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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의 노래
    부모님 이야기 2019. 5. 5. 05:04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3 시간 전에 마지막을 부른 노래의 이야기이다. 뇌출혈을 당한 뒤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부르신 노래가 찬송가였다면 닷새 후 돌아가시기 전에 부르신 노래는 동요였다.)

     

    --------------

     

    글을 못 읽으시는 아버지에게 음악은 새로운 세계였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아버지 방에서는 음악이 울려퍼졌다.  찬송가는 물론이고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트럼펫 연주에 교향곡, 관현악, 오페라, 성악 등 악기와 장르를 넘는 아름다운 소리들은 우리의 바쁜 삶의 배경 음악이었다.

     

    어느날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튜브의 옆의 창에 일본 노래 하나가 떴다.  갑자기 아버지가 외쳤다

     

    '어! 후루사토다, 후루사토다! 저거 후루사토야!!'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것을 보고 소리치듯이 흥분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바로 똑같은 목소리와 톤을 들은 적이 있었으나 90 세 할아버지의 '어린애같은' 목소리는 적응이 안되었다. 

     

    내가 아버지의 어린애같은 목소리를 들은 것은 1 년 전이었다. 사촌, 인철오빠가 한국에서 사진 한 장을 보내왔을 때였다.  '신주야, 이분이 우리 할아버지시니?' 라는 질문과 함께.

     

    성경을 들고 서 있는 또렷한 눈매의 어떤 남성의 색바랜 흑백 사진이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아버지가 외쳤다.

     

    "우/리/ 아버지다!

    아아아, 우/리/ 아버지다!

    우/리/ 아버지야!" 

     

    아버지의 힘찬 목소리도 목소리려니와 '우리 아버지'란 표현에 나는 적지 않이 놀랐다. 어린아이가 친구한테 자기 아버지 이야기하는 듯한 표현이 아닌가. 갑자기 어렸을 때 아버지 모습을 보고 반가우니 어린 아이로 돌아가는 것인가.... 손가락으로 아무 것도 잡을 수 없는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손으로 사진을 잡았고 손은 마구 떨렸다.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야, 우리 아버지야' 하면서 눈물 흘리셨다.

     

    그런데 유튜브의 일본 노래를 보며 아버지는 바로 '우리 아버지야' 할 때의 그 뜨거움으로 '후루사토다' 라고 외치신 것이다. 그리고는 따라 부르셨다. 음이 간단한 동요였다. 아버지는 구부러졌던 어깨를 펴고, 화면의 가사를 따라서 힘차게 노래했다. 나의 놀란 시선은 아랑곳없이.

     

    노래가 끝난 뒤 여쭸다.

     

    "아버지, 후루사토가 무슨 뜻이에요?"

    "고향이란 뜻이야. 어려서 많이 불렀던 노래야."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이 노래는 나에게 '나의 살던 고향'과 같은 노래였던 것이다. ( 그후에 나는 후루사토가 실제로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나의 살던 고향' 만큼이나 애창되는 노래임을 알게 되었다. 일본의 2011 년 지진과 쓰나미 후, 플라시도 도밍고가 일본 공연 중에 충격과 상심에 빠진 일본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불렀다.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마음의 노래' 이다)

     

    아버지가 어려서 이 노래를 왜 애창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버지는 9 세 때 평소에 아주 존경하고 사랑하던 어머니를 잃었다.  9 세는  엄마의 죽음을 '몸'으로 느끼지만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함부로 울면 안된다는 교육의 탓에 이불 속에서 혼자 숨죽여 울던 그 어린 소년 강대건이 잃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친구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였으리라. 80 년 전에 부르던 그 노래가 불쑥 티비 창에 떠오르니 아버지가 '후루사토다!' 라고 놀라 외칠만 했다.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후루사토를 들려달라고 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엄마는 아버지의 기운을 북돋아드리려고 같이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가 노래를 하면 멕시코 간병인들이 신기해했다.

     

    "저게 일본어에요?" "아버지가 일본어도 하세요?"

     

    그들고 마찬가지로 나도 아버지의 역사와 언어의 세계가 가끔 경이롭게 느껴졌다. 딸과 부인과는 한국어로, 의사, 물리치료사, 손주, 사위, 멕시코 도우미들과는 영어로 소통하는 아버지. 엄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어로 노래를 하고 평생 공부하고 애송해온 영시, 한시, 일본시를 애송하는 아버지의 두뇌가 도대체 어떠 식으로 작동되고 있는지 지도를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버지 앞에서는 평생 철없는 내가 기껏 한 소리는, "아버지, 돌아가실 때 나한테 아버지 두뇌를 주고가면 안되요?" 였다.

     

    동시에 나는 후루사토라는 노래가 아버지에게 열심히 부르시는 게 이해가 안되었다. 아버지는 일본에 대해 자존심을 지키고, 일본어가 한국어만큼 편했지만 일본어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일본어,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있다. 30 년 전, 부모님과 일본을 갔을 때였다. 입국 수속을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저 멀리 앞쪽에서 나이가 지긋한 출입국사무소 직원의 불손한 태도가 눈에 띄었다. 그 시간에는 한국에서 온 비행기 승객들이 입국 절차를 받는 거라 대부분이 한국인들이었다. 여권검사를 하고, 쳐다보고, 도장을 찍고 여권을 던져주는 그 간단한 절차에 그의 교만함이 드러났다. 딱 뭐라 항의할 수 없게끔 기분 나쁘게 행동하는 그 치사한 무례함을 하나 둘 겪고 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그가 아버지의 여권을 휘리릭 훑더니 맨 처음 페이지에 아버지 이름을  가르키며 뭐라 뭐라 했다. 그 순간 아버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당신이 한자를 모르는 거요!

    그건 호랑이 '호' 자가 아니라 경건할 '건' 자요!

    글자를 몰라도 좋소.

    그러나 모르면 공손하게 물으시오!"

     

    작은 공항이라 아버지 목소리가 온 공항에 찌렁찌렁 울리는 것같았다. 사람들의 눈길은 다 아버지와 그 직원을 향했다.  나도 아버지가 격노한 모습에 놀라 눈이 동그래져 아버지와 그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만큼이나 아버지의 표정이 단호했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직원은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아무 소리 없이 도장을 찍어주었다.

     

    나도 그 직원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기에 아버지가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서 속이 시원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분노는 내가 느끼는 '불친절에 대한 기분 나쁨'과는 격이 다른,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이라는 게 분명했다. 빼앗긴 나라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차별을 당하고 살았던 아버지는 스치고 지나가는 차별도 옛 기억을 후벼파는 것임이 분명했고, 그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인가 싶었다. 나는 대강 짐작하고 분노 비슷한 감정을 느낄지는 몰라도 나라를 빼앗긴 자의 설움과 분노를 온전히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상상을 못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없는 설움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것, 게다가 어떻게 '나라를 빼앗긴다'는 끔찍한 경험을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옛 세대의 역사의식

     

    '후루사토'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야기가 많이 옆으로 가는 것같은데 그래도 나는 '후루사토'를 부르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이야기인 것같아 좀 적어보겠다.

     

    아버지의 역사적 경험과 의식을 그러다가 2007 년, 아버지가 쓰신 수상록 편집을 하던 중, 나는 차별, 억압, 탄압이 현실이자 생활이었던 일제 강점기를 살아낸 아버지에게는 나와 다른 역사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아주 간단한 사실에서 발견했다. 아버지는 개인의 역사를 한국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함께 생각했다. 예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결혼은 '1919 년, 3.1 운동이 일어난 해' 라고, 또한  '1919 년은 민족적으로 다사다난한 해였던만큼, 강씨 집안에게도 다사다난한 해였다' 로 묘사되어 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의 묘사도 민족의 치욕적 사건과 연관짓고 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해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 돌아가신 날은 8 28, 그러니까 우리나라 국권이 상실된 국치일을 하루 앞둔 이었다. 어머니의 생년이 1900 이니, 그야말로 한창 나이에 세상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연도ㅡ 1937 년을 중일전쟁이 일어난 해와 같이 묶어 생각하는 것은 차지하고 , 흥미로운 것은 할머니의 사망일, 8 월 28 일의 묘사이다--- '우리나라 국권이 상실된 국치일을 하루 앞둔 날.'  여기서 '국치일'이라 1910년 8 월 29일, 경술국치일을 의미한다. 조선은 이날 한일병합조약이라는 부당하고 굴욕적인 조약으로 500 년 역사의 조선이 일제로 넘어가 이후 35 년간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경술국치일 이후 27 년이 지난 1937 년이고, 날짜도 8 월 28 일로 경술국치일인 8월 29 일 이 아니다.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버지는 경술국치일에서 17 년 뒤에 태어났으며, 수상록을 쓰던 싯점 (2007)은 국치일에서 90 년이 지났고 할머니의 죽음에서 70 년이 지난 싯점이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치욕의 역사는 뒤로하고 일본과 경제, 문화적으로 일본과 당당히 맞서고 세계적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경술국치일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건은 자신에게 가장 아픈 기억인 어머니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었다.

    나라를 빼앗기는 설움이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만큼이나 가슴에 피가 흐르게 만드는 고통임을 경험해서가?. 그래서 아버지의 의식 속에 8월 29 일이란 숫자는 '국치일'로서 또렷이 기억되고 있는 것인가?  

     

     

    고향---'후루사토'--상실, 그리움, 희망

     

    아버지처럼 첨예한 역사 의식을 가진 사람이 일본 노래에 정서를 담아 노래를 하는 게 아이러니컬하다 싶었고, 처음에는 우리집에 매일 일본 노래가 흐른다는 사실이 적응이 안되었다. 그러나 후루사토의 가사를 여러번 일으면서 나는 '일본'이란 형용구를 초월한 인간의 원초적 정서를 담은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 단순한 가사가 불러일으키는 복합적인 감상을 나 스스로 음미하게 되곤 했다.

     

     

    1 절:

    토끼 쫓던 저 산 

    붕어 낚던 저 강

    지금도 꿈에 그리는

    잊지못할 고향

     

    2 절:

    어떻게 지내시나요 아버님 어머님 

    친구들은 여전한가요 

    비바람 불어도 

    생각나는  고향

     

    3 절:

    뜻을 이루고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산 푸른 고향

    물 맑은 고향

     

    아주 간단한 언어로 후루사토는 상실, 그리움, 동경, 희망의 주제를 담고 있다. 색깔 몇 개 안 쓰고 덧칠을 하지 않는 수묵화처럼 말끔하나 깊이가 있는 가사이다. 굴곡진 삶을 통해 죽음, 사별, 상실이 무엇인가를 너무도 잘 아는 구순의 아버지에게 단순한 선율에 담긴 그리움의 가사는 어려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평생은 상실, 동경, 희망의 주제로 살아낸 삶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일제 강점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낸 나의 부모님 세대의 어르신들의 집단적인 경험이고 주제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2007 년에 수상록을 쓰셨다. 아버지는 가족사와 더불어 2 차대전, 한국 전쟁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가 살아낸 한국 역사를 아주 자세히 기록했다. 나는 아버지의 책을 통해서 이전까지 몰랐던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개인의 삶이 마치 가늘고 연약한 덩쿨처럼 타고 올라갔던 든든한 나무인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뛰어난 기억력과 관찰력으로 자신이 만났던 한국의 역사를 움직인 인걸들의 이야기---침례교 선교사 말콤 펜윅, 공산주의자 , 창덕궁에 있던 '민주위원'이란 기관에서 만난 이승만, 김규식, 김구를 위시한 28 명의 최고 정무 위원,  이용문, 송요찬, 백선엽, 김일환, 정일권 등의 장군들---를 개인적인 관점에서 기록했다.)

     

    1960 년 대 초의 시기의 기록으로 마무리지어진 아버지의 수상록의 주제는 '실제적 상실과 그 상실의 아픈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9 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할아버지는 1950 년 10 월 공산당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19 세에 월남한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고, 북의 가족들도 잃었다. 후루사토에 '비바람이 불어도 생각나는 고향'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수줍던 문학 청년이었던 아버지가 던져진 한국 역사의 장은 '비바람'이 아닌, 폭풍우와 해일과 지진의 장이었다. 특히 한국 전쟁은 그가 소중히 간직하는 모든 것들을 다 파괴했고, 그에게 소중했던 '미' '진리' 등의 가치는 쓰레기만도 못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고군분투해야했다.

     

    아버지는 한국전에서 우리 민족이 '자의든 타의든' 두 편으로 나눠지었고, 적이 되어 증오와 적대감정에 휩싸여 폭행과 학살을 자행했다고 기록한다. 전쟁 직후 서울에 남아 있던 아버지에게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민청에 가입하라'고 권유한 옛 지인이 자신이 열성분자임을 입증하기 위헤 남한 군 포로를 각목으로 후려쳐서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그 포로의 고통으로 비명지르는 것을 들은 것-- 그것이 끔찍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도망 다닐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을 믿을 수 없고, 친구로 어울리면서도 그 본심을 알 수 없어서 몸을 사려야했던 아버지는 '누가 우리편이고 누가 적인지'를 알 수 없던 상황은 6.25를 '비극 중의 비극'으로 만들었다'라고 적고 있다.

     

    아버지의 글 중에서 내가 지금까지도 항상 새롭게 읽게 되는 부분은 아마도 의용군 심사 현장이다. 자의던, 타의던, 의용군이 되겠다고 심사현장으로 향하던 젊은이들의 광기어린, 연출된 열정, 거기에 합류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행진했던 22 세의 아버지. 나는 그 부분을 읽을 때는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신분이 발각날까봐 조마조마해하듯이, 자기가 원치 않는 상황에 속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공포를 숨기고 행동했을 아버지를 상상하며 애가 타곤 한다. 그것도 20 세 초반의 어린 나이에...나의 아들과 같은 나이에 의용군 심사를 받으신 거라니...

     

    "나는  허름한 , 머리띠, 검은 고무신 차림을 하고 공장 노동자, 농민, 점원  각종 직업과 계층 출신의 의용군 지원자들과 4   조로 어깨를 끌어 안고 발을 맞추며 비겁한 자여, 갈려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킨다 라는 적기가와 함성을 고래고래 지르며 마포 일대를 돌다가 마지막으로 종로로 행진해서 수송국민학교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운동장 여러 곳에 의용군 심사의원 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붉은 글씨로 살벌한 구호가 적혀 있는 깃발들이 무수한 의용군 지원자들의 인파와 함께 물결치고 있었다. 도도히 흐르는 전승의 물결을 타고 자원이건, 강제 동원이건 의용군 지원자가 양산되어 이제는 심사에 합격한 자들만이 의용군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운좋게 의용군 심사에서 불합격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오히려 민청 회원들에게 반동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 있어서 내내 도망다녀야했다.

     

    서울 수복 후 아버지는 국군에 입대했다. 아버지는 군대에서 만난 인걸들의 기억을 적고 있는데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은 한국 역사를 움직인 장군들이 아니라, 한 미국 장교이다. 그는 아버지가 전방의 36 연대 본부에서 근무할 때 같은 장교 천막을썼던 사람이다. 

     

    "어느  밤에 있었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삭풍이 윙윙거리며 천막을 치고 천막의 사방 날개가 마구 펄럭이는 몹시 춥고 을씨년스러운 겨울 밤이었다. 음산한 전등 밑에서 별로  일도 없어 일찍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으나 손가락과 발가락이 시려서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장교가 천막에 들어와 잠시 앉아 있다가 갑자기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자고 있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나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은  같았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섞여서 들리는  오열은 전쟁의 광란상과  비극을 상징하는  같아 나에게는  없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장교는 미국에서 곧장  나이 어린 장교였다. 부모의 따뜻한 보호 속에 있다가 이렇게 살벌하고 위험한 전쟁터로 내던져진 스무 살을  넘은 청년, 대학을  졸업하고 임관한 R. O. T. C.  출신 장교이었다.  그의 흐느낌은 바람 소리가 커질 때에는 더욱 커져서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그리워진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비통한 오열 속에서 전쟁의 비정함과 수많은 젊은이와 그들을 사랑하는 부모들의 오열을 들을  있었다."

     

    미군 장교의 '비통한 오열' 을 들으면서 전쟁의 비정함과 수많은 젊은이와 그들을 사랑하는 부모들의 오열을 들을 수 있었다' 고 꽤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생각을 토로한 아버지 자신은? 전쟁에 났을 때 아버지는 스무살 초반의 대학생이었고, 전방 36 연대에 근무한 시기는 52 년 이므로 아버지가 24-25 세였을 것이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임관한 R O T C 장교'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생각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 땅의 한 막사, 늦은 밤 오열하던 그 무명의 미국 장교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자기와 한 천막에서 잠자는 척하면서 자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안스러워하고 있다는 한국군 장교는 

    전쟁이 끝나도 돌아갈 고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 한국군 장교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였고,

    아버지가 공산군에 의해서 잔인하게 처형되었고 

    사랑하는 누이들은 북한에 남겨졌고

    형 한 분을 제외하고는 남한에 내려온 남동생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그 한국군 장교는 사랑하는 자식을 전장에 보낸 뒤 오열하는 부모가 없고

    그는 아무 것도 없이, 아무도 없이, 그저 혼자 살아내야함을 알고 있어서

    부모가 그립다고, 고향이 그립다고 남처럼 맘대로 오열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그에게는 삶 자체가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전쟁후 아버지는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했고, 결혼을 했으며,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여대, 서울대, 한림대에서 가르쳤다.

    돌아갈 고향은 없어졌지만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한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죽음으로 만나는 고향

     

     

    유튜부에서 후루사토를 만난 뒤 아버지는 거의 매일 후루사토를 불렀다.  기력이 딸리는 아버지가 갸냘픈 목소리로 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그렇게 뭔가 마음을 담아 노래할 수 있는 게 다행이라 싶었다. 또한 전쟁으로 형님 한 분을 제외한 온 가족을 잃은 아버지께 '고향'은 얼마나 그리운 것일까, 그리고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괴로운 경험일까가 헤아려져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가 후루사토 노래를 마지막으로 부른 것은 돌아가시기 13 시간 전이었다.

    (나의 전화기에는 아버지가 이 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모습의 영상이 있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퇴원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날, 여늬때와 다름없이 병원에서도 아버지께 '후루사토'를 들려드리기 위해 유튜브로 찾으면서 내 마음은 착잡했다.  음식을 못 삼키시므로 얼마 안되어 돌아가실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 상태에서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가기로 했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유튜브로 후루사토 노래가 울리자마자 아버지는 천장을 보면서 열심히, 착한 어린이가 선생님 말을 듣고 열심히 노래 부르듯이, 노래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사랑스러워서 미소를 띤 채 동영상을 찍었다. 얼굴이 마비가 되어 발음이 정확치 않고, 나흘 동안 드신 게 죽 반 그릇도 안되었으니 기력이 딸려 소리를 내는 게 힘드실텐데도 온 기운을 다 모아서 열심히 부르셨다.

     

    바로 그 때 에밀과 꼴렛이 병실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들어온 것을 보았지만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다정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는 아이들 눈에는 할아버지가 자기들은 뜻을 모르는 일본 노래를, 더군다나 무슨 중요한 노래 자랑도 아닌데,  얼굴은 마비가 되신 상태에서 왜 멈추지 않고 부르실까 의아한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손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노래를 그리도 열심히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 나는 지금 아버지에게 후루사토라는 노래의 의미가 무얼까? 나도 의아했다. 동시에---이게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까지도 내가 눈물 터뜨리게 만드는 사실인데---온 몸에 케이블이 연결된 채 담요로 덮인 아버지를 내려다보면서  아버지의 몸이 우리나라같다는 생각이 휙 들었다. 왜 그럴까?. 삼년간 내가 매일 만져온 나의 아버지의 몸이 내가 언제든 손으로 샤악~~그릴 수 있는 그런 토끼모양의 한반도 지도만큼 정겨워서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부르는 일본어 노래가 한국 역사의 한 산물이라서?   아버지의 인생이 나에게 한국 역사책이었기때문에? 얼굴이 마비가 두동강이 난 우리 나라를 연상시켜서? 

     

    그런데 아버지의 몸이 그 지경이고, 닷새의 짧은 기간 동안 응급실, 중환자실, 일반 병실로 거쳐왔고, 죽음의 기운은 병실에 꽉 차 있건만 아버지의 표정은 편안했고, 눈빛은 밝았다.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누군가가 자기를 내려다보는데 노래를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 순수함, 의연함이 압도적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버지가 부르는 후루사토는 더 이상 나라와 모국어를 잃어버린  9살배기 소년이 감정을 담을 수 있었던  원초적 동심의 노래만도 아니었다. 두고온 고향을 그리는 노래만도 아니었다.  '뜻을 이루고'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꿈꾸던 이가 그 '언젠가'가 다가왔음을 감지하고 부르는 노래였다.

     

    어쩌면 그 '고향'은 죽어야마나 갈 수 있는 곳, 죽어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랑하는 존재들이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게 원산의 명사십리이든, 안양의 관악산이든, 천국이든---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친구, 그리고 앞서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아들까지, 아버지는 이제 비바람이 부는 세상을 뒤로하고 돌아갈 수 있게 된 그곳을 그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너무 슬펐다. 아버지가 마치 미리 장송곡을 미리 불러주는 것같았다. 눈물이 터지려해서 당황스러웠다. 아버지에게든,  아이들에게든 슬픈 기색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슬픔이 내 마음의 전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고향에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음에 안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노래가 끝난 뒤 에밀이가 말했다.

     

    "할아버지, 오늘 집에 돌아가실 거에요."

     

    아버지는 "I'm so happy" 라 했다. 내가 '아버지 왜 기쁘세요?' 라고 물으니 "Because you guys all came" 이라 했다.

     

    첫째 딸과 손주들이 와서 행복함을 느꼈고 그것을 표현했던 아버지는 13 시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몸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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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구의 모래톱을 지나며 

     

     

    ---알프레드 테니슨 (강대건 역)

     

    해 지고 저녁별

    그리고 나 부르는 하나의 분명한 음성!

    내가 바다로 떠날 땐

    포구의 모래톱이 통곡 소리 내지 않기를.

     

    오직 밀물 가득하여, 파도 소리, 물보라 없고

    자는 듯 넘실대는 조수만이 있기를,

    가없는 바다의 깊은 심원에서 끌리어 나온 자가

    또 다시 본향 찾아 돌아갈 때에는.

     

    황혼 깃들고 저녁 종 소리,

    그 다음에 찾아 오는 어둠이여!

    내 바닷길 떠날 때에도

    이별의 슬픔 아주 없기를.

     

    시간과 공간의 경계에서 멀리

    내가 조수에 실려 갈지라도

    바라노라, 포구의 모래톱을 지났을 때

    '인도자'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게 되기를.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노래하는 동영상을 나는 엄마께도 보여드리지 못했었다가 그저께 처음으로 보여드렸다.  지난 며칠간, 아버지가 후루사토를 부르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많이 울었다. 어제 저녁에 에릭과 컨서트에 갔는데 암으로 투병하던, 우리가 무척 존경하고 응원하던, 첼리스트가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또 울었다.

     

    콘서트 동안 고개 푹 숙이고 아이패드에 (다음의) 그림 그렸다. 

    테니슨의 시와 '인도자'의 얼굴을 직접 마주했을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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