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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 (2): 룸메이트와의 재회
    카테고리 없음 2023. 6. 12. 00:52

     

     

    이스라엘에서 첫 금요일 아침,  택시를 타고 하이파시로 향했다.

    하이파 대학의 기숙사의 룸메이트, '사바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리웠던 친구를 보는 설렘과 감격에 시차가 전혀 안 느껴졌다.

    35 년 전, 사바나를 처음 만난 순간 나는 그녀의 성숙하고 따뜻한 품성에 끌렸고, 그녀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를 무척 좋아해 주었다. 우리는 7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서 함께 밤을 새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일을 함께 하면서 우정을 쌓았다 사바나의 가족도 사바나처럼 다정한 사람들이어서 가끔 사바나의 어머니의 집을 방문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바나 식구와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다. 

    어느 긴 주말 휴가 기간이었다.  기숙사 아파트를 함께 쓰는 친구들은 다 집에 가고 혼자 남아 논문을 쓰고 있던 중, 외로움이 밀려왔고, 마음이 답답해졌다. 나는 서둘러 배낭을 메고 기숙사를 뛰쳐나와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평소에 내가 아주 좋아하지만 갈 기회가 별로 없었던--갈릴리 호수 행 버스를 탔다.  홀로 있던 기숙사를 벗어나 버스를 타고 갈릴리를 향하는 동안 마음의 어두움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갈릴리에 도착해서 샌드위치를 사서 먹으면서 정처없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뜨거운 햇살에 온몸이 달아오르고, 갖고 온 물도 다 떨어졌다. 몸은 녹초가 되었는데 마음이 가뿐해진 게 느껴졌다.  

    더위에 더 이상 걷는 것은 위험하다 싶어서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는데, 정류장이 텅텅 비어 있었다. 기숙사를 뛰어나오면서 잠시 잊었던 사실--그날은 금요일, 안식일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이스라엘은 금요일 오후 해 지는 시간부터 토요일 해 지는 시간까지를 안식일로 지키고, 안식일에는 대중교통 운행이 중지된다.)

    난감했다. 기숙사로 돌아갈 방법은 택시뿐이 없었으나 돈이 빠듯하던 유학생 처지에 이제까지 한번도 타본 적이 없는 비싼 택시를 장거리로 탈 수는 없었다. 히치 하이킹을 해도 하이파 시 꼭대기의 기숙사까지 가는 차를 발견할 리 없었다. 어디선가 또 히치 하이킹을 해야 하는데  그럴 엄두가 안 났다. 그렇다고 하이파의 어머니께 나를 픽업해 달라고 하기에는 내가 너무 멀리 있었다.

    나는 곰곰 생각하다가 사바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바나의 집도 차로 1 시간 걸리는 곳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궁색한 소리를 해도 마음이 편했다.  사바나는 '당장 우리집으로 와. 내가 엄마랑 너 데리러 갈게'라고 했다. 감사했지만 라이드를 부탁하는 것은 너무 미안해서 '내가 알아서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내가 가야 하는 방향의 길 가장자리에 서서 오는 차를 향해 몇 번의 히치 하이킹 시도 끝에 사바나 집이 있는 도시로 향하던 한 아저씨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사바나의 엄마와 두 여동생은 나를 두 팔 벌여 환영해 주었고 그래서 나는 그 주말을 아주 행복하게 보냈다. 사바나의 가족들은 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갖고 있지만 한가지 그들을 묶어주는 공통점이 있었다. '따뜻함.'  그 이후에도 나는 사바나의 집을 몇 번 방문했고, 우리는 더더욱 가까워졌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옮길 무렵, 사바나는 나이가 20 세가 많은, 휠체어 신세를 지던 남성과 사귀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더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내 친구가 불행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닌가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결혼을 한 뒤 그녀는 참 행복해 보였다.

    예루살렘에서 나의 삶은 아주 바빠져서  사바나와는 가끔 전화 통화를 주고받을 따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나는 파리로 떠났고, 빠리 내에서 집을 여러 번 옮기면서, 그리고 3 년 뒤 미국으로 와서 또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 안타깝게도 사바나와의 연락이 끊어져버렸다. 

    항상 그리움으로 기억하던 나의 친구, 나는 그를 찾으려고 이름으로 검색해 보았다. 결혼 전 그녀의 이름, 결혼 후 남편 성을 딴 이름... 그러나 그녀는 검색되지 않았다. 그녀도 나처럼 숨어 사는 건가? 혹시 그녀가 나를 찾으려고 해도, 꽁꽁 숨어사는 나를 찾을 길은 없으니, 결국 서로 못 만나는 것인가 안타까웠다.

    몇 달 전, 이스라엘 어머니와 줌 영상 대화를 하던 중, 어머니가 물었다.

    "팜펨, 사바나를 기억하니?"

    "물론이지요! 제 룸메이트였어요. 사바나를 찾으려고 했었어요. 근데 어머니가 어떻게 걔를 아세요?"

    이스라엘 어머니는 나의 기대를 잔뜩 부풀려놓은 상태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바나가 너를 찾더라."

    어머님은 가끔 심리치료사들을 위한 웍샵을 진행하곤 하는데, 그 주에 zoom 웍샵이 끝나고 난 뒤 한 여성이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되겠냐'라고 묻더니, '혹시 팜펨과 아직 연락 중이시냐'라고 물어서 깜짝 놀랐다며 그 여성은  자기가 나의 룸메이트였으며 계속 나를 찾고 있는데 찾을 길이 없어서 이스라엘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했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당장 연락했고,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동시에 눈물이 터졌다. 전화로 사진 교환을 하고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그녀의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나를 딸처럼 대해주시던 어머님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딸이 최근에 결혼을 했으며 자기는 심리 치료사로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후에도 몇 번 통화를 했고, 내가 이스라엘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만나러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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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년 만의 만남...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는데 마음이 뛰었다.  그런 설렘이 참 오랜만이었다.

    멀리서 그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옛날과 비슷한 안경테, 옛날과 비슷한 통통한 몸집, 고운 피부, 그저 달라진 것은 하얗게 샌 머리카락뿐, 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사바아나아아아!!!' 외치면서 그녀에게 달려갔고 그녀도 'oh my gosh! Famfem!' 하고 외치며 달려왔다. 우리는 껴안고 팔짝팔짝 뛰고, 눈물을 훔쳤다. 몸은 늙었으나 우리의 20대의 목소리의 톤은 그대로였다. 

    일단 카페에 앉아서 두서없이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마음이 급한 우리들의 대화는 마치 올림픽 금메달을 두고 다투는 탁구 선수들이 주고받는 공처럼 질문-대답-질문-토로-공유-웃음-질문-대답 식으로 빨리빨리 진행되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그렇게 빨리빨리 대화를 하는데도 나는 내가 평소에 쉽사리 하지 않는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고, 사바나도 자기의 속얘기를 진솔하게 나누어주었다.

    점심을 먹기 전, 사바나와 나는 우리가 만난 하이파 대학을 가보기로 했다.  사바나는 갈멜산 꼭대기에 있는 하이파 대학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 (Rakavlit)가 새로 생겼다면서 자기도 못 타봤으니 함께 타보자고 했다.

    원래는 케이블카에 각각 10 명의 승객들이 탈 수 있는데, 그날은 휴일의 시작이라서 승객들이 없었다. 사바나와 나는 케이블카 한 대를 단둘이 앉아 고도 460 m 까지 케이블카가 천천히 올라가는 과정, 그리고 우리 눈 아래로 펼쳐지는 하이파 시와 지중해의 장관을 만끽했다

     

    산꼭대기 하이파 대학까지 총 4 km 가 넘는 거리를 운행하는 Rakavlit 케이블카의 정류장은 단 6 개.  그중 정류장 두 개가 대학교--테크니온 공대와 하이파 대학--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사바나는 Rakavlit 은 관광목적만이 아니라 대중교통용 공중 전차로서  두 대학의 학생들이 겪는 교통 체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했다.

     '갈멜산 산꼭대기까지 단 20 분이 걸린다고?' '기억나니? 옛날에는 꼬불꼬불한 길의 많은 정류장마다 쉬면서 가느라  학교까지 50 분 넘게 걸렸잖아!' '와! 아침저녁으로 저 지중해와 평야의 절경을 보며 등하교를 하다니! 학생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큰 복을 누리는지 알까?' '저 밑에 봐봐! 저기가 공터였는데 큰 건물들이 들어섰네?'  

    우리는 감탄에 감탄을 하며 쉴 새 없이 조잘거리며 정상까지 올랐다. 하이파대 캠퍼스를 함께 걷고, 고고학 박물관을 방문한 뒤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하이파 시로 내려와 브런치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안식일로 버스가 끊어질 시간이 되었다.

    "다음번에 이스라엘 오면 우리 집에 와서 머물러. 단 하루라도.."

    "그래, 우리 기숙사 때처럼 밤새고 이야기 나누자"

    꼭 껴안으며 인사를 나눈 뒤 나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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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저녁 사바나와 사진들을 나누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대학교 교정을 누비다가 찍은 사진,

    교정의 한 구석, 내가 한국의 가족이 그리워 지중해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우던 곳의 사진.

     

    사바나는 옛날 앨범을 뒤져 찾은 사진 몇 장을 보내주었다.

    헉... 나 사자머리 하고 다닐 때구나.... 사바나는 아기 같네! 큭큭거리면서 보다가 사진에 찍힌 장소가 오늘 우리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내려다본 곳이라는 게 보였다.  (우리의 뒤편으로 이즈라엘 평야와 구름에 가린 지중해가 있다.)

    반대편으로 찍은 사진, 우리의 뒷쪽으로 보이는 큰 건물이 갈멜산 꼭대기의 하이파 대학.
    박물관

     

    나도 사바나도 사진들마다 미소 일색이었다.

    우리는 사진기를 보고 웃는 게 아니라 그 뒤의 친구를 보고 웃고 있었던 것...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여기 봐! 원 투 쓰리!'' 외치던 사바나의 목소리가 생각나고, 얼굴의 반을 가린 전화기 뒤의 사바나의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래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따지고 보면 사바나와 내가 함께 산 기간은 짧았다. 기숙사 생활은 고작해야 6 개월, 그 후 어쩌다가 내가 하이파를 방문할 때 몇 번 만난 게 전부. 우리는 성격도 달랐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정직했고 진실했으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었다.  나도 그녀도 우정이든 연애든 내가 밑지는 장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스타일이었고, 둘 다 그러다 보니 관계가 풍성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바나는 내가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는 친구였고, 동시에 나를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가는 친구였다.

    35 년 만에 만났는데,  감사하고 놀랍게도 우리는 본질적으로 옛날과 다를 게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고 우리의 우정의 dynamics 도 그대로였다. 이제까지 우리가 서로 떨어져 겪은 수많은 경험들은 결국은 우리를 비슷한 인격체로 성장시켜 주었다. 우리는 둘 다 사랑에도, 용서에 좀 더 넉넉하게 되었고, 동시에 남이 뭐라든 자기가 원하는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지키는 그런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정 많고 부드러운 고집쟁이들... 우리들...

    나는 60 이 넘어 이제 삶의 후반부를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나의 삶의 후반부는 이미 수많은 기쁨과 슬픔을 예고하고 있다. 그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를 다시 찾은 게 감사하다. 아낌없이 주고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는 친구,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는 친구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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