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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몫의 재산은 오빠에게 주세요’—첫째에게 감사합니다
    모성- doodle 2020. 9. 20. 15:58



    15 년 전, 엄마가 몹시 편찮으신 뒤, 친정부모님이 본인들이 이제 생을 마무리짓는 단계에 왔다고 여기셨는지 그때까지 내내 생각해왔던 죽음에 대한 준비를 구체적으로 논의하시곤 했다. (묘소는 교회 묘지, 장례식은 간단하게, 장기기증 서류와 유서작성, 재산은 계속 절약해서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남겨주자.. 등등)
    나는 그때 부모님께 말했다.
    "재산을 나눠주실 때 저는 빼줘요. 오빠한테 제 몫을 주세요."
    엄마 아버지는 의아해하셨다. 왜냐, 당시 나와 남편의 핵가족은 아주 행복했지만 살림은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고, 매해 우리집을 방문하시는부모님은 그걸 잘 알고 계셨다. 오빠는 자녀가 없고, 편안한 회사생활을 하기에 우리보다는 훨씬 더 넉넉했다. 그러니 내가 받을 몫의 재산을 오빠께 다 드리라는 말이 이해가 안될 수 있었다.
    '나는 언니 오빠 덕에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누렸고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니 부모님 재산이 필요없어요' 라고 설명했다.
    언니와 오빠는 나에게 큰 은인이다. 나는 그들 덕에 돈으로 얻을 수 없는 큰 행복을 누리고 살고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언니 오빠가 나의 은인이라는 깨달음을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얻었다..

    "넌 경험이 많은 엄마한테서 태어나서 행운이야. 내 때 엄마는 모유수유 실패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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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나는 내가 큰 착각을 했었음을 알아차렸다. 열달동안 태교하면서 나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었는데 나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때문이었다. 첫날부터 육아의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 아기를 안고 하는 모유수유는 실패, 유축기로 젖을 짜서 먹이고, 기저귀에 익숙치 않아서 매번 다 새어 이불빨래가 잔뜩, 출산으로 몸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 수유를 하면서 몸이 축났고, 실질적 도움을 주거나 경험과 지혜를 나눠줄 어르신/선배가 없이 신생아를 키운다는 것은 너무도 힘들었다.
    나만 고난의 길을 겪었나? 아니다. 초보 엄마 아빠를 둔 첫째 아이도 삶이 고난 그 자체였다!
    아가는 따뜻하고 완벽했던 자궁에서 퇴출! 15 시간 동안 산도를 뚫고 세상에 나온 뒤 공기에서 호흡을 해야했고, 날카롭게 들리는 모든 소리에 적응해야했으며, 처음으로 배고픔과 배변의 고통을 경험했으며, 입술을 오물거려서 힘들게 우유병꼭지를 빠는 법을 배워야했다. 그런데 육아 경험이 없는 엄마 덕에 아기는 뜨거운 목욕 물, 차가운 공기,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운 분유, 불편한 잠자리, 자신없는 손놀림으로 하는 목욕---에 익숙해져야했다. 매사에 우왕좌왕 어수선한 엄마의 품은 엄마의 자궁의 완벽함을 대신해줄 수 없었다.

    출산 두 달 전
    태어나자마자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나를 자궁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한 갓난아기
    모유수유 실패! 유축기로 젖을 짜 먹이던 시절...어설픈 엄마를 믿어준 아들
    첫번째 크리스마스... 왜 이런 소동이지? 의 표정



    첫아이는 우리에게 큰 행복을 가져왔다. 딸이 국제결혼을 해서 미국에 정착을 해버린 뒤 딸을 잃은 듯한 상실감을 감추고 살던 부모님은 '서양 사위때문에 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딸과 사위와 복덩이 손자까지 얻게 된 것이라 행복해하셨다.
    나와 남편은 절약해서 부모님을 자주 찾아가뵈려고 노력했고, 부모님도 일년에 한번씩 우리집에 꼭 오셨다. 당시 사진들을 보면, 사진기를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찍은 사진조차 다 밝게 웃는 사진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생후 50일!
    그리 좋으세요? 제가 웃어드리지요! 아빠게 웃음 선물!
    편안하게 잠자는 아기는 엄마에게 지복!
    아빠에게 안겨서가 아니라 나를 봐서 웃는 거라고 착각하는 엄마가 사진 찍음 
    엄마 아빠, 늦둥이 보더니 난리도 아니구만...ㅠ 
    돐잔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젊게 해주었던 비타민 손자
    할아버지께 처음으로 육아의 기쁨과 고통을 안겨준 손자
    아직 동생이 태어나지 않았어요. 난 너무 행복해요....


    나는 아이를 돌보는 일에 점차 익숙해졌지만 아이의 성장의 단계마다 다시금 '초보엄마'가 되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배워갔다. 아이는 그런 엄마에 익숙해졌고... 나는 내가 꽤 잘한다고 생각하다가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아이를 돌볼 때의 그 '우아함'과 아이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그 노련미에 감탄하곤 했다. 내가 책을 보며 공부하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절대로 금방 터득할 수 없는 그런 노련미. 감사하게도 두 할머니들 덕에 아이는 적어도 일년에 석 달은 편안했고, 엄마는 할머니들을 통해 많이 배웠다.
    이렇게 간신히 육아에 익숙해질 무렵,---첫아이가 2 년 3 개월때, 둘째를 낳았다.
    병원에서 둘째를 데리고 집에 온 날. '동생'이란 존재의 실체를 처음 대면한 첫째 아이는 굳어버렸다. 짜증을 내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그냥 굳은 표정이었다. 두살배기 첫째는 항상 불평하지 않는 어질고 착한 아이였다.

    책 읽는 시간---둘째는 책에 집중, 첫째는 아빠를 뺏긴 표정


    20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신의 의사 표현에 서툴고, 아니면 약간 극기적인 성향이 있어서 참는 것에 익숙한 첫째아이는 동생에게 자기 자리를 빼앗겼을 때 느꼈을 (부모에 대한) 배신감, (동생에 대한) 질투심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냥 묵묵히 삼켜버렸을지도 모른다.

    둘째를 낳은 뒤 첫째에겐 이런 표정이 잦았다. 나는 그걸 20 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고. 


    첫째아이로 실험/실패/실습을 많이 해본 덕에 나는 능숙하게 둘째를 돌보았다.
    '아...둘째는 이렇게 쉽구나. 첫째도 이렇게 쉽게 해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결혼 전에 조카들이니 친구들 아가들을 좀 돌봐보았더라면 첫째 때 참 쉬웠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끼곤 했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나는 갓난아기를 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육아의 길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이는 유아원에 들어가고, 초등학교에 가고, 중학교..대학교....두 아이의 육아는 매사에 비슷한 공식---온 가족이 첫째 아이를 통해 새로운 상황을 배우고 적응하고 난 뒤 둘째 아이가 똑같은 길을 편안히 가는 그 상황---이었다.
    두 아이가 대학교에 들어가 집을 떠날 때까지 첫째 아이나 부모인 우리나 모든 일을 약간 얼떨결에 한 반면, 둘째 아이는 첫째 아이를 통해 얻은 경험 덕에 그 모든 과정이 친숙해서 우리도, 둘째아이도 다 좀 더 자신감을 갖고 했다. '조심스럽다, 소극적이다, 수줍다' 라는 말을 자주 들은 첫째와 달리 둘째는 낙천적이며, 표현력, 배짱, 사회성이 뛰어나다....라는 호평을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둘째의 '멋진 성격'은 반드시 타고난 성격, 즉 '천성' 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째는 오빠를 통해 간접 경험을 미리한 덕에 수줍움과 두려움에 압도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소극적으로 될 필요가 없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 한 성격검사에 의하면 둘째가 첫째아이보다 아주/ 훨씬/ 더 내성적이라고 한다). 태어날 때 오빠가 15 시간동안 열어놓은 산도를 타고 1 시간만에 나온 것처럼, 앞에서 걸어가는 오빠를 쫓아가는 둘째에겐 모든 게 조금씩 쉬웠다.
    첫째의 존재로 둘째의 삶이 얼마나 쉬워졌는가를 목격하면서 나는 나의 오빠 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도 어려서부터 항상 자신감이 있었고, 낙천적이었으며 모험심이 많았고 사람들이 나더러 그렇다고들 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게 내가 타고난 '천성'이고 부모님이 그걸 잘 살려주신 것이려니 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나의 두 아이들이 서로에게 주는 영향을 보면서, 특히 둘째의 삶이 얼마나 쉬운가를 목격하면서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유치원에 간 적이 없지만, 초등학교 1 학년 첫 수업 시간에 유치원에서 배워주는 노래들을 할 때 다 따라할 수 있었다. 더 오랜 기억도 있다. 언니인지 오빠인지 유치원 따라갔을 때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내가 나서서 답을 하려고 했었다. 언니 오빠가 집에 와서 하는 노래들을 들으면서 나도 따라했고...그렇게 정식 유치원생은 아니지만 귓동냥, 눈동냥으로 유치원과정을 자연스럽게 마쳤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다 마찬가지. 오빠 언니를 통해 간접경험을 다 해둔 덕에 나는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동급생들 사이에서 '뭔가 좀 아는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대접은 은근한 자신감으로 이어진 것이고....
    자라는 과정 내내 그런 식이었다. 오빠와 언니가 앞에서 큰 길을 내준 덕에 나는 편안하게 즐기면서 그 길을 걸어갔다. 예습을 한 뒤에 수업을 들으면 쉽듯이, 그리고 예습을 한 학생들이 공부를 잘할 가능성이 더 크듯이, 나는 오빠와 언니의 존재 덕에 내 삶을 좀 쉽게, 즐겁게, 여유있게 살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두려움이 없고, 아주 근본적인 낙천적인 성격이 나는 부모님의 신앙심과 기도뿐만이 아니라 오빠 언니 존재 자체 덕임을 알고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언니 오빠께 또 감사하는 이유는 더 있다. 부모님의 성차별이 없는 교육으로 오빠는 특별 대우를 받은 적이 없고, 언니도 오빠도 나이가 많다고 더 큰 권리를 누린 적이 없다. 그럼데 두 사람 다 막내인 내가 유학을 갈 때 적극 지지해주었다. 내가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언니가 다리미질을 하면서 "우리가 살림이 넉넉하진 않지만 어떻게 해보면 다 될 거야" 라고 한 것을 또렷하게, 감사히 기억하고 있다. 오빠는 나더러 '부모님이나 사회의 압력때문에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라' 라고 지지해주었다. 정말 너무 너무 너무 고마운 인간들... 오빠...언니...
    나는 참 행복한데, 나의 현재의 행복에 기여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처음은 부모님과 오빠와 언니라는 것을 나는 꼭 기억하려고 한다. 오빠가 돌아가실 때 나는 뇌사상태의 오빠께 '부모님 걱정 마시고 편히 가세요' 라고 했을 했다. 입관식 때도 그말을 했고, 장례식 때도 그말을 했다. 진심이었다. 내가 50세가 넘을 때까지 오빠가 나에게 배풀어준 사랑과 자유와 사랑의 선물 덕에 나는 스트레스 받지 않고, 기쁨으로 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힘이 키웠으니까, 오빠는 훨훨 날아서 천국 가세요~~
    현재 타주에 사는 언니는 교수로서, 작품활동을 하는 예술가로서 무척 바쁘다,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는 언니가 자주 왔지만, 코로나 이후 언니는 자주 오지 못한다. 언니께 "언니, 엄마 걱정을 너무 하지마, 내가 엄마 잘 모실께. 내가 엄마 잘 모셔서 언니가 여기 걱정 조금이라도 덜하면 그게 언니를 돕는 것이라는 자부심이 있다우..." 라고 했다. 그것도 진심이다. 나는 엄마의 '몸'을 잘 돌보고 언니는 엄마 아버지가 물려주신 '정신'을 작품으로 승화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나는 언니가 삶으로서, 사랑으로서 나에게 준 여러 축복에 대한 보답을 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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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이야기로 잠깐 돌아가서...아이는 23 세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뒤늦은 성장통도 겪고, 더 단단해져서 새 삶을 계획해가고 있다.
    아이가 마음고생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시금 알게 되었다. 내가 그때까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아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여리고, 훨씬 더 순수하고, 훨씬 더 정직하다는 것을....나는 단단한 근육에, 딱딱한 말투의 아이의 겉모습만 보고 아이가 강철같은 아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성장통때문에 아이가 힘들고 남편과 나도 힘들었지만, 그 열매는 달고 풍성하다. 아이는 고통의 과정에서 자기가 자기를 알게 되어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부모인 우리는 아이를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어내면서 얻은 '고통 면역체' 덕에 이후에 닥칠 여러 모습의 어려움을 잘 싸워낼 거라는 것이 기쁘다. 어떤 면에서 아이의 힘든 일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것은 꼭 있어서야했던 일, 아니 '천운' 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만큼 나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고보면 쪼글쪼글한 붉은 얼굴로 파랗게 질려 울던 갓난아기였던 아이를 품에 안았던 나나, 20년이 지나 건장한 청년이 되어 자기만 아는 아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나나, 나는 여전히 '초보엄마'이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첫째가 결혼을 할 때, 손주를 볼 때, 다 나는 새로이 업그레이드 되어야하는, 성장하여 커지는 아이의 보폭에 맞추어 한발자국 두발자국 걸어가는 초보 엄마일 것이다.
    아주 힘든 순간에서조차 엄마와 아빠를 믿어주고 계속 정직하게 대화를 나눠주었던 첫째야, 참 감사하다.
    부모에 대한 존중이 굴종이 아니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굴레가 아닌, 자유와 존중과 사랑의 부모 자식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첫째야, 감사하다.
    내내 엄마를 키워주고 엄마와 같이 커가는 첫째야,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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