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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병수발과 사마리아인의 이웃사랑
    부모님 이야기 2019. 2. 25. 08:28


    (2017. 04.) 아버지 돌아가시기 1 년 반 전. 


    주위에 집에서 병수발 드는 사람이 없는지라 우리집 일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다. 수발에 대한 일반적 반응은 ‘너무 힘드시겠어요’ 이다. 내가 엄청난 희생을 한다고 칭찬도 자주 듣는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애들도 나중에 자매님처럼 날 부양해줄까?’ 하고 농담삼아 진담을 한 분도 있고, 자신이 이기적이라 부모님을 품지 못했다고 반성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동갑내기인 필리핀 친구 다이앤은 나의 희생을 우려했다.


    “정말 괜찮다고? 일에 너무 빠져있는 거 아니야? 너 스스로를 챙겨야지. 신주, 너의 부모님이야 좋으시겠지만, 네 희생이 너무 커.”


    나름 나를 챙기면서 일하고 있는데 같은 지붕 아래 살지 않으니 증명할 길이 없다.  부모님 모시는 일을 숭고한 희생처럼 보는 것도, 아니면 커다란 개인적 손실로 보는 것도 나에게는 불편한 시선이다. 내가 꼭 희생하는 건 아니라고 했으나 다이앤은 “너는 희생을 합리화하는 것일지도 몰라. 우리 동양 여성들의 문제야" 라고 못을 박았다. 그녀가 날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녀도 이해해야할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난 물었다.


    “다이앤, 이제까지 내가 너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적이 있어?”


    “물론이지! 내가 네 도움을 어떻게 잊겠어! 내가 대장암 걸렸을 때 한동네 사는 시누는 나 몰라라 했는데 넌 우리애들을 데려다가…”


    “그렇다면 이렇게 좀 봐줘. 만약 이제까지 우리 관계에서 내가 너와 너의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너를 도와준 ‘나’와 지금 우리 아버지를 돌보고 있는 ‘나’ 라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기때문이야.  내가 지금  아버지를 돕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에 옛날에 너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발벗고 나섰던 거야. 그때도 희생한 게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야.아버지든, 친구든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니까.”

     

    다이앤은 그 때 잠시 '아...' 하는 표정이었다. 그 이후로는 효도, 희생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오랫만에 만난 셰리라는 친구는 내가 부모님과 같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대단해!' 라고 하더니, 자기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무남독녀이고, 그녀의 엄마는 싱글맘으로 그녀를 키웠다.) 


    "난 나중에 절대로 엄마를 우리집에 안 모실 거야. 그런 희생은 자신이 없어. 오히려 친구라면 돕겠어.  실제로 남편이랑 나는 얼마전까지 실직한 친구를 우리집에서 1 년간 살게 해줬어." 라고 했다.


    위의 두 대화는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일이라서인가, 나는 이들의 대화를 묶어서 떠올리곤 했다. 나는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미화하고 종용하는 사회의 압력을 경계해야한다는 다이앤의 입장에 찬성한다.  또한 셰리가 평생 해결되지 않은 엄마와의 문제를 직시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선을 그어서 엄마가 노후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합리적이고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은 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같았다. 왜일까? 나와 다이앤과 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이앤이나 셰리는 '부모'를 모시는 것'과 '친구를 돕는 것'을 완전히 다른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것같다.  다이앤도, 셰리도 이웃과 친구를 돕는 것은 대단한 희생이 아닌, 훈훈한 선행으로 보았지만, 병수발이라던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경계해야할 희생으로 보았으니 말이다. 셰리와 달리 나는 부모님이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다. 


    그렇다. 나는 부모님과 아주 친한 친구사이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사회적 정의로는 현재 나의 상태가 "딸이 부모님 모시는 것" "딸이 아버지 병수발 드는 것" 이지만, 현실에서 나와 부모님은 무겁고 진중한 '효'로 엮여진 관계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친구에게 도움을 주는 친구의 관계--즉,  셰리가 사랑하는 친구에게 무상으로 숙식을 제공하는 마음과 내가 부모님을 모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나는 다이앤에게 내가 이웃을 돌보는 마음이나 아버지를 돌보는 마음이나 한 마음이라고 했다.   이제까지 내 삶에서 만난 여러 이웃들처럼. 30 년 전 이스라엘에서 유학시절, 사라 할머니가 치매로 요양원에 있을 때 말벗 해드리고 목욕을 시켜드린 것, 나디아 할머니의 영주권 신청을 도운 것, 빅토리아가 암수술을 받을 수 있게 도운 것, 바바라 할머니의 개, 진저를 돌봐주는 것—나는 나의 이웃, 나의 친구를 도운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의 친구, 강대건 씨를 돕는 것이고. 다른 친구들과 달리, 강대건 씨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셀 수 없이 많은 도움을 준 은인이다. 이제 내가 그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같이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내 친구라고 부르고, 내 이웃으로 섬길 수 있는 것은 특권이고 축복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부모님께 그렇게 잘하는가' 라고 물을 때 내가 꼭 이야기하는 것은 '당신이 나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두었다면 당신도 그럴 것이라' 고 대답한다. 그래서 나는 나처럼 부모와 편한 관계가 아닌 셰리가 엄마와는 절대로 살지 않겠다고 할 때 그 마음을 이해한다. 그 누구도 '억지로' '떠밀려져서' '그냥 그래야한다고 하니까' 수발의 임무를 지게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전제 하에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있다. 병수발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편견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희생’이란 개념과 단단히 묶여져 있다는 사실이다.  ‘늙으면 죽어야지’ ‘자식에게 똥수발 시키느니 죽는 게 낫다’ 식의  보편적 진리인양 통용되는 말들은 정작 수발을 들기도 전에 은 노년과 병수발을 모두 불행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수발에 대한 두려움, 거부감은 노년에 어떻게든 살고자 애쓰는 약자들의 노력을 냉정한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 '똥오줌 못가리면서 명이 질긴 건 저주' 라는 사고를 갖고 사는 사람이나, 그런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나, 수발은 지옥 체험이 되어버린다.


    나는 희생이라고 하는 개념과 수발을 함부로 엮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노년과 수발에 관한 부정적인 말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고, 또한 수발은 무조건 희생이라고 여겨 칭찬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함을 의미한다. 그리고---이게 내가 가장 노력하는 것이기도 한데--돌보미도 헌신을 해 열심히 일을 하되 수발이 꼭 희생이 되지 않게끔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전에 성경을 읽던 중, 우연히 병수발의 좋은 예를 발견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사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어떤 관점으로든 수발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수발의 경험 덕에 나는 이제까지 내가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소리다.


     ’선한 사마리아인 법’ (도움을 받는 이가 뜻밖에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했을 때 도움을 준 사람이 손해배상과 처벌에서 보호해주기 위한 법) 이 그 예화에 의거해 생겨났을 정도로 비기독교인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정확히 어떤 이야기인지 한번 나눠보고자한다.



    ---누가복음 10: 25-37 을 풀어서 썼음--



    한 유대인 율법학자가 예수한테 물었다.


    율법학자: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예수: "율법에서는 그 방법이 무어라고 합니까?"


    율법학자: "하나님을....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수: "그 말이 맞습니다."


    율법학자: "그렇다면 저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는 대답 대신에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사람이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옷을 벗기고, 마구 때려서 반쯤 죽여놓고 

    가버렸다. 길을 가던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피해서 다른 길로 갔다. 두번째로 (제사장을 도와 성전의 일을 담당하는) 레위인도 그를 피해 다른 길로 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처한 피해자를 보고 가엾게 여겨 그에게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싸매어주고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간호해주었다. 심지어는 다음날 길을 떠나기 전 그는  여관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가 끝난 뒤 예수가 물었다.


    예수: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피해자의 이/웃/입니까?” 


    율법학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 ‘당신도 가서 똑같이 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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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는 깊이 숙고할 필요없이 파악되는 명백한 주제가 있다. 제사장, 레위인과 같은 지도층에 속하는 종교인의 위선,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이웃이 되어야하는가....그런데 그런 주제 대신에 내눈을 사로잡은 것은, 이제까지 내가 한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유대인 피해자의 묘사'였다.


    강도에게 모두 빼앗기고 옷이 벗겨지고 맞아서 반쯤 죽어 있는 강도의 피해자. 그 묘사를 읽으며 나의 뇌리에 낙상한 직후의 아버지의 모습, 죽음이라는 강도를 만나 넘어져 찻길에 쓰러져 의식이 잃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팔이 부러졌고, 손발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었고, 옴짝달싹 못하게 된 가엾은 아버지는 유대인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사마리아인의 응급처치도 나에겐 새로운 의미로 읽혀졌다.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피해자의) 상처에 붓고 (붕대로)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것은 내가 매일매일 하는 병수발의 여러 다른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부러진 팔을 붕대로 보호하고, 몸을 깨끗이 씻고, 항상 소독하고, 온 몸에 로션을 발라 욕창이 안 생기게 하고, 차로 병원에 모시고 다니고, 집에서 내내 돌보아드리는 게 나의 일이다. 사마리아인이 길을 떠나면서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고 자기 대신 돌봐달라고 하는 대목은 내가 간병 도우미들에게 돈을 지불하면서 아버지를 돌봐달라고 하는 것으로 읽혀졌다. 



    "사마리아인이 병수발을 든 거구나!"


    나는 이제까지 몰랐던 진리를 발견이라도 한 양 내심 외쳤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라는 말이 딱 맞는다)


    자세히 읽으면서 나는 사마리아인의 병수발의 주변 상황을  새롭게 음미했다. 


    강도의 피해자, 제사장, 레위인은 모두 유대인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천하게 여겨 멸시하고 어떤 관계도 맺지 않으려고 했다. 예수가 ‘누가 피해자의 이웃인가’ 라고 물었을 때 율법학자가 ‘사마리아인’ 라고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한 이유는  자기들이 그리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선행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차마 인정할 수 없어서일 수도 있다.


    율법학자의 질문--‘내 이웃이 누군가’---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뻔뻔할 정도로 이기적인 사고이다. 


    '내가 영생을 얻고 싶은데 율법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니, 어떤 이웃을 골라잡아 사랑을 해야할까' 의 심보이다. 


    찬밥 더운밥 가리듯이 내 마음에 맞는 이웃을 선택하려는 제사장이 만약 반죽음이 되어 길에 쓰러져 있는 사마리아인을 발견했다면? 율법학자의 기준으로는 천한 사마리아인은 그의 이웃이 아니므로 당연히 외면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어떠했나? 그는 자기의 이웃이 누구인가의 기준이 없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피해자가 보았고, 그 피해자가 유대인임에도 거리낌없이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자신을 멸시하는 종족인 유대인 피해자를 이웃으로 삼아 도와줬다는 면에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운 것은 단순한 선행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수의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하다. 


    '저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예수는'누가 피해자의 이웃이 되었습니까?' 라고 되묻는다. 또한 예수는 ‘사마리아인같/은/ 사람이 되/어/라’ 라고 하지 않고,  ‘가서 똑같이 하라 (Go and do likewise)’ 라며 이웃 사랑 행위의 실천을 강조한다.  이거저거 따질 것 없이 자비와 사랑의 마음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이웃을 삼아 도우라는 소리다. 이 예화에서 이웃은 두가지 모습이다. 유대인 피해자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 도 이웃이고, 사마리아인 처럼 ‘그 누구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도 이웃이다. 


    유대인 피해자나, 사마리아인이나,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살면서 우리가 처할 수 있는 상황과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다 보여주고 있다.  현재 아버지는 유대인 피해자처럼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고, 그것을 발견한 나는 사마리아인처럼 도움을 주는 상황일 따름이다. 사마리아인과 나의 다른점이라면, 사마리아인은 개인적 관계가 전혀 없고, 자기를 적대시하는 부류에 속한 유대인을 도운 것이고, 나는 핏덩이인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살려준 나의 아버지를 돕는 것이므로 나의 일은 '선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마땅히 해야할 일'에 속한다.


    예수는 사마리아인의 일이 ‘선하다’고 칭찬하지 않는다. (‘선한’ 이란 형용사는 인간들이 붙인 수식어이다). 나의 눈에도 그가 '선하다'라는 생각보다는 '이 사람, 참 일 잘하네~' 라고만 보인다.


    정말 사마리아인은 모든 일을 현명하게 했다.  응급처치, 밤에 환자 돌봐주기, 그 다음에 자기 대신에 누군가가 돌봐주게끔 조처하고 떠나기---정말 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쾅쾅 받아야할 일이다.  분명 그에게 약간의 불편함과 경제적 지출이 있었겠지만 그게 희생이 아님은 그 다음날 그의 처사로 확인된다. 그는 다음날 자기 계획을 취소하고 머물면서 환자를 돌보는 대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여관 주인에게 돈 주고 '병수발' 서비스를 샀음--을 하고는 자기 길을 떠났다. 보상의 기대 없이 남을 도와준 것, 차별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한 것, 불필요한 희생을 피한 것---다 참 잘했어요! 이다.


    나도 사마리아인이 자기가 선 자리에서 자기 눈에 보이는 이웃을 도왔듯이,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했듯이, 그렇게 살고 싶다. 내 삶에서 여러 이웃을 만났고 나는 도움을 받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했다. 지금 내가 돌보는 이웃은 운명적으로 나와 아버지라는 관계를 맺고 있는 강대건이라는 나의 이웃이다.  그를 돕는 게 ‘부모 병수발’이라는 무거운 ‘봉사와 희생’이라는 개념과 연상되는, 그런 거창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실제로는 나는 그저 도움이 필요한 나의 이웃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내가 아무리 붕대를 잘 말아도,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아무리 많은 간병 도우미를 고용해도, 나의 이웃 강대건 씨는 몸이 치유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의 돌아가시는 최후의 순간까지 마음만이라도 건강할 수 있게 잘 챙겨드리는 게 내 수발의 중심 목적이다. 이기적이고 성격이 고약하고 무례한 이웃이 미워 죽겠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때문에  미움을 꾹꾹 누르면서 돌보는 게 아니라, 매사에 감사해하고, 어질고, 착한, 그래서 사랑스럽기만한 이웃 강대건씨를 돌봐드릴 수 있어서 기쁘기 한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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