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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표가방, 시간을 초월하는 우리의 이야기카테고리 없음 2024. 10. 24. 00:32
1978-9, 고등학교 2-3 학년 때 들었던 ‘우주표 책가방’을 나는 아직 갖고 있다.
어떤 자재로 만들었는지 신기하게도 40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다.
이번 추수감사절 가족 여행을 떠날 때 우주표 책가방에 짐을 넣어보았더니, 여행용 가방으로 최적이었다.
아이패드, 책 세 권, 공책, 그림패드, 필통, 스누피 인형을 넣었는데 자리가 남는다. 그도 그럴 게, 5kg 이 넘는 무게를 끄떡없이 소화해 냈던 가방이 아니더냐.
남는 자리에 책 두 권을 더 넣었다
초등학교 때 나의 영혼의 양식이었던 ‘빨간 머리 앤’ (신지식 역) 5 권 중 1 권과 2 권.
세로로 인쇄된 옛날 책이다.
눈이 침침해 읽기 어렵겠지만 최근에 새로 산 돋보기로는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다가 딸에게 우주표 책가방과 “빨간 머리 앤”을 보여주었다.
자기도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의 한국어 판, 그것도 1964 년도 출판본을 보곤 신기해한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쓰겠음)
미국 애들이 들고 다니는 배낭과는 다른 지구표 가방에도 관심을 보였다.
나는 딸에게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이 가방은 5 kg까지 채울 수 있었어.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는 책이 많아서 점심 가방은 따로 들었었지
이곳 큰 칸에 책과 공책을 넣었고, 옆의 작은 칸에 실내화를 넣었단다.”
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학교에 실내화를 갖고 간다고? “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딸에게는 생소한 개념—실내화.
"응, 당시는 교실, 복도가 마룻바닥이었어.
교실에 들어갈 때 실내화로 갈아 신었단다.
실내화는 하얗게, 깨끗하게 빨아서 천 주머니에 넣은 뒤에 가방에 넣었어.’
딸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얘기 더 해줘, 더 해줘! 의 신호.
가방 안에서 발견한 빨간 이름표 두 개도 보여주었다.
고등학교 2 학년과 3 학년 때의 이름표.
"이건 엄마의 이름표야. 3 학년 10 반, 학급 내에서 나의 번호. 그리고 나의 이름."
‘오 마이갓, 오 마이갓!’
마치 앞마당에서 우물을 팠는데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기라도 한 듯 딸아이는 흥분해 내 이름표를 매만지면서 ‘팜... 펨’ 하고 이름을 몇 번씩 읽었다.
명찰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학생들은 아침에 교문에 들어서는 순간 명찰을 달아야 했어.
명찰뿐만이 아니라 교문에 들어설 때마다 학생들은 자기 옷매무새를 매만지곤 했지.
교문에 규율부 학생들이 쭉 줄지어 서서 두발, 복장 상태를 검사했기 때문이야.’
이 부분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딸은 동급생들이 행동거지를 감/시/하/고, 선생님이 불량학생을 처벌하게끔 감독하는 규율부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가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게끔 ‘학생회 (ASB)’의 한 부서로서 학생들이 복장, 두발 상태, 이름표 착장 여부 등등을 체크하는 역할을 담당한 부서’라고 했더니 학생들끼리 왜 검사를 하고 보고를 하냔다.
'나도 싫었다. 그러나 우리 때는 그랬었다' 하고 패스.
딸이 두발 검사는 정확히 뭐냐고 물었다.
"음… 머리가 너무 길면 안 되고.. 단발머리 경우에 귀 밑 2 센티가 넘으면 안 되었고….
단발머리를 약간 느슨하게 핀을 꽂아서 귀엽게 앞머리를 내려도 안되고, 교복을 약간 변형해서 눈에 띄게 여성적이라던가 깜찍하게 한다던가 해도 안되었고…."
고등학교 때 멋을 낼 줄 알던 친구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방과 후 학교를 나서기 전에 머리에 물을 묻혀 애교머리를 머리를 빗고, 구두를 닦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하게 했던 나의 친구들... 그 모습은 자기 멋대로 입고 벗는 미국 아이들에게는—요즘의 한국 아이들에게도—이해가 되지 않을, 먼 옛날이야기였다.
딸아이가 재밌어하니 나도 추억 여행이 신나서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청소.
"수업이 끝난 다음에는 온 학급이 청소를 같이 했어.
의자를 책상에 올린 뒤 교실 뒤로 옮긴 뒤 학생들은 그룹으로 나뉘어 교실 청소를 했어. 교실 유리창, 바닥, 복도..
우리는 줄지어 쭈그리고 앉아서 바닥 윤을 내면서 수다를 떨었지.
엄마 학교에서는 윤을 내기 위해 학생들이 고동색 구두약이나 양초를 갖고 다녔고 (퍼뜩 떠오른 상표명, ‘말표 구두약’)
시골 학교 애들은 참기름 들기름도 사용했어."
참기름으로 바닥을 닦다니…. 딸아이는 입을 벌린 채 집중한다.
(이게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라고?)
"청소를 하는 동안 방송반에서는 스피커로 크게 노래를 틀어줬어.
그 노래가 지금도 생각난다."
나는 딸에게 노래 일부분을 들려주었다. 아이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내가 근 50 년 전의 노래가 기억난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불러재꼈다.
’하늘은 푸릅니다. 창문을 열면
온방에 하나 가득 가슴에 가~득
잔잔한 호수같이 먼 하늘에
푸르름이 드리우는 아침입니다.
아가는 잠자고 쌔근쌔근 잠자고
뜰에는 울던 새가 가고 안 와요.
돌아오실 당신의 하루해가 그리워
천년처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헉.. 부르다 보니 집에서 아기 보며 남편 돌아오길 기다리는 전업주부의 노래였네!
이 노래를 매일 들으면서 무릎 꿀고 바닥을 닦던 나의 면목여자 중학교 친구들… ㅠ
점심시간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학교 급식이 존재하지 않을 때여서 학생들이 다 점심을 싸갖고 다녔어.
스테인리스 도시락, 알루미늄 도시락에.
김치가 가장 보편적인 반찬이었고 어묵볶음, 소시지랑 달걀말이, 멸치볶음은 아주 고급반찬이었어.
애들이 다 비슷비슷한 반찬을 싸왔지만, 점심시간에는 반찬을 바꿔먹곤 했지.
아, 실제로는 점심시간 전 휴식 시간에 밥을 먹어치우는 일도 많았어.
식욕이 왕성했던 때니까..
병에 넣은 김치가 새지 않게끔 조심해야 했는데, 그래도 가끔 김치국물이 새서 공책과 책이 젖고 냄새가 진동을 하는 사고가 나곤 했지.
겨울에는 교실 한가운데에 난로가 있었는데
2-3 교시에 난로 위에 도시락들을 차곡차곡 쌓았어.
따뜻하게 밥을 먹으려고.
한 두어 시간 지나면서
맨 밑에 있는 도시락의 밥은 누룽지가 되어갔고,
교실 안에는 구수한 냄새가 가득 찼지.
도시락의 위치를 바꾸는 것도 주번의 일이었어.‘
딸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질문을 하고, 나는 답을 하면서 오랜 시간 추억 여행을 같이 했다.
생리대 이야기도 나왔다.
“우리는 면을 겹겹으로 만 생리대를 핀으로 고정해서 썼는데, 생리양이 많은 날은 교복에 묻기도 했어.
불편했었어. 집에 와서 찬물에 면생리대를 빨아 널었어."
딸이 와~~! 탄성을 지르더니만 나에게 부탁한다.
“엄마, 이 이야기들 너무 재밌어. 나한테 좀 써서 남겨줘. 두고두고 읽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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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표 가방에서 시작된 추억 여행...딸이 옛날 이야기를 글로 써달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이게 뭐가 재밌다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왜 나의 70년대 중고등학교 이야기가 딸에게 흥미로운지 이해가 되었다.
나도,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딸'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어머니께 함경도 신포, 이원에서 보낸 유년기, 청소년기, 피난 이야기, 20대 때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경험으로 엄마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기는 과정은 단순히 '엄마의 과거의 회고나 사실 기록' 만이 아니었다.
엄마의 이야기는 곧, '엄마라는 인간이 나에게 끼친 영향'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무게를 좀 더 가볍게 해 주었던 엄마의 이야기..
또한 엄마의 성장과정을 알게 되면서 나는 엄마의 삶이 나만이 아니라 나의 아이들에게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발견했다.
내가 엄마로서 나의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적용했던 여러 가치 기준의 기원은 엄마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엄마 이전에 외할머니가 내가 현재 고수하는 가치관의 '원조'였고 이야기를 더 듣다 보니, 증조 할머니가 할머니께 준 영향이 컸다.
즉, 나에게 아주 중요한 교육관의 원조는 증조 할머니였고 나는 그것을 '엄마의 이야기'를 찾아 듣기 시작하고 기록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 뒤, 딸에게 나의 이야기를 써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야하는 이유가 명확했다.
딸에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들이 - 나의 엄마의 이야기가 나의 현재에 직접/간접 영향을 끼쳤듯이-
언젠가 딸이 자신의 뿌리를 더 깊이 알게 되고, 자기 형성에 끼친 시간과 문화와 가족관계라는 문맥 안에서 자신을 정의하게끔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벨기에/한국 부모를 두고 자라는 딸아이에게는 적어도 엄마쪽 이야기라도 가능한한 많이 알고 있는 게 삶을 풍성하고 단단하게 해줄 것이다.
내가 해주는 나의 이야기와 나의 어머니의 이야기들은 딸의 삶에서 끊임없이 해석되고 분석되고 이해되면서 딸과 엄마와 나를 하나로 묶는 끈이 되리라.
우리의 삶은 이야기를 통해 이어지고, 이해되며, 현재에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빨간머리 앤, 우주표 가방에 담긴 추억을 나누면서 딸과 나는 서로의 다른 문화적 경험을 나누었듯이,
우리의 삶은 경험의 공유와 이야기를 통해 이어지고, 이해되며, 현재에 새로운 의미가 태어난다.
꼭 부모님, 조상님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수많은 이야기의 고리 속에서,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발견하고, 이해하며, 성장해 나간다.
어머니의 옛날 이야기이든, 전혀 모르는 타인의 이야기이든, 이야기들은 우리의 삶에 하나의 'map' 이 되어주고, 현재와 미래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다는 생명성을 갖고 있다.
인간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그리고 삶의 이야기가 아름답고 의미있는 이유이다.
딸에게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과연 내 건강 상태로, 내가 현재 쓰고 있는 '어머니의 삶'의 이야기에 덧붙여 나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내 몸이 건강해야 하는데...
쓸 이야기는 너무도 많은데…
한국 친구들의 우정, 민방공 훈련, 만원 버스, 공중목욕탕에서 때 모르는 사람과 때 밀어주기 등 너무도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내가 힘이 들어도 딸을 위해서 이야기를 계속 쓰리라 마음 먹는다.
내가 이 세상이 없더라도 우리의 이야기는 시간을 초월해 계속될 것이며, 우리를 하나로 연결하는 끈이 될 것이기에 더더욱..(2023 추수감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