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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어는 호신술!
    스치는 생각 2019. 8. 13. 22:30

    허리가 부실한 나는 장거리 비행기를 타기 전에는 꼭 운동을 해야한다. 어젯밤 에릭과 저녁 먹고 산책하고 이야기 나누다가보니 운동할 시간을 놓쳤다. 그래도 건강한 여행을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한다 싶어서 기특하게도 밤 11 시 반에 gym 으로 내려갔다. 에릭이 폭신한 침대에서 시트에 돌돌 감긴채 안겨서 ‘안전할까?’ 하고 걱정하는 척한다. 엄지 척 올려주고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갔다. 내가 한밤에 운동하는 게 어제 오늘에 일인가...24 시간 열린 gym 이 안전하니까 운영되는 거지...
    그.러.나.
    Gym 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섬뜩했다. 일단 어두웠다. 좁은 공간에 아령들과 근육 기계들이 즐비했다. 달리기를 위한 Treadmill 이 안보였다. 큰 호텔의 gym 이 왜 이리 작지? 달리기는 어디서 하라고? 실망하여 찬찬히 둘러보니 내가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벽은 벽인데 양쪽으로 조그만 틈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 들어가면 또 조그만 공간이 나오고 거기에 treadmill 다섯 개와 자전거 두 대가 놓여 있었다. 
    즉...달리기 공간은 막힌 공간이었다. 어둡고 조용한 조그만 공간에서 평소에 폐소 공포증이 없는 나에게 갑자기 훅~ 두려움이 엄습했다. 왜 이런 기분이? 놀라서 잠깐 서서 생각해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의 두려움은 공간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가 여기 있다가 나쁜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지?’ 의 두려움이라는 것을.
    늦은 시간이니 아무도 안 올거야.      
    그러니까 문제지. 아무도 없을 때 나쁜 놈이 날 덥치면 더 위험하지.
    나쁜 놈이 이 시간에 운동하겠다고 체육관을 오겠냐.  
    나쁜 놈이니까 인적 없는 체육관을 찾아 올 수 있지.
    나쁜 놈이 언제 누군가 들어올지 모르는 호텔 체육관에서 사고를 저지르겠냐.
    언제 누군가 들어올 리 없는 시간이잖아!
    내 머리 속에서 이런 두 개의 모놀로그의 싸움이 진행되는 가운데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빨리 걸으면서도 내 머리카락은 쭈빗쭈빗 서있었고, 온 머리카락이 안테나라도 된 듯이 나는 미세한 움직임의 소리를 들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한 20 분 운동을 했나, 갑자기 ‘철거덩’ 문소리가 들렸다.
    올 게 왔다! 내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누굴까...? 이 시간에 왜? 왜 게으름 피우다가 자정에 운동을 하냐고!
    어서 그 누군가가 내 옆에서 달리기 운동을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에 누군가가 보여야 안심이 될텐데...그러나 소리의 주인공은 내 옆에 나타나지 않았다.
    근육 운동할 때 나는 소리 (아령을 들었다 놓았다, 기계를 잡아당겼다 놓았다 할 때 나는 소리) 가 아닌 정체불명의 소리가 좀 나더니만 잠시 후 또 철거덩! 문소리가 났다.  
    아니....이 사람, 나간 거야? 왜? 왜 나가? 왜 운동하지 않고 나가냐고! 한번 하겠다고 왔으면 해야지!
    (언제는 들어온다고 불평하더니만, 이젠 나갔다고 툴툴거리는 건 웬일?)잠시 후 다시 또 문소리가 철거덩!
    이 사람이 문 소리를 냈다고 밖에 나갔다는 보장은 없지? 문소리만 내가 벽 뒤에 서 있는지 누가 알아?
    발을 재빨리 움직이는 나는 이미 머리로 단편 호러물을 찍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 나를 뒤에서 공격하는 평이한 플롯의 1편은 가볍게 탈고하고, 더 무서운 속편—-‘도망가려는데 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그와 맞닥뜨리는 상황의 흥미진진한 전개—를 쓰고 있었다. 즉, 벽 너머로 존재하는 ‘그 누군가’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돌아서서 문으로 향하는 게 무서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겉잡을 수 없는 상상은 나의 일상, 한편으로 나는 ‘아무 일도 아닌데 내 상상력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 거야’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무서운 건 여전.
    갑자기 방언이 터졌다.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운동을 하던 갑자기 터진 나의 방언은 ‘한국어 수다’였다.
    “꼴레사~~ 엄마, 지금 운동 잘하고 있어. 거의 끝나간다. 응. 우리 내일 ‘일레븐 어클락’에 체크 아웃해. Papa said he might want to join me at the gym. (아빠가 자기도 운동하러 올지 모른다고 했어) yeah, yeah, it was a great stay. 넌 어때? 최근에 체육관 갔었어?...운동 하니까 살 것같다. 운동, 정말 좋지.
    마치 진짜로 누군가에게 전화로 이야기하듯이 줄줄줄줄 방언이...가끔 ‘하하하하!’ 웃기도. 
    내 계산은—괴한은 내가 누구랑 이야기하는 것은 알지만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모른다. 한국말을 하니까....설사 한국어를 알아 듣더라고 괴한은 모른다. 내가 이야기하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있는 친지일 수도 있고, 호텔에 함께 투숙한 가족일 수도 있다. 내 호텔 방이 체육관과 같은 층, 바로 옆 방일 수도 있고, 꼭대기 층일 수도 있다. 그의 계산으로 나를 건드린다면 그것은 전화를 하고 있는 나에 의해서 현장 중계가 될 것이고, 그럼 나의 지인이 뛰어올텐데 그게 바로 옆방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잠재적 괴한의 입장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저 통통한 동양 아줌마는 금목걸이를 훔치거나, 성적인 공격을 하기에는 아주 불편한 존재이다. 하하하하 웃음소리는 오히려 그에게는 불길한 BGM. 그의 불안을 극대화하는 것, 그게 내가 유창한 모국어로 방언을 한 목적이었다.
    한국어 방언은 하면서 나는 마음이 점점 편해졌다. 한국어는 나의 호신술 언어였다. 나는 보호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보니 한 20 분 정도 더 운동을 했더라. 벽 너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나지만 두렵지 않았다. 
    운동이 끝나갈 무렵, 땀이 나고 마음도 가벼웠다. 이제 그만하고 올라가봐야지. 남편이 걱정할텐데...
    도대체 문소리를 낸 사람은 누구이고, 어디에 있지? 조금 전까지 벽 너머에서 소리를 낸 사람은 누구? 궁금했다. 
    소지품을 챙겨 벽을 돌아 가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흠? 나 혼자 상상한 거? 
    그러나 체육관 문을 여는 순간 나는 한 중년 남성과 맞닥뜨렸다.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진 그는 거의 엉겁결이다시피 즉각적으로
    ”Bon soir!” 인사를 했다.
    아, 이 사람이 들낙날락한 거구나.  나도 ‘봉수아~’ 인사를 하면서 ‘잠재적 괴한’을 재빨리 훑었다. 그는 빗자루와 걸레 통을 들고 있었다. 
    그는 청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체모를 소리는 기구를 닦는 소리였다. 들낙날락한 것도 청소하느라..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의 쓰잘데 없이 풍성한 상상력으로 호러물을 쓰고 있었고..그는 깊은 밤, 혼자 자기는 못알아듣는 언어로 열혈 수다를 떨면서 달리기를 하는 동양 아줌마를 보면서 뭔가 섬뜩했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나는 마음이 완전히 놓였다.  에릭이 많이 걱정하겠다 싶었다. 어서 한국어를 호신술로 사용해서 내 마음이 편했다는 무용담을 이야기해줘야지...하고 방문을 열었다. 깜깜...
    그는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괴한이 나를 덥쳐도 나를 구해줄 수 없는, 완전 치즈 퐁뒤 처럼 침대에 포~옥 녹아들어서 주무시고 계시는 나의 남편님.
    근데 뭐 그리 섭섭하지 않더라.
     남편이  아니라도 나를 지켜줄 호신술이 있스~’ 
    *3주간의 휴식을 마치고 집에 갑니다. 호텔 첵아웃 전에 훗훗 ~ 유쾌한 기분으로 재빨리 쓰고 이제 짐쌉니다. 들고온 것도, 가져갈 것도 없는 간편한 짐. 엄마!!!!!!!!! 엄마 밥 먹고 싶어요~!!!! 좀 있다 뵈어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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