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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와 천국
    부모님 이야기 2019. 5. 23. 05:44

    아버지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을 나갔다. 날이 흐려도, 추워도, 심지어 비오는 날조차도 산책을 나갔다. 침대에 종일 누워계시는 아버지에게 바깥 바람을 쐬는 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었다.

     

    아무리 호수가 좋다고 하지만 흙길이 아니고 나무들도 많지 않으며 약간 훵~ 하고 트인 심심한 곳이라 일년 내내, 매일 가면 좀 싫증날 수 있지만, 아버지께는 아니었다. 산책에서 나갈 때도, 돌아올 때도  아버지의 얼굴은 화색이 돌고, 눈이 빛났다.

     

    "아버지 오늘 산책 어떠셨어요?"

     

    라고 물으면 도대체 감당이 안되게 감격스럽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저어가면서

     

    "아....! 너어--무 좋았어."

     

    하시고는 당신이 본 것을 이야기해주셨다. 오늘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날씨가 너무도 좋았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서 쾌적했다. 호수 건너편에 heron 새 한 마리가 혼자 있었다. 거북이 여러마리가 대화를 하는 듯했다. 오리새끼들이 자그마치 8 마리가 되더라. 부모 오리가 두리번거리면서 아기 오리들을 지키더라. 분홍 부츠를 신은 듯, 발이 분홍색인 오리를 처음 보았다....아버지의 눈은 작은 생물의 움직임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게 경이로운 것이었다.  아버지는 단조로운 산책로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곳곳이 보물이 숨어있었고, 산책은 일종의 보물찾기였다. 

     

    나는 아버지가 흥분해서 본인이 본 것을 나눌 때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가 떠올랐다. 밖에서 놀던 아이들은 흥분해서 '엄마! 엄마!' 나를 부르며뛰어들어와 자기들의 발견을 같이 나눴다. 개미가 빵가루를 옮기고 있다고, 아가 토끼가 뛰어가는 걸 봤다고, 천천히 움직이는 달팽이를 지켜줬다고 옆집 개를 쓰다듬어 줬다고. 도마뱀이 빨리 도망가더라고...아이들은 바쁜 현실에 찌들어있는 이 엄마가 지나치는 자연의 세세한 여러 모습을 놓지지 않았다.

     

    자연은 항상 새로운 놀잇거리가 기다리고 있는 놀이터였다. 자연을 대상화하고 사진을 찍어대고 감탄하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놀 수 있는, 거의 본능적인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즐겁게 함께 놀 수 없는 대자연/멋진 경치/ 유명한 관광지는 큰 의미가 없는 듯했다. 나는 그것을 그랜드 캐년에 데리고 갔을 때 알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멋진 장관을 보여주려고 돈들여, 시간들여 계획해 데려갔건만 아이들은 거대한 병풍같은 그랜드 캐년의 파노라마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

    그러나 아이들이 반짝 신났던 순간이 있다. 그랜드캐년의 휴게소 뒤의 풀숲에서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던 다람쥐와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내가 다다가니까 아이들은 마치 내가 다람쥐를 잡아먹으려는 짐승이라도 되는듯 긴장해 "엄마, 얘가 우리랑 이야기 나누는 중이니까 방해하지 마!"  라고 했다. 나는 오랜 시간 운전해서, 비싼 돈 들여서 온 여행의 결과물이 다람쥐랑의 대화라는 사실이 허탈하기도 했고, 다람쥐와친구를 맺고 좋아하는 아이들이 신기해보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연의 작은 생명체와 현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신나서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엄마의 마음으로 들어드리곤 했다. 아버지는 참 어린이같았다. 언젠가 사막 여행 중, 아버지가 선인장 가시에 찔리는 일도 생겼을 때였다. (사진을 찍던 나는 설마 아버지가 선인장 가시를 만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셔터를 눌러 그 순간을 잡았다..)

     

     

    온 가족이 다 멈춰서서 아버지 손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실같이 얇은 선인장 가시를 뽑아야던 중, 엄마가 아버지를 책망했다.

     

    "아니, 왜 선인장 가시를 만지세요?"

     

    아버지는 "너무 예뻐서 만져보고 싶었어" 라고 대답했다. 

     

    "아유...어린애처럼, 그걸 꼭 만져봐야해요?"

     

    그게 아버지였다. 어린애와 같은 호기심으로  자연을 만나던 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그와 사물을 새롭게 발견하게 됨은 물론, 동시에 아버지가 뭐든 경탄하고 신기해하고 감사해하는 모습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니, 일거양득이었다. 

    침대 신세를 진 3 년간도 아버지는 항상 새롭게 뭔가를 발견하고 경이로워했다. 나는 아버지 덕에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였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유년기, 자연, 워즈워스

     

    아버지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을 즐기는 아이들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분명한 차이점은 있다. 무아지경으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 노는 어린이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그 무아지경을  철학적으로 고찰하고 그렇게 무아지경이 될 수 있는 어린이들의 능력의 아름다음과 덧없음을 깊이 느끼는 노인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그러한 유년과 자연에 대한 사고는 아버지가 특히 사랑했던 영국 낭만주의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워즈워스의 시를 사랑하여 여러 시를 줄줄 외웠다. 워즈워스처럼 아버지에게도 평생 가장 중요한 일상은 '걷기'였다.  워즈워스가 영국의 호수 지방 (Lake District)의 들과 산을 걸으면서 시적 영감을 추구했다면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관악산을 타면서 명상하고 사색했다.  인간 관계의 복잡함에 마음이 어두워지면 아버지는 하루 종일 산을 탔고, 어떨 때는 밤 늦게까지 혼자 산에서 머물면서 마음을 다스리고는 맑고 행복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나는 이전에는 워즈워스의 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나와 아버지의 워즈워스에 대한 대화의 시작은 30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1 년, 빠리에서 공부할 때,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했는데, 아버지를 위해서 워즈워스가 살면서 주옥같은 시를 썼던 호수지방에 모시고 갔다.  이른 아침 아버지와 산책을 하는데 호수에서 올라오는 물안개 속으로 보이는 산과 구릉과 하늘의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왔다. 당시 빠리에서---이 글에서 굳이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싶지 않은-- 탁한 도시의 삶을 추구하던 나는 갑자기 신비한 경치 속에 아버지와 함께 하는 순간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버지, 너무 아름답네요. 나, 이 경치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나중에 너무도 그리워할 것같아요.

    '나중에 그리워할 것같다' 라고 아쉬워하면서 경치를 바라보는 게 처음이에요."

     

    아버지는, "그래, 너도 어른이 되어가는 거구나. 워즈워스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송가'에서 했었지." 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언급한 '송가'는 워즈워스의  "불멸의 송가: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를 말한다.  워즈워스의 자연과 유년기에 대한 철학이 아주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송가의 일부는 영화 '초원의 빛'에서 나탈리우드가 낭송해서 유명하며, 우리에게 친숙한 구절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는 이 시의 첫 구절이기도 하다.

     

    워즈워스의 '자연'과 '어린이'의 개념은 단순하나 심오하다.  그는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찬란한 이상적인 세계에 살고 있었으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서서히 어두움으로 빠져들어가 옛 세계를 잊게 된다고 보았다. 출생은 곧 '잠'이고 '망각'이다. 그런데 어린이는 태어나면서 '우리의 고향인 신' 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영광을 이끌고 오고, 본능적으로 옛 세계에 가까이 있기에 '영원한 신비'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어린이는 자연과 동화될 수 있는 능력을 아직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는 차차 어른이 되어가면서 어른들은 이전의 '빛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감옥의 그늘'에 뒤덮인 채 살게 된다. 그러나 워즈워스는 옛 광채와 영광이 사라진다해도 어른들도 절망할 필요가 없는데 그것은 그들이 '온 삶의 빛의 원천'이 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은, 원초적 공감, 위로의 생각, 신앙, 철학적 의식에서 힘을 얻어 어린 시절의 빛을 떠올리고 위대한 불멸성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초적 공감, 사색, 신앙, 세월은 어린 시절의 빛을 떠올리고, 위대한 불멸성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게끔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어렴풋한 회상은 온 생애의 빛의 원천이 되어 한번 깨어나면 사멸하지 않는 불멸의 바다로 시인을 인도한다. 이제 광채, 영광의 시간이 사라지고 되찾을 길 없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30 년 전에 아버지가 나에게 '너도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라고 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그 의미를 이해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분명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대학원 때 워즈워스의 '불멸의 송가'를 읽어던 나는유년과 자연에 대한 워즈워스의 사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로. 만. 

     

    세월이 지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워가면서 나는 나와는 분명히 다른 감성을 갖고 있는 동심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자연과 일체가 되어 뛰노는 아이들의 무아지경을 경이로움으로 바라보면서 비로서 나는 워즈워스가 '불멸의 송가'에서 한 이야기가 이런 것이었구나...혼자 되새김했다. 시가 심장으로 공감되었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버지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서서히 알아가게 된 것이리라.

     

     

    불멸의 송가와 바다

     

    내 컴퓨터에는 '불멸의 송가' 라는 사진 앨범이 있다.  2008 년, 부모님을 모시고 해변에 갔을 때 찍은 사진들의 앨범인데 나는 그 사진들을 볼 때마다 부모님과 아이들과 함께 했던 짧은 오후 시간의 기억이 다시 떠오름은 물론이고, 당시 내가 느꼈던 감상을 그대로 다시 생생히 느끼곤 한다.

     

    2008 년 10월, 부모님이 방문했을 당시, 아버지 건강이 무척 나빴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에 부모님도 나도 마음이 좀 무거웠던 때였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오후에 해변에 갔다. 내리막길을 천천히 걸어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에밀은 서둘러 물에 뛰어들었고, 꼴렛도 부모님과 잠시 조개를 줍는 듯하다가 어느 새인가 물에 들어가 있었다. 아이들은 첨벙거리면서 파도와 장난으로 싸우기도 하고, 둘이 어울려 물장난치고 모래 싸움을 했다. 그렇게 둘이 놀다가도 갑자기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아니면 모래를 파면서 혼자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부모와 조부모의 존재는 잊어버린 채 자연의 품에 안겨 노는 아이들은 '황홀경'이란 것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느껴지고 경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린 시절 천국은 우리 주변에 있다!                                          

    감옥의 그늘이 자라나는 소년에게 뒤덮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그는 빛을,. 

    그리고 그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기쁨으로 바라본다.

    그 젊은이는 날마다 동쪽에서부터 멀리 멀리 

    여행해야하고, 여전히 자연의 사제로서

    찬란한 환상이 그의 여정과 함께한다.

    마침내 어른은 깨닫게 된다

    그 환상이 사라지는 것을.

    일상의 빛으로 희미해져버리게 되는 것을.' 

     

    행복하게 뛰노는 아이들을 배경으로 아버지가 지나갔다.  나는 천진난만한, 활기찬 아이들의 모습과 지팡이를 잡고 걷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의 대조에 멈칫했다. 

     

    아버지는 천천히, 그러나 어떤 목적이라도 있는 듯이 걸으시더니만 밀물이 지나간 뒤에 온 몸을 드러낸 바위군으로 다가갔다. 

     

    지팡이를 잡은 채 서서  바위의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홍합을, 모래에서 꿈틀거리는 게들을 보신 것인가? 반들반들한 돌을 찾으시는 건가?

    아버지는 찬찬히 바라보시더니 쭈그리고 앉아 손으로 모래를 파면서 놀기 시작했다.  그무렵, 아이들도 파도와의 싸움을 멈추고 나와 모래 속에서 숨쉬는 생명체들을 구경하였다.

     

    옆에서 노는 손자들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어 놀고 있던 아버지..아마도 그는 70 년 전, 열살배기 소년 시절, 원산 명사십리에서 저렇게 하염없이 모래, 바닷물, 돌과 놀았겠지....옆에서 쭈그리고 놀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들만의 탐구에 빠져있는 아이들...아무런 걱정, 한숨, 슬픔도 없이 그저 온전히 온 몸으로 자연에서 뛰어노는, 지복의 상태의 아이들이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바닷물에 손을 담구고 돌을 찾는 아버지나....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리니...

     

     

     

    30 여분 혼자 놀던 아버지는 바위에 앉아 있던 엄마께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아이들이 노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삶에 대한 일말의 걱정, 우울함, 어두움 없이 현재를 기쁨으로 온전히 만끽하고 있는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보면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워즈워스 시의 이런 구절을 떠올리지 않으셨을까? 

     

     

    '새로운 행복에 빠져있는 아이를 보라.

    피그미족 마냥 작고 귀여운 여섯살배기!

    .....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꼬마 배우는 새로운 기쁨과 긍지를 갖고

    삶의 다른 역할을 배울 것이다.

    가끔은 자기의 '변덕스러운 무대'를 

    온갖 인물로--인생이 그녀의 마차에 싣고 오는 중풍에 걸린 노인의 역할까지 이르는--

    채울 것이다.

    마치 자신의 천직이 끊임없는 모방이기라도 한 듯.'

     

    아니면,  당장은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유의 힘으로 영광스러운 존재'인 아이들이 자라가면서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되고, '관습'에 의해 무겁게 짓눌릴 것이라는 사실에 슬퍼하지는 않으셨을까?

     

    '머지않아 네 영혼은 세상의 짐을 질 것이고

    관습이 너를 무겁게 누르리라.

    서리처럼 무겁게, 거의 인생만큼이나 깊이.'

     

     

     

    혹은 자연의 평범한 광경이 마치 '천상의 밎'츨 두른 듯이 환희하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아이들과는 달리,  죽음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우려로 마음이 무거운 자신이 더 이상 대자연을 온전히 즐기고 찬양할 수 없음을 탄식하셨을까? 

     

    '그 환상의 빛은 어디로 날아갔는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영광과 꿈은?'

     

    할머니, 할아버지, 에밀, 꼴렛, 나는 서로 다른 차원에서 자기만의 사고와 감상에 빠져 있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과 불확실한 미래로 숙연한 우울함에 빠져 있던 늙은 부부, 조부모의 그런 멜랑꼴리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무심함, 자유, 환희,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경외심에 가까운 놀라움으로 바라보는 조부모. 사진기를 들고 조부모와 손주들이 속한 판이한 의식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나. 

     

    매 초마다 수평선을 향해 뚝뚝 떨어지는 해는 빠른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아름다운 시간이 내 눈앞에서 스러져갔다

     

      .

    나는 워즈워스가 말한 '슬픈 생각' (a thought of grief)  가 무엇인지 알 것같았다.

     

    '지금, 새들이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어린 양들이 뛰놀고 있건만,

    오직 나에게만 슬픈 생각이

    북소리에 박자를 맞추기라도 한 듯 들려왔다.'

     

    '슬픈 생각'은 내가 그날 해변에서 부모님과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사고를 정의하는 구절이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자연 내에 함께 존재해서 행복했지만 이런 순간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예견,  아이들이 지복의 상태에서 자연을 만끽하고 있지만 그 순간도 덧없이 지나갈 것이라는 인식--이 모든 것은 '슬픈 생각'이었다. 워즈워스가 한 말이 다 옳다 생각되었고, 그가 불멸의 송가에서 이야기한 '상실'과 '가멸성'에 대한 슬픔이 그 시의 궁극적 주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 (11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 불멸의 송가에서 1 연에서 8 연까지는 슬픔이 지배하지만 마지막 9 연에서 11 연까지의 3 연은 사뭇 긍정적인 사고를 담고 있다) 나는 그날의 경험, 그리고 그날 찍어서 간직하고 있는 사진들의 모든 장면들은 아름다움, 덧없음, 슬픔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유년기와 천국

     

    근 10년이 지난 뒤, 아버지를 모시게 되면서 나는 다시금 워즈워스의 불멸의 송가를 음미하게 되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

     

    아버지 생의 마지막 3 년, 아버지가 가장 고대한 스케줄은 주말의 산책이었다. 우리집 가까이 호수를 25 분 정도 걸어가면 호수 반대편에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주말에는 어린 아이들을 둔 가족이 함께 나와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타고 놀고, 주위에 있는 아이스크림, 요구르트, 버거 등을 먹으며 오랜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이 없으면서 그 무리에 끼어 있는 것은 필시 우리 가족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점심이나 이른 저녁을 사서 벤치에 앉아서 먹고, 아버지를 위해서는 보온밥통에 따뜻한 미음을 준비해가서 드렸다. 아주 어린 아기에게 밥 먹일 때 앞 수건을 (bib)을 둘러주듯이 아버지도 앞수건을 두르고, 삼키다가 목에 걸리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먹었다. 이날은 특별한 날이라서 아버지가 쵸콜렛 무스나 아이스크림 몇 숫갈도 드시게 해드렸다. 아버지가 기뻐하시니 우리도 기쁜, 온 가족의 소풍 날이었다. 매 주말이...

     

    공원에 갈 때마다 나는 놀이터의 어린이들을 심취해서 바라보는 행복한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랑 같이 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오래갈까...싶어 마음 아팠고, 동시에 어느새 훌쩍 커서 집을 떠난 에밀과 꼴렛과 함께 놀던 옛날이 그리웠다. 그러면서 유년기를 찬송한 워즈워스의 불멸의 송가가 나의 마음에 다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보면서 뭐가 그리도 신기한지 내내 함박 웃음이었다. 아이들이 로프 기구를 타고 낑낑거리며 올라타고, 가끔 미끄러지고, 걸음마배기들이 뒤뚱뒤뚱 누비고 다니고, 공놀이를 하는 아기도 있고, 가끔은 온 세상이 떠나가게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뭘 하든 자신의 노는것, 자신의 먹는 것, 자신의 우는 것에 집중했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자기가 하는 것에 전력을 다하는 그 모습이 아무리 귀엽다해도 어른들은 자기 일을 하면서 아이를 보건만, 아버지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이들만 쳐다보고 미소짓고 소리내어 웃으며 우리도 보라고 말해주셨다. 순수한 어린이들을 보고 경이로워하는--지속적으로, 질리지 않고--아버지도 참 순수했다. 아버지야말로 어린아이 같았다. 

     

     

    어느 날, 남에게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아버지께는 관심을 보였다. 맨발로 뛰어놀던 다섯 살, 여섯 살 정도의 아이 두 명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만 아버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왜 이 사람은 동상같이 생겼어요?"

    "왜 이 사람은 동상이에요?"

    (한 아이가 말하면 옆의 아이가 따라함.)

     

    나는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난감했다. '이 할아버지가 동상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게 이상해서였다. 망또를 걸치시고 앉아 있으니 손이 안보이고 그냥 뭉뜽그려져있는 게 동상같지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할아버지는 동상이 아니야' 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반대로 아무 말을 안 하는 것도 뭔가 불충분했다. 게다가 아무리 어린이가 하는 소리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내 아버지를 '동상'에 비유하는 것이 불편하기도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하하하하 웃었다. 아버지는 아이의 질문의 천진함이 너무도 귀여운 것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웃는 순간 '동상이 아니구나...' 싶은지 멍한 얼굴로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다가 자리를 떴다. 아버지는 그게 귀엽다고 또 미소지었다.

     

    그  어린 아이들은 '동상같이 생긴 사람'이 왜 웃는지를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 동상같은 사람이 자기들의 천진함과 순수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순수함 속에서 천국을 보고, '영혼의 광대함'을 보고 '영원한 신비'를 읽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우리와 함께 산책을 하는 도우미들은 아버지가 왜 공원에서 아이들을 보는 것을 그리도 즐기는지를 궁금해했다. 아이들이 귀여운 거야 범 우주적 사실이라하지만 아버지가 공원에서 아이들을 취한 듯 바라보는 것은 사실 평범한 '어린이 사랑' 은 아니라는 게 명백했기 때문이다.

     

    어느날 빅토리아가 물었다. 왜 그렇게 아이들 보는 걸 좋아하시는가고.. 나는 워즈워스의 시 이야기를 하기는 너무 거창하고 해서 간단하게 말했다.

     

    "아이들은 천국에서 내려온지 얼마 안되니 천국에 가까이 있고,

    이 지상에서도 아이들에게는 자기 주위가 다 천국이지요. 

    아버지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천국을 느끼시는 것같아요."

     

    모호한 말인데도 빅토리아는 금방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천국을 본다는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라 나도 경험하는 일이다. 어쩌면 나는 아이같은 아버지를 통해서, 주위에서 천국을 발견하는 아버지를 통해서 천국을 경험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이제 나는 불멸의 송가를 다른 감흥으로 읽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지상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자연에서 거룩한 광채를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탄식에 공감하였지만, 이제는 죽음, 가멸성, 불확실성에 대한 안타까움도, 두려움도 없이 ,불멸의 송가 마지막 3 연 (9-11)에 담겨있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사고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오 얼마나 기쁜가! 우리의 타다 남은 불속에

    살아있는 무엇인가 존재한다니,

    자연이 아직도 그리도 덧없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니!

    우리의 지난 세월에 대한 기억이 나의 마음에

    영원한 감사기도를 낳는다. 

    .....

     

    그러니 노래하라, 너희 새들아, 노래하라, 즐거운 노래를!

    그리고 어린 양들이 북소리에 박자 맞추듯

    뛰놀게 하라!

    ....

     

    비록 한 때 그리도 빛나던 광채가 

    나의 시야로부터 영원히 사라졌다한들 어떠리오.

    비록 풀밭의 광휘와 꽃의 영광의 시절을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한들 어떠리오.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 있는 것에서 힘을 얻으리라.

    지금까지 존재해왔고, 또 늘 존재할 것임에 틀림없는 그 원초적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는 위로의 생각에서.

    죽음을 궤뚤어보는 신앙에서.

    그리고 철학적 의식을 가져다 주는 세월에서.

     

    그리고 오, 너희들, 샘물, 초원, 산, 숲이여,

    우리 사랑의 어떤 이별도 절대 예언하지 말라!

    오히려 나는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너희들의 힘을 느낀다.

    나는 너희들의, 보다 습관적인 지배 하에 살기 위해서

     즐거움 하나 만을 포기한 것뿐이니.

    나는 수로를 따라 물결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시냇물을

    내 스스로가 그 시냇물처럼 경쾌하게 돌아다녔던 그 옛날보다 훨씬 더 사랑한다.

    새로 태어난 순수한 빛은

    여전히 사랑스럽다.

    저무는 태양의 주위로 몰려드는 구름들은

    인생의 무상함을 줄곧 지켜본 이의 눈에는 실로 차분한 색조를 띤다.

    또 하나의 경기가 끝났고, 또 하나의 승리가 얻어졌다. 

    인간이 붙들고 살아가는 마음 덕에,

    그 마음의 따뜻함, 기쁨, 두려움 덕에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꽃 한송이가 

    나에게

    종종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한 상념들을 안겨준다.'

     

     

     

    병으로 몸이 침대에 휠체어에 묶여이다고 해도 어떠리오. 자연에 대한 사랑, 어린 시절의 회상, 명상, 신앙, 사색은 언제든 빛의 원천이 되어 불멸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줄 수 있음을 아버지는 나에게 보여주었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는 소망하련다. 나의 인생이

     하루 하루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결속되기를.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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