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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 울렁증 할머니의 미국 병원 생존기 (투병기 2)
    엄마 2020. 9. 8. 03:12

     

    아침에 엄마께 전화를 했다. 전화를 안받으시니 밤새 뇌진탕이 진행되기 시작했나, 심장에 문제가 있었나 걱정이 들었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면 병원에서 연락을 했을테니 아무 일도 없었음이 분명하지만 엄마를 병원에 혼자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려서였다.
    간신히 8 시 경에 엄마와 통화가 되었다.

    “아... 팜펨아!~~”
    밝은 목소리.
    나는 안도했다.
    엄마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난 잘 잤어. 근데 여기 너무 춥다. 아버지 생각나더라. 아버지 응급실 모시고 갈 때 네가 털모자랑 큰 담요를 갖고 응급차에 탔잖아? 응급대원들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그런데 아버지가 그 담요 덕을 얼마나 보았니. 미국 병원은 냉장고같이 추워. 네가 담요 들고 간 거 너무 잘했다."

    엇? 엄마가 옛날이야기를 하시네? 웬 마음의 여유?

    “엄마, 어젯밤 너무 추우셨지요?”

    “응. 담요를 받았어. 근데 여긴 면 담요를 따뜻하게 데워 주더라.”

    “아, 간호사들이 배려해줬어요?”

    “아니, 내가 담요 달라고 했어.”

    “네? 엄마가.... 요?”

    “응. 처음에는 영어를 하기 싫어서 꾹 참았는데 한밤중에 너무 춥더라고. 그래서 간호사 불러서 ‘암 콜드. 김미 블랑켓’이라고 했지. 그랬더니 알아듣고 갖다 주데.. 재밌어.”

    난 너무 놀라서 잠시 말을 잊었다. 엄마가 내 통역 없이 영어로 소통하고 그걸 재/밌/다라고 하시다니!!

    그렇게 엄마와 통화 중인데 간호사가 들어와서 엄마께 뭐라고 하는 듯했다. 엄마가 그녀에게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마이 다러’
    (my daughter)

    간호사가 "오, 오케이!" 한다.
    엄마가 정말 간호사와 소통을 하시고 계시는구나! 다시 안심이 되면서 신기했다. 엄마의 발음이.
    어떻게 나의 엄마가 자음을 다 녹여버리는 미국식 영어 발음을 구사하시는 건가? 나도 안 하는 그 굴림 발음을?

    엄마가 말했다.
    “참, 여기서는 화장실 (bathroom)을 바스룸이라고 발음하네. 앞으로는 나도 바스룸이라고 할 거야.”
    ‘여기서는’ 이라 함은 병원, 그럼 '바스룸'을 '바스룸'이라고 발음하지 않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우리 집이다. 지난 4 년간 엄마가 살아오신 우리 집, 아버지 수발을 들면서 수백 번도 더 사용한 목욕탕, 화장실이란 영어 단어 bathroom.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발음되는가를 엄마는 처음 들으시고, 그게 본인의 발음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신 것이다.
    심장 고치러 간 병원에서 엄마는 발음을 고치게 되셨다.
    -------------------
    엄마가 '바스룸' 이야기를 하는 순간, 나는 뜨끔했다. 내가 엄마께 영어를 가르쳐드리는 '선생'이지만 어쩌면 내가 엄마의 영어 습득에 방해가 되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왜?
    나의 영어 발음 ㅠㅠ.

    나는 한국 떠난 지 30 년이 넘었지만 미국에 오기 전에 이스라엘, 프랑스에서 살았기에 한국에서 배운 정통 종합 영어식 교정할 기회가 없었고, 어느 순간에서부터 인가는 발음보다 소통이 중요하다 생각해 굳이 교정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누구나 아무렇게나 발음해도 소통을 하려는 의지로 다 척척 알아듣는 여러 나라 사람들과 친선 만세 하면서 나의 국적불명의, 종잡을 수 없는 영어 발음은 편안하게 자리 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게도, 당시 나는 일본 사람들이나 동남아권 사람들에 비해서 나는 내 영어 발음이 너무너무너무 좋다는 자부심마저 있었다. ㅠ)

    불어가 끼친 내 영어 발음에 끼친 (부정적) 영향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불어는 영어에 비하면 발음이 아주 정직한 언어이다. 철자 써진 대로 그대로 읽어주고 톤을 좀 부드럽게 해 주고, 엑센트에 신경을 쓰면 된다. (한 예로 '결혼' 은 영어로 'marriage, ' 불어로는 'mariage' 인데, 영어 발음은 '메리지'로 중간의 'a' 발음이 사라지는 반면, 불어는 철자 쓴 그대로 '마-리-아-지'이다. 얼마나 쉬운가!)

    자음을 꿀떡 삼켜먹거나 부드럽게 흘려버리는 것을 좋아하는 미국 사람들은 물 (water)를 '와아터' 또는 '와아러'라고 하고 딸 (daughter)를 '다아터' '다아러' 라고 하지만 써진 대로 읽는 버릇이 생긴 나는 그렇게 굴리지를 못한다. 나에게는 물은 여전히 '우어터'고, 딸은 '도오터'이다.

    불어는 영어식 발음으로, 영어는 불어식 발음으로 갈팡질팡 하면서 나는 개의하지 않고 그저 말하고 사는 게 즐거웠다.

    ‘이 내가 당신네 나라 언어로 이야기하는데 당신이 내 말을 못 알아들으면, 그건 누구 책임이 더 클까? 당신의 책임!! 당신의 모국어인데 눈치로,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지"
    하는 말도 안 되는 배짱이었으니 세상 편했다. 그렇게 뜻이 통하고, 대화가 되면 만사 오케이! 하면서 다바다바다바, 지치지 않고 수다를 떨고 살았다.

    그러다가 만난 남편이, 아뿔싸.... 프랑스어를 쓰는 벨기에인. 남편은 현재 27 년 미국에 살았고, 미국 직장에서 일해왔지만, 아직도 '며칠 전에 미국 땅을 처음 밟은 벨기에 관광객'의 영어와 같은 한심 찬란한 불어 엑센트의 영어를 구사한다. 흥분하면 말이 엄청 빨라지는 것은 덤.

    나와 사랑하는 나의 남편은 언어적으로도 찰떡궁합이다. 우리가 말할 때 남들에게는 우리가 우리만의 비밀 언어를 구사하는 듯 들리는 것 같다. 예로, 어느 날 슈퍼마켓에서 식재료를 사고 포장을 하면서 우리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캐시어 아줌마가 우리에게 '불어로 이야기하시네요?' 하는 바람에 허걱 놀란 적이 있다. 우리는 그때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ㅠ

    본론으로 돌아가서, 바깥세상 출입하는 일 없이 그저 그런 국적불명 영어 엑센트의 딸과 굳세어라 불어 엑센트의 사위와 한 지붕 밑에서 사는 엄마가 어떻게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울 수 있었겠는가!

    또 하나, 엄마가 나에게 효과적으로 영어를 배울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나는 한국어를 할 때 영어 단어를 자연스럽게 끼어 넣어 사용하는 일이 없기에 엄마가 실용적 영어 단어를 자연스럽게 접할 기회가 없다. 만약 내가 실용적 영어단어가 많이 사용되는 ‘미국 교포식 한국어’를 전혀 한다면 엄마는 영어를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국 교포식 한국어'라 함은 영화 ‘기생충’의 조여정 분 엄마가 영어 섞어서 쓰는 한국어와 유사하다. (뭔가 좀 있어 보이는 것같이 들릴 수는 있는, 그러나 알고 보면 미국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영어 단어들일 따름...) 바로 다음이 미국 교포식 한국어의 예이다.

    “우리 아이가 사람들 앞에 서면 너무 너버스 (nervous) 해해서 걱정이야. 그런 식으로 하면 미국 사회에서 어떻게 서바이브 (survive) 하겠어. 근데 나는 걱정이 앞서서 아이를 스콜드 (scold) 하나봐. 남편이 나더러 '캄다운' (calm down) 하라고 하더라고. 부모가 아이한테 자꾸 네깅 (nagging) 하면 아이한테 '로우 셀프 에스팀' (low self-esteem)만들어줄 수 있다는 거야. It makes sense. 맞는 소리 같아. 내가 아이의 디벨롭먼트 (development) 에 네거티브 (negative) 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하니까 정말 guilty 한 감정이 느껴지더라고. 우리는 그냥 인커리지 (encourage)만 해주면 된다고 해....유노 왓아이 미인..(you know what I mean)”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이해하는 영어가 비벼진 한국어. 이런 한국어/영어의 장점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가 이미 감이 오는 상태에서 적시 적소에 영어 단어가 사용되기에 영어 단어가 삶에 녹아든다는 사실. 단어를 잘 몰랐던 사람도 이런 말을 들으면 음....low self-esteem 은 낮은 자신감 같은 거구나... nagging 은 잔소리고.. encourage는 칭찬해주고 독려해주는 거겠고... 하면서 단어를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교포 한국어를 구사하지 않는다. 한국어를 할 때 영어 단어가 절/대 섞이지 않는다. 영어를 할 때 불어를 쓰지 않고, 불어 쓸 때 영어 사용하지 않는다. 대단하게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게 습성이다. 한국어로 있는 단어는 영어를 쓰지 않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일어나는 일, 얼마 전에 산책 나갈 때 엄마께 “엄마, 색안경 갖고 계시는 거죠?” 했다가 엄마께 핀잔 들음. 요즘 누가 색안경이란 말을 쓰냐. ‘간첩인 줄 알겠다’라고 하셨다.

    (이거 글이 완전 옆으로 새는데.... 나는 진심, 외래어를 안 쓰는 북한말이 너무 좋다. 가락지 빵 (도넛), 단물 (주스), 망시민 (네티즌), 화학세탁 (드라이클리닝), 모서리공 (코너킥), 투피스 (동강옷), 살까기 (다이어트)..... 맘에 꼭 든다. 이런 단어를 쓰고 살고 싶고, 이런 단어를 쓸 때 누가 나더러 간첩이냐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북한말 중 하나ㅡ 슬픔증 (우울증)!!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내가 한국어를 하면서 영어 단어를 섞어서 쓰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렇게 해야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는 때, 즉 이중언어자인데 영어가 좀 편한 젊은이들과 대화할 때일 따름이다. 그렇다. 나는 ‘정통 종합 영어’와 ‘정통 종합 한국어’를 분리해서 쓰고 산다. 그래서 엄마는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할 기회가 더더욱 없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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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사태로 병원에 엄마의 '다러 (daughter)'의 출입이 금지된 것은 엄마의 영어의 성장을 위해서는 신의 한 수였다. 매사에 통역을 해주던 딸이 없으니 엄마는 억지로 본인의 의사 표현을 해야 했고, 자신의 건강에 직결되는 대화들이 오가는 모든 상황에 엄마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니 서서히 귀가 열리고 입이 트이는 것.

    병원에서 실전 영어를 듣고, 간단한 표현을 하면서 엄마는 영어로 '소통'하는 쾌감을 처음 느끼신 것은 새로 교대되어온 간호사와의 대화에서였다.
    간호사가 자기 이름은 ‘Vivien’이라고 인사를 했을 때, 평소에 나랑 함께 있었을 때라면 그저 친절한 미소로 인사를 했었을 엄마는

    “비비엔? 그 유명한 여배우와 같은 이름?”이라고 하셨단다. 영어로! 간호사가 크게 웃으며 엄지 척! 했단다. 새로 배우는 언어가 딱딱한 정보의 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웃음으로 연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매개물이 되는 순간!

    병원을 영어 연습실 삼아 조금씩 영어 연습을 함과 동시에 엄마는 말이 잘 안 통하는 병원에 홀로 있다는 사실에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당당히 지켰다. 통역사를 통해서 간호사든, 의사에게든 본인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했고, 사람들은 모두 엄마를 존중했다. 언어를 모른다고 그저 모든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기록하고, 통역사를 통해 질문하고, 항의하고, 칭찬하면서 능동적으로 병원 생활을 했다. 내가 엄마의 상황이라면? 하고 상상해보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게 엄마는 줏대 있게 행동했다.

    엄마는 평생 매일의 일지를 쓰셨는데 병원에 입원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첫날 나랑 통화 중, “병원에서 잰 혈압이 이러이러하니 그걸 내 대신 받아 적어 달라. 그리고 내 노트북과 펜을 갖다 달라. 일기를 써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리곤 병원에서의 일상을 빠짐없이 기록하셨다. 뭘 몇 시에 먹었고, 어떤 테스트를 받았으며, 혈압은 어떠한지. 통역사를 통해 궁금한 것, 요구할 것, 항의할 것— 다 표현했다.

    엄마가 노발대발한 사건이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신 뒤 둘째 날 엄마는 러닝 머신에서 달리기를 하는 심장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게 되어 있었다. 오후에 엄마께 전화를 걸어 테스트를 잘 받으셨냐고 여쭸더니 엄마의 목소리가 영 언짢으셨다. 심장 테스트를 하러 운동실에 갔는데 자그마치 50 분이나 기다리게 하더니만 테스트 검사관이 '금식을 해야 하는데 아침 식사를 했으므로 테스트를 할 수 없다'라고 했단다.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고 싶었던 엄마께 병원 실수로 하루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병실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비싼 입원비를 하루 더 내야한다는 것도 화날 일이었다.

    의사가 회진하러 왔을 때, 엄마는 한국어 통역을 사용해서 이미 항의를 했다고 했다.

    '이 병원의 지시 체계는 어떻게 된 것인가. 내 조식 배식의 책임자가 누구인가. 간호사, 조리사 등 다 내가 아침 식사를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무척 화가 났었다.''

    의사는 엄마께 사과를 했고, 나에게 전화를 해 정중히 사과했다.
    병원에 입원하신 뒤에 명령/소통 체계가 제대로 안되어 간호사들이 엄마가 왜 입원했는지, 무슨 테스트를 하실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에/게 물어본 적이 두 번 있었다. 그래서 나도 병원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고 좀 불안했는데, 엄마가 눈을 똑바로 뜨고 똑똑히 행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 마음이 놓였다.

    매일 전화할 때마다 엄마는 그날그날 엄마의 무용담을 전해줬다. 한 번은 엄마가 항생제 복용을 시작한 날, 간호사가 주무실 때 약을 드시고 6 시간 후 새벽 3 시에 약을 다시 드셔야 한다 라고 했단다. 엄마가 주무시는데 간호사가 항생제를 갖고 와 엄마를 깨웠다. 비몽사몽 중, 간호사가 주는 약을 그대로 받아 드시지 않고, 엄마는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새벽 1 시. 엄마기

    ‘지금 새벽 1 시니까 너무 이르다. 두 시간 후에 먹어야 한다’라고 하니 간호사는 당황했고, 이후 새벽 3 시가 되어 엄마는 잠이 깨어 간호사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더란다. 그래서 버튼을 눌러 간호사를 불러 약을 달라고 했단다.

    내가 매일 전화를 할 때마다 간호사들은 ‘너의 어머니, 너무 멋지다’라고 했다. 어떤 이는, ‘나에게 물어보는 것보다 당신의 어머니께 물어보는 게 더 정확할 거다’라고 했다. 어떤 간호사는 ‘당신의 어머니랑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해주실 이야기가 너무 많을 것 같다’라고도 했다.

    엄마가 그렇게 본인의 일을 알아서 해준 것은 나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 간호사들은 대체적으로 프로페셔널한 친절함이 있어서 엄마가 노골적인 차별을 당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영어를 못하는 할머니이니까 좀 쉽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는 스스로의 보호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집이 그립고, 병원 음식은 맛이 없고, 외롭고 힘들었지만 잘 버텨주셨다. ("너를 위해서라도 내가 열심히 병원 생활을 잘할 거다'라는 것을 보니 모성애가 엄마를 강하게 해 준 것 같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계시는 동안 나는 하루에 한두 번 병원에 가서 수위실에 책, 옷, 속옷, 마스크 등등 물건들을 맡겨놓았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집에서 온 물건을 받으면 엄마가 세상과 단절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을 덜 느끼실 것 같아서. 병실을 올려다보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면서 참 착잡했다. 동시에 엄마가 길고 긴 격리의 시간에 영어로 이야기하시고, 영어를 들으려고 노력하시고, 자신에 관한 모든 정보를 통제하시면서 살아내신다는 사실에---엄마에게 새로운 도전이 주어졌고, 엄마가 그 도전에 응전을 너무도 성공적으로 잘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꼈다.

    엄마가 퇴원하기 전에 그날 담당 간호사가 나랑 통화 중 한 이야기가 있다.

    “당신 어머니, 너무 쿨하셔요. 이제까지 이런 환자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혈압 체크를 하면 숫자를 보여달라고 해 본인의 노트에 혈압 수치를 적고, 잠시 후에 자신의 개인 혈압계로 혈압을 측정해 기록하여 비교하십니다. 본인이 약을 언제 먹는지, 무슨 테스트를 하는지 다 적고, 자신의 몸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다 알고 계셔요. 말을 못 하셔도 똑똑하시고 권위가 있으세요. 늙어서 나도 당신 어머니같이 되고 싶습니다."


    --------------
    퇴원 후 4 개월이 지난 지금, 엄마는 예전보다 훨씬 더 건강하시다.
    숨이 차, 팔이 아파 못 걷던 곳을 지팡이 없이 씩씩하게 걸으신다.
    "아 몸이 가볍다!' 하시면서.
    심장만 건강해진 게 아니다. 엄마의 영어도 아주 건강해졌다.
    산책 다니실 때 지나치는 사람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고,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게 즐겁게 되었다. 이제는 영어 단어 섞어 쓰는 교포 영어도 간간히 구사하시고, 내가 영어로 하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시며,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물으셨다.

    "'See the bigger picture. Make a better world' 란 말이 좀 더 크게 보고, 세계를 더 좋게 만들라는 뜻이지?"
    "네, 어디서 그런 좋은 구절을 찾으셨어요?"

    손녀딸의 대학 티셔츠의 뒤에 적혀 있던 문구란다.

     

     

     


    엄마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See the bigger picture, make a better world.... 참 멋진 말이지? 티셔츠를 개는데 그 문구가 눈에 들어오는 거야.
    영어 교습서가 아닌데 그냥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문장을 내가 쉽게 해석하고 그 깊은 의미를 이해했다는 게 신기했어.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어."

    엄마가 언어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는 걸 보니 나도 덩달아 기뻤다.

    딸의 티셔츠의 문구가 계속 뇌리에 맴돈다. 엄마의 삶에 적용되는 말이라서이다.

    (교포 한국어/영어 좀 쓰자면) 엄마는 영어를 공부하면서 '좀 더 큰 픽쳐'를 보시게 되었고 그리고 본인의 삶을 더 나은 세계로 만들어가고 있다. 어떤 면에서 방년 21 세 미국 손녀딸이 갖는 꿈--the bigger picture, a better world--을 엄마도 함께 꾸고 계신 것이다. 나는 엄마의 그 꿈을 오랫동안 목격해왔다. 늦은 밤, 불이 켜져 있는 엄마의 방에 잠자리를 봐드려 들어갈 때 가끔 엄마가 돋보기를 쓴 채, 영어책을 가슴에 껴안고 잠이 든 모습을 볼 때.... 수시로 이어폰을 꽂고 영어 문장을 따라 읽는 모습에서. 그날그날 새로운 문장을 받아 적고 외우는 엄마의 노력에서.. 그리고 엄마의 꿈이 이제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86 세라는 연세에도 퇴색되지 않고 반짝반짝 빛나는 엄마의 꿈이 고귀하게 느껴지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엄마가 너무도 사랑스럽다.
    엄마의 간호사가 했던 말--늙어서 나도 당신의 어머니처럼 되고 싶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다리가 불편하고, 몸이 약해지는 노년에 여전히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은 이제 곧 환갑이 되는 나에게 큰 배움이 되고 자극을 주고 내가 게으르지 않게 해 준다.
    엄마의 지치지 않는 열정과 부단한 노력이라는 삶의 방식으로 이미 세상을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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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

     

    응급실

     

    퇴원

     

    생신

     

    할머니가 살아오심 축하하는 파파라치 손자 손녀

     

    봄메 여사는 우리의 여왕님!


    그리고....아버지 묘소에 가서 '엄마는 아직 아버지 옆에 못가십니다~~' 인사드리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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