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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줄리엣의 화단
    부모님 이야기 2016. 5. 31. 13:13

    나와 꽃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다.

    수십 년간 나는 꽃을 보고 아름답다 느끼지 못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들꽃은 좋았다. 돌틈에서 자라는 선인장을 보면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꺾어서 장식을 하고 꽃병에 꽂힌 꽃들은 그렇게 잠시 살다가 죽는 게 가여웠다. 

    어쩌다 꽃다발을 받으면 주는 사람의 마음은 너무너무너무 감사해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 나같은 사람에게 꽃을 선물한 분의 돈 낭비가 아닌가 미안했다.


    그러나 몇 년 사이에 조금씩 변화가 왔다.

    친구들이 가끔 보내주는 꽃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아, 이렇게 꽃을 아름답게 보고 가꾸는 사람들이 있네. 그 마음이 참 곱다..." 하고 생각하며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다시 꺼내보고 하면서 꽃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빠가 돌아가신 뒤에는 꽃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꽃이나 꺾여저 병에 꽂혀있는 꽃이나, 다 예쁘게 보였다. 결국은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꽃과 우리네 인간의 삶의 유사성을 절실하게 깨달아서인지도 모른다.

    스러지는 꽃을 아쉬워하고  꺾어진 꽃을 두고 슬퍼할 게 아니라 꽃의 아름다움을 봐주고, 찬송해주고, 즐겨주는 게 '꽃의 삶' 에 대한 정당한 대접이리라는 생각이 꽃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해줬다. 


    가장 큰 변화는 내가 꽃을 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작년, 아버지가 침대에서 못 일어나시게 된 뒤 몇 달은 정신없이 지났지만, 조금 여유가 생기면서 한 공간에 갇혀있는 아버지께 자연의 숨을 넣어드리기 위해 꽃을 샀다. 철쭉도 사고, 장미도 사고, 안개꽃도 사고.. 


    그리고 우리는 매일 꽃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 산에는 진달래가 한창일텐데, 개나리가 예쁘겠지요, 

    약수터에는 철쭉이 있나요, 아파트 단지 앞에 목련이 참 고왔어요. 

    오빠 묘소에 들어가는 길목의 매화가 너무 아름다웠다고요. 


    그런 말을 나누면서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새로 만든 아버지 방의 커다란 창문 밖은 회색 나무 울타리였다.

    어둡고 우중충한 색깔.

    주택 관리소에서 관리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그 색깔을 어떻게 한다나.

    게다가 뜰 바닥은 콘크리트. 

    아버지 시선이 머무는 곳은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계획을 세웠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정원사를 고용해 우울한 회색 울타리 앞으로 초록색 나무를 심어 아버지의 눈을 즐겁게 해드리리라..

     

    그러던 중, 한달 전, 성경공부 모임의 친구들이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




    내가 '시스타!' 라고 부르는 필리핀계 쥴리엔 언니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눈물의 기도를 시작으로 프리씰라, 쎄실리아, 후아 가 돌아가면서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다. 


    기도 끝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들이 나더러 짧은 시간 내에 아버지 방을 예쁘게 잘 만들었다고 칭찬해줬다. 


    "방이 예쁘긴한데 전망이 좀 안 좋지? 지난 번 계시던 방은 좁긴 했어도 창문 밖에 나무가 있었는데..."


    이전에 부모님이 머무시던 방은 거실 옆의 조그만 공간을 방으로 만든 곳으로 아주 협소했다.

    그러나 그 방 앞에는 작지만 레몬나무, 오렌지 나무, 알로에, 장미의 조그만 화단이 있었고 그 너머로는 눈이 시원하게 잔디가 깔린 공원이 있었으나 방이 너무 좁아서 아버지를 돌보는 게 (목욕, 산책 등등) 힘들었다.

    그래서 방을 하나 만들어 옮긴 것인데 거의 감옥의 마당과 같이 황량하니 문제.


    나는 친구들에게 내 계획을 털어놓았다.


    "경치가 너무 삭막해서 언젠가 아버지를 위해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화단을 만들어드리려고 해. 그러면 아버지가 더 행복해지실 것같아."


    다들, 오! 그래, 좋은 생각이다! 라고 하는데 쥴리엣이 물었다.


    "콘크리트를 걷어내는 건 아주 큰 공사인데 그걸 언제할 수 있을까? 너무 오래 걸릴 것같은데?"


    그건 맞는 소리다. 하루하루 허덕이며 사는 요즘과 같은 처지에 당장 급한 게 아닌 일--화단--은 미루게 되기 마련이다.


    쥴리엣이 말했다.


    "음...내가 화분들을 좀 가져올께."


    무슨 소리지? 

    난 잠시 이해를 못했다.

    쥴리엣은 혼잣소리처럼 말하면서 생각을 나눴다.


    "색깔 예쁜 꽃들 심은 화분들을 좀 사올께. 

    아, 내 정원사 아저씨에게 이야기해야겠다.

    미스터 이 인데, 그도 한국사람이야."


    쥴리엣은 소리내어 생각하면서 정리가 되었는지 결론을 지었다.


    "내가 아버지께 정원을 만들어드릴께.

    내 선물이야.

    다음 주 와도 될까?"


    나는 얼떨결에 선물을 받게 되었다.



    ------


    다음 주, 쥴리엣이 왔다. 

    정원사 이 선생님과.


    그들은 분주히 마당을 청소하더니 가져온 예쁜 화분에 화원에서 사온 꽃을 옮겨 심었다.

    쥴리엣도 덩달아 바삐 화분의 꽃 정리를 했다.





    잠시 후,

    아버지 방 밖으로 정원이 생겼다.


    쥴리엣의 사랑이 꽃들과 함께 심어져 있는 아름다운 화단이.


    버지니아와 아버지는 순식간에 화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흐믓한 놀라움으로 지켜보았다.

    쥴리엣은 아버지에게 와 손을 잡고 아름다운 것을 보시면서 건강해지시라고 축복해주었다.



    장난스럽게 "아부지!" 하고 부르는 모습이 친딸처럼 정겹고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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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는 아침마다 새로운 일정이 생겼다.

    커튼을 활짝 열고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고 서 있는 꽃들을 만나는 행복한 일과!

    불과 몇 주 전에만해도 열어봤자 회색 울타리이니 굳이 열고 싶지 않았던 창문이었는데.


    매일 아침, 꽃들은 묵묵히 서 있다.

    진실한 친구처럼, 거기 그 자리에 항상 서있다.


    꽃들에게서 미소가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인가?


    햇살을 업은 꽃들 덕에 우리는 빛을 본다.

    빨간색, 자주색, 보라색, 노란색, 초록색---각양각색의 빛을 본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불과 몇 개의 화분에 심어져 있는 꽃들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웅장한 그랜드캐년이 주는 감동을 준다는 사실이다.


    묵묵히 한자리에 서서 우리를 기다려주는 꽃들이 궁전 앞에 보초를 서는 가드같다 느껴질 때가 있다.

    또 어떤 날은, 특히 꽃망울들이 동글동글한 이슬을 머금은 날들은, 나는 생글생글 미소로 이웃집 대문 앞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며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떠올린다.


    요즘 엄마는 새로운 일거리가 생겼다. 시도때도 없이 밖으로 나가 화분의 위치를 옮기신다. 

    꽃들이 볕을 더받게. 아버지 눈에 꽃들이 더 잘보이게끔. 


    엄마는 꽃들의 아름다움을 찬송한다. 


    어떻게 쥴리엣은 이런 선물을 할 생각을 할까. 

    하나님의 창조물은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운가. 

    그리고 쥴리엣이 아버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성심성의껏 기도하는 모습에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말씀하신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마음을 위로와 감사로 촉촉히 적셔주던 그녀의 기도....


    우리는 아침마다 꽃을 보면서 쥴리엣의 사랑, 배려, 우정을, 

    리고 쥴리엣을 통해 우리를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한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도전인 요즘, 사랑의 경험은 엄청난 용기를 준다. 


    꽃들 덕에 부모님 방이 밝아졌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도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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