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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상록 산파
    카테고리 없음 2023. 8. 24. 10:03

     

    2023. 06.


    남편의 지도교수였던 J 교수로부터 문자가 왔다.

    '팜펨, 드디어 나의 수상록이 완성되었다. 그 수상록이 나올 수 있게 해 준 당신에게 정식으로 책을 증정하기 위해 저녁 초대를 하고 싶다'라는 내용.

    남편과 나는 샴페인을 들고 가 J 교수의 출판을 축하드리고 책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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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대 후반의 J 교수는 근 30 년 전, 남편을 미국에 초대해 남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분이다. 당시 같은 대학에 visiting scholar 자격으로 왔다가 우연히 남편을 만난 순간, 나는 첫눈에 사랑에 빠져 구애를 하고... 이렇고... 저렇고... 하다가 우리는 28 년을 함께 해왔다.  

    J 교수가 나와 남편을 소개시켜준 것은 아니지만, 남편과 내가 만날 수 있는 우연은 그가 남편을 초대하지 않았더라면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항상 '은인'으로 여기고 있다.

    남편이 박사 논문을 쓸 때부터 지금까지 교수와 남편은 지도교수/제자의 관계를 뛰어넘어 아주 수평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둘 다 불어가 모국어이고, 전공분야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 관한 관심이 비슷하니 아주 친하다. 그의 부인과 나는 우리만의 공감대가 있어서 우리끼리 따로 만나는 사이다. 부부동반으로 종종 식사를 하고 문화 행사를 같이 한다.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다. J 교수와 대화도 마찬가지로, 나는 많은 질문을 했고, 그의 이야기가 항상 재미있었다. 그는 참 독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J 교수는 수학, 심리학, 문학, 음악, 철학, 역사에 조예가 깊다. 수학 중간 고사에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인용해서 문제를 낼 정도로 그는 문과/이과라는 이분법을 뛰어넘는 르네상스적 인간이다  젊어서는 DJ 도 했다고 한다. 그는 아주 마음이 따뜻하고 generous 하고, 겸손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은 집요하게 추구하는 고집장이이다. 

    내가 그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깊은 영감을 받는 부분은 그의 긍정성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긍정적인 사람이다. 회사를 하나 세워 성공을 거둔 전력이 있는데, 그리고 지금은 몸이 불편해서 full-time 간병인이 와서 돌보는 상황인데도 항상 새로운 꿈을 꾸고 추구한다.

    그에게는 89 세라는 나이도, 질병도, 노화도, 그 어느 것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 노년에 지팡이를 처음 사용하게 되면 약간 부끄러워하거나, 자기의 노화를 깨닫고 의기소침해지거나 하는데,  J 교수는 아니다. 예를 들어, 지팡이를 처음 사용하게 되었을 때라던가, 그보다 더 건강이 악화되어 두 손으로 워커를 밀어서 걸어야 하는 최근에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자신의 골반 수술이 성공적이었는데 요즘 가끔 통증이 느껴져서 걱정이라면서 셀폰에서 자신의 골반의 엑스레이 사진을 찾아 보여주기도 했다.

    ”심 박은 게 보여? 여기, 또 여기… 현대 의학은 정말 놀랍지 않아?“ 라며 감탄하는데, 나는 하늘 같으신 선생님의 하체의 엑스레이를 보는 게 마치 속옷 입은 모습을 보는 것처럼 당황스러웠지만, 동시에 그가 육체적인 쇠퇴를 그저 한 '팩트'로서 받아들일 뿐, 거기에 괜히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더하지 않는 것이 참 배울만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경험, 사고방식, 그가 맺고 있는 여러 관계들에 대해서 잘 알게 되면서 나는 그가 자신의 삶을 글로 써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상록 집필을 권유했다.

    내가 그에게 ‘당신의 삶의 기록은 자식들은 물론이고, 당신 스스로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다’ 라고 했을 때 그의 첫 반응은, "나는 한 번도 나의 삶의 이야기를 쓸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굳이 나의 이야기를 쓸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였다.

    그게 한 5 년 전이었나? 그 후에도 나는 여러번 그에게 수상록 집필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수상록을 쓰지 않겠다는 그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꾸준히 설득했다. 그러다 3 년 전, 그가 선언했다.

    "팜펨, 너의 말을 따라 수상록을 한번 써볼까 생각 중이야."

    마음을 먹자마자 행동파인 그는 당장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 후 여러 건강 문제와 집안 일로 여러 번 중지되었지만 글쓰기 작업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가끔 만날 때마다 "아직도 쓰고 있어"라고 했고, 그럴 때마다 적극적으로 칭찬해드리곤 했는데 드디어 완성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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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 교수의 수상록은 내가 산파 역할을 해서 태어난 수상록 중 세번 째이다. 지금 보니 세 권의 수상록은 세 개의 다른 언어로 써졌다.

    한국의 친정아버지 (한국어)
    벨기에의 시아버님 (불어)
    미국의 J 교수님 (영어)

     

    세 권의 수상록은 비슷한 단계를 거쳤다.

    1 단계는 내가 처음 글쓰기를 권했을 때의 반응, 즉각적 거부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책 안 쓴다' '나는 그런 개인적인 글쓰기는 못한다')

    2 단계는 반신반의 ('내 이야기가 글로 쓸 가치가 있다고?  누가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라도 할까?')

    3 단계는 글쓰기의 시작. 

    산파로서 나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다.글쓰기를 시작할 때까지 열심히 설득하고, 글쓰기가 시작된 뒤에는 국 끓일 때 뜨는 거품을 걷어내듯이 수시로  '자기 회의'를 걷어내 드리면서 글쓰기 작업을 응원해 주는 것이었다.  즉, 산파로서의 나의 역할은 '응원단' 역할일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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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돌아와 교수님의 책을  훑어보았다. 

    "팜펨, 당신이 없었다면 이 책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자필 인사와 서문의 "내가 이 자서전을 쓰게끔 저를 설득했던  팜팜에게 감사합니다'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이 구절은 시아버님도 자서전에서 쓰셨던 감사의 말 ("나를 지지치 않고/쉬지 않고/끈질기게 격려해 준 며느리 팜펨에게 감사드립니다. 팜펨의 노력 없이는 이 책은 결코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과 거의 동일했다. 시아버님이 '끈질기게' (tirelessly) 란 표현은 참 정확하다 싶다.  J 교수 설득하는 데는 2 년 정도뿐이 안 걸렸지만 시아버님 설득하는 데는 장장 10 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J 교수님의 쓴 말 중, 나를 아주 기쁘게 한 말이 있다.

    "자서전을 쓰는 작업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보람 있었습니다 (rewarding)."

    나는 교수님이 글쓰기 작업을 통해서 보람을 느끼시리라는 것은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그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참 기뻤다.

    나의 아버지가 수상록에서 J 교수가 쓴 말과 아주 유사한 내용을 좀 더 길고 명확하게 표현했던 게 생각나 찾아서 인용해 본다.

    "나의 어린 시절을 글로 써달라는 부탁을 처음 팜펨으로부터 받았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런 류의 글을 한 번도 써본 일이 없어서 나에게는 그것이 큰 부담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렵게나마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해 보니 오랫동안 내 의식 밑바닥에 깊숙이 묻혀 있었던 지난날의 일들이 가물거리며 떠올라 나는 온갖 감회에 빠지게 되었다. 고요한 한밤중에 오롯이 책상머리에 앉아 글쓰기를 계속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나의 과거는 얼마나 외로운 삶의 연속이었던가, 그리고 나의 현재는 지난날의 쓰라린 기억을 보상하고 남으리만큼 얼마나 복된 삶의 연속인가'라는 말을 되뇌면서 북받치는 감격과 행복감으로 눈물짓는 일이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수상록이든, 개인 에세이든, 삶의 글쓰기는 그 글이 독자에게 주는 감동, 배움 이전에 이미 작가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나 스스로의 경험으로 그걸 많이 경험하고 있고 블로그에서도 그런 내용의 글을 몇 번 올렸었다. 그래서 J 교수에게 수상록을 쓰시라고 권고하면서 나는 그가 글쓰기 작업을 통해서 보람을 느끼리라는 것을 확신했었던 것이고.

    J 교수의 책을 하루만에 읽고 시아버님의 책, 아버지의 책도 꺼내 다시 훑어보았다. 세 권의 책을  만지작거리면서 잔잔한 행복감이 느껴진다.

    80대의 어르신들에게  죽음이라는 '완적한 멈춤' 이전에 잠시 멈추어서 삶을 돌이켜보는 소중한 기회가 된 책 세 권.

    어르신들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기록하고, 마무리 지으면서 감사와 성취감을 느끼듯이, 나 역시 소중한 책이 탄생하기까지 응원하면서 책을 받아냈음에 큰 보람을 느낀다.

    한가지, 내가 아는 여성 중 참 흥미롭고, 배울 게 많은 삶을 살아온 분들이 계시고 나는 그들에게도 글쓰기를 권유했으나 다 글을 쓰려고 하지 않으신/셨다.  그게 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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