내용은 없었지만 그래도 오빠가 개인적으로 쓴 편지이므로... 

    1 년이 지난 뒤, 아버지와 같이 읽어도 괜찮다는 마음이 들어서 우리는 단 둘이 레스토랑에 간 것이다.

    아버지는 오빠의 유서를 천천히  읽으셨다.
    나는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전화기를 만지작 거리면서 아버지 눈치를 보았다
    아버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아들의 유서를 읽으면서 미소짓는 아버지가 신기해서 살짝 사진 찍었다. 




    편지를 다 읽은 뒤에도 손에서 놓지 못하시면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아...신열이는 글씨를 참 잘쓰네. 이 글씨를 보니 신열이 얼굴을 보는 것같아 기쁘다."

    아버지는 계속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말씀하셨다.

    "신열이는 정말 깨끗한 사람이구나....
    정말 기쁘다. 
    신열이를 알게 되어서.

    신열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살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편지를 통해 확인하니 너무 좋구나.

    힘든 순간에도 신열이는 하나님을 붙들고 있었어. 그걸 아니 내 마음이 놓인다.

    아...신열이는 정말 맑구나. 
    신열이가 참 훌륭한 사람이었구나..

    아, 난 오늘 너무 좋다."


    나는 조용히 거의 혼잣말같은 아버지의 말씀을 새겨들었다.

    아버지가 오빠가 어떤 사람인가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모습에 나는 잠시, 오빠가 아버지가 이렇게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또 꼭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아버지의 인정을 바라면서 산 것은 아니었고, 아버지도 교수가 성적 매기는 마음으로 아들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빠가 아버지 수상록을 읽고서 눈물 흘리며 감동했지만 그것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았듯이, 아버지가 오빠의 유서를 읽고 오빠를 한 인간으로 새로이 발견한 감동도 그냥 아버지만의 감동으로 남아도 상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원래 말로는 표현되지 않고 행동으로 표현되어왔지 않았던가.

    그렇다. '언어로 하는 사랑의 표현'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의 사랑은 한번도 적절히 표현되지 못했다. 오빠는 대학교때부터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친구들, 나, 엄마, 언니를 위시한) '남'들에게 표현했을런지는 몰라도 아버지께는 그런 말을 직접 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수상록을 읽으며 눈물 흘렸고 아버지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지만 한번도 '아버지, 존경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사랑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 오빠에게 사랑한다고 하신 적 있냐'는 말에 쇼크를 받고 자신이 바꾸겠다 약속했고 약속을 지켰지만, 아버지는 한번도 오빠에게 '내가 너에게 잘못했다'  '너를 이전부터 사랑해왔다'  '앞으로 더 잘해주마' 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빠는 아버지의 변화 이후 30 년 후 죽음의 순간까지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바꾸고 노력한 것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행동을 바꿈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고, 아들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를 확신하고 살았다. 변덕없이 한결같은 사랑, 온전한 행복감을 주는 사랑을...

    아버지와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 카페인 없는 커피를 여러 잔 마시면서 아름다운 오빠의 이야기를 나눴다.
    밖으로 나왔는데 아버지는 좋은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얼굴이 싱글벙글이셨다.


    식당 앞에서 아버지...너무도 그립다.



    아버지가 오빠의 신앙을 확인하고 기뻐했다면, 나는 나대로 여러가지 의문점이 다 풀려버리는 듯했다.
    이제까지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들---
    빈소에 와서 아들의 영정 사진의 아들의 미소를 보고 반가워하고,
    아들의 묘비를 쓰고
    아들이 죽은 뒤 하루가 안되어 슬픔에 의해 무너지지 않고 힘찬 송가를 쓰고,
    아들의 묘소에서 아들을 기리면서 해맑은 미소를 지었던 게 
    결코 아들의 죽음 후 쇼크로 인한 비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었다는 완전한 확신이 왔다.
     
    아들의 유서를 읽으면서
    죽은 아들의 신앙심을 확인하고 기뻐했던 아버지,
    그는 모른다.
    내가 그런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들의 상실에 연연하지 않고 그 아들의 귀한 모습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아버지에게서 신앙인의 참모습을 발견했다는 것을.

    나는 그때 몰랐다.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의 맑고 귀한 신앙심을 알기에 나의 깊은 슬픔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오빠를 알고 오빠의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였듯이
    나도 아버지를 알기에 아버지의 죽음이 이 정도로 편안하다.
    아버지가 새벽에 글 읽다가 오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파하셨듯이 
    나도 갑자기 밀려오는 그리움으로 아파한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행복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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