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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디아 할머니 (3)--영주권과 갓블레스유
    부모님 이야기 2019. 2. 8. 02:08


    나는 할머니가 요리를 할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예술가같은 살림꾼 할머니의 작품이니까.  맛과 색깔의 향연을 그냥  꿀꺽 먹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사진들은 1 년 후, 영주권 심사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나디아 할머니의 요리 모음 co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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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나디아 할머니가 우리집에서 모든 일을 마친 뒤, 할머니의 다음 일터-- 근처의 한 중국인 가정의 베이비시팅--에 차로 모셔드리던 길이었다.  할머니는 편지 봉투 몇 개를 꺼내면서 미안하지만 대강 어떤 편지들인지 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가끔 우편으로 서류들을 받으면 나에게 갖고 와 읽어달라곤 했다.  평소에는 주말에 남편이 집에 오면 모아 뒀던 편지를 읽어달라고 하는데, 당시 남편은 여행 중이었다.

    무심코 받아 읽어보니 별로 중요하지 않은 편지들중에 이민국에서 온 서류가 끼어 있었다. 얼른 뜯어 읽어보니 제출한 서류가 미비하다 내용과 어느 날짜까지 서류를 제출하지 않으면 영주권 신청을 기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편지의 내용을 들은 순간 나디아 할머니는 "아...."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갸냘픈 할머니의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할머니는 울고 있었다. 이제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울음에 나는 당황했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어요. 변호사는 모든 서류 다 냈다고 했는데, 이제 또 이런 일이. 이제는 엘에이에 올라갈 필요 없다고 좋아했는데..."

    그렇다. 할머니를 위시해 유세프도, 나도, 그리고 할머니를 아는 모든 이들은 이제까지 서류가 전부 제출되어서 심사만 남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면 할머니의 변호사가 골칫거리여서였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 아니었고, 할머니에게 매번 만날 때마다 400 불이란 거액을 요구했다. (뭘 대단하게 해주는 게 없이 잠깐 얼굴만 봐도 400 불, 현금으로 받았단다. 영수증은 당연히 없고.) 

    사람들은 할머니더러 변호사가 사깃꾼같다면서 끊으라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몇 년째 자신의 케이스를 담당해줬던 변호사를 두고 다른 사람을 찾을 엄두가 안났다. 더군다나 하루하루 벌어 은근히 사는 삶에 새 변호사를 새로 찾을 여유가 없었다. 그저 어서 모든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서류미비에 신청이 기각될지 모른다는 편지가 날라왔으니 청천병력이었다.

    이제까지 했던 걸 다시 다 새로 시작해야하는가 두려웠던 게다. 서류를 구해야하는 어려움과 불편은 물론, 그전에 매일 허덕이면서 일하는 여러 직장의 스케줄을 조정해서 엘에이까지 가서 변호사를 만나야하는 것이 큰 부담임은 물론이다. 변호사 만나러 가는 교통비도 만만치 않았다. 버스비를 아끼려고 가까운 거리를 걸어다니는 할머니는 엘에이 변호사 사무실에 가기 위해서 왕복 150 불의 택시비를 내야했으니 말이다.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할머니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혼자 넘을 수 있는 역경에는 한도가 있는데 그 한도를 넘어간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당시 나는 오빠가 돌아가신 뒤 엄마와 아버지를 멀리서나마 잘 챙겨드려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다른 사람을 도와줄 여유가 있나? 내가 할머니를 도와줄 수 있을까? 

    그러다가 든 생각, 내가 아무리 바쁘다고 하지만 삶의 의지가 강인한 이 문맹의 할머니가 영주권 신청이란 복잡한 서류의 홍수에서 익사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데, 이미 영주권 신청 해본 경험이 있고, 영어 서류를 읽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내가 그 버둥거리는 할머니를 바라보면서 고민을 한다?  

    부끄러웠다. 

    소리죽이고 우는 할머니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또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에이, 나디아, 뭐 이런 일로 울어요! 걱정 말아요. 

    변호사는 한번 만나서 확인해보면 되는 거고, 어떤 서류든 발급 받으면 되는 거고,

    데드라인까지 시간이 많기만 하네. 뭘 걱정해요! 나도 도와줄 수 있는 한 도와줄께요."


    그 말에 고개를 숙인채 울고 있던 나디아는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내어 울었다. 등을 토닥이며 엉엉 울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알라께,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자'면서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친 뒤, 할머니는 천천히 눈물을 닦고, 히잡을 다시 잘 고쳐쓰고는 나를 향했다.

    '갓 블레스 유, 갓 블레스 유어 패밀리, 갓 블레스요. 땡스 갓, 땡스 신주, 땡스....' 

    가슴에서 우러나는 갓블레스 송가, 그러나 울음 뒤의 힘이 빠진 뒤의  '갓블레스유'는  처량하게 들렸다.

    나는 웃으면서 할머니의 어깨를 툭 치며 농담했다.

    "어서 일하러 들어가세요. 이 직장에서 해고되면 변호사비 못 벌어요!"

    나디아는 천천히 차문을 열고 나갔다.

    요리할 때 춤추듯이 신나고 경쾌하게 움직이던 나디아는 없었다. 걸음이 천근만근이란 표현이 딱 맞는 걸음거리였다.

    70 년이란 세월의 무게가 지탱하기 힘든 듯, 천천히 쌍동이 아기가 기다리는 집의 문을 향하는 그녀의 어두운 모습과 밝디 밝은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너무도 대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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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국에서 온 서류를 읽어보았다. 그녀의 모국에서 '이혼증명서'를 떼어와야 했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요즘은 여러 증명서를 전산시스템을 통해 영사관에서 발급받을 수 있다더라. 당신도 뉴욕에 있는 당신네 나라 영사관에 연락하면 금방 받을 수 있을 거다' 라고 안심시켰다.

    그런데 아니었다. 뉴욕에 있는 그녀의 모국의 영사관에 전화를 해보니 자기네 나라는 아직은 그런 시스템이 없단다. 직접 본국에서 서류를 떼어 우편으로 받아야할 것이라고 했다. 

    나디아 할머니께 즉각 연락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젖어있는 할머니가 불필요하게 좌절할까봐 '서류를 받을 수 없다' 는 말을 강조하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서류를 가능한 빨리 받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에 촛점을 맞춰서 이야기했다. '할머니가 아는 사람 중에 본국에 여행가는 사람 있는가, 식당 종업원, 식당 종업원의 친구, 사돈의 팔촌, 그 누군가가 본국으로 여행가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을 잡아야한다' 라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동시에 그녀의 모국에 있는 여동생에게 전화해서 서류를 미리 준비해놓으라고 했다. 다행히 본국으로 여행하는 사람을 하나 알게 되었고, 서류는 6 주 내에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는 엘에이의 변호사를 만나러 같이 갔다. 나의 영원한 치부--운전을 무서워하고 싫어함--때문에 나도 내 친구 '쑤우'의 도움을 받아야했다는데 쑤우는 자기가 누구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이냐며 (천사들은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우리를 엘에이까지 데려다 주었다.

    변호사를 만나러 간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누락된 서류에 대한 질문도 질문이었지만 또 하나, 아무도 남편 말고는 아무도 없는 나디아 할머니를 홀대하거나 착복해왔다면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는 경고성 방문이기도 했다. 변호사는 나디아 할머니가  미팅후 현금을 내놓으니까 그걸 받으면서 그걸 내가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에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영수증은요?' 하고 물으니 그는 당황하면서 '나중에 우편으로 보낼 것입니다' 라고 거짓말했다. 그 후에 할머니는 두 번 변호사를 만났고, 한번은 에릭이 우리의 수표를 사용해서 돈을 대신 내주었다. 그 이후로는 변호사와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나는 그녀의 남편 '유세프'를 에릭과 만났다. 참 좋은 사람이었다. 파사디나라는 엘에이 북부의 도시에서 직장에 다니는데 주말이면 1 시간 반을 들여 나디아를 만나러 왔다. 어느 날 그들과 함께 같이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중 나는, 나디아 할머니가 유세프한테 잔소리를 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세상에서 가장 흐뭇한 잔소리의 광경이었다. 할머니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닥달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보기 좋던지. 할머니가 했던 말, '맨날 바닥만 보고 살다가 나도 옆을 보고, 앞을 보고 살고 싶었다' 라는 말이 떠오르고, 할머니의 꿈이 이뤄진 것을 축하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 70 세에 라스베가스에 가서 결혼식을 올린 할머니, 일때문에 같이 살지 못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는 그녀의 남편, 그들의 특별한 관계는 영주권 심사를 통과하기에는 불충분한 그런 자격이었다. 그게 그들의 고민이었다. 나는 영주권 심사 시에 '보충서류'로서 이들의 관계를 증명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내가 가끔 찍어두었던 그들의 사진을 모아봤다. 식당에서 같이 밥먹는 사진, 카페에서 에릭과 나와 함께 찍은 사진, 호수 산책하며 찍은 사진, 우리집에서 애들과 찍은 사진....사진들이 꽤 있었다. 자연스러운 일상에서 그들의 자연스러운 관계가 잘 드러났다.

    또한 나디아 할머니가 이제까지 우리집에서 한 요리의 사진들도 모아보았다. 많은 사진들을 다 사용할 수 없어 뽑아서 사진들의 꼴라주를 만들었다.

    영주권 심사관에게 편지를 썼다. 나디아 할머니가 우리집에서 정기적으로 와서 일해온 기간, 일의 종류, 우리가 지불한 비용 대해서 상세히 기록했다. 우리가 두 차례의 장기간 해외 여행을 갔을 때와 여러 가족 모임, 파티가 있을 때도 할머니를 고용했음을 밝혔고 보수를 얼마나 지불했는지도 썼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의 요리에 관해서 사진과 함께 언급했다.

    "우리는 나디아 할머니를 요리사로서 고용해왔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요리, 지중해 지역 요리, 북아프리카 요리의 전문가로서 색깔과 맛이 뛰어난 그런 멋진 식탁을 차려냅니다. 할머니의 요리의 재능은 탁월해서 간단한 멕시코 타코도 할머니의 손을 거치면 일류 식당의 요리가 되어버린답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제가 지난 일년 간 할머니의 요리를 보면서 감동받아 찍은 사진들입니다. 이보다 더 많은 요리를 하셨지만 제가 너무 바빠서 다 기록을 하지 못했던 게 유감스럽네요. 이 사진을 보시면서 나디아 할머니의 음식을 즐겨보십시오. 실제로 맛을 보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할머니께 영주권 인터뷰 때 보충서류로 제출하라고 나의 편지와 사진들과 사진 꼴라주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할머니께 권고했다. '심사관이 안 믿어주리라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진실을 이야기하라'고. 

    나디아 할머니와 유세프가 정확히 몇 번의 인터뷰를 했는지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한가지는 확실히 기억한다. 처음에는 판사와 나디아, 유세프 세명이 함께 했고, 두번 째는 따로 면접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진술의 일관성을 살피려고 한 것이라 추측된다. 

    영주권 심사가 끝난 뒤 얼마 후, 우리집에 찾아온 할머니는 마치 초등학생이 선생님의 칭찬을 받은 뒤 흥분해서 엄마한테 자랑하듯이 나에게 말했다.

    "보충 서류로 사진이랑 당신 편지를 제출했어요. 심사관이 사진들을 하나 하나 보면서 '사진 좋네' '사진 참 잘 찍었다' 라고 했어요!  편지를 읽더니만 나한테 요리를 그렇게 잘하냐고도 물었어요! 왜 결혼했는지, 결혼한 뒤에 왜 따로 살고 있는지에 관해서 물었어요.  난 뭐든 사실대로 다 이야기했어요. 심사관들이 친절했어요. "

    심사가 잘 된 것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얼마 후 아버지가 낙상을 한 뒤, 나는 나디아 할머니와의 고용관계를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이 되었다. 애초에 할머니를 고용한 것이 내가 도움을 받는 목적보다는 할머니께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한 일이었는데 아버지의 간병인을 구해야하는 처지에서는 할머니께 지출하는 비용이 큰 부담이 되었다. 그렇다고 칠순이 넘은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를 아버지의 간병인으로 고용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너무도 다행히, 바로 그 시기에 할머니는 근처의 한 가정에 풀타임으로 두 아이의 입주 육아 도우미로 채용되었다. 요르단인 부부가 따뜻하게 잘 보살펴준다고 했다.

    할머니는 우리집보다 더 좋은 직장을 찾아 떠난다고 나에게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 나는 할머니 대신 간병인을 고용하는 것에 대해서 미안해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도 정기적으로 보던 할머니를 보기 힘들게 되어 섭섭했다. 

    "내가 부모님 돌보느라 바빠서 당분간 자주 못 보게 되어 너무 섭섭하네요. 이해해줘요."

    라고 했더니 나디아 할머니는 펄쩍 뛰며 말했다.

    "이해하고 말고요. 당신은 부모님이 한국 계실 땐 나를 데리고 다니더니 이제는 부모님을 모시네요. 갓블레스유! 
    당신은 내내 노인들을 섬겨요. 갓블레스유! "

    그리고, 시를 쓰듯이 요리를 하고, 요리를 하면서 시를 쓰는, 항상 자신만의 탁월한 방식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그녀는 나의 뇌리에 오래 박힐 말을 했다.

    "노인네들은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아이들처럼.
    당신은 아이들이든, 노인이든,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잘하니까 복을 많이 받을 거에요."

    나는 내가 처음 들어본 노년의 정의---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뭔가 재밌고 의미심장했다. 할머니가 간단하게 노년을 정리해버리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잠시 말을 않고 생각하는데  할머니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부모님을 잘 돌봐주니까 말년에 행복할 거에요. 난 그렇지 못했어요.
    부모님을 두고 고향을 떠났으니까요. 
    나도 그렇고, 나의 동생도 그렇고, 부모님의 말년에 돌봐드리지 못했어요., 돌아가실 때도 찾아가지 못했어요.
    사느라 그런 거지만 그래도 우린 해야할 일을 못했어요.
    그래서 우리들의 말년이 힘든 거에요. 
    그러나 그건 당연해요. 우리가 한 일이 없으니 받을 것도 없는 것이지요.
    신은 공정해요."

    아아, 이건 아닌데! 나는 할머니의 말을 막고 싶었다. 괜히 할머니가 자기 비하에 빠질까봐.

    그러나 할머니는 거침없었다. 신을 잘 믿는 사람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때의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받아들여야하는 것이 자신에게 역경이고 외로움이고 고난일지라도, 그것은 그녀에게는 아이러니하게 공정한 신의 존재함의 증명이었다. 확실이 존재하는 신을 믿고 사는 그녀는 매순간, 매사에 신께 드리는 감사는 진심이었다.

    얼마 후 그녀는 우리집에 찾아왔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
    이미 무슨 일인지 나는 말을 안해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가방의 지퍼를 열고, 수많은 자잘한 물건들 속에서 조그만 손지갑을 열고, 그 손지갑의 지퍼를 열고, 그 안에 종이로 곱게 포장되어 있는 그것---그렇다, 영주권!--을 폈다. 그 과정을 옆에서 기다리면서 나는 마치 아카데미상 수상식 봉투가 열리기 직전의 여우조연상 후보들의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나디아는 천천히, 자랑스럽게 영주권을 들어 보여주었다. 

    우리는 껴안으며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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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만의 방을 갖고 열심히 일해온 할머니는 영주할 자격을 얻고 더더욱 자신있게, 더더욱 떳떳하게 살고 있다.
    남편 유세프도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작년에는 18 년만에 당신의 모국에 다녀왔다.
    돈도 많이 없는 할머니는 고향 다녀온 기념이라고 엄마의 바지, 스카프, 커피, 차, 예쁜 그릇 등을 바리바리 챙겨왔다. 
    고맙다 못해 미안할 지경이다. 

    내가 고맙다고 하니 할머니는 그에 질세랴, 나의 말의 10 배의 속도로, 그리고 자신만의 당당한 목소리로, 
    '갓블레스유! 갓블레스유!'를 외친다. 

    나에게 축복을 해주는 그녀 자체가 나에게는 축복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땡스갓' '땡스갓' 
    그리고 나디아 할머니를 축복한다. 갓블레스유, 갓블레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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