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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축기
    모성- doodle 2020. 2. 13. 08:44

    첫 아이를 나은 뒤 가장 큰 충격은 모든 초보 엄마가 경험하는 것--시간의 박탈과  몸의 변화, 특히, '나의 몸이 나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의 깨달음이었다. 나의 몸이 태아를 위한 인큐베이터이며, 출생 후에는 내 몸이 태아를 돌보는 데 온전히 사용되어서 나의 몸이 나의 몸이 아니게 되어버리니까.

    그런데 또 다른 차원에서 '나의 몸이 나의 몸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다. 그것은 유축기의 사용이었다. 유축기는 '내가 생각했던 나의 몸, 내가 알아왔던 나의 몸과 나의 몸이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게 당시에는 과히 긍정적인 경험은 아니었지만, 그 깨달음이 나의 이후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으니 이제는 흐믓한 마음으로 돌이켜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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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통의 여파외 회음부 절개의 통증으로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덜너덜한 상태에서 나는 엉겁결에 유축기를 사용해야했다. 일단은 아이에게 모유를 주기 위해서, 젖 몸살을 풀어주고, 그리고 남편이 수유에 동참하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23 년 전)에는 내 주위에서 유축기를 사용한 사람이 없었다. 출산을 책으로 공부하던 나는 유축기가 존재하며 여러 이유로 많은 여성들이 사용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내가 사용하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아기 엄마가 아기를 안고 젖 먹이는 자연스러운 그림'에만 익숙했었고, 나도 나를 그 그림에 대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대로 수유가 되지 않았고, 에릭이 급히 유축기를 대여해왔다.

    기계치인 주제에 설명서 읽는 것을 혐오하는 나의 특성을 잘 아는 남편이 꼼꼼히 읽으면서 위치, 각도 등을 설명해주었다. 시어머니는 가만히 옆에 서계셨다. 뭔가 도움이 되면 도와주시려.

    어서 젖을 짜서 아이에게 먹여야하는데, 유축기가 성공할까?  기대반, 걱정반, 유축기를 젖에 갖다 대었다.  나의 젖에,  이제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딱딱한 플라스틱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기계의 감촉.

    젖을 짜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와 남편 앞은 나를 다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나도 창피하지는 않았고 그냥 참 이상했다. 우리는 '온전한 젖 산출을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였다. 내 젖은 내 젖이 아니라 여러사람이 공유하는 공공자산?

    유축기로 젖을 짜는 부인/며느리를 보면서 남편도, 어머니도 분명 어색하긴 했을 것이나, 그래도 나보다는 덜했을 것이다. 왜? 대가족을 이룬 그들은 손자, 조카 여러명들을 갓난아기때부터  보살펴본 경험이 있고, 젖병을 물려본 경험도 많다. 반면 나는 첫아이 출산 이전까지 기저귀를 갈아본 적이 한번도 없고, 젖병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젖병을 들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내 가슴을 훤히 내놓고 젖을 짜고 있으니...나는 젖소와 다를 게 거의 없었다.

    다행히 젖은 잘 돌았다. 나는 감사히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

    그 이후 '젖짜는 일'은 나의 일상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책에서 보니 모유를 냉동해두었다가 이유식 만들 때 사용하면 좋다는 말에 더 열심히 젖 생산에 돌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몸은 '젖이 흐르는 몸'이 되어버렸다. 일정 시간이 되면 젖은 어김없이 나의 생각--'엇, 유축기 아직 준비 안되었는데! 잠깐 기다려!!'---에는 아랑곳없이 어줄줄줄줄 젖을 흘려냈다. 잠시 시간을 잊고 밖에 나갔다가 줄줄 흐르는 젖에 놀라 차로 뛰어 돌아간 일도 몇차례. 소변, 대변, 방귀 등의 생리현상을 대부분은 (병이 나지 않는 한) 이성으로 콘트롤 할 수 있었건만, 이제 젖은 나의 이성의 통제라는 벽을 가볍게 밀쳐버리고 줄줄줄줄 내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내가 모르는 리듬에 맞추어 돌아가는 내 몸, 제 때에 젖을 생산해내는 나의 몸에 나는 경악했다. 내가 내 몸을 모르고 있으며 내 몸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일말의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35 년간 나는 내가 이성으로 내 몸을 관리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몸은 자기 맘대로, 내가 모르는 시간 관념과 리듬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출산과 육아로 몸과 마음이 다 너덜너덜해졌는데,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내 몸은 나의 감정이나 생각은 고려하지 않고 멋대로, 묵묵히 그러나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그뿐이랴, 몸은 나를 지배했다. 몸이 '젖 짤 시간이다!!' 라고 외치듯이 젖을 줄줄 흘러내보내면 나는 급히 유축기를 갖다 대고 젖을 짜야했으니 말이다.  

    하루에 몇번씩 젖을 짜서 젖병에 보관하는 일을 하다보면 '내 몸은 내 몸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음은 몰론, 나는 '내가 내가 아닌 것같은' 그런 박탈감도 느끼곤 했다.  열심히 젖을 짜고 있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책이 빽빽하고 꽂힌 책꽂이와 컴퓨터. 바로 최근까지만해도 내 지성의 세계의 주축이었던 그것들은 당장은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나의 현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배경일 따름이었다.

    나는 젖배가 불러 스르르 잠드는 아기를 내려다보면서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중, 갑자기 솟아 오르는 '이거 지금 무슨 상황이지?' 라는 생각을 다스리곤 했다. 엄마가 되면서 나는 아주 강해졌고, 속이 단단해졌고, 너무도 행복해졌지만, 그 새로운 자아가 완전히 익숙하지는 않았다.  자주, "이거 뭐지?' '내가 누구니? 나 내가 맞아?' '나만 이런 건가?' '나 이래도 되는 건가?' 식의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고, 바삐 젖병 소독을 하고 이유식을 만드는 내내 그런 생각들에 깊이 빠져들곤 했다.  당연 우울함도 느꼈고, 아가가 울 때, 아기보다 더 큰 소리로 울기도 했다.

    첫 아이와의 시간은 빨리 지나갔고, 나는 둘째를 가졌다. 둘째 때는 모유 수유를 직접 할 수 있었지만 남편이 수유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유축기를 계속 사용했다. 유축기는 삶의 일부였고 우리 모두에게 내가 유축기로 젖을 짜는 모습은 식사하기, 양치하기, 잠자기만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유축기로 젖을 짜는 동안 나는 항상 '내가 젖을 짜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두번이 출산을 겪은 뒤에도 나는 '젖짜는 엄마'라는 새로운 자아에 적응은 잘 안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차적으로 '나의 몸이 나의 것이나 내 마음대로,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어떻게 보면 아주 뻔한 진리를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철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나는 어떠했나?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스타일대로 살기 위해 내 몸을 한껏 부려먹었다. 니코틴? 웰컴! 카페인? 모어댄 웰컴! 사흘동안 잠 안자면서 놀면 건강에 안좋아? 아니, 그게 젊음을 낭비하지 않고 잘 살아내는 것이지!  나의 몸은 나의 이성, 이상, 객기에 종속되어 나의 모든 결정에 착실하게 따라주었다. 크게 아프지 않고, 별로 피곤하지 않으니, 나는 몸의 오만한 군림자가 되어버렸다.

    임신. 츨산, 수유는 그런 면에서 나와 나의 몸의 관계에 혁명을 가져왔다.  태아를 잉태한 임신 기간과 출산 후 갓난 아기의 수많은 요구, 모유 수유 등, 모성의 다양한 경험은 나의 몸의 나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나는 몸이 나의 전유물이 아니며, 나의 이성과 욕구의 노예가 아니다. 나는 몸에게 좀 겸손해진 것이다. 이전에 노예처럼 부리기만 했던 나의 몸에게...

    세월이 지나 유축기 기억은 사랑스러운 젖먹이 아들과 딸의 기억과 어우러져 행복한 시절의 한 상징물처럼 남아버렸고 나는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늙은이가 되었다. 고혈압이 있고, 간이 안좋고, 무릎이 시큰하니, 발톱은 왜 아픈 거고...어쩌고 저쩌고....크고 작은 문제들로 몸이 나에게 말을 건다..

    그런데 옛날에 터득한 몸에 관한 진리는 아직도 나에게 유효하다. 아니, 아주 유용하다.  나는 요즘 나의 몸의 언어를 들으려고 노력하고, 이해하고, 맞춰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말을 안듣는, 통제 불가의 그 신비로운 고유의 리듬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거기에 나를 맞춰주고 있다. 나도 끊임없이 몸에게 말을 건다.

    이거 먹어볼래? 잠을 더 재워줄까? 이전까지 막대해서 미안해, 몸아. 나를 지켜줘서 고마워. 

    그렇게 나는 나의 몸을 만나고 있다. '나의 몸'이 아닌 나의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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