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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님의 기일
    스치는 생각 2020. 12. 16. 03:38


    4 년 전, 아로디 (이스라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다행히 나는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기 3 개월 전, 아버님을 찾아뵈었다.

    당시 나의 아버지 수발을 들 때였는데 ‘이번에 아로디를 못 보면 평생 후회할 것같다’ 는 직감이 있어서
    무리를 해서 에릭과 이스라엘 휴가를 갔었다.

    아로디는 한눈에 많이 편찮아보였다.

    내가 30 년 전 이스라엘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 내 짐을 번쩍번쩍 들어 날라주고
    집안의 온 궂은 일을 쉽게, 씩씩하게 해치우던 아로디는
    계단 몇 개를 오르면 심장의 고통을 참아야하고,
    집안에서 천천히 걸을 때도 숨이 차하는 그런 약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에릭을 너무도 좋아하신 아로디, 두번째 만남인데 마치 사랑하는 친아들을 오랫만에 만난 듯이 즐거워하셨다.
    ‘아로디가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 오랫만에 본다.
    에릭과 아로디는 참 잘 맞는다.’ 라고 오프라가 말했다.

    아로디는 오프라와 결혼하면서 오프라의 아이들을 입양했다. 자신의 친자녀는 없다.
    내가 이스라엘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오프라가 한 말이 기억난다.

    “아로디는 스스로의 아이가 없음을 한번도 아쉬워한 적은 없어.
    그런데 네가 온 뒤에는 ‘내 dna 를 물려받은 딸이 온 것같은 기분이 든다’ 라고 하더라.”

    나도 아로디를 아버지로서 존경하고 사랑했다.
    아로디가 나에게 끼친 큰 영향은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남성/남편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부인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고, 부인에게 전통적인 여성상의 굴레를 씌우거나 강요하지 않고,
    나이 먹어가는 부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남성.
    생활에서 그런 존중과 사랑이 실천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어떤 사상적인 결단이나 사회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임을 매일매일 목격하면서
    ‘결혼을 절대 안 하리라!’고 모질게 먹었던 마음의 빗장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만약 아로디같은 남편감을 만나면 할 수도 있겠다..’ 정도로.

    이스라엘의 첫 해, 내가 오프라의 집에서 반 년 살고 기숙사로 옮기기로 결정했을 때
    (또래 집단과의 경험이 하고 싶고, 밤 늦게까지 파티하고 노는 것 하고 싶고, 아이들과 수다 떨면서 히브리어를 배우고 싶어서였음)
    그 결정을 가장 아쉬워한 것은 아로디였다.
    워낙 과묵하신 분이라 그의 아쉬움은 말로 표현되지 않았고, 그냥 느껴졌다.

    나의 짐과 책을 기숙사 방에 옮겨준 다음,
    아로디는 카드 한장을 건네고 나를 꼭 껴안아준 뒤에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아로디를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마치 그가 나를 버리고 가는 듯이 보였을 것이다.)

    봉투를 열어보니 줄지어 선 아기 오리들이 쭉 나열되는 그런 접는 카드였다.
    오리들마다 하나씩 글자를 들고 있었다.

    “K -E -E-P S-M-I-L-I-N-G”

    뭐든 서툴고 어리숙한 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혹시라도 꺾어지고 부서질까 걱정하시는 아빠의 마음이 읽어졌다.

    —-
    아로디의 카드는 내가 기숙사를 옮길 때마다 벽에 걸었던 소중한 카드였다.
    몇 년 후, 빠리로 이사간 뒤 벽에 걸려고 찾아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빠리로 부친 짐 중에 박스 두 개가 분실되었는데, 그 박스에 들어있었나보다.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 걸 알면서도 계속 부질없이 짐을 뒤지고 뒤지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그 상실감이란...

    그 후 나의 삶은 많이 바빠졌고, 나는 오리 카드 사건은 잊고 살았다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오리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면서 카드 생각이 났다.
    ‘맞아. 그 때 이삿짐 풀면서 아무리 찾아도 그 카드가 없은 거 알면서도 그리 열심히 찾았었지....’ 라고 추억을 더듬을 때,
    상실감이란 전혀 없이 그냥 엣 추억이 흐믓하기만했다.
    힘들 때 아로디가 나에게 준 ‘keep smiling’ 이란 교훈을 나는 자주 떠올렸다.
    맞아, 그렇게 힘든 일도 겪었는데....다 잘 할 수 있어 하고 스스로 도닥거리면서.

    그런데 4 년 전 아로디가 돌아가시자마자 나는 다시 카드를 찾는 마음을, 그 당혹스러움과 상실감을 다시 느꼈다.
    카드가 없는 거 분명히 알면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듯이
    아로디가 돌아가신 것을 머리로 아는데, 마음은 그의 죽음을, 그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빠를 잃었을 때도 그랬고, 아로디를 잃었을 때도 그랬고, 그 후 나는 나의 친아버지를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혹스러움과 상실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로디가 떠난지 4 년이 지나면서, 그의 죽음은 현실로 서서히 받아들여졌고 나는 카드가 없는 것을 알면서 계속 박스를 뒤지는 그런 황망함은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다.

    카드를 잃어버렸을 때의 당혹감 대신, 그 카드에 담긴 멋진 독려의 말—-‘keep smiling!’ 이란 말을 기억하고 용기를 얻듯이
    나는 이제 아로디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상실감에 메몰되지 않고
    나의 삶에 큰 선물이자 은인이었던 아로디라는 인간이 나에게 베풀었던 부성애, 다정함, 신뢰, 희망을 더 또렷이 기억하게 된다. 아니, 그러려고 한다.

    —-
    오늘 이스라엘 어머니와 나는 약속했다.
    각자 초를 켜서 아로디를 기리기로.
    정원에서 꺾은 꽃 한송이, 초 몇 개,
    간단하지만 나의 온 영혼을 쏟아 나의 아버지, 아로디를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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