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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기장의 장례식을 치루며...
    스치는 생각 2021. 1. 29. 14:24




    오랫만에 처음 휴가/여행을 떠났다.

    결혼 25 주년, 남편의 생일 겸사겸사, 집에서 15 분 거리의 Laguna Beach,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완전한 휴식.

    남편도, 나도 많이 지쳐있어서 이번 여행은 각자 마음 가는대로 보내기로 했다.
    자기 멋대로,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을 때 알아서 먹고, 하고 싶은 것 맘대로 하기—
    바다에 나가고 싶은 사람은 나가고, 언덕에 산책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아니면 방에 틀어박혀 책읽고 그림그리고..
    온전히 자기가 원하는대로 시간 보내기.

    나는 가방 한 가득 책을 싸왔다. 각기 다른 주제, 다시 읽고 싶은 책, 그냥 휘르륵 스치면서 읽을 책,
    그리고 스페인어 문법책. 스페인어 공부할 시간이 안 날 가능성이 크지만, 뭔가 공부할 것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해도 엄청난 기쁨이 오기에...

    남편과 나는 각기 다른 방을 짐을 풀었다.

    남편이 섭섭해했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은 자기가 원하는 것 하기 아니었던가?
    나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책읽기를 하고 싶단 말이다!!
    (남편은 빛과 소리에 민감해서 일찍 일어나는 나는 침대에서 책을 읽을 수가 없다.)

    책이 많은 내가 킹 사이즈 침대방을 차지,
    밤부터 책을 읽기 시작, 벼개 더미, 책더미 속에서 잠을 달게 잤다.

    아침 일찍 눈을 뜨니 천장의 유리창으로 빛이 환히 비춰줘서 램프를 켜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너무 행복했다.
    늦게 내려와 커피를 내리고, 엄마가 싸주신 고구마와 떡을 먹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 책을 읽었다.

    남편이 늦게 일어나 잠시 이야기 나누고,
    내일부터 비가 온다니 오늘 같이 해변 산책을 하자고 해서 같이 나갔다.

    해변은 사람이 없었다.
    햇살이 밝고, 바람이 상쾌했다.
    남편이 망원경으로 허밍버드, 갈매기, 파랑새를 보여줄 때 같이 감탄한 것,
    내가 빈 해변에서 스누피 사진을 찍을 때 남편이 허허허허 웃은 것,
    커피 마실까, 쥬스 마실까, 점심을 어디선가 살까 등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 말고,
    우리는 말없이 각자의 상념에 빠져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산책을 즐겼다.

    산책 후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내가 벼르고 벼르며 가져온 옛날 일기장을 폈다.
    80 년도에서 86 년- 대학교와 대학원 시절에 쓴 일기장인데
    같은 시기에 매년 쓴 일기장이 존재하지만 이 일기장은 6 년에 걸쳐, 깊은 속내를 적은, 그래서 각별한 의미있는 일기장이다.

    나는 이 일기장을 버릴 작정을 하고 싸왔다.
    언젠가 정리할 요량이었는데 그냥 버리기는 너무 미안해서 집중해서 한번 읽어주고 작별인사를 고할 작정이었다.
    방해받지 않고 집중해서 읽기에는 이번 여행이 제격이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커피, 차, 쥬스를 마시기 위해 일어나는 것 외에는 움직이지 않고 일기를 읽었다.


    자신의 오랜 일기를 읽는 것은 소설을 읽는 것과 다름없다.
    이번에 또 그걸 느꼈다.
    40 년 전의 나는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일기를 통해서 옛날의 나를 새로이 알게 되었다.


    20 대의 팜페미는 이런 생각을 했고, 저런 고민을 했구나.
    이런 일들을 했고, 저런 계획을 세웠고,
    이런 저런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구나....

    정겹게 떠오르는 얼굴들도 있었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도 다수였다.
    오랜 세월 직접 만나기는 커녕, 간접으로 이름조차 들을 기회가 없었으니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 당연하리라.

    나는 내가 즐겨갔던 장소의 언급이 유독 재밌었다. 즐겨가던 카페 (레떼, 파인힐, 몽셸통통, 이태원/반포/동숭동의 난다랑) 다방 (왕자다방, 학림),
    이화여대 앞의 리바이벌 떡볶이집 (아! 이런 거대한 이름이라니!), 서강대 R 관의 장수면, X 관 라운지의 미니김밥,
    C 관 여학생화장실...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나눴던 깊은 이야기, 상처를 주고받은 대화...

    참 많은 것을,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열심히도 기록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에게 글쓰기는 살풀이, 심리치료 효과가 있었나 싶었다.
    분명 글을 쓰면서 마음이 정리가 되었을 것이고
    분명 글을 쓰면서 나와 만나는 시간이 행복했을 것이고,
    분명 글을 쓰는 행위—펜으로 글씨쓰는 단순노동—을 즐겼을 것이다.

    문득 그 옛날의 나는 자기 자신 말고는 독자가 없는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일기란 장르의 속성이 그러해서이지만 여하간 20 대 초반의 나에겐 나의 일기는 독백이었고, 그 독백은 나만을 위한 것,
    그러므로 나의 일기장은 나 말고는 ‘독자’가 없는, 아니, 독자가 없어야하는 기록이었다.
    일기를 설합 깊숙히 넣었고, 어떤 때는 옷장 구석에까지 넣는 보안조치를 취한 게 바로 그래서 아니었던가.

    그런데 나는 일기를 버리지 않았다. 40 년간.
    ‘과거의 나’ 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또 한 명의 독자를 위해서, 즉 ‘미래의 나’라는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쓴 것이기에...

    낮에 등에 햇살이 따뜻할 때 시작한 일기 읽기는 해가 질 채비를 할 무렵에 끝났다.


    뿌듯했다. 행복했다.
    일기는 꼭 잠겨있던 기억의 금고의 빗장을 열어주었다. 많은 사건/사람을 회상하는 시간이 참 즐거웠다.

    깊은 감사가 느껴졌다.

    40 년 전의 나는 ‘감사함’이란 주제로 일기를 쓰지 않았건만—-피곤하고 우울한 내용이 많았음—
    40 년 후에 읽혀진 일기는 나에게 그저 ‘감사함’만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주 pure 한 감사함을...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 가족과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들은 물론이고 스쳐지나간 선후배와 지인들이 특히 감사했다.
    그들은 다 내가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천로역정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담당한 의인들이므로...
    미성숙하고 모난 성격, 오만함과 냉소로 가득찼던 모자랐지만 계속 일기를 통해 자아성찰을 하고 잘 살아보려고 노력한 어린 팜펨에게도 감사했다.
    그 친구 덕, 아니, 그 친구가 쓴 일기 덕에 나는 내 과거와 현재를 ‘감사’라는 깨달음으로 엮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는 평온한 감정으로 일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일기는 나를 떠날 준비가 되었다.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이야기거리 몇 개와 감사함을 선물로 남겨준 채.

    빗장이 열리자마자 쏟아져나와 나를 잠시 즐겁게 해준 수많은 기억들은 이제 영원히 잊혀질 준비가 되어있다.
    그래도 된다.
    그래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조금 후 장례식을 맞이할 나의 일기장을 기리는 ‘조문’이다.

    ‘40 년 전의 나’ 야, 고맙다!
    일기장아, 고맙다.

    과거여, 이젠 아듀~~~!
    한결 더 가볍게 다가오는 미래여, 봉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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