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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별인사 1: 시어머니
    카테고리 없음 2021. 8. 1. 02:16

    시댁을 떠나기 전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자클린 이모가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기다리고 계셨다.

    이번에 쟈클린 이모님과 오붓하 시간을 두 번 가졌고, 우리는 더 친해졌다.
    쟈클린 이모는 자기에게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고 하고, 여러 덕담을 해주셨다.
    이모님 눈에 고인 눈물을 보는 순간, 나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모님이 가신 뒤, 아버님께 작별인사를 드릴 차례였다.
    어떻게야할지 난감했다.
    멀찌감치서 아버님 방을 바라보니 의자에 깊숙히 앉아 있는 아버님의 옆모습이 보였다.
    ‘아버님은 우리가 떠난 뒤 하루의 대부분을 저 모습으로 계시겠지’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났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아버님께 갈 수 없었다.
    거실에 계시는 시어머님께 부엌으로 와주실 수 있는가 여쭸다.
    어머니랑 식탁에 마주 앉아서 말씀드렸다.

    “어머니, 저 지금 아버님 보면 울 것같아요. 여기 앉아서 울고 들어갈래요.”

    어머님은 (나의 예상대로) 펄쩍 뛰시며

    “아니, 왜 울어? 울 일이 뭐가 있다고?” 라고 하셨다.

    어머님은 절대 안 우신다.

    쟈닌이 안락사로 숨이 끊어진 뒤, 사람들이 병실로 들어가니까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고 계셨는데
    사람들을 보더니 당황해서 “나는 우는 게 아니다” 라고 하실 정도로, 본인의 울음을 억제하신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한테도 울지 말라고 하신다.
    아마 그게 ‘위로’라고 생각하시는 것같다.
    울보인 나는 어머니로부터 ‘왜 우냐, 울지 말아라’ 라는 말을 많이도 들었다.

    그런 어머니를 알기에 부엌으로 어머니를 부른 것이다.
    내 눈물을 막아주십사.
    아버님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았기에…

    그러나, 나에게 “팜펨, 울 일은 하나도 없다” 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큰 눈이 불그레해보였다.
    말씀과 달리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울음이 터졌다.
    급한 김에 입고 있던 검정 원피스의 치마를 들어올려 눈물 콧물 닦아가면서 훌쩍거렸다.

    어머님은 나를 달래려고 많은 이야기를 하시면서 평소와는 달리 마음의 이야기를 많이 털어놓으셨다.
    내가 어머님을 알아온 25 년동안, 어머님의 속생각이 가장 많이 표현된 순간이었던 것같다.

    ‘울지 말아라. 떨어져 있어도 너희는 우리 마음에 가까이 있어
    벨기에 식구들은 한 나라에 살아도 삶이 바빠서 자주 못봐.
    큰 아이와 며느리도 작년에 두 번 봤어.
    나는 그걸 다 이해하고 받아들였어. 너도 그래야해.’

    라고 하시던 어머니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너는 마음이 너무 여려. 나도 옛날에는 너같았어. 그러나 바/꾸/기/로 마/음/ 먹/은/ 거/야.”

    어머니가 나같이 잘 우셨다고?
    상상도 못햇던 일이다.
    나는 정색으로 여쭸다.

    “어머니도 잘 우셨다고요? 그런데 왜 바꾸셨어요? 언제 바꾸셨어요?”

    어머님의 대답은 모호했다.

    “오래 되었어. 살면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고, 힘들 때는 많이 울었지.
    그런데 어느날 ‘이게 무슨 소용이람? (A quoi ca sert?) 운다고 되는 게 없는데, 내가 왜 울고 있지? 싶었어.
    그래서 울지 않겠다 마음 먹었어.”

    나는 어머님 말씀을 통해 여러 사실을 발견했다.

    항상 괜찮다, 괜찮다 하시는 어머니에게 울 정도로, 그리고 울음을 참아야할 정도로
    힘든 일이 많으셨구나…

    어머니가 마음을 잡기 위해서 스스에게 한 말, ‘그게 무슨 소용이람?’ (‘A quoi ca sert?’)은 그렇게 시작되었구나…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야’라는 말은 평소 어머니가 ‘성인’ (saint) 과 같이 행동하시게끔 만들어주는 삶의 모토이자 행동 강령이다.
    어머님은 ‘슬퍼해야 무슨 소용있냐’ ‘화를 내야 무슨 소용이 있냐’ ‘미워해야 무슨 소용이 있냐’—라고 하시며
    소용없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신다. 그래서 어머님은 죽음, 사고, 아들의 혼수상태, 이혼 등의 힘든 일이 생길 때
    절대 당황하시지 않았고, 항상 차분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님이 참 지혜로우시며, 어머님의 ‘A quoi ca sert?’ 철학이 참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고 보아왔는데,
    나의 그런 긍정적 시각이 흔들리게 된 것은 최근 쟈닌의 죽음 때문이었다.

    어머님은 자닌이 안락사를 신청했을 대, “병으로 고생하며 살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 는 입장이었고,
    한번도 쟈닌더러 안락사를 재고하라는 소리를—-인사치레로서라도—하지 않았다.
    나와 남편은 어머니가 자닌의 안락사를 용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부추키는 것같다고까지 느꼈고
    어머니와 통화할 때마다 상처를 받았다.

    쟈닌이 죽기 직전, 어머니와 아버님이 지극히 사랑했던 고양이가 많이 아파 안락사를 시킨 일이 있다.
    어머님은 눈물을 한방울도 흘리지 않으셨다.
    (고양이가) ‘고통을 받고 살아서 좋을 게 뭐가 있어,’ (내가) ‘슬퍼해봤자 무슨 소용이야’—다시금 ‘a quoi ca sert’ 철학 덕이었다.

    얼마 후 쟈닌이 안락사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어머님은 내내 담담했다.
    슬픔의 표현은 한번도 없었다. 슬픔의 표현은 커녕, 어머니는 돌아가시자마자 우리랑 통화 중,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쟈닌이 떠나서 난 안심이야.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이제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같아”
    라고 하셨다. 남편과 나는 어머니의 매정함에 경악했었다.

    그런 어머니가 스스로 ‘여린 사람’ ‘잘 우는 사람’이었다고 고백하다니, 내가 깜짝 놀란 것이다.

    어머님은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쟈닌이 안락사 1 달 전, 어머님은 너무 힘들었으며
    그래서 하루에 여러 번, 스스로의 정신을 무장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노라고.

    ‘받아들이자. 어쩔 수 없는 거야.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한다.
    난 최선을 다했어.
    지금 이 상황에서 언니까지 돌볼 수 없어.”

    어머님은 쟈닌의 안락사 직전에 여러가지 일이 한번에 닥쳐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빠삐 수발을 들어야하는데, 온수 보일러가 고장이 나지 않나.
    코로나로 사람들이 와서 고쳐줄 수 없다고 하고,
    아랫층의 쟈닌은 수시로 넘어져서
    하루에 여러번 쟈닌을 돌봐주러 가야했고,
    거기에 고양이까지 온 가구를 돌아다니면서 토하고…
    나는 너무 힘들었어.

    밤마다 빠삐 용변 수발을 세 번이나 들어서 지쳐있는데 새벽 5 시에 쟈닌에게서 전화가 왔어.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날 수 없었다고. 2 시간 동안 찬 바닥에 누워 있었던 거야.
    내가 놀라서 ‘왜 2 시간 동안이나 연락을 안했냐’고 했더니, 내가 피곤할까봐 미안해서 그랬데.

    쟈닌은 나에게 미안해하고, 나는 쟈닌을 제대로 돌봐줄 수 없었고,
    빠삐는 우울해져서 나를 힘들게 하고…그 상황이 너무 힘들었어.”

    봇물이 터져나오듯한 어머님의 진솔한 토로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나도 85 세, 젊은 나이가 아니야.
    혼자 사시던 친정 어머니가 우리집에 와서 나의 보호를 받기 시작했을 때
    어머니의 연세가 80 이었어. 지금 나보다 5 살이나 적은 나이였지.
    나는 85 세인데 갑자기 두 명의 수발을 들게 되었으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들으니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던가가 절절히 느껴졌다.

    우리가 그동안 전화로 “어머님, 괜찮으세요? 힘들지 않으세요?” 하고 여쭐 때마다
    어머니는 항상 “괜찮다. 괜찮다. 점점 적응이 되어가고 있다” 라고 하시며 우리를 안심시키려 하셨다.
    우리는 어머님 말을 믿지 않았고, 어머님이 아주 힘든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뭐든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라고 부인하시면서 혼자 다 하시려는 어머니가 답답했다.

    그러나 어머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으니 다른 관점이 생겼다.

    어머님이 힘든 순간에 불평하지 않고, 자식들에게 손을 벌려 도움을 청하지 않은 것은
    바로 어머니가 굳게 믿고 있는 사고—-‘불평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냐’—의 결과였다.
    언니가 안락사한다고 슬퍼해서 뭐하냐,
    남편이 아프다고 슬퍼해야 무슨 소용이냐,
    미국에 있는 아들 내외한테 힘들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냐…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야’라는 사고를 꼭 움켜쥐고 계시는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가 나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하신 목적은 단 하나였다.
    어머니의 ‘a quoi ca sert’의 철학을 나에게 전파하여
    내가 울지 않게끔 하시려는 의도.
    슬퍼하고 아파하지 말고, 꿋꿋하게 살라고 가르쳐주시려는 목적이었다.

    “팜펨아, 너는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해. 좀 tough 해져야해. 너는 너무 여려.”

    하시는 순간, 나는 속으로 ‘아…어머니….’ 탄식이 나왔다.

    어떻게 어머니께 이해시켜드릴 수 있을까.

    어머니가 보기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나의 눈물은
    내가 약해서 흘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는 눈물이 사랑의 한 방식이라는 것을…
    어머님은 내가 마음이 약하다고 생각해서 안타까워하시지만
    나는 맘편히 울지 못하는 어머니가 가엾다는 것을…

    그러나 나의 생각을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어머님은 이해하지 못하실테니까.

    그대신 나는

    “어머니, 죄송해요. 그대로 전 좀 울어야하겠어요.
    저 어머니 앞에서 많이 울고, 아버님 앞에서 안 울게요” 라고 선언하고
    펑펑 울었다.

    내가 그렇게 소리내어 울 때, 어머님은 당황하셨다.
    평소에 허그와 같은 육체적 접촉을 싫어하시는 어머님은
    내 어깨를 감싸안거나, 손을 잡지 않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하셨다.
    나는 어머니를 이해하기에 어머니 품에 기댈 생각하지 않고
    멀뚱하니 거리를 유지한 채 울었다.

    어머니가 그 때어떤 허그보다도 포근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씀했다.

    “이번에 와줘서 고마워. 시간을 내줘서 고마워.
    아마 빠삐도 너랑 이야기를 많이 해서 행복했을 거야.
    너랑 대화하면서 빠삐가 조금 바뀌었고, 나도 바뀌었어.”

    나는 어머니가 ‘나도 자주 울었다’ 라는 말을 하셨을 때에 이어
    어머님이 ‘바뀌었다’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아버님이 바뀌신 것은 눈에 띄는 현상이었지다. (우리가 브러셀에 온 뒤 얼마 안되어,
    표정이 밝아지시고 말을 많이 하심).

    그러나 어머님이 바뀌신 게 무엇이지?

    어머님이 바뀌신다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어머님은 누가 뭐락 해도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으신다.
    예전부터 집문제, 아버님 케어 문제, 집 수리 문제 등등,
    어느 것도 어머님이 자신의 입장을 바꾼 적이 없었다.
    매사에 ‘그래봤자 뭐하니, 소용없다, 지금도 괜찮다,
    내 리듬으로 천천히 알아서할테니 나를 좀 그냥 내버려둬라, 우리 나이에 돈 써서 뭐하겠냐…’
    어머님의 입장은 항상 단호했다.
    아버님 케어가 시작된 이후, 어머니와 자녀들 사이를 힘들게 했던 게 바로 어머님의 고집이었다.
    어머님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아버님이 훨씬 더 편안한 상황에서 수발을 받으실 수 있고 덜 우울하실 것이라는 게 자식들의 생각이니까.

    그런 고집장이 어머니가 스스로 바뀌셨다니?
    무척 궁금했지만 나는 어머니께 그게 뭐냐고 여쭙지 못했다.

    나중에 남편에게 어머니가 변하신 부분이 무엇이라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그는 어머니가 나로부터 친정 아버지 수발 경험과 간병 도우미 고용의 유익한 점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도 요양보호사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 것일 거라고 추측했다
    일리가 있는 관점이다.

    어머니가 다른 이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은 나와 남편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남편과 나는 매일 출근해서 아버님 옆을 지키면서
    아버님의 잦은 용변 수발, 물심부름, 약심부름, 마사지, 기침하실 때 도와드리기,
    밤에 양치와 파자마 환복 등 손이 많이 가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도맡았다. (우리 둘이 나눠해도 피곤한 일을 어머님이 1 년 넘게 혼자 하셨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우리의 도움을 받으면서 어머님은 서서히 변했다.
    처음 도착하자마자는 어머니의 머리가 산발이었고,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고, 자세와 움직임도 늙고 지친 모습이었는데
    우리와 함께한지 사흘도 안되어 어머니의 은발은 단정해졌고, 웃음도 많아지셨고, 아버님께도 다정해지셨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자연스레 매일 나와 남편의 도움을 받으면서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고,
    되려 아주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셨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남편과 나의 추측일 따름, 우리는 정확히 어머니가 변하셨다는 게 뭔지 알지 못한다.
    그게 무엇이든간에 그저 내가 어머님이 아버님 수발을 드는 데 약간이라도 도움이 된 것이 무엇인가 있었다면 다행이다.


    ——————————————————-

    부엌에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게 도움이 되었다. 눈물 콧물 뽑으며 운 덕에 마음이 안정되어서
    시아버님 앞에서는 웃으며 재롱을 떨 수 있었다.

    어머니와 부엌에서 나눈 대화는 참 소중했다.
    어머님이 마음이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강하게 먹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분임을 알게 되어서였다.

    노인이 노인의 수발을 드는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계시는 어머니을 이해하니까
    어머니께 이제까지와는 다른 식의 사랑이 느껴졌다.

    이전까지는 어르신에 대한 ‘존중’의 감정에 가까운 사랑이었다면
    지금 느끼는 사랑은 보호본능에 가까운 사랑인 것같다.
    어머니께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어른 대접을 깍듯이 해드리겠지만,
    내 마음 속에서 어머니는 어리고 여린 아가와 같다.
    넘어져서 무릎에 피가 나는데도 주먹 꼭 쥐고 ‘안 아파’ 라고 호기를 부리는 고집센 아가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어머님이 함부로 내놓지 않는 연약함을, 어머니 몰래 살포시 품어드리고 싶다.

    자기 감정 표현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고, 운다고 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도 아실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건 평생 눈물을 억제하면서 살아온 어머니께 너무 많이 바라는 일이리라.
    울음처럼 아무 짝에 쓸모 없는 행위가 사랑의 표현임을 어머니가 알아주셨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너무 많이 바라는 일이리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님이 ‘울어봤자 무슨 소용이야’ 라면서 울음을 삼키지 않아도 되게끔,
    어머니가 홀로 슬프하지 않게끔 해드리는 것이라 믿는다.
    어머님의 아버님 수발이 덜 외롭고, 조금이라도 쉬워지고
    아버님의 투병생활이 덜 고통스럽고, 조금이라도 유쾌해질 수 있게끔,
    나는 앞으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드리고,
    어머니를 더 많이 사랑하리라 마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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