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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발이 즐거우려면---독립심, 감사, 돈!
    부모님 이야기 2019. 1. 26. 08:36

    아버지 수발을 들기 어떤 친구가 '신주씨네가 어렵게 사는 줄 알았는데 부모님 모시는 것보고 놀랐다'라고 했다. 에릭이 돈 많이 버냐는 말도 들었다. 수발을 드는 경우 자식들이 고생한다는 선입견 때문에 우리 돈 걱정을 하는 듯하다. 현재 엄청난 액수의 돈이 의료/간병비로 지출되고 있는데 대부분은 부모님이 내시고 나와 에릭이 생활비, 간병비의 일부와 물품비를 보조해드리고 있다.


    수발의 비용은 환자의 육체적/정신적 건강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땅덩이가 큰 미국에서는 사는 지역에 따라서도 차이가 많이 난다. 캘리포니아는 다른 주에 비해 비용이 높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에 아버지께 드는 간병비는 부모님 두분의 의료보험비 1800 불을 포함해 간병 도우미, 물리 치료 비용을 합하면 한달에 도합 700 만원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약값과 기저귀, 각종 의료용품, 생활용품의 가격은 포함하지 않은 액수이다. 다 포함하면 대략 800 만원 정도가 드는 듯하다. (2015 년 미국으로 오시기 전,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고 그외에 수입이 없이 은행 저금의 이자로 생활비를 충당했는데 20 여만원의 아파트 관리비 포함해서 한달에 생활비 100 만원 미만으로 쓰셨던 것을 고려하면 약 8 배의 돈이 필요한 셈이다)

    정부 보조는 전혀 없다. 저소득층이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지만 부모님이 한국에서 가져온 재산이 있어서 국가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고령의 미국 이민자들은 만만치 않은 의료비를 절약하려는 요량으로 자국에서 재산을 가져올 때에 지인들의 통장에 나눠 예치하고 자신들은 서류상 재산이 없는 것으로 해놓아 의료 혜택을 받는다고 하던데 우리는 그 방법을 택하지 않았고 그래서 혜택도 없다.

    그래도 엄마와 내가 수발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고 간병인을 파트 타임으로 쓰기때문에 입주 간병인을 두는 것에 비하면 훨씬 부양비가 덜 든다. 입주 간병인을 두고 있는 우리 옆집의 치매 할머니의 경우는 한 시간에 $22 (간병인 주선 업체를 통해 고용하기에 약간 더 비싼 액수임), 한달에 천 칠백만원이 넘는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거기에 기저귀, 식사, 약 등 여러 지출을 더하면 포함하면 가히 천문학적 액수가 된다. 할머니의 딸은 할머니의 집에서 5 분 거리에 가까운 곳에 살지만 엄마를 집에 모시는 것보다 하루에 한번씩 들러 잠깐 보고 가는 걸 선호했다.

    입주 간병인보다 조금 싼 게 요양원인데 그것도 싸지는 않다. 나의 친구 쥴리엣은 최근까지 집에서 부양했던 시어머니의 치매가 악화되어 동네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는데 싱글 룸에 한 달에 천 만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고 있다. 쥴리엣은 그렇게 많은 돈을 내도 개인 소지품이 섞이고 분실되는 일이 잦다며 한숨지었다. 치매인 시어머니는 옷이 바뀌어 남이 자기 옷을 입거나, 자기 옷이 아닌 옷을 입게 되면 분노하여 동료 원생들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해서 쥴리엣은 개인적으로 고용한 간병인을 요양원에 출근시켜 하루에 4-5 시간씩 할머니와 함께 하게 한다고 했다.

    엄마와 내가 좀 힘이 들더라도 아버지를 직접 모시기에 돈이 많이 절약되고, 아버지의 건강 유지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어서 우리는 현재의 시스템에 만족하고 있다. 부모님이 모든 비용을 지불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도와드리는 이유는 부모님의 정신적 건강때문이다. 아버지의 낙상, 급작스러운 이민에 이어 한국 생활비의 8 배가 되는 돈을 지출해야하는 현재 상황은 평생 절약하면 살아온 부모님께는 아주 힘든 일이다. (실제로 아버지는 초기에 우울증에 걸리셨었다.)


    돈을 간병인들에게 지불하는 현재의 처지는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도 우울증에 빠트릴 수 있다. 엄마가 은행에서 돈을 찾아오자마자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것을 보면서 내 가슴이 떨리는데 평생 안쓰고 살아온 엄마는 오죽할까.

    어느날 엄마께 물었다.

    "엄마, 돈이 많이 들어서 좀 너무 놀랍지 않으세요?"


    엄마가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놀랍지......그러나 괜찮아. 아버지가 평생 열심히 번 돈 아버지께 쓰는 건데 뭐."


    엄마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시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쓰려고 평생 그렇게 절약했나봐."


    평생 그리도 열심히 절약해서 모아둔 재산이 지금 이렇게 펑펑 쓰기 위하였다는 사실에 엄마가 아까워하고 불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안도되었다.


    그리고 엄마 말이 맞다 싶었다. 부모님의 근면과 저축의 평생은 지금 이순간--노년--을 위해서 모은 노후준비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모아둔 재산, '이렇게' 펑펑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재산이 있다는 것은 부모님의 독립심과 존엄성에는 너무도 중요한 요소였다.




    절약과 노후준비




    부모님 세대의 어르신들이 그러했듯이 엄마 아버지은 철저히 절약하고 저축했다. 엄마가 얼마나 절약했는지는 엄마가 내가 태어난 해부터 지금까지 57년간 꼼꼼히 써온 가계부에 다 기록되어 있다. 부모님 친구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돈을 '굴려서' 큰 돈을 만들어 보란듯이 살아도 부모님은 "우리는 돈버는 재주는 없다" 라며 선을 긋고 월급을 절약하는 것에 온 힘을 쏟았다. 아버지는 하루에 도시락을 두 개 싸들고 연구실에 갔고, 엄마는 속옷은 물론 티셔츠의 겨드랑이 부분이 헤어져서 속이 비칠 때까지 입었다. 옷 하나 살 돈으로 천을 사서 우리 삼남매의 옷을 만들고, 손뜨게로 만든 옷이 작아지면 실을 풀어 좀 큰 옷을 만든 엄마.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도 않고, 함부로 사지도 않으며, 갖고 있는 것은 깁고, 꼬매고, 개조하여 절약한다. 지금까지도 속옷, 양말, 덧신을 여러 번 기워입으시는 것은 물론이다.

    부모님의 절약은 '공짜'로 얻는 것을 거부하고 남에게 폐가 되는 것을 삼가하는 사고방식과 맞물려 있었다. 옳지 않은 방법으로 쉽게 들어오는 돈의 유혹을 뿌리치려면 절약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철없던 때, 우리집이 '서울대 교수'라는 번드르르한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누추하고 궁상맞다고 툴툴거리면서도 나는 청빈한 부모님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와도 거침없이 거부하는 모습을 내심 존경했다. 한 예로 아버지는 박사논문 심사 사례비. 아버지는 박사과정 논문 심사나 학위를 두고 학생으로부터 사례금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나 옛날에는 박사 심사 전에 돈봉투가 오갔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청렴하게 살 수 있게 해준 것은 엄마였다. 엄마는 없는 돈에 살림하느라 걱정으로 얼굴에 기미가 거멓게 올라왔어도 아버지께 돈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고, 그래서 아버지는 돈봉투를 거부할 수 있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일. 지긋한 나이에 박사학위 과정을 밟던 Y 선생이 논문심사 즈음에 돈봉투를 들고 왔다. 아버지가 예의바르게 거절했으나 그는 "다른 교수님들은 받으셨습니다. 저의 작은 성의를 받아주십시오" 라고 우겼다. 그 때 한자리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Y 선생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선생님, 저희가 20 년 전 태능 살 적에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웠어요. 그때 라면이 20 원 정도였는데 신주가 '계란 넣은 라면을 한번만 먹게 해달라'고 며칠간 졸랐는데도 안 줬습니다. 외상을 지지 않으려고요. 그때는 가게에서 외상갖다 쓰고 월급 나온 뒤 갚는 게 흔한 일이었고, 분명 동네 가게에서는 우리가 교수님 집이라고 선뜻 외상을 줬겠지만 외상을 지고 싶지 않았어요. 며칠 이라도 빚을 지고 사는 것이니까요. 이유없이 남의 것을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말에 Y 선생은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봉투를 집어 넣었다.

    우리에게 사랑을 퍼주는 다정한 엄마는 돈에 관해서는 엄격했다. 엄마에게는 '한번만 사달라' 이란 단어가 통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어느 추운 겨울날, 45 번 버스 (성림운수)의 동대문 종점에서 태능 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40 분- 1 시간이 넘는 배차를 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추워서 발을 동동 구르는데 바로 옆에 행상들이 피라미드 형태로 귤을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귤이 너무도 먹고 싶어 엄마한테 '이번 한번만' 하며 끈질기게 졸랐으나 엄마는 안 사줬다. (엄마는 50 년이 지난 후에 나더러 그때 귤 못사줘서 미안했었다고 했다.)

    어려서 우리집에서 금지된 말이 있었다. "엄마, 십원만" 이란 말이었다. 친구들은 자기 엄마한테 '십원만' 하고는 진짜로 십원, 아니면 그보다 더 큰 돈을 받아 사탕도 사먹고 라면땅도 사먹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십원도 소중히 여기는 엄마한테는 '십원만'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에게 섭섭하기보다는 그게 우리집의 규칙임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고 감사하게 되었다. 먼 훗날 내가 얼바인에서 제일 낡았다고 소문난 차를 몰고 다니면서도 창피해하지 않았고, 아이들 기를 살리겠다고 좋은 차로 바꾸지 않은 것은 분에 넘치는 삶을 살 필요가 없음을 실천한 엄마 덕이다 )


    엄마의 삶을 잘 알기에 '이렇게 쓰려고 그렇게 절약했나보다' 라는 엄마의 말씀은 아주 의미심장했다. 나는 엄마가 거의 만족하다싶을 정도로 담담한 이유를 안다. 평생 모은 돈이 고장난 수도꼭지에서 퀄퀄 흘러나와 수채구녕으로 빠져나가는 물만큼 허무하게 사라지더라도, 엄마는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니 만족한 것이다.




    자식에게 폐가 되기 싫은 부모님


    외상, 공짜 없이 평생 살면서 남에게 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부모님은 자식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은 종종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너희랑 같이 살지 않을 거다. 그게 우리한테 더 좋아.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할 거야'


    분명 부모님도 불투명한 말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엄마는 노년에 대한 두려움으로 2009 년에 잠시 우울증에 걸렸었다) 그 두려움조차도 자식들에게 떠맣기지 않고 본인들이 지고 가려고 했다. 언니와 나는 멀리 미국에 사니 자잘하게 챙겨드리지도 못해 죄송해했고, 부모님이 열심히 키운 자식들이 다 멀리 가서 살고 있으니 섭섭하실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웬걸, '어디서든 너희들이 행복하면 된 거지!' 라고 한마디로 끊어버렸다. 한번도 늬들이 우리를 부양해야한다, 용돈을 줘야한다는 식의 이야기도, 기대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 입장에서 자식 농사는 참으로 밑지는 장사였다. 그렇게 희생하면서 어렵게 자식에게 교육을 시켜주고 길러주고서는 다 큰 뒤에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다니.


    그러나 부모님이 희생을 하고 모든 정성을 다 하여 우리를 키우면서도 절대로 무리해서 낭비하며 도와주지는 않으셨다. 어떤 돈이든 정성스럽게, 거의 어떤 의식처럼 곱게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 삼남매는 부모님이 얼마나 희생하고 고생한지를 알기에 그것을 감사했고, 부모님께 함부로 손을 벌리지 않았다. 각자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직장, 결혼, 유학---다 알아서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이스라엘로 떠날 때 내가 저금한 돈으로 갔고, 이스라엘, 빠리에서 유학을 한 것은 미국에 비해 학비가 너/무/도 쌌던 이유도 있었다.) 결혼을 한 뒤에도 부모님은 우리 삼남매에게 결정적인 순간에는 경제적 도움을 주셨는데, 그게 어떻게 모은 돈인지 알기에 감사함과 미안함이 컸고 우리 모두 상습적으로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오빠, 언니, 나 모두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어쩌다가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면 부모님은 적은 액수인데도 감사함으로 받으셨고 소중하게, 의미있게 사용했다. 2 년 전에 미국으로 부모님 짐을 부치기 위해 정리 중에 나는 책장에서 오빠, 언니, 내가 여러 해에 걸쳐 부모님께 드린 돈의 봉투들을 발견했다. 대부분 빈봉투였는데 그 위에는 액수/날짜가 적혀있었다. 일부는 아직 쓰지 않은 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자식들이 준 돈을 감사해하고 잊지 않으려하고, 흐지부지 살림에 보태쓰는 대신에 뭔가 중요한 일 (임플랜트라던가 아버지가 원하시는 책이라던가)에 사용하려고 한 것이었다.



    자식에게 폐가 되지 않는 삶이란 건강관리도 포함되었다. 나이를 잡수면서는 부모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지팡이를 의지해 휘청거리는 다리로 매일 등산하고, 정기적으로 치과, 안과, 내과를 다니면서 (그것을 두분은 '땜질' 이라고 불렀다) 성실하게 건강 관리를 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큰 일을 막아서 아이들 염려시키지 않는다'시며 '우리들이 정말 잘하고 있지요?' 하고 두분이 자화자찬하며 행복해하셨다.



    부모님 연세가 많아지면서 노후가 염려되기 시작했다. 오빠, 언니, 나는 다 각기 다른 싯점에서 부모님을 모실 생각을 했었다. 언니는 오래 전에 나에게 ‘부모님은 내가 모시게 될 거야’ 라며 부모님이 의료보험에 대해 고민했다. 오빠는 10 여년 전 부모님께 살림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아버지가 팔순이 가까와지던 싯점에서 맏아들이고 자녀가 없는 오빠의 '합가' '부양' 제안은 합리적일 수 있었으나 엄마는 단호히 'No!라 하셨다. 본인들이 아직도 독립적으로 잘 살 수있으니 아들 며느리에게 부담주기 싫다는 이유였다.


    (그때 부모님이 합가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만약에 합가를 했었다면 오빠가 돌아가신 뒤에 부모님은 경제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을 수 있다. 나도 오빠의 재산 정리를 도우면서 알게된 사실인데 한국 상속법에 의하면 슬하에 자식이 없는 오빠의 재산은 아버지 2/7, 어머니 2/7, 부인 3/7 로 나누게 되어 있었다. 합가를 했더라면 부모님의 재산은 오빠의 재산과 섞여버렸을 것이고 부모님들은 자신들의 재산의 4/7 을 ㅇ오빠로부터‘상속’ 받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오빠와 합가를 하지 않았기에 부모님의 재산은 보호되었다. 또한 법적으로 두분의 몫인 오빠 재산의 4/7 의 상속을 깨끗이 포기해서 오빠의 부인이 전재산을 상속하게 하였다. 부모님이 오빠에게 부양의 의무를 기대하지 않고 오빠와 합가를 하지 않은 덕에 부모님의 재산도 보호되었고, 오빠의 유산도--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부인에게 온전히 상속될 수 있었다.)


    2013 년에는 오빠가 돌아가신 뒤 부모님은 한국에 두분만 남으셨다. 에릭과 나는 부모님을 미국으로 모시고 올 때가 되었다 싶어서 초청을 했다. 그날 엄마가 어찌나 차갑게 거절했는지, 그 차가움에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나는 아직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싫어!'라고 했던 엄마의 옆모습과 차가운 어조가 떠오른다. 엄마는 그날 말씀하셨다. 두 분 중의 한분이 돌아가셔도 미국에는 안 오겠다고 하셨다. '그냥 한국이 좋다. 한국에서 죽겠다' 라고 하셨다.


    엄마의 차가움에 섭섭하기보다는 부모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가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자식의 앞길에 걸림돌이 안되려는 배려의 마음을. 폐가 되지 않으려는 마음을..


    미국에 와 계시던 중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직후, 아버지가 거동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부모님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우기셨다. 에릭과 내가 간청을 했는데도...나는 (문자 그대로)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가 비행기에 누워서 타고가는 경비와 서류에 대해 정보를 구하고, 아버지가 한국 공항에 내리자마자 입국 수속 간소화하고 병원으로 갈 수 있게끔 사설 앰뷸런스 회사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운명할 가능성이 있는 심각한 상태' 라는 진단을 받아 한국행을 포기해야했다. 그 후 아버지는 본인이 자식에게 짐이 되었다는 사실에 절망해 우울증에 빠졌지만, 아버지 수발을 드는 게 에릭과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임을 점차적으로 알게 되면서 우울증에서 벗어나셨고 현재의 상황을 즐길 수 있기까지 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현재의 삶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이 본인들의 의료비를 지불할 수 있어서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쓰려고 그렇게 절약했다' 라는 말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진 부모님의 노후 준비의 성공을 의미한다. '십원'까지 아끼면서 평생 가계부를 쓰며 절약해온 덕에, 그리고 눈먼 사랑으로 자식들에게 무한대로 돈을 퍼주지 않고 돈관리를 철저히 한 덕에 부모님은 사위와 딸 집에 살면서도 '얹혀산다'는 기분 없이 떳떳할 수 있는 것이다.






    수발이 행복하려면


    부양을 당연히 기대하거나 요구하기는 커녕 경제적으로 본인들의 경제적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매사에 감사하는 부모님은 자식에게 폐가 될 수 없다. 폐가 되기는 커녕, 자식들에게 축복이 된다. 아주 단순한 일을 해드려도 그걸 두고두고 감사해하는 부모님은 나에게 신비하게 긍정적인 힘을 준다. 가까운 병원이나 시장에 모시고 가면, "이렇게 편하게 우리를 데려다주다니.. 고맙다. 내가 이렇게 호강해도 되는가 모르겠다. 고맙다. 네 시간을 뺏어서 어떻게 하니." 라고 말씀하신다. 약을 챙겨드려도, 물 한잔을 떠드려도 감사해한다. 이제사 부모님은 고백하신다. 미국에 와서 살게 되어 행복하다고. 우리에게 폐가 될까봐 절대로 안 오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와서 언니랑 가까이, 나랑 함께 같이 살 수 있는 게 꿈만 같다고. 감사하다고.


    경제적 도움이던, 육체적 수발이던, 부모님이 우리 자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의 기초는 '독립심'인 것같다. '내가 다 혼자 해야한다' 라는 마음이 기본이기에 나, 에릭, 언니, 형부가 해드리는 모든 것이 분에 넘치는 감사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이 담긴 그 감사의 미소를 보는 순간, 나는 내가 마치 아주 훌륭한 일을 한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부모님의 독립심 덕에, 또한 감사하는 태도 덕에 나는 매일 베푸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수발 드는 게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나의 마음은 평안하다.


    부모님께 베풀고 섬기는기쁨을 누릴 수 없게 당연히 강요되는 수발이란 참 힘들 것같다. 부모님이, 또는 시부모님이, '우리가 이만큼 했으니 너희가 이제 우리를 돌봐야하는 게 아니냐' 라거나, '노년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아냐? 그러니까 우리를 모셔라' '한달에 용돈 얼마씩 보내다오. 내 친구 아들네는 그거 두 배를 보낸다더라' 라는 이야기를 하신다면 모든 일이 고역이 되고 박탈감으로 괴로울 것이다. 그 반대의 상황, 자식이 부모님의 평생의 노고를 감사하지 않고 해준 거 없다 불평하고 댓가를 바라면서 부양을 하는 경우도 아주 슬픈 시나리오다.


    부모님 부양이란 게 자식의 자발적'선택'이면 가장 이상적이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자식의 효심 하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부모님들의 태도에 따라 수발이 즐거운 일인지, 보람있는 일인지, 고역인지, 도망가고 싶은 일인지가 정해지는 것같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노후를 철저히 준비하고,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독립적으로 하려 하고, 자식의 효도를 당연히 여기지 않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런 부모님을 부양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한번 해볼만한 일이다. 마치 그 과정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미 여행 중에 보람이 느껴지는, 그래서 선택하길 잘했다, 이거 해봐서 다행이다, 힘들지만 즐겁네...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귀한 여행과도 마찬가지로.









    (2018.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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