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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치는 생각 2020. 1. 17. 01:57

     

    시댁에 가기 전, 어머님께 원하는 게 있냐고 여쭈었더니 아버님이 반코트 위에 입을 '가벼운 방수 자켓' 을 구해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겹겹히 입으시려면 번거롭지 않으시겠는가, 아예 방수가 되는 겨울 반코트를 사면 어떻겠냐고 했는데 어머님이 거부하셨다. 이미 모 반코트가 있으니 돈 낭비하지 말라고.

    나도 그 코트를 안다. 24 년간 입어오셨으니까. 낡고 무거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노인이 밖에 산책을 나갈 때 무거운 모직 반코트 위에 꽉 끼는 방수 자켓을 입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고, 산책 나가는 게 귀찮은 일이 되어버릴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님이 밖에 나가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신다던데..

    에릭더러 어머니의 명을 어기고 새로운 코트를 사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두 차례에 걸쳐 자켓 쇼핑 대 장정에 나섰다. (연말 쇼핑으로 붐비는 쇼핑센터 다니는 것은 정말 고역ㅠ)  

    백화점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게를 돌았는데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버님이 원하는 길이와 스타일이 있다.) 간신히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더니만 사이즈가 맞는 게 없어 결국 마땅한 사이즈가 있는 가게를 찾아보니 30 분 운전해야하는 거리, 예약을 하고 밤늦게 가서 자켓을 사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자켓이 좀 너무 얇은 것같았다. 며칠 고민하다 에릭에게 새 자켓을 사자고 제의했다. 브러셀 기후를 생각해보면 이 자켓은 늦가을에 딱 맞는 그런 따뜻한 자켓이었고, 영하로 내려가는 추운 날씨, 특히 추위를 잘타는 아버님을 따뜻하게 보호해줄 수는 없으니 새 자켓을 사자는 나의 제안에 에릭은 담박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럼, 이 자켓을 또 반납하러 30 분 걸려 가야하잖아. 그냥 이 자켓으로 하자." 

    라고 한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아버님께 맞는 자켓을 사는 게 목적이지 당신 운전 덜하는 게 목적이야? 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고 물었다.

    "에릭, 한가지만 말해줘. 이 자켓이 아버님께 충분히 따뜻할까 아닐까?"

    에릭은 다시 입어보고 쓰다듬으면서 검토해보더니만 이 자켓이 아주 따뜻하지는 않다고, 늦가을 용으로 적합하다는 나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했다.

    "그럼, 나는 겨울용 자켓을 사드릴래."

    라고 했다. 에릭은 다시금 반대 의견을 냈다. 아버님은 모 자켓이 있고, 브러셀에 추운 날이 얼마나 많다고 이미 자켓이 있는데 또 자켓을 사는 것은 낭비이고 어쩌구 저쩌구....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내 입장을 표명했다.

    "지금 자켓 두 개를 사드리는 것은 아버님께 '심리치료' 효과가 있어. 아버님은 요즘 몸이 편찮으셔서 우울하신 분이야. 밖에 나가서 걷는 게 힘들고, 몸이 예전같지 않으셔서 우울하시잖아. 아버님이 옷이 좋아서라도 밖에 나가고 싶게끔 멋진 옷 사드리고 싶어.

    그리고 요즘 아버님이 '나는 이제 다 되었다' 식으로 말씀하신다던데, '아버님, 왜 말도 안되는 소리 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아버님의 생각을 막아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이 코트로는 한겨울에 따뜻하게 지내시고, 저 코트로는 내년 가을에 비오는 날 잘 입으시라고 함으로써 아버님이 오래 건강히 사시는 걸 당연한 사실로 만들어버릴 수 있어. 여하간, 지금 이 싯점에서 코트 두 개로 아버님의 마음을 좀 위로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가치있는 투자라고 생각해."

    에릭이 내 말을 이해하는 듯했다. 나는 내가 평소에 해오던 생각을 에릭과 나누었다.

    "에릭, 2015 년, 아버지 사고 나기 전에 아버지랑 어머니 모시고 크루즈 다녀왔던 것말야, 내가 왜 그 크루즈 계획한 건지 알아? 조용하고 단조로운 삶 가운데 이제 죽을 날이 얼마 안남았다고 막연하게 생각하시던 부모님의 삶을 기다리고 좀 뒤흔들어놓으려고 한 거였어. 어르신들이 다 그런가봐.  엄마 아버지도 그전에 신발, 옷 사드리면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 이제 신발같은 거 사지 말아라,'  '이런 거 이젠 필요 없다. 죽을 때까지 있는 옷만 입어도 된다' 라고 하셨었거든.

    그런데 크루즈를 가기로 하니, 혹시라도 본인들때문에 여행 취소해야하는 일이 생길까, 딸과 사위에게 민폐가 될까봐,  건강을 유지하려고 많이 노력하셨잖아? 그러면서  삶이 달라지셨어. 죽음에 대해 골몰하시기보다는 가까이 다가오는 새로운 즐거운 목표에 골몰하게 되셨지. 참 긍정적 경험이었어.

    나는 아버님도 그렇게 되셨으면 좋겠어. 지금 몸과 마음이 많이 쇠약해지셨지만 아버님도 그런 쇠약함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삶에 뭔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일은 존재할 수도 있고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드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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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년, 나는 당시 이미 연로하셨던, 당시 한국에 살고 계시던 부모님이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계획을 세웠다.  12 일간의 스칸디나비아/러시아 크루즈 여행. 먼저 한국에서 미국으로 와 시차 적응을 마치고 몸이 건강해진 뒤에 유럽으로 가 크루즈를 탄다는 계획이었다. 에릭과 내가 동참하므로 이제까지 우리가 한 가족 여행 중에서 가장 경비가 많이 나가는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꼭 해야할 것같았고 아주 잘한 여행이었다. (그 경험으로 크루즈는 내 여행 스타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앞으로 절대 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지만...그것도 해봐서 안 것이니 오케이!)

    그 원대한 계획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되었다. 어느날 워즈워스의 시를 읽던 중,  30 년 전 독신이었던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워즈워스가 살았던 '호수지방'을 여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60 대 말엽의 아버지는 워즈워스의 발길이 머물렀던 땅을 밟고, 꽃을 보고, 호수를 거닐면서 감격했었지... 어느날 이른 아침, 아버지와 함께 산책을 나갔는데. 안개가 오르는 호수의 정경의 고요한 아침이 너무도 아름다웠지...떠올리다가 내가 그때 아버지께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버지, 너무 아름답네요. 지금 이 순간이...먼 훗날 제가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그리워할지가 이미 상상이 되어요. 아버지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이 순간을...." 

    30 년이 지난 뒤 그 말을 곱씹어보면서 나는 뭔가 불편했다.

    '왜 나는 아버지께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라고 했을까? 왜 그렇게 단정지어버렸지?'

    라는 안타까움은 곧

    ''아니, 왜 못가? 맘 먹으면 갈 수 있잖아? 나이 먹었다고 못할 일은 아니잖아? 부모님께 한번 같이 도전해보자고 이야기할까?'

    의 생각으로 이어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부모님께 근사한 도전이 될 것같았다. 팔순이 넘은 뒤로는 미국에 오는 것 말고는 다른 여행을 일체 포기하지 않으셨던가.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열차 노선, 숙소 등을 혼자 찾아보면서 이런저런 계획을 해보았다. 그런데 문득 이게 가치가 있는 여행인가? 싶었다. 호수지방의 자연은 아름다우나 그걸 위해 많은 시간, 경비, 노력, 그리고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 갈 가치가 있을까?  

    이왕이면 두분께 좀 더 많은 자극을 줄 수 있는 여정이 없을까?? 그러나 걷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는 아버지를 위해 좀 편안한 여행이 없을까?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크루즈 프로그램을 찾은 것이다.

    화상채팅을 하던 중 부모님께 크루즈 여행을 제안하니 단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네가 돈 많이 써서 안된다가 첫째 이유, 우리는 이미 보고싶은 거 다 봤으니 더 이상 그렇게 비싼 여행은 안해도 된다가 둘째 이유,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긴 여행을 할 수 있겠느냐가 세째 이유...못가고 안갈 이유는 많기도 했다.  이해는 갔다. 일단 미국에 오셔서 시차 적응 하고 건강을 관리하신 뒤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가야하는 것이니 위험부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을 설득했다. 딸과 사위가 잘 돌봐드리겠으니 걱정마시라고...

    부모님이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뒤, 그들의 삶은 달라졌다. 이전까지 그들은 미국에 사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책임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으나 여행이 결정된 뒤 부모님은 올림픽 준비하는 국가대표 선수의 마음가짐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았다. 부모님의 아파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건강 관리를 하고, 운동을 하여 근력을 기르고, 식이요법으로 혈압과 당뇨를 관리하는 일종의 '올림픽 준비 태능 선수촌'이 되었고.

    '저 멀리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있지?'라고 하면서 보이지 않는 종착역을 보려고 어떻게든 보려고 애쓰던 부모님은 '죽음' 이란 역 대신, 잠시 후 훌쩍 다가올 '로스엔젤레스' '코펜하겐' '오슬로''스톡홀름'이란 역을 상상하면서 삶이 활기차졌다.

    부모님과 여행을 하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그 '활기' '목적성' 때문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여행계획은 성공이었다. 언젠가 올 죽음이라는 처절하고 막연한 '데드라인' 대신에 딸과 사위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는 즐겁고 구체적인 데드라인에 집중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부모님이 여행을 위해 우리집에 오셨다. 이미 그 언제보다도 건강하셨다. 나는 크루즈 여행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휠체어도 준비했고,  아버지가 목욕할 때 앉으실 수 있는 간이 의자도, 영양제도, 비상약품도 다 준비했다. 

    아, 하나 더 준비해야할 게 있었다. 

    정장과 드레스.

    크루즈 프로그램에 정장/이브닝가운 만찬이 두 번 있었다. 나도 에릭도 개인적으로는 아주 싫어하는 그런 프로그램 이었으나 (실제로 에릭은 벽에 머리를 박아가면서 '이런 거 왜 하는가' 라고 울부짖음), 나는 부모님께 새로운 자극을 드린다는 차원에서 그날 우리 모두 정장을 입자고 했다. 이참에 우리도 새로운 것은 다 해보자고 하면서.

    옷도 간단히 준비했다. 나는 10불짜리 가짜 실크 셔츠에 10 불짜리 가짜 실크 바지를 입기로 했고, 엄마는 구세군에서 5 불에 산 드레스를 멋지게 고치시고는 허튼데 돈 안썼다고 너무 너무 너무 좋아하셨다.

    그러나 아버지 옷이 문제였다.  남자 정장은 세련되게 리폼하기가 힘드므로 싸구려 옷을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 정장을 새로 사드리겠다고 했다.

    부모님은 펄쩍 뛰셨다. 두분은 아버지가 이후로 정장 입을 일은 한번도 없을 것이다라면서 왜 그런데 돈 낭비를 하냐고 꾸짖으셨다.

    "그걸 누가 알아요? 애들 결혼할 때 입으시면 되지?" 

    참고로 막내가 고등학생이었고, 결혼이란 건 까마득한 일이었으나, 나는 다시금  부모님께 미래의 기쁜 일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죽음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우리가 꿀 수 있는 꿈은 꾸어야지. 내일 세상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오늘 나는 사과를 맛있게 사과를 먹고, 남은 씨로 사과 나무를 심을 것이란 말이다! 가 진리가 아니겠는가. 부모님은 하하 웃으셨다.

    아버지를 모시고 남성 정장 전문점에서 가볍고 부드러운 천의 정장을 골랐고 그들은 일주일 내 말끔하게 아버지께 딱 맞게 수선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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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즈 여행은 다리에 힘이 없는 아버지께는 쉽지 않은 여행이었다. 아버지는 휠체어, 난간, 지팡이를 번갈아가며 의지해서 여행을 했다. 그러나 여행 내내 부모님은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얻으시는 듯했다.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천천히 걷는 아버지를 보면서 가끔은 모르는 사람들이 엄지를 치켜세우고 응원해주었다. 

    지적 호기심에 불타는 아버지는 박물관, 공원, 궁전 등 새로운 곳을 방문할 때마다 황홀경에 빠진 표정으로 신기해하고 가이드의 말을 열심히 듣고 질문하면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했다. 여행이 끝나고 방에 돌아온 뒤에도 아버지는 늦은 시간, 이른 아침, 혼자 복습/예습을 했다. 

    당시 아버지의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거의 항상 같은 행복한 표정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걸을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곡예를 하듯이 아슬아슬 계단을 내려올 때조차도 아버지의 표정은 웃는 얼굴이었다.

    나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주 보았던, 어린 아이들만이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런 경이로움에 매료된 아버지의 시선을 훔쳐보면서, 나는 과연 저 연세에도 저런 표정이 가능하다니! 하고 감탄했다. 에릭과 내가 아버지께 크루즈 여행을 선물한 것이지만, 되려 선물은 우리가 받았다. 아버지는 경탄하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줬다. 하루에도 수십번 '이런 호강을...' '이렇게 잘해주다니..' '너무 고맙다'를 진심을 다해 표현해주신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경이에 찬 눈빛을 지금도 보석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드디어 정장을 입는 날이 되었다. 새 옷에, 새로운 상황에 익숙치 않아 약간 경직한 부모님께 사진기를 들이대었다. 엄마는 아름다웠고, 아버지는 정장이 잘 어울렸다. 오랫만에 아버지가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니 강단에서 가르치시던 아버지의 젊은 날이 생각나 마음이 좀 촉촉해졌다.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아버지께 엄마 어깨에 손을 얹으시라고 요구하니 아버지가 손을 얹으시고 환히 웃으셨다. 이렇게 부인의 어깨에 손을 얹는 것, 아버지는 평생 해본 적이 없으시다. 남편이 어깨를 감싸주는 일, 엄마가 평생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이다. 바로 이렇게 안해본 일들을 해보기 위해서 엄마 아버지를 내가 이 먼곳까지 끌고 온 거야, 호호~~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크루즈에서 돌아온 뒤 2 주 후에 아버지는 사고를 당하셨고,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셨고, 침대 신세를 지다가 3 년 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새벽, 나는 장례 회사에 전화를 했고 그들은 몇 시간 후에 와서 아버지 시신을 모시고 나갔다.  아버지는 아주 얇은 잠옷 위에 담요를 덮고 계셨고, 나는 아버지께 다른 옷을 입혀드리지 않았다. 즉, 수의를 입혀드리지 않았다.

    그 후 몇 달이 지난 뒤 엄마랑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한국에서는 시신에 예의를 다하여 수의를 입혀드리거든. 나는 아버지께 그걸 못해드린 것같아서 마음이 좀 불편했어."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가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몰랐었다. 아버지 시신을 모시고 나가기 전에 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인가? 내 입장은 그게 아니었지만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이해를 시켜드리지 못한 게 죄송스러웠다. 나는 엄마께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엄마, 제가 크루즈 갈 때 아버지 양복 새로 해드린 거 생각나시지요?"

    "물론이지."

    "저에겐 그게 수의였어요. 그리고 엄마,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계시는 동안에도 제가 아버지 신발이랑 옷들을 자주 샀었잖아요?"

    "그래, 아버지가 옷을 입을 일은 밖에 산책 나가는 두 시간 뿐인데 그걸 위해서 네가 아버지 옷을 사시사철 다 샀었지? 모자도, 신발도..."

    그랬다. 간병 도우미들이나 물리 치료사들은 아버지가 새옷을 입으면 예쁘다, 가볍다, 멋지다 칭찬했다. 심지어는 아버지 옷에 'Prof. Dae Kun Kang' 이라고 이름을 자수로 밖기까지 했다.  

    "엄마, 그 모든 게 저는 '수의'라고 생각해요. 언제 어떤 사고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었기때문에 매일매일이 마지막 같았고, 그래서 매일매일의 옷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해드리려고 했어요.

    그러나 엄마, 미안해요. 저는 살아계실 때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드리고 싶다는 마음만 갖고 있었지 돌아가신 뒤에 좋은 옷을 입혀드려 보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안했어요. 돌아가신 몸, 화장을 할 몸에 비싼 천을 감는 것은 돌아가신 분의 얼굴에 예쁜 화장을 해드리는 것만큼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는데...엄마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엄마는 내 마음과 말을 금방 받아들여주시고는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셨다.

    "네 말이 맞아. 살아계실 때 정성 다하고, 가능한한 단순하고 깨끗하게 보내드리고... 그런 게 낫다. 분명히 아버지도 너와 동의하시고 네가 잘했다고 좋아하실 거야."

    너른 마음의 엄마가 금방 이해를 해주셔서 다행이다. 나는 아버지 시신이 나가자마자 나를 비판하거나 불만을 표현하지 않으시고 본인의 생각을 거두어주셔서 모든 일들이 걸끄러운 일 없이 평화롭게 진행될 수 있게 해주신 게 감사했다.

    나는 엄마께 농담섞인 진담을 던졌다.

    "엄마, 그러니까 제가 자잘한 거 사드릴 때 '난 이런 거 필요 없다. 내 나이에...' 라고 거부하지 마세요. 엄마가 살아계실 때 엄마 예쁜 수의를 많이 많이 사드리고 싶어요. 정작 돌아가신 뒤에는 수의, 생략! 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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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러셀에 계시는 시아버님을 뵈러 연말에 가는 이유도, 시아버님께 자켓을 두 개를 사고 싶은 이유도, 이제까지 여행할 때 딱히 챙겨가지 않았던 선물들을  바리바리 준비하는 것도, 그리고 시아버님이 내년에 미국에 오시라고 설득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해볼까 고민하는 이유도 살아 계실 때 모든 정성을 다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나중에 비싼 수의로 몸을 감싸고, 화려한 장례식 해드리는 대신에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자....

    브러셀 가기 전 며칠 동안 계속 여기저기 다니면서 아버님 자켓을 찾았다. 어느날, 나는 한눈에 확! 들어오는 자켓을 발견하였고,, 그냥 눈대중으로 '이게 아버님 것이다' 라는 확신이 왔다. 뛸듯이 기뻤다. 집에 와서 에릭에게 입혀보니 약간 작은 게, 분명 아버님께는 딱 맞을 것같았다.

    브러셀에 도착해서 부모님과 식사를 한 날, 자켓을 선물받은 아버님은 눈이 휘둥그레지셨다. 아버님은 평생 베이지색 계통의 자켓을 입어오셨는데 그런데 빛이 차르르한 검정색 자켓을 입으시니 건강하고 젊어보였다. 사람들이 다 '와!' '오!' 탄성했다. 젊어보이신다는 말이 압도적 평.  

    에릭이 신나서 내가 자기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재생했다.

    "빠빠, 이건 올 겨울에 입으시고, 이건 내년 가을에 입으세요. 요즘 옷들은 아주 가벼워요. 그러니까 몸이 어서 나으셔서 이 옷입고 산책 다니시고 날씨가 좀 풀리면 저 옷을 입으세요."

    그리고 또 하나의 서프라이즈 선물을 드렸다. 아이패드.

    아이패드는 내가 책의 인세로 받은 돈을 어떻게 하면 잘 쓸까 고민하던 중, 아버님께 새로운 세상을 열어드리자 맘 먹고 산 것이다. 아버님께 아이패드, 어머님께 핸드폰 선물. 나도 인세를 의미있게 쓰게 되어 뿌듯했고, 에릭은 무척 감사해했다.

    "아...이건 정말... 나는 이미 늙었는데....나를 위해서  연말에 브러셀까지 와주고...자켓에...아이패드에....내가 이거 입고 산책 열심히 하마!'라고 고마워하셨다. 

    친정 아버지를 돌본 경험이 아버님의 상황을 이해하고 아버님의 몸에 맞는 것들을 찾아드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아버님은 균형을 잘못잡으시지만 지팡이 드는 것을 꺼려하셨는데 아버님이 좋아하실만한 깔끔한 디자인의 지팡이를 사다드렸더니, 한참 이야기 뒤에 설득되셔서 지팡이를 들겠노라 약속하셨다. 또한 밤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날 때 허리가 아픈 아버님께 누워서 소변기를 쓰면 얼마나 편한가를 (소변기 안에 내 손가락을 넣어가면서) 설명해 아버님께 충격 요법과 동시에 '세상에 내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라는 사고방식을 전파했다. 어머니와 아버님과 나는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어머니가 '우린 최근에 이렇게 웃은 적이 없다'고 하셨다. 우리가 앞으로 아이패드로 화상채팅 자주 할 것이니까 앞으로 웃으실 일 더 많을 거라고 해드렸다.

    예전에 부모님에게 크루즈 여행이 그들의 사고방식을 뒤흔들어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에 연연하기보다 현재의 삶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듯이, 시부모님께도 새로운 자극을 찾아드리고, 그래서 삶의 즐거움을 회복하실 수 있게 돕고 싶다.

    엄마, 시부모님, 시이모님들, 살아계실 때 더 잘해드리고 싶다. 그들이 미래를 바라보면서 보이지 않는 죽음을 찾으려드는 대신, 현재, 그리고 가까운 미래의 일상들에서 여전히, 영원히 존재하는 작은 기쁨들을 찾아내고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실 수 있게끔 부모님과 엄마, 시이모님들이 마음 편히 의존할 수 있는 지팡이가 되어드려야겠다 마음 먹는다. 고급 수의 대신, 같이 나눈 신나고 아름다운 경험과 같이 나눈 감사의 기억으로 그들의 몸을 곱게 덮어드리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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