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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기장, 어떻게 할까나
    스치는 생각 2019. 7. 29. 23:15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짐정리를 하고 있다. 

    5 년 전에 이사온 뒤에 여러 일이 일어났고 열지 못하고 차고에 쌓아두었던 박스들을 하나씩 풀고 있는데...

    초중학교 때 쓴 일기장들이 나왔다. 

     

    좁은 집, 다섯 명의 가족.

    나만의 공간이 절실하던 때.

     

    이 일기장을 누군가가 볼 지 모른다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면서 일기를 썼던 때.

    ‘일기장을 보는 사람에게는 삼대에 걸쳐 재앙이 있으리라” 라는 저주로서 나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려고 했던 처절하고 무의미한 시도를 보면서 풋! 웃음이 나왔다.

     

    어떤 일기장은 한 권이 다 내가 개발한 암호 언어로 씌여 있었다.

     

    아...맞아....올리비어 허시 주연의 로미오와 쥴리엣을 본 뒤의 감동을 글로 쓰고 싶은데 누군가가 내 일기장을 볼까 두려워 반나절 걸려 나만의 알파벳을 만들어 연습을 했었지.

     

    암호 언어로 술술 글을 써내려가면서 ‘나의 비밀’이 보호되고 있다는 사실에 느꼈던 그 짜릿함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유학/독신 시절의 일기장도 있었다. 지하철, 기차역에서 쓴 글들이 어찌나 많은지...

     

    25 년 전, 에릭과 데이트를 하던 시절의 일기장도 있었다. 독신 시절의 글들이라 ‘누군가가 볼거라’라는 공포가 없이 자유스럽게 써내려간 글들이었다. 거기에 그림, 사진, 공연 티켓, 하다못해 식당 메뉴로 범벅된 일기장들. 연인과의 시간이 다 소중해서 모든 것을 다 기록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이 읽혀졌다. 

     

    ——-

     

    얼마 전,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온 꼴렛이 짐을 푸는데 일기장들이 몇 권 보였다.

    글을 꽤 열심히 쓰는 것같았다.

    참 잘하는 일! 

    꼴렛에게 계속 글을 쓰라고 격려해주려고 내 일기장 꾸러미를 보여줬다.

     

    “꼴렛아, 이것 봐라. 이게 엄마가 옛날에 쓴 쓴 일기장들이야. 한국어로 쓴 것도 있지만 영어로 쓴 것도 있어. 기록해두길 잘했어. 지금 보니까 너무 재밌다.”

     

    꼴렛은 마치 나의 30 년 저의 사진들을 볼 때처럼 신기해하면서 읽어봐도 되냐 물었다. 

     

    “물론이지...아무 거나 펴서 읽어봐줘. 엄마도 궁금하다.”

     

    딸이 무작위로 편 나의 일기장에는 젊은 날의 나의 어떤 경험과, 어떤 고뇌와, 어떤 사색이 담겨 있을까....

    그.런.데...

     

    푸하하하하하하!

    꼴렛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를 잡고 웃는다. 

     

    왜 웃지?

    내 일기장에 그렇게 웃긴 이야기가 써 있다고?

    설마. 유머집이 아닌데 저렇게 소리내어 웃지?

     

    ”엄마, 내가 읽어줄....하하하하하! 엄마, 정말 정직하게 썼...하하하하”

     

    궁금해지는 순간.

    도대체 20-30 년 전의 나의 무슨 이야기가 세월을 뛰어 넘어 스무살 딸아이를 웃음으로 고통받게 한단 말인가?

     

    꼴렛이 눈물을 훔치면서 정색을 하고 읽기 시작했다.

     

    ”오늘도 에릭과의 섹스는 아주 만족하고 행복한 경험이었다.

    그는 나의 몸을 안다. 우하하하!

    나는 그와의 섹스를 통해서 나를 점점 더 깊이 알아가고 있다. 프하하하!

    어쩌고 저쩌고...(자세한 묘사)”

     

    나는 너무 놀라서 잠시 굳어버렸다.

    지금 쟤가 뭘 읽고 있는 거라?

    나와 에릭의 성?

    설마! 내가 저렇게 상세하게 썼다고?!

     

    정신을 차린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꼴렛에게 달겨들었다.

    꼴렛은 자기도 더 읽기가 미안한지 나에게 뺏기는 척, 일기장을 양보했다.

     

    꼴렛이 계속 킬킬거리면서 나간 뒤에 내 일기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마치 남의 일기장을 몰래 읽기라도 하는 듯이 마음이 떨리는 건 왜?

    아...

    그 다음 페이지는 정말 가관이었다.

    거침없이 써내려간 내용...야함의 극치.

    꼴렛이 바로 그 전 페이지를 읽은 것이 다행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일기장들을 옷장 맨 구석에 숨겨 놓았다.

     

    일기장은 참 묘한 존재다.

    두 개의 두려움의 갈등이 공존하는 곳.

    소중한 일상의 경험과 감상이 잊혀질까 하는 두려움과

    나의 소중한 개인적 비밀이 남이 알까하는 두려움의 갈등.

     

    비밀을 나만 간직하려고 암호 언어를 만들었던 십대의 나,

    비밀을 나만 간직하려고 일기장을 옷장 깊숙이 숨기는 60 이 다된 나이의 나,

    기록의 의지와 프라이버시의 열망의 갈등은 여전하다.  

     

    앞으로 내 일기장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죽기 전에 다 정리하겠다고 캠프파이어에 태워버릴지도 모른다. 솔직히 모든 글들의 소각 후에 얻어질지도 모르는 자유로움이 어떨까 궁금하고 탐나기도 하고 그렇다. 

     

    그런데 그걸 못할지도 모른다. 기록의 보존 의지 때문일수도 있고,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과거의 나를 ‘타인’으로 받아들여서일 수도 있다. 당장 20 년 전의 일기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남의 프라이빗한 일상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이) 미안함과 (내가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난 듯한) 생소함, 아니면 (잘 아는 사람을 아주 오랫만에 만난 듯한) 반가움—-그것은 과거의 일기의 주인공이자 작자인 ‘나’라는 존재가 현재의 ‘나’와 더 이상 동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10 대의 일기만 봐도 그렇다.  내가 어떻게든 감추로 보호하려고 암호를 만들어가면서 썼던 10 대의 일기를 다시 읽을 수 있다면 (암호를 해독해야...ㅠ) 나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간에 분명 내 10 대의 나를 신기하게 바라볼 것이고, 분명히 그를 타자로서 받아들여주고 품어줄 것이다.  

    ‘귀여운 것...그랬구나. 너에겐 그게 그리도 부끄럽고, 그리도 소중했구나...’ 하면서.

     

    마찬가지로 세월이 지나면 나는 이미 알고 있으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모순적 진리—즉, 과거의 나는 ‘나’ 이지만 ‘나’가 아니기도 하다—를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여유있게 받아들일 것같다.

     

    80 이 넘어 몸이 불편한 늙은 팜펨이는 휠체어에 앉아 과거의 일기장들을 읽으면서 추억을 되새김할지 모른다.

    30 대에 쓴 애인/남편과의 성행위의 세세한 묘사가 부끄럽기는 커녕, 그 진지함과 솔직함이 소중하고, 신체적으로 왕성했던 젊은 날의 추억이 애틋할 것이다. 늙은 나는 분명 내가 지금 10 대 때의 일기를 보면서 느끼는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같다.

     

    아...다 모를 일이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아주 늙어서도 나는 여전히 혼자 구석에서 끄적일 것이다.

    손이 불편하면 발로 또각또각 타자를 쳐서라도.

     

    하루가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 노년의 일상에서 글쓰기는 나를 지켜주고

    매일매일 어제의 나를 뒤로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가능하다면 죽는 날까지 혼자 끄적일 것이다.

    그게 재밌고, 그게 살맛나게 해주고, 그게 사는 것을 의미있게 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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