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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만의 궁전 완성!
    random 2019. 11. 22. 12:55

    결혼 후 24 년 만에 내 방이 생겼다.  

    그리고 7 년 만에 내 책상이 생겼다.

    이제 나는 "방-리스" "책상-리스" (홈리스에서 영감을 받은 단어 ㅋ) 가 아니라 떳떳하게 내 방에서 내 책상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문을 닫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게,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놓을 수 있고, 책을 닫지 않아도 되는 책상이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쁠 수가.

    내가 방과 책상을 동시에 소유했던 적이 딱 한번 있긴 했다. 흥미롭게도 그건 우리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신혼 초기였다. 방 두개 딸린 기숙사에서 내 방이 있을리가 만무했지만 현관 옆의 1 평방미터의 신발장에 조그만 책상을 넣고 내방으로 만들었다. 나만의 궁전이라는 의미로 혼자 '자/궁'이라 불렀던 공간...(검색하여 들어왔다가 실망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 사용하겠음)

    책상이 있는 '자/궁'의 호사는 한 3 년 누렸나보다. 그 이후 우리는 방 세 개의 작은 콘도로 옮겼다. 아이들이 각기 방 하나씩 차지하고 에릭과 내가 함께쓰는 안방, 나만의 공간은 당연히 없었다. 혹시 뭔가 개조해서 내 공간을 만들어볼까 했으나 가능하지 않았다. 좁은 기숙사보다는 공간이 더 많이 생겼음에도 기숙사에서 누리던 '자/궁'의 행복이 없어져서 참 섭섭했다.

    그대신 책상을 좀 큼직한 것으로 샀다. 놓을 곳이 안방뿐이었고 침대에서 손을 뻗으면 책상 위에까지 컴퓨터까지 손이 닿았다. 전자파가 해롭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전체적으로 비좁은 집이니 우리 방도 비좁았고 그 비좁음에 비해 널찍한 책상이 감사했다. 

    그 집을 팔고 현재 집으로 이사오기 위해서 집의 짐을 비워야했다. 집 매매와 인테리어 전문가인 나의 친구는 우리집의 인테리어를 도와주러 와서 눈으로 스캔을 하더니만 잠재적 구매자가 방문할 때 집이 커 보이려면 '너의 싸구려 가구를 다 빼야한다'면서 '볼품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책상'부터 치워야한다고 했다. 나는 이사가면 다시 책상을 찾을 수 있으려니 하고 책상을 포함 모든 책들을 포장해 창고에 맡겼다. 

    현재의 집을 산 것은 2013 년 2월. 원래 살던 콘도보다 1.5 배 더 큰 이 집에 들어오면서 나는 어쩌면 '책상이 있는 자/궁'을 다시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내가 서재로 삼고 싶은 공간이 있었는데 시댁어른과 친정부모님이 각각 한달 이상씩 지내시는 공간이어서 내 서재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 공간 포기.

    새집에 들어와 삿짐의 반 정도를 풀었을 때 한국에서 오빠가 돌아가셨다. 이후 나는 아주 바빠졌다. 한국의 부모님의 크고작은 병치레,  입시 준비하는 고등학생 두 명, 그들의 사춘기 드라마, 구조 변화를 겪는 회사에서 고민이 많은 남편--너무 바빠서 내 방에 대한 꿈은 아예 잊어버렸다.  조각 시간이 나면 잠깐 랩톱에 글쓰고 (그래서 어깨가 아주 보기 좋게 굽어버림 ㅠ), 침대에서 책을 잡고 몇 자 읽지 못한 상태에서 스르르 잠이 들기 일쑤. 어쩌다 사막집에 가서야 종일 폭풍 독서, 폭풍 글쓰기를 하곤 했다. 

    이후 3 년은 아버지 병수발. 내 '자/궁' '내 책상'의 자리를 만드는 대신에 부모님 방을 만들었다. 나는 내가 시간 관리를 못하면 내 정신 건강이 위태해진다는 위기의식이 생겨서 '시간 훔치는 것'을 아주 중요한 원칙으로 삼아 나름 열심히 뭔가 하려고 노력을 했다. 책상이 없어도, 방이 없어도, 식탁에서, 거실에서, 마당에서 뭔가 계속 하고는 있었다.  단지 생산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다. 글쓰다가 코를 박고 잠이 들어 글을 날려먹은 것도 여러 번이었으니 말이다.

    책상이 없다는 것은 글쓰기만이 아니라 독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책을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버릇을 갖고 있다. (글도 여러 편을 동시에 쓴다. 지금도 영어 에세이 두 편을 쓰는 중에 이 글을 쓰고 있음). 책 한권을 열심히 집중해서 읽다가 피곤하면 완전히 다른 장르/언어의 책을 읽으면서 머리를 식히는 식이다. 산문을 읽다가 피로하면 시를 읽고, 영시를 읽다가 집중이 안되면 한국어 에세이를 읽고, 에세이를 읽다가 눈이 피곤하면 잠시 쉬었다가 동화를 읽고....그래서 내 방, 내 침대 주위는 관계없어 보이는 책들이 널려있다. 꽤 대단한 일을 하는 것같이 들릴까봐 조심스러운데, 그건 아니다.  뚜렷한 목적 없이 그저 내 '즐거움'이 유일한 목적인 글쓰기이고 독서이다. 그렇다보니 응급상황에는--그리고 지난 몇 년간 응급상황은 아주 잦았다--제일 먼저 포기하게 되는 게 내 글쓰기요, 내 독서였다.  한번 쓰다만 글은 다시 쓰기 너무 힘들었고, 한번 닫은 책은 다시 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사용하게된 게  e book 이다. 이제는 e book 에 익숙해졌지만, 그리고 여행을 다닐 때는 ebook 이 있어서 참 행복하지만, 한가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ebook 은 손에 종이책을 잡고 읽을 때 느껴지는 쾌감, 책갈피에 내 감상을 적은 포스트잇을 끼어넣고, 이리저리 페이지를 만져가면서 책을 가슴에 담는 즐거움이 없다. 한마디로 종이책과 맺을 수 있는 짜릿한 '육체적 관계'를 허용하지 않는 게 ebook 이다. 나는 종이책과 놀고 싶은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달 뒤 엄마와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라서 글을 써서 마음을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방 두개짜리 스위트를 예약했다. 나는 정말 오랫만에 책상이 있는 나만의 공간, yes, '자/궁'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때 열흘정도 시도때도 없이 글을 썼다.

    그리고 그 자/궁에서 지난 30 년간 하지 못했던 일마저 했다

    나는 가장 좋아하는 자유스러운 옷차림으로 (= 즉, 아무런 옷을 걸치지 않고!! ) 글을 썼다.

    그 자유스러운 글쓰기는 옛날 유학 시절에 얻은 버릇이다.  학교 숙제, 논문을 다 '가장 자연에 가까운 모습'으로 썼다. 물론 결혼 후에는 그런 자유스러운 글쓰기가 가능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호텔의 자/궁에서 난 훌훌 벗어던지면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고 싶은대로 해. 아버지를 돌보는 동안 못했던 것들, 다 해보는 게 이번 여행의 목적이 아니었드냐...그래 내멋대로 하리라... 

    그렇게 행복한 글쓰기를 하던 어느날 새벽,  엄마가 화장실 가시다가 불이 켜있는 내 방의 문을 여셨다. 나의 행색에 너무 놀라 그자리에 얼어붙으셨다. 그럴만도 하다. 60 이 다 되어가는 딸이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채 눈이 이글이글하니 글을 쓰고 있으니. 

    그 순간에 나는 글에 정신이 팔려 "엄마, 일어나셨어요?" 하고는 그냥 계속 글을 썼다. 엄마는 말없이 문을 닫았다.  지금도 엄마는 그날의 쇼크를 이야기하신다. 처음엔 기괴한 내 모습에, 그 다음에는 엄마가 보던 말던 전혀 상관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에 놀라셨다고...

    그후 1 년이 지났다.  나는 여러 일로 바빴다. 우리집에는 빈 책상은 여러군데 있었다. 집을 떠난 두 아이의 방의 책상이 비어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너무 행복했다. 그러나 아이들 방이 내 방이 아니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옷차림' (또는 '옷 벗은 차림') 으로 글을 쓰게되지 않았다. 게다가  가까이 사는 아들, 수시로 집을 방문하는 딸이 올 때마다 방, 책상을 도로 내어주다보니 내 맘대로 여러권 책을 펼쳐놓고 읽고, 글쓰기를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올 때마다 난민처럼 내 물건들을 주섬주섬 들고나와 안방 한 구석에 처박아 두다보면 아이들이 떠난 뒤에 책상이 내 차지가 되어도 독서하고 글쓰는 작업에 금방 발동이 걸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맥이 끊기고 맥이 빠지는 것이다.

    지난 주말에 사막에 가 있는 동안 여러 생각을 했다. 곧 60 이 되는 나,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절감하면서 24 시간을 정말 알차게 쓰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나는 나만의 방, 나만의 책상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의 자/궁을 복구하자! 

    어디다 자/궁을 만들까..

    원래 내가 내 방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공간에 눈이 갔다. 요즘은  다리미대, 재봉틀, 안보는 책들, 운동 기계들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 방을 고양이가 사용하고 있다. (즉, 고양이에게 방이 있고, 나에게 방이 없었다는 소리다!)

    '펠릭스야, 미안하다. 넌 책 읽지 않잖아. 엄마가 방 좀 쓰자...'

    나는 사막에서 돌아오자마자 체육복에 운동화를 신고 일을 시작했다. 차고의 짐 박스를 보니 2013 년에 이사온 뒤에 풀지 못한 짐들도 꽤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 나의 짐들이었다. 미친듯이 버리고, 치우고, 묶고, 모으고...이틀간 쉴새없이 일했다.

    화요일에는 에릭과 온라인으로 책상을 검색. 가볍고 조립하기 쉬운 책상으로 정했다.  

    수요일, 어제 저녁 가서 사와 조립해서 설치했다.

    이방의 문을 잠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나는 완벽한 내 자/궁/이 완성되었음에 환호했다.

    나의 동거인이자 영원한 지지자인 남편과 엄마께 내 결심을 말했다.

    "여러분,

    전 제 자/궁에서 뭐에 대해서 쓸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쓸지는 알고 있습니다.

    전 아주 즐/겁/게 쓸 것입니다.

    그리고 세가지 스타일로 글을 쓸 것입니다. 

    (이 싯점에서 '스타일'이 글의 스타일이 아님에 미리 양해를 구함)

    1. 옷 차려입고, 화장까지 하고, 하이힐 신고 쓰거나 

    2. 옷을 전혀 안 입고 쓰거나

    3. 옷을 전혀 안 입고 하이힐 신고 쓰거나

     이 세가지 스타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열지 말아 주세요. 저야 괜찮지만 놀라실까봐...."

     

    나랑 오래 살아서 나의 웬만한 말에 놀라지 않는 에릭은 그냥 미소짓는다.

    엄마는 말씀하셨다.

    "난 첫번째랑 두번째는 이미 보았어. 세번째만 못봤네."

    와우. 엄마!

    난 속으로 좀 놀랐다.

    85 세의 엄마가 나에게 '얘, 흉칙하게 그게 뭐니, 너 정신 나갔니, 창피해라....' 하셔도 충분히 이해할텐데 오히려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주시니 말이다. 

    엄마, 감사합니다!

    난 앞으로 즐겁게 자/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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