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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 아버지보다 엄마가 먼저야" --팔순 엄마의 자아찾기
    부모님 이야기 2019. 2. 1. 01:12




    아버지 수발을 들면서 내가 내내 걱정한 것은 엄마의 건강이었다. 고혈압인 엄마가 무리하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하지? 졸지에 한국에 못돌아가게 된 상황에 우울증이라도 걸리시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이미 엄마는 7-8 년 전에 건강에 적신호가 와서 응급실 신세를 졌고 그후에는 우울증을 겪지 않았던가.


    엄마는 2009-10 년에 우울증을 겪었다. 나는 함경도 또순이로 항상 긍정적이고 강한 엄마가 우울증을 겪는 것이 너무도 놀라웠다. 그러나 엄마를 어떻게 도와드릴까 싶어 엄마의 평소의 삶을 찬찬히 관찰하면서  좀 더 일찍 우울증이 오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라 싶었다.


    책임강이 강한 살림꾼 엄마는 평생 알뜰살뜰 아끼고, 새로운 것 시도하고, 응용하고 개발하는 그런 열정적인 살림지기였다. 우리 삼남매가 집을 떠난 뒤에도 아버지를 철저한 당뇨 건강식을 하고 하루에 빠짐없이 같이 등산을 다녀오고, 그 외에 한 가정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일--빨래, 청소, 병원, 은행, 고지서--을 전담하였다. 아버지는 모든 일에서 해방되어 새벽부터 밤까지 공부/만/ 할 수 있었다. 


    45 년 넘게 아버지가 당뇨를 앓았으면서 아무런 합병증이 없고 치아도 다 보존한 것은 엄마의 공로다. 그래서 엄마는 ‘아버지의 그림자,’ ‘아버지의 산소마스크’란 별명을 얻으셨다. 두분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관양동 아파트의 뒷산에 같이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산에서 만나는 모르는 사람들도 인사를 했고, 부모님과 한동네 사는 내 친구는 ‘너의 부모님은 같이 계시는 뒷모습도, 그림자도 아릅답다’ 라고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엄마의 힘이 점점 약해지는데 아버지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엄마가 해야하는 일은 점점 늘어났고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노쇠하여 등산 중 조그만 돌에 걸려서 넘어지곤 했다.  어떨 때는 몸이 너무 마르고 힘이 없는 아버지가 발을 들 힘조차 부족해 10 센치미터의 조그만 돌을 건너지 못해 한자리에서 발을 들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평지를 찾아가는 일도 있었다. 그걸 뒤에서 바라보면서 엄마는 마음이 너무 아팠고 두려워졌다. 당뇨도 문제였다. 아버지 혈당이 580 까지 올라갔을 때 엄마는 인슐린 주사 놓는 법을 배우고 수시로 혈당검사를 하고 같이 운동을 함으로써 아버지 건강을 지켰지만 이미 혼자 총력을 다해서 아버지를 지키고 있는 상태여서--그리고 외국에 있는 우리에게 걱정을 끼칠까봐 아무런 이야기를 않고 혼자 겪어내면서--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매일 의욕상실과 우울함을 안고 살았다. 


    엄마가 우울증 증상이 있다는 것을 나는 우리집에 도착한 날,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느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얼굴? 깊이 혼자 생각에 빠진 그 우울한 표정이라니.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 엄마가 우울증 증상이 있음을 확인하고 우리집에서 머무는 동안 엄마를의 마음을 바꾸는데 총력을 다했다. 엄마는 한 달동안 우리와 함께 있는동안 일단은 육체적 기력을 회복하셨고 그 후에 마음의 치유가 서서히 이뤄졌다. 손자 손녀들과 함께 하고 살림에서 해방되어 푹 쉰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엄마가 한국에 가서도 다시 의욕상실증과 우울함에 빠지지 않게끔 대책을 강구해야했다. 일단은 엄마의 육체적 피로에서 해방되어 휴식/충전을 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미 너무도 많은 일을 혼자 하고 있는 엄마에게서 살림의 짐 일부라도 덜기 위해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고 싶었으나 엄마가 ‘치를 떨며’ 거부하셨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엄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간단한 일 (커피 끓이기, 먼지 대걸레 청소, 세탁기 돌리기) 들을 배워드렸다. 아버지는 일을 배워줘서 고맙다고 본인이 엄마를 위해 뭔가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무척 기뻐하셨다. 엄마는 원기가 회복된 후 한국에 돌아가셨고, 그 후 아버지는 엄마가 새벽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겠끔  엄마가 미리 준비해놓은 아침식사를 혼자 찾아 드시고, 청소, 빨래 돌리고, 설거지에 적극적으로 참여 엄마를 도우려하였다. 


    아버지가 살림지기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엄마의 결단과 노력이 필요했다. 엄마가 뒤로 물러서서 아버지가 일하는 것을 허용해야했다. 철저한 잭임감, 완벽주의 습성, 항상 계획하고 준비하고 휴식없이 일을 끝마치려하는 습성을 다 내려놓아야했다. 그게 참 고치기 힘든 일이었다.‘이거 한번만하고 쉬자’ 하다가 쉬는 대신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엄마와 전화를 할 때마다 엄마의 기본 생각 틀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이 일을 꼭 마쳐야해’ 라는 생각을 ’이 일은 나중에 해야지’ 라고 바꾸는 것으로는 불충분했다.  ‘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로 바꾸고,  거기서 더 나아가 ‘이 일은 더이상 하면 안된다’로 일을 자기 자신보다 먼저 놓는 습관을 바꾸려고 했던 그 노력은 지금까지 진행중이다.


    평생 같이 살아온 부부에게 가장 두려운 일, 배우자의 죽음에 관해서도 많이 이야기를 했다.  특히 아버지를  돌보는 사명에 평생을 바친 엄마는 점점 쇠약해지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이 ‘돌보미’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기때문이다.


    “엄마, 엄마가 아버지를 정성스럽게 모시니까 그런 스트레스 받으시는 거 당연해요. 너무 고마워요. 그렇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돌아가시는 거에요. 그건 엄마 책임 아니에요. 삶과 죽음을 우리가 관장할 수 없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주제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미국 여행 중‘가족 치료법’과 ‘국제전화 치료법’도 효과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엄마를 많이 도와주었고, 엄마 스스로도 노력을 한 덕에 엄마의 우울증은 약을 쓰지 않고 조절되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6 년간 근근이 살아오시다가 아버지가 미국에서 사고를 당하고 병수발을 받아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


    아버지 수발이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엄마는 나에게 언제 밟아 터질지 모르는 ‘지뢰’와 같았다. 심장질환, 혈압으로 하루하루의 건강 관리가 중요한 엄마에게 수발의 책임은 너무도 막중했다.  


    아버지와 자식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돌보고 섬기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엄마가 본인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상하지 않으려면 어떤 식으로 수발에 참여해야할까? 


    내가 엄마를 걱정하듯이 엄마는 나를 걱정했다. 나도 지병이 있고 과로를 하면 안되기에 엄마는 내 힘을 덜기 위해 엄마가 무리를 하려하는 상황이 자주 일어났다.


    나는 엄마가 ‘지뢰’같이 두렵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절대로 아버지 수발 들다가 건강에 무리가 와서 죽지는 말자고, 그것은 어느 누구도 원하는 게 아니라고, 특히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밖는 일이라는 사실을 서로에게 상기시켰다. 배우자 수발 들다가 먼저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던가.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임을 인지하고 엄마도 나도 조심하자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모성의 본능이, 평생 지켜온 남편에 대한 보호본능이 너무도 강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본인이 하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 아주 힘들었던 것은 간병 도우미를 고용하냐마냐의 문제였다.


    엄마가 평소에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해서이기도 했지만 엄마는 아버지가 몸을 남에게 보이고 용변 수발을 받아야하는 것을 가엾어했다. 아버지를 수치심에서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다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엄마. 절대로 도우미를 쓰지 않겠다, 도우미를 쓰더라도 더러운 일은 내가 한다... 엄마는 모든 일을 당신이 하려했다. 


    나는 엄마의 다른 본능--모성애--를 자극하여 엄마를 저지했다. 예로, 도우미를 왜 쓰냐고 하실 때,


    ‘엄마, 도우미 안 쓰면 엄마 딸이 죽어요’ 의 협박,


    도우미가 와도 본인이 일을 하려고 우기실 때는 


    ‘그러다가 엄마가 병나면 엄마 딸만 고생이에요’의 협박이 효과적이었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내 뜻을 받아들여 도우미와 나에게 일을 맡겼다.


    엄마께 엄마와 내가 스스로를 먼저 챙기지 않으면 아버지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납득하실 수 있게 자주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내가 사는 시에서 개최하는 재난 상황 대비 시민 자원자 훈련 프로그램의 이야기다. (그 프로그램은 몇 주간 경찰과 소방관들이 강의를 하고 실전 대비 훈련을 시켜주는 것으로 나도 몇 주간의 훈련을 받아서 자격증을 갖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프로그램의 첫 강의에서 강사가 던진 질문이었다.


    "재난 시 자원봉사자가 기억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무얼까요?" 


    답은 간단했다. "봉사자 자신의 안전"이었다. 


    프로그램 내내,


    '당신이 피해자를 구하려고 본능적으로 뛰어들고 싶다 하더라도 당신의 본능과 싸우라'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


    라는 가르침은 마치 노래의 후렴구처럼 매일, 매 강의에서 반복되었다. 


    재난시 사상자가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인간애라는 본능에 휩싸여서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헬멧과 같이 간단한 안전장치없이 붕괴된 건물로 뛰어들어서란다. 물론 자신의 가족이 갇혀 있다면 당장 뛰어들어가 구조하려는 욕구는 본능이고 그 본능을 조절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겠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뛰어드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구조가 필요한 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사들은 수시로, 일관성있게 강조했다. 

     

    훈련 맨 마지막 날에 훈련원들이 가상 지진 상황에 투입되어 구조 작업을 펼치고 소방관, 경찰들이 우리의 대비 방법과 팀웍의 점수를 매기는 '시험'이 있었다. 총 8 명으로 구성된 우리 팀은 지진으로 무너진 빌딩의 재난 상황을 평가하고, 빌딩의 구석구석을 돌면서 사망자와 부상자를 구별해서 구조하는 작업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우리팀이 '0' 점을 받은 항목이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라는 표시가 있는 방에 들어가서 희생자가 있는가 확인을 했기 때문이었다. 심사위원인 소방대원이 한 말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교육의 첫 날, 이번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했지요? 


    '당신의 안전부터 챙겨라' 입니다.  당신들이 부상자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고자 했던 의도는 가상하지만 점수는 0 점입니다. 왜냐면 팀 전원이 출입 금지된 방에 들어가 다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원 봉사자들은 '관계자' 가 아닙니다. 출입금지가 된 곳에는 절대 들어가지 마십시오. 당신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놓아야합니다.”


    그 후로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무심하게 보았던 비상시 대처 요령 중, 위기 상황이 닥치면 아이의 보호자가 먼저 산소 마스크를 쓰고나서 아이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워주라는 비행기의 안전 수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매번 상기한다.


    '당신의 안전을 우선으로 두라'는 교육은 수발에 임한 나의 마음가짐을 똑바로 잡아주었다.


    나만 잘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했다.


    ‘아버지를 위한, 아버지에 의한, 아버지의 삶’을 살아온 아버지의 그림자, 아버지의 산소 호흡기인 엄마가 바뀌어야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더러 


    "엄마 아침에 일어나실 때 천천히 일어나세요. 아주 천천히. 엄마 혈압 오르면 안되니까.”


    “엄마 밤에 아버지가 아프다고 해도 엄마가 벌떡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엄마 건강이 우선이에요”


    “엄마, 아버지가 밤에 불러도 웬만하면 엄마 일어나지 마세요. 아버지더러 그냥 아침까지 기다리시라고 해요. 엄마 잠이 무너지면 하루 종일이 괴로워요.”


    이러한 제안은 서서히 받아들여졌으나 아주 어려웠던 게 있다. 


    아버지 식사 하기 전에 우리 먼저 식사하기.


    평생 엄마는 항상 먼저 아버지를 챙겨드리고 나서 본인의 식사를 챙겼다. 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신 뒤에는 더더욱 본인 보다는 아버지를 먼저 챙겼다. 그런데 아버지 식사는 아주 오래 걸린다.  40 분에서 1 시간 동안 옆에 서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떠 먹여드려야한다. 엄마와 내가 교대로 하는 식사수발이라지만 아침, 점심, 저녁, 중간중간 음료수, 약....그렇게 잡숫는 것을 도와드리는 것만해도 기운이 방전된다.


    나는 엄마더러 ‘우리 먼저 밥 먹고 아버지 식사 챙겨드립시다’ 라는 거의 혁명적인 제안을 했다. 재난 대비 클래스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엄마, 우리는 지금 ‘재난’을 당한 거에요. 이 위기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구조원’인 엄마와 나의 건강이에요. 우리 건강을 먼저 챙기고나서 아버지를 돌봐야해요. 아버지를 먼저 돌보고 싶은 우리의 본능을 억제하고 우리가 식사를 먼저 해서 기운을 차리고 아버지 식사를 천천히 여유있게 하는 게 아버지께도 더 좋아요’” 라 설득했다.


    엄마는 꽤 오랜 기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버티셨다. 그러나 나의 꾸준한 ‘전도’의 결과로 엄마는 2 년이 지난 요즘에야 아버지보다 먼저 식사를 하신다. 내가


    “엄마, 우리가 잘 먹어야해요. 먼저 맛있게 먹자구요!”


    라고 하면 엄마는 "비행기에서의 엄마처럼?" 하시며 웃으신다.

    나는 엄마가 그러실 때 아주 기쁘다.

    아버지 수발을 같이 들면서 엄마의 변화는 참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엄마는 쉽지는 않지만 조금씩 본인의 삶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번 운동을 꼭 하고, 낮잠을 꼭 주무셔서 건강 관리를 했다. 본인의 안녕과 안전을 우선으로 두고서 새벽에 일어나 아버지 챙기고, 밤 늦게까지 아버지 돌보는 일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노력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어제 2018 년 1 월 17 일은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다! 

    엄마는 나와 시에서 하는 요리 클래스를 다녀왔다! 


    엄마가 좋아하는 일을 한 것이다!


    요리강습에 다녀온 것은 평소의 아버지만을 위하는 엄마의 단조로운 일상에 하나의 새로운 획을 그은 사건이다. 평소에 엄마의 외출은 아버지와의 산책, 아버지 병원, 본인의 병원 방문, 그리고 아주 가끔 나와 50 분간 한국 마켓 다녀오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쿠킹 클래스를 가자고 몇 번 이야기를 했었을 때 엄마의 표정은 관심이 있는 것같은데 머리는 도리도리, "no." “난 그런 거 안 해도 괜찮다, 어떻게 아버지를 두고 나가냐” 라고 하신다. 평생 아버지를 자신보다 먼저두고 섬기는 게 버릇이 되어버려서 아버지를 위하는 본능적인 버릇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엄마는 설득되었고 내가 요리 강좌 신청을 한 날부터 어제까지 근 3 개월을 기다렸다가 거사를 치루게 되었다.


    엄마와 나는 아침부터 서둘러 아버지가 아침 식사를 한 뒤에 도우미와 산책을 나가실 수 있게끔 도와드리고, 요리 강좌를 들으러 갔다. 둘이 하는 아침 드라이브가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지난 3 년간 아버지한테서 하루 세 시간 이상 떨어져본 적이 없는 엄마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나가서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이라도 되는 양. 그러나 바람 피우는 사람이 억지로 떠밀려서 하는가? 좋아서 하는 법. 엄마도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요리 클라스는 재밌었다. 와인을 넣고 하는 프랑스 고기 요리와 사과파이 만드는 법을 배웠다.유쾌한 성격의 프랑스인 강사는 시어머니로부터 받은 요리법을 이용해서 와인을 넣고 찐 소고기 요리와 아주 간단하나 맛이 기가막힌 사과 파이를 만드는 법을 보여주었다. 불어 액센트가 심한 영어도 달콤했고, 사진을 찍으랴, 홍당무를 자르랴, 레서피를 받아적으랴 바쁜 동료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우리가 화려한 외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아버지 건강 관리가 잘 되었다는 것의 증명인데 그렇게 건강 관리를 잘 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라는 자화자찬으로 엄마를 웃게 만들었다. 또한 우리가 언젠가 이렇게 화려한 외출을 상상도 못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눴다.  마음의 대비도 해두어 어떤 상황이 닥치던 잘 해나가자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집에 돌아왔다.


    우리를 보고 아버지가 반가워하셨다. 아버지는 엄마와 내가 뭔가 나가서 했다는 게 그리 뿌듯하셨는지, “나는 오늘 버지니아랑 동네 구석구석 정원을 구경하면서 다녔어요. 참 좋았어” 라고 하시더니 “다음에도 오늘처럼 내 걱정 말고 나갔다와요” 라고 했다. 엄마가 ‘바람 피고 오니’ 온 가족이 다 행복해지는 것같았다.


    나는 엄마가 뭔가를 계속 본인을 위해서 하게끔 도와드릴 작정이다. 엄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게 바람직한 일임을 알기에. 엄마는 꾸준히 아침 산책, 밤에 운동, 틈날 때마다 요가, 그리고 영어 공부를 하신다. 한달에 두어 번 병원을 다녀올 때 우리는 단 30 분이라도 차를 마시고 (꼭 엄마가 나에게 차를 사준신다!) , 어떨 때는 이른 점심을 먹으면서 데이트를 한다. 


    60 년간 성실하게 아버지를 우선으로 두고 살아온 엄마, 이제는 아버지의 ‘산소호흡기’ ‘그림자’의 타이틀을 반납할 때가 되었다. 아버지는 엄마 혼자의 책임이 아닌, 나와 언니와 에릭과 여러 사람과 함께 잘 모시면 되는 것이고, 이제 엄마는 바람을 좀 더 많이 피워야하겠다. 


    “비행기에서의 엄마처럼?” 하고 말하는 엄마는 이미 알고 있다. 엄마가 스스로의 삶의 살림지기가 먼저 되어야한다는 것을.  엄마가 자신의 건강을 먼저 챙기고 떳떳이 원하는 것ㅇ을 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게끔 계속 도와드리려고 한다. 여성의 자아추구는 팔순이 넘어서도--죽는 날까지--추구될 수 있고, 추구되어야할 귀중한 숙제이자 권리이니 말이다.



    덜덜 떨면서 못 오르시던 운동기구에서 이제 매일 열심히 걸으시는 엄마



    (2018.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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