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가루 님, 이 글은 님을 위한 것입니다. 제가 얼굴 마주보고 하면 20 분 내로 끝날 이야기를 글로 하니 아주 길어졌네요.

아가들 키우느라 힘드실텐데 그 힘든 이야기도 적어보시고, 기쁜 순간도 많으실텐데 그 이야기도 적어보세요~ 응원합니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가의 서재..

오른쪽, 멈춰져 있는 검은 시계는 그가 생을 마감한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고 있음.



나는 결혼하기 오래 전부터 혼자 글쓰기를 했다. 글쓰기는 '버릇'이었다. 안 쓰면 어지러운 나의 마음, 어수선한 나의 삶이 정리가 되지 않는 것같아서 거의 청소/therapy 차원에서 글을 썼던 것같다. (내가 좀 과격했던 시절에는 그것을 "안 미치려고 쓴다" 라고 표현했었다) 글쓰면 행복했다.


첫 아이를 나은 뒤 1 년간, 혼자 끄적이는 게 힘들어졌다. 처음으로 해보는 엄마 노릇이란 게 어찌나 힘들던지, 모든 것을 책으로 배워서 하는 처지에 글을 쓸 수 없음은 당연했다. 부모님께 틈틈히 일상 이야기를 해서 일주일에 한번 정도 팩스로 보낸 것이 유일한 글쓰기였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 오프라 교수와 남편 아로디가 우리집을 방문했다. 그들은 바로 몇 년 전까지만해도 결혼에는 관심없이 공부만 하던 내가 갑자기 결혼을 하더니만 아기 엄마가 되어 쩔쩔매며 사는 것을 보며 많이 안타까워했다.  


"신주, 난 이제까지 네가 쓴 편지를 다 모아뒀어. 나중에 네가 유명해진 다음에 돈 많이 받고 팔려고 했지. 그런데 이제 그 편지를 어떻게 하지? 네가 유명해지지 않겠다 하니..." 라고 뼈있는 농담을 했다.


그녀는 또한 나더러 왜 글을 안 쓰냐고 채근했다. 나는 내가 이제까지 써온 글은 아카데미아의 학문적 언어였고, 그런 언어로 무슨 글을 쓰겠냐고 했다.  오프라는 '네가 나에게 쓰는 편지처럼 쓰면 되잖아?' 하고 답답해했다.


며칠 후 이스라엘로 돌아가기 전 오프라는 나에게 조언했다.


"글을 써라. 난 네 글을 읽고 싶어. 제발 글을 써라."


'시간이 안 나는데 어떻게 글을 쓰겠어요...' 라는 내 마음의 변명을 듣기라도 한 듯 그녀는 말했다.


"'글 잘 쓰는 문필가 (good writer)' 가 되려고 하지 마. 그냥 '글쓰는 사람 (writer)' 이 되어봐. 하루에 10 분 씩 무조건 글을 써봐. 그렇게 하다보면 점점 글 쓰는 시간이 늘어날 거야. 장담한다."


그러리라 약속했다. "good writer" 가 되지 말고 그냥 "writer" 가 되라는 신선하고 고무적인 충고가 내 귓가에 맴돌았다. 할 수 있을 것같았다. 


나는 오프라의 권고대로 하루에 10 분씩 시간을 내어 글을 써보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야했다. 모유 수유를 하는 두 아이의 엄마에게는 '경계'가 없다. 아이가 마구 주무르고 빠는 내 몸은 나의 몸이 아니었다. 아이의 장난감과 기저귀, 옷들이 흐트러져 있는 조그만 기숙사에는 엄마의 공간이 없었다. 어딜봐도 그저 "너는 엄마이다" 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나의 집. 


내가 나임을 상기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방 두 개의 기숙사에서 내 방을 어떻게 확보한다? 현관 옆의 조그만 창고 (신발, 청소기, 여행용 가방을 보관하는 곳)에 책상을 배치했다. 책상이 들어가니 문을 제대로 닫을 수 없는 그런 조그만 공간이었지만 그 '문간방' 은 나만의 공간, 나의 서재가 되었다.


젖먹이 꼴렛이 밤에 잠이 들면 컴퓨터 앞에 가 앉았다. 처음에는 '뭐라 시작하지?' '뭘 쓰지' 암담했다. 글쓰기라는 것이 (요리처럼!) 내가 하기 힘든 아주 무거운 책임과 같이 느껴졌다. 물끄러미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으로 10 분이 금방 지나갔다. 그러나 매일 책상에 앉는 연습을 하고, 편지, 일기를 컴퓨터로 쓰고 하다보니 글쓰기 명목으로 앉아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10 분은 금방 15 분, 15 분은 금방 30 분이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글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글쓰는 버릇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글쓰기 습관이 돌아오니 컴퓨터 앞에 앉지 않아도 일하는 도중에도, 젖을 먹이는 도중에도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낮에도 아이들이 잠을 잘 때 나도 잠깐 쉬고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컴퓨터 앞에 가 앉아 글을 썼다.

아이들은 엄마가 사랑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경쟁 의식을 느끼는지, 내가 즐기지 않는 청소나 요리를 할 때는 혼자 잘 노는 녀석들이 내가 글쓰기를 하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컴퓨터 앞에 앉을라치면 금방 달려와 기어오르고 칭얼거렸다. 아쉽게 글을 못 쓸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서서히 내가 컴퓨터 앞에 앉는 모습에 적응이 되었다. (나의 물리적 공간을 지키는데 익숙해졌기에 아이들이 좀 커가면서 아이들에게  "엄마는 지금 바빠" "엄마는 생각 중이야" 라는 말로써 내 의식의 공간을 지키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였다. 마무리짓지 못하는 글들. 


딱 정해진 시간 안에 글을 쓰는데 그 시간이 충분치 않다보니 쓰다말고 컴퓨터를 끄는 게 다반사. 다음날 다시 글을 쓰려고 보면 전날 쓴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귀, 표현등이 유치하다싶고, 생각도 또렷하지 않다 싶어 글을 지워버렸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남아나는 글이 없었다. 공책에 펜으로 썼다면 뭐라도 내 생각의 진화 과정이 남아 있으련만 컴퓨터로는 다 삭제해버리니 글이 쌓일 수 없었다. 나는 내 비생산적인 글쓰기에 실망했다. 거의 투쟁하다시피 해서 얻어낸 귀한 시간 동안 열심히 끄적거리곤 그걸 다 삭제해버리고 일어날 때의 허무함이란...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의 뇌에 문제가 있었다. 나는 문학 비평을 공부했기때문에 글을 읽을 때 논리적으로 분석하는데 익숙했다. 즉, 나는 글을 읽고 쓸 때 나의 좌뇌를 많이 사용해왔다. 그런데 내가 마음 가는대로 창의적이고 즉흥적인 글쓰기를 하려니 우뇌를 사용해야하는데 예전 식으로 좌뇌가 더 가동되는 꼴이었다. 그러다보니 자꾸 바꾸고, 삭제하고, 불만스러워하고...이넘의 좌뇌를 어떻게 붙잡아매나...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 내용이 아무리 보잘것 없고,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함부로 지우지 않기로했다. 초벌 원고는 완벽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초벌'이라는 '베이비'를 먼저 출산하는 것으로 우선 순위를 정했다. 자꾸 사소한 것을 교정하고 덧붙이는 것은 태어나지도 않은 베이비한테 성형하고 화장 덧칠을 하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일단은 초고 베이비부터 나와라~


시간이 가면서 노력의 결과가 쌓여갔다. 초벌 몇 편이 나왔다. 나는 초벌을 마치면 며칠은 그 글을 다시 안들여다보았다. 우뇌를  잠재우기 위해서. 원고를 프린트해서 식구들이 다 깊이 잠든 밤에 조용한 식탁에 앉아서 글을 다듬었다.  좌뇌가 마음대로 놀아도 되는 시간이다. 나는 '에디터'의 마음가짐으로, 글과 미적 거리를 유지하여, 약간은 차가운 시선을 유지하면서 글을 읽었다.  빳빳하고 하얀 종이에 인쇄된 글으며 분석하고 에디팅하는 것은 가끔은 고통스럽기도 한 글쓰기와 달리 쉬웠고, 그래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중해서 글을 다듬었다.  


나중에 쓰겠지만 2006 년 경부터 몇 년간 나는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분석하고 에디팅을 했었다. 그때는 나의 글을 쓰는 게 힘들었다. 일단 하루에 글에 (그게 글쓰기이든, 에디팅이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고 글손질을 열심히 하고 난 뒤에는 집중력도 소진되고 글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좌뇌가 활성화되어 있으니 창의적이고 즉흥적인 글쓰기가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에디팅 하지 않는 기간에 숨이 짧은 짤막한 글, 스케치 수준의 글을 끄적이는 정도로 만족해야했다. 그러나 (우뇌가 맘대로 설치면서!) 남의 좋은 글 읽으면서 분석하고 에디팅 하는 재미가 솔솔해서 행복했다. 


매일 정기적으로 글쓰기를 하다보니 글쓰는 시간이 하루에 두 시간, 심지어는 세 시간까지도 늘어났다. 그러다가 우연히 책을 한 권 내게 되었고, 또 몇 년 후에 책을 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그런 책들이지만, 좌뇌 우뇌가 춤추면서 (예이~~!)  글쓰는 과정을 즐겼고, 출판이 되던 안되던 상관없이, 책이 많이 팔리던 안 팔리던 상관없이 (안 팔렸다^^) 나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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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하라는 이야기를 자주한다. 이미 글재주가 있거나, 아니면 재미난 이야기 거리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글쓰기를 하라면 사람들은 일단은 '글쓰기'를 '책'과 연결시키는 것같다.  즉, 글쓰기의 목적이 책이라 여기거나, 아니면 글의 최대의 결과물이 책이라는 생각이 그 예이다. 한 예로  내가 첫 책을 냈을 때 나와 동갑내기인 지인이 '신주씨 글은 참 쉽네요...이런 글은 나도 써서 출판할 수 있었을텐데...." 라고 아쉬워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친구는 나중에 그녀의 말이 예의가 없는 소리라 비판을 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왜냐면 내가 그녀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별볼일 없는 일상에 포커스를 두는 나의 글은 그다지 심오하지 않으며, 나의 글 스타일은 단아하지도 세련되지도 않다. 분명 그녀가--아니면 그 어느 누구나--- 내 글 정도의 글은 충분히 쓸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녀가 절대로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녀의 목적이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책이 되기 전에 가장 필요한 것---글쓰는 습관--이 없기 때문이다. 숨쉬기처럼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습관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을 깊이 하고, 그 생각을 글로 풀어보는 습관도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 습관을 통해 심오한 내용과 현란한 글솜씨의 글이 태어날 수도 있고, 그냥 단순한 언어로 표현된 자연스러운 글이 태어날 수도 있다. 그 어떤 것이든 공통분모는 '글쓰기 연습' 이다. 내 글을 읽고 '저렇게 쉬운 글은 나도 쓸 수 있다' 라고 생각한 그녀도 만약 싫든 좋든, 무작정, 무턱대고 글을 열심히 쓰다보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삶을 관찰하고, 사고하고, 그걸 글로 담아내려고 노력하면...그녀가 원하는 책을 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글쓰기가 지긋지긋해서 때려 치우고 싶어도 그 과정을 '이것도 이제 지나리니...' 하고 참을성있게 버티고 다시 글쓰기를 하는 그런 사랑이 있다면 글은 책이든 아니든 --당장은 그녀가 상상하지 못하는- 그런 선물을  반/드/시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도 책을 내고 싶다는 욕망과 반대로 '나는 절대로 책을 낼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글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 (전문가, 작가)의 전유물이라 생각하여 아예 글쓰기를 시작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말이다.  '내 삶이 평범한데 뭘 쓸 게 있겠냐' '나는 글재주가 없어서' '지금은 너무 바빠서' 라는 부연 이유도 있다. 내 경험으로는 이  부류의 사람들이 첫째의 '욕망' 부류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같다.


그래서 나는 '책'과 '글쓰기'를 분리해서 이야기한다. 책을 생각하지 말고 글을 쓰라고. '글쓰는 사람'이 되라고. 글쓰기 과정을 즐기고 열심히 쓰다보면 글이 책으로 태어날지 아닐지는 글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이 스스로 그 운명을 정한다고. 


운명적으로 태어난 책, 세 권과 저자 세 분의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그분들의 책이 태어날 때 산파 역할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은 나에게 큰 영광이었다. 


자신이 책을 낼 것이라 계획하지 않은 채 열심히 글을 쓰다가 책을 낸 임혜지 작가 (언니),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가 책을 낸 두 할아버지 (나의 아버지와 시아버님). 


건축학자 임혜지언니는 독일에서 학위를 마쳤고, 국제결혼을 했으며, 2000 년대 초반, 외국에 거주하면서 한국어로 글쓰기를 하는 부담을 갖고 있다는 면에서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한번도 얼굴을 못 본 상태에서 글을 통해 언니 동생이 되었고 내가 언니보다 약간 먼저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이유로 언니가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할 무렵 언니의 글을 읽으며 코멘트를 해드렸다. 


언니는 매사를 진지하게 관찰하고, 깊게 사고하고, 단어 하나하나를 정성들여 선택하는 정직한 writer 이다. 언니의 글 속에는 보기드물게 명징한 논리가 굳건히 살아있지만 그 논리를 받쳐주고 있는 것은 언니의 따뜻한 인간애이다. 그래서 언니의 글을 읽으면 뭔가 많이 배워서 머리가 커지는 것같은데, 동시에 위로도 받고, 용기도 얻고, 자신감도 생기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는 짧으나마 언니가 첫 책을 낼 때까지 글을 미리 읽고 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특권을 누렸고, 언니의 첫 책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 2008) 이 출판되는 순간의 감격을 같이했다. 혜지 언니는 이후 '고등어를 금하노라' (2009) 외에도 많은 이에게 생각거리와 감동을 주고, 변화를 가져온 많은 글들을 계속 써오고 있다.


혜지 언니의 책이 나오기 전 해인 2007 년, 아버지의 수상록 '아버지의 기도' 가 자비로 출판되었다. 내가 편집에 많이 관여한 아버지의 수상록은 우연한 계기로 씌여지게 되었다. 


꼴렛이 네 살경,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 오늘 애들이 나랑은 안 논다고 놀이터에 못 들어오게 했어" 라고 했다. 소위 왕따를 당한 것이다. 꼴렛이 바비 인형에 관심이 없다고 하니까 바비 인형을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이 단합해서 꼴렛을 따돌렸다.


"그래서 어떻게 했니?" 나는 놀라움과 걱정을 누르고 꼴렛에게 물었다.


"운동장 구석에 앉아서 북한의 할머니를 생각했어. 그랬더니 괜찮았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내가 이야기를 해줬던가 기억도 안나는 그 이야기를 꼴렛이 기억했다니...


그 이야기'라 함은  1950 년 전쟁이 나기 전에 엄마가 북한에서 조직적 왕따를 당했던 이야기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엄마는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에 동조하라는 학교측의 무언의 압박과 노골적 회유에 꿋꿋이 맞섰고, 그것을 못마땅해한 학교 측에서 "아무도 이춘산과는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 는 기상천외한 처벌을 내렸다.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까지 모두들 엄마에게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엄마를 무시했다.  엄마는 학교에 가면 공부 시간에 선생님께 질문도, 발표도 못하고, 친구들과 단 한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조용히 투명인가처럼 있다가 집에 오곤했다. 그래도 엄마는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십리 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다. 외할머니는 딸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분노해서, '내 딸을 바보 만드는 학교는 다닐 수 없다' 며  온 식구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 얼마 후에 엄마는 식구들과 남한으로 피난 내려왔다. 


나는 꼴렛에게  '네가 왕따를 당하더라도 노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는 식으로 주제를 정해 이야기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꼴렛은 이야기 속에서 자기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진리를 찾아낸 것이다. 미국에서 프리스쿨을 다니는 네살배기 아이가 60 년 전, 북한에서 사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용기를 얻어  따돌림의 상황을 극복해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경험의 공유의 중요성과 스토리텔링의 위력을 똑똑히 보았다.


나는 혹시 엄마께 그런 용감함과 영감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더 있지는 않을까 궁금했다. 엄마께 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며 몇 년이 지났다. 갑자기 엄마의 건강이 안 좋아지셨을 때 덜컥 걱정이 들었다. 엄마가 편찮으시면 귀중한 이야기를 못 듣겠구나 싶어서 엄마께 글을 옛날 이야기를 글로 써주실 수 있나 여쭸다.. 엄마는 일언지하에 '나는 못쓴다' 라고 거절하셨다. 


바로 그 때 엄마 옆에 아버지가 계셨다. 그래서 아버지께도 옛 얘기를 글로 써주시지 않겠냐고 여쭸더니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자신없어 하셨다. 아카데미아에서 학문적 글만 쓰시던 분이 개인 에세이를 쓰신다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하시더니 글을 쓰기 시작하셨다.


그 후 2 년 뒤에 아버지의 책이 출판되었다. 책의 머리말의 첫 페이지에서 아버지는 글쓰기의 어려움과 기쁨을 토로하셨다..



나의 어린 시절을 글로 써달라는 부탁을 처음 신주로부터 받았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런 류의 글을 한 번도 써본 일이 없어서 나에게는 그것이 큰 부담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신열이를 곤지암에서 처음 보았을 때와 꼭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은 젖살이 붙지 않아 파리한 색깔의 오글쪼글한 한 줌의 핏덩어리. 그러나 그것은 불안 섞인 책임감의 엄청난 무게로서 나에게 다가왔다.....


무력감과 의무감 사이를 어기적거리며 며칠을 보내던 중, 불현듯 이스라엘에서 신주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오프라가 신주에게 했다는 말이 내 머리를 스쳐갔다. '글을 쓰라. 처음부터 좋은 글을 쓰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선 글을 쓰는 것부터 시작하라' 라는 조언이었는데 바로 이것이야말로 지금 내게는 가장 적절한 충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력하든 그렇지 앟든 나는 의무적으로 신열이를 키워야 했고, 또 현실적으로 키워냈다. 이제 그처럼 말재간이나 글재간이 있든 없든 나는 의무적으로 자식이 원하는 글을 써야하고 또 현실적으로 써낼 수 있으리라고. 


어렵게나마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해보니 오랫동안 내 의식 밑바닥에 깊숙이 묻혀 있었던 지난날의 일들이 가물거리며 떠올라 나는 온갖 감회에 빠지게 되었다. 고요한 한밤중에 오롯이 책상머리에 앉아 글쓰기를 계속 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나의 과거는 얼마나 외로운 삶의 연속이었던가. 그리고 나의 현재는 지난날의 쓰라린 기억을 보상하고 남으리만큼 얼마나 복된 삶의 연속인가'라는 말을 되뇌이면서 복받치는 감격과 행복감으로 눈물 짓는 일이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강대건 '아버지의 기도' p7-8)


아버지의 수상록을 교정하면서 나는 '이 이야기가 글로 씌여지지 않고 아버지의 기억 속에 묻혀 있었다면 우리 가족 모두의 삶에 얼마나 큰 손실이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교훈을 남기겠다는 목적 없이 그저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서술했을 따름이었으나 그의 역경, 용기, 인내의 스토리는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나는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새로이 발견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시아버지의 수상록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시아버지의 수상록도 팔순 즈음에 출판되었다. 글쓰기를 '출산'에 비유하자면 시아버지가 글을 써서 책을 내기까지는 10 년게 걸린 넘는 '난산'이었다. 


아버님은 독서광이시고 말솜씨가 출중하다. 가족이 같이 겪은 경험 이야기를 할 때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면 그냥 '사실의 나열' 이지만 아버님이 이야기를 하면 적절한 과장, 리얼한 세세한 묘사, 확실한 주제의 재미나는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1998 년 꼴렛을 임신했을 때 우리집에 와계시던 아버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나 혼자 듣기에 아까웠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시면 이 이야기가 다 사라지게 될 거라니 너무도 아까워서 아버님께 글을 써보시면 어떻겠냐고 했다. 뜬금없는 나의 제안이 흐믓하시긴 한 것같은데 대답은 반대로 하셨다.


"나는 글 못써. 재주가 없어. 글쓰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거야."


그게 1999 년 이었다. 그후 매년 아버님이 우리집에 오실 때마다 아버님의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은 계속되었고 그 이야기들을 글로 담아두고 싶은 나의 욕심도 점점 커졌다. 나는 아버님을 졸랐다. 아버님은 난공불락이었다. 


아버님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글쓰는 습관이 없는 사람들에게 글을 써보라하면 누구나 다 '난 못쓴다' 라고 한다. 그런 사고는 활자화 된 글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권위와 자신은 관계 없다고 보는 것이다.


아버님께 '저의 아버지도 같은 소리 하셨어요. 그러나 오프라의 이야기를 생각하시면서 용기를 내셨어요" 라고 했더니만 

"그래도 너의 아버지는 학자이니까 글을 써오셨지. 난 글을 쓴 적이 없어. 그래서 못쓴다." 라고 하셨다.


몇 년동안 글쓰기를 거부하는 아버님을 보면서 아버님이  '글의 권위'와 ‘자기 자신'을 엄격히 분리하시는 게 상기시켜준 게 있다 그것은 1980 년대 말-1990 년대 초, 페미니즘 문학 비평에서 많의 논의 되었던 '글'과 '여성성'의 담론이다.  독서, 글쓰기 등 '문자'의 영역은 오랫동안 일부 계층 남성의 전유물로서 여성들은 집단적으로, 체계적으로 그 영역에서 소외되어 왔지만. 여성이 '문자=남성'의 고정관념을 부수고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당시로서는 아주 powerful 했던 사고가 어쩌면 아버님께도 적용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 글쓰는 사람을 우러러보고 글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 이 쓰는 것이라고 믿는 아버님은 자신을 글쓰기 행위의 주체로서 인정하지 못했고, 그러한 사고는 남성주의 사회에서 문자와 그 권위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갖고 있던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과 일맥상통했기때문이다.


나는 아버님께 물었다.


“아버님, 글 쓰실 때, '나' 라는 주어로 시작해본 적 있으세요?”


아버님은 그게 무슨 말인가 물었다. 당연히 '나' 라고 쓰지.


"말할 때는 '나' 라고 쉽게 하지만 글 쓰실 때 '나' 라고 쉽게 쓰실 수 있나요?  어렵지요. 그러니까 글쓰기가 어려워요. 아버님이 저한테 말씀하시듯이 글을 쓰면 되어요. 그냥 쓰시면 되는데..."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지만 아버님과의 대화에서는 영어와 달리 프랑스어는 더더욱 'I'  (나) 라는 단어를 덜 쓴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아버님은 이해하셨다.) 


아버님은 내 말이 이해하지 못하시는 듯했다. 당연하다. 평생 갖고 있던 사고방식을 바꾸는 건데 그게 쉬우시랴. 

다음 해에 나는 여전히 아버님을 졸랐다.  나는 아버님께 ‘친구한테 편하게  말씀하시듯이 이야기 하시는 걸 녹음을 하여 그걸 받아쓰면 좋은 글이 될 것이다’ 라고까지 했다. 잘쓰는 글이 목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글이 목표라고, 사실은 그게 잘쓴 글이라고도 했다. 아버님은 그래도 이해가 안된다고 하셨다. 아버님이 평생 탐독하신 역사책의 언어--학문적이고 딱딱하고 개인적인 목소리가 배제된 지성의 언어에 익숙하셔서였다.


2009 년 우리집에 와 계실 때 나는 아버님께 프랑스 여성 작가 꼴렛의 작품들을 읽어보시게 했다. 남성 작가보다 여성 작가의 목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나" 로서 글을 쓰시는 게 쉽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아버님은 소파에 파묻혀 열심히 내가 드린 책들을 읽으셨다. 4 주 후에 벨기에로 떠나기 전에 나에게 말씀하셨다.


“신주, 네가 말해온 것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같아. 말하듯이 글을 쓰는 게 뭔지, 개인적인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그 말들이 뭔지 알겠어. 내가 글을 한번 써보려고 해.” 


그 결정은 10 년만에 이뤄진 경사스러운 결단이었다. 나와 에릭은 당장 아버님께 컴퓨터를 선물했다. 어려워도 조금씩 배워보시라고. 그래서 아버님은 펜으로 종이에 글을 써서 원고를 작성하는 틈틈이 컴퓨터로 타자연습을 하시고, 워드프로세싱 프로그램 사용법을 배웠다. 


1 년 후 아버님은 원고를 들고 우리집에 돌아오셨다. 지치지 말고 더 열심히 글을 쓰시라고 독려하는 차원에서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다. 저녁 식사 후, “작가 코젠 선생님께 출판사에서 드리는 선약금” 이라면서 돈 봉투를 드렸다. 글과 글쓰기의 권위에서 스스로를 소외시켜왔던 아버님이 글을 써서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진실로 칭송받고 축하받아야할 일이기에...


2 년 뒤, 아버님의 책이 나왔다.  아버님이 재밌고 유익한 글을 써서 책으로 엮어낸 것은 큰 성공이다. 그러나 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성공은 아버님께서 80 세가 되어가는 나이에 고정관념을 버리고, 글쓰기라는 미지의 영역에 용기있게 뛰어들어 글쓰기의 주체가 되었고, 자신을 작가로 탄생시킨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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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글을 쓰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친구 쑤우가 나에게 ‘글쓰기 전도사’ 란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맞다. 글쓰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이익들과 풍성한 행복감을 남들도 맛보았으면 좋겠기에 나는 계속 전도를 하고 다닐 것이다.  


글쓰기가 주는 이득은 너무도 많지만 그중 몇가지만 들자면.


삶의 주체로서 삶을 알차고 규모있게 살 수 있게 해준다. 글쓰기는 삶의 가계부이다. 가계부를 쓰면 하루를 돌아보면서 그 하루를 '경제'라는 한 관점에서 파악하여 정리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규모있는 삶을 살게 된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하면 삶의 수많은 경험들에 그냥 휩쓸려서 살아가버리는 게 아니라, 그 삶의 흐름을 잠깐씩이나마 멈추어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가 '주체'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 일어나는 경험들을 그냥 피동적으로 살아버리는 대신에 글쓰기를 통해 그 경험을 바라보고 생각해보고 하는 과정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경험의 주체 (경험을 살아내고, 생각해내고, 글로 써내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그게 픽션이든 논픽션이든--(영화, 소설, 에세이)--등을 통해 감동받고 뭔가 깊이 생각해보고 깨닫고 하는 것, 참 재밌고 유익하다. 그러나 글쓰기를 하면서 클로즈업해서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일견 보잘 것 없이 보이는 

단조로운 일상성이라는 표면 밑에서 마그마처럼 뜨겁게 꿈틀거리고 있는, 밖으로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된다. 마그마뿐이랴? 폭풍우, 노을, 지진, 코미디, 비극, 진공상태---너무 많은 것들이 글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나를 포함해 그 누구든지의 이야기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재밌고, 훨씬 더 드라마틱함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자신들이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범하고 흥미로웠다.  '보통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배웠고  나의 삶도, 남의 삶도 나는 다 중요하고 귀하게 느끼게 되었다. 


글쓰기는 그 자체가 보물찾기이다. 보물찾기 스토리들을 생각해보면 '보물'이라는 뚜렷한 목적은 삶의 원동력을 부여해주고 보물찾기를 하는 사람들은 희망에 차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토리라인은 보물 자체보다는 보물을 찾아가는 희망과 열정적 추구의 과정이 더 의미를 부여한다.  (보물을 찾은 주인공이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그래서 중요한 스토리 라인이 될 수가 없다. 동기도 없고 희망도 없으니까...)


글쓰기가 보물찾기와 비슷한 이유는 바로 그 과정 때문이다. 내가 나를, 나의 주위를, 내가 속한 세상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생각하는 그 사고의 과정이 주는 깨달음과 즐거움이 이미 보물이다. 이야기에 뚜렷한 주제가 안 보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 경험을 갖고 씨름을 할지라도, 그럴 때의 당혹과 난감함 조차도 보물찾기라는 큼직한 테두리 안에서 받아들이고 가는 과정이다. 보물찾기가 끝날 때 보물이 손에 들려 있던 아니던 상관없다. 나는 이미 변했으니까. 변한 '나'가 보물이니까. 


나, 타자, 세상을 만나게 해주고, 배워주고, 나를 바꿔주는 글쓰기를 통해 나는 나의 친구가 되었다. 덜 외롭고, 더 강해졌다. 글쓰기를 하면서 얻는 그런 내면적 성장과 변화는 '옵션'이 아니라 '보장된 선물'이다. 


남도 나와같이 글쓰기를 통해 그 선물을 받았으면 좋겠다.


(k 님도 글쓰기를 통해서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