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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목길 걷기
    카테고리 없음 2022. 7. 18. 00:36


    June, 2022

    시댁에 와서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거의 40 명이 모인 가족 모임은 어제 성공리에 끝났고, 근 27 년 간 알아온 가족들과 한층 더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바로 몇 해 전까지만해도 어렸고 내 앞에서 쭈빗거리던 청소년 조카들은 마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고 30 대 중반의 조카들과는 아줌마로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바쁜 중에 나에게 매일 매일 활력을 주는 게 하나 있다.
    골목길.
    우리의 에어비엔비에서 시댁까지는 1 km 가 채 안되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골목길이 많아서 여러 방법으로 걸을 수 있다.
    남편과 나는 아침에는 각기 다른 시간에 시댁에 ‘출근’ 하고, 저녁 시간에는 주로 같이 퇴근하는데
    아침에 시댁에 출근할 때 나는 매번 여기저기 골목길을 새로 개척해서 '능동적으로 헤매면서,' '길잃기를 즐기면서,' 걷고 다닌다.

    골목길 걷기는 미국의 내가 사는 동네는 꿈도 못 꿀 일이라서 이곳에 있는 동안 실컷 즐기려고 하고 있다.

    미국의 ‘우리동네’는 엘에이에서 45 분 거리, 쾌적한 환경과 우수한 교육 시스템을 자랑하는 도시로서 한국에서도 많이 오는 곳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와서 몇 년씩 머물고 간다고들 한다.
    나와 남편은 안전하고 편리한 환경을 감사하며 살고 있지만 항상 뭔가 아쉽다.
    공공 교통 수단의 편리함,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사는 맛,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 행사 등등 도시가 주는 편리함과 즐거움이 없을뿐더러가장 큰 아쉬움은 골목의 부재이다.
    자연 환경이 좋은 우리 동네에서는 운동을 목적으로 걷고 뛸 장소는 많지만 좁은 이 골목 저 골목 누비는 ‘정처없이 걷기’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형광색 기어를 입은 사이클리스트들은 많지만 일상에서 자전거를 이용해 쇼핑을 하거나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그래서 유럽에서 정장이나 평상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보면 한참 바라보고 사진을 찍게 된다.


    이번에 시댁 앞 길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옷을 걸치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무리.
    환경보호, 사이클리스트들의 권익 보호를 주장하는 시위였다.

    (시위객 사진을 올려도 되나 곰곰 생각했는데, 탈의를 시위의 방법으로 사용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은 괜찮은 일이리라 싶어 올림)

    누드를 보고 미국에서 온 나와 나의 아이들만 놀랐지, 길거리의 행인들도, 야외 카페와 식당의 손님들도, 우리 친척들도 그 누구도 대수롭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유럽과 미국의 엄청난 문화차이를 체감했다. 시위대를 본 뒤 나는 문화차, 몸, 자유, 사회적 억압, 투쟁, 투쟁을 뛰어넘는 몸과의 화해 등등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댁 대문을 열고 골목길을 걸어 나오자마자 만난 시위대는 그렇게 나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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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행은 이제까지 시댁 방문 일정 중 가장 짧고 그래서 가장 바쁜 일정.
    시댁에 출근해서 부모님 돌봐드리고, 여러 식구들을 만나고, 밥을 먹고, 밖에 나가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버린다.
    게다가 아들은 시댁에서 머물고 딸은 우리와 에어비엔비에서 머무르고 있고 두 아이 다 사촌들과 만남으로 바빠서
    우리 4 명의 가족이 만나려면 약속을 잡아야했다.

    그러나 시댁 근처의 골목길에 많은 카페와 식당이 있어서
    우리는 잠깐씩 아이들을 소집해서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면서 가족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좁은 도시에서는 밤에는 성당의 계단도 카페로 돌변한다. 해가 길어서 밤 10 시에도 밝다.


    남편과 나도 따로 바쁘게 지내다가 잠깐씩, ‘우리 잠깐 나가 걸을까?’ 하곤 밖에 나가 정처없이 걸었다.
    새로 생긴 서점도 들어가보고, 골목길 구석에 있는 카페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어느 날은 밖에서 걷다보니 늦어져서 ‘이 집 한번 들어가볼까?’ 하고 약간 남루한 포르트갈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식당 리뷰니, 별점이니,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읽지 않고
    그냥 우리 발길이 이끄는대로, 우리의 순간의 입맛이 이끄는대로 결정을 내렸다.

    식당이 너무 맛이 없다? 그것도 여행이 주는 새로운 경험이니까, 그게 여행의 맛이니까…

    실제로 여행을 한 것은 아니지만 여행객의 마음으로 순간 순간을 즐길 수 있어서 행복했다.

    딸아이가 먼저 자기가 사는 곳으로 떠난 날, 우리는 정처없이 걷다가 차 한잔 하자고 앉은 카페에서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계획없이 뭔가를 하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축복..나는 30 년이 젊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

    매일,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올 때, 골목길을 걷다보면 피로가 서서히 가시고 숙소에 도착할 때쯤은 새로운 기운이 난다.

    짧은 거리이지만 직장 (시댁/여러 모임)에서 나의 보금자리 (에어비엔비)까지의 시간은 내가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짓고 일에서 자유로운 나만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transition 역할을 한다.
    그 전이의 시간은 격렬한 하루의 일과, 수많은 대화, 그 과정에서 내 머리 속에 맴돌았던 감정과 생각들을 되새김하고 그냥 놓쳐버릴 수 있었던 하루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하냐에 따라서 어떨 때는 5 분, 어떨 때는 10 분, 어떨 때는 15 분 걸리는 그 전이의 시간,
    동안에 남편과 손을 잡고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골목길을 걸으면서 나누는 두서없는 대화는 신기하게도 미국에서 우리가 데이트를 한다고 나가 저녁 식사를 하면서 두 눈을 바라보면서 나눈 대화보다 그 폭이 더 넓고, 깊이가 깊다.


    조만간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나는 시댁 근처의 골목길이 무척 그리울 것이다.
    혼자 정처없이, 헤매는 것을 즐기면서 걷는 산책도 무척 그리울 것이다.
    남편과 나에게 하나됨을 느끼게 해주던 골목길의 대화도 무척 그리울 것이다.

    가기 전에 시간을 내어 더 열심히 도시 구석 구석을 누비고 다닐 작정이다.

    (ps. 이 글 쓴 뒤에 너무 열심히 걸어서 발에 물집이 생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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