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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제일 행복한 때가 언제였냐면….
    엄마 2021. 11. 1. 08:23


    며칠 전 엄마가,

    “나는 내 인생에서 언제가 제일 행복했던 때였나 생각해보았어.”

    라고 말을 꺼내셨다.

    언제일까? 궁금함과 동시에 나는 답을 알 것 같았다. 엄마는 종종 태능 시절이 참 좋았다고 떠올리시곤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강의하시던 서울 여대 옆의 하얀 울타리의 작은 집, 정원에 장미꽃과 뒤뜰에 호박넝쿨이 무성했던 그 집은 나, 오빠, 언니에게도 행복한 유년의 추억의 장소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엄마는 나의 예상을 뒤엎는 말씀을 하셨다.
    "어렸을 적, 북한에서 살 때였어. 난 참 행복했었어."
    오? 처음 듣는 소리여서였다.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의 유년기의 이야기를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엄마의 옛날이야기는 북한에서 기독교인으로서 받은 탄압과 작은 어선을 타고 내려온 피난의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 후의 이야기는 부산의 난민촌, 온 가족의 생계를 위한 취직, 가난, 폐결핵, 결혼, 궁핍, 건강문제..... 엄마의 장년기와 노년기는 고생이 주제인 스토리들 일색이었다.

    그렇다고 엄마의 삶은 그 누구의 눈에도 불행한 삶은 아니었다. 엄마 스스로 불평하지 않고 노력했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 오셨고, 엄마의 희생과 사랑으로 비옥한 마음밭에서 자란 우리 삼 남매는 엄마를 존경하고 아끼고 있고, 돌아가신 아버지도 엄마를 많이 사랑하셨으니 엄마는 참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아낸 여성이다...........라고 나는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엄마가 '난 참 행복했었어' 란 말이 새롭게 들리는 걸까? 엄마가 '행복'이란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으셔서다. 엄마가 우리 가족 모두가 그리워하는 행복했던 태능 시절을 흐뭇한 미소로 떠올릴 때조차도 엄마는 '행복하다'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때 참 좋/았/어'라고만 하셨었다.

    엄마가 '행복'이란 단어로서 기억하는 유년기는 도대체 어떤 시절이었을까?

    “어렸을 적에 나는 참 행복했어.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근무지가 시골이었는데 시골에는 항상 먹거리가 풍부했어. 나의 부모님은 고생하셨을지 모르지만 어렸던 나는 시름이 없었지.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친구들과 즐겁게 뛰놀고, 공부 열심히 하고, 책을 많이 읽었었어. 위로는 언니 오빠, 아래는 동생들, 우리는 참 다복했고, 식구가 다 온순한 성격이라 집이 화목했어. 타지에서 공부하던 언니 오빠가 집에 돌아오면 온 식구가 잔치를 열곤 했고, 나는 언니 오빠를 기다리던 때의 설렘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 참 행복한 때였어. 아무 책임도 없고, 걱정도 없이 하루하루 즐겁게 살았던..."

    그러셨구나.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평생 묵묵히 고생하시면서 우리를 키워준 엄마께도 그런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행복했던 어린 춘산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의 비극--큰언니의 죽음--과 민족의 비극--전쟁--을 겪을 것이고 그 행복한 시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고….나는 그 스토리들은 잘 알고 있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가정을 꾸려서 살아가면서 웃는 순간도 많았고, 기쁜 일도 많았지만, 그런 기쁜 순간은 장마철에 비가 잠시 그치고 해가 나는 것처럼 일시적이었고, 삶은 내내 흐리고 비가 퍼붓는 장마철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신앙심으로 걱정/근심거리로 압도되어 좌절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해방될 수 없었던 그런 고달픈 삶이 엄마의 삶이었다. 아마도 엄마는 힘든 일을 이겨내고, 고생을 버텨낸 뒤에 느끼는 보람, 안도감, 만족감, 뿌듯함과 같은 감정은 엄청 많이 느끼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엄마가 말하는 '삶의 시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기쁜 마음을 지속적으로 누리는 순수 행복감' 과는 거리가 먼 감정들이다. 그러기에는 어려운 일, 시름 거리가 자주 찾아오거나 아예 떠나지를 않았다. 엄마가 온몸으로 비를 막아주니 나는 아무 시름없이 행복했던 거고…

    엄마의 유년기의 행복에 대해 듣는 순간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읽는 순간, '이 여인 덕에 난 참 행복하게 살아있구나’ 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라 항상 자신 있었고, 엄마의 희생과 지지를 든든한 다이빙대로 삼아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발을 내딛고 비상하고 뛰어내리지 않았던가... 수백 번... 수천 번... 엄마는 나를 힝상 격려해주었고…

    엄마가 말을 이으셨다.

    "근데 말이야... 요즘 나는 어렸을 때처럼 행복해. 다시는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무슨 의미이지? 나는 이해가 안 되어서 엄마를 쳐다보았다.

    "팜펨아, 나는 평생 이렇게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살아본 적이 없어. 아무 근심도 없이 매 시간 행복하게 살아본 적이 없어."

    "아!! 엄마!! 그러세요? 진짜?!"

    나는 기뻐 외쳤다. 엄마가 요즘 그 정도로 행복하시다니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나는 아버지같이 훌륭한 남편 만나서, 너희 셋같이 사랑 많은 자식들을 두고 복을 많이 누리고 살았어. 너무 감사하지. 그렇지만 나는 몸과 마음이 이렇게 편안해본 적이 없어. 믿어지지 않아. 어떻게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지.... 너무 감사하다."

    엄마는 왜 지금 누리는 지속적 행복감이 옛날 유년기/청소년기의 행복감과 비슷한지 설명을 해주셨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평생 걱정 없이 살아본 적이 없었어. 아버지는 연구만 하시고 모든 일은 다 내가 알아서 해야 했었어. 살림은 당연히 내가 하는 것이지만 전구 가는 것, 집 도배, 페인트칠, 가구 옮기는 거, 이삿짐 싸는 거, 모든 계약, 고지서, 은행, 병원, 모든 일을 다 내가 했었어. 한 푼이라도 절약하려고 배낭 매고 두 시간 걸려 시장에 다니고... 나는 내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살았고 한 번도 불만스러운 적은 없었어.

    너희들이랑 살면서 내가 하던 그 많은 일들과 나 혼자 이겨내야 했던 걱정거리들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 믿어지지 않아. 내 방구석에 전구가 꺼진 거 나는 모르고 있는데 에릭이 들어와서 갈아주고, 내 책상이 너무 작다고 큰 책상으로 바꿔주고, 티브이 보기 좋게 설치해주고, 가구 배치 다시 해주고, 차 타고 같이 시장 가고, 병원도 데려다주고…. 그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 바느질을 하고, 음악 듣고, 성경 읽고, 산책하고, 운동하여 내 관리만 하면 되는 거니 세상에 이런 호강이 어디 있겠어. ‘나는 참 행복하구나...’ 하고 생각하다 보니 부모님 둥지에서 근심 걱정 없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던 어렸을 때 생각이 난 거야."

    아… 그러시구나. 다행이다. 엄마 난 기분 너무 좋아요….라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내 방에 돌아왔는데 엄마와의 대화가 준 감동의 여운이 계속 남아있다.

    엄마가 뭐 하나 당연히 여기지 않고 매사에 감사하시는 거야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오늘 내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엄마가 70 년의 시간을 압축해서 유년기/청소년기의 행복과 현재의 행복의 색깔, 무게, 모양을 비교하여 나에게 정확히 전달해주신 것이다. 노년에는 몸도, 마음도, 사고도 딱딱하게 굳어버린다던데 어떻게 하면 엄마는 행복과 감사라는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감정을 느끼고, 유연하게 사고하실 수 있지? 나도 탁한 욕심과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영혼을 정화한다면 엄마처럼 어린 시절의 행복감을 현재로 느끼면서 살 수 있을까?

    엄마가 나와 남편과 같이 살면서 유년기의 행복을 다시 경험하시고 있다는 것은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남편은 '어머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도 내내 감사해해. 어머니한테는 뭐든 더 잘해드리고 싶어.'라고 했다.) 매일매일 새로운 도전이 생기는 노년 부모님 부양, 계속 지금 하는 대로 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거다 싶으니 마음이 놓인다. 삶이 주는 도전을 겸손히 받아들이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엄마랑 같이 한다면 앞으로 어떤 일도 다 잘 해낼 수 있을 거같아 용기가 난다.

    서서히 역전되어 왔던 엄마와 나의 역할은 이제 한 단계 더 진화한 것 같다. 몇 년 전에 나는 내가 '엄마의 친정'이라고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친정'은 출가한 딸이 돌아갈 수 있는 집이고 나는 ‘젊은 새댁’이 그리워하였던 ‘친정 어머니’의 역할을 해주는 딸이었다. 이제 나는 젊은 아기 엄마의 친정 어머니의 역할이 아니라, 그보다 더 어렸던 '어린이 춘산이' '청소년기의 춘산이'를 든든히 지켜주었던 '엄마'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엄마의 마음이 점점 더 고와지고, 점점 더 순수해지면서, 나는 더 어려진 엄마를 보호하고 사랑해주는 그런 엄마로 되어간다. 내가 초등학교 때 굳게 믿고 살았던 믿음 (진리의 믿음)—-‘이 세상에 무슨 일이 생겨도 엄마는 나를 구해주고 지켜줄 거야. 엄마는 나를 제일 사랑해’—-을 이제 엄마께 돌려드릴 차례이다. 나에게 행복한 기억만 남겨준 태능 집에서 쉴 새 없이 수고하고, 끊임없이 나를 믿어주고, 내내 무조건적 사랑을 퍼부어줬던 엄마가 마음에 묻고 있었던 어렸을 때의 행복을 느끼실 수 있게 해드려야겠다.

    사람들은 엄마가 어려서 눈동자가 유독 까맣고 반짝였다고들 한다. 총명하고 호기심이 많고, 책을 사랑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세상은 참 아름답다고 느끼고 살았던 어린 춘산이…. 그 어린 춘산이가 온몸으로 느끼고 살았던 순수한 행복을 늙으신 춘산여사께서 앞으로의 삶에서 더더욱 많이 느끼시게 되길 바란다. 예전의 행복한 기억과 현재의 행복이 함께 어우러져서 엄마의 삶이 한층 더 풍성하고 복되기를, 엄마가 건강하셔서 내 품에서 오래오래 행복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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