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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 없는 노부부의 사랑과 이별
    부모님 이야기 2019. 3. 4. 09:33

    아래는 내가 병수발이 뭐라는 것을 전혀 몰랐던 1997 년 브뤼셀의 남편의 이모님 (쟈닌). 과 그녀가 돌보는 전신마비 상태의 이모부님 (죠) 을 만나뵌 경험을 기록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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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쟈닌 이모님은 칠십대 초반으로 브러셀의 중심가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계시다. 소위 '부자'이다.

    그녀보다 20 세 연상인 남편의 성공적인 커리어 덕에 부자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그분들에게 자녀가 없기 때문이다.
    50년이 넘도록 금슬좋은 부부인 그들은 애초에 자녀를 원치 않았다. 
    "아이 하나가 집 한 채" 라는 말이 맞는 게, 남편의 부모님들은 자식이 네 명이니 살림이 소박했지만 이모의 삶은 풍족하고 화려했다.
    이모님 부부는 음악, 문학, 미술에 조예가 깊었고 그림을 수집하는 게 취미였고 그들의 아파트는 벽마다 재산가치가 뛰어난 그림들로 꽉 차있었다.

    죠는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고아로서 부르주아 가정에 입양되어 좋은 교육을 받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서 부를 축적했으나 원래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갖지 않기를 원했다. 쟈닌은 맏딸로서 어려서부터 5 명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면서 이미 육아의 경험을 해볼만큼 해봤으니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갖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 없이 연인처럼 살기로 했고, 원대로 그렇게 살았다.

    자유롭게, 행복하게, 그리고 부부로서의 신뢰를 지키면서. 

    젊었을 때의 사진들 중, 비키니를 입은 쟈닌의 탄탄하고 균형잡힌 모습이라던가 죠의  근육질 몸매의 흑백 사진은
    그들이 원했고, 선택했고,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뤘던 그들의 사랑과 결혼을 요약해주는 듯했다. 

    쟈닌은 활발하고 긍정적 기운이 넘쳐 흘렸다. 젊어서의 자신만만한 미소는 70이 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남편 사랑도 변함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이 반짝거리고, 신났다. 할 이야기가 어찌나 많은지..
    ‘내 남편은 구교가 국교인 벨기에에 그리 많지 않은 개신교도였어. 그는 여행을 좋아했고, 특히 중동에서 찍은 사진들이 많단다.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사교 모임의 중심이었고....’

    쟈닌은 안타까워했다.

    "팜펨, 네가 좀 일찍 우리의 삶에 들어왔다면 내 남편을 만났을 텐데...그랑 너는 참 잘 통했을텐데..."

    나는 남편에게 죠에 대해서 물어봤다.

    “이모부는 뭔가 참 재밌는 분 같은데, 어린애들에게 잘 해주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농담 같은 것이 약간 우울하고 독특했어. 나는 어려서 이모부 옆에 있을 때에 어떻게 응대해야하는가를 몰라 쩔쩔맸던 기억이 있어" 고 했다.

    남편은 “팜펨, 당신이랑 이야기하면 잘 통했을지도 몰라” 라고 덧붙였다.


    남편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시어머니도 '너랑 죠와 만났다면 둘이 잘 통했을 거다' 라고 했다.



    ——

    나는 죠를 만난 적은 없지만 ‘뵌 적’은 있다.
    죠와 쟈닌의 브러셀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일방적으로 그를 ‘보았다’.
    왜냐하면 죠는 의사 표현도, 거동도 불가능한 전신마비 환자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뵌 것은 1995년 처음 벨기에를 방문했던 해, 쟈닌에게 인사드리러 갔을 때였다.
    이모님은 집안 구경을 시켜주겠다면서 여기 저기 우리를 안내하던 중, 어떤 방의 문을 열기 전에 말했다.

    “여기가 내 남편의 방이야.”

    문을 여니 어스름한 방에서 커다란 덩치의 남성이 잠을 자고 있었다.
    쟈닌은 남편이 마비가 된 후에 아파트를 완전히 개조해서 수발이 좀 편하게 했다고 했다. 샤워도 의자에 앉은 채 할 수 있게, 대소변 가리는 것도 쉽게, 거실에서 침실로 옮기는 것도 쉽게....

    쟈닌은 웃으면서 털어놓았다.
    “사람들은 다 나를 어리석다고 했지.”

    모두들 쟈닌이모님을 염려해서 한 말들이지만 이모님께는 상처가 된 비판들은 대강 “마비가 된 게 벌써 몇 해냐. 치매도 왔는데, 네 스스로의  생각도 좀 해야지... 저렇게 하다가 탈이 날까 두렵다' 의 주제였다.  

    먹여도, 기저귀 갈아줘도 반응이 없는 사람, 하루 종일 티비 앞에 앉아 있는 마비환자 죠, 그는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이었다. 그 옛날, 근육질 몸매를 뽐내고, 음악과 춤, 사교계의 중심으로서, 돈이 많아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사람 부리고 싶은 대로 부리고 살던 남성..아이 키우는 구질구질한 일을 싫어하고, 문화, 교양, 세련미, 로맨스의 화신으로 살아온 죠는 이제는  없었다.

    사람들은 죠를 위탁 시설로 옮기라고 종용했다. 위탁 시설에 옮겨지면 대부분은 일 년을 못 넘기고 사망한다지만, 이미 죠는 죽은 사람이니, 산 사람이 살아야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런데 쟈닌은 그런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나에게 나의 남편은 항상 똑같은 사람이야. 전신마비든 아니든, 그는 내가 평생 사랑한 사람이고 나는 앞으로도 그를 사랑할 거야.
    그리고 그는 나를 끔찍히 사랑해준 사람이다. 그가 나에게 준 사랑을 나는 평생 갚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돌볼 수 있는 것도 나에게는 축복이다.' 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결혼한지 며칠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나는 이모님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잘은 몰라도 나도 같은 상황이면 남편을 돌보는 쪽을 택했을 거 같았다.  전신마비 환자라고 '죽은 사람'이라고하는 것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나는 내가 죠의 상태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싶을까?
    어쩌면 나도 그냥 죽어버리고 싶을지 모른다 싶었다.
    폐되게 사는 거, 무척 힘들 거 같았다.
    ‘죽은 사람을 치워버려라!’ 식의 생각보다는, 이모님이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폐되지 않게 죽고 싶다’ 라는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면
    남편을 위탁 시설로 보낼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뭐가 ‘폐’이고 뭐가 ‘존중’인지 모호했다.

    그게 95년도, 브러셀 첫 방문 때 내가 알게된 이모님과 이모부님의 이야기였다.

    —————————————
    죠 이모부님과 두번째 ‘만남’은 1997 년 브러셀을 방문했을 때 이뤄졌다.

    2 년 사이에 이모부님의 상태가 악화되었고 쟈닌 이모님은 혼자 힘으로 수발을 들 수 없어서 의료보험에서 지불하는 '도우미'의 도움을 받았다. 쟈닌은 자신의 어깨가 아프고, 발목이 쑤시고, 허리가 아픈 상태에서도 남편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비판에도 그녀는 단호하게
    '남편은 전신마비이지만 죽은 사람은 아니다’
    ‘나는 남편을 마지막 순간까지 집에서 돌볼 거다’
    라고 하며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쟈닌 이모님을 아끼는 식구들은 이모님의 고집을 어리석음으로 치부했고, 답답함을 느끼다 못해 분노했다.

    노상 남편의 옆에 붙어 앉아 있어야하는 이모님은 이제 사회활동도 점점 축소되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큰 명절에도 자기와 한마디도 나눌 수 없는 마비 환자 남편과 단 둘이 앉아 티비를 보면서 죽음과도 같은 내면의 정적과 씨름해야했다.

    우리가 벨기에에 머물던 당시, 7월의 어느 날, 벨기에 날씨답게 좀 음산하고 우울한 비오는 날이었다.
    남편이 이모님의 생일이라며 함께 가서 축하해주자고 했다.
    우리는 동네의 조그만 빵집에서 가장 조그만 케잌을 하나 샀다. 남편과 이모님과 나, 세 명만이 먹을 작은 케익을...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였는데 우리는 걷기로 했다. 걸으면서 좀 우울했다. 몇 해 전 잠자는 이모부님을 뵌 이후로 처음으로 만나는 건데 전신마비 환자를 만나서 어떻게 행동해야하고, 이모님께 어떻게 처신해야하는 건지 전혀 감이 안 왔다.  당시 식구중 누구의 표현을 따르자면 "개와 고양이만큼도 반응하지 못하는 마비환자"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해야하는가, 이제까지 내가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혹시나 내가 처신을 잘못해서 이모님께 상처를 줄까봐 걱정되었다.  이미 찟길 대로 찟겨진 이모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속으로 오늘도 이모부님이 자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모님은 우리를 반겨 맞아주셨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이모부님이 어딨나 두리번 거렸다.
    약간 어두운 거실의 한 중앙의 큰 안마의자에 이모부님이 앉아 있었다. 그는 티비를 보고 있었다.

    이모님은 그의 유일한 낙이 티비로 콘서트를 보는 것이고, 가끔 만화영화를 보여주면 좋아한다고 설명하면서 우리를 거실로 안내했다.
    이모님은 아주 큰 소리로 이모부님께 외쳤다.

    "여보, 우리 조카들이 왔어. Eric, 기억하지? 에릭의 부인, 팜펨이도 왔어. 팜페미는 한국 사람이야. 한국 사람! 기억 나? 2년 전, 크리스마스 때도 얘들이 왔었어.”

    이야기...말...이라기보다는 '외침'에 가까운 쟈닌의 음성.
    이모부님은 미동도 없이 정지상태로 있었다.

    이전의 근사한 풍채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콧구멍과 가슴에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지만, 널찍한 어깨에 맑은 피부, 그리고 체크무늬 남방이 잘 어울리는 젊어보이는 할아버지였다. 

    쟈닌은 나를 끌어당겨 죠 앞으로 내세웠다.  


    "여기, 얘가 팜페미야! 에릭의 부인!!"

    나는 죠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발 이 미소의 뒤에 숨어 있는 나의 이 어색한 기분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면서 죠를 응시했다.
    공허한 그의 눈과 나의 시선이 만났다.

    공허한?

    아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의 시선을 맞이한 죠의 시선이 잠시 또렷해서였다.
    그의 시선은 무심하게 허공을 향한 게 아니라 정확히 나라는 대상을 향해 있었다. 그의 눈에는 호기심마저 어려 있었다. 

    (그자리에 함께 있던 남편은 나중에 나에게 말했다. 죠와 나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죠의 눈빛이 빛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모부가 놀란 것같아 보였어. 뭔가를 분명 인지한 그런 시선이었어.’ 바로 그게 내가 이모부의 눈을 본 순간의 느낌이었다.)

    죠이모부 님의 시선은 ‘죽은 사람과 다름없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몸은 죽은 사람과 다름 없을지 몰라도, 그의 시선은 살아 있었다.

    나는 놀라움을 애써 감추고, 그와 눈맞춤을 유지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에게 성큼 다가가 그의 큰 손에 나의 작은 손을 얹었다.

    “죠, 저는 팜페미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와 손을 잡는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자신있게 한 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그의 큼직한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쟈닌이모님은 매일 이런 순간을 혼자 경험하고 살고 계시는 거겠지? 그래서 이모부님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나는 죠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쟈닌과 대화를 나눴다. 가끔 쟈닌은 죠에게 외치시듯 큰 소리로 우리의 대화 내용을 요약해서 말해줬다. 죠는 당연히 반응이 없었고.
    우리는 그럼에도 절뚝거리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서 나는 그날 이모부님을 만나러 오기 전에 느꼈던 불안감?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정신과 몸이 다 마비된 환자"를 만나는 게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는 사람--즉 살 가치가 있냐 없냐의 혼란스러운 질문을 야기할 그런 존재를 만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존재’를 만났고, 그와 눈맞춤을 했고, 그의 따뜻한 손을 잡았고, 그리고 대답이 없는 그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머리속이 하애지는 것같았다.

    이모부님은 초보 부모인 남편과 내가 한살배기 아들을 돌보면서 너무도 익숙해진 그런 ‘돌봄’을 받고 있었다. 주는대로 먹고, 용변을 보면 그것을 남이 치워주고,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갓난아기와 다름 없는 인간이나, 점점 성장을 해갈 갓난아기와 달리, 하루가 다르게 마음과  몸이 굳어질 것이며, 누구와 아무런 소통을 하지 못한 채 서서히 죽음이라는 암흑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 시선은 뭐지? 치매, 전신마비로 얼음처럼 굳어진 그의 얼굴에 스치듯 반짝인 그의 호기심의 눈빛을 어떻게 해석해야하지? 

    우리는 이모부님 옆에서 이모님의 생일 케익을 잘랐다. 아이들의 떠들썩한 생일잔치에 익숙한 남편과 나에게는 참으로 생소한 생일 파티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고마와, 키스, 웃음...다 있었으나 기쁨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모님은 이미 남편의 죽음을 마음으로 준비한 채 5 년째 수발을 들어오고 있는데, 그리고 그들의 거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의 사자가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데, 거기서 우리가 밝은 얼굴로 해피 버스데이 어쩌구저쩌구 한다는 게 유치한 연극, 뻔한 거짓말 같았다.

    쟈닌이모님이 이모부님께 음식을 줘야한다하며 주사기 모양의 음식 주입기를 들었다. 우리가 한살배기 아들에게 약을 억지로 먹여야할 때 쓰는 기구와 똑 같은 것이었다. 단지 세 배 정도 컸다.

    쟈닌은 죠의 고개를 뒤로 젛히더니 음식을 주입했다.

    "여보, 먹어야 해. 먹고 건강해야지? 어서...옳지...아니, 먹어야한다니까! 여보, 제발 먹어! 삼켜!”

    쟈닌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억지로 먹이는 것는 잔인한 행위같기도 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약을 억지로 먹이는 엄마의 모습이 엿보이는 그런 고역스런 행위이기도 했다.

    지금은 우리가 옆에 있지만, 평소에는 두 분이 단둘이 계실텐데, 쟈닌은 대답할 수 없는 남편에게 저렇게 매일 투쟁하면서 음식을 먹이겠지?
    이 아파트에서 '대화'란 저렇게 일방적으로 음식을 먹일 때 뿐이겠지?

    내가 깊은 생각에 빠진 것을 눈치라도 챈 듯이 쟈닌 나를 보고 웃었다.

    "내가 아기 없이 평생 살았는데, 이제 아기가 생긴 거 같지?"

    그러나 죠는 음식을 먹자마자 뱉어냈다. 토한 것인지, 뱉은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음식의 액이 줄줄 흘렀다. 죠의 가슴의 앞받이 수건이 지저분하게 되었다.

    쟈닌은 펄쩍 뛰었다. 음식을 잘못 삼키면 기도로 들어가 큰 사고가 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죠의 목을 똑바로 세우더니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여보, 이럼 안 돼! 음식을 삼켜야지! 당신을 할 수 있어! 삼켜야지. 삼켜야지! 당신은 할 수 있어!!"

    죠는 삼키지 않고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그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표정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다.
    죽음과 삶의 싱갱이를 보는 거 같았다. 아무리 회피하려고 해도 죠의 얼굴의 표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무표정하리라고만 예견했던 마비환자의 얼굴에 안타까움, 슬픔과도 같은 표정이 담겨 있는 것은 내 착각일까? 내 선입견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나는 그 때 죠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분명 그는 죽음을 원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문제다.  남편을 돌보려는, 살게 하려는, 죽는 순간까지 돌봐주려는 부인의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 동시에, (평소에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로 비추어볼 때) 독립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이모부님께는 이러한 의존, 이러한 무력함, 이러한 처절함이 스스로에게 용납하기 힘든 고통이리라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그렇다고 요양소에 보내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가?  아니었다. 죽는 순간까지 남편을 돌보기 원하는 이모님의 마음이 지옥일테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던 그들은 아플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게 꼭 아이가 없어서 생긴 일은 아니었다.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죽음으로 이별해야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을 문제였다.

    나는 그만 눈물이 터졌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급히 구석에 가서 엉엉 울었다. 에릭이 나를 쫓아와 나의 등을 도닥거렸다.

    쟈닌은 죠의 옷을 갈아 입히고 방에 눕히고 나서 거실로 돌아왔다. 

    나는 퉁퉁 부은 얼굴로 녹초가 되어 소파에 눕듯이 앉아 있었다. 쟈닌이 나에게 말했다.

    "팜펨, 울지 마. 이게 매일 있는 일이란다."

    "울어서 죄송해요. 그냥...슬펐어요."

    "아니, 울지 말라는 소리를 잘못 한 거 같다. 울어도 돼. 울고 싶으면 울어...."

    쟈닌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내 남편이 처음 쓰러졌을 때, 내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를 거야.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지금도...."

    나는 쟈닌이 울음을 터뜨릴까 걱정 되었다. 그랬다간 나는 그냥 통곡할 거 같았다. 슬프고 말고를 떠나, 죠와의 첫 대면부터  모든게 너무 일이 너무도 격렬했고, 깨끗이 정리될 수 없는 생각들이 엉켜버려 있어서였다. 풀 수 없는 문제, 울어서라도 마음을 진정해야할 상황.

    쟈닌은 말을 이었다.

    "지금도 내 가슴에는 피눈물이 흐른다."

    '피눈물'이라는 게 아픔의 묘사가 아니라 그냥 문자 그대로 피가 눈물로 나온다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만큼 그녀의 고통이 가깝게 느껴졌다.

    쟈닌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다독였다.
     

    "그런데 운다고 해결되는 게 없더라. 내가 해야할 일은 그냥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어. 그리고 그러기로 마음 먹었어. 남편이 가는 날, 나는 웃으면서 보낼 거야.
    여보, 우리 참 행복하게 잘 살았지? 당신이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이제 잘 가!' 하면서 보낼 거다."

    에릭과 나는 숨을 죽이고 쟈닌의 말을 들었다.

    "우리는 자식이 없었기에 참 행복했어. 지금 이 순간도 자식이 있었더라면...하고 아쉬움을 갖질 않아. 사람들은 그렇게들 이야기해. 자식이라도 있었다면 지금 더 쉬울 거 아니겠냐고.
    그런데, 우리는 자식을 원하지 않았거든? 그리고 그래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거든? 그러면 됐지, 이제와서 자식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후회하는 것은 웃긴 일이야. 

    진심으로 나는 나와 남편 단 둘만 살아온 그 삶에 감사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남편과 같이 택할 수 있었던 인생은 행운이었어. 
    그리고 그 선택이 잘 한것이었음을 매 시간, 매 분 느끼면서 살게 해준 나의 남편에 감사해. 내가 지금 돌보는 것도 너무 행복해. 관절이 쑤시고, 허리가 아프고 하지만 나는 행복해."

    나는 가만히 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이 있더라도 입을 다물어야했다. 한 인간의 진솔한 삶의 회고에, 삶의 정의 내리기 작업에 끼어드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나는 쟈닌의 이야기를 들으며 약간 위로를 받았다. 그녀는 감상주의에 빠져서 남편을 돌보는 게 아니었다.
    전신마비 남편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해서 절박하게 남편의 쓸모없게된 몸에 매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고,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의연히 자기가 해야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것, 남편을 몸소 돌보기로 한 것처럼 남이 하지 않는 선택을 할 때 감수해야하는 몰이해, (선입견에 가득찬) 비판도  그녀는 의연하게 감수하고 있었다. 

    쟈닌과 죠의 집을 나선 것은 밤 늦은 시각.. 아까 내리던 비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말없이 걸었다. 말할 기운이 없었다.

    속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랑 이 남자는 어떻게 인생을 하직하게 될까? 나랑 이 남자도 병수발을 드냐마냐 선택을 내려야하는 상황이 닥칠까?  우리들은 어떤 엔딩을 맞을까?  나랑 이 남자의 아이들은 우리의 죽음에 어떻게 반응할까?  나는 마치 한번은 꼭 봐야할 아름다운 사랑 영화, 그러나 너무 비극적이라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를 보고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심결에 옆을 보았다. 에릭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한손으로는 우산을 잡았으니 눈물을 닦지 못해 얼굴이 엉망이었다. 이미 펑펑 울었던 나는 더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호주머니에  시무룩하게 꽂았던 손을 빼어 우산을 잡은 에릭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에릭의 흐느낌이 들렸다. 남편은 결혼식 날, 첫 아이를 낳은 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소리내어 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건장한 체격에 자신감이 넘치는 이모부를 바라보고 자란 에릭에게는 한 남성으로서 또 다른 남성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게 더 큰 충격일 수 있겠다 싶었다.
    어쩌면 그도 나처럼 평생을 사랑한 연인들의 마지막 이별 과정이 얼마나 혹독할 수 있는지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감정이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그들과 비슷한 상황에 놓일 것이니 말이다.

    늦은 밤이라 차가 없었다.  침묵 속에 비에 젖은 코블스톤 길을 밟으며 우리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갑자기 에릭과 내가 첫아이를 낳은 뒤 이렇게 단둘이 걸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 옆에서 함께 걷는 남편이 오랫만에 애인같이 느껴졌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직 2 년밖에 안된 우리의 결혼생활,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낼까? 어떻게 걸어갈까? 우리가 맞이하는 노년은 어떤 것일까?  만약 우리가 헤어지지 않고 잘 살아낸다면,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계속 자란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만큼 이별도 아프리라. 이모님과 이모부님처럼...그래...사랑하면 좀 아파도 된다...

    이렇듯 나만의 생각에 잠겨있는 나와 내가 모르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는 남편은 미로와 같이 복잡하고 아기자기한 브러셀의 골목길을 조용히 걸었다. 

     

     

    ps. 이모부님은 1 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20 년이 지난 지금까지 쟈닌 할머니는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시다. 작년에 뵈었는데 여전히 이모부님의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나에게 사진을 보여주시며 행복한 옛날을 떠올리시고, 이모부님의 유품 중 조그만 역기 피겨를 나중에 바디빌딩을 하는 나의 아들에게 물려주겠노라 약속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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