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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을 현재로 살기
    스치는 생각 2020. 12. 1. 16:17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우리는 바로 몇개월전의 일상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는 소리도 있다.
    1 년 전의 일들을 30 년 전의 그 옛날—손을 많이 쓰고, 발품 많이 팔고, 기다리는 것에 익숙했던 그 옛날—처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런데 1 년 전의 삶으로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나는 ‘30 -40 년전의 그 옛날’을 나의 ‘현재 시제’로 살고 있다.

    집밖에 나가서 누리던 삶의 자극과 즐거움이 사라진 요즘, 집 안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한다. 손을 많이 쓰고, 생각없이 해치우던 일들을 천천히 하면서.
    2 층의 우리집 ‘안방’은 나에게는 참 재밌는 놀이터가 되었다. 부엌에서 일을 하고, 엄마랑 대화 나누는 시간 빼놓고 나는 대부분 안방에서 논다.
    씨디로 음악을 듣고, 몇 개 안남은 카세트 테이프를 카세트 플레이어에도 듣고 (33 년 전에 친구가 노래를 부르면서 녹음을 한 테이프를 들을 때의 감격이란!!!)
    그리고 매일 입은 옷은 목욕탕에서 비누로 손빨래해서 침실 앞의 베란다의 빨래걸이에 널어 햇볕에 빳빳이 말려입기.

    그리고!!

    잠시 책상에 앉아 글쓰기

    얼마 전에 뭔가 너무 열심히 하다가 허리/어깨/몸통 통증으로 책상에 오래 앉지는 못하고 30 분- 1 시간 정도.
    그 짧은 시간이 너무도 신나는 이유는 만년필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에릭과 나에게 각 하나 씩 주신 만년필은 추억이 어린 물건이다.

    결혼 초기 책상이 따로 없었던 에릭은 아이들을 재우고 부엌 정리를 도와준 뒤 식탁을 깨끗이 치우고 식탁을 책상 삼아 공부를 하곤했다. 그는 아버지가 주신 만년필로 페이퍼, 논문을 썼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컴퓨터에 더더욱 의존하게 되면서 그도 나도 만년필을 쓸 일이 점점 없어졌고 만년필은 결혼 때 받은 은수저세트마냥 벅스 안에 보관되었다.

    만년필을 쓰려니 잉크가 없어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며칠 뒤 도착한 몽블랑 잉크 박스에 “Made in Austria” 라고 씌여져있었다.

    오스트리아산 물건은 처음 사보아서이기도 하고 요즘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물건 중에 made in China 이 아닌 게 거의 없는지라 잉크 병을 들고 마치 새로운 발명품을 처음 보듯이 찬찬히 감상하던 둥 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향수를 느끼고 있는 ‘그 옛날’은 중국이 세계 시장의 대량 생산국이 되기 전, 조야한 '메이드인 차이나' 물건들이 범람하기 전의 세상이었다는 사실,

    그 옛날은 나를 위시해 모든 한국 사람들이 물건을 아껴쓰고, 다시 쓰고, 없으면 없는대로 살던 시절이었다. 싸구려를 쉽게 사고 버리는 문화가 정착되기 전의 그 옛날, 물건이 의미가 있었고, 물건에 기억이 서려 있었고, 물건을 쌓아놓을만큼 여유가 없었던 나름 축복의 시절.

    너의 만년필에 ‘중국산 제품이 아닌’ 잉크를 넣어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잠시지만 옛날을 내 현재로 데려와 다시 살아보는 호사를 누린다.

    기억하고 싶은 글들을 배껴쓰기도 하고, 새로 배운 단어들을 외우면서 쓰기도 하고, 단상들을 끄적이기도 하는 매 순간 나는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산다.

    흥미롭게도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번번히 중학교 1 학년 팜페미가 된다. 대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 그것도 중학교 1 년생!

    그것은 아마도 만년필의 ‘첫경험’을 했던 게 중학교 1 년 때이어서인 듯하다. 만년필로 글을 쓰는 게 마치 성인식이라도 되는 양 어색함과 셀레임으로 잉크를 넣고 글을 써보던 그 첫 경험.

    말을 잘 안듣는 펜촉에 적응하려고 애썼지. 만년필에 잉크가 새어 손가락이 검정색으로 물들곤 했었지.
    영어 알파벳을 필기체로 수없이 연습했었지. 친구의 좋은 만년필을 부러워했었지.
    내 뒷자리에 앉았던 경림이의 은색 만년필, 초록색 잉크가 어찌나 부러웠었던지..

    천천히 살기.
    지금 나의 삶에서 내가 원하는 삶을 잠시나마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 큰 만족감을 준다.
    뭐든 ‘더 빨리, 더 편하게!’ 를 목적삼아 항상 치열하게, 구르듯이 뛰며 살아온 과거의 삶을 잠시 멈추고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삶을 준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미래에 대해 대단한 준비와 계획은 없지만 하나 결정한 게 있다.

    더 이상 펜은 사지 않으리라!

    나는 필기도구를 참 좋아해서 이제까지 꽤 많은 필기도구를 줒어모았었다. 각기 다른 색깔, 모양, 감촉의 필기도구는 그 무엇보다도 나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유혹의 대상.
    (루이비똥 백과 예쁘고 잘 씌여지는 펜 중 뭐 택하겠냐고 물으면 나는 망설임없이 펜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우리집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필기기구, 볼펜들을 (아마도 대부분이 중국산!) 다 끝까지 사용하리라 마음 먹는다. 그 펜들을 다 사용할 때까지 새로이 펜들을 사지 않으리라!
    책상에서 일할 때는 반드시 만년필로 쓸 것이다. 만년필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 옛날의 마음으로,..
    새 볼펜과 사인펜을 사면 소중히 여기고, 함부로 버리지 않고 끝까지 썼던 게 ‘절약’이 아니라 ‘일상’이었던 그 옛날로 나는 돌아가리라.

    그렇게 천천히 글(씨) 쓰고, 글(씨) 쓰는 순간을 만끽하면서 나는 나의 삶을 조금씩 천천히, 의미있게 흘려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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