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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어가는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키스와 허그.
    부모님 이야기 2019. 2. 13. 06:38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쓴 글)


    나는 아버지에게 스킨쉽을 자연스럽게 자주한다. 아침에 아버지가 눈을 뜨자마자, 면도가 끝난 뒤, 휠체어에 앉아서 간식을 잡술 때, 침대에 앉아서 티비를 보실 때, 뜬금없이 아버지의 몸을 만진다.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드리고, 머리 마사지를 하고, 손가락 마사지를 하고, 발 마사지를 한다.
    자주 아버지의 어깨를 꼭 껴안기도 한다. 뺨, 이마에 가볍게 뽀뽀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마치 아가들에게 하듯이 쬬—옥 소리를 내며 입술로 뺨에 도장을 찍듯이 꾸욱 누른다.

    아버지와의 망설임없는, 잦은 스킨쉽을 보고 간병도우미가 물었다.

    “아버지를 참 편하게 대하네요. 어려서부터 아버지랑 친했나봐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57세인 내가 구순의 아버지한테 자유스레 뽀뽀를 하니말이다.

    그러나 난 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시기 전에는— 커서는 물론이고 어려서도--한번도 아버지께 뽀뽀한 적이 없다.
    나의 세대는 부모 자식간에 애정 표현을 뽀뽀로 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의 어른들은 감/사/하/게/도 요새 어른들처럼 어린아이들에게 좀 가까운 어른이면 ‘뽀뽀해드려~!’ 강요하고
    영문을 모르는 아이가 뽀뽀를 해주면 환호하고 칭찬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 뽀뽀를 해본 기억도, 뽀뽀를 받아본 기억도 전무하다.

    아버지께 뜬금없는 허그와 뽀뽀가 자연스러워진 것은 수발을 들면서 자신의 몸의 소유권을 완전히 박탈닥한 아버지의 몸을 돌보면서이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볼 수도 없고, 신체의 어느 부위도 보고 만질 수도 없는 아버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사소한 일도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아버지의 몸은 하루 종일 생존을 위해서 해야하는 여러가지 일들---면도, 목욕, 용변, 물리치료사와 운동--동안 끊임없이 남에게 의해 만져짐을 당한다.

    그런 의무적인 접촉에는 ‘사랑의 터치’는 없다.
    부드럽지만 그렇다고 다정한 위안을 주지는 못하는 그런‘만져짐.'
    간호사가 피를 뽑으려고 스웨터의 소매를 걷어 올릴 때와 같은 부드럽지만 사랑이 없는 그런 터치….에 아버지는 익숙하다.

    아버지의 몸을 만진다는 사실에 아버지도 나도 잠깐 적응이 필요했으나 서서히 적응해가면서 아버지께 사랑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젖먹이 아가의 기저귀를 간 뒤에 엉덩이에 큰 소리를 내며 뽀뽀를 하는 엄마의 마음이 된다.
    기저귀는 간호사도 갈아주고, 유모도 갈아줄 수 있지만, 아기 궁둥이에 하는 뽀뽀는 아기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끼는 사람만이 할 수있지 않은가.

    나는 아버지가 즐거움, 따뜻함,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랑의 터치를 자주 해드리고 싶다.
    아버지가 간병인들로부터 받는 생존을 위한 ‘만짐’이 건강을 위해 억지로 먹어야하는 지루한 건강식이라면
    나의 뜬금없는 두피 마사지, 발가락 마사지, 허그와 뽀뽀는 더운 날의 시원한 수박처럼 살맛을 돋군다고 믿는다.

    아버지를 껴안아드릴 때, 아버지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같다는 것은 나의 착각만은 아닌 것같다.
    내가 뽀뽀를 하는 순간에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지고 삶의 기운이 전해지는 게 느껴지니 말이다.
    아버지의 기쁨은 동시에 나에게 기쁨을 준다.
    엉덩이에 뽀뽀를 하는 순간 꺄르르르 웃는 아가가 엄마에게 삶의 희열을 느끼게 해주듯이…

    내가 아버지를 가만히 두지 않고 껴안고 뽀뽀하는 비단 아버지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아버지께 사랑의 스킨쉽을 자주한다.

    아버지와 나는 지금 죽음으로 향하는 그런 기차를 같이 타고가고 있다.
    얼마 안가서 아버지가 ‘강대건의 죽음’이라는 역에서 내릴 것이고 나는 계속 그 기차를 타고 ‘강신주의 죽음’이라는 역을 향해서 갈 것이다.
    누구도 기차가 언제 ‘강대건의 죽음’이라는 역에 도착해서 아버지가 내려야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언제’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아버지의 점점 쇠약해지는 몸이 그것을 말해준다.

    빠른 속도로 ‘강대건의 죽음’이라는 역을 향해 달리는 기차.
    나는 곧 나와 작별할 아버지를 보면서 두려움, 미안함, 안타까움, 슬픔을 느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저 키스, 마사지, 허그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잠시나마 멈추게 하고 온전히 느끼려고 한다.

    2 분 후에 가스실로 보내져 죽음을 당할 부인과 여동생을 나치 경비원 몰래 껴안고 뽀뽀했던 어떤 유대인 이발사처럼 말이다.

    유대인 이발사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쇼아 (Shoah)’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포함된 내용이다.
    끌로드 란츠만 감독은 장장 9 시간 반 동안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었던 수용자들과 가스실의 문턱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들의 인터뷰와 증언을 담아낸다.
    아직도 남아 있는 수용소의 가스실들의 사진과 수용소로 향하던 기나긴 철도를 배경으로 생존자들의 증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끔찍한 사진과 동영상 하나 없이 생존자들의 서술과 증언으로 관객이 상상 속에 태어나는 홀로코스트의 실체는 참혹하기 이를데없다.

    나는 이스라엘에 간지 도착한지 몇 달 안되어 쇼아를 이틀에 걸쳐 하이파의 한 영화관에서 관람했는데 큰 충격을 받았고,
    이 영화는 이후로 내가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 내가 잊지 못하는 에피소드는 감독과 텔아이브의 한 이발사와의 인터뷰였다.
    아브라함 봄바 라는 이름의 이발사는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에서 여성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임무에 관해서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는 텔아비브의 한 이발소에서 손님의 머리를 자르는 내내 아브라함은 감독의 여러 질문에 ---아무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브라함의 임무는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하기 직전의 여성과 어린이들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었다.
    그를 위시해 유대인 이발사들이 16-7 명 정렬해서 전라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줄지어 들어오면 재빨리 그들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한사람 당 대략 2 분 소요되었다.

    자신들이 그 방을 나가자마자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할 것을 전혀 모르는 여성들은 머리를 자르고 나면 샤워를 하고 그 뒤에 일을 배당받을 거라는 희망에 차 있었다.
    이발사들은 곧 죽음을 맞을 그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지만 둘러싼 채로 감시하고있는 독일 병사들 앞에서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머리를 잘라야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아브라함의 무뚝뚝함, 침착함은 놀라웠다. 분명 복잡한 감정의 여러 현을 건드리는 질문들에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또박또박 대답했다. 한 예로 전라로 들어온 여성들을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는 감독의 질문에 그는 ‘나는 아무런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라고 대답했다. 그는  ‘여성들 중에는 나의 고향에서부터 알고 있는 여성들도 있었고, 같은 동네에서 산 여성 친구들도 있었으며, 그 친구들이 그를 보고 반가워했지만 자기는 그냥 묵묵히 일을 해야만 했다고 했다’ 고 덧붙이기조차 했다. 마치 역사책을 읽는 듯이 또박또박한 말투로.



    여성들이 곧 죽임을 당할 것이고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만큼,
    그것을 아무런 감정을 섞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하는 아브라함의 무심함과 초연함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여버려야했고, 묻어둬야했던 끔찍한 감정들의 크기와 정도를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감정 컨트롤을 잘했던 그가 잠시 울컥한 대목이있다. 그의 동료 이발사의 이야기를 할 때였다.

    “내 친구도 이발사로 일하고 있었어요…그런데 그의 부인과 누이가 가스실에 들어왔을 때….”  

    아브라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할 수 없어요. 너무 끔찍합니다. 제발….”

    란츠만 감독은 그에게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종용한다.
    아브라함은 할 수 없다고 우기고, 란츠만은 다시금 ‘당신은 이야기를 해야만해요. 힘든 것 압니다. 압니다. 미안해요.” 라 한다.

    이런 대화 후 아브라함은 눈물을 훔치고 동료 이발사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동료 이발사는 부인과 누이에게 그들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줄 수 없었다.
    바로 뒤에 나찌 경비원들이 있었고 혹시라도 그가 가스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순간 모두가 죽음을 당할 것임을 알기때문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2 분이었다.
    그 때 동료 이발사가 한 일은?

    아브라함은 말했다.

    “[제 동료]는 자기 부인과 여동생을 위해 위해 최선을 다해서, 껴안고 키스를 하면서 일 초라도 더, 일 분이라도 더 같이 하려고 했습니다.”

    9 시간 반의 긴 영화 내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 내가 왜 이 장면을 그렇게도 생생히 기억을 하는 이유가 있다.
    그해 나는 이스라엘에 도착해서 처음 집을 떠난 사람이 겪은 극심한 향수병에 걸려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국제 통화를 하는 것이 어려웠다.
    어쩌다 정말 어렵게 전화를 걸었을 때 부모님이 받지 않으면 하염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부모님의 무응답이 ‘죽음과 같다’고 느꼈다.
    ‘엄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가 바로 이런 기분일 거야 내가 아무리 이야기하려고 해도 부모님이 나에게 답하지 않는 상황. 그게 죽음이지.’


    ‘죽음’같다’는 것은 죽음과는 분명 다르다.
    전화가 안된다고 죽음과 같다고 느끼는 나의 처지와 홀로코스트로 누이와 아내를 잃은 유대인 이발사의 경험은 절대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이를 만날 수 없는 게 죽음과 같다고 느끼던 나에게 사랑하는 이를 잃어야했던 유대인 이발사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큰 울림을 주었다.
    마냥 철부지였던 내가 ‘내가 사랑하는 이와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단 2 분이라면? 그 짧은 시간, 그 매초가 그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고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영화를 봤던 무렵, 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남의 죽음은 물론이고 나의 죽음에 관해서 생각해볼 계기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 이발사의 이야기는 죽음이 목전에 있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처음으로 강렬하게 느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내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애초에 그 삶이라는 게 나에게 주어진 게 얼마나 감사한지,
    어떤 이유에서든 살고자 했지만 죽어야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못누린 시간을 내가 대신 열심히 살아줘야하겠다는 책임감마저 갖게 되었다.
    이후로 내 삶은 성실하고 치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발사의 이야기가 나에게 ‘가족의 소중함’ ‘삶의 소중함’ ‘시간의 소중함’과 같이 약간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깨달음을 주었다면
    2013 년 오빠가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나는 유대인 이발사의 마음을 더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혼수상태의 오빠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고,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오빠가 살 수 있겠지? 돌아가실지도 몰라, 아니 살 수 있을 거야, 정말?’ 의 희망과 절망을 널뛰기를 다스리려고 애쓰면서 석 주를 보냈다.
    그러나 오빠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오라기 희망이 뇌사라는 진단에 의해 끊어졌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의 ‘얼마’ 가 하루인지, 일주일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나는 2 분 후에 가스로 죽음을 당할 아내와 누이을 바라보는 유대인 이발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를 2 분 후에 보내야하는 그와 달리 나는 오빠를 아침 저녁으로 30 분 볼 수 다지만,
    유대인 이발사처럼 죽음에 맞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허그와 키스 말고는.

    나는 오빠의 뺨을 수없이 가볍게 쓸었고, 퉁퉁 부은 오빠의 팔과 손을 만지고, 복잡하게 놓인 튜브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오빠의 가슴을 만졌고, 오빠의 뺨에 내 뺨을 갖다 대었다.
    오빠 오빠…대답이 없는 오빠에게 계속 이야기하고, 노래를 불러드렸다.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오빠가 이땅에 머무는 그 짧은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소소한 사랑의 표현뿐이 없었다.
    오빠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 그리고 그 이후, 나는 테러리스트와 같은 죽음이 남기고 간 나와 가족의 상처에 아파했다. 많이 아픈 만큼 배움도 컸다.

    영화에서 이발사를 보고 내가 삶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살아겠다는 막연한 착한 생각을 하게끔 해줬다면,
    오빠와 함께하는 ‘시한부’의 시간과 그를 이어 맞이한 오빠의 죽음은 나를 본질적으로 바꿔버렸다.
    매 순간, 정말 소중하게 여기면서 잘 살리라는 결심은 나의 하루하루를 지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죽어가다 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빠가 돌아가시는 순간, 그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되었다.
    오빠와 나눌 수 있으리라 여겼던 나의 미래가, 나의 시간은 오빠의 죽음과 함께 덧없이 사라져버리니 나는 내가 죽는 것같았다.

    이후로 나에게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의식이 남아 있다.
    오빠가 가신 뒤 나는 삶을 건성건성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 새롭고 소중했다.
    더 성실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나의 하루하루를 지배했다.
    내가 숨쉬는 매 순간이 공짜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자각은 나의 마음을 형언할 수 없는 감사함과 책임감으로 채워줬다.

    오빠가 가신 뒤에 부모님을 잘 모시겠다는 결심은, 단순히 오빠 ‘대신’에 부모님을 돌본다는 책임감만이 아니었다.
    오빠가 살지 못한 삶을 내가 이렇게 잘 누리고 살고 있는데 하는 감사함과 내가 부모님을 돌보는 것이 돌아가신 오빠와 함께 하는 것이라는 기쁨이 있었다.

    이제 아버지 수발을 들면서 나는 3 년 전 오빠의 중환자실에서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아버지가 내려야할 ‘강대건의 죽음’이라는 기차역이 1 초 후에 도달할지 10 년 후에 도달할지 나는 모른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죽음의 가능성이 아주 리얼하게 우리 옆에 있다.

    반대로 아버지의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은 불행이나,
    바로 그 첨예한 인식 덕에 우리에게 놓여진, 언제 박탈될지 모르는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생명의 소중한 순간을 우리는 잘 살아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수시로 아버지를 껴안아드리고, 키스를 하고 사랑을 표현한다.

    죽음이 언제고 우리를 떼어놓을 것을 알기에 슬프다.
    그러나 ‘시한부 삶’을 매 순간 의식하고 살기에 사랑이 빛과 향기가 더 진해진다.
    매 순간을 하나도 낭비없이 의식하고 살고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단 1 분이라도 축복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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