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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 제 품에 안기세요
    카테고리 없음 2021. 12. 12. 17:12




    나는 어려서 병치레가 잦아서 어렸을 때 병에 관한 기억이 꽤 많다.
    끙끙 앓는 나를 밤새 지키던 엄마 아버지. 잠자다가 눈을 뜨면 어김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그들의 불안한 시선. 나는 눈 맞춤 후 안심을 하고 잠에 빠져들곤 했었다.
    결핵성 늑막염 진단을 받던 날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당시 6 세.
    엄마와 나는 버스를 타고 종로 3 가에 있는 '이북에서 온 용한 의사 선생님'께 갔다.
    의사는 검진을 하더니 다짜고짜 엄마더러 나를 마주앉아 꼭 껴안으라고 했다.
    엄마는 의자에 앉았고 나는 엄마 목에 팔을 두르고, 양발을 엄마 허리로 두른 채 엄마를 안았다.
    의사가 무시무시하게 큰 주사기를 들고 다가오는 순간 나는 겁에 질려서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엄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엄마는 내가 겪을 고통을 알고 공포에 떨고 있구나. 나는 엄마에 대한 동정심과 보호심을 느껴졌다. 엄마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파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울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의사는 커다란 주사기로 흉액을 뽑아내기 시작했고, 나를 껴안은 엄마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엄마도, 의사도 내가 큰 주사기를 보고 겁에 질리지 않은 것에, 그리고 흉액을 뽑는 내내 울지 않음에 많이 놀라 했다. 내가 남을 위해 나의 아픔을 참은 첫 경험이었다.

    그 후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창신동에 위치했던 이화여자대학 동대문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까지만해도 한옥들이 대부분이었던 창신동의 주택가를 내려다보던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나는 난생 처음으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났다. 내 옆 침대의 20 대 초반의 청년으로 신장병을 앓고 있던 그는 잘 웃고 나와 잘 놀아주었다. 그는 가죽 케이스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갖고 있었는데, 무료한 병원 생활 중 그와 함께 듣는 라디오 방송은 나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가 퇴원하던 날 나는 목놓아 울었다. 누군가와의 이별을 슬퍼한 것, 내 6세의 삶에서 처음이었다.

    병원을 들낙날락하여 병원의 기억이 꽤 많은데 고통의 기억, 아프다고 힘들어한 기억이 안 난다.

    아파서 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단 한번. 엄마가 없는 중, 의사가 회진을 왔을 때의 일이라 하겠다. 나를 귀여워했던 간호사들이 의사에게 '이 어린애가 책을 잘 읽어요'라고 의사에게 칭찬을 하니, 의사가 '짜식, 배에 때를 씻어야지'라고 농담했는데, 엄마가 없어서 두렵던 차에 자존심까지 상항 나는 목이 터져라 울기 시작했다. 주사를 놓아야 하는데 내가 울음을 끄치지 않자 당황한 간호사는 나를 달래가면서 주사를 놓았는데, 내가 힘을 주고 우는 바람에 주삿바늘이 엉덩이에 꽂혔다. 나는 보란 듯이 더 크게 울었고 간호사는 곤혹을 치렀다. 나를 무시한 의사에 대한 분노는 쉽게 가시지 않았고 그 후에도 나는 (6 세의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포스로) 쌀쌀맞게 대했다.

    그게 병원에서의 유일한 육체적 고통의 기억이다. 왜 나에게 '고통'의 기억이 없을까?

    (당시의 몇 개의 기억들이 생생하기는 하지만) 당시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으리라. 또한 육체적 고통의 기억은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끔찍한 산고 후에도 다시 아기를 갖고자 하는 엄마들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분명히 고통을 무효화시키는 어떤 효과가 있었다.
    엄마의 존재.
    항상 내 옆에서 존재하며 나를 지켜준 엄마 덕에 나는 고통에서 보호되었다. 내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아파하는 엄마 덕에 나의 마음이 어루만져져서 나는 아파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흉액을 뽑을 때, 엄마를 위해 울음을 참겠다 마음 먹은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나를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도 달게 받아들이고, 나보다 더 아파하는 엄마를 나는 더 이상 아프게 할 수 없었다. 나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엄마에 대한 나의 사랑이 진통제였다.
    엄마의 품은 나에게 궁극적인, 최고의 안식처였다. 나는 엄마의 품에 있으면 세상이 뒤집어져도 아무렇지 않음을 경험한 것은 7세 때였다. 퇴원 후 이대부속 병원에 정기 검진을 간 어느 날, 엄마 손을 잡고 층계를 올라가던 중에 굉음이 들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스통이 폭발한 거였다.)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큰 폭발에 병원은 졸지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쇼크와 공포의 순간에 엄마는 나를 낚아채듯 재빨리 들어 품에 안았다. 엄마를 꼭 붙들고 주위를 돌아보면서 '큰일이 났구나' 감지했지만, 엄마 품에 안겨서 나는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엄마는 그 순간 다리가 떨려서 제대로 뛸 수가 없었다고 회상하신다. 마치 자동차 사고에 차체가 온 충격을 다 흡수하고 탑승자가 하나도 상처 받지 않은 경우처럼, 엄마가 온몸으로 마음으로 쇼크를 흡수해버려서 엄마의 품에 안긴 나는 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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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많이 흘러 엄마는 늙었고 약해졌고 이제 암투병을 시작하셨다.
    엄마는 나의 손을 잡고 이 병원, 저 병원, 이 검사, 저 검사 받으며 다니고 계시시다.
    내가 투병하시는 엄마를 돌보는 것이 부모 자식간의 역할의 반전이라고 쉽게 생각했었는데, 큰 의미로는 그게 맞는 소리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할의 반전이랑은 좀 거리가 먼 부분이 있다. 그것은 환자로서 어렸을 때의 나와 현재 엄마의 태도의 차이때문이다.

    어려서 큰 병, 작은 병 많이도 앓으면서 때 나는 엄마의 눈치를 본 적도, 엄마한테 미안해한 적도 없다. 아니, 되려, 아파서 사랑과 관심을 받는 것을 즐겼다. 엄마가 걱정하는 거 알면서도 엄마의 과외의 서비스와 사랑을 즐기기 위해 꾀병도 많이 부렸으니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짝이 없다. 엄마께 돌봐줘서 고맙다고 한 적도 없다. 자식인 게 벼슬이라도 되는 양, 엄마의 돌봄을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역할의 반전이라면 엄마도 지금 내 눈치 볼 필요없이, 미안해하지 않고, 내 관심과 사랑을 즐기면서 아프셔야 할 텐데, 그게 아니다. 엄마는 엄마가 나에게 미안해하고, 나때문에 마음 아파한다. 자식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고, 노쇠하는 건강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는데, 결국은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하신다. 엄마는 여전히 내가 아플까 봐, 당신 때문에 내 건강이 상할까 봐 걱정하신다.

    아픈 나를 걱정으로 내려다보며 밤을 지새우고, 내가 아플까봐 상상만으로 사색이 되어버렸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상황에서도 나를 보호하려고 품에 안고 있던 젊었던 그 여인은 50 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마음인 것이다. 같은 사랑인 것이다.
    엄마의 사랑을 무상으로 먹고, 누리고 자란 나는 지금 내가 아무리 해도 엄마가 나에게 베풀어준 사랑을 되돌려드릴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엄마는 나의 보호, 관심, 사랑을 당연히 여기거나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엄마'로서, '엄마'라는 위치에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가 좀 변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되는 상황이다. 이대부속 병원에서 나를 품에 안고 뛰던 엄마는 35 세였다. 나는 그 젊은 여인을 마치 내 딸이라도 되는 양 안쓰러워하고 기특해하는 그런 지긋한 환갑의 나이가 되었다. 나름 여러 일을 많이 겪어보아 웬만한 모든 쇼크를 끄떡없이 흡수할 수 있는 든든한 맷집도 있다. 내 60 평생 무조건적 사랑으로서 나를 강하게 키워준 엄마, 이제 나를 믿고 내 품에 포근하게 안겨서 평안함만을 느끼시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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