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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가 사랑했던 너는 어디에 있니
    스치는 생각 2021. 8. 6. 22:39


    나는 이스라엘 어머니, 오프라와 일주일에 한 번, 화상 채팅을 한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꽤 열정적으로, 각자의 삶, 가족, 문화, 책, 영화 등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팽팽하게 맞서서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고, 남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눈다.

    브러셀 여행으로 한 달간 채팅을 못했는데 어제 회포를 풀었다.
    어머니의 근황과 나의 여행이 주요 토픽.

    오프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나랑 채팅을 한 게 이스라엘 시간 밤 10 시였는데
    오전 중에 자기 집의 세미나실에서 5 시간 동안 그룹 웍샵을 했고,
    오후에는 줌으로 한 시간 동안 상담치료를 했다고 했다.
    85 세이신데… 대단한 정력에 대단한 열정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의사가 운동을 하라고 하는데 운동은 안하고 일만 하고 있다며
    ‘나의 아버지가 나를 힘들게 했지만 건강 유전자를 물려주신 건 고맙다’ 며 웃으셨다.

    나에게 브러셀에서 무엇을 했냐고 물으시는데 딱히 뭘 한 게 없었다.
    '시부모님이랑 많은 시간을 보냈다' 라고 하니 오프라는 영 실망한 기색이었다.
    “오랫만에 한 여행인데 박물관 방문, 근처 도시로 짦은 여행, 이런 거 없었어?”

    없었다.
    초대 받은 곳은 여럿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버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거절했었다.

    오프라는 영 이해가 안가는 눈치였다. 매일 시댁에 가서 뭐했냐고 물으신다.

    “제 친정 아버지 모실 때랑 비슷했어요. 에릭이랑 둘이 분업해서 일을 했어요.
    단지, 이번에는 에릭이 몸으로 하는 일을 하고 저는 아버님 마사지하고, 아버님 말벗 해드렸어요.”

    “시아버님 귀가 잘 안들리신다며, 네가 하는 말 잘 알아들으시니?”

    “네. 벨기에 식구들 말보다 제 말 더 잘 알아들으실 때가 많아요. 왜냐면 벨기에 식구들은 좀 조용조용 이야기하는데
    저는 힘차게 이야기해서요.”

    시부모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냐고 해서 대강 전해드리니
    오프라는 ‘훌륭하다!’ 라고 나를 잠시 칭찬하더니만,
    “너는 또 남에게 공짜 심리치료를 해줬구나. 이럴 거면 아예 전공을 하지 그랬어.” 라고 하셨다.

    그것은 오프라가 늘상 하는 소리--왜 커리어를 갖지 않았냐--의 변주곡 잔소리이다.
    오프라는 내가 전업주부인 것, 평소 돈이 안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사는 것이 불만이다.
    오프라의 눈에 나는 자아의 상실을 유발하는 ‘가족애, ‘희생,’ ‘헌신’의 아이콘이다.

    늘상 듣는 소리라서 그냥 그러려니...했는데
    앗, 오늘은 다른 주제에서 불꽃튀는 대화가 벌어졌다.

    ‘나와 남편의 부부관계.'

    부부 심리 상담사인 오프라는 내가 벨기에 가서 남편과 둘만의 시간을 갖지 않은 것을 문제삼았다.
    부부의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둘만의 시간을 갖고, 계속 사랑을 키워나가는 노력을 해야하는데
    우리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나랑 아바 (오프라의 남편)은 아이들이 집을 떠난 50 대 중반부터가 새로운 로맨스의 시작이었어" 라고 회상하시면서
    자녀를 키울 때의 크고 작은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이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나도 남편과 ‘빈둥지’를 둘이 서로를 발견하는 기회로 만들어야한다고 조언했다.

    나는 우리는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살기에, 핵가족 모델에 의거해 만든 ‘빈둥지’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현재 직장에 다니는 남편과 아침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하루를 시작하고,
    남편과 마음 내키는대로 천천히 아침 식사를 즐기고, 둘이 훌쩍 여행을 다녀오고—-는
    가능하지 않으며,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일찍 은퇴를 해서 50 대 말부터 자유롭게 프리랜서 일을 해온 오프라의 삶과
    늦게 결혼해, 아이를 늦게 본 나의 삶의 곡선을 비교할 수는 없는 것같다고 맞섰다.

    오프라는 음….하고 잠깐 생각을 고르더니 또 다른 방법으로 나의 결혼 생활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빈둥지는 그렇다고 치자. 내가 알기로 넌 결혼한 뒤로부터 지금까지 너와 남편만의 시간이 없었어.
    내 기억에 이스라엘에 부부 여행 온 거, 캐나다 두어 번 간 거 말고 부부가 함께 한 여행이 없었어. 맞지?”

    나는 또 수비모드—-

    (매년 여름 휴가는 물론 가끔 남편과 주말 여행을 가는데요?)

    그러나 내가 남편과 일년에 몇 달을 여행을 함께 한다고 하더라도
    둘 다 프리랜서로 자유롭게 여행 시간을 낼 수 있었던 오프라의 눈에는 부족하게 보였을 것이다.
    나는 오프라더러 ‘어머니의 삶이 예외적인 것이지, 제가 비정상인 건 아니라’ 며 맞섰다.

    오프라는 흠….생각하더니만 다시만 다시 공격!

    ‘일상을 돌이켜볼 때 너희 둘이 부부로서 같이 하는 게 무엇이니?’ 라고 따졌다.

    아....이것은 나의 아킬레스 건 ㅠ
    우리는 같이 하는 게 애초에 별로 없다.
    남편과 나는 성격, 관심사, 취미, 결정방법, 돈쓰는 방법—-뭐 하나 공통점이 없다.
    25 년은 고사하고 결혼 생활 3 년을 버텨낸 게 신기할 정도로 우리는 따로 따로 논다.
    여행을 가서든, 집에 있을 때든 같이 하는 게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r, 그런 것을 문제삼지 않고 편하게 즐기니까 우리는 행복하다.

    나는 그걸 오프라에게 이해를 시켜드리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프라, 저희는 원래 여행을 가서도 많이 각자의 시간을 가져요.
    그러나 그래도 문제가 없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요.
    저희 둘 다 부모님때문에 바빴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무관심하거나 무성의한 건 아니었어요.
    둘이 로맨틱한 시간을 못 가졌다지만 전 이번에 남편한테 새로이 사랑에 빠졌어요.”

    오프라가 이게 무슨 소린가하여 눈이 반짝했다.

    나는 그 문맥을 설명했다.

    도착한지 하루가 안되어 부모님댁을 방문했을 때, 에릭은 시차로 피곤할 때인데도 자연스럽게 아버님의 배변을 도와드렸다.
    마치 매일 그 일을 해온 사람처럼 익숙하게마치 아버님을 부축해서 의자로 모셔가고,
    아버님 옆에서 기다리고, 오물 버리고, 아버님 옷 갈아 입혀드리더니, 그 후에도 내내
    물심부름, 약 챙겨드리기, 가래 뱉으시게 돕기 등 아버님 옆에서 잔심부름을 했다.
    그 어느 누구도 그가 도착하자마자 아버님을 몸으로 돌볼 것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일인양 하고 있는 남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키가 더 커보이고, 어깨도 더 듬직해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



    오프라에게 “아, 에릭, 너무 멋져! 사랑스러운 남편!!” 이란 간지러운 생각이 들더라고 하니까
    그녀는 시쿤둥했다. 그럴 밖에. 당신은 중년부부의 로맨틱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나는 아버님 용변 수발을 드는 모습에 사랑을 느꼈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게 사실인데 어쩌랴?
    오프라는 내가 답답하시겠지만, 나는 사회가 정해놓은 ‘행복의 방법’을 강요하면서
    나의 (남성에 대한) 취향을 인정하지 않는 오프라가 답답했다.

    부부가 각자의, 그리고 서로의 가족을 사랑하는 게 왜 부부관계의 문제의 결과라고 하시는가.
    가족애가 왜 단지 희생이라고 생각하시는가.
    그냥 사랑하고 사는 거라 보면 안되는가?
    가족애는 인간애의 출발점이다.
    왜? 가족도 ‘남’이니까. ‘가족이라는 이름의 남’이니까..
    부모도, 형제 자매도, 시부모도, 친척도, 남편도 이웃, 동료, 친구도 엄밀히 말해서 ‘나’ ‘내’가 아닌 남이다.
    신의 섭리/인연/우연? 으로 나와 관계를맺고 사는 ‘남.’

    나는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사랑이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일 따름이다/
    25 년 전, 우리의 첫 만남에서 내가 에릭한테 반한 것도 그의 가족애때문이 아니었던가.

    오프라도 우리의 첫만남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나는 다시금 상기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남편을 처음 본 순간 그의 무심하고 맑은 눈빛을 보는 순간 한눈에 반했어요.
    그러나 그 ‘한눈에 반함’은 순간적 끌림이고 금방 스러질 수 있었는데
    매혹이라는 순간적 감정을 ‘나는 이 사람이 정말 좋다. 사랑할 수 있을 것같다. 사귀고 싶다' 라는
    진지한 관심으로 만들어준 것은 그와의 대화 중에 그가 한 ‘할머니’ ‘조카’ 이야기였어요.

    저는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는데,
    남편과 내가 친구 이삿짐 날라준 뒤, 그가 운전하는 픽업 트럭으로 귀가하던 중이었어요.
    그가 구순의 외할머니가 참 그립다,
    할머니를 부축해서 동네의 그리스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곤 했었다,
    할머니는 유머센스가 있는 멋진 분이시다 라고 하는 순간,
    갑자기 그에게 강한 관심과 즉각적인 신뢰심이 생겼어요.
    처음 만난 외국인 남성에 대한 ‘끌림’을 내가 애써 부인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든 거지요.
    이 남자가 누군지 알 것같은 그런 기분?
    그와 함께하고 싶은 욕구?
    그렇게 저의 상사병은 시작되었고
    유학 떠난 뒤 근 9 년간 꽤 일관성있게 추구해왔던 철칙 (외국인과는 절대 안 사귄다!) 을 내동댕이치고
    커리어의 꿈을 다 수정/포기하고 남편을 쫒아다녔고 결혼을 한 거에요.’

    우리의 ‘연애감정’에 불씨를 당긴 것은 ‘그의 할머니 사랑’ 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만큼 가족애가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매력 포인트였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남모르게 혼자 겪는 외로움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식의 외로움, 소외들에 대한 인식도 있을테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이해할 줄 알았던 오프라는 냉큼 나의 말을 잡더니만 질문을 했다.

    “그래, 그래, 너는 에릭의 그런 면을 좋아해서 사랑에 빠졌다 치자.
    그럼 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그 때, 에/릭/이 사/랑/에 빠/졌/던 그 /여/자는 어/디/에 있/니?”


    회심의 일격!
    뼈있는 질문.
    내가 이미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질문이나 내가 한번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던 그 질문.

    이 질문은 오프라의 나에 대한 불만과 직결되어 있다.
    내가 학위를 마친 뒤에 멋진 커리어를 쌓지 않은 것에 대해 큰 아쉬움과 불만을 갖고 있는 오프라는
    나의 남편이 말로는 않해도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추측하고 있었다.
    오프라가 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적절히 대답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일단은 남편의 생각을 몰라서이고 (묻기도 쑥쓰러움),
    내 생각에도 ‘남편이 사랑에 빠졌던 그 여자’와 현재의 나는 너무도 다르다 생각되어서이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확신하고, 커리어에 대한 야망이 높고 자신만만하던 그 여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남편과의 나와의 최근의 대화를 오프라와 나눴다.

    ———————-

    에릭이 아버님을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새롭게 그에게 반했던 날,
    숙소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즐겁게 조잘조잘거리면서 은근히 사랑 고백을 했다.

    “아버님 돌보는 당신 모습, 진짜 멋있었어.
    또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었어~~
    근데 애초에 내가 당신한테 사랑에 빠진 게 바로 그 이유였어.
    본마망! 당신의 가족애! 그래서 내가 당신을 쫓아다닌 거였지!”

    남편이 지나가는 소리 하듯이 말했다.

    “나도 같았어.”

    “당신도 같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남편은 자신도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 날 나와 똑같은 이유로 (가족애) 나에게 호감을 느꼈었다고 말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이제까지 남편은 나의 첫인상을 진지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
    (‘당신이 이사 도와주겠다고, 복대에 장갑까지 끼고 와서는 트럭에서 박스를 들고 쩔쩔 매기만 하고 해서
    저럴 거면 왜 왔나하고 생각했었어’ 라고 농담만 했다.ㅠ)
    그래서 우리의 첫만남은 항상 내 시각에서의 narrative 였다. (팜펨이 한눈에 반해 쫓아다닌 스토리 ㅠ)

    그러나 남편은 나만큼 그 때의 순간을, 그리고 내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우리의 대화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파사디나 거리를 드라이브할 때, 당신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했는지 기억해?
    당신은 당신 부모님 이야기를 했었어. 부모님이 늙어가는 모습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고,
    유학 하면서 부모님께 감사하게 되었다고…
    나는 그래서 깊은 인상을 받았어.
    속으로, 어, 이 사람, 보히미언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것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가족을 사랑하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부모 이야기를 할 정도로. 현실에 발을 딛고 서있는 사람이네?
    나는 당신처럼 표현을 못했을 뿐이지 나도 그 순간 당신에게 깊이 끌렸었어.
    ‘이 사람이랑은 말이 잘 통할 것같다’ 라고 생각했었고, 내 판단은 정확했어.”

    나는 오프라에게 남편의 관점 덕에 오프라의 질문, “그 때 그가 사랑했던 여성은 어디에 있니?” 에 답을 할 수 있을 것같다고 했다.

    옛날에 그가 사랑에 빠졌던 여성은 ‘나’였다.
    부모님께 감사하고 부모님을 사랑하는 ‘나.’
    이제 그 ‘나’는 시부모님을 감사하고 시부모님을 사랑하는 ‘나’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의 ‘나’는 한 사람이었다.

    오프라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라고 이야기했다.


    천성

    오랫만에 ‘본마망’ 이야기를 해서인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같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던 중,
    내가 연결지어 생각한 적이 없었던 과거의 두 개의 사건이 하나로 묶어져서 보였다.

    성격과 취미에 하나도 공통점이 없는 나와 남편이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다름’을 초월하는
    천성적인 유사성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두 관계—

    사브타와 나
    에릭과 본마망

    아래는 내가 오프라에게 한 말인데 편의상 비대화체로 서술해보겠다.


    <나와 사브타>

    사브타는 오프라의 시어머니로, 내가 이스라엘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실족/치매로 병원에 입원하셨었다.
    한 번 인사차 병문안을 간 뒤 나는 거의 매일 할머니를 찾아 뵈었다.
    히브리어도 잘 못했고 전공 공부하느라 바빴지만, 가족에게서 떨어져 병실에 누워 계시는 할머니가 너무 가엾었다.
    할머니 몸을 마사지 해드리고, 머리 감겨드리고 발을 씼어드리고, 조기 치매인 할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나는 27 세였다.

    바로 몇 달전까지만해도 한국에서의 나는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하고, 놀고—-그저 나만 생각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노인들의 머리를 감겨드린다? 손톱을 깎아드린다? 발을 씻어드린다?
    한번도 해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나에게 사랑을 주셨던 외할머니가 생각이나서…’ 라는 이유도 없었다. (어려서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할머니의 기억이 전무하다.)
    가까이 사는 어르신도 없었고, 당연히, 어르신 수발드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할머니께 잘해드려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이스라엘 부모님도 일주일에 몇 번 잠깐 인사만 하고 갔는데, 유학생이고 친족이 아닌 내가
    매일 찾아가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하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회의 권유, 강요, 가족의 의무도 없었을뿐더러 ‘내가 가엾은 할머니를 돕고 있다’는 자긍심도 없었다.
    (이스라엘 식구들의 대부분은 내가 그만큼 사브타를 자주 찾아가는지도 몰랐고, 몸을 씻어드리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할머니를 돌본 것은 그저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었다.

    30 여년 전의 기억을 돌이킬 때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버스를 타고 할머니 병원으로 갈 때의 설레임,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기는 할머니를 뵐 때 느꼈던 기쁨,
    할머니의 몸을 깨끗하게 해드리고, 농담으로 기분을 좋게 해드리면서
    집을 떠나 병원에서 외로운 투병을 하는 할머니의 하루가 조금이라도 살만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주는 보람.

    어쩌면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은 내가 별 깊은 생각 없이, 온전히 나의 천성이 이끄는 대로,
    나의 마음이 말해주는데로, 내가 행복한 일을 한, 첫번째의 일일지도 모른다.

    ‘에릭과 본마망의 관계’도 나와 사브타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도 나처럼 나와 비슷하게, 자기의 천성이 이끄는대로, 본마망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을 표현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혼자 사시던 본마망이 실족하여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에릭과 시아버님이 문병을 갔었다.
    두 사람은 환자로서의 본마망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병원이라는 차갑고 냉정한 시설에 본마망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금방 돌아가실 것라고
    집으로 모시고 오자고 우겼다.

    시어머님은 나에게 “내 친정 어머니라서 오히려 내가 입으로 모시자고 하기 어려웠는데 아들과 남편이 우겨줘서 고마웠다’ 라고 했다
    본마망은 집에 오시자마자 안색이 건강하게 변했고,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지셨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 행복해지신 거다.

    디둠, 빠삐, 쟈클린 이모, (생전의) 쟈닌 이모는 에릭은 본마망에게 아주 특별한 손자였다고 했다.
    할머니 옆에 앉아서 할머니께 관심을 갖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할머니 모시고 산책을 다니고, 식당에 모시고가고,
    그래서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대학생 손자, 에릭.
    본마망이 속마음을 가장 많이 털어놓았다는 쟈클린 이모는 본마망이 본인의 심장에 손을 갖다 대면서,
    “에릭은 항상 여기, 내 마음 한 가운데 있다” 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외할머니를 집에 모시고 오자고 주장했을 때 에릭은 22 세였고,
    27 세에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그는 외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러려고 노력했다.

    20 대의 에릭이나 나나 ‘이게 옳은 일이다’ 라는 도덕적, 윤리적 가치에 의해서 할머니들을 돌본 것이 아니었다.
    우리 눈에는 우리 옆에 존재하는 할머니들의 노년의 고독이 보였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한 것이다.
    그게 우리가 서로 만나기 전의 우리였다.

    그러므로 첫 만남에서 ‘할머니’ ‘늙으신 부모’ 이야기를 하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클래식을 사랑하고 별보기를 좋아하는 차갑고 명석한 수학도 (남편)
    세계를 놀이터삼아 돌아다니겠다고 마음 먹은 보헤미안 문학도 (나) 라는
    우리의 사회적 정의, 겉모습 밑에 존재하는, (당시 우리 스스로도 스스로의 천성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던)
    ‘천성’을 상대방에서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

    오프라랑 이런 이야기를 나눈 것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남편과 내가 같이 하는 게 별로 없다고 늘상 생각해왔었지만,
    지금보니 우리는 계속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면서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부모님을 위해서든, 이웃을 위해서든 무엇인가를 할 때
    나를 항상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남편, 그는 나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오자고 우기고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같이 하고자 했던
    compassion 이 많았던 20 대의 에릭은 지금까지 하나도 안 변했다.

    “오프라, 오늘 이야기하면서 새로 알게 된 것들이 많았어요.
    남편이랑 저는 가족이든, 이웃이든 ‘남’과 함께 사는 삶을 지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에요.
    우리 천성이고, 그게 옳다고 생각되고, 그게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그렇게 할 때 우리가 행복하기때문에…”

    이 말에 오프라는 활짝 웃는 얼굴로 ‘브라보!’ 하더니

    “너랑 에릭은 천생 연분이구나! (“You and Eric are meant for each other!”)

    하셨다.

    오프라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이제까지 힘들게 나눴던 공격/방어/공격/방어 식의 대화의 스트레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이제까지 나에게 여러 번 성가실 정도로 우리의 부부관계에 대해 잔소리를 한 것이
    진심으로 걱정해서였구나 느껴져 감사했다.

    오프라와 줌 채팅을 마친 뒤 마음이 가뿐하니 즐거웠다.
    오프라랑 이야기할 때마다 ‘희생’이라는 낙인이 나에게는 참 힘들었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내가 왜 맨날 ‘희생’을 자처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셨기에.

    오늘 처음으로 ‘희생’이 아니라 ‘천성’임을 오프라께 설득력있게 설명한 것같았다.

    27 세에 내가 사브타에게 품었던 마음의 희생심이 아니었듯이
    50 대에 내 아버님 수발을 들 때의 마음이나, 60 대에 시부모님을 아끼는 마음이나 다 같은 사랑이었다.
    내가 사브타를 돌볼 때 아무도—-오프라 조차도—나에게 ‘희생’이라고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 부모 돌보고, 시부모 돌보고, 내 주위의 이웃들을 돌보는 것은
    내가 나보다 불편한 ‘남’에게 내가 쉽게 줄 수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기에
    ‘희생’이 아니다. 적어도 나처럼 천성이 그렇게 태어난 사람에게는..

    천성으로 좋아서 하는 섬김은 절대 희생이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섬김의 대상인 ‘남’이 나의 삶에 기여하는 것을 고려하면 정확히 무엇이 희생인지,
    누가 누구에게 감사할 일인지 분명하지 않다.

    씨를 심고, 물을 주고, 꽃을 기다리는 사람은 꽃이 피면 감사하지만, 꽃이 피지 않는다고 큰 상실감을 느끼지 않는다.
    빛을 조절해주고, 흙을 골라주고, 물을 주는 ‘소망의 행위’ ‘주는 행위’가 주는 기쁨만해도 어딘가.
    나의 노력이 음으로, 희망의 시선, 새로운 삶의 의지같은 꽃이 피워질 때는 온 세상을 다 얻은 듯이 행복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기쁨은 한가지이다. 노력 자체가 의미있는 행위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듯, 우리가 사는 동안 섭리/인연으로 맺는 모든 관계는 우리의 삶에서 사는 법을 배워주고,
    수많은 감정을 경험하게 도와주고, 관계를 키워나가는 고통과 보람을 배워주면서
    우리가 죽는 날까지 우리를 성장시켜준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의 질과 양을 재어보고 계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는 굳게 믿는다.
    가족이든, 가족이 아니든, ‘남’과 나누는 힘들 때도 있지만,
    그렇게 남들과 함께 부등켜안고 살기에 남편과 나의 사랑이 상실되기는 커녕,
    반대로 우리 둘의 사랑의 품이 넓어질 수 있고, 사랑의 매듭이 더 단단해질 수 있다.
    가깝게는 시아버님을 돌보는 모습에 남편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 게 바로 그 예.
    남편이 내가 친정 아버지 수발을 드는 내내 한결같이 나를 지지해주고 지켜준 것도 그렇다.

    남편과 나는 몸은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다. 비록 몸은노년의 입구에 서 있을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아직도 젊기만 하다.
    20 대의 마음이 그대로이다.
    우리를 첫만남에서 엮어준 젊은 날의 ‘천성’은 변하지 않고 있다.

    곧 우리가 ‘본마망’이 되고 ‘사브타’가 되겠지만
    그 전에 우리는 계속 배풀 수 있는 젊음을 만끽 할 것이다.









    엊그제 아버님이 휠체어에 타시고 긴 도시 산책을 즐기셨다.

    생전의 친정아버지와 에릭. 에릭은 아버지를 위해서 호수만이 아니라 동네 골목 구석구석을 모시고 다녔었다. 조금이라도 더 새로운 것을 보여드리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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