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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빅토리아 이야기 (2)- 암이 맺어준 우정
    부모님 이야기 2019. 2. 20. 01:42

    ‘암’이 맺어준 우정


    나는 2004 년,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유치원 유치원에서  청소부/요리사로 고용된 빅토리아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나보다 10년 연상이지만 항상 밝고 유머센스 있고 다정해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고 나와도 예의를 갖추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2005 년 1 월, 유치원이 개학한 뒤 며칠 후 어느날 아침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가는 길에 부엌을 지나치는데  조리대 앞에 서 있던 빅토리아가 넋나간 표정이었다. 심상치 않아 보여 그녀에게 아무 일 없냐고 물었다.그녀는 여전히 넋나간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저한테 암이 있답니다" 


    그녀는 ‘주말에 하혈이 너무도 심해서 달려간 응급실에서 생각지도 못한 암 진단을 받았다. 전문의를 만나서 정밀 진단을 받아야하고, 보험이 없어서 극빈자 보험을 신청했다’고 했다, 나는 노령의 어머니를 모시며 직장 두 개를 다니면서 근근이 생활하는 중에 암 선고를 받은 그녀가 너무도 딱했다. 어서 정밀검사 받고 수술을 받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빅토리아는 그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성실하게 유치원 요리사, 청소부의 일을 해냈다. 나는 일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함부로 묻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다가 얼마 지나서 빅토리아에게 어떻게 되어가고있는가 물었다. 놀랍게도 나와 대화를 나눈 뒤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아니, 더 안좋은 상태였다.  보험 신청서가 분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담당자가 자기에게 전화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단다.


    나는 펄쩍 뛰었다.


    "빅토리아,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안돼요. 어서 전화해서 서류처리를 요구해야 해요."

    “마담싱쥬, 제가 할수있는 일이 뭐가있겠어요. 전 마음이 편해요.”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요!  어서 서류접수를 해서 의사 만나고 수술 받아야지요!”


    그렇게 다구쳤지만 빅토리아의 상황이 이해가 갔다.  아침 7 시에 출근해서 유치원 학생들의 간식과 점심을 준비하고 청소를 하느라 바빠 노상 전화기를 붙들고 있을 수도, 전화를 하겠다고 근무 시간에 자리를 비울 수도 없다. 하교 후에 청소를 하고난 뒤에 곧바로 다른 직장으로 가 일을 하니, 낮에는 일하느라 바빠서, 저녁에는 병원이랑 관계 기관 사무실들이 닫혀서  전화를 걸 수가 없다.


    당장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암과 싸우겠다는 용기와 의지’가 아니라, ‘전화를 걸 시간’이었다. 

    실없는 소리같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한번만이라도 도와주자 하고 빅토리아가 요리하는 동안 전화기를 잡았다. 자동응답기가 나와 메시지를 남겼으나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받기를 바라면서 30 분간 쉴 새없이 전화번호를 눌렀다. 마치 동전 넣고 인형 꺼내는 게임--성공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엄청난 집중과 인내를 요구하는 게임--을 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받았다. 당장 빅토리아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직접 통화하라고. 그러나 빅토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고 서류 분실에 대해 따지지를 못했고, 상대방은 ‘고상하게’ 발뺌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빅토리아에게 수화기를 달라고 해 상대방에게 내 신원을 밝히고 설명을 요구했다.


    담당자는 나에게 서류가 분실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서류가 너무 많다보니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했다. 그 다음말이 날 경악케했다. “서류 분실은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두고 이렇게 무심하게 이야기를 하다니! 물론 이해한다. 그들이 매 환자들의 서류 하나하나를 신경쓸 수 없다. 절박한 환자들이 흥분해서 전화할 때 일일이 친절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음도 안다. 또한 너무도 많은 환자들을 다루니 환자들의 절박한 상황에 무감각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무감각하지 않은 척, ‘ 즉  ’암환자의 상황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들이 최소한의 포로페셔널 예의가 없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청서는 분명히 제출되었는데 당신들이 모른다고 하면 우린 뭘 어떻게 해야합니까?' 


    라고 따졌더니 담당자는 '제가 보호자도 아닌 당신께 설명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라고 발뺌하더니만 한술 더 떠 “위급한 상황도 아닌데 왜 그러냐" 라고 짜증을 냈다.


    나는—- 이럴 경우에는 폭발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폭발했다.


    "지금 농담한 거지요?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합니까? 암환자를 두고? 이 환자의 암세포가 얼만큼 큰지 압니까? 암이 번지고있는지 아닌지 봤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수술 받아야하는 판인데 그렇게 무심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환자를 도와주는 게 당신들의 임무 아닙니까?" 


    나의 격앙된 어조에  쌀쌀맞던 그녀는 당황했다. 자기에게 며칠을 주면 분실된 서류를 찾아보겠다고 하더니, 오늘 내로 하겠다고 하더니만, 아니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같다며 월요일까지 하겠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네, 감사합니다! 월요일!! 좋습니다’ 라는 마음이었지만 겉으로는 차갑게 ‘ 감사하다. 가능한한 빨리 해달라.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 당신이 보내는 서류 접수를 담당할 직원의 이름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전화를 나눈 시간과 통화 내역을 기록해두겠다' 고 했다.


    빅토리아는 점심 준비로 왔다갔다 하면서 내 통화 내용을 들었다. 이제까지 내가 화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빅토리아는 내 격앙된 어조에 많이 놀란 듯했다. 말없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마담 싱쥬, 고마워요” 라고 하며 뺨을 대며 껴안아줬다.


    나는 전화를 한 뒤에 다시금 깨달았다. 당장 밥벌이를 하기 위해 바쁜 빅토리아가 암과 혼자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전화하고, 팩스 보내고, 이멜하고, 질문하고, 받아적고, 확인하고—-하는 일들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힘들지만 내가 나의 생활을 어떻게 정리하냐에 따라서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빅토리아, 내가 도와줄께요. 수술 받을 때까지 같이 싸워요.” 라 제안했다.


    그렇게 나는 빅토리아의 비서이자 매니저가 되었다. 나의 편의와 내가 상대해야하는 많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빅토리아에게 필요한 서류와 인적사항, 병력, 전화번호 목록을 정리했다. 어떤 사무실이든 전화를 하면 통화 내용과 시간을 기록하고 담당자 이름도 기록했다.



    미궁과 같은 의료 시스템.


    빅토리아가 의사를 만나고 (2 달 걸림), 전문의를 만나 수술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진단에서부터 넉 달 걸림) 빅토리아와 함께 여러 노력을 하면서 나는 과히  친절하지 않은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되었다.  극빈자프로그램이 존재하며, 그 프로그램에 속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정말 고맙게도—-의사들과 간호사들이 극빈자 환자를—-가난한 사람을!—무시하지 않고 깍듯이 존중해주는 것은 깊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시스템의 덩치가 커서 그런지 일이 한번 꼬이면 (빅토리아의 경우처럼) 그것을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익명성 사회의 병폐, 테크놀러지라는 허울좋은 '편리' 로 인한 폐해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정보가 친절하게 제공되어 있는 경우도 연락처가 없다던가, 팩스, 전화번호가 있으면 주소 대신 '우편함 번호'만 나와 있었다. (주소가 없으니 직접 방문해서 올바른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씨름하는데, 전화를 걸 때마다 담당자가 바뀌니 똑같은 설명을 반복해서 하여야하고, 전화통화 대신 팩스로 보내라 해서 팩스를 보내면 그 사이에 담당자 근무 시간이 바뀌어서 팩스를 다시 보내라는 소리를 하고, 팩스 못 받았으니 사무실로 전화를 해라....이런 도돌이표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화 통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이멜을 많이 사용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기의 책임의 경계가 확실한 경우에 일을 철저히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설렁설렁 모호하게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내가 전화를 통해 운좋게 어떤 정보를 얻었다할지라도 몇 시간 후에 그 사람 대신 앉아 있는 사람과 통화를 하면 완전히 다른 소리를 했다. 그러므로 나는 중요한 일은 꼭 서면으로 기록을 남기고 서면으로 대화를 하려고 했다. 법정 소송이 많고, 소송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 나라에서는 그렇게 문서로 기록을 남겨두는 게, 그리고 상대방이 그것을 알게 하는 게 일의 정확하고 빠른 진전을 위해서 필요했다.


    황당한 일도 여러번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나는 일은 ‘피검사 사건’이다.


    빈자 보험 카드를 발급 받은 뒤에 피검사, ct 스캔을 ‘당장’ 해야한다는 의사의 검진 뒤 그녀의 보험카드가 적용되는 곳은 다른 병원이라고해서 서둘러 갔다. 피검사 신청하고 빅토리아가 팔뚝을 내놓고 피뽑을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밖으로 나왔다. 대기실에 앉아서 그 다음에 ct 스캔을 위해 가야할 방 번호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빅토리아가 뛰어왔다. 


    ‘마담, 여기좀 와봐요!’ 


    달려가보니 나이 지긋한 간호사가 이 병원 환자가 아니므로 피를 뽑아줄 수 없다고 했다. 의사가 보냈다고 이야기를 해도 통하지 않았다. 내가 들고다니던 진단기록 등을 보여주면서 이 병원 응급실에 들어온 적이 있고 환자 번호도 있다고 하며 어디든지 가든 우리에게 서비스를 거부당하는 우리의 딱한 처지를 설명했다. 그녀는 컴퓨터 몇 대를 오가면서 꼼꼼히 살피더니만 ‘이번만 해줍니다. 이분은 우리 병원 환자가 아니에요. 원래 해줄 수 없는 건데 이번만 해주는 겁니다. 환자에게 확실히 설명해주세요’ 라 하였다.


    피뽑기 허들을 잘 뛰어 넘었다 했더니만 ct 스캔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친절한 담당자는 규율때문에 해줄 수 없다고 ‘처방전’을 받아오라 했다. 빅토리아의 의사가 준 처방전은 효력이 없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또 어디가서 허가서를 받아와야한다는 거지? 암의 크기를 알려줄 ct 스캔을 하라는 허락을 받는데 두 달이 넘게 걸렸는데 이제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말이니. 마치 손에 쥐어졌던 풍선을 누군가가 낚아채어 하늘로 보내버리는 것같이 허무했다.


    다행히 한 간호사가 우리를 도와줬고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되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참 이상했다. 우리가 뭘 몰랐을 때는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었다. 빅토리아 담당 소셜 워커도, 간호사도, 사무직원도 의사도, 다 손을 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정보를 확실히 얻고 요구를 하니까 이제까지 아무도 몰랐던 문제가 갑자기 다 아는, 뻔한 사실로 둔갑하는 것같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한 조각이 없어서 완성될 수 없었던 골칫거리 퍼즐이 다 맞춰지는 것같았다. 


    숱한 사연을 거쳐 한 ct 스캔의 결과를 들으러 의사에게 간 날은 4 월 18 일, 암 진단을 받은지 석 달 후였다. 담당 의사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의사는 왜 이제야 왔냐고 야단쳤다. 마치 우리가 게을러서 시티 스캔을 받지 않기라도 한 양. 그러나 그런 꾸짖음도 달기만 했다. 빨리 수술을 하라는 이야기니까. 빅토리아는 4월 25 일 수술신청서를 내고 5 월 2 일 아침 수술을 받았다.


    빅토리아가 암 치료를 받기 위해 투쟁하던 시기에 미국에서는 ‘테리 시아보’ 논란이 한창이었다. 테리 시아보는 심각한 뇌 손상으로 15 년간 튜브로 영양공급을 받고 있는 환자로, 그녀가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뜻을 밝혔었다고 주장하며 회생이 불가능하니 튜브를 제거하자고 하는 그녀의 남편에 맞서 그녀의 친정부모는 딸이 깨어날 가능성에 있다고 주장해 장장 10 년간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결국에는 연명치료, 존엄사, 죽을 권리, 살 권리등 여러 이슈를 둘러싸고 플로리다 주지사, 대법원, 대통령, 연방의회, 교황청까지 개입했는데 플로리다주 대법원이 영양공급장치를 제거하라는 명령이 3 월 중순에 내려졌다. (참고로 그녀는 튜브를 제거한지 2 주 후, 3 월 31 일 사망했다)


    빅토리아와 여러 사무실을 전전하면서 테리 시아보의 기사를 접할 때마다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살 권리만큼 중요한 죽을 권리, 누가 누구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테리였다면? 내가 테리의 부모라면? 내가 테리의 남편이라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이 질문거리만 떠올랐다. 동시에 테리와는 너무도 다른 처지의 빅토리아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금방 손을 쓰면 살 가능성이 있는 암환자 빅토리아, 살려는 의지가 확실하고,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는 그녀가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게 왜 이리 어렵단 말인가.

    당시에 또 하나의 사건은 요한 바오로 2 세 교황의 선종이었다. (2005 년 4 월 2일) 빅토리아 보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나는 성베드로 대성전 중앙에 안치되어 공개된 교황의 시신을 보면서 그분의 위대한 삶을 생각하기보다는 ‘교황님은 보험때문에 고생 안 하셨겠지?’ 라는 말도안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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