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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별 인사 2 :시아버지
    카테고리 없음 2021. 8. 2. 02:16

    어머님과 엉엉 운 뒤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아버님과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같았다. 어머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버님께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가닥이 잡혔다.

    —————————————
    노년의 부부는 '노년'이라는 아주 까다로운 시험을 치루게 되는 것같다.
    기존의 대화방법, 가치관, 자아/타자에 대한 견해 등이 다 테스트에 붙여지는, 부부관계의 마지막 테스트.

    친정 부모님도 그 시험을 치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마무리지어졌다. 어렵게 치룬 시험이었지만 성적이 꽤 좋았다.
    왜냐면, 젊어서는 많은 갈등을 겪었지만 노년에 갈등을 극복하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였고
    자손들에게 노년과 죽음을 어떻게 살아내야하는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맨 마지막, 아버지의 수발은 받는 이도, 돌보는 이도 힘든 일이었음은 분명했지만,
    그 힘든 일도 헌신, 배려, 감사로 같이 해나가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시부모님은 지금 테스트를 받고 계시다. 어머님이 15 세, 아버님이 18 세때 만나 70 년의 해로라는 엄청난 위업을 같이 달성하신 부부이지만 그들에게는 이 시험이 아주 어렵다.
    이제까지 살아온 사고방식, 문제 해결방식으로는 풀리지 않는 노년의 문제, 아니, 이제까지의 방식대로 풀려니 불협화음과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이다.

    흥미롭게도 친정부모님과 시부모님의 중장년의 삶은 완전히 반대 양상이었다.
    친정부모님은 젊어서부터 갈등이 잦았고, 대화를 통해 풀려고 노력은 번번히 실패로 끝나곤했다.
    반면, 시부모님은 친한 친구, 동역자, 동반자였고, 사소한 일로 의견차이가 있을 망정 다툼과 갈등은 전무한 관계였다.

    그러다가 노년의 테스트에서 완전히 반대의 양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

    친정부모님

    나의 부모님은 중매로 만나서 결혼해 60 년 해로를 하셨다.
    서로를 존중하고, 결혼에 충실했고, 자식들을 사랑으로 키워낸 모범적 부부였다.

    그런데 두분의 관계는 왜 그리도 힘들었을까..
    두 분 다 625 이후 무너진 가정의 자손이라 보이지 않는 정신적/정서적 상처를 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덜 아파야 더 아픈 사람을 안아줄텐데 그렇지 못했다.
    자신의 어머니를 일찍 여읜 아버지에게 엄마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고,
    어려서 응석한번 제대로 부려보지 못하고 자란 소심한 아버지는 엄마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어머니역할을 기대했다.
    또한 성품이 강직하고 선량한 아버지는 어둡고 공정하지 못한 세상 일에 지치고 상처를 받으면 그 화풀이를 엄마에게 했다.
    엄마는 억울한 대접, 괴로운 상황을 참다 참다 못해서 항거를 하면 그게 싸움이 되는 거였다.
    부모님의 잦은 다툼의 원인은 아버지였다. 엄마는 억울하고 한스러웠지만,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힘든 결혼생활을 버텨내었다.

    커피 한 잔도 스스로 타지 못해 모든 것을 엄마께 떠맡기면서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를 나는 무척 싫어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하나의 연약한 인간'임을 알게된 뒤 아버지를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두 분을 다 사랑하는 딸로서 어떻게든 부모님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보았지만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대학시절부터 엄마, 아버지, 나, 셋이 함께 있으면 종종 '가족 상담 치료' 상황이 되곤 했다.
    부모님이 각자 자기의 힘든 일을 나에게 털어놓는 그런 상황. 내가 유학을 간 뒤에도, 심지어 내가 결혼을 한 뒤에도 두분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억나는 것--프랑스에서 유학 시절, 당시 60 대이셨던 부모님과 유럽 베낭 여행을 두 차례 했었는데,
    나는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유럽 각지를 누비고 다니는 동안 계속 두 분이 심리상담사 역할을 했다.
    뮌헨에 가는 침대차를 탄 날, 탁자에 시원한 맥주와 콜라, 견과류의 안주, 아름다운 경치가 차창을 스치고 지나가는데,
    부모님도 나도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엉켜버린 실타래와 같은 갈등의 관계를 풀어보려고 애썼었다.
    이태리 해변을 타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도, 영국의 호수지방의 절경을 두고도…다툼의 연속이었다.
    부모님의 갈등의 골은 그렇게 깊었다.

    우리 삼남매가 부모님을 떠난 뒤 갈등이 더 심해진 것같았다.
    빈 둥지에 남은 부부가 이제까지 아이들을 키우느라 바빠서 대면하지 못했던 서로 서로를 마주하면서 대화하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상처를 주고 받고 것이었다.

    유럽 여행할 때마다 나는 부모님께 진지하게 “이혼하셔서 각자 행복하게 사시라”고 조언하곤 했었다.
    그렇게 오래 함께 사시고, 함께 자식들을 키워내신 공동체가 이렇게 말이 안 통할 수 있나? 싶어서였고,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갈라서지 않았다. 이혼이 흔치 않은 당시 사회에서 자녀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운 게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고,
    공부만 해온 아버지는 엄마 없이는 단 한끼도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자였고, 엄마는 그런 남편을 두고 떠날 수 있는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아무리 분노를 하고, 증오심을 느껴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깊은 존중이 있었고,
    그 존중은 그들이 공유한 몇가지 중요한 가치관에 기초하고 있었다.
    부모님 두 분 다 지성의 세계에 큰 가치를 두었다. 경제적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한번도 엄마가 불평한 적이 없고, 아버지의 꿈인 공부와 연구를 계속 할 수있게 내조했다.

    한 예로, 아버지가 복학한 뒤 경제적으로 많이 쪼들릴 때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직장 몇 군데에서 job offer 를 받았을 때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고민하던 아버지께 엄마는 ‘당신 적성에 맞지 않을 거에요. 당신이 원하는 공부 하세요’ 라고 하여 아버지 결정을 쉽게 해주었다.
    공부말고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아버지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기는 커녕, 학문의 세계를 마음껏 탐구할 수 있게 지원해주는 엄마에게 늘 감사했다.

    부모님은 관심 분야는 달랐지만 천성적으로 지적인 호기심이 강했다.
    나는 가끔 친정을 방문할 때마다 두분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시는가에 놀라곤 했다.
    아버지야 새벽부터 밤까지 책을 읽으셨고, 엄마는 집안의 살림, 아버지의 병 뒤치닥거리, 매일 아버지의 등산 벗 역할 등등
    온힘을 다 써서 살림을 하면서도 자투리 시간에 항상 공부를 하셨다.
    부모님의 빈둥지는 '부부의 공동 공부방'이었다.

    기독교적 신앙은 두분의 존재의 중요한 뿌리였다. 두분 다 예수의 가르침을 정직하게 삶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서로 그런 모습을 당연히 여기고, 그런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을 감사해했다.
    그래서인가 두분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 아무리 격앙된 논쟁을 할 때조차도 존대말이 흐트러지는 적이 없었다.

    부모님의 힘든 관계의 이유는 가치관이 달라서가 아니라 '대화하는 법'을 몰라서였다.
    아버지는 80 세에 수상록을 출판했는데, 우리는 그 책을 통해서 아버지의 엄마에 대한 사랑이 한결같고 깊었음을 알게 되었다.
    20 대 후반, 부산의 모 교회에서 처음 만난, 물방울 무늬 옷을 입고 노란 양말을 신었던 그 예쁜 아가씨는
    아버지의 부인이 되었고, 고생을 많이 했고, 아버지는 부족한 자신을 현명하게 옳은 길로 인도해준 그 여인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고백했다.

    80 세에 아버지가 사랑의 표현을 한 반면, 워낙 낯간지로운 소리를 못하시는 어머니는 항상 무뚝뚝했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왜냐면, 아버지가 엄마를 위해서 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고쳐나갔고, 과감하게 옛 습성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마치 비온 뒤에 땅이 굳듯이 힘든 시간을 이겨낸 부모님의 사랑은 단단해졌다.
    부모님은 노년에 커다란 시련이 휘몰아쳤을 때 중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이제까지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을 표현하고, 계속 격려하면서 역경을 함께 헤쳐나갔다.

    부모님께 이혼을 하시라고 권하기까지 했던 나는 부모님의 변화가 놀라웠고, 감동을 많이 받았다.


    시부모님

    내가 시부모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1995) 아직 친정 부모님의 갈등이 아주 심했던 시기였다.
    나는 시댁에서 거할 때마다 시어른들의 다투는 일 없이, 상처를 주고받지 않고 협동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시어머니가 아버님께 “쥴리앙, 수퍼에 가서 이것들 사와” “쥴리앙, 우체국 가서 이거 부쳐줘” “쥴리앙, 은행에 다녀와” 라고
    아버님께 수시로 부탁을 했고, 아버님은 언제든 성실하게 일을 해주셨다.
    가끔 슈퍼에서 잔뜩 사갖고 집에 오셔서 부엌문을 여실 때, 올망졸망한 손녀 손자들이 까르르 웃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아….” 하고 만족하게 웃으시던 아버님의 모습은 행복 그 자체였다.

    가끔, 어머님이 주도하시는, 아버님이 아무 저항없이 순응하시던 바쁜 삶에서 아버님은 가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쫓아가는 상황이 되곤 했다.
    “무슨 일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라고 아버님이 물으시곤 했는데, 나는 그 모습도 참 좋아 보였다.
    남자가 주도하지 않고 여자가 주도하는 집안, 거기에 아무런 불평 없이 순응하시는 아버님…

    어쩌다가 내가 불편한 적이 있긴 했다. 어머님이 아버님을 아이처럼 대할 때…
    한 예로,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부모님과 식당에 갔을 때였다.
    식탁에 다 자리했는데 어머님이 아버님께,

    “쥴리앙, 자켓 벗어” 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말투에—- 어린 아이에게 하는 말투—깜짝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에서라면 시아버지가 식구들 앞에서 그런 대우를 받으면 모욕감을 느끼고 화를 냈을텐데
    그런 말투에 익숙한지 아버님은 “나는 자켓을 입고 있는 게 편하다” 라고 담담히 말씀하셨다.
    어머님은 아버님께 “식당에서 왜 쟈켓을 입고 있는 거야? 어서 벗어” 라고 여전히 강압적인 말투로 말했고
    결국 아버님은 “하하하….지젤….” 하면서 자켓을 벗으셨다.

    어머님이 손자 손녀들을 돌보면서 (사랑을 담아서) 명령을 하는데 익숙하셔서 아버님께도 그러시는 거려니..생각하고 지나쳤지만,
    나는 시부의 권위라는 개념이 전무한, 아니 시부의 권위고 뭐고 떠나서 아버님의 의사가 존중되지 않는 그런 상황이 불편했다.

    20 년 전의 당시 상황을 내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당시의 충격과 불편함이 커서였음직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상황이 현재의 갈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아버님은 나의 친정 아버지와 아주 비슷하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잘 쓰시지만 현실감각이 전무, 그래서 수퍼, 가게 운영 등은 어머님이 보이지 않는 주인이었다.
    나의 친정 어머니가 힘드셨듯이 시어머님은 현실감각이 없는 아버님과 사는 게 분명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님이 어머니께 맞춰서인지, 아니면 어머님이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궂은 일을 하셔서인지,
    시부모님은 다툼이 없었다. 어머님의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의 철학이 부부생활에도 적용되어
    어머니의 눈에 불필요하게 보이는 싸움을 하지 않고 어머니 식으로 해결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부모님의 대화 방식의 문제, 사고방식의 차이는 근 69 년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데,
    지금 수발이라는 역경을 맞자 여러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두분을 힘들게 하고 있다.
    또한 문제들이 현재 진행형으로 심화하고 있다.

    얼마전의 글에서 내가 시부모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게 마치 '상담치료'와 같은 상황이라고 느꼈다고 했는데,
    그것은 친정 부모님은 30 년 전, 베낭여행을 할 때 겪었던 일이었다.

    시부모님이 자녀, 손자 손녀로 북적거리는 행복하고 분주한 일상 속에서 구석에 방치해두었던
    ‘부부관계'의 문제가 너무 늦게 나타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된다.
    표지가 아름다운 책, 행복한 이야기가 가득한 책, 열심히 읽다보니
    마지막 페이지가 실이 풀려있고, 찢어져있는 것과 같은 지금,
    어떻게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곱게 붙이고 책을 마무리짓는가가 숙제이다.



    존엄

    어머님은 아버님을 위해서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노력을 하고 계시다.
    평생 남을 도와오고, 남을 돕는 것이 본인의 '천성'이라고 믿는 어머니가 아버님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다른 도움을 마다하고 본인이 직접하겠다고 우기셨다.
    어머님 입장에서는 본인의 수고를 몰라보고 불평하는 아버님이 아주 섭섭하실 것이다.

    시부모님의 수발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어머님의 실용주의, 현실주의이다.
    그래서 어머님은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것, 아버님께 필요한 것에 대한 배려가 없으시다.
    예전부터 수많은 아이들을 돌봐온 어머님은 아버님의 '몸'을 돌보는 수발이 아기 보는 일과 그리 다를 것없다 생각하시는 것같다.
    그러나 수발은 아기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아이를 키울 때의 희망이 없는 일이고, 많은 경우에 그저 더 나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하는 고생이기 때문이다.
    또한, 뭘 먹여주던, 뭘 입혀주던 상관없이 방긋거리면서 자라나는 아기들과 달리, 수발을 받는 노인은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는 경향이 있다.

    어머니는 그러한 심리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신다.
    한 예로, 아버님이 2 층의 목욕탕까지 걸어 올라가실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간병인을 고용해 목욕수발의 도움을 받는 대신,
    어머님이 부엌에서 물을 끓여 아버님을 물수건으로 닦아드렸다
    1 년 전, 훨씬 더 몸이 좋으셨을 때, 즉 어머님이 목욕을 시켜드릴 필요가 없었을 때에도
    아버님은 어머님께 짐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부엌에서 팔순의 부인이 스폰지 목욕을 시켜줄 때의
    기분이 어떠하셨을까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실용주의자인 어머님은 불필요한데는 돈을 쓰지 않는다. 아버님 발이 부어서 신발이 안 맞는다고 신발을 칼로 찢어서 신겨드리고,
    부은 발에 맞는 새 양말을 사지 않고 낡아서 흐늘흐늘한 양말을 신겨드린다.
    아버님이 식사하실 때 25 년 전에 본마망이 쓰시던 앞가리게/에이프런을 입혀드린다.
    천이 흐늘흐늘하고, 색깔이다 바래고, 가장자리 실밥이 터진 애이프런을 입고 식사를 하고 있는 사진을 우리에게 찍어보내셨다.
    (어머님께는 그게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그렇게 사진을 찍어 자식들에게 보낸 것이리라)

    남편은 흥분했다.
    “아주 낙후한 양로원에서도 쓰지 않을 에이프런을 왜! 아버지께!”

    (이번에 남편과 내가 에이프런, 양말, 신발 다 갈아드렸다.
    에이프런 하나만 바꿔드려도 아버님은 아주 번듯하고 기운차보였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라는 말을 자주 하시는 어머니는 구체적인 결과가 없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에 회의적이시다.
    시누가 40 대의 나이에 대학에 돌아가 공부를 했을 때나, 내가 돈 안되는 글을 열심히 스는 것을 탐탁지 않아하셨다.
    당연히 어머니는 내가 10 여 젼 전, 아버님께 책을 쓰시라고 권했을 때도 반대하셨다.
    ‘이제 그래서 뭐하느냐, 책상에 앉아 있으면 건강에 상한다. 몸을 움직여야한다’가 어머니의 이유였다.
    만약 어머님이 아버님께 한마디라도 독려해주셨다면 아버님이 책을 쓰겠다 마음 먹는데 10 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님께 컴퓨터를 사드리고 배워드리려고 했을 때도 ‘이런 거 해봤자 뭐하느냐,’
    아버님 보청기 검사를 다시 해보자고 하면, ‘50 년간 귀가 안들렸는데, 이제와 뭘…’
    아버님이 책을 개정할 경우 더 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고 했는데, 그것 좀 쓰시게 해보자 하면
    ‘빠삐는 그러기엔 너무 늙었어.그런 건 너무 피곤해’ 라고 아버님 말을 대신하신다.

    그래서 어머님이 아버님 수발을 들기 시작한 뒤 아버님이 ‘아기처럼 군다’고 불평하실 때 나는 안타깝다.
    어머님이야말로 아버님이 ‘아기처럼 굴지 않을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귀가 잘 안들리는 아버님의 말할 기회가 없어지고, 아버님께 흥미있는 주제를 갖고 토론할 계기가 없어지고,
    아버님이 글쓰기나 책읽기등, 지적인 추구를 계속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어떻게 아버님만 탓하리오.
    주위 사람들이 아버님이 스스로를 받는 쓸모없는 인간’으로만 자신을 정의하지 않게끔,
    지적인 활동, 대화를 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할 때인데 어머님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신다.
    그저 아버님의 염세주의가 불만이고, 긍정적으로 살아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신다.

    "여보, 팜펨 아버지는 당신과 같지 않았어요. 긍정적이었어요. 팜펨 아버지처럼 되봐요!” 라고까지 하셨다.

    그런데 '팜펨의 아버지가' 긍정적일 수 있었던 게 단지 본인의 노력의 결과였을까?

    아니다. 본인의 노력은 물론이지만, 주위 사람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엄마, 나, 사위, 손자 손녀—-모두, 아버지가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느낄 수 있게끔 행동했고,
    또한 신체적으로는 불구였던 아버지가 정신적/영적/지적 불구가 되지 않게끔 열심히 노력했던 결과였다.

    아버지의 정신 건강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엄마였다. 엄마는 아버지께 무척 다정하셨다.
    그저 아버지의 고통을 안스러워하고 같이 아파했다.
    '지금 가장 힘든 건 당신이에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라고 부인이 말해주니, 아버지는 '나 아프다, 나 힘들다!' 라고 느낄 필요도, 표현할 이유도 없었다.
    또한 아버지의 깔끔함과 단정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는
    아버지가 용변/목욕 수발이란 힘든 순간을 담담히 받아들이시는 이유가
    하루라도 더 살려고 하는 간절함이 아니라, 당신에게 주어진 삶의 그 어떤 경험도 감사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이루려고 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선택임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존경했고 사랑했고---평생 하지못했던---표현을 하셨다.
    엄마를 평생 믿고 의지해온 아버지께 엄마의 사랑의 표현은 큰 힘이 되었다.
    존엄성을 잃지 않는 아버지의 마지막은 소멸되는 육체 속에서 지성의 탑이 건재하고, 영성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는 역동적 진리의 증명이었다.

    엄마와 아버지 수발을 드는 내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는 과정, 아버지가 떠나신 뒤 엄마의 애도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영성과 지성의 세계, 공동의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는데,
    이번에 시부모님과 함께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실감한다.

    시부모님은 보기 드물게 바르고 고운 분들이시다. 두분의 사랑도 깊다.
    그러나 시어머님는 아버님의 의식주만 해결해드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 외의 아버님의 심리적/정서적/지적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신다.
    아버님이 매사에 긍정적이시기를 바란다. 반면 아버님은 어머님이 자신을 더 이해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기를 원한다.
    두 분 다 상대방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프다’ 하는 사람에게 ‘그건 당신의 탓이다’라고 몰아붙이거나, 상대방의 노고를 무시한다.
    그렇게 두분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평행선을 지키고 있다.

    ———

    아버님께 작별 인사 드리기 전, 어머님과 부엌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던 중,
    어머니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머니는 새벽에 세 번 씩이나 일어나서 아버님 용변 수발을 드시는데
    (어머님, 그거 정말 미치게 힘든 일이겠어요!)
    아버님은 어머니께 상처되는 소리를 자주 하신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어. 당신이란 사람이 두려워" 라고 하셨고
    (어머머, 아버님, 끔찍한 소리를 하셨네요!)
    어느 날은 ‘당신은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은 너무 차갑다’ 라고 하셨단다.

    어머님은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금 일을 할 수 있겠냐고...
    그렇게 모진 말을 하니 내가 기운이 안 빠지겠어." 한탄하셨다.
    (아버님, 진짜 너무하셨다. 어머니 진짜 일할 맛 안 나시겠어요.)

    어머니는 가장 큰 상처가 된 말은 그날 새벽에 하신 말이라고 했다.
    새벽에 ‘나 소변 봐야해! 소변 봐야해!’ 라고 고함을 치셔—옆에서 쪽잠을 주무시던 어머니가 황급히 일어났는데
    아버님은 의자에서 꼼짝않고 어머니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니, 당신도 의자 스위치를 눌러서 좀 일어나는 척이라도 해봐요” 라고 화를 냈더니
    아버님이 ‘당신은 나한테 너무 매섭게 군다’ 면서
    “당신이 나를 얼마나 모질게 대하는지 아이들이 알면 뭐라할 것같냐?’ 라고 하셨다고 했다.

    “내가 모질게 했다고? 아니야.
    자기가 잘못한 건 생각지 않고!
    내가 노예야? 자디고 뭔가 하려고 해야지!
    변기는 내가 가져올테니 당신은 의자 스위치만이라도 눌러야하지 않겠냐고 했는데
    그게 마치 학대인냥 나를 매도하다니..”

    라고 씩씩대던 어머니가, “나는 그소리에 너무 억울해서 울었어” 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우셨다는 이 말은, 앞서 쓴 '시어머니/작별' 에세이에서 썼듯이, 아주 놀랄만한 사건이다.
    언니의 죽음에도 눈물을 삼켰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셨다니 어머니가 아버님의 말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의 대화는 나에게 여러모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전까지 나는 어머니가 아버님께 너무 각박하게 대하신다 종종 생각해왔었다.
    아버님을 어린애 취급하시고, 지적인 자극의 필요를 무시하시는 것이 불만이었고, 어머니가 너무 마음대로 아버님을 다룬다는 의심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버님의 말씀에 상처를 받아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그리고 아주 아주 확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아버님과의 작별 인사를 어떤 목적성을 갖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님은 도움이 필요하다. 어머님은 격려가 필요하다.
    아버님이 어머님을 도와주셔야한다.
    그래야 지금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변할 수 있는 아버님이 어머님을 품어주셔야한다. 어머니를 사랑해주세요.
    이런 모든 사실이 내 머리 속에 입력된 상태에서 나는 아버님 앞에 앉았다.



    사랑과 감사

    어머님은 시장에 가셨고, 남편은 소파에 비스듬하게 앉아 쉬고 있었고, 뒤늦게 벨기에에 온 딸은 남편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아무도 아버님과 나의 대화를 방해하지 못하게, 아버님 정 중앙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아버님 양말을 벗기며 말했다.

    “아버님, 저 내일 떠나요. 오늘 마지막 서비스입니다.
    여전히 경로 우대, 5 유로로 싸게 해드릴게요!”

    농담을 하면서 마사지를 시작했다.
    "네가 가는구나. 참...."
    아버님의 섭섭함이 역력했다. 나는 조물조물 아버님 발가락을 만지면서 아버님의 건강한 발을 칭찬했다.

    발에 무좀이 없으시네요.
    피부가 어쩜 이렇게 부드러우신가. 에릭 발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부드러우세요.
    이젠 붓기도 다 빠지셨네요.

    아버님은 흐믓한 표정으로
    “맞아, 붓기가 다 빠졌어.
    새 양말이 좋은 것같아” 라고 맞장구 치셨다.

    근데 발가락이 어쩜 이렇게 유연하세요? 발가락이 자유자재로 움직이시네요. 저의 친정 아버지는 발가락도 맘대로 움직이실 수 없었어요.
    "아 그래?" 좋아하시며 나 보란듯이 발가락을 열개를 현란하게 움직여주셨다.

    “와, 중국 체조선수들의 유연함이 저리 가라네요!”

    아버님이 훗! 웃으셨다.

    나는 아버님이 참 좋아하시는 주제 ‘나의 친정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어제 걸으실 때 보니까 아버님은 척추가 참 곧으세요. 키가 그대로시더라고요. 저의 아버지는 사고 전에도 등이 아주 많이 굽으셨었어요"

    “내 등이 좀 그렇지."

    "아버님은 장수할 준비가 다 되셨어요.
    혼자 걸으시고, 식사하시고, 책을 읽으실 수 있고,
    거기에 더해 어머니같은 든든한 배우자가 엾에 계시고,
    네 자녀들이 아버님을 응원하지,
    벨기에 사회 복지 제도가 뛰어나지..

    아…아버님은 복도 많으셔."

    아버님이 듣기 좋은 말에 엷은 미소가 잠시 스쳤다.
    그러나 아버님 트레이드마크, ‘아냐’ 로 부인하신다.

    ‘아냐…
    난 너무 힘들다.
    난 이제 망했어..'

    "아버님, 무슨 소리에요? 망하다니요? 뭐가 망한 건데요?
    아버님은 많은 노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복을 누리고 계셔요. 망하긴요..

    근데, 아버님 힘든 것은 이해해요. 많이 힘드시지요?
    그래서 우리 모두 어떻게 하면 덜 힘드시게할까, 지금 열심히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자식들은 아버님의 편안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일 거에요. 그거 아시지요?"

    "알지...난 고마워.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인데, 자식들이 다 훌륭해."

    "아니, 아버님! (빽, 소리침)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맞아요. 아버님 자녀들 다 잘났고 훌륭해요.
    그런데 그들이 그냥 땅에서 솟아나서 자란 거에요? 그들의 근원이 누구에요?
    아버님이랑 어머님이에요! 부모님이 열심히 사시고 희생해서 자식들이 다 잘 된 거에요.
    우리는 다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왜 아버님만 본인이 아무 것도 아니라 하세요? 정말...아버님, 고치셔야해."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아버님께 야단치는 듯한 시늉을 했다.
    아버님은 "그래도 난 운이 좋아." 라고 하셨다.
    (그건 감사의 마음이니까 부정하지 않고 통과.)

    "아버님, 많이 힘드시지요? 우리 그게 다 보여요. 저의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처음에 무척 우울하셨어요.
    그런데 그걸 바꿀 수 있었어요. 저랑 많은 이야기 나눈 뒤에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먹기로 했고, 그후에 모든 것이 다 잘 되었어요.
    아버님도 그럴 수 있어요. 아버님, 지금이 선택의 순간이에요."

    진지한 아버님의 시선에 용기를 얻어 나는 계속 이야기했다.

    "아버님, 억지로 긍정적이 되실 필요 없어요. 그러나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사실/존재를 부인하시면 안되어요.
    그건 자기 패배적인 선택이에요.

    아까 말씀했듯이 아버님 상태는 너무도 양호하거든요.
    건강도 회복 가능성이 있고, 자식들은 아버님을 돌봐드리려고 하고, 어머님도 옆에 계시고, 이게 얼마나 행복한 상황이에요.
    이제 엘리베이터도 설치될 것이고, 산책도 나가실 수 있고....좋은 일들, 감사한 일들이 너무도 많잖아요?
    그걸 부인하시 않으시면 되어요."

    "네 말이 맞네. 그러네."

    "그리고 아버님, 잊지 마세요."

    (뜸을 들였다. 아버님의 궁금증을 유발하여 드라마틱하게 강조하려고.)

    "아버님, 잊지 마세요. 아버님,당신은 여전히 이 집안의 가장이에요. 그걸 잊지 마세요.
    또한, 아버님, 당신은 여전히 어머니의 사랑이에요. 그걸 잊지 마세요.

    어머니가 사람들 쓰지 않고 아버님 혼자 돌보시려고 하는 거,
    그게 얼마나 엄청난 보호본능적 사랑인지 아세요?
    그 연세에 그게 가능한 생각이냐고요.
    어머니는 아버님을 지키려고 하시는 거에요.

    아버님 아버님이 어머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아버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시는 거에요.
    저희 아버지도 그랬거든요. 저희 아버지는 아버님과 달리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숫가락을 들지도 못하고, 책장을 넘기지도 못하셨어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은 손을 씻은 뒤 손의 물을 털 때의 동작, 딱 가슴께 까지만 올라올 수 있는 그렇게 한정된 동작만이 가능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라도 근육의 퇴화를 막고, 그러면 엄마와 저를 덜 힘들게 할 거라는 생각을 하셨나봐요.
    새벽 3 시에 아버지방의 문을 열었는데, 아버지가 깜깜한 방에서 조용히 혼자 이렇게 이렇게 ('나비야, 나비야' 동작을 보여드리면서 말함) 손을 움직이고 계셨어요.
    몸을 꼼짝하지 못하고, 눈썹이 가려워도 긁을 수도 없이 가만히 미이라처럼 누워계시는 아버지가 한밤중에 일어나 어떤 생각이 드셨겠어요?
    ‘아. 이게 뭐냐..난 망했어.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라고 생각하실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런 생각에 빠지는 대신, 아버지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을 하면서 나쁜 생각을 떨쳐내셨어요."

    친정 아버지가 느꼈을 고독과 절망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시는 시아버님은 친정 아버지의 선택이 놀라웠던가보다.

    "그러셨니? 그거 쉽지 않은데.." 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님, 저의 아버지는요, 그 상태에서도 매일 많이 많이 엄마를 도와주셨어요. 어떻게 그러셨을까요?"

    (다시 궁금증 유발, 강조 화법)

    아버님은 궁금한 표정이 되셨다.

    "아버지는 저랑 엄마한테 '고마워'란 말을 자주 하셨어요. 고맙다라는 말은 마법의 언어였어요.
    저와 엄마 기운을 북돋아주고, 그 힘든 상황에서도 엄마가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요.

    아버님, 아버님이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을 때 어머니도 마찬가지에요.
    작년에 아버님이 어머님께 폐가 되는 게 가슴아프다고 눈물 흘리셨을 때 어머니의 반응 생각나세요?
    괜찮다고, 나는 괜찮다고, 웃으시면서 아버님을 품어주셨지요.
    그게 어머니의 마음이에요. 어머님은 아버님을 사랑해서 지금 모든 일을 하고 계시는 거에요.

    어머니도 사람인지라 아버님의 격려가 필요해요.
    매사에 부정적이고 불평하시면, 어머님은 기쁨으로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수발은 힘들지만 기쁜 마음으로 하변 힘들지 않아요.
    그런데 기쁜 마음 없이 하는 수발은 아마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일 거에요.

    아버님, 어머님은 당신의 격려가 필요하세요.
    어머님은 당신이 주실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을 주고 계셔요.
    그거 의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어머니가 그리도 받을 자격이 있는 감사와 사랑을 많이 퍼드리세요.

    아버님, 어머니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세요?”

    아버님은 갑작스런 질문에 의아한 표정이셨다가 잠시 생각하시더니 미소지으셨다.

    “아…그렇지. 정말 옛날 이었어. 믿어지니? 70 년 전이었다는 게? 참…”

    나는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알랑 들롱같았고, 어머니는 천사처럼 아름다웠던 그 시절,
    날씬하고 깜찍했던 15 세의 지젤,
    아버님이 농담할 때마다 꺄르르 웃던 그 소녀,
    밝은 햇살을 즐기며 수영장에서 발을 담고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던 그 예쁜 소녀,

    기억 나시지요?

    (아버님의 미소)

    그 때의 아버님 기억나시세요?
    건장한 체격, 부리부리한 눈, 짙은 눈썹,
    바디 빌딩을 한 근육질 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만 하면 주위를 웃음 도가니로 만들어버리던
    젊은 시절의 아버님, 멋쟁이 남성!

    (아버님, 아하….웃으심.)

    그런데 아버님의 마음 한 가운데 그 옛날의 그 멋진 청년, 쥴리앙은 여전히 살아있지 않나요?
    연세를 많이 잡수셨지만, 아버님의 마음은 그 때 그 청년의 마음 그대로이시지요?

    (그렇지. 마음은 안 늙으니까.)

    어머님도 마찬가지에요, 아버님.
    아버님의 사랑을 받고 행복해했던 그 소녀는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아버님 옆에 있어요.
    머리는 하애졓고 몸은 굽었지만, 그 소녀의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녀는 아직도 쥴리앙의 사랑이 필요해요.
    쥴리앙이 사랑해주면 그녀는 행복할 거에요.


    아버님,
    저는 어머님께도 좀 변하시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이거 우리끼리 이야기인데, 아마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버님일 거에요.
    왜냐면, 아버님이 더 이성적이셔서요.
    이성적인 분이 사고와 마음을 더 잘 관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니까요.
    아는 사람이 문제를 풀어야해요.
    아는 사람이 힘든 일을 해야해요.
    아는 사람이 사랑을 하고 인내를 하고 용서해야해요.
    그래야 풀려요.

    그래서 아버님, 제가 아버님께 부탁하는 거에요.
    아버님은 하실 수 있다 믿어서요.
    아버님이 변해주세요.
    하실 수 있어요.

    변하는 게 뭔가?
    아주 간단해요.
    딱 한가지 개념만 기억하시면 되어요.

    고맙다.

    간단하지요?
    고맙다는 말만 기억하시면 되어요. 그리고 고마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면 되어요.

    고마운 마음으로 보면 어머니를 많이 칭찬해드릴 수 있을 거에요.
    당신 덕에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네, 힘들지만, 당신 덕에 버틸 수 있다.
    이렇게 당신 옆에 있는 것만해도 감사한 일이다, 당신이 있어서 든든하다.
    당신이 하는 음식은 다 맛있다, 오늘은 특히 더 맛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행복하시겠어요!
    기운이 나실 거에요!


    나의 열정적 연설이 마무리지어졌다.
    아버님은 대화 내내 옆에 눈길 한 번 안주고 나와 눈맞춤을 하고 경청하셨다.
    또한 대화 내내, 맞네 "Tu as raison (you are right)," "C'est vrai (It's true)" 라며 나의 말을 받아들이셨다.

    (귀가 안들리시는 아버님이 잘 알아들으시게 어찌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이야기를 했던지.
    밖에서 내 목소리 들으면 며느리가 아버님 학대한다는 소리 나오겠다 싶었다.
    나중에 잠에서 깬 딸은 ‘엄마 나는 꿈에서 엄마가 막 소리지르는 꿈을 꿨어. 그래서 귀에 병이나는 꿈을 꿨어.”라고 했다.

    ‘랄라야, 그건 꿈이 아니야. 내가 네 옆에서 엄청 소리 질렀어.
    그덕에 할아버지가 모든 말을 다 깨끗이 알아들으셨어.”

    “아, 그럼, 엄마가 소리지른 것은 현실이었고, 내 귀가 병이난 것은 꿈이었구나” 하더라.)

    아버님께 마지막 뽀뽀를 해드릴 순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아버님의 대머리 정수리에 뽀뽀를 했다.

    퇴근도장!

    "아버님, 저 내일 가지만, 브러셀에 또 올 거에요. 비행기로 15 시간이니 엄청 가까워요.
    어느날 불쑥 나타나서 또 이렇게 뽀뽀해드리고, 아버님 마사지해드리고, 아버님이랑 재미난 이야기 많이 할 거에요."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나는 유쾌한 얼굴/목소리로 아버님께 작별 인사를 했다.

    아버님이 '이번에 참 고마웠다. 너의 마사지가 최고였다. 잊지 못할 것야. 네가 어서 또 왔으면 참 좋겠다' 라고 하셨다.

    평소라면 아버님은 '우리 이제 못 볼거다' 라고 하면서 침울해하셨을텐데,
    다시 볼 날을 기약하시는 것만해도 아버님이 긍정적인 사고를 하심을 알 수 있었다.

    ----------------------------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말했다.

    “오늘 이야기하는 거 들으면서, 나도 뭔가 방향이 생겼어.
    당신 가고 난 뒤에 나도 부모님께 비슷한 이야기를 할 거야.
    수발의 주체는 결국 어머님이니까 엄마가 정서적으로 고갈되지 않게끔 해드리는 게 중요한 것같아.
    어머니때문에 속이 답답할 때 많지만."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도 어머니 생각할 때 어머니가 잘못하는 것만 생각하는 대신에 우선 어머니께 감사해야할 것같아
    그게 필요한 것같아. 사랑, 감사... 그런 마음을 품고 우리의 일을 찾아해야할 것같아.”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그게 부모님과의 대화를 거치면서 나에게 일어난 변화였다.
    즉, 내가 아버님께 조언했던 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존재하는 사물의 긍정적인 면을 애써 부인하려고 말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감사해하자.
    어머님이 하시는 일들의 긍정적인 부분부터 보고, 감사해하자.
    긍정적인 변화는 사랑의 감정, 사랑의 시선이 확인된 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부모님의 상황은 긍정적인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니까...

    이번에 부모님과 대화를 여러 번 하면서 나는 어머님도, 아버님도 얼마나 사랑이 필요한 분인가를 깨달았다.
    내가 아버님께 '당신들이 15 세, 18 세 때의 사랑을 기억하시냐' 라고 한 것은 그냥 어쩌다 나온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사진으로 뵈었던 어머니 아버님의 당시의 모습이 지금 현재 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더 늙은 것같다.
    왜냐..
    부모님은 노년의 위기를 처음 맞이했고, 당황한 채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게 잘 안 풀리고 있다.
    그런데 나와 남편은 친정 아버지 엄마와의 경험을 통해서, '노년의 위기'라는 주관식 시험을 치룬 부모님의 답을 알고 있다.
    다른 여러가지 주관식 답도 가능하겠지만, 당장 우리가 갖고 있는 친정부모님이 남기고 간 답안지의 답은 명확하고 설득력이 있다.

    시부모님은 시부모님대로 답을 창조해 내실 것이라고 믿지만,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한번 참고하시라고 해답지 하나를 보여드리는 것이다.
    ‘고맙다’ 라는 말이 적혀진 그 답지를..
    인생 경험이 있는 부모가 조심스럽게 틴에이저를 인도하듯이말이다.

    70 년이란 긴 세월을 베스트 프렌드로 배우자로 두고 사는 축복을 누린 부모님,
    현재의 역경을 잘 이겨내어, 노년의 테스트를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지으시기를,
    그래서 해피 엔딩을 이루실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사랑, 격려, 인내를 실천하면서 부모님을 도와야하리라.
    그러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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