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나의 장례식을 너의 결혼식처럼 해다오
    부모님 이야기 2018. 12. 19. 15:09

    엄마와 아버지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그 연세의 어르신들이 하시는 이야기--치매와 자식들에 폐끼치는 것 걱정, 혼자 남을 배우자에 대한 걱정은 물론이고 장례식에 어떤 사진을 사용할지, 어떤 찬송가를 불렀으면 좋겠는지 디테일한 것까지 이야기하셨다. 어쩌다가 내가 끼어들면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이야기를 같이 나누자는 듯이 반색하시며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하셨다.  "연명치료는 거부한다, 서류를 작성해놓았다" "하나님 나라 가는 것이니 슬퍼할 것없다"  "우리 죽었다고 우는 것보다 찬송 부르면서 기뻐해줬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욕심도, 한도 다 비우고 밝은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나 스스로도 죽음에 좀 담대해지는 것같았다.

    아버지가 침대 신세를 진지 3 년이 거의 다 되어가던 때---돌아가시기 몇 달 전--- 나는 장례식에 관해 구체적인 플랜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본 미국에서의 장례식들은 한국 장례식 못지 않게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고, 평상시에 아버지와의 대화에 비추어볼 때 분명 아버지가 원하지 않으실 거라는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지? 나는 아버지께 여쭸다.

     "아버지, 아버지 장례식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나는 그 질문에 구체적인 조그만 질문들을 더 할 작정이었다. 조문객의 범위, 숫자, 어디에서...

    그러나 아버지는 내 첫 질문에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씀하셨다.

    "네 결혼식처럼 해다오."

    전혀 예상치 않은 말씀에 "네?" 하고 반문했다.

    "너의 결혼식 때 나는 정말 행복했었다. 식구들이 모여서 간단히 예배드리고 식사하고.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소박하지만 영적으로 충만한 그런 결혼식이었지. 아.....난 그날 정말 너무 행복했어."

    나는 적지않이 놀랐다. 아버지가 에릭과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기뻐하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장례식의 모델로 삼을 정도로 내 결혼식을 마음에 들어하셨다는 것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그 말씀이 우리가 아버지 장례식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내가 결혼식을 간단하게 한 것은 우리집의 전통을 이은 것일 따름이다. 우리 삼남매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비합리적이고 소비적인 한국의 장례문화와 혼인문화가 바뀌어야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언니 오빠는 한국에서 결혼했는데 둘 다 예단이니 폐백을 생략하였고, 언니는 피로연도 집에서 엄마가 만든 음식으로 했다.

    에릭과 결혼을 하기로 작정한 뒤 나는 벨기에에 혼자 가서 에릭 가족들 앞에서 혼인신고를 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아기를 가졌고 임신 한 상태에서 원래 계획했던대로 미국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두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간소한 결혼식은 에릭과 내가 원래부터 좋아하는 '스타일'이기도 했지만, 30 세가 넘어 결혼하면서 에릭의 대학원생 조교 월급으로 살림을 꾸려나가야하는 처지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부모님과 언니가 잘 아는 목사님께 주례를 부탁드리고 교회에서 식을 올리기로 했다. 부모님, 언니 가족, 오빠 부부, 그리고 에릭 쪽에서는 시어머니, 이모님, 에릭의 누나와 조카 두명이 오기로 했다. 에릭과 나 친구 각 한명 초대하고 우리 가족이 내가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온 가족, 다 합해 20 명 정도 함께 했다. 

    골치거리가 하나 있었다. 엄마는 내가 당연히 웨딩드레스를 입을 거라 생각하셨고 그러길 바라셨다.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여성적이고 우아한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나는 (나에게 분명 어울리지 않을) 웨딩 드레스를 입고 싶은 적이 한번도 없었고 나이 30 이 넘어서, 더군다나 임신을 한 상태에서 '순결'을 상징하는 웨딩드레스를 입는 게 아주 버거웠다. 30 중반에의 결혼에 공부만 해왔고 직장이 없으니 돈도 없었다. 애초에 입고 싶지도 않은 옷에 돈을 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 벨기에에서 결혼할 때처럼 그냥 평상복을 입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께 너무 미안했다. 엄마는 내가 공부 끝나는대로 한국에 돌아올 거라 기대하던 상태에서 갑자기내가 외국인이랑 결혼을 한다니 놀라고 섭섭하고 슬픈 상태였으나 나의 뜻을 존중해 맞춰주려고 노력하시는 중이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엄마가 가엾고 유학 내내 나를 지원해주고 기다려주신 엄마 마음에 못을 박는 게 죄스러워 많이 울곤 했었다. 나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지도교수의 부인인 미케가 '너의 사고를 이해하지만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네 마음대로만 하면 아마 나중에 많이 아플 거라'고 한 소리가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나는 고민 끝에 엄마께 진담반 농담반으로 '엄마가 웨딩드레스를 만들어준다면 입겠다'고 했다. 엄마는 선뜻 '내가 만들어보마' 하셨다. 기뻤다. 임신한 나에게 엄마가 만들어주시는 웨딩드레스는 축복의 드레스, 그러므로 하얀색이든, 검정색이든, 호피무늬든, 분홍 비키니든 다 맘에 들 것같았다.

    나는 임신 4 개월의 배를 편안하게 가릴 수 있는 디자인을 엄마께 보여드렸다. 엄마가 할 수 있을 것같다고 하셨다. 우리는 동대문에가서 천과 장식을 구입했다. 드레스 천, 레이스, 장식 구슬, 머리 장식을 만들기 위한 핀---다 합해서 2만 5 천원이 들었다. 내 마음에 꼭 드는 드레스였다.

    언니와 형부가 아침부터 일찍 로스엔젤레스의 교회로  결혼식장을 예쁘게 꾸며줬다. 정장을 입은 나의 귀여운 조카, 달래와 솔이 엄숙하기만 할 수 있던 결혼식 분위기를 따뜻하고 유쾌하게 만들어주었다. 미국 여행이 처음인 에릭의 조카들은 매사에 호기심이 어린 싱글생글 미소로 우리 마음을 밝게 해줬다. 감사하게도 목사님의 따님이 자청해서 피아노 반주를 해주셨다.  

    예배를 드리고, 반지를 교환하였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결혼식 사진은 내 일본 친구의 남편이 찍어주었다. 그는 광고 사진 전문가로 결혼식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는데 우리가 결혼식을 올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능력과 정성에는 절대로 합당치 않은 사례비--100불--에 멀리 엘에이까지 와서 사진을 찍어 주었다. 평소 과묵한 성품의 그는 손에 들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사진기 두 대를 번갈아가면서 우리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게끔 조심스럽게 사진찍었다. (몇 장 안되는 칼러 사진은 사진관에서 분실되어 흑백 사진만 남았다.)  

    결혼식을 마친 뒤, 나는 시어머니를 껴안고 울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에릭은 아버지를 껴안고 울었더라. 


     


    결혼식 끝나자마자 모두 각자의 차로 집으로 내려와 휴식을 취하고 저녁에 예약해두었던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며칠 후 신혼 여행으로 시댁 식구들과 캠핑을 갔다. 

    정작 결혼을 하기 전까지 나는 결혼을 꿈꾸지 않았기때문에 당연히 결혼식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만에 하나라도 결혼을 한다면 결혼식은 아침에 일어나 내려 마시는 커피처럼 자연스럽고 향기로우며, 내가 그 순간을 즐기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거였으면 좋겠다' 라고 혼자 글을 끄적인 적은 있다. 돌이켜보면 나의 두 번의 결혼식은 결코 아침 커피 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결혼식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식구들과 하는 예식이어서 그나마 자연스러웠고  내가 매 순간을 의식하고 즐길 수 있었다. 아침 커피 마실 때처럼 행복했다.   

    결혼식을 올린 뒤에 내 부모가 불쌍하다라는 말도 들었고 내가 불쌍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 말을 한 사람 중의 하나는 결혼선물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우리에게 굳이 선물을 주고 간 사람이었다. 내가 씁쓸한 얼굴로 "저를 불쌍하다고 해요" 하였더니 아버지가 "그런 말에 신경쓰지 말아라. 네가 좋으면 된 거야. 결혼식은 어떻게 해도 이렇궁 저렇궁 말이 나온다." 라고 일축하셨다. 아버지가 상처받지 않으시니, '그래, 전통적인 화려한 결혼식에 익숙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가, 내 부모가 불쌍해보이는 게 당연하지' 생각에 불쾌함이 사라졌다.


    이 글을 쓰면서 (몇 장 없는) 결혼식 사진을 찾아보던 중, 이제까지는 '아버지가 웃는 사진'으로만 기억했던 위의 사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


    아버지의 장례식은 어떻게 할까의 큰 픽쳐는 그려졌다. 식구들이 간단히 예배를 드리기로.

    10월 23 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화장을 하고 온 가족이 다 모일 수 있는 12 월 중순에 우리집에서 가족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그동안 수목장이니 한국 호국원에의 안장 등 이런저런 가능성을 다 생각해보고 정보를 수집해본 결과, 온 가족이 다 미국에 사는 상태에서 한국의 호국원 안장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는 애초에 호국원에 안장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너희들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 죽어서 자리 차지하고 싶지 않다'라는 이유로

    그런데 미국에서 수목장을 하기에는 어머니, 나, 아이들 모두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음도 깨달았다. 특히 한국에서 여행왔다가 아버지 낙상으로 한국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엄마가 이제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같이 돕고 의지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느끼시는 상실감을 고려하면 엄마가 찾아갈 수 있는 묘소가 있는 게 필요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까운 친척 없이 자라는 우리 아이들과 조카들에게도 할아버지의 묘소는 자신들의 뿌리를 기억할 수 있는 그런 marker 가 될 거라는 확신이 왔다. 아버지를 묘지에 모시고 아버지의 영혼께 '저희는 번거롭지 않으니까 아버지를 묘소에서 모시는 거 이해해주세요' 라고 양해를 구하리라...  

    아버지 장례 예배를 주관해주기로 된 박홍관 목사님을 통해 우리 동네 근처에 예쁘고 조용한 묘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중 한 묘원에 당장 가보았다. 엄마는 해가 잘 드는 동산에 위치한 묘소 자리를 보고 마음이 끌리셨다. 그래서 나중에 엄마도 합장할 수 있는 조건으로 아버지의 묘소를 구입했다. 아버지의 유해를 어디에 모시는가로 내내 고민하면서 기도해왔던 엄마는 집에서 20 분 거리의 가까운 묘원에 언제고 찾아갈 수 있다고 무척 좋아하셨다. 우리가 원래 계획했던 12 월 중순에 가족 예배에 맞춰서 아버지를 묘지에 모실 수 있게 된 것도 다행이었다. 

    장례식 2 주 전부터 내내 엄마와 나는 아팠다. 한번 심하게 아프고 나으면 좋겠건만 감기가 나은 듯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힘들게 하고 그러면서 지겹게 내 몸을 떠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무척 아프고 어떤 날은 그냥 힘들고 어떤 날은 멀쩡하고 그러다 다시 아프고. 몸이 불편하니 장례식 준비를 할 수가 없었다.

    워싱턴 디씨에서 장례식 며칠 전에 돌아온 꼴렛이 자기가 장례식 준비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뭘 해야할지 멍하던 차에 꼴렛의 제안이 반가웠다. 

    "안 해본 일인데 할 수 있겠니?" 하고 물었다.

    "엄마, 장례식도 하나의 '이벤트' 잖아. 나 몇년간 이벤트 준비하고 개최하는 일만 했어. 할 수 있어."

    그러고보니 꼴렛이 고등학교 때 학생회 일이나 현재 대학에서 맡은 일이나 다 이벤트를 개최하는 일이었다. 스스로 '장례 준비 위원회 위원장'을 자처한 꼴렛이 개입은 큰 도움이 되었다. 꼴렛은 묘원과 연락을 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할 것들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묘원에서 장례식을 위해 제공하는 것 (천막과 간의 의자 12 개), 장례식 소요 시간 (통상적으로 15 분에서 1 시간), 정확한 매장의 절차 (식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인부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원할 때 와서 매장을 함), 묘지에 꽃을 꽂을 플라스틱 꽃병의 제공 여부 (no, 우리가 준비해야함, 테이블보도 개인적으로 준비할 것)

    이런 정보들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꼴렛은 묘지 위에 놓을 꽃다발과 매장 시에 식구들이 하나씩 던져 넣을 꽃을 사왔다. 할아버지가 평소에 사랑했던 워즈워스의 시, '수선화'를 생각해 수선화를 사고 싶었으나 제철이 아니라 수선화에 가까운 노란색 꽃을 샀다고 했다. 나의 임무는 아버지 사진 찾아내기란다. 아버지의 사진첩, 옛날 가족 앨범, 여러 대의 전화기를 뒤져 100 장 여의 사진을 추려냈다. 꼴렛이 사진을 출력해와 밤 늦게 엄마,나, 꼴렛은 같이 4 장의 두꺼운 보드에 하나하나 붙였다. 질문도 많고 이야기도 많고 웃음도 많았다. 

    나를 크게 도와준 분이 또 있다. 미애 집사.

    장례식 이틀 전, 샌디에고 교회의 꽃 장식을 담당하는 플로리스트, 미애 집사가 전화를 했다. 그녀는 목사님으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면서 아버지 장례식을 위한 화환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이전에도 그녀는  아버지께 아름다운 화분과 꽃을 들고 와 축복 기도를 해주고 간 적이 있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꽃을 통해서 사랑을 전하는 자매이기에 나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알았지만 비싼 꽃다발을 덜컥 받는 게 미안해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언니, 제가 알아서 할께요' 하고 끊었다. 그녀는 "아버님 천국 가시는 길에 꽃을 해드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감동의 문자로 나를 위로해줬다. 

    목사님은 예배순서를 알려주시면서 설교 직전에 식구들이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나 같이 나눌 이야기가 있으면 나누는 순서가 있을터니 가족들에게 미리 알려주라고 하셨다. 간단히 하고 싶은 사람만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니 부담갖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식구들에게 연락했다.

    목사님의 사모님도 우리 가족을 위해 큰 봉사를 하셨다. 한국어를 못하는 가족을 위해 영어로 통역을 해주시기로 한 것이다. 목사님과 사모님 덕에 우리 3 세대는 차분히 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

    장례식 아침, 10 시 반에 도착하니 천막과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고 멀찌감치 인부들이 보였다. 테이블보를 깔고 있는데 목사님이 미애 집사에게서 받은 꽃다발 꾸러미를 들고 오셨다. 우리 식구들은 너무도 놀랐다. 유해함을 놓을 수 있는 꽃다발, 영정사진을 놓을 wreath, 그냥 큼직한 꽃 바구니....엄청난 꽃 선물에 어안이 벙벙했다. 텅 비어있던 테이블은 순식간에 미애 집사의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찼다. 그 순간, 아버지의 장례식이 금방 큰 축제처럼 느껴졌다. 

    '


    목사님의 인사로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언니와 나와 엄마가 앞줄에, 뒷줄에 형부와 달래, 솔이, 에릭, 에밀과 꼴렛이 자리했다.



    목사님 기도 후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찬송 (내 평생 가는 길)을 불렀다. 다음 순서는 식구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순서. 놀랍게도 말없기로 소문난 에릭이 처음으로 일어섰다. 눈물을 억제하면서 에릭이 한 말:

    "지난 몇 년간 우리 가족은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는 삶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주 젠틀한 영혼...어떤 상황에서든 모든 것에 매우 감사하셨지요.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아버지와 같은 본을 우리 삶에 갖고 사는 게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식구들은 하나씩 눈물을 삼키며 이야기를 했다. 달래, 솔이는 할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 할아버지가 본인들에게 어떤 분이셨는지, 그리고 자신의 삶이 어떻게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형부는 사위로서, 그리고 같은 학자로서 아버지를 추억했고, 겸손하게, 삶을 통해서 본을 보여주신 아버님의 모습이 아이들의 삶에 뿌리가 될 것을 소망했다. 언니는 슬픔을 간신히 억누르며 침착하게 시를 사랑한 아름다운 신앙인, 이미 40 년 전부터 언제고 죽을 준비를 하고 살았던 깨끗한 아버지를 이야기했다.에밀은 눈물을 억누르며 자기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위대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노라 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다고 했다. 꼴렛은 눈물, 콧물, 미소가 범벅이 된 얼굴로 항상 책을 읽으시던 할아버지를 추억하면서 돌아가신 후에까지도 할아버지에게서는 고결함이 보였다고 나눴다.

    결국은 온 가족이 다 한마디씩 했다. 원래는 아무 말씀 안하겠다고 하셨던 엄마는 목사님의 '어머니도 하시지요' 의 권유에 일어나셨다.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학자로서 꾸준히 정진하신 아버지, 성차별 없이 아이들을 공평하게 사랑하시고, 6 세 연하인 엄마를 늘 인간적으로 존중해준 아버지를 기억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답게 살고 가신 것이 감사하다고 하셨다. 

    그리고나서 엄마는 말씀하셨다.


    "제 남편께서는 공부 외에는 모든 게 서투셨습니다. 제가 다 해야했지요. 그래서 하루는 제가 남편께 말했습니다. '당신이 혹시 나보다 먼저 천국 가시면 불편한 것 있을 때 나를 불러주세요" 라고. 그런데 그 말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웃었다. 언니가 '무효!' 라고 외쳤고 목사님께서 "천국에서는 아무 것도 불편한 것이 없으십니다" 라고 결론을 내려주셨다.

    모든 식구들이 다 이야기를 한 뒤,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강대건 교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남편으로,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귀한 분이었고, 그를 떠나보내는 것이 큰 아픔이지만 강교수님 자신으로보면 축하할 일이다. 모두는 태어날 때 각자의 사명을 갖고 태어나는데 사명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강대건 교수님은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험란한 한국 역사를 배경으로 많은 고통을 겪으셨으나 학자로서 정진하면서 수많은 후학을 남기시고 가정적으로 가장으로서 자녀에게 본이 되었다. 그 무엇보다도 그는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살았다. 자기가 해야할 사명을 부족함 없이 이루었기에 그는 죽기 13 시간 전에 '나는 행복하다' 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분이 여러분의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임을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또한 그분도 여러분들을 자랑스러워했음을 기억하시고, 그의 행복에 가족 여러분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도 기억하시길 바란다. 

    강교수님은 육신적으로는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 하늘나라에서 새 몸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서도 살아 있다. 기쁘고 즐거웠던 추억으로, 그리고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속에 그의 가르침과 숨결이 존재한다. 우리의 목소리, 말투, 행동 속에 그가 묻어있다. 우리가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날 때, 이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보/아버지/할아버지, 당신의 가르침을 본받아서 제가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후 우리는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셨던 찬송,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불렀다. 목사님께서 축도를 해주시고 예배가 끝났다.

    예배 후에 우리는 잠시 서로 섞여 위로하고 사진을 구경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부들을 불러 아버지의 유해함을 묘원에서 제공하는 박스에 넣고 아버지가 좋아하던 시 한장과 시가 적힌 손수건을 넣었다. 

    사모님과 에밀유해와 함께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시를 넣었다.


    이미 파여있던 묘소에 유해함을 넣고 식구들 한명 씩 노란 꽃을 유해함 위에 놓았다. 목사님을 시작으로 삽으로 흙을 덮고, 인부들이 땅을 다 묻고 평평하게 한 뒤에 유리 십자가와 꽃을 놓았다. 



    온 가족이 목사님을 모시고 사진을 찍었다. 예약해놓은 식당으로 가서 맛있고 즐거운 식사를 하였다. 



    집에 돌아온 후 녹초가 되어 골아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온 가족이 모여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아버지를 기리면서 마음과 몸이 다 살아난 것같았다.

    마치 장례식 내내 우리 앞에 놓여 있던 영정 사진의 아버지의 밝은 미소가 내 마음에 온전히 새겨지기라도 한 양, 나는 너무도 즐거웠다.


    인숙이가 미국 살 때 아버지 사진을 깨끗하게 정리해 준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사용했다.


    목사님, 사모님, 미애 집사님, 인부들등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아버지의 장례식은 번거롭지도 않았고, 우리 마음이 번잡하지도 않았고, 우리는 그냥 온전히 아버지만을 기리고 애도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의 분위기가 가장 잘 표현된 사진 한 장이 있다.  예배가 끝난 뒤에 찍힌 것이다. 


    목사님이랑 어머니와 언니가 즐겁게 이야기하시고 에릭은 삽으로 흙을 파 던져 넣고 있고 손자 두 명은 비통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고 나와 조카는 껴안고 있고 형부는 모든 것이 보이는 위치에서 보고 계시고 이 광경을 꼴렛이 사진찍고 있다. 

    Everybody is minding his/her own business. 

    남을 의식하지 않은채, 자기 나름대로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 즉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울고, 생각에 빠지고 싶으면 빠지고,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는...자기의 리듬대로 울고 웃고 나눈 그런 자연스러운 시간. 

    우리 각자는 자연스럽게 각기 다른 방법으로 아버지와 이야기했고 아버지를 그리워했고, 슬픔을 같이 나누면서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애도하는 것은 격식이 갖추어진 화려하고 큰 장례식에서는 쉽사리 보장받을 수 없는 그런 선물이었다. 

    이제 에밀과 꼴렛은 에릭과 내가 정확히 어떠한 장례식을 원하는지를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그런 큰 장례식이 아니고, 어쩌면 남들이 안스러워할지도 모르는 조촐한  예식. 나는 아이들이 그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다는 것을 아는 게 우리가 죽은 뒤 자신들의 애도의 감정을 다스리고 사망 후의 여러 일처리를 하는 과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 왜냐, 이 세상에 폐가 되지 않고 가볍게 세상을 떠나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뜻을 아는 게 나의 애도의 과정에 큰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서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힘든 과정을 담담하게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큰 기쁨을 주니까...

    모쪼록 아버지의 장례식이 아버지를 행복하게 하셨던 나의 결혼식과 같았기를 바랄 따름이다.

    나중에 아버지를 뵈면 여쭤볼 작정이다.



    강신주의 미래의 장례식의 준비 위원회 위원님 두 분 ^^




    ------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