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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노이의 빨래
    스치는 생각 2019. 11. 18. 03:43

     

     

    나는 손빨래를 좋아한다. 아직도 자주 손빨래를 한다. 

    손빨래는 행복한 추억을 갖다 준다. 소중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어려서 살던 태능집. 마당의 수세미 덩쿨 밑으로 있던 수돗가.. 나는 대야에 물을 받아 물장난 겸, 빨래 겸, 놀았었다. 내가 아무리 힘껏 빨래를 짜도 물이 뚝뚝 흐르는데 엄마가 한번 휙 짜면 모든 물이 다 빠지는 게 신기했었다. 여름, 햇볕이 좋은 날, 낮에 잠시 놀고 나면 빨래는 빳빳하게 말라있었다.

    요즘 손빨래를 하면  당연히 빨래줄에 널지만, 어떨 때는 세탁기로 빤 빨래도 넌다. 에너지 절약이 주 목표가 아니라, 그냥 빨래를 너는 게 좋아서이다.

    안타깝게도 깨끗하기로 소문난 우리 동네에서는 밖에서 보이게 빨래를 거는 게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이층 침실 앞의 베란다의 하얀 울타리 뒤로 은근하게 숨겨서 빨래를 넌다. 밖에서는 안보이고, 내 침실에서는 보인다.

    목표 달성. 나는 빨래를 '보려고' 넌다. 빨래를 보면 마치 내 눈앞에 옛날의 태능 수돗가가 펼쳐지는 것같고 기분이 좋아진다.

    빨랫줄에 걸려 있는 빨래 사진은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사진의 모티브이기도 했다. 옛날 여행 사진들을 보면 빨래줄의 빨래 사진들이 좀 있다. 

    빨래줄의 빨래는 모르는 이의 가족 사진과 같이 정겨웠다. 엄마,아빠, 아기, 청소년 자녀, 조부모---한 가족의 삶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것이니 말이다. 빨래줄에 걸려있는 옷 중에서 특히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기 옷들. 작은 양말들, 티셔츠가 바람에 살랑살랑 날리는 모습에 내 마음에는 짜랑짜랑한 동요가 울려퍼지고 즐거워지기 마련이었다. 세탁이 된 뒤 하나 하나 찝게로 찝어서 단정하게 걸려있는 빨래들은 단조로운 삶의 행위에 담긴 삶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몇년 전부터 빨래줄 사진을 함부로 찍지 못하고 있다. 그 계기가 있다.

    남편과 중동 지역을 여행 중, 빨래가 걸려있는 집을 지나치게 되었다. 무너져내릴 듯한 낡은 집에 알록달록 예쁘게 걸려있는 빨래에 눈이 가는 순간 반가워 사진기를 들다가 멈칫했다.

    그 집은 나에게 너무도 가까웠다. 멀리서 망원렌즈로 찍을 때에 보장되었던 그런 안전 거리가 없이 나는 한 가정의 내밀한 삶에 너무도 가깝게 서 있었다. 모르는 가족에게 사진기를 들이대면서 찍을 수 없듯이 나는 가족의 빨래를 찍을 수 없었다. 바라보는 것조차 미안했다. 사진기를 내리고 조심스레 지나치는데 마치 자기들을 봐달라고 하듯이 반짝이는 각양각색의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비 인형 드레스, 슈퍼맨 어린이용 팬티, 나이키 로고가 붙어있는 성인 남성 티셔츠, 반짝이 샤넬 로고의 까만 여성용 셔츠...창문도 안보이는, 천막처럼 보이는 거무틱틱한 집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열매들! 

    그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빨래 사진은 사실 '못사는 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라는 것을...벨기에의 한 마을에서 본 빨래--침대 시트와 이불--에 나는 사진기를 들이대지 않았었다. 밋밋하니까...내가 좋아한 선명하고 아롱다롱한 빨래들은 주로 한국 시골, 멕시코, 이집트, 팔레스타인마을, 필리핀, 베트남 등 낙후된 지역 아니면, 빠리, 브러셀, 로마 등 '잘사는 도시'에서도 소위 '못사는 동네'에서 볼 수 있었다. 

    나는 바람에 팔랑이는 빨래들에서 숨쉬고 있는 한 가족의 모습을 사랑했다. 나름 순수했다. 그러나 나는 빨래를 건조기로 말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어쩌면 배부르고 등따뜻한 내가 빨래를 해서 너는 것조차 힘든 각박한 한 가정의 삶을 로맨틱하게 바라보면서 사진기를 들이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생긴 뒤에 나는 함부로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빨래줄에 걸려있는 한 가족의 빨래들은 나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다. 단조로운 일상의 아름다움을 부인할 수 없다. 라면 하나를 온전히 먹는 게 가장 큰 행복같이 생각되었던 어린 시절, 태능의 수돗가에서 빨래를 널면서 나는 행복했었으니까. 박봉에 세 아이를 키우면서 빚을 안 지고 살려고 갖은 고생을 하던, 얼굴에 기미가 서물서물 피어가던 엄마도 빨래를 하고, 걸고, 걷으면서 행복했으니까. 궁핍함이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지 않았으니까... 창문없는 어두침침한 텐트에 사는 내가 모르는 빨래의 주인들의 삶에 대해 어떤 억측도 할 필요는 없으리...

    하노이 여행 중에 호텔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광경을 즐거운 마음으로 찍다가 잠깐 머뭇했다. 빨래가 보여서였다. 그러나 여러 각도와 배경을 고려할 때 그게 가장 좋은 사진이었다. 이 정도의 먼 거리는 사진을 찍어도 괜찮지 않을까? 약간의 죄의식을 담아 사진을 찍었다. 빨래 주인들의 삶이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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