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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빅토리아 이야기 (6) --섬김의 인연
    부모님 이야기 2019. 2. 22. 17:09


    내가 빅토리아와 같이 다닌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차가 없어서였다. 캘리포니아의 대중 교통 시스템은 한국에는 비교가 안되게 낙후되어 버스가 드문드문 다니며, 버스 노선도 많지 않아서 불편하기 짝이없다.

    두 군데 직장을 다니는 빅토리아는 길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하루에 5 시간을 길에서 보낸다. 그러니 암환자인 그녀가 몸이 많이 지치는 것은 물론이고 효율적으로 병원의 일처리를 없었다. 


    내가 빅토리아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빅토리아는 내가 매일 같이 다닐 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혼자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내 도움이 꼭 필요할 때만 나와 같이 다니려고 했고, 방문해야할 병원과 사무실이 정해지면 맨 먼저 주소과 버스 노선을 확인하여 자기가 혼자 갈 수 있는가를 알아보았다. 암수술을 할 병원이 정해진 뒤 그녀는 주소를 보더니, 


    "아, 잘됐다. 혹시라도 항암치료를 받아야할 경우에, 이 병원은 내가 혼자 다닐 수 있겠네요. 집에서 30 분 걸으면 병원가는 버스가 있고, 40 분 버스 타면 병원에 도착할 거고, 정류장에서 병원가지 15 분-20 분 잡으면...넉넉잡아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어요" 라며 기뻐했다.


    차로는 20 분이면 가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병원인데  시간 반이 걸리더라도 남의 도움 없이 있다는 그녀에게는 마음이 놓이는 일이었다. 


    극빈자 보험을 받는 그녀는 정말 돈이 없었다. 병원 가는 날이 많아지면서 시간제로 받는 급료를 포기하다보니 돈으 스트레스가 적지 않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작은 돈이라도 나에게 페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빅토리아와 다닐 우리는 다투곤 했다.


    주차요금당시에 나도 작은 액수의 돈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했던 때였다. 나도 내가 일로 병원에 때는 좀 멀어도 길에다 공짜 주차하고 걸어서 병원에 가던 때였다. 그러나 우리는 내내 빅토리아의 직장과 병원 사무실을 오가면서 촌각을 다투는 처지니 가까운 곳에 주차하기 위헤서 한번에 1 불이나 2 불하는 주차비를 낼 가치가 있었다.


    어느 병원 옆에 하루 종일 주차에 3 내는 곳이 있었다. 병원에서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분명 두 시간은 넘게 있을 것이었고, 병원 주위에 공사가 한창이어서 무료 주차를 하기 위해서는 아주 멀리까지 가서 주차하고 걸어야했다. 빅토리아는 그래도 멀리가서 주차하자고 했다. 내가 오늘은 시간이 없다며 미터기에 돈을 넣었더니 빅토리아가 단단히 화가 났다. 다음번에는 자기가 내겠다고 하더니만 그 후에도 주차비 생각만 하고 있었는지, 이틀 후에 내가 어떤 병원 사무실과 전화로 예약을 하는데, "마담싱쥬, 이번에는 내가 주차비 꼭 낼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라고 다짐했다.


    나는 남에게 끼치는 것을 원치 않는 빅토리아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고 가능한한 존중하려했다. 그래서 그녀가 혼자 있는 일들은 혼자 하게끔 두었다. 서류를 기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불필요한 항목에 기입을 하거나, 같은 서류를 쓰는 일이 있었지만 그런 일은 문제가 아니라 싶었다. 수술 전에도 자기가 혼자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왕복 40 거리를 시간 넘게 다녀옴) 등록 절차를 혼자 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면서 나에게 전화해서 먹어야하는 약들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자기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해달라고 해서 다음 읽어보고 정확치 않은 부분을 설명해주기만 했다.


    5 2 아침 7 시, 빅토리아의 수술! 아침 일찍 가서 마취하기 전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친구 인디라, 로사 (빅토리아한테 '암만 꺼내고 자궁은 사/수/하/라!' 종용했던 친구)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기다렸다. 수술은 시간 만에 끝났다. 사람들은 그게 좋은 징조라고 했다. 암이 번졌을 가능성이 크단다수술이 끝난 마취가 약간 풀린 상태의 빅토리아를 2 분여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수술 후 빅토리아는 요리사, 청소일을 그만두어야했다. 자궁 적출 후에는 솥과 물동이같이 무거운 것을 들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빅토리아에게 수입원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의 젊은 친구들 —인숙이와 은영이—가 선뜻 수백불의 돈을 기부했다. 빅토리아에게 큰 응원이 되었다.


    몇 달 후 10 월에 출산을 한 나의 친구가 유모를 구할 때 나는 아기들을 본 경력이 오래된 빅토리아를 서슴없이 추천했다. 자궁을 잃는다고 눈물 흘렸던 빅토리아는 자궁을 잃은 뒤에 오히려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안고 돌보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후 우리는 몇 번 만났다. 빅토리아가 채혈사 자격증을 땄을 때 졸업식을 가 축하했고, 직장 인터뷰를 준비할 때 좀 도와줬다. 그 이후로는 각자의 삶이 바빠져 만나지 못했다. 


    10 년 후 아버지 간병 건으로 연락을 했을 때, (나중에 알게 된 바) 빅토리아는 1 년 전에 어머니를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마마는 멕시코의 둘째 집을 방문하러 갔다가 갑자기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되었고 미국에 돌와오지 못한 채 짧은 투병 뒤에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가 미국 여 중에 낙상하셔서 영원히 한국에 돌아가시게 것과 흡사했다.) 평생 엄마를 모시고 살아온 빅토리아는 급작스레 엄마를 떠나보낸 뒤, 깊은 슬픔을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홀로 애도하던 중, 내가 아버지 건으로 연락한 것이다.


    빅토리아는 이후 3 년간 아버지를 자신의 아버지인양 정성으로 모셨다. 마마가 멕시코에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원만큼 돌봐드리지 못한 한을 나의 아버지한테 풀기라도 하는 양, 친부모에게 하는 정성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나는 빅토리아가 자궁을 잃은 뒤에 아기를 안게 되었고, 자신의 어머니를 덧없이 잃은 뒤 아버지를 돌봐줄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신비로운 인연/축복이라고 여겨진다)


    아버지가 운명하신 , 빅토리아는 새벽 4 시 반,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 아버지의 뺨을 쓰다듬고, 아버지의 뺨에 자기의 뺨을 대고 눈물 흘렸다. 6 시 반 경, 장의사들이 와서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터로 모시기 위해서 준비하는 동안, 그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나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방 안에 빅토리아가 있어서 내가  믿고 마음을 놓을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시신이 집을 떠난 뒤에 우리 식구들이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죽음의 충격으로 얼떨떨해하며 앉아 있는 동안에 그녀는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 방의 쓰레기통의 기저귀를 버리고, 옷을 정리하고, 침대의 담요를 개어 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그것 하나만 보아도 지난 3 년간 빅토리아가 어떻게 아버지를 돌보았는지를 알 수 있다. 남이 보던 안보던 묵묵히, 온 정성을 다해 일하는 빅토리아의 보살핌을 3 년간 받은 아버지는 천복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빅토리아는 나의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분명히 빅토리아가 누군가를 섬겼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에게는 돌봄, 섬김, 봉사가 천성이기 때문이다.


    수술 한 달 후 경과를 보려고 의사에게 가 검사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빅토리아가 엘리베이터에서 전단지 장을 뜯었다. 뭐냐고 물었더니 빅토리아가 대답했다.


    병원에서 자원봉사자 구한다고 해요. 혹시라도 내가 도울 있는 있나해서…”


    그게 빅토리아이다. 언제든지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수술을 하고 나오면서 자신이 남을 위해 있는 일이 있는가를 찾는 그런 섬김과 봉사의 마음을 가진 빅토리아. 바로 그래서 그녀는 10 나의 전화를 받자마자 한숨에 달려와 3 아버지를 그렇게 정성으로 돌본 것이다. 


    나는 빅토리아의  덕에 그녀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 덕에  아버지는 죽음 이후의 순간까지 존엄성을 지킬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제 빅토리아가 늙으면 내가 빅토리아에게 섬김으로써 보은할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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